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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4일 10시 39분 등록

지난 11월 4일 오전 김포공항 입국장.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영화 ‘히어로’ 홍보차 방한(訪韓)한 일본 배우 기무라 다쿠야(34)를 보려고 새벽부터 팬들이 몰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한때 한류로 들떠있던 지금의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광경이다. 일본에서 ‘욘사마 열풍’이 식어 가는 사이, 한국에서 일류(日流)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몇몇 스타에 의해 후끈 달아올랐다가 꺼지곤 하는 한류와 달리, 일류는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서서히 가열해 오다 꽃을 피우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같은 동양권에 있는 두 나라이지만 너무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근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다.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보았기에 부족하지만 오히려 객관적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이중성이라는 이름하에 평화와 전쟁을 대변하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으로 설명하였다. 이 책이 써진 지는 1946년도 꽤 오래되었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윤택해졌다고 하더라도 일본 국민의 유전자에 박혀있는 근원적인 모습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해설자도 밝혔듯이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번 이상을 읽어야 한다. 처음에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두 번째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가까우면서도 멀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본을 좀 더 아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저자에 대하여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6.5~1948.9.17)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09년 바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다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하였다. 1919년 인류학을 접하고 2년후 다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절대적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었다. 현지를 답사하며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30년부터 모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학문적 입장은 인간의 사상·행동의 의미를 심리학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으로서 O.슈펭글러나 W.딜타이의 문화유형학과 게슈탈트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문화양식론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입장은 문화와 퍼스낼리티 연구나 국민성 연구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주요저서로 《문화의 패턴 Patterns of Culture》(1934) 《종족-과학과 정치성 Race:Science and Politics》(1940)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등이 있다.

만년의 명작인 이 <국화와 칼>은 1944년 6월 미 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인데, 저자 자신은 일본을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학(Anthropology)’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인류학은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행동과학(behavior science)이라고 하겠다. ‘어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사람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주어진 환경을 합리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그 결과의 축적물이 바로 문화이다.

인류학자 중에 유명한 두 여성학자가 있다고 한다. 그중 한 사람이 루스 베네딕트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충분히 느끼겠지만, 대단히 여성적인 기질을 갖추고 있다.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이만한 결과물을 이끌어 낸 정도이다. 또한, 연구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쪽이 더 엄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도 주목받았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들

[9] 일본인은 서양 여러 나라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전시관례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11] 이러한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낱줄과 씨줄이 된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동시에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16] 많은 다른 동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기록해 두는 강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세계 확장 계획은 물론 일상의 사소한 일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일본인들은 놀랄 만큼 솔직했다.

[21] 어떤 국민 생활의 사소한 인간적 일상생활에 주의해야만, 비로소 어떤 미개 부족에도 또 어떤 문명국에도 인간의 행동은 일상생활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는 인류학자의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의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행위나 의견이 아무리 이상한 것일지라도 어떤 인간의 느낌과 사고방식은 그의 경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일본인의 행동에서 무엇인가 당혹감을 느낄수록 그것은 일본인의 생활 속에 그러한 이상함을 생기게 하는 당연한 조건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만일 그러한 조건의 연구가 나를 일상적 교섭의 사소한 일에 끌어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학습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25]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심한다. 그들은 차이를 존중한다. 그들의 목표는 차이가 있더라도 안전이 확보되는 세계, 세계 평화를 위협하지 않고도 미국은 철저히 미국답고, 같은 조건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일본은 일본다울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32]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33] 세계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일정한 위치가 주어져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다.

[34] 일본은 정신력으로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36] 가미카제라는 것은 13세기에 칭기즈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케하여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가리킨다.

[39]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인이 그들의 정신력부족 때문에 전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미국인의 정신력에 졌다고 자인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41] 미국인은 생활양식을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세계에 맞게 조정한다. 그리고는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본인은 오히려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정해진 생활양식에서만 안심을 얻을 수 있으며, 예견하지 못한 일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59] 계층 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80] 상인 계급은 늘 봉건 제도의 파괴자였다. 실업가가 존경받고 번영하게 되면 봉건 제도가 쇠퇴한다.

[90]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보다도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미리 규정되어 있어, 각자의 사회적 지위가 정해진 세계 속에서 생활하도록 조건지워져 왔다.

