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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6일 21시 2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Ruth Benedict in 1937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는 1887년 6월 5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바사(Vassar)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09년 졸업했다. 이후 어학 교사 및 시인으로 지내며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한 그녀는 1919년 인류학을 접하게 되고, 2년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의 지도 아래, 공부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학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프란츠 보아스는 '인종, 언어, 문화(Race, Language, and Culture, 1940)'란 인류학 고전의 저자이자, 이후 그가 사망한 1942년까지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와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녀의 '절대적인' 스승이다. 1923년,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북아메리카에서 수호정령의 개념'이란 학위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같은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며 1930년부터 인류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때 그녀의 학생이자 동료인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에는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s, 1934), '종족(Race: Science and Politics,1940),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1946) 등이 있다. 그녀의 학문적 입장은 인류학과 심리학을 결합하여, 인간의 사상, 행동을 의미를 심리학적으로 파악하려는 '문화 양식론'으로 대표되는데, 이는 문화와 인성(culture and personality)에 대한 연구이다. 그녀의 자신의 책 '문화의 패턴'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화도 사람처럼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는 사고와 행위의 유형이다. 각 문화는 특징적인 목적을 가지며, 그 문화에서 이질적인 행위들도 점차 일관성이 있는 형태를 갖추어 가게 된다. 이러한 행위들이 취하게 되는 형태는 그 사회의 정서적이고 지적인 주요 동기들을 이해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녀는 니체의 개념을 빌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기질을 대비시켰고, 이를 사람 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적용시켰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푸에블로족은 아폴로적이며, 콰우키틀족은 디오니소스적이다. 즉, "문화란 관습과 가치들이 지배적인 성격의 유형에 따라 역사적으로 선택된 결과"이며 이는 문화의 '개별성'과 '상대주의'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작 "국화와 칼"은 그녀가 만년에 집필한 책으로 1944년 6월, 미 국무부의 요청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을 연구하고자" 했으며, 놀랍게도 일본을 단 한 차례 방문하지 않고도 그들의 독특한 국민성을 비교적 정확하게 규명해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 책을 쓴 2년 뒤인, 1948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2. 내 가슴에 들어온 글귀

제1장 연구과제-일본
 
(10) 문호가 개방된 이래 75년간 일본인에 대해 씌어진 저작에는 세계 어느 국민에게도 일찍이 쓰인 적이 없을 정도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표현이 연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1) 그렇지만 이러한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13) 모든 통찰이 필요했다.
 
(13) 우리는 일본인의 사상·감정의 습관과 그러한 습관에 배어 있는 문화의 틀型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17) ‘이 그림은 어디가 이상한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을 알 필요가 있는가? 나는 이러한 질문을 되풀이하면서 읽었다.
 
(19) 인류학자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문화와 다른 문화간의 차이성에 익숙해져야 한다.
 
(20) 인류학자는 평범한 사실을 연구할 수 있도록 특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21) 어떤 국민 생활의 사소한 인간적 일상 생활에 주의해야만, 비로소 어떤 미개 부족에도 또 어떤 문명국에도 인간의 행동은 일상 생활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는 인류학자의 전제에 대한 중요한 의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2) 종교적 교리와 경제적 관습과 정치는 결코 명료하게 격리된 작은 연못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것으로 상상되는 그 경계를 넘어서 넘쳐 흘러나간다. 그래서 그 물은 서로 섞여져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모르게 합쳐진다.
 
(23) 20세기의 핸디캡 가운데 하나는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국을 미국인의, 프랑스를 프랑스인의, 러시아를 러시아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여전히 가장 막연하고도 편견에 가득 찬 관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식의 결핍으로 세계 각국은 서로 오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닮은 두 나라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난 경우라도 우리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23) 모든 나라의 문필가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국민이 자기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다른 국민이 사용하는 렌즈와는 다른다.
 
(25) 그들은 차이를 존중한다. 그들의 목표는 차이가 있더라도 안전이 확보되는 세계, 세계 평화를 위협하지 않고도 미국은 철저히 미국답고, 같은 조건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일본은 일본다울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26) 문화의 비교 연구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 양식을 세계에서 유일한 해결법으로 믿고 그것의 방어에만 급급해 하는 한 도저히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생활 양식을 알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문화를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즐겁고도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있다. 그들은 너무 수세적이어서 다른 국민에게 그들 자신의 특수한 해결법을 채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 이외는 다른 방도를 가지지 않는다.
 
