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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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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0일 17시 55분 등록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中西美學與文化情神
장파 저, 유중하, 백승도, 이보경,
양태은, 이용재 역, 푸른숲


1. 저자에 대하여

개인적 약력

사부가 태어난 해 1954년 중국 충칭(重慶)시에서 동시에 뿅하고 출생. 쓰촨(四川)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베이징(北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그곳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였다. 1984년 런민(人民)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15년간을 재직하며 '중국미학사' '중서미학연구' 등을 강의함.
'미학연구소' 소장과 '전국심미문화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미학계를 이끌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중서미학과 비극의식 中西美學與悲劇意識」「20세기 서구미학사 20世紀西方美學史」가 있다. 또 1998년 중국도서상을 수상한 「중국예술학 中國藝術學」과 「중국전통예술의변천 中國傳統藝術學」「천년화하예술의 개관 天年華夏藝術一瞥」을 비롯해 9편의 공동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주요 저서

1、《중서미학과 문화정신(中西美学与文化精神)》
북경대학출판사1994年版, 1998년 대만版, 2000년 한국어版
2、《천년화하예술개관(艺海泛舟--千年华夏艺术一瞥)》해천출판사 1999년版
3、《미학도론(美学导论)》중국인민대학출판사1999년版
4、《불교 세계를 묻다?(询问佛境)》종교문화출판사2000년版
5、《중국미학사(中国美学史)》상해인민출판사2000년版
6、《별양감오(别样感悟)》사천인민출판사2001년版
7、《전지구화시대로 가는 문예이론(走向全球化时代的文艺理论)》안휘교육출판사2005년版

공저
1、《중국예술학(中国艺术学)》(5인공저, 제1저자)고등교육출판사1997년版
2、《예술철학(艺术哲学)》(3인공저, 제1저자)중국인민대학출판사1999년
3、《중국어 속의 서방미학(汉语语境中的西方美学)》(4인공저, 제2저자)안휘교육출판사2000년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22) 한 학과가 ‘학문’으로 성립되려면, 즉 과학적 형태를 갖추려면 고전적 요구에 따라 다음과 같은 기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일련의 기본 개념을 가져야 한다. 둘째, 그 개념의 정의는 명확하며 일관된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 논리에 부합하는 완전한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학과의 이론적 형태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이론이 과학적이려면, 마지막으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그 이론이 보편적으로 유효해야 한다는 것이다.

(24) 과학 이론은 결코 현실 세계의 유일한 진리가 아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주객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창조해 낸다. 동일한 현실이라도 상이한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있다.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론은 현실에 대한 유일한 해석이 아니며, 그것의 정의 역시 보편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범위를 지니며, 그 범위를 넘어서면 타당성을 잃게 된다. 패러다임은 영원할 수 없으며, 변화와 진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26) 역사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 한 새로운 참조 체계는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기 때문에, 총화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어떠한 총화도 최후의 총화일 수 없다.

(31) 문화 정신은 하나의 문화에 담긴 모든 시대, 모든 사상의 총화로서, 그 문화의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한다.

(32) 중국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시대적 차이가 아니라 사상 유파의 차이이다. 중국에서 어떤 특징이 문화적 특징으로 간주되려면, 모든 유파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동일하게 보아야 한다. 서구문화에서 제일 중요한 차이는 중국과는 반대로 시대적 차이이다. 어떤 특징이 문화적 특징으로 간주되려면, 그 특징이 각 시대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중서 비교에서 중국의 경우는 시대적 차이에도 유의하면서 유파의 차이에 더 주목해야 하고, 서구의 경우는 유파의 차이에 유의하면서도 시대적 차이를 더 중시해야 한다.

(33) 결국 중국 문화와 미학의 특징은 주로 유가와 도가의 상호 보완 관계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34) 미학은 인문과학으로서, 일련의 기호 체게이다. 혹은 하나의 문화로서, 인간의 실천적이며 창조적인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더 높은 차원의 융합이란 다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잠시 총결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고금의 심미적 실천에 부합하면서도 인류의 심미적 발전 방향을 대표할 수 있고, 앞으로의 발전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조절하고 부정할 수 있는 일련의 미학 이론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38) “천하 만물은 모두 유에서 생기는데, 유는 무에서 생긴다.” ‘무’는 개별적 개념이 아니라, 도무이기가 일체화된 중국의 정체적 우주관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38) 중국 문화는 도(道)•천(天)•무(無)•이(理)•기(氣)•진여(眞如) 등의 개념을 갖고 있다. 서구 문화는 Being(있음, 존재)•God(신)•idea(이념)•matter(물질)•substance(실체)•logos(로고스) 등의 개념을 갖고 있다. 중국과 서구를 서로의 참조 체계로 삼아 살펴보면, 그중에서도 ‘Being(유)과 무’가 우주관에 대한 중서 문화의 차이를 비교적 잘 보여 준다 하겠다.

(39) 이치로써 그것을 설명하자면 도라 할 수 있고, 숫자로써 그것을 설명하자면 하나라 하겠으며, 몸체로써 설명하자면 무라 할 수 있다. 만물이 열려 통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도이고, 미묘하여 예측할 수 없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신이며, 계기에 따라 변화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역이다. 종합해서 보면, 이 모두는 허무라 하겠다.

(41) 서구의 우주론은 Being에서 substance로 발전하면서 그 특징이 확연해진다. 즉 우주는 실체의 세계라는 것이다.

(42) 서구인이 우주의 본질을 추구할 때 중시하는 것은 유(Being)이고, 허공이 아니라 실체(substance)이다.

(46) 무가 근본이며, 무에서 유로 나아간다.

(46) 서구인들이 문화를 창조하면서 일단 허공에서 실체를 분리하자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기지와 미지의 대립이 생겨났고, 여기에서 객체에 대한 인식이 부단히 심화되어 갔다. 즉 ‘총체’로부터 객체를 부단히 독립시킴으로써 서구인은 결국 총체성의 허황함과 개체의 독특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개체가 문화적 기호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바뀌었든지 간에 결국 서구 문화는 실체의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본 것이며, 언제나 실체의 세계를 그려내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실체와 허공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했다.