[92] 서양에서 봉건 제도가 붕괴된 것은 점점 발달하고 우세해진 중산 계급의 압력이 그 원인이었다. 중산 계급이 근대 산업 시대를 지배한 것이다. 일본에는 그러한 강대한 중산 계급은 발생하지 않았다.

[93] 이 두 계급이 제휴한 것은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는 편이 두 계급 모두에게 이로웠기 때문이었다. 서구에도 그러한 제휴가 이루어진 몇몇 특수한 사례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대체로 계급이 철저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프랑스 같은데서는 계급투쟁이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본에서는 계급간의 사이가 밀접하였다.

[103] 윗사람에 대한 전통적 의무, 특히 천황에 대한 전통적 의무는 일본의 큰 장점이다. 일본은 이 ‘웃어른’의 지도하에서 견실히 나아갈 수가 있다. 또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방지할 수 있다고 스펜서는 말하였다.

[104] 일본은 이렇게 하여 중요한 정부의 지위를 어디까지나 ‘각하’들의 수중에 두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결코 그 ‘알맞은 위치’에 자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나라와 정치 체제에 관계없이 위로부터의 권력이 아래로 미치는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지방 자치제의 힘과 마주친다. 나라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민주적 책임이 어느 정도까지 위로 미치고 있는가, 지방 자치 제도의 책임이 얼마만큼인가, 지방적 지도력이 지방 공동체 전체의 요망에 어디까지 부응하고 있는가, 또 지방의 세력가들에게 농락당하여 주민의 불이익을 얼마나 초래했는가 등등의 차이가 있는데 불과하다.

[117] 일본이 이룩한 것은 실수와 헛된 소모를 최소한도로 줄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일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과 그 후 여러 단계의 일반적 순서’를 수정할 수가 있었다.

[120] 일본은 계층 제도 속에 거대한 부가 차지하는 위치를 주어서 그것과 제휴하였다. 그러나 부가 그 영역 밖에서 획득된 경우에는 일본인의 여론은 그것에 통렬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124] 남에게 빚이 있는 인간은 극도로 화를 잘 내는 법인데, 일본인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채무가 일본인에게 갖가지 큰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142]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존중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는 데에는 더없이 타고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150] 일본 현대 영화 가운데 한 어머니가 어느 마을 학교 교사인 결혼한 아들의 돈을 훔치는 장면이 있다. 이 돈은 이 교사가 어린 여학생, 즉 흉년으로 굶어 죽게 된 그녀의 부모가 자기 딸을 사창가에 팔려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금한 돈이었다. 교사의 어머니는 자신이 상당한 요리집을 경영하여 조금도 돈에 궁색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들로부터 이 돈을 훔친다. 아들은 어머니가 돈을 훔친 것을 알지만 자신이 그 책임을 뒤집어쓴다. 그의 아내는 진상을 알고 돈을 잃어버린데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유서를 남기고 어린아이와 함께 자살한다.

[152] 이처럼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이 효행 속에 포함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채무에 대해 자식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보은이다.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개인의 정당한 행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간섭의 사례라고 여겨지고 있다.

[152] 미얀마에서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속담에서, ‘화재, 홍수, 도둑, 관리, 악인’을 열거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지진, 벼락, 오야지’를 들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53]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람이외의 조상에 대한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에게 집중한다.

[162] 미국에서는 그것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태도에 의존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난점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난점은 법규가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도 국민의 승인을 얻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본의 난점은 무엇보다 어떤 사람의 온 생애를 뒤덮을 만한 큰 부채를 지우기는 어렵다는 점에 있다.

[165]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란 기무를 갚아야 하는 것처럼 기리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기리는 기무와는 종류가 다른 일련의 의무이다. 영어에서는 이것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학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별난 도덕적 의무의 범주에서도 가장 드문 것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특히 일본적인 것이다.

