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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일 13시 38분 등록
1.프롤로그

오랜 명성 속에서 듣던 동방견문록, 여행과 미지의 탐험에 대한 본성을 자극하는 이름이 바로 마르코 폴로였다. 고착화된 기억이 동방견문록을 정말 재미있는 여행기라고 생각을 하고 책을 보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기대에 조금 미치지 못하였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의 모습, 현재를 보자면 문명이 앞서있는 서양인의 모습에 비친 동양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는 분명 동양이 앞서 있었고, 칭기스칸이 통일한 몽골족의 세상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느낀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면서 느낀 일상들이 무미건조한 단어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그것도 일년이나 이년이 아닌 20년 이상의 여행은 유랑이라고 부르는 편이 낳을 듯 하다. 지금의 나도 동양과 서양의 구분을 짓고 그 사고의 틀속에 갇혀 있는데, 700년 전 에 이러한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 마르코 폴로의 식견이 부럽기만 한다. 그만큼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특별함 기회를 주는 것 같다. 그가 여행기를 보면서 지도를 보면서 같이 따라가 보았다. 지금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여행도 길고 힘들기만 한데, 도보로 말과 낙타를 타고 다니는 여행을 어떠하였을까? 우리는 속도를 올려놓아 여행이 여정이 아닌 목적지만 찾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마르코 폴로가 여행을 갔다 오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토대로 허구로 썼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가장 힘있는 증거는 역사속의 기록에서 이름이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17년 동안 몽골의 관리로 근무를 하였다면 기록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근거로 드는 것이 마르코 폴로의 길을 현실적으로 답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차 문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역사속의 기록과 답사는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역사의 기록은 우리가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은 되지만, 역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해서 거짓이라는 명제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답사가 어렵다는 말은 5년동안 인적이 끊긴 산을 찾아가는 기분이라면 조금 이해가 갈 듯하다. 700년의 세월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만리장성과 차 문화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는 좀 궁색하지만 마르코 폴로의 선택으로 돌리고 싶다.

동방견문록이 허구라는 주장도 어쩌면 진실을 찾고자 하는 열정이고, 좀더 치밀한 연구를 하는데 기여하는 부분도 많을 것이라는 다양함에서 우리가 배울 것을 더욱 더 공고히 해주는 도구가 아닌가 한다.

마르코 폴로는 26년간의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길에서 인생을 알았고 그의 발로 세상을 배웠다. 늘 떠남과 만남의 연속이었고, 늘 자신을 운에 맡기는 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꼼꼼한 기록를 남겨 인류가 살아가고 새로운 희망과 도전을 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책을 다시 꼼꼼하게 읽으며 지명을 찾고 책속의 내용을 상상으로 그려보면서 지독한 방랑벽을 지닌 오지 여행가, 그러면서도 결국 인간을 사랑하고 세상을 뜨겁게 사랑한 마르코 폴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2. 저자에 대하여

위대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1254년 태어났다. 출생지는 폴로가문이 달마시아 인근의 해안가에 살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 니콜로와 마페오는 인근 크로졸라 섬에서 무역회사를 세워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베니스에서 태어났는지, 달마시아에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린 시절은 다른 사람과 같은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고 시간이 갈수록 올라갈수록 고전의 작가와 성경, 라틴문학을 읽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구사하였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니 니콜로 폴로와 삼촌 파페오는 중국으로 사업차 여행을 갔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서야 아버지와 삼촌이 돌아왔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였다.