(47) 중국의 유무상생론에서 무는 서구인이 이해하듯 실체가 차지하는 위치와 운동 장소로서의 허공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하고 변화하고 창조하는 작용으로 충만한 기를 뜻한다. 허공은 바로 기이다. 형태가 없는 태허가 기의 본체이고,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일시적 변화의 형태일 따름이다. -<정몽태화>에서 중국 문화에서 무로 이해되는 광대 무변한 우주 공간은 가로 가득 차 있다. 기는 떠돌아 흐르다가 만물을 파생시킨다. 기가 모이면 실체가 되고, 실체의 기가 흩어지면 그 사물은 없어져 다시 우주의 기가 된다. 하늘의 일월성신과 땅 위의 산천초목과 금수 등 온갖 만물은 모두 기에서 생겨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천지의 기를 향유하여 태어난다.

(47) 허공은 바로 기이다. (虛空卽氣) 형태가 없는 태허가 기의 본체이고,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일시적 변화의 형태일 따름이다. -《정몽•태화(正蒙•太和)》에서

(48) 기의 세계에서 유와 실체는 기이며, 기의 응집이다. 무 역시 기로서, 유형의 사물의 시작이며 유형의 사물이 죽어 기가 흩어진 후 돌아가는 귀속처이다. 이렇듯 유와 무, 실체와 허공은 기의 두 가지 양상으로 이해되며 확연히 대립되지 않는다. 유무는 상반상생하고 허실도 상반상생한다.

(49) 기의 우주에서 무는 근본이며 항상적인 기이다. “무는 만물을 형성하는 것이 그 임무로, 어디로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한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음양은 이것에 의지하여 변화•생성하고, 만물은 이것에 의지하여 꼴을 이룬다.” 무는 유의 본원이자 유의 귀속처이다. 유(실체)는 일시적이며 유한하다. 유는 본질적으로 무와 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49) 항상 무에서 그 오묘함을 보려하고, 항상 유에서 그 돌아감을 보려 한다. 이 둘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이를 하나로 이름 할 때 현(玄)이라 한다. 현하고 또 현하니 모든 미묘함의 문이다. -<노자>1장에서- “무는 만물을 형성하는 것이 그 임무로, 어디로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한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음양은 이것에 의지하여, 변화 생성하고 만물은 이것에 의지하여 꼴을 이룬다.

(50) 하나는 실체의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기의 우주이다. 하나는 실체와 허공의 대립이고, 다란 하나는 허실의 상생이다. 이것이 중서 문화의 우주 모델에 있어 각 방면의 차이를 양산하는 근본적인 차이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방식이다.

(51) 서구인들이 보기에 세계는 하나의 실체 세계이고, 이 실체 세계를 구체화•정교화한 것이 바로 form이다.

(53)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이 바로 본체라고 생각했다.

(53) 예술가는 돌(질료)에 형식을 부여하여 조각을 창조하고, 건축가는 재료에 형식을 부여하여 사원을 창조하며, 정치가는 도시국가에 법률을 부여하여 국가를 세운다. 그러므로 형식이 바로 본질읻.

(56) 설령 표층과 심층의 관계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더라도, 현대 학자는 여전히 심층으로 표층을 통제하고, 무의식으로 의식을 지배하고, 존재로 존재자를 규정하고자 한다.

(57) 서구 문화의 형식 원칙이 지닌 내적 모순은 역사적 한계, 진리와 완벽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 그리고 과학적 요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57) 형식은 서구 문화에서 근본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실체를 가일층 구체화한 것이자, 과학적 명료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객관 법칙의 표현이자, 인간의 객관 법칙에 대한 인식적 파악이다.

(59) 기의 우주는 정체 공능으로 구체화된다.

(59) 애초에 형식을 운용하려던 서구인의 바람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진리의 추구, 즉 세계를 진실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완전의 추구, 즉 세계의 총체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60) 음과 양이 갈마드는 것을 일러 도라 한다.

(62) 이러한 우주는 소농경제와 통일된 농업 사회에서 생활하고 사유하던 사람들이 사회 형태와 자연 법칙을 서로 참조비교교류하여, 사회 속에 자연을 짜 넣고 자연 속에 사회를 짜 넣어 만들어 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이다.

(64) 중국의 정체 공능은 미지의 부분의 정체 공능, 즉 기를 포함한다. 그 정체성의 현현은 정체적인 기가 각 부분으로 주입된 결과이며, 여기서 각 부분의 실체적 구조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 주입된 실체적 구조 속에 담긴 기이다.

(66) 우주적 차원이란 일종의 초월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속에서 발견하는 부분(예를 들어, 인체의 심장간비장폐신장)들도 실체가 아니라 정체 공능적이다.

(67) 모호함은 정체 공능의 특징이자 정체 공능이 추구하는 바이다. 마음으로 알 수는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정신으로 깨달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형체로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67) 요컨대, 마음으로 알 수는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정신으로 깨달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형체로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74) 매번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때면, 사람들은 이젠 날씨가 맑아지고 태양이 영원히 비추리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 다음은 환상의 소멸이다. “산 내려가기가 쉽다 하지 마오. 이는 나그네가 착각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니, 산들로 둘러싸인 곳에 들어간 것이니,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라.”

(75) 도가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라 했으니, 영원한 도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77) 도의 숭고함. 기의 우주는 미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끝내 궁극에 도달 할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우러러볼수록 더 높아지고, 뚫을수록 더 단단해지고, 앞에 있어 쳐다보면 어느덧 뒤에가 있는” 그런 느낌이다. 도는 끝이 업으며, 심원아득하다. 이것이 중국 문화에서 최고의 경지이며, 중국 예술에서 최고의 경지이다. 한편, 기의 우주는 기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인체 자체와 주위 환경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도를 파악할 수 있고,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동경한다. 이러한 믿음은 성인 이미 도를 터득했다는 것으로 구체화되며, 이러한 동경은 성인의 도에 대한 동경으로 구체화된다.

(79)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다. 하지만 책은 말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말에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따로 있다. 말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뜻이다. 뜻은 그것이 따르는 것이 따로 있는데,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장자천도(天道)>에서

(80) 말이라는 것도 뜻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뜻을 얻으면 말은 필요 없게 된다.

(81) 중국인은 인간은 본래 우주(기)에서 근원한 것으로, 우주의 산물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의 비밀과 우주의 비밀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83) “뭇 사물의 큰 윤곽이나 세밀한 지점을 살핌에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내 마음의 전체적인 큰 쓰임이 두루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다.”