[166] 기리는 일본이 중국의 유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닐뿐더러 동양의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 특유의 범주로서 기리를 고려에 넣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 방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67] 기무는 태어나자 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169] 데릴사위가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커서, 일본인의 속담에 “쌀 세 홉만 있으면 데릴 사위가 되지 말자”는 말이 있다. 일본인은 이 거부감을 ‘기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미국에 이런 습관이 있었다면 미국인은 ‘남자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173] 충절은 주군에 대한 기리였고, 모욕에 대한 복수는 자기 명예에 대한 기리였다. 일본에서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방패의 양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에 대한 옛 이야기들은 오늘날 일본인의 재미있는 백일몽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에 와서는 ‘기리를 갚는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정당한 주군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람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77] 일본인은 기리에 관하여 서구의 채무 변제 관례와 비슷한 또 한 가지 관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만일 갚는 일이 기한보다 늦어지면 마치 이자가 느는 것처럼 커진다는 것이다.

[180]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그들은 서구인처럼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한쪽은 침해 행위, 다른 한쪽은 비침해 행위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어떤 행위가 침해로 인정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기리의 세계’밖에서 행해지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사람이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침해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일본인은 모욕이나 비방이나 패배가 보복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말한다. 훌륭한 사람은 세상을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183] “어린 새는 먹이를 찾아 울지만, 사무라이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

[184] 또한 그들은 고통에 져서도 안되었다. 일본인의 태도는, 나폴레옹에게 “다쳤느냐고요? 아닙니다. 폐하, 저는 지금 살해당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한 어느 소년병의 응답과 비슷한 것이었다. 사무라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고통의 표정을 보여서는 안되며,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이것은 1899년에 세상을 떠난 가쓰 백작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어렸을 때 개에게 물려서 불알이 찢어졌다. 그는 사무라이 가문이었으나 집안은 구걸을 할 만큼 아주 가난하였다. 의사가 수술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그의 코앞에 칼을 뽑아들고 “한마디라도 우는 소릴 내면 무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널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186] 중요한 것은 일본이 오늘날 우리의 기초 위에서가 아니라 일본 자신의 기초위에서 자존심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것을 일본의 특유한 방법으로 순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188] 기리의 모든 용법에서 공통적으로 한 인간과 그가 하는 일이 극단적으로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행위 또는 능력에 대한 비판은 자동적으로 그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

[189] 우리는 경쟁을 ‘좋은 일’로 생각하고 크게 의지한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테스트 결과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소년기가 끝난 뒤의 시기에 현저하다. 일본의 어린이는 경쟁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청년이나 성인의 경우에는 경쟁자가 있으면 작업 능률이 뚝 떨어진다. 혼자서 할 때에는 비교적 좋은 진보를 보이고 실수도 적고 속도도 빨랐던 피험자가, 경쟁 상대와 함께 하면 자주 틀리고 속도도 늦어지는 것이다. 반면 그들은 그들의 진보를 그들 자신의 성적과 비교하여 측정할 때에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타인과 비교 측정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191]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는 노력은 일본인의 생활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 미국인은 친구들과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반면, 온에 입각하는 윤리에서는 경쟁을 허용할 여지가 아주 적다. 각 계급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세밀하게 규정한 일본의 계층제도 전체가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있다. 가족 제도 또한 그것을 최소한도로 제한하고 있다.

[191] 어디에든지 나타나는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200] 무수한 사건이나 영웅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47 로닌 이야기>라는 역사물이다.

[202]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204]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여 절망에의 자포자기적인 굴복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209] 맹렬한 노력과 단순한 답보 상태인 무기력 사이를, 기분이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인 것이다.

[210] 일본인의 영원 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은 그 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의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212] 기리는 항상 침략 행위의 행사와 상호 존경 관계의 준수를 동시에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패전에 이르러 일본인은 분명히 자기 자신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한다는 의식을 전혀 지니지 않았고, 전자에서 후자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도 그들의 목표는 여전히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일본은 역사상 여러 가지 경우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여 왔다. 그것은 항상 서구인을 당혹시키는 일이었다.

[214] 이와 같은 상황적인 현실주의는 일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다. 달과 같이 기리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 배척 법안을 만들게 하고, 해군 군축 조약을 크나큰 국가적 치욕으로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그처럼 불행한 전쟁 계획으로 내몰게 한 것은 그 어두운 면이었다. 1945년에 항복의 여러 결과를 호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은 그 밝은 면이다. 일본은 변함없이 일본 특유의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215] 기리는 모든 계급에 공통된 덕이었다. 일본의 다른 모든 위무나 규율과 마찬가지로 기리는 신분이 높아질수록 더욱 무거워지기는 하지만,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 요구된다.

