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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6일 10시 3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중국 충칭(重慶)에서 태어난 장파(張法) 교수는 사부님과 동갑으로 1954년에 태어났다. 1982년 쓰촨(四川)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뒤, 베이징 대학교에 진학해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1984년 철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런민(人民) 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중국 미학사, 중서미학연구 등을 강의했다.

미학연구소, 전국심미문화연구회, 중국비교문학학회 등을 이끌며, 중국 미학계를 대표하고 있는 장파의 주요 저서로는 <중서미학과 문화정신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중서미학과 비극의식>, <20세기 서구 미학사>, 공저로 1998년 중국도서상을 수상한 <중국 예술학>, <예술철학> 등이 있으며, 총 14편에 이른다. 발표한 논문도 100여편에 달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정열적인 연구 노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원제 : 중서미학과 문화정신)은 1990년에 집필하여, 1994년에 출판한 책으로 우리나라에는 1999년, 연세대 유중하 교수 등에 의해 번역, 소개되었다. '비교학'이란 방법론을 통해 동양과 서양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마치 맑은 거울로 비추듯 그 핵심을 밝혀내는 그의 해박한 식견에는 책을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 정신'에서 시작해 '감상 방식'에 이르는 숨가쁜 여정을 통해, 그는 서로 다른 미학적 관점을 극명하게 비교해내며, 예술의 살점을 깔끔하게 발라내 그 뼈대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섣불리 서로 다른 두 길을 통합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독자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다른 두 길을 밝게 비추어 줄 뿐이다.

사부님께선 1999년 동아일보에 그의 책을 평하며 이런 찬사를 보냈다.

"나는 평생 쉬엄쉬엄 이 책을 뒤적이며 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많은 아름답고 중요한 인용들이 가득하여 지루하지 않다. 우연한 장소에서 한 사람을 만나 그저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마음에 맺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것과 같다. 웬일인지 모르지만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따라 걷게 한다."

그리고 또 "이만한 책 한 권을 쓰고 싶다"고도 하셨다. 이제 이토록 사부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아직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던(환승을 위해 잠시 공항에 머물렀던 것을 제외하면) 그는 2000년 12월, 아트센터 나비 개관기념 학술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 발표문을 첨부파일로 올린다. 책 뒤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술을 자주하지는 않지만, 잘 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던 그가, 그날 행사 이후 동갑내기인 유중하 교수와 술자리를 함께 했는지, 또 얼마나 마셨는지 조금 궁금하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해제
 
(9) 미학의 기초는 감각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을 통한 미적 체험이 참으로 삶과 세계 변혁에로 향한 교육학적 효과를 얻으려면 이같이 거의 완성에 가까운 오감 통합의 세련된 기계 기술적 과학 수준을 깊은 깨달음이나 오묘한 아우라의 체험에 연속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0-11) 즉 서양의 경우 그 아우라가 현실 의식이나 감각적 삶, 또는 물질적 체험과 이원적으로 완전 분리되어 높이 솟아올라서 그야말로 범접 못할 신성성으로 출몰하는 데 비하여 중국의 경우 양기(養氣)나 경물(景物), 영물(詠物)의 예술 체험에서 보이듯 물질, 감각, 삶의 순간적 접촉에서 심오하고 덧없는 아우라가 감지, 표현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13) 소통에서 초월에로의 전환에는 생성, 그것도 내면적인 숨겨진 질서의 창조적 차원 변화로서의 드러남, 즉 오묘한 생성이 있는 것이지 드러난 가시적 질서의 범박한 ‘종합’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 미학적 소통은 결코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의 자기 내에서의 우주 전체의 완성이요 그 완성의 확장이며 그 확장된 큰 자기의 상호 겹침으로서의 감동이라는 새 아우라 영역의 창조 과정이기 때문에 입자적 개체와 입자적 개체의 수평적 대화가 전혀 아닌 것이다.
 
(14) 우리 인류는 지금 농경 정착성 일변도의 진영주의, 영토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지역 정착적이고 민족 주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세계적, 유목민적 이동성과 탈진영주의, 탈영토주의, 탈중심주의적인 어떤 독특한 ‘카오스적이고 신령한 초월적 질서’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0 서론
 
(22) 한 학과가 ‘학문’으로 성립되려면, 즉 과학적 형태를 갖추려면 고전적 요구에 따라 다음과 같은 기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일련의 기본 개념을 가져야 한다. 둘째, 그 개념의 정의는 명확하며 일관된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 논리에 부합하는 완전한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학과의 이론적 형태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이론이 과학적이려면, 마지막으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그 이론이 보편적으로 유효해야 한다는 것이다.
 
(24) 과학 이론은 결코 현실 세계의 유일한 진리가 아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주객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창조해 낸다. 동일한 현실이라도 상이한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있다.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론은 현실에 대한 유일한 해석이 아니며, 그것의 정의 역시 보편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범위를 지니며, 그 범위를 넘어서면 타당성을 잃게 된다. 패러다임은 영원할 수 없으며, 변화와 진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25) 아인슈타인, 후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의 사상이 공통적으로 보여 주는 현대 정신에 따르면, 사물에는 최후의 본질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사물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는 당신이 그것을 어떠한 참조 체계에 끌어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다.
 
(26) 역사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 한 새로운 참조 체계는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기 때문에, 총화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어떠한 총화도 최후의 총화일 수 없다.
 
(29) 오늘날 미학이 ‘학문’의 차원에서 논의되려면, 먼저 중서 미학을 관통하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31) 문화 정신은 하나의 문화에 담긴 모든 시대, 모든 사상의 총화로서, 그 문화의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한다.
 
(32) 중국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시대적 차이가 아니라 사상 유파의 차이이다.
……
서구 문화에서 제일 중요한 차이는 중국과는 반대로 시대적 차이이다.
……
중서 비교에서 중국의 경우는 시대적 차이에도 유의하면서 유파의 차이에 더 주목해야 하고, 서구의 경우는 유파의 차이에 유의하면서도 시대적 차이를 더 중시해야 한다.
 
(33) 결국 중국 문화와 미학의 특징은 주로 유가와 도가의 상호 보완 관계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33)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대, 근대, 현대의 내적 공통점을 파악한다면 그것을 서구 문화의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34) 미학은 인문과학으로서, 일련의 기호 체게이다. 혹은 하나의 문화로서, 인간의 실천적이며 창조적인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더 높은 차원의 융합이란 다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잠시 총결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고금의 심미적 실천에 부합하면서도 인류의 심미적 발전 방향을 대표할 수 있고, 앞으로의 발전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조절하고 부정할 수 있는 일련의 미학 이론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1 문화정신
 
(35-36) 문화정신을 논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에 의거한다.
첫째,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즉 문화 정신이 제기될 수 있도록 해 주는 문화성을 띤 사실적 기초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여러 문화 중 서구 문화만이 처음부터 민주 제도를 탄생시켰으며, 큰 폭의 상승과 하강, 아울러 끊임없는 전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 발전의 기관차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세계 제 문화 중 중국 문화만이 갖가지 내적·외적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서 수천 년을 지속해 왔다.
……
둘째는 특수성을 지닌다는 점인데, 이는 미학과 연관된다. 우리는 미학적 문제-비극이나 숭고, 전형 등-를 논할 때면 항상 중서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36) 중서 미학을 다루면서 문화정신을 언급하는 것이 본 주제에서 벗어난 논의 같지만, 사실은 본 주제와 가장 밀접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표면적 형상 밖으로 초월해야만 그 묘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7) 고대 그리스인은 구체적인 책상의 이면에는 추상적인 책상이 있고, 개별적인 인간 이면에는 보편적 인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책상과 인간은 모두 구체적 항목에 속하는 것으로, 각 분과의 과학 이론이 구체적인 영역을 연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각 부문별로 나누어진 학과의 상위에는 반드시 각 사물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 즉 모든 이념에 대한 이념, 모든 과학에 대한 과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
형이상학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철학이고
……
초이성적 이해가 곧 신학이다.
……
철학과 신학은 상호 보완적으로 서구의 우주관을 구성하였다.
……
《주역》에서 “형이하의 것을 기(구체적 사물)라 하고, 형이상의 것을 도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도는 곧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38) 중국 문화는 도(道)·천(天)·무(無)·이(理)·기(氣)·진여(眞如) 등의 개념을 갖고 있다. 서구 문화는 Being(있음, 존재)·God(신)·idea(이념)·matter(물질)·substance(실체)·logos(로고스) 등의 개념을 갖고 있다. 중국과 서구를 서로의 참조 체계로 삼아 살펴보면, 그중에서도 ‘Being(유)과 무’가 우주관에 대한 중서 문화의 차이를 비교적 잘 보여 준다 하겠다.

