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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7일 11시 59분 등록
1. 프롤로그

최근에 늘 떠오르는 단상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복잡한 주제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에서부터 관자에 이르기 까지 동양 고전을 동양의 사상적 줄기를 하나씩 파내려 가다가 옆에 있는 것을 슬쩍 쳐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름다움을 통하여 보여준 동양과 서양은 오랫동안 답을 찾고 헤매다 정답을 주는 동굴에 와있는 느낌이다. 동양과서양의 문명사에 대한 것은 도올 선생님의 논어 강의를 하다가 동양과서양의 문명사에 대한 강의가 다시 떠올랐다. 서양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문화가 결합하고, 동양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결합하면서 중세가 시작되고,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에 의한 문예부흥과 동양에서는 주자에 의한 문예부흥 시기를 같이 거치게 된다. 이제 동양과 서양은 한 번도 융합되지 않은 서로 다른 두 문화가 거대한 시류의 흐름에 따라 융합의 시대를 거치게 된다. 이러한 만남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도올 선생님이 영국의 대학자 버트 러셀이 1919년 북경대학에서 강연한 말을 인용하였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그 구절이 떠올랐다.


동서 융합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의 위대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여기 동양 사람들이 죽으라고 서양을 배우고 있지만, 우리 서양 사람들은 동양 사람들이 서양을 배우고 있는만큼 동양을 배우고 있질 못하다. 그리고 동양에서 서양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매우 미묘한 종교나 철학 같은 복잡한 문제이지만, 서양에서 동양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수학이나 과학 등 객관적이고 쉬운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라고 하며 서양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렸다.(도올의 논어이야기 26편-인류문명사 어떻게 볼것인가(2)


동양과 서양이 발전하는 추이가 있지만 어찌보면 미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동양과 서양의 미의 융합은 시작되었다고 본다. 쉽게는 미인의 기준에서부터 그림, 음악 등이 푸전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기업의 경영측면에서는 오히려 서양의 앞선 통계와 과학적인 관리방법이 우세한 분야을 점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사부님의 자연의 미에 대한 단상이다. 비행기 안에서 볼려고 가져온 사부님의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를 한 장씩 감칠 맛나게 읽다가 자연의 아름다움 부분에서 딱 하고 멈추었다.

자연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은 늘 같다. 먼저 우리를 감탄하게 하여 혼을 빼놓는다. 상상 너머의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다음에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을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한 후 신의 음성을 불어 넣는다. 이 아름다움이 보이느냐? 너의 초라함이 보이느냐?


동양적인 자연에 대한 일칠감과 경외 그리고 숭고에 이르는 자연의 미에 대한 장파 교수의 정확한 표현이 다시 살아났다. 역시 자연의 아름다움은 수치나 과학이 아닌 마음의 소통하고 경외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본다.

2. 작가에 대하여.

A와 B를 비교한다는 말이 쉽게 보일지 모르나, A와 B를 모두 다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거대하고 다양한 철학중에서 미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적당하게 잘라내고 갖다 붙여서 두 개의 거대한 아름다운 탑을 만들었다. 문득 청나라 때 아편전쟁으로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중화사상이 여지없이 깨지고 난후의 충격이 새삼 떠오른다. 하지만 장파 교수는 그런 문명의 우세함이나 충격없이 두 개의 탑에 망원경과 현미경을 설치하여 독자들이 판단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중국 충칭(重慶)에서 태어난 장파(張法) 교수는 1954년에 태어났다. 1982년 쓰촨(四川)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뒤, 베이징 대학교에 진학해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1984년 철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런민(人民) 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중국 미학사, 중서미학연구 등을 강의했다. 중국 미학계를 대표하고 있는 장파의 주요 저서로는 <중서미학과 문화정신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중서미학과 비극의식>, <20세기 서구 미학사>, 공저로 1998년 중국도서상을 수상한 <중국 예술학>, <예술철학> 등이 있으며, 총 14편에 이른다. 발표한 논문도 100여편에 달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정열적인 연구 노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진으로 본 장파교수의 외모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남자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아름다움은 동양과 서양의 미에 대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만들었다. 꼭 아름다움이 아닌 동양과 서양의 비교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안겨주었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해제 - 동서 통합으로 을 향하여>

(12) 물론 감상과정이 감상자의 작품을 쌍방향으로 자기 초월하게 하는 활력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으로 역동한다는 미학적 기획과 인식은 놀랍다.

<서론>
(24) 따라서 교류가 빈번한 현대 사회에서의 범문화적으로 전파되는 문학작품을 연구함에 있어 예전의 문학이론은 무능하다. 비교문학에서의 영향연구는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다.