[217]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게 해두어야 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된다.

[231] 완고한 전통적 일본인은 음주와 식사를 엄중히 구별한다.

[231]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232] 온화한 영혼과 거친 영혼으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이 지옥으로, 다른 한쪽이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 된다.

[233] 일본에서는 인간의 성질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의 나쁜 반쪽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창문을 깨끗하게 하고, 경우에 따라 알맞은 행위를 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것이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더러움은 쉽게 제거되며, 인간의 본질인 선이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235] 일본인의 견해를 반영하듯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은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이 극히 드물다. 미국의 일반 관중은 해결을 열망한다. 그들은 극중 인물이 그 후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게 될 것으로 믿고자 한다.

[239] 일본인의 인생관은 그들의 주, 고, 기리, 진, 인정 등의 표현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이다. 그들은 인간의 의무 전체가 마치 지도위의 여러 지역처럼 명확하게 구별된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242] 서구인은 일본인이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도 하나의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가능성은 우리의 경험에는 없다. 그런데 일본인의 생활에서는 모순 - 우리에게는 모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 이 그들의 인생관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치 우리의 획일성이 우리의 인생관에 뿌리박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44] 일본의 참다운 국민적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47 로닌 이야기>이다.

[245] 47명의 로닌은 명성, 아버지, 아내, 누이동생, 정의 등 일체의 것을 기리를 위해 희생시킨다. 그리고 최우에 그들은 자살을 하는 것으로 그들 자신의 생명을 주에 바친다.

[245] 아사노 영주는 바쿠후로부터, 전국의 모든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쇼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관장하는 두 명의 다이묘 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 접대역은 모두 시골 다이묘였다. 따라서, 궁정의 매우 신분이 높은 다이묘인 기라 영주에게 필요한 예법을 지도 받아야 했다. 아사노 영주의 가신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오이시(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가 있었더라면 주군에게 빈틈없이 조언을 했을 것이나 공교롭게도 그는 고향에 가 있었다. 그리고 아사노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융통성이 없어서 지도자에게 바칠 충분한 선물을 생각해 내지 못하였다. 기라의 지도를 받고 있던 또 한 사람의 다이묘의 부하들은 세상살이에 능숙한 사람들로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지도자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냈다. 그래서 기라 영주는 아사노 영주에게 필요한 예법을 잘 가르쳐 주지 않고, 더군다나 고의로 전혀 맞지 않는 복장을 입고 의식에 나오도록 지시하였다.

아사노 영주는 기라 영주가 가르쳐 준 복장을 하고 영예로운 날에 임하였다. 그러나 아사노는 자기가 모욕당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칼을 뽑아 미처 다른 사람이 말리기도 전에 기라의 이마를 베었다. 기라의 모욕에 복수하는 것은 명예를 중시하는 인간으로서 그가 당연히 해야 할 행위(즉 이름에 대한 기리)였으나, 쇼군의 어전에서 칼을 뽑는 것은 주에 반하는 행위였다. 아사노 영주는 이름에 대한 기리라는 점에서는 훌륭한 행동을 한 것이지만, 셋푸쿠의 예법에 따라서 자살하는 것이외에는 주와 화해할 길이 없었다. 그는 그의 집으로 돌아와 셋푸쿠의 차림을 갖추고, 오로지 그의 가장 총명한 그리고 가장 충실한 가신인 오이시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였다. 두 사람이 긴 결별의 시선을 교환한 후 이미 예법에 따라 앉아 있던 아사노 영주는 자기의 배를 칼로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에 반하여 바쿠후의 책망을 받은 고인의 뒤를 상속하려는 친척이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아사노의 번지는 몰수되고 가신은 주인없는 로닌이 되었다.