(38) 중국 문화만 가지고 논할 경우, 이 중에서도 핵심은 도이다. 무는 도의 형이상학적 특징을 나타내준다. 도는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다. "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그러나 '도'는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지만, 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과 온 세상은 지금의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39) 이치로써 그것을 설명하자면 도라 할 수 있고, 숫자로써 그것을 설명하자면 하나라 하겠으며, 몸체로써 설명하자면 무라 할 수 있다. 만물이 열려 통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도이고, 미묘하여 예측할 수 없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신이며, 계기에 따라 변화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역이다. 종합해서 보면, 이 모두는 허무라 하겠다.
- 《주역·계사(繫辭)》 정의(正義)에서
 
(40) 중국 문화를 참조 체계로 삼을 경우, 서구 문화 정신은 Being과 그것의 풍부한 전개를 통해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햄릿이 깊은 고민에 빠져 내뱉은 명언과도 같다. “유나 무냐, 이것이 관건적인 문제이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41) 서구의 우주론은 Being에서 substance로 발전하면서 그 특징이 확연해진다. 즉 우주는 실체의 세계라는 것이다.
 
(41) 아리스토텔레스가 Being과 substance, 논리와 명료성을 일체화시켰을 때, 서구 문화의 실체적 세계는 커다란 도약을 이루었으며 더없이 견고해졌다.
 
(42) 서구인이 우주의 본질을 추구할 때 중시하는 것은 무가 아니라 유(Being)이고, 허공이 아니라 실체(substance)이다.
 
(42-43) (1) 실체와 허공은 분리되어 있으며, 그 둘 사이에는 내재적 연관이 없다. 허공은 다만 공간적 장소일 뿐이며, 실체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 ……
(2) 실체가 중요하다. 즉 서구인은 실체와 허공이 하나로 융합된 우주 속에서 실체만을 중시한다. 실체와 허공은 분리될 수 있다. ……
(3) 실체와 허공이 합일된 우주를 대면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실체와 허공을 구분하는 것이다. …… 실체와 허공은 물체와 공간 사이의 분리일 뿐만 아니라, 기지와 미지의 대립을 포함한다. ……
(4) 기지와 미지의 대립은 실체를 인간적으로 만들고 허공을 적대적으로 만든다. 실체는 인간이 인식한 것이며, 인간의 실천 수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허공과 미지는 인간에게 압박감을 주는 대상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더 나아가 인식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실체와 허공의 관계는 대립을 통한 발전이라는 서구의 문화적 특성을 낳았다.
(5) 실체의 인간화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역사적 제한을 받는 데서 비롯된다. 한편, 실체와 허공이라는 모델은 본래 우주 모델이기에, 인간은 거기서 우주의 총체성을 얻어내려 하는데, 이는 인간의 초월적 본성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해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나아가는 인과론적 추론 방식과 인간화를 통해 연역해 낸 우주의 총체성이 서구 문화사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
(6) 따라서 실체와 허공의 모델에 근거한 우주의 총체성은 내적 한계를 지니며,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논리와 실험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 실체와 허공의 모델은 서구의 우주 모델이 끊임없는 부정과 부정의 부정 속에 놓이게 만들었다.
 
(46) 서구인들이 문화를 창조하면서 일단 허공에서 실체를 분리하자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기지와 미지의 대립이 생겨났고, 여기에서 객체에 대한 인식이 부단히 심화되어 갔다. 즉 ‘총체’로부터 객체를 부단히 독립시킴으로써 서구인은 결국 총체성의 허황함과 개체의 독특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개체가 문화적 기호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바뀌었든지 간에 결국 서구 문화는 실체의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본 것이며, 언제나 실체의 세계를 그려내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실체와 허공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했다.
 
(47) 허공은 바로 기이다. (虛空卽氣)
형태가 없는 태허가 기의 본체이고,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일시적 변화의 형태일 따름이다.
-《정몽·태화(正蒙·太和)》에서
 
(47-48) 중국 문화에서 무로 이해되는 광대 무변한 우주 공간은 기로 가득차 있다. 기는 떠돌아 흐르다가 만물을 파생시킨다. 기가 모이면 실체가 되고, 실체의 기가 흩어지면 그 사물은 없어져 다시 우주의 기가 된다.
 
(48) 무릇 형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존재하며, 모든 존재는 형상을 지닌다. 모든 형상은 기이다. - 장재의 <정몽, 건칭(乾稱)>에서

무 역시 기로서, 유형의 사물의 시작이며 유형의 사물이 죽어 기가 흩어진 후 돌아가는 귀속처이다. 이렇듯 유와 무, 실체와 허공은 기의 두 가지 양상으로 이해되며 확연히 대립되지 않는다. 유무는 상반상생하고, 허실(虛實)도 상반상생한다.

(49) 항상 무에서 그 오묘함을 보려 하고, 항상 유에서 그 돌아감을 보려 한다. 이 둘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이를 하나로 이름할 때 현(玄)이라 한다. 현하고 또 현하니 모든 미묘함의 문이다.
 
(49) 기의 우주에서 무는 근본이며 항상적인 기이다. “무는 만물을 형성하는 것이 그 임무로, 어디로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한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음양은 이것에 의지하여 변화·생성하고, 만물은 이것에 의지하여 꼴을 이룬다.” 무는 유의 본원이자 유의 귀속처이다. 유(실체)는 일시적이며 유한하다. 유는 본질적으로 무와 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49-50) (1) 실체는 허공과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 (2) 물체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도 역시 기이다. 기는 본래 작용성을 지닌 힘이다. 그것은 관찰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경험에 더 의지해야 하며, 분석할 수도 있지만 몸으로 느껴 깨달아야 한다. …… (3) 물체의 기는 우주의 기에서 기원한다.
 
(50-51) 하나의 실체는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기의 우주이다. 하나는 실체와 허공의 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허실의 상생이다. 이것이 중서 문화의 우주 모델에 있어 각 방면의 차이를 양산하는 근본적인 차이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방식이다. 서구인들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실체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중국인들은 기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51) 서구인들이 보기에 세계는 하나의 실체 세계이고, 이 실체 세계를 구체화·정교화한 것이 바로 form이다.
 
(53)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이 바로 본체라고 생각했다.
 
(53) 예술가는 돌(질료)에 형식을 부여하여 조각을 창조하고, 건축가는 재료에 형식을 부여하여 사원을 창조하며, 정치가는 도시국가에 법률을 부여하여 국가를 세운다. 그러므로 형식이 바로 본질읻.
 
(53-54)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곳에서는 형식과 질료라는 이 한 쌍의 개념이면 충분하지만,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이나 혹은 이데아를 끌어들인다. 하지만 여하간에 형식은 두드러진 지위를 가지며 사물과 형식, 본질은 모두 형식이 주도하여 나온 것이다. 형식은 외형이자 본질이다.
  
(56) 설령 표층과 심층의 관계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더라도, 현대 학자는 여전히 심층으로 표층을 통제하고, 무의식으로 의식을 지배하고, 존재로 존재자를 규정하고자 한다.
 
(56-57)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모든 구조는 다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일단 만들어지면 고정된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세계는 변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구조는 필연적으로 해체된다. 따라서 존재자 배후에는 존재가 없고, 의식 밑에는 무의식이 없으며, 표층 구조의 깊은 곳에는 심층 구조가 없다. 사물의 의미는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생성, 변화하는 것이다. 이른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나, 무의식, 심층 구조 등은 단지 사물의 참조 체계가 어떤 현상을 전화시켜 만들어 낸 환상일 따름이다.
 
(57) 형식은 서구 문화에서 근본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실체를 가일층 구체화한 것이자, 과학적 명료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객관 법칙의 표현이자, 인간의 객관 법칙에 대한 인식적 파악이다.
 
(57) 서구 문화의 형식 원칙이 지닌 내적 모순은 역사적 한계, 진리와 완벽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 그리고 과학적 요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58) 이처럼 지속적인 분해를 통해 우리는 그 사물들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때 그 사물들의 원인은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인식되지만, 그것을 다시 조합함으로써 우리는 개별 사물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게 된다.
 
(59) 형식을 운용하려던 서구인의 바람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진리의 추구, 즉 세계를 진실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완전의 추구, 즉 세계의 총체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59) 기의 우주는 정체 공능으로 구체화된다.
 
(60) 음과 양이 갈마드는 것을 일러 도라 한다.
 