(27) 이러한 연구의 목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태도를 기술하는 데에 있다.
 
(29-30) 분명히 전에 나는 서양인의 가정은 일본인의 인생관과는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힌 바 있었으나, 일본인이 사용하는 범주와 상징에 관해 조금만 이해한다면 흔히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의 많은 행동적 모순은 이미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했다.
 
(30) 덕과 악덕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체계는 전혀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아니고 유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제2장 전쟁중의 일본인
 
(32) 미국은 추축국(樞軸國)의 침략 행위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32-33) 반면 일본은 전쟁의 원인을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보았다. 각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 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된다. 일본은 계층 제도(hierarchy)를 수립하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33) 이러한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계층 제도에 대한 신앙과 신뢰이다. 그것은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층제도라는 것으로 일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또 그 제도에 어떠한 장점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35) “일본의 참된 사명은 황도황도를 사해사해에 널리 홍포홍포하고 선양선양하는 데에 있다. 힘의 부족은 우리가 개의할 바가 아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마음쓸 필요가 있는가?”라고 썼던 것이다.
 
(35) 그러나 군함이나 대포는 바로 불멸의 일본 정신에 대한 외면적 표시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무라이의 칼이 마치 용기의 상징이었듯이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40) “기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우연히 부딪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시기를 당해서는 반드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41) 미국인은 생활 양식을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세계에 맞게 조정하다. 그리고는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본인은 오히려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정해진 생활 양식에서만 안심을 얻을 수 있으며, 예견하지 못한 일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44) 일본에서 산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의 천황 숭배는, 나치스 당의 성쇠를 점치는 척도이며 파시즘적 계획의 모든 악과 결부된 하일 히틀러(Heil-Hitler) 숭배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했던 것이다.
 
(50) 천황이 명령하는 한 일본인 ‘죽창을 들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만일 칙명이라면 그들은 조용히 패전과 점령을 감수할 수 있다는 포로들의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우리를 속이기 위한 말은 아니었을까? 혹은 어쩌면 진실일까?
 
(51) 일본군들은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이며, 우리 미국인같이 환자를 충분히 간호하는 것은 전투기의 구명 도구처럼 영웅적 행위를 해치는 것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55) 그렇지만 만일 그것이 밖으로 보이게 되면 큰 죄가 되는 것으로, 미국인이 보초의 권위를 모욕하는 것이 되었다. 공공연히 권위에 도전하면 설명 그것이 단순한 ‘말대꾸’일지라도 심하게 처벌되었다.
 
(57) 그것은 마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새로운 페이지에 씌어진 것과 낡은 페이지에 씌어진 것은 정반대였지만, 그들은 새 페이지에 씌어진 구절을 한결같이 충실하게 실천하였다.
 
(57) 그런데 일본인의 행동은 어떤 하나의 행동 방침에 모든 것을 걸며, 만일 그것이 실패할 경우 다른 방침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59) 계층 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가 관계에 대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64) 일본인 또한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그들의 신념을 표명한 것은 스스로의 사회적 체험에 의해서 그들 속에 깊이 뿌리내린 생활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68) 일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사쓰마 영지에 속하는가, 히젠 영지에 속하는가에 있었다. 어떤 사람의 고삐는 그의 영지에 매여 있었다.
 
(69) “부모에게 의견을 제출하고 싶어하는 자식은, 머리를 기르고 싶어하는 승려와 같다. 그 까닭은?” 이에 대한 답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72) 일본에는 세대와 성별과 연령에서 오는 특권이 이처럼 크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멋대로 하는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받은 인간으로서 행동한다.
 
(80) 상인 계급은 늘 봉건 제도의 파괴자였다.
 
(83)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은 쇼군의 정치 기구, 다이묘의 여러 기관, 사무라이의 봉급 등을 포함한 거의 200만을 웃도는 기생적 상층 계급 전체를 그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였다.
 
(85) 동기의 정당함은 법을 어긴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86) 그들은 처형당한 지도자를 위해 사당을 지어 순교자로서 숭배하기도 했으나 처형 그 자체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계층적 법률의 본질적 요소로서 시인했던 것이다.
 
(89) 아래로는 천민에서 위로는 천황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형태로 실현된 봉건 시대의 일본 계층 제도는 근대 일본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봉건 제도가 법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은 요컨대 겨우 75년전에 불과하다. 그 뿌리 깊은 국민적 습성이 겨우 인간의 일생에 불과한 7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소멸될 수 없는 일이다.
 