기리의 의무로 말하면, 아사노 가의 가신은 망군에 대하여 주군과 마찬가지로 셋푸쿠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주군에 대한 기리로 주군이 이름에 대한 기리를 위해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면, 기라가 그들의 주군에 가한 모욕에 대한 항의를 표명한 것이 된다. 그런데 오이시는 마음속으로 셋푸쿠는 그들의 기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가치없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다른 사무라이들이 그의 주군인 아사노 영주를 기라 영주로부터 떼어 놓았기 때문에 다하지 못했던 복수를, 그들이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라 영주를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일을 성취하려 한다면, 아무래도 주를 위반하게 된다. 기라 영주는 바쿠후와 너무나도 긴밀한 관계에 있어, 로닌들이 정부로부터 원수를 갚는 허락을 받아 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에 복수를 계획하는 일단의 사람들은 그 허락 이전에 복수를 끝마친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 계획을 포기하겠다는 최후의 기한을 정해서, 그 계획을 바쿠후에 제출한다. 이 제도 덕택에 운이 좋은 약간의 사람들은 주와 기리를 화해시킬 수가 있었다. 오이시는 그와 그의 동지에게는 이 길이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에 아사노의 가신이었던 로닌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기라를 칠 계획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로닌들의 수는 300명 이상에 달하였는데, 1940년도에 일본 학교에서 가르치던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셋푸쿠하자는 의견에 동의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이시에게는 그 모두가 무한한 기리 - 일본어로 표현하면 마코토노기리(진정한기리) - 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 따라서 그들을 신뢰하고 기라에 대한 보복과 같은 위험한 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시적인 기리밖에 갖지 않은 인간과 진정한 기리를 가진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으로서, 그는 주군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를 내놓아 보았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그들의 가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므로, 그들이 이미 자결에 동의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시험법이었다. 재산 분배의 기준에 관하여 로닌들 사이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우두머리 집사는 가신 중에서 최고의 보수를 받고 있던 사나이였는데, 재산을 종래의 봉록 액수에 따라 분배할 것을 주장하는 일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오이시는 전원에게 균등하게 분배할 것을 주장하는 일파의 지도자였다. 이리하여 로닌 중에 누가 일시적인 기리를 가진 인간인가가 분명히 가려지자 오이시는 우두머리 집사의 재산 분할안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승리를 얻은 패거리가 탈퇴하여 떨어져 나가는 것을 묵인하였다. 우두머리 집사는 도망쳤다. 그 때문에 ‘개 같은 사무라이’, ‘기리를 모르는 인간’, ‘신의도 도리도 모르는 인간’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오이시는 오직 47명만이 그의 복수 계획을 몰래 털어놓을 수 있는 기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오이시와 맺어진 이들 47명의 로닌은 신의, 애정, 기무 등 무릇 그들의 숙원 달성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것을 배제한다는 서약을 하였다. 기리가 그들에게 최고의 법도가 되었다. 47명의 로닌은 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맹세하였다.

그들의 첫 번째 과제는 기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흩어져서 명예라는 것은 일체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가장하였다. 오이시는 가장 저속한 창녀집에 틀어박혀 추악한 싸움질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이와 같은 방종한 생활을 핑계삼아 아내와 헤어졌다. 이것은 법률에 위반하는 행위를 하려는 일본인 누구나가 통상 사용하는, 또한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처자는 그와 더불어 궁극적 행위의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시의 처는 울며 그와 헤어졌지만 그의 아들은 로닌의 무리에 가담하였다.

도쿄(에도)의 모든 사람들은 보복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억측을 하였다. 로닌들을 존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그들이 기라 영주의 살해를 기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47명의 로닌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기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그들의 장인들은 그런 치욕스러운 행동에 분개하여 그들을 집에서 쫓아내 결혼을 취소시켰고, 그들의 친구는 그들을 조소하였다. 어느 날 오이시의 친한 친구가 술에 취해 여자와 희희낙락하고 있는 오이시를 만났다. 그런데 오이시는 이 친구에게조차 주군에 대한 기리를 부정하였다. 그는 “뭐, 원수를 갚는다고? 바보같이, 인생이란 모름지기 재미있게 웃으면서 지내는 것이 제일이야. 술을 마시고 노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어”라고 말하였다. 친구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오이시의 칼을 칼집에서 뽑아 보았다. 아마 오이시의 말과는 달리 잘 닦여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칼은 새빨갛게 녹이 슬어 있었다. 친구는 오이시의 말이 본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길거리에서 술에 만취되어 있는 오이시에게 공공연히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었다.