(62-63) 정체 공능은 정체성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파악된다. 정체를 떠나 부분을 얘기할 수 없고, 정체 공능을 떠나 구조를 얘기할 수 없다.
 
(64) 중국의 정체 공능은 미지의 부분의 정체 공능, 즉 기를 포함한다. 그 정체성의 현현은 정체적인 기가 각 부분으로 주입된 결과이며, 여기서 각 부분의 실체적 구조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 주입된 실체적 구조 속에 담긴 기이다.
 
(65-66) 시 쓰기는 시 속에 구체적인 주제를 담는 것이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시는 천지의 마음”이라는 점이다. 그림 역시 “붓 한 자루로 태허의 모습을 그려 내는 것”을 중시했다. 우주 속에서 사물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때문에 개체 사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인체의 경락, 그림의 신, 문학의 기〕을 우주적 차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런 초월적 발전은 실험 과학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찌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우주관이 도리어 더 정확함을 증명해주었다.
 
(67) 명료함은 형식 구조의 특징이자 형식 구조가 추구하는 것이다. 기의 세계의 정체 공능 모델은 필연적으로 모호할 수 밖에 없다. 모호함은 정체 공능의 특징이자 정체 공능이 추구하는 바이다.
 
(67) 요컨대, 마음으로 알 수는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정신으로 깨달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형체로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70)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세계를 명료하게, 확정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도구에 의지해야만 한다. 세계와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도구에 의거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의 이성도 사실은 도구를 척도로 삼는 것이고, 따라서 도구의 제약을 받는다. 이렇듯, 도구의 한계는 바로 인간 인성의 한계이다.
 
(72-73) 인간은 언제나 일거에 세상을 규정하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망은 실증 과학과는 모순된다. 변증법은 개념의 치환 가능성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햇다. 즉, 상대적인 진리만이 존재하고 절대적 진리는 그 상대적 진리에 의존하며, 일반은 더 큰 일반에 대해서는 여전히 특수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74) 매번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때면, 사람들은 이젠 날씨가 맑아지고 태양이 영원히 비추리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 다음은 환상의 소멸이다. “산 내려가기가 쉽다 하지 마오. 이는 나그네가 착각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니, 산들로 둘러싸인 곳에 들어간 것이니,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라.”
 
(75) 서구 문화가 줄곧 추구해 온 객관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그들을 순수한 객관 세계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의 문화적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창조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서구인은 문화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중요한 전환점에 처하게 되었다.
 
(75) 도가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라 했으니, 영원한 도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77) 모호성은 공식과 정의로는 표현해 낼 수 없고, 형식화하거나 인간이 검증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정체 공능은 우주 전체를 파악하고자 했고(이는 농업 사회, 특히 하나로 통일된 농업 사회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실천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반드시 달성해야 하지만 인간의 실제 능력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 결과 정체 공능이 생겨났다.) 따라서 모호할 수 밖에 없었다.

(77) (1) 도의 숭고함. 기의 우주는 미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끝내 궁극에 도달할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우러러볼수록 더 높아지고, 뚫을수록 더 단단해지고, 앞에 있어 쳐다보면 어느덧 뒤에 가 있는 그런 느낌이다. 또는 끝이 없으며 심원, 아득하다. 이것이 중국 문화에서 최고의 경지이며, 중국 예술에서 최고의 경지이다.
 
(79) (2) 도구의 경시. 중국의 정체 공능적 우주가 시대적 수준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도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언어와 외부 사물 간의 관계에서 봤을 때 “말은 사물을 다 표현해 내지 못한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대체적인 윤곽이지만, 의식은 사물의 세밀한 부분까지 이를 수 있다. - <장자, 추수(秋水)>에서
 
(79) “말은 그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79)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다. 하지만 책은 말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 하며, 말에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따로 있다. 말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뜻이다. 뜻은 그것이 따르는 것이 따로 있는데,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장자·천도(天道)》에서
 
 
(80) 말이라는 것도 뜻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뜻을 얻으면 말은 필요 없게 된다.
 
(80-81) “입으로는 말할 수 없고, 그 마음속에 비결이 있다.” 다만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가장 심오한 기술의 경지는 기술이 아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기술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며, 사람의 총명함과 재능의 문제이고, 사람이 도를 터득하는 문제이다.
 
(81) 육상산은 “내 마음이 바로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내 마음”이라고 했다.
 
(82) 고대 중국인의 인식론은 유가의 실용적 이성과 도가의 경험적 직관의 상호 보완 관계로 나타난다.그러한 중국인의 인식론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개괄할 수 있다. 쳇째는 종교적 미신이 아닌 맑게 깨어 있는 이성으로, 그것은 공능성을 내용으로 하는 ‘논리’를 갖추고 있다. 둘째로는 경험·체험·직관을 강조한다. 외부 사물을 관찰할 때는,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껴서 가장 정치한 부분에 이른다. 셋째로는 현실 속에서 유효하고 유용하며 이로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시행하고 자연과 천도에 적용했을 때, 언제나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83) “뭇 사물의 큰 윤곽이나 세밀한 지점을 살핌에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내 마음의 전체적인 큰 쓰임이 두루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다.”
 
(84) 인간과 세계를 중개하는 도구는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개의 층차를 갖는다. 드러난 층차는 언어 기호, 논리 체계, 과학 기술 등이며, 숨겨진 층차는 문화적 우주모델이다. 즉, 중국인의 도구의 표층은 초월하기는 했지만, 그 심층은 초월한 적이 없다. … 그런데 중국인은 표층을 초월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우주의 본심(本心)과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고대 중국인은 문화적 세계를 객관적 세계라고 여겼으며, 문화적인 도를 자연의 도라고 여겼다. 따라서 사람은 당연히 그것과 합일되고, 그것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서구인은 도구를 중시했기 때문에 문화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했다. 반면에 중국인은 줄곧 문화적인 도를 자연의 도라 여기면서, 서양의 대포가 그들의 미몽을 깨뜨리기 전까지 2천 년 동안 그 속에서 즐거워했다.
모호성은 중국 문화의 도의 수호자이다.
 
 
2 미학의 총체적 비교
 
(86) 서구 미학은 사물의 본질 추구, 주체의 지성·감성·의지의 분리, 예술의 통일성이라는 세 가지 근원에 기초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부재한다.
 
(87) 언어와 사물, 언어와 사상의 관계에서 사물과 사상이 더 풍부하고 더 근본적인 것이다. …… 고대 중국인의 말을 들어 설명하자면, 사물이나 사상은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이고 언어는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87) 서구인의 인식 과정을 감정에서 이성에 이르는 것, 언어 기호에 의한 최고의 이성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중국인의 그것은 감정에서 언어 기호를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것으로, 언어는 결코 최고 층차가 아니다.
 
(87) 사물의 가장 미묘한 부분에 대한 파악은 기호를 넘어선 마음을 통한 깨달음으로만 가능하다.
 
(89) 시라는 것은 지가 가는 바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지가 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시는 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여 그것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89-90) 마음이 아직 외부로 표출되지 않은 상태인 인·의·예·지는 성이며, 마음이 외부로 표현된 상태인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羞惡之心), 공경하는 마음(恭敬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是非之心)은 정이다. 성과 정은 체용(體用)의 관계이자 동(動)과 정(靜)의 관계에 있다.
 
(94) 서구의 미학 체계는 미적 사물들의 상호 관계를 개괄하고 반영하는 개념 체계이다. 서구 문화의 변화·발전에 따라 미에 대한 인식과 예술도 변화·발전하였다. 미학의 체계도 이와 함께 변화하였다. 이러한 미학 체계의 변화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개념의 변화·확대이고, 둘째는 중심 개념과 기본 개념의 변화이며, 셋째는 개념을 조직·구성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104) 풍격·정신·기질·운취 등에 대한 느낌을 말로 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유사한 것을 통해 묘사한다면 말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그 느낌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108) 생각 저 너머의 미묘한 뜻이나 글을 벗어난 은밀한 정취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어서 붓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 《문심조룡·신사》에서
 
(110-111) 각각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풍격을 어떤 것이라고 일일이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 풍격의 가장 내면에 있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경계(境界)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무엇을 '섬농'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맑게 흐르는 물, 저 멀리 봄이 퍼져 있네. 아득히 깊은 골짜기, 때때로 아름다운 여인이 보이누나. 복숭아 가득 열린 나무, 바람 부는 날의 물가로다. 버드나무 그늘진 길모퉁이, 노래하는 꾀꼬리가 짝을 짓는 경계이다. 무엇인 "경건(勁健)인가. 그것은 "정신을 운용함이 공중을 나는 것 같고, 기를 운용함이 마치 무지개 같다. 깊디깊은 무협 골짜기에 구름을 좇아 바람이 이는" 경계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정의나 해석을 통해 예술적 언어를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의미를 파악하게 하고 언어를 통해 경계에 들어가, 그 경계 속에서 직접 느끼고 체험하며 깨닫게 하는 것이다. 어떤 풍격의 경계에 들어가면 그 풍격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개념이나 해설, 정의를 이용할 경우 사물의 깊은 곳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유사성에 의거한 경계를 이용하면 사물의 내면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 “한 글자도 더하지 않고 풍류를 다 얻는 것이다.” 이는 무엇인가 말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생생한 풍경을 통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116) 간결하고 예스러움을 통해 섬세하고 농염한 것을 표현하고, 담박한 것에 자극한 맛을 담아 낸다.
- 소식(蘇軾)의 《서황자사시집후(書黃子思詩集後)》에서
 
 
3 문화적 이상의 표현: 화해(和諧)
 
(118) 순수 이론적 차원에서 보면, 화해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뜻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구체적 사물로 표현될 때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다.