(84) 인간과 세계를 중개하는 도구는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개의 층차를 갖는다. 드러난 층차는 언어 기호, 논리 체계, 과학 기술 등이며, 숨겨진 층차는 문화적 우주모델이다. 즉, 중국인의 도구의 표층은 초월하기는 했지만, 그 심층은 초월한 적이 없다. … 그런데 중국인은 표층을 초월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우주의 본심(本心)과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고대 중국인은 문화적 세계를 객관적 세계라고 여겼으며, 문화적인 도를 자연의 도라고 여겼다. 따라서 사람은 당연히 그것과 합일되고, 그것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서구인은 도구를 중시했기 때문에 문화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했다. 반면에 중국인은 줄곧 문화적인 도를 자연의 도라 여기면서, 서양의 대포가 그들의 미몽을 깨뜨리기 전까지 2천 년 동안 그 속에서 즐거워했다.

(87) 사물이나 사상은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이고 언어는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저것이 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손가락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라는 것이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달이므로 달을 보면 손가락의 존재는 잊어야 하듯이, 말은 의미 전달이 목적이므로 의미를 파악하면 말 자체는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배움에 있어서도 스승의 마음을 파악해야지 흔적을 좇아서는 안된다. 사물의 가장 미묘한 부분에 대한 파악은 기호를 넘어선 마음을 통한 깨달음으로만 가능하다.

(87) 언어와 사물, 언어와 사상의 관계에서 사물과 사상이 더 풍부하고 더 근본적인 것이다. …… 고대 중국인의 말을 들어 설명하자면, 사물이나 사상은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이고 언어는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90) 이해득실을 바르게 하고, 천지를 움직이게 하며, 귀신을 감동 시키는 데에는 시가 제일 좋다. 선왕들은 시를 통해 부부간의 관계를 바로잡고, 사람들이 효도하고 공경하게 만들었으며, 인륜을 두텁게 하였고, 교화를 아름답게 하였으며, 풍속을 교정하였다. -<모사서>에서

(94) 서구의 미학 체계는 미적 사물들의 상호 관계를 개괄하고 반영하는 개념 체계이다. 서구 문화의 변화•발전에 따라 미에 대한 인식과 예술도 변화•발전하였다. 미학의 체계도 이와 함께 변화하였다. 이러한 미학 체계의 변화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개념의 변화•확대이고, 둘째는 중심 개념과 기본 개념의 변화이며, 셋째는 개념을 조직•구성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104) 풍격•정신•기질•운취 등에 대한 느낌을 말로 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유사한 것을 통해 묘사한다면 말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그 느낌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108) 생각 저 너머의 미묘한 뜻이나 글을 벗어난 은밀한 정취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어서 붓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 《문심조룡•신사》에서

(110) 유사성에 의거한 경계를 이용하면 사물의 내면 깊은 곳에 도달 할 수 있다. “한 글자도 더하지 않고 풍류를 다 얻는 것이다.” 이는 무엇인가 말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생생한 풍경을 통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는 것이다.

(116) 간결하고 예스러움을 통해 섬세하고 농염한 것을 표현하고, 담박한 것에 자극한 맛을 담아 낸다 .- 소식(蘇軾)의 《서황자사시집후(書黃子思詩集後)》에서

(118) 순수 이론적 차원에서 보면, 화해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뜻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구체적 사물로 표현될 때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다. ‘화해’는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진다는 의미,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을 용납한다는 의미를 포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20) 음악은 가장 신비로운 것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고 마음을 바꿀 수 있다.

(122) 무릇 정치는 음악과 비슷하니, 좋은 음악은 화해로움에서 나오고, 화해로움은 각 악기가 침범하지 않는 안정됨(平)에서 나온다.

(124) 음악시노래음악춤 “다섯 가지 맛이 기를 충실하게 하고, 다섯 가지 색이 마음을 정화시키며, 다섯 가지 소리가 덕을 밝혀 주는” 것이다. 입으로 다섯 가지 받아들이고 귀로 다섯 가지 소리를 듣는데, 이 맛고 소리에서 기가 생겨난다. 기는 입에서 말이 되고 눈에서 밝음이 되는데, 말은 명분을 신실하게 하고 밝음은 행동을 시의 적절하게 한다.

(125) 화해란 국을 끓이는 일과 같다. 국을 끓이기 위해선 물과 불을 준비하고, 육장을 마련하고, 음식의 간을 맞추고 생선과 고기를 삶고 장작으로 불을 때야 하는데, 요리사가 그 국을 화해시키고 고르게 하여 맛을 낸다. (중략) 군가는 그것을 먹고 마음을 가지런히 한다. (중략) 선왕은 다섯 가지 맛과 다섯가지 색을 다스림으로써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정치를 고르게 한다. -<좌전, 소공 20년>에서

(127) “무엇이 가장 지혜로운가? 수이다.”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가? 화해이다.” 미의 본질은 곧 화해이며, 화해는 합리적 혹은 이상적 수량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129) 화해가 충만해야 만물이 생겨난다. 같으면 지속될 수 없다. 서로 이질적인 사물들이 어우러져 평형을 이루는 것을 화해라 한다. 이렇게 하면 만물이 풍부하게 성장할 수 있으니, 만물은 그것에로 귀의하게 된다. 만약 동질적인 사물에다 다시 동질적인 것을 더한다면, 그것을 다 써버리고 난 후엔 이내 버려야만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왕들은 흙에다 쇠, 나무, 물, 불을 섞어 온갖 사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 소리가 단일하다면 들을 만한 것이 없으며, 색이 단일하면 나름의 독특한 문채가 없는 법이며, 맛이 한가지라면 특별한 맛이 없으며, 사물이 단 한가지라면 강구할 가치가 없다. -<국어, 정어>에서

(130) “상반상생(相反相生)” 유와 무가 상생하고 쉬움과 어려움이 서로를 이루며, 장과 단이 서로를 형성하며 높고 낮음이 서로 기울고, 음과 성이 서로 어우러지며, 앞뒤가 서로 따르는 것이다. 즉, 어떤 요소는 그것과 상반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위가 없으면 아래가 없고,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있을 수 없다.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는 것들이 함께 결합되어야만 사물이 존재하고 세계가 존재되는 것이다. “음과 양이 갈마드는 것을 일러 ‘도’라 하는 것이다”

(135) 만물이 함께 자라남에, 나는 만물이 도로 돌아감을 본다. 크면 나아간다. 나아가면 멀리 간다. 멀리 가면 되돌아온다. -《노자》에서

(137) 태극도가 되면 순환적 특징이 완연히 드러난다. 그림에서 음과 양은 각각 절반을 차지한다. 그것을 회전시키면, 한쪽은 소(小)에서 대(大)가 되고 다른 한쪽은 대에서 소가 되며, 이쪽이 줄어들면 저쪽은 늘어나서, 대에서 소에 이르기까지 한쪽은 다른 한쪽이 되는 것이다. 두 음양어의 머리와 꼬리는 서로 맞닿아 있어, 중국 문화에서의 시간적 선이나, 낮밤의 운행, 사계절의 교체처럼 끝없이 순환한다.