(26) 사물의 성질은 참조 체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현대의 보편법칙이다. 현대 정신을 지니 비교학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참조체계를 도입한 연구이며, 새로운 참조 체계의 도입을 통해 이전의 참조체계로는 드러낼 수 없었던 새로운 사물의 성질을 드러냄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32) 중국 문화에서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시대적 차이가 아니라 사상 유파의 차이이다. 중국에서 어떤 특징이 문화적 특징으로 간주되려면 모든 유파를 근본적이 차원에서 동일하게 보아야 한다. (중략) 서구 문화에서의 제일 중요한 차이는 중국과는 반대로 시대적 차이이다. 어떤 특징이 문화적 특징으로 간주되려면 그 특징이 각 시대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중서 비교에서 중국의 경우는 시대적 차이에 유이하면서 우파의 차이에 더 주목해야 하고, 서구의 경우에는 유파의 차이에도 주의를 하면서도 시대적 차이에 더 주목해야 한다.

<1.문화정신>

(37) 형이상학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철학이고(그것은 세계의 통일성을 연구하는데, 세계의 궁극적 본질은 이념 또는 물질로 귀결된다) 초이성적 이해가 신학이다(하느님이 세계의 통일성을 결정한다.) 철학과 신학은 상호 보완적으로 서구의 우주관을 구성하였다.

(46) 즉 총체로부터 객체를 부단히 돌입시킴으로써 서구인은 결국 총체성의 허황함과 객체의 독특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개체가 문화적기호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바뀌었든지 간에 결국 서구문하ㅗ는 실제의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본 것이며, 언제나 실체의 세계를 그려내는 강박관념 속에서 실체와 허공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했다.

(49) 이처럼 유무의 영원한 전화과정이 중국적인 기의 우주의 끊임없는 생성운동을 구성하며, 바로 이 기의 운동이 만물을 싹트게 하고 세상의 천태만상을 낳은 것이다.


(57) 형식은 서구 문화에서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실체를 가일층 구체화하는 것이자, 과학적 명로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객관 법칙의 표현이자, 인간의 객관법칙에 대한 인식적 파악이다. 형식은 복잡한 현상이 질서를 갖게 하고, 원시적 질료가 새로운 질을 획득하게 하며, 신비하고 모호한 내용이 이성을 드러내게 하고, 혼돈의 자연이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든다.

(57) 서구 문화의 형식원칙이 지닌 내적 모순은 역사적 한계, 진리와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 그리고 과학적 요구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서구의 형식이 부단히 스스로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수정하도록 충동하였다.

(64) 중국의 정체공능은 미지 부분의 정체공능, 즉 기를 포함한다. 그 정체성의 현현은 정체적인 기가 각 부분으로 주입된 결과이며, 여기서 각 부분의 실체적 구조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 주입된 실체적 구조 속에 담긴 기이다. 따라서 어떤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기를 중시해야 한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정신과 기량을 그림을 평가할 때는 기운이 생동하는 가를 우선시한다.

(69) 명료함은 세계를 인식하는 인류이 인식자체에서 나온 것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인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서구인은 인신과정과 인신법칙을 총괄하는 과정에서, 실체성과 형식원칙의 은밀한 규제 하에 도구의 명료성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감각기관의 기능범위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물의 복잡한 내부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70)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세계를 명제가 확정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도구에 의지해야만 한다. 세계와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도구에 의거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의 이성도 사실은 도구를 척도로 삼은 것이고, 따라서 도구의 제약을 받는다. 이렇듯, 도구의 한계는 바로 인간이성의 한계이다.

(80) 중국인에게 기술 역시 언어와 마차가지로 이해된다. <장자>에서는 재경이 나무로 악기 틀을 만들었는데, ‘악기틀 이 완성되자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귀신같은 솜씨라고 경탄했던 ’ 것은 기술을 넘어서서 자연에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포정이 소를 가르는 기술로 사람을 놀래켰던 것도 그가 기술을 넘어서서 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기술의 정치한 부분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정한 순서로 전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입으로는 말할 수 없고, 그 마음속에 비결이 있다.’ 다만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가장 심오한 기술의 경지는 기술이 아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기술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며, 사람의 총명함과 재능의 문제이고, 사람이 도를 터득하는 문제이다.

(84) 모호성은 중국 문화의 도의 수호자이다.

<2. 미학의 총체적 비교>

(86) 서구미학은 본질추구, 주체의 지성‧감성‧의지의 분리, 예술의 통일성이라는 세 가지 근원에 기초하고 있다.