(121) 음악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바람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몸으로는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바람도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바람에 닿은 사물은 흔들리기 때문이다.
 
(122) 무릇 정치는 음악과 비슷하니, 좋은 음악은 화해로움에서 나오고, 화해로움은 각 악기가 침범하지 않는 안정됨(平)에서 나온다.
 
(124) 재차 강조하면, 음악의 화해에서 우주의 화해를 발견했기 때문에 바람이 중국 문화의 근본 개념인 기(氣)의 전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기의 특징이 중국적 화해관의 특징과 발전 방향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125) 화해란 국을 끓이는 일과 같다. 국을 끓이기 위해선 물과 불을 준비하고, 육장을 마련하고, 음식의 간을 맞추고 생선과 고기를 삶고 장작으로 불을 때야 하는데, 요리사가 그 국을 화해시키고 고르게 하여 맛을 낸다. (중략) 군가는 그것을 먹고 마음을 가지런히 한다. (중략) 선왕은 다섯 가지 맛과 다섯가지 색을 다스림으로써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정치를 고르게 한다. -<좌전, 소공 20년>에서
 
(127) “무엇이 가장 지혜로운가? 수이다.”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가? 화해이다.” 미의 본질은 곧 화해이며, 화해는 합리적 혹은 이상적 수량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127) 중국 문화에서는 음악이 바람과 기(氣)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면, 그리스 문화에서는 수(數)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
 
(128) 서구의 화해는 명료한 수로 설명되며, 우주의 보편성은 수를 통해 얻어진다. 중국의 화해는 모호한 바람과 기로 설명되며, 바람과 기를 통해 우주적 성질로 변화하였다.
 
(129) 화해가 충만해야 만물이 생겨난다. 같으면 지속될 수 없다. 서로 이질적인 사물들이 어우러져 평형을 이루는 것을 화해라 한다. 이렇게 하면 만물이 풍부하게 성장할 수 있으니, 만물은 그것에로 귀의하게 된다. 만약 동질적인 사물에다 다시 동질적인 것을 더한다면, 그것을 다 써버리고 난 후엔 이내 버려야만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왕들은 흙에다 쇠, 나무, 물, 불을 섞어 온갖 사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 소리가 단일하다면 들을 만한 것이 없으며, 색이 단일하면 나름의 독특한 문채가 없는 법이며, 맛이 한가지라면 특별한 맛이 없으며, 사물이 단 한가지라면 강구할 가치가 없다. -<국어, 정어>에서

(129-130) 질적으로 상이한 요소와 사물 간에는 분명히 대립적이고 배척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언뜻 보기에, 이는 화해를 부정하는 듯 하나, 사실은 그것이 화해의 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고대인은 이를 "상반상생(相反相生)"이라 하였다.
 
(134) 치세에 사람들은 개인·사회·우주를 서로 대비하는데, 이때 우주는 인의(仁義)의 성질을 지니게 된다. 이것이 유가의 우주적 화해이다. 난세에 사람들은 개인을 우주와 직접 대비하며, 인간과 우주는 모두 사회를 부정하게 된다. 이것이 도가의 우주적 화해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우주적 화해는 모두 소농경제와 통일된 농업 사회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기·음양·오행의 우주적 화해이다.
 
(135) 만물이 함께 자라남에, 나는 만물이 도로 돌아감을 본다.
크면 나아간다. 나아가면 멀리 간다. 멀리 가면 되돌아온다.
-《노자》에서
 
(136) 중국적 정체의 화해에서 중요한 원칙은 대립적인 요소를 조합하여 대립물이 충돌하지 않고, 상반상성(相反相成) 하도록 하는 것이다.
 
(137) 태극도가 되면 순환적 특징이 완연히 드러난다. 그림에서 음과 양은 각각 절반을 차지한다. 그것을 회전시키면, 한쪽은 소(小)에서 대(大)가 되고 다른 한쪽은 대에서 소가 되며, 이쪽이 줄어들면 저쪽은 늘어나서, 대에서 소에 이르기까지 한쪽은 다른 한쪽이 되는 것이다. 두 음양어의 머리와 꼬리는 서로 맞닿아 있어, 중국 문화에서의 시간적 선이나, 낮밤의 운행, 사계절의 교체처럼 끝없이 순환한다.
 
(139) 오행은 서로를 낳는다(상생). …… 동시에 서로를 제압한다(상극).
 
(141) 상호 배척하는 것이 결합하고 상이한 음조가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것은 모두 투쟁에 의해서이다.
 
(145) 즉, 중국 그림은 형상의 유사함이 아니라 신기(神氣)를 중시한다. 신(神)과 기(氣)가 바로 개체와 정체가 상통하는 바이다. 개체의 신을 추구한 것은 곧 개체의 정체성을 추구한 것이다.
 
(145) 서구 문화의 화해는 부분(개체)를 강조하며, 부분(개체)의 실체성을 가지고 총체적 화해를 형성한다.
 
(148) 건축의 허는 사람들로 하여금 폐쇄된 원 내에서 자연의 기운, 우주의 차고 비는 것을 체험하고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
 
(149) 서구적 화해는 개체의 완정성을 통해 총체적 화해를 형성한다. 서구의 건축은 개체를 위주로 하며 순수한 공간이다.
 
(151) 인간과 세계의 화해는 인간과 시간이 화해를 이루는 방식에 의해 표현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개인의 소망과 문화적 요구를 결합시키는 사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4 문화적 곤경의 표현: 비극
 
(158) 화해는 문화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극치이며, 비극성은 가장 현실적인 극치이다. 화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꿈과 희망으로 충만하게 한다. 하지만 비극성은 사람들에게 보고 싶지 않는 일을 보여 준다. 그 속에는 냉혹한 사실과 절망적인 고통만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문화에는 화해와 현실적 비극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비극 의식은 성숙한 문화만이 가질 수 있다.
 
(158-159) 생존을 위협하는 도전은 불규칙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 도전은 인간의 지식과 인식 능력 밖의 것이며, 인간의 파악 능력을 벗어난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도전에 맞선 인간의 투쟁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인간의 무기는 생존 본능과 지식 그리고 신념이었다. 그들의 정신력이나 지도력은 초이성적인 것이다. 비이성적인 도전에 초이성적인 응전이 더해진 것이 인류의 비극성이다. …… 역사의 필연성이란 수많은 우연성 속에서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159) 비극 속의 탄생이라는 단 한 번의 고난을 통해 재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명은 끝없는 도전과 응전의 비극성 속에서 탄생한다. 문명의 성장도 비극적인 도전과 응전에 의한 것이다.
 
(161) 비극 의식이 형성되려면 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성이 있어야만 종교적 마취에서 풀려나 냉혹한 현실과 맞대면하고 현실의 비극성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162) 토마스 딕슨은 “우리가 사고하기를 강요당하면서도 우리의 사고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극의 탄생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165) 순자는 “강한 것은 절로 부러짐을 부른다고 했다. 주(柱)는 부러짐, 끊어짐이다. 지나치게 단단하면 쉽게 부러진다. 서구 문화의 발전사는 끊임없는 소멸과 신생의 역사였다.
 
(166) 순자는 “부드러운 것은 절로 묶음을 부른다”고 했다.
 