(141) 상호 배척하는 것이 결합하고 상이한 음조가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것은 모두 투쟁에 의해서이다.

(145) 중국 그림은 형상의 유사함이 아니라 신기(神氣)를 중시한다. 신(神)과 기(氣)가 바로 개체와 정체가 상통하는 바이다.

(148) 건축의 허는 사람들로 하여금 폐쇄된 원 내에서 자연의 기운, 우주의 차고 비는 것을 체험하고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

(148) 중국의 회화에서 보듯이 빈 공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집안의 허는 서구적 허가 아니라 우주의 영기(靈氣)이다. “텅 비었으니 영기가 왕래할 수 있다.” 건축의 허는 사람들로 하여금 폐쇄된 원 내에서 자연의 기운, 우주의 차고 비는 것을 체험하고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

(151) 인간과 세계의 화해는 인간과 시간이 화해를 이루는 방식에 의해 표현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개인의 소망과 문화적 요구를 결합시키는 사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158) 화해는 문화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극치이며, 비극성은 가장 현실적인 극치이다. 화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꿈과 희망으로 충만하게 한다. 하지만 비극성은 사람들에게 보고 싶지 않는 일을 보여 준다. 그 속에는 냉혹한 사실과 절망적인 고통만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문화에는 화해와 현실적 비극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비극 의식은 성숙한 문화만이 가질 수 있다.

(159) 비극 속의 탄생이라는 단 한 번의 고난을 통해 재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명은 끝없는 도전과 응전의 비극성 속에서 탄생한다. 문명의 성장도 비극적인 도전과 응전에 의한 것이다.

(162) 토마스 딕슨은 “우리가 사고하기를 강요당하면서도 우리의 사고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극의 탄생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166) 순자는 “부드러운 것은 절로 묶음을 부른다”고 했다.

(182) 우리는 중국인의 진퇴양난의 모순 속에서 개인의 욕망을 천치 법칙에 의거한 ‘예’에 복속시킴으로써 분쟁을 없애고 안정 국면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184) 헤겔의 말을 빌면, 자신의 ‘단편적인’생각으로 싸우지만 그 단편성을 끝까지 밀어부치면, 이 좋은 세상에 시체가 쌓이면서 상대방-그가 아무리 정의•합리•선으로 포장하고 있어도–의 단편성도 여지없이 폭로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문제는 쌍방의 단편성을 드러내어 새로운 사고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 중국에서는 개인이 이러한 곤경에 빠질 경우, 자신을 극복하여 예를 수호하고, 예를 통해 감정을 절제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리하여 내면에 비길 데 없는 고통과 슬픔을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은 이러한 슬픔을 견딤으로써 예가 자신의 내면에서 승리를 얻게 하고, 사회에서 예의 신성성이 유지되도록 만든다. …… 이러한 감정이 슬픔으로 변하여 눈물이 될 때, 이는 문화적 예의 완정성과 신성함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185) 부정의 부정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변혁적 서구 문화는 비극 의식의 폭로적 기능을 이용한다. …… 보존적인 중국 문화는 비극 의식으로 곤경을 폭로하면서도 예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198) 그는 스스로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는 바가 없기에 자멸을 부른다.

(199) 진리 추구에서 ‘진리’는 미지로 나아가는 역정으로, 자아 부정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201) 비극의 효과가 공포와 연민이라면 숭고의 효과는 고통과 쾌감이다. 비극이 파멸을 통한 정화를 강조한다면, 숭고는 투쟁을 통한 초월을 강조한다.

(202) 숭고론의 변천은 바로 ‘자극물과 위대한 그 무엇’사이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인류의 진보는 언제나 초월을 동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숭고 현상은 보편 현상이다.

(207) “지나치게 강렬한 빛은 시각적 감각 기관을 정복함으로써 모든 객체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암흑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211) 자연의 미는 그 근거를 우리의 외부에서 찾아야 하지만, 숭고는 반드시 우리 내부와 심적 태도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 심적 태도가 자연의 표상에 숭고성을 끌어넣는 것이다.

(220) 숭고는 ‘위대한 영혼’의 메아리이다.

(223) “큼(大)” 아름답긴 아름답지만 아직 크지는 않다. 충만한 것을 이르러 아름답다 하고, 충만하면서 빛을 발하는 것을 일러 크다 한다.

(226) 브래들리는 “두려움, 미칠 듯한 희열, 경외, 심지어 자기 비하(self-abasement)조차도 숭고가 일으키는 감정에 있다”고 했다. 버크와 칸트가 두려움을 강조하고 롱기노스가 미칠 듯한 희열을, 기독교 정신이 경외를 강조했다면, 중국인은 “자기 비하”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숭고가 더 중시한 것은 자신이 높아지는 순간의 감정-즐거움-이다.

(229) 누대에 올라 우러러 우주의 위대함을 살피고 아래로 만물의 번영을 관찰함으로써 사방을 멀리 조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중국인이 우주와 인생의 숭고함을 느끼게 한 숭고이다.