그 당시 베네치아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로 세계 각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온 후 2년이 되던 해에 교황청에 몽골의 친서가 왔고, 아버지는 교황인 그레고리 5세의 명으로 몽골에 친서를 전달하는 사자로 지원하게 되었다. 여기에 마페오와 열 여섯 살인 마르코 폴로가 동방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베니스를 출발한지 3년 만에 몽골의 여름수도인 상투에 도착을 하였고, 장장 5,600마일의 긴 여로를 걸어서 온 것이었다. 네 나라의 말을 구사하는 마르코의 재능으로 몽골의 관리가 되었으며, 주로 쿠빌라이 칸의 특별한 명령을 수행하고 중국, 인도 등을 오가며 관리 생활을 하게 된다. 17년동안 관리로 재직하면서 그는 몽골의 정치형태, 각 나라의 다양한 문화, 지리적 특징등을 접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에게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여러번 간청을 하였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던 차에 1286양 칸국의 군주인 아르군은 부인이 죽자 그녀를 대신할 왕녀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쿠빌라이는 코카친이라는 이름의 몽골여자를 선발하여 사신과 함께 보내게 된다. 원래는 내륙아시아 육로로 갈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인도양을 다녀온 마르코폴로의 경험을 살려 해로를 통하여 오게 된다. 뱃길을 통한 여행은 거의 2년이 걸렸으며, 힘든 여행 때문에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1295년 겨울에 흑해와 베니스를 거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4년 후인 1299년 베니스와 인근 도시 제노아의 해전에 참전했던 마르코 폴로는 포로로 잡혔고, 감옥 안에서 그가 겪었던 몽골에서의 생활을 글로 옮기게 된다. 포로생활이 끝나고 다시 베니스로 돌아와 결혼을 하였고, 세 딸을 두었다. 1324년, 70세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도 그는 쿠빌라이 황제가 준 다양한 선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수많은 단어가 화면에 나타났다. 음식점에서부터 의류 브랜드, 인공위성 이름, 컴퓨터 게임이름 등등. 7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이 도전과 극복이라는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아마 수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은 여행의 기록을 통하여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였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두 세계를 다녀갔지만 다 그들의 목적에만 충실한 기록만 남겼다. 이에 비하여 마르코 폴로는 공무상의 경험과 여행 경험을 살려 객관적이고 더 다양한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의 대필로 남기게 되었다. 가장 위대한 여행가의 길을 따라 같이 길을 떠나보자.

3. 가슴을 치는 구절

<해설 마르코 폴로와 동방견문록>

<1. 시대적 배경>

(7) 마르코포로와 아버지인 니콜로와 숙부 마페오, 이 두형제가 해외무역을 위해 베니스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것은 1260년, 그 해에 세계사는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게될 위대한 군주의 출현을 보게 되었으나. 그가 바로 쿠빌라이 카안이었다. ‘카안’이라는 칭호는 칸 중의 칸, 혹은 대칸이라는 뜻으로 그의 조부인 칭기스칸 조차 감히 취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12) 베니스를 떠난 폴로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곧 제국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조그만 지역으로 위축되어 버린 비잔티움의 경계 너머 모두가 몽골인들의 천하였기 때문이다. 15세의 마르코가 베니스의 집을 떠나 41세의 나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까지 그는 이 몽골제국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귀향길에 오른 그는 동남아시아의 수마트라, 자바 등지의 수많은 섬과 해안을 거치면서 대카안의 종주권이 그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확인했고, 말라카 해협 너머에 있는 인도의 세일론 섬이나 동아프리카 연안까지도 대카안 사신들의 발길이 미치고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마르코 폴로에게 몽골제국은 단순히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세계’그 자체였다.

(12)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를 가리켜, “우리 최초의 조상인 아담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나타난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백성과 지역과 재화를 소유한 가장 막강한 사람” 이라고 부른 것도 그 특유의 과장이라고 볼 수많은 없다.

(14) 그러나 좁은 세계에 머물러 있던 그들에게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대 카안의 제국’ 이 비록 ‘허상의 카멜롯’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그러한 이미지는 오랫동안 유럽인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고, 나아가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으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탐구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친 콜럼버스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유럽은 근대로의 일보를 내딛게 되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28) 그의 글은 ‘견문록’이나 ‘여행기’처럼 필자와 독자 사이의 긴밀한 정서적 교류는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부분들은 무미건조하리만큼 기계적이어서 때로는 마치 ‘편람’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물론 그의 책이 이러한 내용으로만 일관된 것은 아니며, 만약 그러했다면 그의 글이 오늘날 까지 불후의 ‘고전’으로 꼽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서구에서 성경 다음으로 베스트셀러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그것은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에게 고갈되지 않는 상상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진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서구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찍이 밟아본 적이 없는 혹은 밟아 보았다 하더라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전해주지 못했던 세계의 다양한 지역과 주민들의 모습을 마치 눈앞에 파노라마가 펼쳐 치듯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9) 사실 당대에도 그의 이야기를 믿었던 사람은 많이 않았고 ‘허풍쟁이’ 마르코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임종의 자리에서 친구들이 마르코 폴로에게 글속에 기술한 거짓을 모두 취소하고 참회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웃으면서 “아직 나는 내가 본 것의 반도 다 말하지 못했다.” 라고 했다는 일화는 당대인들의 온갖 회의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32) 이에 비해 마르코 폴로의 관심은 너무나 다방면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에 반영된 그의 입장은 상인이나 선교사 혹은 외교사절의 그 어느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의 기록은 실로 당시 유럽을 제외한 다른 나머지 지역에 대한 ‘지리서’이고 ‘박물지’이며 동시에 ‘민족지’라고 할 수 있다.