(166-167) 사랑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이상으로 반짝인다. 사랑의 빛 속에서 현존하는 모든 것은 창백하고 저속하며 평범해진다. 또한 사랑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원초적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용솟음치는 사랑의 물결은 현존하는 모든 것이 강물을 막는 제방처럼 딱딱하고 교조적이며 죽은 것으로 드러나도록 한다. …… 사랑의 거대한 활력과 격정은 모든 장애물을 무너뜨리는 파괴력으로 표현되며, 지고한 이상을 꿈꾸고 현실을 환멸하는 초월성으로 표현된다. 이는 모두 사랑의 비극성을 예비하고 있다.
 
(174-175) 격정의 일종인 사랑은 당시 문화가 지닌 예의 역사적 한계를 본능적으로 체감했던 것이다. 현실에 반항하고 현실을 넘어서려는 추구자의 감정에 추구하는 목표와의 거리감이 더해지면서, 목표인 님은 현실을 넘어선 이상적 존재가 되고, 이상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182) 우리는 중국인의 진퇴양난의 모순 속에서 개인의 욕망을 천치 법칙에 의거한 ‘예’에 복속시킴으로써 분쟁을 없애고 안정 국면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182) 하지만 이런 곤경이 비극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복종 역시 비극적이다.
 
(184) 헤겔의 말을 빌면, 자신의 ‘단편적인’생각으로 싸우지만 그 단편성을 끝까지 밀어부치면, 이 좋은 세상에 시체가 쌓이면서 상대방-그가 아무리 정의·합리·선으로 포장하고 있어도–의 단편성도 여지없이 폭로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문제는 쌍방의 단편성을 드러내어 새로운 사고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 중국에서는 개인이 이러한 곤경에 빠질 경우, 자신을 극복하여 예를 수호하고, 예를 통해 감정을 절제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리하여 내면에 비길 데 없는 고통과 슬픔을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은 이러한 슬픔을 견딤으로써 예가 자신의 내면에서 승리를 얻게 하고, 사회에서 예의 신성성이 유지되도록 만든다. …… 이러한 감정이 슬픔으로 변하여 눈물이 될 때, 이는 문화적 예의 완정성과 신성함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185) 부정의 부정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변혁적 서구 문화는 비극 의식의 폭로적 기능을 이용한다. …… 보존적인 중국 문화는 비극 의식으로 곤경을 폭로하면서도 예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197)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적나라한 현실을 보게 한다.
 
(198) 중국의 비극 의식이 ‘예의 수호→파멸’의 특징을 갖는다면, 서구의 비극 의식은 ‘진리추구→파멸’의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98) 그는 스스로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는 바가 없기에 자멸을 부른다.
 
(199) 진리 추구에서 ‘진리’는 미지로 나아가는 역정으로, 자아 부정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200) 서구의 비극 의식이 진취형 문화에 부합하는 것처럼, 중국의 비극 의식은 보존형 문화에 부합하는 것이다.
 
 
5 문화적 초월 의지의 표현: 숭고
 
(201) 비극의 효과가 공포와 연민이라면 숭고의 효과는 고통과 쾌감이다. 비극이 파멸을 통한 정화를 강조한다면, 숭고는 투쟁을 통한 초월을 강조한다.
 
(202) 숭고론의 변천은 바로 ‘자극물과 위대한 그 무엇’사이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인류의 진보는 언제나 초월을 동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숭고 현상은 보편 현상이다.
 
(208) (1) 안전 지대, (2) 일정한 문화적 수양, (3) 두려움 없이 저항하고자 하는 결의이다. 이 세가지는 실천적 차원에서 숭고의 주체적 조건을 다룬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안전 지대는 인간의 실천이 자연을 정복함으로 인해, 즉 직접적인 실천 영역의 생산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문화적 교양 역시 실천 역량에서 배태된 것으로 그 수준은 실천 역량에 의해 규제된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저항하고자 하는 결의도 직접적은 실천 영역에 의존해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210-211) 간접적인 미지의 영역은 인간이 진정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숭고 객체와 대면한 주체의 상상력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에 상응할 수 없고”, 이에 주체는 스스로 “왜소하고” “무능하다”고 느껴 “일순간 생명력이 가로막힘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안전 지대”에 있고 “심의(心意)에는 일련의 관념들이 미리 채워져 있기”때문에, 실제로 인간은 일정한 실천력을 기반으로 하여 숭고 객체와 대결하는 것이다. 인간은 대자연을 조금씩 정복하여 그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숭고함을 보여 주게 되는 것이다.
 
(211) 자연의 미는 그 근거를 우리의 외부에서 찾아야 하지만, 숭고는 반드시 우리 내부와 심적 태도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 심적 태도가 자연의 표상에 숭고성을 끌어넣는 것이다.
 
(220) 숭고는 ‘위대한 영혼’의 메아리이다.
 
(220-221) 숭고한 말이 청중에게 주는 효과는 설득이 아닌 미칠 듯한 희열이다. 인간을 경탄케 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도리만을 말하거나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들의 빛을 상실하게 한다. 믿건 말건 상습적인 것은 맘대로 할 수 잇다. 하지만 숭고는 수천의 군대를 쓸어 버리는 불가항력의 작용을 일으킨다. 그것은 독자들이 원하든 말든 모든 독자를 조종한다.
 
(225) “천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는 쉬지 않고 스스로 강하게 하는” 숭고의 정신이다.
 
(226) 브래들리는 “두려움, 미칠 듯한 희열, 경외, 심지어 자기 비하(self-abasement)조차도 숭고가 일으키는 감정에 있다”고 했다. 버크와 칸트가 두려움을 강조하고 롱기노스가 미칠 듯한 희열을, 기독교 정신이 경외를 강조했다면, 중국인은 “자기 비하”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숭고가 더 중시한 것은 자신이 높아지는 순간의 감정-즐거움-이다.
 
(229) 고딕 양식 건축물의 영혼 승화가 속세와 단절된 성당의 내부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면, 누대의 영혼 승화는 천지 만물을 더 다양하게 관조하고 더 깊이 느끼며 더 가까이 교류하도록 해 주는 탁 트인 누대 위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겠다.
 
(235) 결론적으로, 중국에서 큰 산과 강이 숭고 객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서구와는 다른 의식에 기반한다. 산과 바다는 적대적인 형상이나 신을 거역한 추악한 조형도 아니고, 헤겔의 이론 체계에서 점하는 낮은 지위를 갖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양강한 천지의 정기이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자연인 것이다.
 
(236) 중국의 숭고 대상은 성인·영웅·자연의 웅장함이다. 따라서 숭고의 유쾌함은 자신으로 귀의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칸트가 말한 “우리 내부의 전연 다른 종류의 힘이 있어서 자연의 전능한 위력과 가상으로 겨루어 볼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브래들리가 말한 객체에 대한 경외심과 혼재된 “자아 방기나 미칠 듯한 희열, 숭배”를 통한 객체와의 합일도 아니다. 그것은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241) 생동하는 기운의 표현을 이상으로 하면서도 고요한 기운의 충만도 요구한다.
 
(244) 중국과 서구의 숭고론에는 다음 세 가지 차이가 있다. (1) 인간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게 하는 것, 즉 초월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다르다. 그 대상이 서구의 숭고에서는 적대자〔하느님도 인간을 적대적인 자리(죄인)에 위치시킨다〕이며, 왜소하다는 느낌은 대립 충돌의 방식으로 표출된다. 중국의 숭고에서 초월을 유도하는 대상은 위대한 것이며, 왜소하다는 느낌은 격려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2) 초월의 방향이 다르다. 서구의 초월, 특히 버크와 칸트의 이론에서는 상대방과 본래의 자신을 싸워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초월은 다양하고 비규정적이며, 승리의 다양한 가능성으로 표현된다. 중국의 자아 초월은 격려자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방향은 규정적이며 그 본보기가 잇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식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원죄 의식과 같은 귀의는 아니다. (3) 초월 과정이 다르다. 서구의 숭고는 격렬한 부정의 부정의 과정으로 드러나고, 중국의 숭고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상승으로 표현된다.
 
 
6 문화적 자유로움의 표현: 부조리와 소요(逍遙)
 
(249) 이에 사람들은 하느님과 뉴턴 그리고 헤겔의 관념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자유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250) 고전적 세계는 통일성의 세계로, 매우 거대하여 그 세계 밖에 다른 세계란 없으며 또 매우 작은 세계에서 그 세계 안에 다른 세계도 없다. 인간과 자아는 그 세계의 구성 성분이며, 소우주인 인간은 대우주와 조화를 이룬다. …… 자아는 항상 결정되어 있으며 수동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파악하거나 인식할 수 없으며, 신체게 종속되거나 혹은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파악할 수 잇다. …… 하지만 현대 문화는 인간의 본질이 결코 고유한 추상물이 아니며 우주가 시공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정적 모델이 아님을 폭로했으며, 신은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 낸 우상임을 폭로했다.
 