(236) 중국의 숭고 대상은 성인•영웅•자연의 웅장함이다. 따라서 숭고의 유쾌함은 자신으로 귀의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칸트가 말한 “우리 내부의 전연 다른 종류의 힘이 있어서 자연의 전능한 위력과 가상으로 겨루어 볼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브래들리가 말한 객체에 대한 경외심과 혼재된 “자아 방기나 미칠 듯한 희열, 숭배”를 통한 객체와의 합일도 아니다. 그것은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243) 산 하나를 놓고 ‘정상을 보고 뒤를 보고 멀리 보며’, 우리의 시선은 움직이며 변화한다. 높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깊은 곳에서 다시 가까운 곳으로 왔다가 다시 평원을 거쳐 횡으로 먼 산을 바라보면서, 리듬화된 행위를 이룬다. -춤-

(244) 중국과 서구의 숭고론에는 다음 세 가지 차이가 있다. (1) 인간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게 하는 것, 즉 초월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다르다. 그 대상이 서구의 숭고에서는 적대자〔하느님도 인간을 적대적인 자리(죄인)에 위치시킨다〕이며, 왜소하다는 느낌은 대립 충돌의 방식으로 표출된다. 중국의 숭고에서 초월을 유도하는 대상은 위대한 것이며, 왜소하다는 느낌은 격려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2) 초월의 방향이 다르다. 서구의 초월, 특히 버크와 칸트의 이론에서는 상대방과 본래의 자신을 싸워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초월은 다양하고 비규정적이며, 승리의 다양한 가능성으로 표현된다. 중국의 자아 초월은 격려자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방향은 규정적이며 그 본보기가 잇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식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원죄 의식과 같은 귀의는 아니다. (3) 초월 과정이 다르다. 서구의 숭고는 격렬한 부정의 부정의 과정으로 드러나고, 중국의 숭고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상승으로 표현된다.

(250) 고전적 세계는 통일성의 세계로, 매우 거대하여 그 세계 밖에 다른 세계란 없으며 또 매우 작은 세계에서 그 세계 안에 다른 세계도 없다. 인간과 자아는 그 세계의 구성 성분이며, 소우주인 인간은 대우주와 조화를 이룬다. …… 자아는 항상 결정되어 있으며 수동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파악하거나 인식할 수 없으며, 신체게 종속되거나 혹은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파악할 수 잇다. …… 하지만 현대 문화는 인간의 본질이 결코 고유한 추상물이 아니며 우주가 시공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정적 모델이 아님을 폭로했으며, 신은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 낸 우상임을 폭로했다.

(251) 그 공식으로는 왜 하필 ‘내’가 실연을 당해야 하는지는 해명해 주지 못한다. 게다가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실연을 당한 후에 어떤 법칙이나 이론으로 그것을 설명하거나 혹은 나의 재난이 그 법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고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며, 당시의 독특한 고통이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피해자화-

(252) 신이나 절대 이념, 보편 법칙이 몰락하자, 법칙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독특함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인간은 자유로워진 것이다.

(254) 서구 현대인의 실존주의적 자유는 신이 사라진 자유이며, 법칙을 부정한 자유이고, 필연에서 벗어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와 필연적으로 결합된 것이 부조리 이며, 따라서 자유와 부조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256) 그에 따르면, 의식 자체는 비어 있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허무이다. 의식은 일종의 자발적 활동으로, 의식 활동과 의식 대상은 동시에 출현한다. 의식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특정 사물을 의식함으로써이다. 의식 대상이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허무인 의식이 대상물에 의거하여 특정 사물에 대한 의식으로 되며, 이때 비로소 무는 유가 된다.

(257) 인간은 자아에 집착하여 이방인이 된다.

(262) 심재좌망(心齎坐忘) 좌망은 심재의 외적 체득이다. 즉 “사지와 육신을 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형체를 떠나 앎을 없애는 것”이다. 형체의 존재를 망각하면 일상적인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이 없어지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심재는 좌망의 내적 상태이다. 그것은 내면적인 기(氣)의 흐름에 전념하여, “뜻을 하나로 하여,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마음이 아닌 귀로 듣는 것”이다. 인체의 기는 우주의 기와 상통한다. 바로 기공(氣功)의 상태가 인체의 기가 자연의 기와 교류하는 상태이다. “기는 비어 있어서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는 빈 곳으로 모이니.” 도가에 있어 기공의 경지는 “대도와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의 경지이다.

(263) 이로써 도가는 유가를 구조적으로 ‘보완’하는데 성공하였다. 벼슬길이 순탄하면 유가에 의지하여 일에 힘쓰고, 벼슬길이 순탄치 않으면 도가에 의지하여 세상을 등지고 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유가와 도가가 하나가 되어 중국 문화의 안정성을 보증하게 된 것이다.

(273) ‘밖으로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거리’라 했다. 그대가 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곧 진(眞)이다. 절로 해탈의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285) 중국의 문은 꾸밈으로서, “획을 엇섞어야지 문을 이루는 것”이었으므로 “한 가지 사물은 문을 이루지 못하고, 한 가지 소리를 들을 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서구의 형식은 수이기에, “간단한 곡선 하나의 아름다움, 평면 하나의 아름다움, 혹은 한 가지 색 또는 음의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

(290) 인의 도덕은 기와 하나가 되어야만 감성적 성질을 획득할 수 있고, 그래야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을 얻어 정감의 열기와 미적 정취가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291) 내적인 ‘마음 비우기’-고요히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형(形)과 아(我)를 잊고 도와 하나되는 것-를 하는 한편, 외적인 소요-물(物)에 연연하지 않고 생사를 초탈하여 천과 하나되는 것-를 추구한다.

(294)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와 그림의 외형으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 있다. -<법언문신>

(305) 시 속에는 공백이 가득하다. 하지만 독자는 도식화를 통해 자기의 상상력으로 이 공백을 메움으로써, 도식화를 거쳐 재현된 객체층에 들어갈 수 있다.

(315) 인물품평론 : 심미적 인물 품평에서 중시하는 것은 구체적인 느낌과 ‘몸으로 깨닫기’이다. 사람은 “유일의 본원을 품음으로써 원질을 형성하고, 음양을 부여받음으로써 본성을 이루며, 오행을 체화하여 형체를 이룬”것이니, 애초부터 정체 공능적이다. 그것은 외형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몸으로 느낄 수 있지만 확정적으로 위치 지을 수는 없으며, 마음으로 알 수는 있어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325) “몸과 사물이 접촉하여 경이 생겨나는 것이다.”

(333) 고전주의 미학에서 전형의 3요소-형상(개성), 형식(법칙), 이상(인성 또는 보편성)-는 유형으로 통일되었다.

(333) 낭만주의는 천재를 표방했다. 천재의 특징은 상상이다. 상상은 모방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모방하지 않고 현실을 창조해 낸다.

(336) 특수는 참조 체계 속에 위치하게 되었고, 참조 체계의 변화에 따라 특수의 ‘성격’과 ‘의미’도 변하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특수는 ‘변형’이 되었다.