(105) 일반적으로 중국 미학의 이론체계는 세 방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 중국문화의 근본 성질인 도-음양-와 오행의 우주, 그리고 그것의 운행, (2) 구체적인 연구대상의 발생‧발전, 즉 시공간적 서열, (3) 정체속의 개체를 개괄하는 두 가지 방식, 즉 정련된 문구사용 방식과 유사성에 의거한 방식이 그것이다.

(117) 명말 사조의 여파가 얼마 등에게서 한바탕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사라자지, 청대미학은 중국고전의 미학의 총결로 나아갔다. 왕부지, 엽삽, 유희재, 왕궈웨이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의 이론 속에서 중국미학은 그 불변의 핵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결국에는 깊고 넓지만 정체되어 초월할 수 없는 양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3 문화적 이상의 표현 ; 화해(和諧)>

(119) 화해란 최선의 생존상태와 최선의 발전상태를 뜻하며,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서간의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그 화해의 내용과 형식, 발전경로는 상이할 수밖에 없다.

(124) 중국 문화에서 화해의 관념은 음악에서 기원하며, 음악의 화해는 정치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 그리고 자연 질서와 긴밀하게 연관된 사회질서의 화해, 이 두 가지 화해 속에서 문화의 최고이상인 우주의 화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면 음악의 화해에서 우주의 화해를 발견했기 때문에 바람이 중국 문화의 근본개념인 기(氣)의 전신이 될 수 있었고, 이러한 기의 특징이 중국적 화해관의 특징과 발전 방향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127) 중국 문화에서는 음악이 바람과 기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면 그리스 문화에서는 수를 통해 우주적 화해에 이르렀다. 기가 중국적 우주의 근본인 것처럼, 피타고라스는 수가 세계 만물의 본원이라고 생각했다.

(128) 중국 문화에서 화해 관념의 기원은 모두 음악과 관련되지만, 서구에서는 음악의 과학적 성격을 강조했고, 중국에서는 음악의 정치적 공능을 중시했다. 서구의 화해는 명료한 수로 설명되며, 우주의 보편성은 수를 통해 얻어진다. 중국의 화해는 모호한 바람과 기로 설명되며, 바람과 기를 통해 우주적 성질로 변화하였다. 기원에서의 이와 같은 차이가 화해 이론의 중서 가의 차이를 낳았다.

(134) 치세에 사람들은 개인‧사회‧우주를 서로 대비하는데, 이때 우주는 인의의 성질을 지니게 된다. 이것이 유가의 우주적 견해이다. 난세에 사람들은 개인을 우주와 직접 대비하며, 인간과 우주는 모든 사회를 부정하게 된다. 이것이 도가의 우주적 화해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우주적 화해는 모두 소농경제와 통일된 농업사회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기‧음양‧ 오행의 우주적 화해이다. 다지 유가가 중점을 둔 것은 통일된 천(天)이고, 도가가 강조한 것은 소농경체의 처일 따름이다.


(142) 수는 정태적이며 공간적인 것이다. 불은 변화이며, 시간적인 것이다. 수의 화해는 공간적이면서도 조용하고 엄숙한 이상의 구현이다. 불의 화해는 시간적인 벼화의 경향을 반영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서구 문화에서 최초로 “모든 것은 흘러간다.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없다.” 는 변증법적 발전관을 제시했다.

<4.문화적 곤경의 표현 : 비극>

(161) 비극 의식이 형성되려면 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성이 있어야만 종교적 마취에서 풀려나 냉혹한 현실과 맞대면하고 현실의 비극성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문명 가운데 그리스 문명과 중국 문명만이 이성주의가 거대한 사조를 이룰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세계적 철학자가 나와 완전한 비극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대표적이며, 중국에서는 시경중의 비가와 초사가 대표적이다.

(166) 중서의 비극 의식이 형태‧특징‧ 내용‧ 정취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양자 모두 비국 의식의 두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각기 문화의 생장을 돕는다. 비극 의식과 문화의 관계에서 보면 양자는 동형구조라 하겠다.