로닌의 한 사람은 복수에 참가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처를 창녀로 팔아 넘겼다. 이 여자의 오빠 역시 로닌의 한 사람이었으나 복수의 비밀이 누이동생에게 알려졌다는 것을 알고, 충성의 증거를 보여 줌으로써 오이시의 복수 일당에 가담하기 위해서라도 설득하여 자기 칼로 누이동생을 죽이려 하였다. 어떤 로닌은 의부를 죽였다. 또 어떤 로닌은 기라 저택의 내부 정보를 알아내어 적당한 공격 시기를 정하기 위하여 자기 누이동생을 원수인 기라 영주의 심부름꾼 첩으로 들어가 살게 하였다. 그 결과 그녀는 복수가 성공한 후에 자살하였다. 비록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기라 영주를 곁에서 섬긴 과오를 죽음으로 씻어야 했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12월 14일 밤, 기라가 주연을 베풀어 경호하는 사무라이들은 취해 있었다. 로닌들은 방어가 견고한 기라의 저택을 습격하여 호위하는 사무라이들을 베고 곧바로 기라 영주의 침실로 향하였다. 그는 거기 없었으나 침상을 아직 따뜻하였다. 로닌들은 그가 저택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그들은 숯을 저장하는 광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로닌의 한 사람이 광의 벽 밖에서 창을 찔러 넣어 보았으나 도로 빼낸 창 끝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창은 기라의 몸에 박혔으나 창을 도로 빼낸 창 끝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창은 기라의 몸에 박혔으나 창을 도로 빼낼 때 기라는 옷깃으로 피를 닦아 냈던 것이다. 그의 이런 꾀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로닌들은 그를 끌어냈다. 그런데 그는 자기는 기라가 아니고 우두머리 집사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47로닌 중의 한 사람이 아사노 영주가 쇼군의 궁정에서 기라를 칼로 벤 흉터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흉터에 의해 그는 틀림없는 기라로 밝혀졌다. 로닌들은 그 자리에서 그에게 즉시 셋푸쿠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물론 이 사실은 그가 비겁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닌들은 그들의 주군인 아사노 영주가 셋푸쿠할 때 쓴 칼로 그의 목을 치고 격식에 따라 그 목을 씻었다. 이리하여 본래의 소망을 달성한 일행은 대오를 정비하고 두 번 피를 머금은 칼로 절단된 머리를 가지고 아사노의 묘를 향해 출발하였다.
도쿄 시중은 로닌들의 훌륭한 행동을 알고 완전히 열광하였다. 로닌들의 의로운 마음을 의심한 가족이나 의부들은 앞을 다투어 로닌들을 포옹하고 경의를 포하기 위해 찾아왔다. 넓은 영지를 가진 영주들은 연도에서 그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로닌들은 묘 앞에 나아가 목과 절단된 머리를 가지고 아사노의 묘를 향해 출발하였다.
도쿄 시중은 로닌들의 훌륭한 행동을 알고 완전히 열광하였다. 로닌들의 의로운 마음을 의심한 가족이나 의부들은 앞을 다투어 로닌들을 포옹하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찾아왔다. 넓은 영지를 가진 영주들은 연도에서 그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로닌들은 묘 앞에 나아가 목과 칼, 그리고 망군에 대한 봉고문을 바쳤다. 이 봉고문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존령을 뵈옵기 위해 왔습니다. (중략) 우리는 영주님이 이룩하려 하시다가 미처 이루지 못하신 복수를 수행하지 않고는 묘전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일일천추의 마음으로 오늘을 애타게 기다려 왔습니다. (중략) 우리는 지금 묘전에 기라 영주를 모시고 왔습니다. 이 단도는 지난해 애용하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칼입니다만, 지금 돌려 드리겠습니다. 원컨대 이 단도를 쥐고 다시 원적의 목을 쳐서 영원히 유한을 푸십시오. 이상 우리 47인, 삼가 존령께 말씀올립니다.

그들의 기리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제 주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양자를 일치시키는 길은 죽음 외에는 없다. 그들은 미리 신고하지 않고 복수하는 것을 금하는 국법을 어겼다. 그러나 주를 배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사 그것이 어떤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주의 이름 아래 요구되는 사항을 수행해야만 했다. 바쿠후는 47로닌에게 셋푸쿠를 명령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의 국어 독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들은 주군의 원수를 갚았기 때문에, 그 확고한 기리는 영구 불멸의 귀감으로 간주해야 할 일이었다. (중략) 그래서 바쿠후는 숙고 끝에 셋푸쿠를 명하였다. 그것은 바로 일석이조의 방책이었다.