(347) 유협의 팔체 : 즉, “각자의 마음에 의거하여 창작하니, 그 작품이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서로 다른” 개별 유형들을 하나의 전체적 유형으로 포괄하기 위해서이다.

(351) 공자는 “문이 지나치게 되면 부화해지고, 질이 과하면 조야해진다. 문과 질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지 군자이다”라고 했다. 그에게 수레가 없으면, 이는 질이 지나친 것으로 다소 ‘조야’해질 수 있다.

(355) ‘신’은 유가의 신이며 ‘일’은 도가의 신이다. 유가의 신은 문화의 신으로, “음양을 알 수 없는 신이며”, “신은 형체가 없고 방향이 없는” 법도를 초월한 성질을 지닌다. 하지만 그것은 유가의 신으로서, 법도에서 출발하여, 형에서 신이 되고 법도로 법도를 초월하며, “만물에 상응하여 그 모양을 본뜬 것”에서 시작하여 “구상이 신과 하나 됨”을 거쳐 결국에는 신의 경계에 이르고자 한다.

(372) “그는 모방이 현실을 충실하게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자유롭게 처리하는 것이며, 예술가는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여겼다.”

(373) 모방론의 핵심은 인간과 현실의 관계에 있다. ……(1) 현실 속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모방한다. …… (2) 무수한 일반 사물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종합해 낸다. (3) 성공적으로 자연을 모방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한다.

(376) 마음에 잘 쌓아 두었다가, 한참 익은 후에 그린다.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살피는 방식이란 화가가 많은 경험을 하고 충분히 유람하며 충실히 수양을 쌓아 아름다운 산과 강이 “가슴속에 역력해지면”, 그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그려내는 것이다.

(385) 중국의 우주는 기의 우주이다. 그래서 중국의 시와 회화에서는 산점 투시를 사용한다. 그림의 배경은 대개가 여백이며, 시의 최고 경계 역시 “글의 끝이 저 아득하고도 아득한 곳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387) 중국의 내유는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비운 것’을 전제로 한다.

(389) 노자는 “현묘한 거울의 때를 깨끗하게 닦을 것”을 강조했고, 순자는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에 집중하여 고요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390) “고요하면 뭇 움직임이 확연해지고, 비어 있으면 모든 경을 받아들일 수 있다.”[소식]고 믿었다. 이에 예술가는 내유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잡념 없는 마음이라고 여겼다.

(391) 모방은 보편적 법칙에 의거하지만 상상은 개인의 힘을 신봉하는 것이다. 상상은 천재의 천부적 능력이며, 독창적으로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393) “신은 마음속에 거주하는데, 그 활동 작용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기질이다. 만물은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을 다다르는데, 그것을 주관하는 표현 도구는 언어이다.

(395) 상상은 감각을 가진 사람에겐 누구나 있는 능력이다. 이런 기능은 기억과 관련된다. -볼테르-

(398) 공감의 핵심은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관찰하여 다른 사람의 감정과 동일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에 도달한다.

(399) 누군가를 대신해서 말하려면, 우선 그 사람의 마음을 대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꿈에서 왕래하고 혼이 되어 함께 노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의 처지가 되어 보겠는가? 단정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려면 응당 처지를 바꿔 단정한 생각을 대신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사악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려 해도 응당 정도를 버리고 권모술수를 따름으로써 잠시나마 사악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405) 흥이 일어야지만 경물을 마주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글로 표현될 수 있고, 흥이 일어야지만 경물을 등지고 혼이 되어 노닐 수 있는 것이다.

(409) ‘기흥’이란 예술적 감정이 일어남을 뜻한다. 흥은 일으키는 것이다. -유협 사물과 저복함으로써 정이 일어나는 것, 이를 흥이라 한다. -이중몽

(409) 흥은 창작의 필수이다. 무지렁이 부녀자나 애들, 농사꾼이나 뱃사공도 노래를 한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노래하고 일꾼은 자신의 일을 노래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그것은 흥에 겨워 나온 것들이다. 아무리 많은 글을 읽고 곳곳을 유람한 문인이나 선비라도 뛰어난 글을 쓰려면 흥에 의지해야 한다.

(412) 직관은 외부 사물과 직접적인 대응 관계가 있다. 그것은 창조이며 표현이다. 직관은 경치를 마주하면서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관조하는 가운데 생겨날 수도 있고, 경치를 등진 상태에서 자아 활동을 통해 생겨날 수 있다. 일단 직관이 형성되면 그것이 바로 미이다. 정신 속의 형상이 물질을 매개로 표현되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413) 문장이란 흥이 일어 짓는 것이다. 먼저 기를 움직이는데, 기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마음은 말로 드러나고 귀에 들리며 눈에 보이고 종이에 기록된다.

(415) 중서의 이론을 보면 영감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불규칙적이어서 논리적으로 추출할 수 없다. 영감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이며 예측 불가능하다. 둘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영감은 인간의 의지에 좌우되지도 통제되지도 않는다. 셋째, 초월적이다. 영감 속에서 인간은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거나 평소에 체험하지 못햇던 감정을 체험함으로써 스스로를 초월한다.

(422) (1)마음의 어지러움을 떨쳐 버리고 사고의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하여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가 무르익으면 즉시 붓을 들어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을 펼쳐놓아야 한다. 그러나 원래 의도했던 글의 구상이 막히게 되면 즉시 붓을 놓아 사색을 중단하고는 이리저리 거닐면서 피로를 풀고 담소를 나누며 권태감을 몰아내야 한다. (2) 늘 마음을 여유롭게 하여 자신의 재능이 예리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 실제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정력이 흘러넘치도록 하며, 항상 사고의 칼날을 지금 막 숫돌에 갈아 놓은 것처럼 유지하고 이치에 따르되 조금도 지체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

(429) 그 순간 시인은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사물인지를 모르는” 몰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는 인인 영감에서 작중 인물에 빠져들 때 겪게 되는 첨예한 대립이 없다. 따라서 이때의 “광기”는 탈속적이며, 자연과 하나 되어 도를 깨닫는 “잊음의 경지”로 표현된다. “잊음은 도가 가는 길이다.”

(431) “시를 지을 때는 도망가는 것을 화급히 좇아야 하니, 좋은 경치는 한번 놓치면 영영 그리지 못한다.”