(90-91) 사람들은 이 지도를 신뢰하였다. 그리고 그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를 때에만 안전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든가 혹은 그것에 반항하는 대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자신의 용기와 고결함을 드러내었다. 여기에 명기된 범위 안에서는 이미 아는 세계이며, 따라서 일본인의 눈으로 본다면 신뢰할 수 있는 세계였다.
 
(93) 일본에서는 계급간의 사이가 밀접하였다.
 
(94-95) 혁명을 싫어하던 일본이 갑자기 방침을 바꾸어 서양 여러 나라의 모범에 따르기로 하였고, 겨우 그로부터 50년 후에는 서양 여러 나라가 본령으로 하는 분야에서 서양 여러 나라와 경쟁하게 되리라고는 실로 생각조차도 못한 일이었다.
 
 
제4장 메이지유신
 
(99) “이것은 도쿠가와 시대에 이미 분명해진 상업·금융 귀족과 봉건·토지 귀족의 특수한 연합을 마침내 정식으로 체결하는 최종 단계였다.”
 
(101) 그러나 문제의 중요성은 이 정치가들이 어느 계급 출신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유능하면서도 현실주의적일 수가 있었는가에 있다.
 
(101) 이들 지도자들의 장점은 물론 또 그 단점까지도 전통적인 일본인의 성격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이었다. 그 성격은 무엇이었고, 또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109) 국정의 최상층에서는 ‘국민의 여론’에 대한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정부는 단지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국가가 그 권한의 영역을 지방 행정의 범위 내에 침범할 때에도 또한 그 지배권은 황송하게 받아들여진다. 갖가지 국내적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는 미국에서 일반적을 느껴지고 있는 것처럼 불가피한 필요악이 아니다. 일본인의 안목으로 보면 국가는 더없이 존귀한 것이다.
또한 국가는 국민 소망의 ‘알맞은 위치’를 인식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당연히 국민의 여론이 지배해야 하는 영역에서는 설명 그것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일일지라도, 일본 정부는 국민의 비위를 맞추듯이 그 일을 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110) 일본인의 생활 양식은 알맞은 권위를 할당하고 각각의 권위에 알맞은 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웃어른’에게는 서구 문화보다도 더 큰 존경-따라서 더욱 큰 행동의 자유-을 주지만, 웃어른들도 그 지위를 지켜야 한다. ‘모든 것을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
 
(116) 그것은 정책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특권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6-117) 그 후 이러한 산업에 대해 정부는 “조직을 정비하여 당초 계획대로 사업이 신장함에 따라”, 그것을 민간 회사에 불하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산업을 선택된 소수의 자본가, 특히 마쓰이나 미쓰비시 같은 저명한 재벌에게 ‘형편없이 싼값’에 팔아 넘겼다.
 
(117) 일본이 이룩한 것은 실수와 헛된 소모를 최소한도로 줄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119) 미국에서 누보리슈란 엄밀하게는 ‘새로 온 사람들(newcomers)’이란 뜻이다. 누보리슈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세련되지 못하고 또 알맞은 품위를 익힐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 측면은 그들이 통나무집에서 출세한 인간이며, 노새를 몰던 신세에서 몇백만 달러의 유전 경영자가 되었다는, 우리 마음을 감동케 하는 긍정적 측면에 의해 상쇄된다.
 
(121) 그들은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도덕 체계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치리지 못하였다. …… 그것은 틀림없는 일본만의 산물인 것이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 체계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앞서 먼저 그 도덕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제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124) 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체에 대해서 인간이 지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더구나 동양인이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나날의 접촉 모두가 현재의 그의 채무를 증대시킨다. 그의 일상적인 의사 결정과 행동은 틀림없이 이 부채로부터 발생된다. 그것은 기본적인 기점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렇게 소중히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혹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단순한 사실까지도 모두 세상의 덕이기 때문이다.
 
(125) 온恩의 여러 가지 용법 전부를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130-131) 일본인은 우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음으로써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137) 아무리 착잡한 감정을 가졌더라도 온진恩人이 실제로 자기 자신인 한, 즉 그 사람이 ‘나의’ 계층적 조직 속에 일정한 위치를 점하는 사람이든지, 혹은 바람 부는 날 모자를 집어 준 경우처럼 나 자신도 아마 그렇게 하였으리라 상상되는 일이든지, 혹은 나를 숭배하는 사람일 경우에 한해서는 일본인은 안심하고 온을 입는다. 그런데 일단 이런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그 온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지워진 부채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 훌륭한 태도이다.
 