(35)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풍습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마르코 폴로의 글 안에서 다른 문화와 관습에 대한 경멸임, 후일 그의 후손들이 비서 구사회를 보고 곧잘 느꼈던 서구문명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자기 문화의 잣대로 다른 문화의 이모조모를 저울질하고 재단하려는 태도보다는 신기하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편 1장 ~ 19장>

(74)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보거나 진실되게 들은 갖가지 놀라운 것들을 글로 쓰게 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게 내버려 둔다면 너무나 커다란 죄악이 될 것이라고.

<1편 서아시아, 20장~43장>

(106) 또한 그곳에는 성 리오나르드 라고 불리는 수도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여러분은 성 리오나르드 교회 근처의산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이루어진 커다란 호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산에서 내려온 물에는 고기라고는 크든 작든 1년 내내 보이지 않지만, 오로지 사순절 첫날에 고기들이 내려오기 시작해서 성 토요일, 즉 파스크(Pasque)가 되기 전날까지는 사순절 동안 매일 내려온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내내 많은 고기가 보이지만 다른 기간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130) 그 흙에 도착하자 그는 그것을 방안에 마치 타르를 칠하듯 깔도록 한 뒤, 카펫을 덮어 그 위에 있어도 미세한 흙이 묻지 않도록 했다. 그러고는 그 방안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했는데, 그들은 음식을 먹고 난 즉시 서로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하며 대들었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제야 비로소 국왕은 바로 땅이 그 원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했다.

(138) 또한 남자나 여자가 죽으면 성대한 장례를 치르는데, 부인들은 죽은 사람을 생가하며 죽은 뒤 4년 동안 적어도 매일 한번은 운다. 그들은 친척과 이웃이 모여 죽은 사람을 위해 크게 울고 통곡하며 슬퍼한다. <죽은 사람이 생기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래서 죽은 남자나 여자를 위해 어떤 날이든 정해주기만 하면 일정한 대가를 받고 와서 능숙하게 곡을 해주는 여자들도 있다.>

(142) 그 나무는 굉장히 크고 굵으며, 한쪽 잎사귀는 푸르고 다른 한쪽은 하얗다. 밤송이처럼 가시로 덮인 열매가 열리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무는 단단하고 상자처럼 노란색이다. 10마일 정도나 가야 겨우 나무들이 나오는 한쪽방향을 제외하면 근처 100마일 이내에 나무라곤 한 그루도 없다.

<2편 중앙아시아 - 44장~74장>

(155) 왜냐하면 그 왕은 다른 왕이나 다른 귀족들 혹은 위세 있는 영주들에게 자기 사람을 통해 그것을 보내는데, 더러는 공납으로, 더러는 애정의 표현으로 보내고 또 더러는 은을 받고 팔기도 한다. 왕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발라시가 귀하고 대단히 값진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캐내어 세계 각지로 가져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너무나 많은 양이 빠져나가 그것은 그렇게 귀하지도 값지지도 않게 되기 때문이다.

(165) 그돌을 돌려주기고 한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그 돌 위에 있던 기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돌로부터 적어도 세 뼘이나 올라가 마치 그 아래에 돌이 놓여 있는 것처럼 그대로 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그 기둥은 그렇게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런 상태로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일어난 크나큰 기적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175) 59장 여리서 그는 카물 지방에 대하여 얘기한다. (중략) 오히려 나그네가 휴식을 필요로 할 때 그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었기 때문에 우상이 자기들을 매우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 덕분에 물건과 자식과 재산도 불어나고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모든 일이 아주 행복하게 되고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부인들은 미모가 빼어나고 명랑하며 자유분방하고 남편의 모든 명령에 극도로 순종적이다.