즉, 로닌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생명을 끊음으로써, 기리와 기무의 쌍방에 대한 최고의 채무를 지불하였다.

[255]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성격의 강함은 반항함으로써가 아니라 복종함으로써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255] 결혼 생활이 행복하게 영위되고 있을 때라도 아내는 여러 가지 의무의 세계에서 중심에 놓여지는 일은 없다.

[266]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대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하여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는 열의다.

[267] 마코토는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 인간을 칭찬하는 말로서 끊임없이 사용된다. 이 사실은 일본인의 윤리가 이윤의 추구를 매우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272] 여러 가지 문화의 인류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와, 죄를 기조로 하는 문화를 구별하는 일이다. 도덕의 절대적 기준을 설명하고 양심의 계발을 의지로 삼는 사회는 ‘죄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

[273]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하여 선행을 행하는 데 비해, 참다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하여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278] 그들은 옛날의 생활을 어느 때는 잃어버린 낙원, 어느 때는 ‘질곡’, 어느 때는 ‘감옥’, 또 어느 때는 분재를 심는 ‘조그만 화분’에 빗대어 말한다. 분재로 꾸며진 소나무 뿌리가 화분 속에 갇혀 있는 동안은 아름다운 정원에 미관을 더해 주는 예술품이 된다. 그런데 한번 직접 대지에 옮겨 심어진 분재 소나무는 절대로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다.

[279] 어떤 문화의 자기 훈련은 항상 다른 나라에서 온 관찰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288]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말하자면 일종의 절연벽이 가로막는다. 일본인은 이 장벽을 ‘보는 나’, ‘방해하는 나’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별한 훈련에 의해 이 장벽이 제거되었을 때에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290] 일본은 불교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윤회와 열반사상이 국민의 불교적 신앙의 일부분이 된 일이 없다.

[300] 선의 고안은 12세기 혹은 13세기 이전의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선종과 함께 이 수단들을 채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안은 중국 대륙에서는 없어졌지만 일본에서는 숙달 수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선의 입문서에서는 고안을 매우 중요시하여 다루고 있다. “고안은 인생의 딜레마를 포장하고 있다.”고안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삼키려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302] 고안은 ‘문을 두드리는 벽돌’이라고 불리고 있다. 문은 눈앞에 있는 수단만으로 과연 충분할까하고 지레 걱정을 하고, 자기의 행동을 혹은 칭찬하고 혹은 비난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감시의 눈을 번쩍이고 있다고 망상하는 어리석고 우매한 인간성의 주위에 둘러쳐진 벽에 붙어 있다. 이 벽은 모든 일본인이 대단히 절실하게 느끼는 하지(치육)의 벽이다. 벽돌로 문을 두들겨 부수고 문이 열리자 마자 사람은 자유의 천지로 해방되어 벽돌을 내던져 버린다. 이제 이 이상 고안을 푸는 일은 하지 않는다. 수행은 완료되고 일본인의 덕의 딜레마는 해결된 것이다. 그들은 필사적인 기세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간다. 수행을 쌓기 위해 그들은 철우를 무는 모기가 되었다. 그 결과 드디어 그들은 막다른 골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기무와 기리의 사이, 기리와 인정의 사이, 정의와 기리의 사이에도 역시 막다른 골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한 갈래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무가의 경지에 달한다. 그들의 숙달 훈련은 훌륭하게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303] 반드시 모순 상극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행위자(로서의 나)는 방관자로서의 나의 구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305] 미국인은 ‘보는 나’를 자기 안에 있는 이성적 원리로 간주하고 위기에 임해서도 빈틈없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행동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데 반하여, 일본인은 영혼의 삼매경에 몰입하여 자기 감시가 부과하는 제약을 잊을 때 지금까지 목둘레에 매여 있던 무거운 맷돌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문화는 그들의 영혼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귀가 따갑게 들려준다.