(142)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존중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는 데에는 더없이 타고난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제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144) 사람의 채무(온)은 덕행이 아니다. 변제가 덕행인 것이다. 덕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보답 행위에 몸을 바칠 때 시작된다.
 
(147) 일본인은 양에서나 기한에서나 무제한적인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과 똑같이 갚고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익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義務’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148) 런은 충송의 기초가 되는 조건이다. 천자의 제위를 유지하는 것도 관료가 관직을 유지할 수 잇는 것도, 런을 베푸는 데서 비롯된다. 중국인의 윤리는 모든 인간 관계에 이 런이라는 시금석을 둔다.
 
(155) 그녀들은 만년이 되어 이른바 쌓이고 쌓인 원한을 자신의 며느리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156) 천황은 일체의 세속적 고려에서 떠난 신성한 수장이어야 했다. 일본인 최고의 덕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주忠는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선량한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받들어야 한다.
 
(159) 일본은 유사 이래 서른 여섯이나 되는 왕조가 교체된 중국과는 달랐다. 일본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 변천을 거쳐 왔지만 그 어떤 변혁에서도 결코 사회 조직이 지리멸렬하게 파괴된 일이 없이 항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져 왔던 나라였다.
 
(160-161) 주는 신하와 천황의 관계에 이중적 체계를 부여한다. 신하는 위를 향해서는 중간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천황을 우러러본다. 그는 그의 행동에 의해 직접 개인적으로 ‘폐하의 마음을 편안케’ 해 드리는 데 신명을 바친다. 그러나 신하가 천황의 명령을 받을 때는 그 명령은 그와 천황 사이에 개재하는 여러 중간자의 손을 거쳐서 중계된 것을 귀에 담는다.
 
(163) 아침에는 소총을 겨누면서 착륙했지만, 점심때는 총을 치워 버렸고, 저녁때는 이미 장신구를 사러 외출할 정도였다.
 
(164) 그러나 일본은 서구가 아니다. 일본은 서구 여러 나라의 최후 방법인 혁명을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또한 적국의 점령군에게 불복종 사보타주를 하지 않았다. 일본은 일본 고유의 강점, 즉 아직 전투력이 분쇄되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항복을 수락한다는 막대한 대가를 주로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능력을 사용하였다. …… 즉,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복의 명령이긴 했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
 
 
제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166) 기리는 ‘올바른 도리, 사람이 좇아야만 할 길, 세상에 대한 변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하는 일’로 되어 있다.
 
(166-167) 그러나 ‘기리를 갚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 많다. 채무자로서의 여러 가지 곤란은 기리의 세계에 있어 극한에 달한다.
 
(167) 기무는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172) 이처럼 기리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전혀 혐오의 정에 더럽혀지지 않았던 시대의 옛 이야기는, 현대 일본이 꿈꾸는 황금 시대의 백일몽이다.
 
(175)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 기리를 갚을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파산하였다고 여긴다.
 
(175) 그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방심하지 말고 걸어다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6) 가능하면 언제나 노력이든 물건이든 서로간에 주고받은 복잡한 관계를 기입한 기록이 만들어진다.
 
 
제8장 오명을 씻는다
 
(179) 이름名에 대한 기리義理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180) 타인의 호의에 반응하는 경우와 타인의 경멸이나 악의에 반발하는 경우의 행동이 왜 하나의 덕으로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적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181)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185) 그러나 우리는 다른 규정에 의거해서 똑갗은 결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는 공장 주인의 아이는 전기 열차 세트를 가지며, 소작농의 아이는 수수깡으로 만든 인형으로 만족하는 것을 비판 없이 승인하고 있다. 우리는 수입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185) “진정한 존엄성이란 항상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자기에게 알맞은 지위를 차지한다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왕이나 백성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188) 본심은 그가 알고 있는 체하기보다는 정직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189) 일본의 어린이는 경쟁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청년이나 성인인 경우에는 경쟁자가 있으면 작업 능률이 뚝 떨어진다.
 
(190)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에 전념하는 대신에 그들의 주의력을 자신과 공격자의 관계에 빼앗기는 것이다.
 