(181) 그들은 정욕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크나큰 죄악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여자가 먼저 그들을 불러들인다면 그녀와 동침해도 죄로 여기지 않지만, 반대로 그들이 여자를 불러들인다면 그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어떤 사람이든 여인과 불륜관계를 맺는 사람을 발견하면 사형에 처한다.

(189) 칭기스칸은 과연 그런지 보고 싶다며 점쟁이들에게 가능하면 빨리 보여 달라고 독촉했다. 그러자 기독교도 점쟁이들은 ‘시편’을 들고 그 가운데 일부를 읽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랬더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칭기스칸의 이름이 씌어 있던 대나무 가지가 스스로 프레스터 요한의 이름이 씌어진 다른 가지로 가서 불더니 그것을 덮쳤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칭기스칸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기독교도들이 진신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그 뒤 기독교도들을 항상 크게 우대해주었고, 그들을 진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로 여겼으며, 그 후로도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191) 진시로 여러분은 칭기스칸 다음에는 쿠니 칸이었고, 세 번째는 바투 칸, 네 번째는 울라우 칸, 다섯 번째는 몽구칸, 여섯 번째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강력한 쿠블라이 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른 다섯을 다 합해 놓아도 이 쿠블라이만큼 강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지상의 어떤 황제나 기독도와 사라센의 어떤 왕들도 이 쿠블라이 대카안처럼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그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195)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만약 필요하다면 그들은 무기를 들고 밤새도록 말 위에 타고 있으며, 말은 그러는 동안에도 줄곧 풀을 뜯어먹는다. 그들은 일이나 어려움을 감내하는 데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또 가장 검소한 사람들이며, 여러 지역과 왕국들을 정복하기에 가장 탁월한 사람들이다.

<3편 대 카안의 수도>

(248) 대 카안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 1만 2천명의 기병들로 하여금 호위토록 했는데, 그들은 케시탄이라 불렸으며 프랑스어로는 ‘기사, 군주의 신임을 받는 사람’을 의미한다. 누군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서 그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1만 2천 명에게는 네 명의 지휘관이 있는데, 그 각각은 3,000명의 지휘관이다. 이 3,000명은 대군주의 황궁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호위한 뒤 비로소 나가고, 그 다름으로 두 번째 3,000명이 다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호위한다.

(258) 여러분에게 1만 2천명의 신하들이 군주에게서 받은 13벌의 의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합하면 모두 15만6천벌이 된다. 내가 이야기한 대로 그것들이 얼마나 비싸고 값진지, 또 얼마만한 보물에 해당하는 지는 이루 셈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혁대나 장화 같은 귀중한 것들을 빼놓고도 그러하다. 대군주가 이런 것들을 주는 까닭은 축제를 더 품위 있고 더 거창하게 치르기 위해서이다.

(261) 사냥감을 추격하는 것, 또 개들과 사냥꾼이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로 장관이다.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대군주가 신하들과 함께 탁 트인 넓은 공간으로 말을 달리며 매를 날리면
이 개들 가운데 일부가 곰이나 숫사슴이나 다른 짐승들을 양쪽에서 몰아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정말로 보기에도 멋진 광경이다.

(283) 여러분은 대군주가 전령과 상인과 다른 사람들이 오가는 주요 도로의 변두리에 2보 간격마다 나무를 한그루씩 심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나무들은 멀리에서도 잘 보일 정도로 상당히 크다. 대 카안이 이렇게 한 까닭은 사람들이 도로를 잘 식별하여 길을 잃지 않게 하려 함이다. 외딴 길가에 있는 이런 나무들은 상인이나 행인들에게 매우 커다란 위안이 된다. 이것들은 어떤 지역이든 어떤 왕국이든 나무심기에 적당한 곳이라면 심어져 있다.