(251-252)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고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며, 당시의 독특한 고통이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252) 신이나 절대 이념, 보편 법칙이 몰락하자, 법칙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독특함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인간은 자유로워진 것이다.
 
(254) 서구 현대인의 실존주의적 자유는 신이 사라진 자유이며, 법칙을 부정한 자유이고, 필연에서 벗어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의 필연적으로 결합된 것이 부조리이며, 따라서 자유와 부조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256) 그에 따르면, 의식 자체는 비어 있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허무이다. 의식은 일종의 자발적 활동으로, 의식 활동과 의식 대상은 동시에 출현한다. 의식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특정 사물을 의식함으로써이다. 의식 대상이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허무인 의식이 대상물에 의거하여 특정 사물에 대한 의식으로 되며, 이때 비로소 무는 유가 된다.
 
(257) 인간은 부조리하다. 특히 개별자는 더 부조리하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에 던져졌다.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257) 인간은 자아에 집착하여 이방인이 된다.
 
(263) 따라서 인간은 사회 계층을 나타내는 장식이 아니라, 내면의 기를 단련하고 의지와 정신을 단련하여 자연과 합일되는 경지를 추구해야 한다.
 
(263) 이로써 도가는 유가를 구조적으로 ‘보완’하는데 성공하였다. 벼슬길이 순탄하면 유가에 의지하여 일에 힘쓰고, 벼슬길이 순탄치 않으면 도가에 의지하여 세상을 등지고 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유가와 도가가 하나가 되어 중국 문화의 안정성을 보증하게 된 것이다.
 
(266) 위대한 영혼은 온갖 모순과 절망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하여 해탈함으로써,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고 모순을 원만하게 융화하여 초연한 소요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276) 자유와 부조리처럼, 의지함이 없는 소요와 인생의 공허함 역시 동전의 양면이다.
 
 
7 문(文)과 형식, 그 심화
 
(281-282) 그것의 첫 번째 특징은 식(飾, 꾸밈) 즉 수식성(修飾性)이다. 이후 식은 발전하여 다양성이 통일된 조화의 사상이 되는데, 식은 본래 단일한 것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물로는 무늬를 이룰 수 없다.”
 
(282) 문의 두 번째 특징은 규정성이다. 원시인이 몸을 치장하는 모든 장식은 토템 의식에 의해 규정되었다.
 
(285) 중국의 문은 꾸밈으로서, “획을 엇섞어야지 문을 이루는 것”이었으므로 “한 가지 사물은 문을 이루지 못하고, 한 가지 소리를 들을 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서구의 형식은 수이기에, “간단한 곡선 하나의 아름다움, 평면 하나의 아름다움, 혹은 한 가지 색 또는 음의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
 
(288) 사물의 차원에서 보면, 문은 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파괴하는 양상을 띠었다.
 
(290) 인의 도덕은 기와 하나가 되어야만 감성적 성질을 획득할 수 있고, 그래야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을 얻어 정감의 열기와 미적 정취가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291) 내적인 ‘마음 비우기’-고요히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형(形)과 아(我)를 잊고 도와 하나되는 것-를 하는 한편, 외적인 소요-물(物)에 연연하지 않고 생사를 초탈하여 천과 하나되는 것-를 추구한다.
 
(294)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와 그림의 외형으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 있다.
-《법언·문신(問神)》
 
(296) 주체의 차원에서 천재는 형식을 무시하고 스스로 형식을 창조했다. 객체의 차원에서 숭고는, 총체적 조화에 속하여 자체 형식 구조를 지녔던 중세의 추와는 달리, 무형식과 무한을 특징으로 하며 인간의 영혼을 놀라게 했다. …… 인간에겐 감성 충동(욕구 충동)과 형식 충동(이성 충동)이 있는데 양자의 모순으로 인해 인간은 초조할 수 밖에 없다.
 
(305) 시 속에는 공백이 가득하다. 하지만 독자는 도식화를 통해 자기의 상상력으로 이 공백을 메움으로써, 도식화를 거쳐 재현된 객체층에 들어갈 수 있다.
 
(310) 후현대 미학은 최후의 것(심층 구조, 형이상학적 특질 등), 하나의 단일한 관점만을 부정할 뿐, 다층적 구조는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층적 구조는 여전히 서구 미학의 미적 대상 구조론의 주류인 것이다.
 
 
8 전형과 의경(意境)
 
(323) 형은 실체이고 상은 허체(虛體)이다. 이 때문에 통일된 형상에서 서구인은 ‘형(body)’을 중시했다. 그것은 ‘식(式, form)’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은 ‘상’을 중시했다. 실체의 ‘식’은 중요하지 않고 허성(虛性)의 ‘상’만이 우주의 기와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맑게 하여 만상을 맛보아야 한다.
 
(333) 고전주의 미학에서 전형의 3요소-형상(개성), 형식(법칙), 이상(인성 또는 보편성)-는 유형으로 통일되었다.
 
(334) 괴테의 말을 빌면, 그것은 특수 속에서 일반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특수를 파악할 때 일반을 생각하거나 명확히 드러내진 않지만 특수를 파악하면서 일반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다.
 
(336) 특수는 참조 체계 속에 위치하게 되었고, 참조 체계의 변화에 따라 특수의 ‘성격’과 ‘의미’도 변하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특수는 ‘변형’이 되었다.
 
(351) 공자는 “문이 지나치게 되면 부화해지고, 질이 과하면 조야해진다. 문과 질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지 군자이다”라고 했다. 그에게 수레가 없으면, 이는 질이 지나친 것으로 다소 ‘조야’해질 수 있다.
 
(361) 그들은 동심에서 흘러 나온 성정만이 진정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마음이자 진정한 본성이며 진정한 감성이라는 것이다.
 
 
9 창작론
 
(371) “나는 마음을 따르고 그 마음은 눈을 따르며 눈은 화산을 따른다”
 
(372) 현실을 충실하게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자유롭게 처리하는 것이며, 예술가는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여겼다.”
 
(373) 모방론의 핵심은 인간과 현실의 관계에 있다. ……(1) 현실 속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모방한다. …… (2) 무수한 일반 사물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종합해 낸다. (3) 성공적으로 자연을 모방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한다.
 
(375) 중국 화가는 언제 “실컷 돌아다니면서 한껏 보고나서, 그것이 가슴속에 역력하게 새겨지는” 경지를 추구했다.
 
(382) “눈이 머물고 마음이 생기면 시구가 절로 신묘해지는 것이다.”
 
(385) 시의 최고 경게 역시 “글의 끝이 저 아득하고도 아득한 곳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385) “경물은 그 모양으로 구하고, 마음은 이치에 조응해야 한다.”
 
(389) 노자는 “현묘한 거울의 때를 깨끗하게 닦을 것”을 강조했고, 순자는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에 집중하여 고요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391) 모방은 보편적 법칙에 의거하지만 상상은 개인의 힘을 신봉하는 것이다. 상상은 천재의 천부적 능력이며, 독창적으로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393) 신이 만고의 세월을 떠돌며 노니는 것은 우주적 넓이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폭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핵심을 추출하여 다시 구체적인 작품으로 구현해야 한다. 각 예술 장르의 물질적 형태로 인한 제약이 드러나는 것은 이 순간이다.
 
(396) 영혼은 이처럼 아주 귀중한 쾌감을 주는 순간적인 체험을 좋아한다. 그리고 영혼은 진실한 색채와 소멸되지 않는 선을 빌어 이 쾌감을 빠뜨림 없이 작품화하고자 한다. 감동적인 또는 즐거운 환영에 형체를 부여하는 것이다.
 
(398) 공감의 핵심은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관찰하여 다른 사람의 감정과 동일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에 도달한다.
 
(401) 환상이 창조한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상이지만, 이상을 가장 잘 담아 낸 형상이며, 우주의 정신을 담아 낸 형상인 것이다.
 
(405) 흥이 일어야지만 경물을 마주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글로 표현될 수 있고, 흥이 일어야지만 경물을 등지고 혼이 되어 노닐 수 있는 것이다.
 
(409) 흥은 창작의 필수이다. 무지렁이 부녀자나 애들, 농사꾼이나 뱃사공도 노래를 한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노래하고 일꾼은 자신의 일을 노래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그것은 흥에 겨워 나온 것들이다. 아무리 많은 글을 읽고 곳곳을 유람한 문인이나 선비라도 뛰어난 글을 쓰려면 흥에 의지해야 한다.
 