(197) 살인자-그는 타인의 육체를 살해한 인간이다. 조소자-그는 타인의 혼과 마음을 살해한 인간이다.
혼이나 마음은 육체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 따라서 조소는 가장 큰 죄이다. 실제로 그 선교사 부부는 나의 혼과 마음을 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 대단한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왜 ‘너 따위가’라고 말하는가?”라고 외쳤다.
 
(199) 일본인은 사람이란 스스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모욕받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당사자로부터 나오는 것’뿐이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하거나 행하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윤리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201) 일본의 충성에 관한 서양인의 논의가 대부분 공론임은, 기리가 단순히 충성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배반을 명령하는 덕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그들은 “매를 맞은 사람은 모반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욕을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202)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204)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208) 그들은 국가주의적 목표를 세우고 공격을 내면으로부터 다시 밖으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외국에 대한 전체주의적 침략 속에서 그들은 다시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불쾌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속에 새로이 큰 힘을 느꼈다.
 
(210) 그 필연적 귀결로서 대부분의 일본인은 무엇이든 당신이 하는 대로 내맡기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목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엇을 하더라도 안 될 테니 잠시 걸음을 멈추어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제일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다. 무기력은 확산되어 간다.
 
(21) 일본인의 영원 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214) 달과 같이 기리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215-216) 일본인은 자신이 속해 잇는 세계에서 존경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보답이 된다. 그래서 ‘기리를 모르는 인간’은 아직도 ‘비열한 놈’이 된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추방된다.
 
 
제9장 인정의 세계
 
(218)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나서 쾌락의 맛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223) 일본인의 생각에 따르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단식하는 것은 얼마나 ‘단련’이 잘 되어 있는가를 아는 특히 뛰어난 감별법이다. 따뜻함을 멀리하고 수면을 줄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식 또한 고난을 참고,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먹지 않았으면서도) 이쑤시개를 입에 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기회이다.
 
(231)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인은 이 신조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는 결론으로까지 가져간다.
 
(232) 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싸우는 선의 충동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화한’ 영혼(니기타마)과 ‘거친’ 영혼(아라타마)으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이 지옥으로, 다른 한쪽이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 된다.
 
 
제10장 덕의 딜레마
 
(239) 그들은 인생이 ‘주의 세계’, ‘고의 세계’, ‘기리의 세계’, ‘진의 세계’, ‘인정의 세계’, 그 밖의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240) 사람은 ‘고를 위해’ 행동할 때와, ‘단순한 기리를 위해’, 혹은 ‘진의 세계에서’ 행동할 때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 서구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 행동한다. 또한 각각의 세계에서 법도는 그 ‘세계’ 속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서, 현저히 다른 행동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으로서 요구되도록 정해져 있다.
 
(242) 그런데 일본인의 생활에서는 모순–우리에게는 모순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이 그들의 인생관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치 우리의 획일성이 우리의 인생관에 뿌리 박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43) 각자의 영혼은 원래는 새 칼과 마찬가지로 덕으로 빛난다. 다만, 그것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슨다. 그들이 곧잘 말하는 ‘자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것이다.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하더라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 번 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52) 즉, 로닌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생명을 끊음으로써, 기리와 기무의 쌍방에 대한 최고의 채무를 지불하였다.
 
(252) “그들은 기리를 위해 아내를 버리고, 자식과 헤어지고, 부모를 잃었다(죽였다).”
 
(254) 그는 죽음으로써 주와 기리를 둘 다 완수하였다. 죽음에서 양자는 일치한 것이다.
 
(255) 서구인은 우선 대개는 인습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여 행복을 획득하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성격의 강함은 반항함으로써가 아니라 복종함으로써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256) 그들은 주를 지도 위의 단순한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 도덕적 아치의 근본 원리로 삼으려 하였다.
 
(262) 의義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보다도 가볍다는 것을 기억하라.
 
(266) ‘마코토노기리’는 ‘일시적인 기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그것은 ‘영구 불멸의 귀감이 되는 기리’이다.
 
(267) 마코토는 항상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268) 마코토는 일본인의 도덕 법전의 어떤 조항도 고차의 거듭 제곱으로 높인다. 그것은 말하자면 독립한 덕이 아니고 스스로의 교의에 대한 광신자의 열광이다.
 
(268) 그들의 윤리 체계는 마치 브리지의 승부와 같은 것이다. 잘하는 경기자란 규칙에 따라 그 규칙의 범위 내에서 경기하는 사람이다.
 