(169)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두 사람이 죽은 후, 두 집안은 원수에서 친구가 된다. <간계와 사랑>에서 두 사람이 죽은 후, 수상도 절망하여 스스로 법망에 뛰어든다. 시체더미속에서 계급과 정치, 사상의 심판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쌍방의 멸망을 통해 절대 이념이 승리한다는 헤겔의 말과도 같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전전하는 문화는 명단을 통해 더 높은 차원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175) 구애자의 비애는 그 자체로 말하면, “정에서 시작되어 예의에서 그치는” 방식 양식에 빠져든 것이다. 정에서 시작해야만 비로소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부패한 선비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 예의에서 그쳐야 더욱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내키는 대로 해선 반금련처럼 부정적 인물 형상이 되어 버려, 비극 의식은 풍자 의식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예의에서 그친다면, 자신이 포기하는 것은 더욱 귀한 것이 되고, 자신은 더욱 고통스러워지며, 그 실패는 더욱 슬픈 일이 되고 그 영혼은 더욱 풍성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184) 중국의 비극 인물들은 감정으로 인해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예의 편면성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마음의 한 구석에 묶어둠으로써 예가 유지되게끔 한다. 이러한 감정이 슬픔으로 변하여 눈물이 될 때, 이는 문화적 에의 완정성과 신성함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도 중국 애정의 비극과 문화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199) 서구의 비극은 극단적인 생리적 증상이나 심리적 증상 - 눈멈‧ 미침‧ 고독 등-을 통해 주인공의 자아부정과 자아초월을 표현한다. 이는 진리추구의 결과로서, 예의 수호와는 다른 특색이다. 진리추구에서 ‘진리’는 미지로 나아가는 역정으로 자아 부정을 통해서만 도달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의 수호에서 ‘예’는 이미 결정된 원칙으로 , 확고한 믿음만 있으면목숨을 걸고 지킬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비극에서 주인공은 절대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예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부정할 따름이다. (중략) 서구의 비극 의식이 진취형 문화에 부합하는 것처럼, 중국의 비극의식은 보존형 문화에 부합하는 것이다.

<5.문화적 초월의지의 표현 : 숭고(崇高)>

(201) 고대 미학의 주요 범주가 비극이라면 근대 미학의 범주는 숭고이다. 비극의 투쟁과 파멸을 중심으로 한다면 숭고는 투쟁과 승리를 중심으로 한다. 비극의 효과가 공포와 연민이라면 숭고의 효과는 고통과 쾌감이다. 비극이 파멸을 통한 정화를 강조한다면, 숭고는 투쟁을 통한 초월을 강조한다.

(208) 숭고는 일련의 두려운 대상이다. 그것이 숭고가 되는 이간에게 고통을 주고 왜소함을 느끼게 하지만 그 고통이 극복되고 왜소함을 초월하여 유쾌한 감정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대상의 이중성(공포의 대상이자, 숭고의 대상)은 여기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공포의 대상이 숭고의 대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객체가 아닌 인간에게 달린 문제이다.

(213) 도덕적 힘은 칸트의 숭고론에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칸트에게 도덕적 힘은 주체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225) 중국 고전 미학에서 이물의 숭고인 ‘큼’은 천의 숭고에서 천인합일이 되고, 천의 명을 받은 제왕의 숭고는 이성화되어 자연을 본받은 성인의 숭고를 거쳐 호연지기를 갖춘 영웅과 군자의 숭고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긍정적 형상이다.

(235) 결론적으로 중국에서 큰 산과 강이 숭고 객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서구와는 다른 의식에 기반 한다. 산과 바다는 적대적인 형상이나 신을 거역한 추악한 조형도 아니고, 헤겔의 이론 체계에서는 점하는 낮은 지위를 갖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양강한 천지의 정기이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자연인 것이다. 중국인이 큰 산과 강에서 받은 느낌은 기본적으로 숭고한 인물에게서 받는 느낌과 동일하다.

(244)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교류 전체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숭고는 인간의 자아초월과정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과 서구의 숭고론에는 다음 세 가지 차이가 있다. (1) 인간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게 하는 것, 즉 초월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다르다. 그 대상이 서구의 숭고에서는 적대자이며, 왜소하다는 느낌은 격려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2) 초월의 방향이 다르다. 서구의 초월, 특히 버크와 칸트의 이론에서는 상대방과 본래의 자신을 싸워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중략) 중국의 자아초월은 격려자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방향은 규정적인 것이며 그 본보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식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원죄 의식과 같은 귀의는 아니다. (3) 초월과정이 다르다. 서구의 숭고는 격렬한 부정의 과정으로 드러나고, 중국의 숭고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상승으로 표현된다.

<6. 문화적 자유로움의 표형 : 부조리와 소요>

(246) 자유가 서구 문화에서의 중요개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미학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자유가 부조리와 결합한 현대에 이르러서이다. 고대 중국 문화에서 자유와 가장 유사한 개념은 소요(逍遙)이다. 소요는 장자에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이미 중국 미학의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으며, 송 대에 이르러 몽환감(夢幻感)과 결합하면서 주요한 미적 범주의 지위에서 점차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자유와 소요는 중서 미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두 개념과 연관된 체계를 함께 고찰해야만, 그 중요성이 더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투쟁‧ 자유‧ 부조리와 은거‧ 소요‧ 몽환감이다.