(412) 직관은 외부 사물과 직접적인 대응 관계가 있다. 그것은 창조이며 표현이다. 직관은 경치를 마주하면서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관조하는 가운데 생겨날 수도 있고, 경치를 등진 상태에서 자아 활동을 통해 생겨날 수 있다. 일단 직관이 형성되면 그것이 바로 미이다. 정신 속의 형상이 물질을 매개로 표현되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10 영감
 
(415) 중서의 이론을 보면 영감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불규칙적이어서 논리적으로 추출할 수 없다. 영감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이며 예측 불가능하다. 둘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영감은 인간의 의지에 좌우되지도 통제되지도 않는다. 셋째, 초월적이다. 영감 속에서 인간은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거나 평소에 체험하지 못햇던 감정을 체험함으로써 스스로를 초월한다.
 
(422) (1) 마음의 어지러움을 떨쳐 버리고 사고의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하여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가 무르익으면 즉시 붓을 들어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을 펼쳐 놓아야 한다. 그러나 원래 의도했던 글의 구상이 막히게 되면 즉시 붓을 놓아 사색을 중단하고는 이리저리 거닐며 피로를 풀고 담소를 나누며 권태감을 몰아내야 한다.
(2) 늘 마음을 여유롭게 하여 자신의 재능이 예리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 실제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정력이 흘러넘치도록 하며, 항상 사고의 칼날을 지금 막 숫돌에 갈아 놓은 것처럼 유지하고 이치에 따르되 조금도 지체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
 
(426-427) 서사 문학을 기반으로 한 서구의 영감론이 인간(작가)과 인간(인물)의 관계를 위주로 한다면, 서정 문학을 기반으로 한 중국의 영감론은 인간(작가의 감정)과 경물(자연의 경물)의 관계가 중심이다. 인인(人人) 영감의 경우 중요한 것은 심리 상태의 변화이다. 광기의 상태에서 인간은 누가 나이고 남인지 알 수 없다. 인경(人景) 영감의 경우 중요한 것은 정신적 깨달음과 융화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무엇이 나이고 사물인지 알 수 없다.
 
(430) 소식은 시인은 “물의 오묘함을 얻음에” “마음에 명료해야”할 뿐만 아니라, “입과 손에서도 명료해야 한다”고 했다.
 
(431) “시를 지을 때는 도망가는 것을 화급히 좇아야 하니, 좋은 경치는 한번 놓치면 영영 그리지 못한다.”
 
(433) 셸링에 따르면 예술에는 두 가지가 포함된다. 하나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배울 수도 없고, 스스로 터득하는 방법이나 기타의 방법으로도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천부적인 자유로운 은총만이 선험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셸링은 “천재는〔……〕이 두 가지 활동을 능아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술 창조 과정에서 이 두 가지 활동을 통일할 때, 천재는 자아를 초월하는 한편 자아를 상실하기도 한다.
 
(434) 헤겔은 상상·재능·영감의 차원에서 천재를 설명한다. 천재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기억한다. 그의 깊고 넓은 영혼은 항상 무수한 사물로 흥미를 넓혀 간다. 그는 중대한 많은 것들을 음미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심도와 폭으로 철저히 체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매료되고 감동받는다. 이는 우주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그리고 천재는 천부적인 추동력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사상·감정을 예술적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내적 충동을 지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다.
 
(434-435) 마음으로 우주를 날고 손으로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영감은 저절로 떠오른다. 영감은 내면에서 갑자기 솟구칠 수도, 외부 사물에서 계발될 수도 있다. …… 헤겔에 따르면, “영감은 형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상황 자체”이다. 영감은 예술가가 주제에 완전히 몰두하게 만든다. 영감으로 인해 예술가는 자신의 독특한 습성이나 우연한 개별 현상을 버리고, 스스로를 대상화한다. 영감이 생기는 순간 예술가는 자아를 상실하고, 자아를 상실하는 순간 그는 대상을 획득한다.
 
(440) 서구 천재론에 따르면, 시인은 영감 속에서만 천재가 되며 영감이 사라진 후에는 보통 인간일 뿐이다. 영감은 자신을 완전히 초월하게끔 한다. 따라서 영감으로 인해 작품은 인간인 작가를 초월한다. 작품이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 천재론의 특징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예술가는 고상한 인품을 가져야지만 영감을 가질 수 있고 우수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잇다. 서구와 달리 중국에서 작품은 그 작자와 같다. 따라서 중국의 천재론은 사실상 인품론이다.
 
(442) “기가 왕성하면 말의 장단이나 소리의 높낮이가 모두 적절해진다.”
 
(447) 진짜 속된 것은 술과 안주, 계집의 노래나 먹고 입는 것이 아니라, 주견도 없고 우매하여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그저 대중을 따르는 것이다.
 
(451) 무의식은 시시각각 의식의 방어막을 뚫고 현현하고자 하며, 의식은 부단히 무의식의 출현을 억압하고 저지한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언제나 의식과 무의식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452) 성인들은 자신의 꿈을 부끄러워하며 남에게 숨기지만, 예술가는 창작을 통해 자신의 꿈을 마음껏 누리며 자책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454) 영감에서의 광기는 꿈과 같은 체험이다. 외부의 힘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 내재적인 것이며, 의식이 모르는 무의식의 힘인 것이다.
 
(456) 하지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논한 바가 있다. 그중 하나는 고대의 우수한 작품을 보는 것이다. 우수한 작품이 우수한 작품이 될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시의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그 비밀은 ‘선(禪)’과 마찬가지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거기에 ‘참여(參)’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제시해 줄 수는 있다.
 
(458) 삶의 풍경 속에서만이 ‘선(禪)’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고, 시는 선과 통하므로 시의 삼매경도 삶 속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언제 깨달음을 얻을 수 잇는가는 영감에 달렸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서적에서 삶으로 바뀌면서, 깨달음은 ‘흥’과 결합하게 된다.
 
(461) 중국의 영감론은 자아 상실을 통해 순간적으로 영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수양을 통해 영구적인 영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11 미적 주체
 
(467) 음악은 사람을 유쾌하게 하므로 “악(음악)은 악(즐거움)이다.”
 
(479) “구하고자 하면 그것(그 마음)을 얻을 수 있지만, 버리려고 하면 잃게 된다”란 것이다.
- <고자(상)>에서
 
(481) 천지는 큰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말하지 않는다.
-<지북유(知北游)>에서
(481) ‘미’는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쉼 없이 흐르며 자연을 운행하는 천지의 기이다. 전우주의 자연 운행의 견지에서 보면, 문명과 인위적 욕망은 천도에 위배되는 것이다.
 
(483) “뜻을 하나로 하여,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마음이 아닌 기로 듣는 것이다. 귀는 듣는 것에 그치고, 마음은 부합하는 것에서 그칠 따름이다. 기는 비어 있어서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는 빈 곳으로 보이니, 허가 바로 심재이다.”
 
(492) 기가 물을 움직이고, 물이 사람을 감동시킨다.
 
(499) 오관에서 심기에 이르는 과정을 주체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눈으로 응하여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며, “경물은 그 형상으로 구하고, 마음은 이치에 조응하는”것이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신으로 만나는 것”이다.
 
(502) 주체가 직관의 방식으로 사물과 세계를 바라볼 때, 사물과 세계는 순수한 형식·색채·자태로서 주체 앞에 현현한다.
 
(503) 그림이 화랑을 필요로 하고, 연극이 극장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 문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현실 세계가 분리됨으로써 당신이 일상의 실용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감을 획득할 수 있는지 여부는 바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잇다. 그 거리가 유지되면 미감을 획득할 수 있고, 정신과 감관이 미적 주체로 구성된다. 반대로, 그 거리를 상실하면 결코 미적 주체로 구성될 수 없다.
 