(271) 일본어에서 다른 어느 것보다 강하게 말하는 방법은 “자중에 자중을 거듭한다”는 표현으로, 그것은 무한히 조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코 경솔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노력도 필요 이하의 노력도 소비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273) 오히려 반대로 나쁜 행위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고백은 도리어 스스로 고민을 자초하는 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수치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 신에 대해서조차도 고백한다는 습관은 없다.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은 있으나 속죄 의식은 없다.
 
(274) 일본인은 치욕감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에 따를 수 없는 것, 여러 가지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을 예견할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치욕(하지)이다.
 
 
제11장 자기 수양
 
(281) 그들의 자기 훈련 개념은 능력을 주는 것과 그 이상의 것을 주는 것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이상의 것’을 나는 숙달이라 부르기로 한다.
 
(285) 태어난 그대로의 어린아이는 행복하지만 ‘인생을 맛보는’ 능력을 갖지 않고 있다. 정신적 훈련(혹은 자기 훈련, 슈요)을 쌓아야 비로소 사람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286)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구어 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물론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288)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 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행위는 노력 없이 행해지게 된다. 그것은 ‘일점적’으로 변한다. 행위는 행위자가 마음 속에 그린 형태와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실현된다.
 
(293) 그들은 이 방법에 의하여 ‘육관’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상태에 달한다고 한다. 육관은 마음속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육관은 보통 훈련에 의하여 오관을 지배하게 되는데, 그러나 미각·촉각·시각·후각·청각도 황홀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 각각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
 
(296-297) “선은 사람이 자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광명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선은 이 추구의 방해가 되는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당신 앞의 장애를 모조리 제거하라. (중략) 만일 도중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만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성자를 만나면 성자를 모조리 죽여라. 그것이야말로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앋.”
 
(300-301)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과 고안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보는 나’의 장벽이 제거된다. 전광의 섬광처럼 빨리, 양자-마음과 고안-가 융합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303) 드디어 그들은 막다른 골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기무와 기리의 사이, 기리와 인정의 사이, 정의와 기리의 사이에도 역시 막다른 골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한 갈래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무가’의 경지에 달한다. 그들의 ‘숙달’ 련은 훌륭하게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304) 그들이 습득하는 것은 무한이 아니고, 유한한 미를 명료하게 방해받지 않고 지각하는 것인데, 혹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꼭 알맞은 정도의 노력을 할 수가 있도록, 수단과 목적을 조화시키는 일이다.
 
(306) 죽은 자는 이제 온恩을 갚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따라서 ‘나는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은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을 의미한다.
 
(308) 그는 ‘숙달’의 수행을 쌓아 ‘하지’의 자기 감시를 배제하려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육관’은 장애가 제거된다. 그것을 자의식과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다.
 
 
제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310) 일본의 생활 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과 정반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저변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하여 몇십 년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로 상승하여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거의 마찬가지로 수치나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330) “아이들은 무엇이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 그러나 점점 자람에 따라, 그들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할 수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누구에게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또 자기 자랑도 하지 않게 된다.”
 
(338) 1년이 지나 고참이 된 병사는 지난 1년간의 쌓이고 쌓였던 갖가지 원한을 이번에는 신참병을 괴롭힘으로써 해소하고,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을 만들어 그들을 ‘단련’시킨다.
 
(342) 할머니는 조용히 차분하게, 모든 사람이 할머니의 생각대로 행동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무라거나 반박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솜털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강인한 기대가 항상 그녀의 가족을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350) 아이는 점차로 많은 개인적 만족을 포기할 것을 요구당하는데, 약속되는 보상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요, 벌은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어린아이를 훈련하는 데 대부분의 문화가 의지하는 강제력이긴 하지만, 일본에서는 달리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중요시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이미 부모가 아이를 밖에 내다 버리겠다고 협박했을 때, 아이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배척되는 것은 폭력보다 무서운 것이다.
 
(353-354)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의 행동적 모순은 그들의 어린 시절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덧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그들이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작은 신어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356-357) 스스로를 존중하는(자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진로를 정하며, 세상 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부끄러움(하치)을 알고’ 한없이 신중하고도 훌륭한 인간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가정에, 자기 마을에, 또한 자기 나라에 명예를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여 빚어지는 긴장은 대단히 커서,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이자 세계의 일대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상한 대망으로 나타난다.
 
(357) 우리는 순진하게, 또한 천진난만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일본인을 미치도록 기쁘게 하는 것인가를 상기해야 한다.
 