(433) 셸링에 따르면 예술에는 두 가지가 포함된다. 하나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배울 수도 없고, 스스로 터득하는 방법이나 기타의 방법으로도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천부적인 자유로운 은총만이 선험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셸링은 “천재는〔……〕이 두 가지 활동을 능아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술 창조 과정에서 이 두 가지 활동을 통일할 때, 천재는 자아를 초월하는 한편 자아를 상실하기도 한다.

(440) 서구 천재론에 따르면, 시인은 영감 속에서만 천재가 되며 영감이 사라진 후에는 보통 인간일 뿐이다. 영감은 자신을 완전히 초월하게끔 한다. 따라서 영감으로 인해 작품은 인간인 작가를 초월한다. 작품이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 천재론의 특징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예술가는 고상한 인품을 가져야지만 영감을 가질 수 있고 우수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잇다. 서구와 달리 중국에서 작품은 그 작자와 같다. 따라서 중국의 천재론은 사실상 인품론이다.

(442) 글은 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글은 배운다고 능해질 수는 없지만, 기는 길러서 이를 수 있다.

(446) 몸소 겪은 일을 입으로 말해야 한다. 장사꾼은 장사에 관해 말하고 농사꾼은 농사일을 말하니, 뚫을수록 맛이 나고 진정으로 덕을 담은 말이어서, 듣는 사람이 싫증나질 않는다. -이지의 <답경사구>에서

(447) 진짜 속된 것은 술과 안주, 계집의 노래나 먹고 입는 것이 아니라, 주견도 없고 우매하여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그저 대중을 따르는 것이다.
(449) 세상에서 진정으로 문장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애초부터 글에 뜻을 둔 것이 아니었다. 경치만 봐도 감정이 생겨나고 그 눈에 닿는 것마다 탄식을 자아내니, 남의 술잔을 뺏어서 단단히 맺힌 자신의 울분 위에 들이붓고, 맘속의 불평을 호소하며 천년 세월 중에도 불운한 팔자를 느낀다. 발광하며 소릴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니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452) 성인들은 자신의 꿈을 부끄러워하며 남에게 숨기지만, 예술가는 창작을 통해 자신의 꿈을 마음껏 누리며 자책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458) 삶의 풍경 속에서만이 ‘선(禪)’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고, 시는 선과 통하므로 시의 삼매경도 삶 속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언제 깨달음을 얻을 수 잇는가는 영감에 달렸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서적에서 삶으로 바뀌면서, 깨달음은 ‘흥’과 결합하게 된다.

(461)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니, 인간도 크다.” -<노자>

(466) 산수화가 처음 출현했을 때, 종병은 “마음을 맑게 하여 만상을 맛 본다”는 말로 그 심미적 특징을 묘사했다 .최초의 순수 시학의 기반을 다진 종영도 “우러나는 맛”이란 용어로 시의 미적 특징을 표현했다. 이처럼 중국의 심미를 설명하려면 ‘맛’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맛을 몸으로 느끼다’, ‘맛을 즐기다’, ‘맛을 찾다’, ‘맛을 궁구하다’, ‘맛을 음미하다’, ‘맛을 세밀하게 느끼다’, ‘맛을 깊게 느끼다’ 등은 상용어가 되었다.

(481) ‘미’는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쉼 없이 흐르며 자연을 운행하는 천지의 기이다. 전우주의 자연 운행의 견지에서 보면, 문명과 인위적 욕망은 천도에 위배되는 것이다.

(483) “뜻을 하나로 하여,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마음이 아닌 기로 듣는 것이다. 귀는 듣는 것에 그치고, 마음은 부합하는 것에서 그칠 따름이다. 기는 비어 있어서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는 빈 곳으로 보이니, 허가 바로 심재이다.”

(494) 눈으로 응하여 마음으로 깨닫는다. 눈으로 응대하고 마음으로 깨닫게 되면 비로소 자연의 신묘함을 느낄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신묘함을 초월하여 자연의 깊은 이치를 이해하게 된다.

(502) 주체가 직관의 방식으로 사물과 세계를 바라볼 때, 사물과 세계는 순수한 형식•색채•자태로서 주체 앞에 현현한다.

(505) 예민한 눈은 평형을 이루고 있는 그 중심점 위에 충만한, 살아 있는 장력들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줄다리기의 양쪽 힘이 균형을 이루어 정지한 상태와 마찬가지로, 정지된 상태에서도 커다란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512) 유가적인 시인은 감각으로 경치를 돌아보면서 내면으로는 역사를 살핀다. 그들의 우주 의식에는 흥망성쇠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눈 돌리기를 하면서 산수에 자신의 감정을 담고, 망국의 역사와 세상사에 자신의 신세 한탄을 담는다.

(514) 재빨리 시선이 다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돌아오는 순간 “바람이 불어 풀이 누우니 소떼와 양떼가 보인다.” 이때의 ‘순간’은 우주적 의식이 생긴 바로 그 다음 ‘순간’이다. 천인 합일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그 순간’은 눈앞의 사물이 유달리 친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 ‘끝간데까지 이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끝간데까지 가면 새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522) 글을 읽을 때는 다음 여섯 가지를 보아야 한다. 첫째, 작품의 전체적인 체재의 안배를 볼 것, 둘째, 문장이나 말의 배치를 볼 것, 셋째, 작품에서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변화의 추구를 볼 것, 넷째, 표현 수법상의 정아함과 기이함을 볼 것, 다섯째, 소재의 운용을 볼 것, 여섯째, 성률을 볼 것. 이것은 모두 실질적 요소이며, 눈 돌기도 실질을 위주로 한다. ‘보기’, ‘맛보기’, ‘깨닫기’는 중국 미학에서의 감상의 세 단계를 뜻한다. 먼저 위로아래로멀리가까이 보고, 그 다음에 형상과 재질을 봄으로써 의경을 맛보는 것이다. 말을 통해 뜻으로 들어가고 문(文)을 거쳐 정(情)에 이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깨닫기에 이른다. 한참 동안 맛을 즐기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에 이르러, 상 너머의 상경물 너머의 경물맛 너머의 맛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530) ‘물에 뜻을 기탁하는 것’은 물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지 내가 물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물에 뜻을 남기는 것’은 온 마음을 물에 빼앗기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면서도 잘 성명하고 있는 것이 소옹의 ‘물로써 물을 보는 것’이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돌이켜 볼 줄 알기 때문이다. 이른바 돌이켜 본다는 것은 나로써 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나로써 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보는 것이다. 물로써 물을 볼 수 있으니, 그 사이에 어찌 ‘나’가 끼어들 수 있겠는가?