(505) 예민한 눈은 평형을 이루고 있는 그 중심점 위에 충만한, 살아 있는 장력들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줄다리기의 양쪽 힘이 균형을 이루어 정지한 상태와 마찬가지로, 정지된 상태에서도 커다란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12 감상 방식
 
(507) 미적 감상 방식에 있어 중서의 특색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관조 방식에 있어, 중국에서는 위로·아래로·멀리·가까이 눈을 돌리며 보고, 서구는 가장 아름다운 범위를 선택하여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2) 표층을 뚫고 심층을 관상하기에 잇어, 중국에서는 ‘맛보기’와 ‘몸으로 깨닫기’에 유의하며, 서구에서는 인식과 본질 규정을 중시한다. (3) 미적 감상 과정에 있어, 중국에서는 주체가 마음을 비우고 정(情)과 아(我)를 버림으로써 대상이 지닌 신비로운 운치를 체득한다. 서구에서는 주체가 정욕을 발산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4) 미적 효과에 있어, 중국에서는 주체가 미적 감상을 통해 스스로 고양시켜 객체의 경계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서구에서는 주객의 교류 과정에서 주체가 자신과 대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주객이 모두 경험하지 못했던 경계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514) 재빨리 시선이 다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돌아오는 순간 “바람이 불어 풀이 누우니 소떼와 양떼가 보인다.” 이때의 ‘순간’은 우주적 의식이 생긴 바로 그 다음 ‘순간’이다. 천인 합일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그 순간’은 눈앞의 사물이 유달리 친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 ‘끝간데까지 이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끝간데까지 가면 새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530) 물로써 물을 보는 것은 성(性)이고, 나로써 물을 보는 것은 정(情)이다. 성은 공정하면서도 밝지만, 정은 편벽되어 어둡다.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정이다. 정에 빠지면 가로막히고, 가로막히면 어두워진다. 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성이다. 성을 찾게 되면 신령해지게 되며, 신령해지면 밝아진다.
-《관물편·외편》에서
 
(535)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 거대한 체재를 배우며, 재능이 보통인 사람은 그 아름다운 글귀를 터득하며, 시를 즐겨 읊는 사람은 거기에 묘사된 자연을 기억하고, 학동들은 거기에 담긴 풀 이름만 주워 섬긴다.
-《문심조룡·변소 》에서
 
(536) 최상의 것을 배우려고 하면 그 중간을 얻을 수 있고, 중간 정도의 것을 배우려 하면 최하가 된다.
 
(537-538)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문화적 전통·시대적 관념·개인적 경험·개인적 특징이 하나로 융화된 전-이해를 지닌 채 작품을 대한다. 인간은 역사와 분리될 수 없듯이 전-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전-이해가 편견을 뜻한다면 그것은 ‘합법적인 편견’이다. 역사성을 지닌 전-이해는 작품의 감상과 이해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감상과 이해를 위해 필요한 전제이자 기초이며, 인간이 그것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이자 인간이 볼 수 있는 시계(視界)하는 것이기도 하다.
 
(539) 감상 과정은 감상자와 작품이 양방향으로 초월하는 과정이다.
 
 
발문
 
(544) 다시 말해 '유'를 앞세우고 '무'를 후경으로 배치시킴으로써 '무'를 한낱 '유'의 보조 개념으로 떨어뜨린 일, 혹은 '유'와 '무'를 이분법이라는 장벽으로 갈라놓음으로써 양자간의 소통을 막은 것이 서방이었음에 비해, 우리네 동방에서는 역으로 '무'를 앞세우고 '유'를 그로부터 말미암아 자리잡게 하는 동시에 '무'와 '유' 사이를 가로막아 앙자를 고립시키는 길을 택하지 않고 언제나 소통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먹고 되먹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상반상생'의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장파 교수의 표현법을 빌자면 '문화 정신'의 차이가 가로 놓이게 된 것이다.

(545) 변증법과 음양의 이치야말로 한편에는 발전과 진보라는 선물을 안겨 준 반면, 다른 한편에는 정체와 순환이라는 굴레를 씌운 것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545) 서로가 마주선 채 힘겨룸을 하면서도 남의 힘을 제 힘으로 받아 와 주고, 또 내 힘을 남에게 은근슬쩍 전해 주어 그를 되살려주는 그런 지혜가 혹시 새로운 이름의 진보가 아니겠는가. "돌아가는 것이 진보"라는 발언은 그런 의미에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새로운 보조를 알리는 새로운 후천개벽의 닭소리는 아니겠는가.

(548) 눈이 칼이 되어 내리치면서 진리를 격파하는 그 찰나에 그 공간의 장(場)을 메우고 있는 것이 바로 공능이라면 설명이 될까. 그 찰나의 한(一)의 순간이야말로 오랜 기다림과 고통의 숱한(多) 시간들이 하나로 모여드는, 비록 짧지만 거대한 시간인 것이다.  

저자 서면 인터뷰

(556) 사상은 하나의 도구이며 여러 다양한 사상은 갖가지 다양한 도구에 해당하고, 각 도구는 다른 것이 대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용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책과 함께 한 2주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러나 마음에서 책을 덮은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자꾸 꼼지락거리며 형체를 이루었다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곤 했다. 많이 아쉬었다. 한 이틀 쯤 푹 쉬며 책과 마음껏 뒹굴고 싶었지만 온갖 주변 여견이 내게 그런 사치를 허락치 않았다. 그러나 비록 불편한 말 잔등 위에서, 띄엄띄엄 읽어내는 독서였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좋은 벗 한 권을 얻었으니 기쁘기 그지 없다.

국악학자 이혜구 선생님은 "학문이란 비교하는 것이야."라는 한 마디를 던지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탁월한 저서이다. 혹자는 동, 서양 미학의 차이는 잘 드러내었으나 "학문의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고 이 책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장점은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굳이 성급하거나 무리하게 서로 다른 두 길의 통합을 이루려 하지 않고, 맑은 거울처럼 둘의 차이를 비쳐낸다. 바로 그 밝게 비추어진 길 사이에 새로운 길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그가 이 책의 끝에 밝혔듯이 "감상자와 작품이 양방향으로 초월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효능이다.

연구원 생활과 함께한 지난 10개월의 여정을 돌이켜보니, 우리는 이미 이 책과 같은 수많은 거울들을 만났음을, 또 서로 다른 거울을 통해 열심히 우리 자신을 비춰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미래와 과거, 역사를 함께 논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았고, 위인과 자신을 비춰보며 위대한 전환의 순간을 꿈꾸고, 또 내 안의 위대함을 찾아보려 했고, 말을 달리는 유목 문화와 성을 쌓는 농경 문화의 차이를 통해 우리가 갇혀 있던 공간적 사고의 한계를 실감하기도 했다. 이제는 동양과 서양을 서로 비추며 자신이 갖고 있는 사상의 현주소와 그 흐름의 근원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신영복 선생님은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란 구절을 논하며 이런 설명을 해주셨다.

"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강의, P. 162)

니체는 말했다.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인간은 자신 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단단한 그릇은 쉽게 깨어지기 마련이고, 흐르지 못하고 한 곳에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쉼 없이 변화하며 틀 안에 갇히지 않아야 하고, 큰 '도道'를 논하되 희뿌연 안개와 같은 신선 놀음에 취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극좌와 극우 사이, 미래와 과거 사이, 농경과 유목 사이, 동과 서 사이, 그 서로 다름의 혼돈 속에 우리의 길, 코리아니티의 해답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것은 김지하 시인이 말하는 '흰 그늘의 미학'이 될지도 모르고, 서양의 변증법과 동양의 음양론이 한데 어울린 '변증법적 음양론'과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연구원 생활 1년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면서, 앞으로 1년 동안 계속해야 할 연구의 키워드를 정해보자면 '변화'와 '창조'이다. 속초에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캄캄한 고속 버스 안에서 이 책의 '창작론'과 '영감'을 읽으며 무언가가 반디불처럼 머리와 마음 속을 명멸하고, 이런 저런 생각이 깜박이며 떠돌아 다니는 것을 즐겼다. 까만 창 밖에는 물기가 어리고, 흐릿한 눈발이 날렸다.

"마음으로 우주를 날고 손으로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영감은 저절로 떠오른다." (P. 435)

새삼 머리 속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느끼는 요즘의 일상이다. 손으로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머리 속의 생각은 덧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창조'는 '변화'가 그러하듯 피 냄새 나는 거친 투쟁을 거쳐야 이뤄낼 수 있다. 어제의 내가 죽어야 비로소 내일의 내가 태어난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 문제가 발생했을 때와 동일한 이해력 수준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변화'와 '창조'란 키워드를 어떻게 엮어내어 나만의 것, 우리의 것을 만들어 낼 것인가, 또 경영할 것인가, 그것이 앞으로 1년 동안 내가 풀어내야 할 화두이다.


***

지난주 금요일, '디자인 코리아 2007'이란 컨퍼런스를 참관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강연을 듣고 전시회를 관람하며 이 곳에 모인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고, 또 나는 무엇을 찾는 것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바람은 바로 내 안에서 시작된다. 남을 따라해서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 디자인이든, 마케팅이든, 미학이든, 경영이든, 그 무엇이든 자신의 언어로 재정의해내어야 한다. 내 안의 나, 우리 안의 우리를 찾아내어야 비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신영복 선생님은 "도대체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라고 말했고, 심리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밖을 향해 보는 사람은 꿈을 꾸고, 안을 향해 보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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