(360)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대에서 이 덕은 가장 훌륭한 평형의 역할을 한다.
 
(361)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368)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기는 하나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조직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찍이 메이지 시대에 행한 것같이 제도 그 자체에는 조금도 비난을 퍼붓지 않고도 가장 철저한 변혁을 실현할 수가 있었다.
 
(372) 일본인은 어떤 일정한 행동 방침을 취해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하였다고 판단한다. 그의 어떤 행동이 실패로 끝나면 실패한 주장을 버린다. 언제까지나 집요하게 실패로 끝난 주장을 고수하는 성질은 아니다. 일본인은 “배꼽을 깨물어도 아무 소용없다”고 말한다.
 
(374) 그들의 윤리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모든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하며, 어떤 과오의 당연한 결과에 의해 그 행위의 잘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384)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해설 ; 죄의 문화와 수치 문화 – 이광규
 
(388) 사람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합리적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민족이 뛰어나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등의 평가는 무용지물이다. 인류학에서는 모든 사람의 가치가 똑같다. 다만 각기 태어난 장소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여러 조건을 가장 합리적, 경제적, 논리적으로 영위하고 있고 그것을 문화라고 한다.
 
(396)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396) 일본 사람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앞에 내세우는 얼굴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398) 혹자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1대1로 있으면 한국인이 훨씬 우세하지만 집단으로 있을 때는 그 반대이다”라는 말을 한다.
 
(399) 일본은 거기서부터 우리와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일본보다 백년 늦게 같은 유신이라는 말을 썼지만 우리의 토착 신앙을 다 때려부수었고, 한문권에서 이탈하고, 차의 세계에서 이탈한다.
 
(400) 베네딕트는 이것을 기초로 서양 문화는 길트 문화라고 하고 일본, 동양은 셰임 문화라고 했다.
서양 사람들에게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양심’이다. ……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행동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이목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한 나라의 문화를 틀(形)에 가두어 밝혀낼 수 있는 것일까? 무형의 문화를 유형의 글 속에 담아내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이런 노력은 분석하고 규정하려 하는 서양적 사고의 일면일지도 모르고, 또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의 틀을 밝혀내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한다. 왜냐면 알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면 오해하기 때문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렇게 말한다.

"20세기의 핸디캡 가운데 하나는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국을 미국인의, 프랑스를 프랑스인의, 러시아를 러시아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여전히 가장 막연하고도 편견에 가득 찬 관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식의 결핍으로 세계 각국은 서로 오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닮은 두 나라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난 경우라도 우리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p. 23)

또한 사부님의 말씀처럼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남의 뒤를 따르기만 하는 추종자는 영원히 리더가 될 수 없다.

"추종을 통해서는 리더의 자리로 진입할 수 없다. 어떤 리더도 다른 사람을 닮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모방은 리더의 속성이 아니다. 닮으려는 자, 그가 바로 추종자인 것이다. 스스로 역할 모델이 되는 것만이 리더십을 쥐고 지속적인 성장으로 가는 길이다." (코리아니티, p. 11)

이를 위해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와 다른 이들과의 차이를 밝혀내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차별화의 원천은 바로 우리 내면 속에, 문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루스 베네딕트처럼 다양한 1, 2차 자료와 심층 인터뷰를 통해 드러낼 것인가? 마가렛 미드처럼 다른 삶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클로테르 라파이유처럼 인간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문화 코드를 연구함으로써 밝혀낼 것인가? 아니면 장파와 사부님처럼 서로 다른 문화의 공통점과 차이를 비쳐봄으로써 저절로 형상이 떠오르게 할 것인가?

아직 가장 좋은 길을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거울을 갖는 것이다. 여러 책과 자신의 경험과 수많은 문화의 스펙트럼을 통해 다양한 삶과 문화의 방식을 이해하고 살펴보는 일,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론을 찾아내는 일, 아마 그것이 자신의 길을 찾는, 또 우리의 길을 찾는 현재에서의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잠시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동아시아의 문화가 마치 일본 고유의 문화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기도 하고, 잠깐씩 미국 중심적인 사고가 노출되는 약점이 보이기도 하지만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인 것처럼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를 통해 일본인의 양면성을 드러낸 점이 좋았다. 또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 것"이 일본 전체 체계를 관통하는 핵심임을 파악해낸 것 또한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차이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앞으로 더 고민해 볼 문제이지만, 일본 문화의 특수성은 농경 문화라는 '성을 쌓고 편을 가르는" 농경 문화와 그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섬'이란 지리적 여건이 결합되어 나타난 그 무엇인 듯 하다. 마이크로하고 세밀한 문화의 한 정점... 그래서 아름답지만, 어딘가 숨막힐 듯 위태로운...