(248) 지적 역량이 이성과 결합하면서, 문예 부흥 이후 근대 과학을 낳았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는 인가의 외적자유를 위한 투쟁에 도움을 주었다. 자연을 정복하면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계약관계로 발전하였고,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부르주아적 혁명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인간들의 제일 투쟁목표는 자유의 쟁취였다. 근대 서구의 자유 쟁취 투쟁에서 절정은 헤겔 철학이다. 헤겔은 하느님과 우주진화 그리고 이념의 운동을 결합하여 자유에 이르는 길- 자유는 필연을 인식하는 것이다 - 을 제시하여 주었다.

(252) 유적법칙은 개인의 운명을 설명하지 못한다. 개인은 그 자신이 속할 뿐이다. 그래서 케이르케고르는 이념이 개인을 지배한다는 헤겔의 주장에 강력하게 맞서서 자신의 묘비명에 단독자라고 새기기 까지 했다. 신이나 절대 이념, 보편법칙이 몰락하자, 법칙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독특함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인간은 자유로워진 것이다.

(254) 전통 서구 철학에서 물질과 정신, 객관과 주관은 가장 근본적인 범주였지만, 실존주의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들 범주를 무력화시켰다. 이는 자유와 부조리의 관건적 관계를 설명해준다.

(258) 서구의 자유추구는 속박을 공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속박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한다. 그러나 과거의 속박이 제거되자, 새로운 속박이 출현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유추구는 부조리의 자유에 이르게 되었다. 중국의 자유추구는 속박에서 시작되지만 자유를 획득하는 방향은 도리어 퇴각의 방법이다. 중국 문화에서 통일된 등급제도는 전장제도‧ 행위규범 ‧ 사상의식을 일체화시킨 예를 강조하였다.

(263) 도가는 사회적 속박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자유를 논하였고, 그 특징은 사회적 속박뿐만 아니라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기의 우주에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제공했다는데 있다. 확실히 기공의 경지는 형체를 떠나 앎을 없애고, 나와 만물이 하나 되며, 나와 하늘이 합일 되는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느낌으로 인해, 인간은 만물과 성쇠를 함께하며 “고요하여 음과 덕을 함께 하고, 동하여 양과 흐름을 같이하는 소요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278) 중국의 소요가 의지처의 진정한 소멸, 극단적 자유에 이르게 되자, 소요는 몽환감을 띠게 되었다. 서종이 의지처를 소멸시킨 진정한 소요에 도달하려고 한 결과로 도리어 자연 인성론의 발생을 촉진시킨 것이다. 자연 인성론은 이지 사상에 집중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 인성론이 대두되자 은거와 소요는 더 이상 중국문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7. 문과 형식, 그 심화>

(279) 미가 형식 속에 있다는 견해는 미적 본질에 대한 서구의 최초의 미론이다. 형식이란 용어에는 역사적 변천에 따른 5가지 함의가 포함되지만 그 중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은 사물의 외관을 뜻하는 것이다. 중국 미학의 경우, 미적 본질에 대한 전문적 연구는 없었지만, 미적 본질과 유사한 개념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문(文)이다. (중략) 형식 역시 그리스 시대를 미학의 제우스가 되어 지배했다. 따라서 문과 형식은 두 문화의 미적대상에 관한 이론의 역사적 출발점이나 논리적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81) 문은 원시인의 문신이고, 노예 사회 군자의 의관복식이며, 원시 사회 무속의식이고, 노예 사회 문물이 덕을 드러내는 예제이다. 즉 문은 일종의 외관이다. 그거의 첫 번째 특징은 식(飾, 꾸밈)즉 수식성이다.

(284) 형식 역시 외관이다. 중국의 문이 정치‧ 윤리와 연관되었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 형식은 과학의 길,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학의 길로 향했다. 수는 부분 자체의 대소이고, 비례는 부분간의 척도관계이며, 질서는 부분의 대소와 비례를 통해 완전한 조화의 총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인의 미적 법칙이다. 문물이 덕을 빛내는 예의 외관이 아닌 수학 법칙을 준수하는 형식인 것이다.

(291) 맹자와 장자는 기를 도입하여 형식을 초월했다. 문은 외재적 형식이고 기는 내재적인 것으로 그 영역이 분명하다. 문이 아무리 찬란해도 그것은 외재적인 것으로 내재적인 것의 현현일 따름이다. 기는 애초부터 내재적인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우주의 근본이다. 이 때문에 중국미학에서 문이 기로 대체된 것은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다 하겠다.