(535)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 거대한 체재를 배우며, 재능이 보통인 사람은 그 아름다운 글귀를 터득하며, 시를 즐겨 읊는 사람은 거기에 묘사된 자연을 기억하고, 학동들은 거기에 담긴 풀 이름만 주워 섬긴다. -《문심조룡•변소 》에서

(536) 최상의 것을 배우려고 하면 그 중간을 얻을 수 있고, 중간 정도의 것을 배우려 하면 최하가 된다.

(539) 감상 과정은 감상자와 작품이 양방향으로 초월하는 과정이다.

(545) 변증법과 음양의 이치야말로 한편에는 발전과 진보라는 선물을 안겨 준 반면, 다른 한편에는 정체와 순환이라는 굴레를 씌운 것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548) 눈이 칼이 되어 내리치면서 진리를 격파하는 그 찰나에 그 공간의 장(場)을 메우고 있는 것이 바로 공능이라면 설명이 될까. 그 찰나의 한(一)의 순간이야말로 오랜 기다림과 고통의 숱한(多) 시간들이 하나로 모여드는, 비록 짧지만 거대한 시간인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헉헉. 이런 복병이.. -_-;
작은 글자와 좁은 줄간격, 여러 생각을 파어나게 하는 관념적인 문체들로 채워진 550 페이지. 관자보다 더 힘든 책이었다.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얻은 소득이 하나 더 있다면 이젠 어느 책을 앞에 놓아도 두렵지 않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첫 눈싸움에서 기가 눌리면 한판 붙기도 전에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았던 것에 반해, 이제는 다짜고짜 선빵부터 날릴 수 있게 된 것. 나중에야 쥐어 터지던 어쩌던 말이다. 고마워요 장파씨, 관자씨. ㅎㅎ

주말에 꿈 프로그램에 다녀오고 나서 급히 읽느라 그 맛을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으나, 사부님이 왜 그날 차안에서 “책을 쓰려면 그 책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라고 말씀하셨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풍부한 인용과 느리지만 힘찬 어조. 빛나는 통찰로 가득한 책을 읽을 시간이 짧아 아쉽다. 연구원 1년이 지나면 다시 자세히 볼 책 중 하나이다.


동서양의 비교 : 두개의 길

이 책은 동서양 미학의 차이를 비교문화적인 시각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서로 견주어 봄으로써 그 차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융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시사하는 책이기도 하다.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입론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동양과 서양의 미학에 대한 관점의 특성을 보여주고 동•서양 문화정신의 차이에 따른 미의식의 차이를 비교해 그 변별점을 드러내고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참조체계의 설명으로 중국과 서양의 비교를 설명한다.
“일찍이 철학가가 말했듯이 사물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는 그것이 무엇을 자신의 참조 체계로 삼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원칙으로 그러한 참조 체계는 무한하며 사물 역시 수많은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가 있다. “
그러한 각각의 다양한 각도로서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는 것 – 이것이 이 책이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틀에 있어서 중국은 무(無)를 바탕으로 삼지만 서구는 유(有)를 바탕으로 삼는다. 이렇게 해서 '기'의 우주와 '실체'의 우주, 다시 말해, 허실의 상생과 허실의 대립으로 세계를 바라보는데 서로 다른 방식이 발생하고 상생의 동양과 대립의 서양이 음양론과 변증법의 역사적 전개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한 동양의 미학과 서구의 미학이 서로 다른길을 걷게 된다고 주장한다.

서구문화는 오늘날의 세계에 무엇을 제공해주었는가? 동아시아는 오늘날의 세계에 무엇을 제공해왔고 또 무엇을 제공해줄 수 있는가? 저자 장파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다. 특히 서구문화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인 변증법과 중국적 사유의 핵심인 음양론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 속에서 동서양 미학의 새로운 통합을 모색하는 대목은 눈여겨볼 만하다.

동양과 서양의 다른 두 길. 그러나 그 교차점은 많이 기술하지 않는다. 독립된 두 길,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두 문화


풍부한 인용

무엇보다도 이 책이 즐겁고 흥미로운 이유는 곳곳에 꾸며둔 아름다운 인용문들 때문이다. 많기도 많거니와, 적합한 내용을 제대로 골라와서 읽는 내내 즐겁다. 필시 저자는 수많은 책들을 탐독하여 정리해두었을 것이다. 가장 가슴을 치고 들어온 두 구절을 아래에 붙여둔다.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다. 하지만 책은 말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말에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따로 있다. 말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뜻이다. 뜻은 그것이 따르는 것이 따로 있는데,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장자천도(天道)>에서

“물로써 물을 보는 것은 성(性)이고, 나로써 물을 보는 것은 정(情)이다. 성은 공정하면서도 밝지만, 정은 편벽되어 어둡다.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정이다. 정에 빠지면 가로막히고, 가로막히면 어두워진다. 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성이다. 성을 찾게 되면 신령해지게 되며, 신령해지면 밝아진다.
- <관물편•외편>에서


몇 가지의 아쉬운 점

* 원제인"中西美學與文化精神"에서 나타나 있듯이 세계문화를 '중서(中西) 간 이항구도' 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물론 장파는 서문에서 “비록 이 책이 중서 비교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였으나” 라고 밝히고 있지만, 책 전반을 흐르는 문체는 동양을 대표하는 문화로서의 중국문화를 이야기하는 듯 하다. 음양론과 변증법으로 중국과 서구의 모든 역사 현상을 다 규정하겠다는 의지의 저편에는 지나치게 문화결정론의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제목도 ‘동양과 서양’이라 대비하고 있다.

* 1~5장은 유사한 개념에 대해서 중국과 서양의 미학개념이 어떻게 다르게 전개되었는지를바라보고 있으며, 6~12장은 대비되는 미학개념들을 몇 개의 범주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챕터(콕 찝기가 어렵다. 사실 다시 보기가 머리 아프다)에서는 모호함을 끝까지 풀어내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을 계속 받았다. 하여, 대단히 논리적으로 단계단계 설명하고는 있으나 읽고 난 후 명쾌함이 떨어진다.


물론 어려운 책이긴 했으나 동서양의 차이에 대한 이해에 덧붙여, 깊은 울림과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두 갈래 길 사이의 ‘자유로운’ 사고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다시 또 책장을 뒤적거릴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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