끝으로 김훈의 '칼의 노래'에 일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대목이 있어 조금 길지만 인용하며 이 리뷰를 마칠까 한다. 두 개의 대목을 끌어왔는데 하나는 적의 칼을 살피는 부분이고, 또 하나는 적과의 전쟁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나는 그 칼이 뿜어내는 적의의 근원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적의 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선명하게 드러난 운명이었다. 적의 칼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칼날의 아래 쪽에 글자가 몇 자 새겨져 있었다. 죽은 적 척후장의 검명(劒銘)인 모양이었다. 나는 칼을 눈앞으로 바싹 당겨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

나는 또 다른 칼을 빼보았다. 오래 쓴 칼이었다. 피고랑에 녹이 슬어 있었따. 그 칼에도 검명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녹슨 글자들을 꼼꼼이 들여다보았다.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

내 젊은 적들은 찌르고 베는 시심의 문장가들이었다. 내 젊은 적들의 문장은 칼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적들 수만 명이 경상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내가 죽인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이 날려도 나는 이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

또 하나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적은 죽음을 가벼이 여겼고 삶을 가벼이 여겼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적은 죽일 수 있었고 삶을 가벼이 여기는 적도 죽일 수 있었다. 적은 한사코 달려들었다. 적은 늘 뱃전을 건너와 맞붙잡고 칼을 찌르기를 도모했다. (…) 적은 무수한 병졸들의 개인의 몸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그때, 적은 눈보라처럼 몰아쳐왔다. 적은 휘날렸고 나부꼈으며 적은 작렬했다. 달려들 때, 적이 죽기를 원하는지 살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적 앞에서 나는 물러섰고 우회했고 분산했다.
적의 살기가 제풀에 흩어질 때 나는 함대를 집중했다. 적이 항로를 오인해서 긴 물목으로 들어설 때 나는 집중했다. (…)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살기들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달려드는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이었다. 달려드는 적 앞에서 나의 함대는 수없이 진을 바꾸어가며 펼치고 오므렸고 모이고 흩어졌다. 대장선이 후미에 있을 때 이물 너머로 바라보면 함대는 적과 마주잡고 쉴새없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무도자처럼 보였다."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약 400년 전의 이순신 장군도 이렇게 적들을 연구했으리라. 직접 부딪히면서, 적들의 유품을 보며 그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깨달았으리라.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님을… 또한 "눈보라처럼" 달려드는 적들을 이기기 위해선 고착되지 않고, "쉴새없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무도자"가 되어야 함을….

아마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 또한 그 끊임없는 전환의 춤사위 속에 있으리라.
IP *.249.191.10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12.15 08:39:09 *.72.153.12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시심을 품은 적들이라.....흠. 일본의 한면을 보게 되었네.

그런데, 너 어느 출판사 누가 번역한 책 읽었냐? 번역이 매끄럽다.
인용 옮겨 쓸 때, 서술어의 어미를 바꾼게 아니고 그대로 옮긴 거라면 번역이 괜찮았나보다.
프로필 이미지
도윤
2007.12.16 21:35:02 *.60.237.51
급히 쓴 리뷰라... 다시 읽어보니 조금 부끄럽네^^;; 내가 읽은 책은 을유문화사 제4판, 역자는 김윤식과 오인석. 읽기에 별 다른 어려움은 없었던 듯.

이 책을 읽다 '너무 지나치면 부족한만 못하다'는 말이 잠시 떠올랐다. 너무 아름다우면 질리게 되고, 너무 세밀하면 숨이 막히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섬세한 듯 하지만 엉성하니 대충대충일 때가 많은데.. 그게 단점인 듯 하지만 또 어찌보면 장점이 될 것도 같고..

그럼 두서없는 댓글은 여기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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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2.17 08:33:46 *.180.48.238
나는 을유문화사 3판 번역자도 똑 같다. 이런, 이런.

컬쳐코드 맨 앞장에 '국화와 칼'의 한구절이 나오는 데, 그 구절 읽는 느낌이 다르더라. 국화와 칼에서 볼 때와 컬쳐코드에서 볼 때 느낌이 다른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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