(299) 헤겔에 있어서 이념의 논리적 특성은 예술 내용의 논리적 특성을 낳았고, 미적 대상 구조론의 논리적 경향성을 낳았다. 하지만 논리적 개념은 결국 예술의 진정한 내용일 수 없다.

(301)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우주, 하이젠 베르크의 불확정 미시계, 괴델의 증명불가의 대전제는 이성적‧기계적 뉴턴의 세계를 뒤 집었다. 실존주의는 개인이 조우한 생의 의문덩어리를 가지고 필연성과 법칙에 맞섰고,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통해 이성의 허위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절대 이념이 쇠퇴하면서 미학에서도 내용의 논리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술 영역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 논리적 언어 예술인 문학이 공격의 주 임무를 담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는 그 사명을 러시아 형식주의와 영미 신비평에게 부여했다.

(320) 예술 내용에 대한 정치 윤리와 논리 개념의 지배를 하고 나서, 서구 미학은 다층적 구조론으로 나아갔고, 중국 미학은 인체학적 구조론을 형성했다. 인체학적 구조론이 중시했던 것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정기‧운이었으며, 이로써 중국의 미적대상론은 자체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위진 이래 청대까지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층적 구조로은 원형 비평과 구조주의에서도 언어에서 출발하여 논리를 전개시켰으며, 프라이의 원형적 총체구조도 너무나 명확하고 확정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부정 혹은 수정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었다.

<8. 전형과 의경(意境)>

(322) 전형은 바로 이상에 가장 가까운 형의 구체적인 형을 뜻한다. 서구 문화는 실체와 형식을 중시하고, 미적 개체에 있어서도 ‘형’을 중시하며, 우주에서 사장 근본이 되는 것도 실체이며 이데아이다, 이 때문에 구체적 형이 심오한 존재 의미를 갖기 위해선 이데아의 견본과 똑같이 주조해 내기라도 한 듯 이데아의 전범성을 드러내야 한다. 전형론의 핵심은 삼각형 구도로 표현될 수 있다.

(347) 의경론에서도 자연의 침투가 이루어짐으로서 인해 무한대로 나아가던 세분화가 순환적 양상을 되게 되었다 세분화되어 전개되면서도 하나로 수렴될 수 있음으로 해서, 의경의 구조는 문화 구조와 동일 구조를 갖게 되었다.

<9. 창작론>

(369) 인간이 자기 자신과 주위 세계를 대하는 방식은 예술 작품 속에 선명하게 구현된다. 이간이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방식에는 문화관과 심미관이 집중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따라서 창작론이 미학에서 중요한 것이다. 서구 미학의 창작론도 서구 문화와 마찬가지로 부정→전진의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고대, 그대, 현대 각 시기마다 모방, 상상, 직관을 핵심으로 하는 상이한 세 가지 창작론이 있었다. 이 세 가지가 서구 창작론의 기본을 이룬다.

(385) 그래서 자연을 모방하는 서양화는 초점 투시를 사용하며 배경은 모두 실제의 경치이다. 중국의 우주는기의 우주이다. 그래서 중국의 시와 회화에서는 산점 투시를 이용한다. 그림의 배경은 대개가 여백이며, 시의 최고 경계 역시 “글의 끝이 저 아득하고도 아득한 곳으로 이어지는(두보)” 것이다.

(389) 예술가들이 잡념 없는 마음을 중시한 것은 마음에 잡념이 없어야지만 우주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기는 철학자적 심리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현묘한 거울이 때를 깨끗하게 닦을 것”을 강조했고, 순자는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에 집중하여 고요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중국의 기의 우주는 비어있다. 따라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만물의 운동법칙을 규정하는 우주의 기를 인식하는 최고의 방법인 것이다.

(405) 중국 미학의 경우는, 경물을 마주하고 이루어지는 조화 본받기든 경물을 등지고 마음속에서 노니는 것이든 공통적으로 전제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흥(興)이다. 흥이 일어야지만 경물을 마주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글로 표현될 수 있고, 흥이 일어야지만 경물을 등지고 혼이 되어 노닐 수 있는 것이다. <시경>과 <악기> 이후 줄곧 ‘흥’은 중국인의 예술 창장에 있어 중요한 논제였다.

(412) 일단 직관이 형성되면 그것이 바로 미이다. 정신속의 형상이 물질을 매개로 표현되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직관이 생기면 예술도 있지만, 직관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자연 모방의 경우, 내적 지향은 이데아와 같은 전형을 획득하려 했다. 상상의 경우에는 유한 속에서 무한을 획득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적 우주 속에서 직관은 더 이상 총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 대상이 직관했을 때 그것이 대상 주체로 간주되는 것. 여기에 현대정신이 구현되어 있다. 모방과 상상은 모두 미를 추구하지만 직관은 추를 회피하지 않는다.