(286) 만약 지위나 살림이 괜찮았던 어떤 가족이 불행을 당했거나 혹은 병으로 일할 수 없게 되어서 어떤 종류의 곡식도 수확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그는 그런 가족에게 1년 내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지급하도록 한다. 그러면 이 가족들은 궁전 안에 별도의 관아에서 대카안이 행하는 모든 지출을 처리하는 관리를 정해진 시간에 찾아가서 각자 전년에 생계를 위해 얼마를 받았는지를 적은 증서를 내보이고 그것에 따라 그해의 분량을 지급 받는다.

(현재의 대카안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 더 만연해 있는 도박과 사기를 모두 금지시켜 버렸다. 그는 그들에게 그것을 금지시키며, “나는 무기로 너희들을 정복했고 너희들이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만약 너희가 도박을 한다면 그것은 내 것으로 도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다.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 105장~130장>

(311) 이제 여자와 혼인하는 관습이 어떠한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해주겠다. 남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만약 여자가 많은 남자에게 길들여지고 익숙해 있지 않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짝을 맞는다.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다른 낯선 땅에서 온 사람이 이 고장을 지나가다가 유숙하기 위해 천막을 치게 되면, 촌락과 부락의 나이든 여자들은 자기 딸을 천막으로 데리고 온다. 20명 혹은 40명 정도의 여자들을 데리고 아서 남자들에게 건네주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도 무방하고 동침해도 좋다고 말한다. (중략) 그런 식으로 여자들은 목에 스무 개 이상의 정표를 걸어 보임으로써 자기가 얼마나 많은 정부와 또 얼마나 많은 남자와 동침했는가를 과시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다.

(323) 대카안이 그들을 정복하기 전에 있었던 일 한 가지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 해주겠다. 어쩌다가 누군가 용모가 잘 생기고 점잖으며 또 모습이 수려한 사람이 이 지방을 지나가다가 그곳 어느 집엔가 유숙하게 되면 밤중에 독이나 다른 방법으로 죽인다.(337) 그들이 그러나 돈을 빼앗기 위해서 그를 죽이는 것이라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가 지닌 훌륭한 외모와 좋은 성격, 그의 지식과 영혼을 자기 집에 남겨두기 위해서다.

(337) 그는 이 침들을 이용하여 그려놓은 문양에 따라 전신을 찔러나간다. 찌르는 것이 끝나면 즉시 잉크를 그 위에 붓는데, 그러면 찌른 곳에 그려진 모양이 새겨진다. 그러나 문신을 받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연옥에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이다. 그들이 이것을 하는 이유는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이며, 문신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뛰어나고 멋있는 것으로 여긴다.


<중국의 동남부 131장~157장>

(347) 누군가 자기 딸을 출가시키려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혼인요청을 받았을 때, 아버지는 그 딸을 장래의 남편에게 처녀의 몸으로 넘겨주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아버지와 남편은 의무와 서약으로 동의하며 만약 그렇지 않는 경우가 드러나면 혼인은 무효가 된다.

(365) 이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설치한 투석기를 당겼다가 돌을 시내로 투척하니 돌이 가옥을 치면서 그것을 부수고 온통 폐허로 만들어 버렸고 커다란 소음과 혼란을 일으켰다. 도시의 주민들은 여태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이 같은 재난을 목도하자, 너무나 간담이 서늘해지고 경악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모여서 협의를 했지만 이 투석기를 피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만약 투항하지 않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니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377) 상술한 광장에는 언제나 각종 야채와 과일이 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한 덩어리에 10파운드나 하는 엄청나게 큰 배가 눈에 뛴다. 안쪽은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고 매우 향기롭다. 제철이 되면 나오는 복숭아로는 황도와 백도가 있는데, 아주 맛이 좋다. 이곳에는 포도나 포도주는 없지만 아주 고급의 건포도가 다른 곳에서 수입된다.