<10. 영감>

(427) 인경 영감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인인 영감에서 작가의 심리 상태가 작중 인물의 심리 상태로 완전히 바뀌기는 힘들다. 인경 영감에서도 시인의 감정이 경물과 융화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영감 론에서는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돌발성’을 제시한다. “감응의 모임, 통하고 막히는 것의 법칙과 같은 것은 온다고 막을 수 없고, 간다고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438) 예술가는 영감을 통제할 힘이 없고, 도리어 영감의 통제를 받는다. 영감의 도래는 갑작스러운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거리 한복판을 걷거나 또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을 때, 혹은 흠뻑 취해서 놀고 있을 때, 때마침 뜨거운 불덩이가 가슴과 손, 혓바닥을 스쳐갈 때가 있다. 그 찰나에 갑자기 글자 하나가 수많은 생각들을 환기시킨다. 그 생각들이 자라나면서 비수를 지닌 비극이나 멋진 그림, 윤곽이 뚜렷한 조각이나 해학이 넘치는 희극이 탄생하게 된다.”

(442) 소철도 기의 배양을 주장했다.
“글은 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글은 배우고도 능해질 수는 없지만, 기는 길러서 이를 수 있다.”

(460)서구의 영감론은 신의 은총설에서 천재론을 거쳐 무의식론에 이르기 까지 시종일관 대립-시인과 뮤즈, 보통사람과 천재, 의식과 무의식- 을 포함하고 있다. (중략)전진 부정의 문화적 성격이 여기서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실체성과 명료성은 인간 스스로의 위대성을 자각하도록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왜소함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전진했던 것은 확실하다. (중략) 중국의 영감론은 신의 도움설, 인품론, 깨달음설도 문화적 차원에서는 중국적 우주가 지닌 기의 비실체성과 도의 표현불가능성과 관련된다.

(461) 인품론이나 깨달음설은 모두 성정의 수양을 통해 영감의 근원을 파악, 획득할 것을 요구하다. 이처럼 중국의 영감론은 자아 상실을 통해 순간적으로 영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수양을 통해 영구적인 영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중국 문화에서 예술적 영감은 천인합일의 방법이자 인간의 자족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로써 중국의 영감론에서도 문화적 성격이 빛을 발함을 알 수 있다.

<11. 미적주체>

(485) 장가의 기와 맹자의 마음은 모두 오관을 초월한 것이다. 맹자의 마음을 통한 초월은 형식을 초월하여 기로 가득찬 숭고이고, 장자의 기를 통한 초월은 형체를 초월하여 도에 가까워지는 소요이다. 하지만 장자나 맹자나 모두 오관의 통일을 파괴한 적은 없으며, 단지 오관의 통일성을 폄하했을 따름이다.

(496)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미적 대상의 외형은 다양성을 지니며, 그에 대한 주제의 체험도 오관의 전면적 체험이다. 따라서 중국의 미적 감관에서는 오관의 고하 구분이 없다. 자연과 예술에서 혀가 그 역할을 발휘할 영역이 많지 않긴 하지만, 그것도 대상의 한 측면으로 쓸모가 있다면 활용했다.

(498) 눈은 자신의 본질은 없고 만물의 모습을 그 본질로 삼는다. 귀도 자신의 본질은 없고 만물의 소리를 그 본질로 삼는다. 코 역시 본질은 없고 만물의 냄새를 그 본질로 삼는다. 입도 본질도 없고 만물의 맛을 그 본질로 삼는다. 마음도 본질도 없고, 천지 만물과 감응하는 것의 옳고 그름을 자신의 본질로 삼는다.

(506) 결론적으로 보면, 현대 서구의 미적 주제 구성은 세 갈래 방향으로 전환을 이룩했지만, 그것은 다시 하나의 총체로 파악할 수도 있다. (1) 인간은 유기적 총체이다. 인간의 모드부분이 미감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 물론 시각과 청각이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는 것은 사실이다. (2)이가의 모든 부분이 미감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심미적 태도에 기인한다. (3)일단 심미적 태도를 가지고 미적체험을 할 경우, 주체의 구체적 활동방식은 감관과 대뇌의 운동과정에 의거한다.

<12. 감상방식>

(507) 미적 감상 방식에 있어 중서의 특색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관조방식에 있어, 중국에서는 위로, 아래로, 멀리, 가까이 눈을 돌리며 보고, 서구는 가장 아름다운 범위를 선택하여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2) 표층을 뚫고 심층을 관상하기에 있어, 중국에서는 맛보기와 몸으로 깨닫기에 유의하며, 서구에서는 인식과 본질규정을 중시한다. (3)미적 감상과정에 있어 중국에서는 주체가 마음을 비우고 정(情)과 아(我)를 버림으로써 대상이 지닌 신비로운 운치를 체득한다. 서구에서는 주체가 정욕을 발산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4)미적효과에 있어, 중국에서는 주체가 미적감상을 통해 스스로를 고양시켜 객체의 경계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서구에서는 주객의 교류과정에서 주체가 자신과 대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주객이 모두 경험하지 못했던 경계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515) 중국인이 위로, 아래로, 멀리, 가까이 보는 것은 기의 우주에서 하나의 사물을 인식하려면 그 사물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그와 관련된 사물들까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선이 움직여 최종적으로 우주의기와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천도에 이르러야 그 사물을 근본적으로 파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사물을 관조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천도의 관조로 발전하고, 여기서 눈 돌리기의 미적 감상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중국인은 이와 같은 눈 돌리기를 통해 ‘바로 지금’을 파악하고 동시에 전 우주를 파악한다고 여겼다.


(530) 사물을 보면서 사물에 의해 이끌리지 않으려면 자아와 정욕을 버리고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을 점유하거나 이용하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우선 마음을 비우고 비워진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며 사물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는 순간 나와 사물이 함께 우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539) 작품은 계몽자도 오락의 대상도 감정 이입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소통자로서 감상과정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작품은 새로운 감상자와 관계를 맺고 새로운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그 의미가 풍부해지고, 감상자를 통해 스스로를 초월하는 것이다. 감상과정은 감상자와 작품이 양방향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발문 - 아름다움을 비추는 두 개의 거울>

(542) 장파 교수가 내건 비교 미학의 ‘비교’란 것이 실은 서구 근대의 여러 사조들은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전략의 일환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은 자명하다. 우리로 치면 서구의 문예사조들과 우리 문학을 대비하여 양자 사이의 같고 다름이라던가. 영향관계등을 따지는 , 기껏해야 해방 후 1세대 평론가였던 백철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같은 지향이 그들에게는 가장 아쉽고 목마른 샘물과 같은 대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545) 변증법이 발전과 진보를 가져다 준 이면을 들추어 보면 앞으로 일로 매진하면서 버리고 간 폐기물들의 잔해가 널려 있음을 보게 된다. 서구의 변증법적 근대는 폐기에 기초한 문명, 곧 무엇인가를 늘 폐기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운동 혹은 재생산이 원초적으로 차단된 그걸 길 찾기에 기반하고 있음에 비해, 동방에서는 비록 그것이 우수마발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듬으면서 갈 길을 더듬어 왔다고 할까.

4. 내가 작가라면

6박7일의 출장중 마지막날이다. 두바이 시각으로는 6시45분, 아마 사무실에는 점심먹으러 나갈 준비를 할 것이다. 일상을 벗어난, 멀리 외국에서 과제를 하는 모습이 동료들의 모습에는 이상한 눈으로 비치고 있다. 틈만 나면 노트북을 들고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고 책을 계속 보고 있고, 술자리도 피하려고만 하고... 그러다가 출장보고서가 아닌 과제물을 한다는 나의 얘기를 듣고 실망하는 눈치이다. 오히려 두바이와 베트남의 비교보다도 미학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제대로 볼것도 못보고 엉뚱하 것만 본 느낌이다.

도올 선생님의 말처럼 동양과 서양은 이제 거대한 융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장파교수의 미학비교는새로운 분야가 될 것이고,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이러한 비교가 이루어 질것 같다. 어찌보면 이미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특히 고대 중국의 시경에서부터 논어,공자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지식인들의 일정한 배치에 따른 인용이 좋았다. 7장의 문화 형식의 심화 부분에서 보여준 일련의 시와 형식에 대한 장파교수의 설명은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상세한 설명이었다. 계속 보고 공부를 더 해야할 부분이다. 미학에 대한 비교를 위하여 사용한 변수 들이 다채롭다. 정신에서부터 화해, 비극, 숭고, 부조리와 소요, 심화, 전형과 의경, 창작론에서부터 감상방식 까지 다양한 변수를 동원하여 좀더 자세하고 알기쉬운 설명이 된 것 같다.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분야에 객관적 단서와 증거들이 가득한 살아있는 비교가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일종의 소통이라는 것. 감상자와 작품에 대한 통섭의 원리로 본 것이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동양과 서양의 반목과 정복이라는 커다란 패러다임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스스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필요한 부분을 접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고전읽기가 계속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다시 찾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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