(408) 이들 자기(磁器)는 다음과 같은 흙으로 만든다. 즉 도시 주민들은 진흙과 부식토를 모아서 큰 둔덕을 쌓은 뒤 30~40녀 동안 둔덕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그러면 오랫동안 둔덕에 쌓여있던 흙은 변용되어 그것으로 자기를 만들면 청색을 나타내게 되는데,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좋은 광택과 아름다움을 보인다. 여러분은 그들이 흙을 모으는 것이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흙을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한 채 변용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자신은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겠다는 희망은 갖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죽은 뒤 아들이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6편 인도양 158장 ~197장>

(416) 또 한 자기 놀라운 것은 이 섬 군주의 궁궐이다. 그는 온통 순금으로 뒤덮인 멋진 궁전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집이나 교회를 납판으로 덮듯이 금으로 씌워놓았다. 그것이 얼마나 값비쌀지는 말로 다 하기 힘들 정도이다. 또한 그의 궁실에 있는 보도들 역시 모두 순금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두 손가락 정도나 된다. 이 궁궐이 지닌 가치는 누가 그것을 계산하려 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427) 대왕의 지배 에 있는 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인데 이 세상 누구에게도 조공을 받치지 않는다. 이 섬은 온갖 재화들로 가득하다. 그곳에는 후추, 육두구, 감송, 방동사니, 쿠베브,정향나무 등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각종 진귀한 향료들이 있다. 매우 많은 선박과 상인들이 이 섬에 와서 물건들을 사고 수입을 올린다.

(446) 이 충신들은 궁정에서는 주군을 모시고 왕과 함께 말을 타고 다니며 그의 주위를 수행하며 전국에서 매우 강력한 권위를 갖고 있다. 왕이 죽어 그의 시신이 커다란 불에 태워지면, 그의 충신이었던 이 신하들도 모두 불 속에 몸을 던져서 저승으로 가는 왕을 수행한다.

(461)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을 이야기해주겠다. 기독교도들은 순례를 위해 그곳에 가서 성스러운 유해가 묻혀있는 곳의 흙을 퍼서 자기 고장으로 갖고 가는데, 4일 열이나 3일열 혹은 그 같은 열병에 걸린 병자에게 이것을 물에 타서 조금 마시게 하면 마시자마자 곧 치유되어 버린다. 그것은 붉은색 흙이다. <마르코님도 베니스로 이 흙을 조금 가져가 그것으로 여러 사람을 고쳐 주었다.>

<7편 대초원 198장~232장>

(518) 전투는 해가 진 뒤에도 계속되었지만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전쟁터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만 해도 끔찍할 정도였다. 전투가 불길한 시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고 많은 부인들이 과부가 되었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러 인해 부인들은 슬픔과 눈물 속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
으니, 그들은 바로 거기서 죽은 사람들의 어머니요 아내들이기 때문이다.


4. 내가 저자라면

역시 여행과 인생은 기록이 중요하다. 사부님의 기록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 마르코 폴로도 자신의 여행한 기록을 틈틈이 남겼을 것이다. 언어도 틀리고 지방마다 다른 특징, 동물과 식물들을 기억만으로 다시 복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목차를 보면 이동경로에 따라 크게 지역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지역안에서도 경로에 따라 적은 것을 보면 기록과 정리, 분류에 많은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평범한 개인의 미시사는 본인이 남기지 않으면 유실된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그나마 연구원을 지원하면서 쓴 글과 다시 쓴 me story가 그나마 위안이 된다.

여행기를 우리는 너무 흥미위주로만 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무미건조한 지명과 무수한 설명이 힘들었다. 중간 중간 나오는 에피소드 덕분에 놓치지 않을 수 있었고 정리를 하고 다시 한번 읽고 나니 방대한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똑같은 형식을 빌어서 소개하는 각 도시의 행렬이 너무 길었다. 특히 황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비슷비슷한 도시의 풍경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동방견문록을 보면서 책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 들었다. 나의 책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자극하고 행동으로 옮길수 있는 열정을 가슴에 안게 하는 것, 그들에게 조그마한 씨앗을 남기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좁은 세계에 머물러 있던 그들에게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대 카안의 제국’ 이 비록 ‘허상의 카멜롯’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그러한 이미지는 오랫동안 유럽인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고, 나아가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으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탐구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친 콜럼버스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유럽은 근대로의 일보를 내딛게 되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p14)


결국 그의 모험은 인류가 좀 더 큰 발전을 이룰수 있는 밀알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달나라를 가고 우주를 여행하는 무한한 도전의 에너지,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용기를 다시 일깨워준 마르코 폴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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