[307] 서구인과 동양인의 심리적 차이를 실로 명료하게 엿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인이 양심을 갖지 않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행에 당연히 수반되는 죄의식을 이미 느끼지 않게 된 인간을 말하는 것인데 비하여, 일본이 동일한 표현(무심, 무념 무상 등)을 사용할 때에는 이미 굳어지지 않고 방해받지 않게 된 인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악인의 뜻이고, 일본에서는 선인, 즉 수행을 쌓은 인간,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312] 뿌리 깊은 연속성의 의식 때문에 완전히 성인이 된 자식이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미국에 비해 훨씬 오래 계속되어도 서구 여러 나라에서와 같이 부끄러운 일, 면목없는 일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314] 일본에서 갓난아이를 사지를 벌린 듯한 자세로 업는 풍습은 태평양 여러 섬, 그 밖의 곳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갓난아이를 숄로 어깨에 걸어 데리고 다니는 풍습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아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데리고 다닌 갓난아이는 일본인이 그렇듯이 자라게 되면 어디에서나 어떤 자세로도 잘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경향이 있다.

[318]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꾸짖을 때 쓰는 ‘위험해’라는 말과 ‘안돼’라는 말 속에는 이와 같은 감정이 들어 있다. 세 번째로 늘 쓰여지는 훈계의 말은 ‘더럽다’는 말이다. 일본의 집은 정연하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어린아이는 그것을 존중하도로 배운다.

[325]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논리는 어른이 된 후에도 일본인의 생활 속에서 크게 존중되는 논리이다.

[327] 사내아이는 큰 대자로 몸을 벌리고 자도 괜찮지만 여자아이는 조심성있고 품위있게 기자처럼 몸을 구부리고 자야 했다. 그것은 ‘자제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339] 일본의 재건 과정에서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청춘시절을 보내는 여러 학교나 군대에서의 학대와 소년들을 괴롭히는 습관에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342] 가정 교육은 습관이지 규칙은 아니다. 유아기에 익히는 젓가락 사용법이나 방에 들어갈 때의 예의 범절도 그렇고, 조금 뒤에 배우게 되는 다도나 안마의 방법도 그렇지만 모든 동작은 글자 그대로 어른의 직접 지도하에 익숙하게 될 때까지 반복 실습을 통해 익혀진다.

[347] 일본인은 서구에서 말하는 ‘순결한 부인’ 또는 ‘음탕한 여자’와 같이 한번 낙인이 찍히면 변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그때 그때의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348] 종래 모든 서구인이 묘사한 일본인의 성격적 모순은 일본인이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것은 일본인의 인생관에 그 어떤 측면도 무시할 수가 없는 이원성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하여 그 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도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때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래에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천국을 가지고 있다.

[352] 미국인은 목적 달성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자유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생활 체험이 다른 일본인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고 여겨 왔다. 그들은 자제에 의하여 자아를 한층 가치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그들 도덕률의 중요한 신조의 하나로 여겼다.

[354] 성격의 이원성은 긴장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 긴장에 대해 일본인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반응을 나타내지만, 사실 그것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졌던 유아기의 경험과 그 후 생활의 안녕을 약속하는 속박을 융화시키는 동일한 중요 문제에 대해, 각자가 제각기 자기 나름으로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356] 스스로를 존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진로를 정하며, 세상 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부끄러움을 알고 한없이 신중하고도 훌륭한 인간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가정에, 자기마을에, 또한 자기 나라에 명예를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여 빚어지는 긴장은 대단히 커서,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이자 세계의 일대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상한 대망으로 나타난다.

[357] 일본인들은 그들의 생활 양식 때문에 값비싼 댓가를 치러왔다. 그들은 미국인이 공기처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단순한 자유를 스스로 거부해왔다.

[359] 돌의 배치는 연못, 건물, 나무들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정해진다.

[360] 카을 찬 인간에게 칼이 녹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 자기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361]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

[376] 러시아에 대한 승리와 필리핀에서의 미국에 대한 승리는 모욕이 개재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일본인 행동의 가장 극단적인 양면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384]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389] 인류학에서는 어느 정도의 문명은 필요하지만 그 문명이 사람을 교활하게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389]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을 깨달은 것이다.

[389] 인간은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시간을, 미래를, 내세를, 종교를, 영혼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399] 예를 들어 일본이나 우리나라에는 동네마다 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었는데 일본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호신이 없었던 면, 군, 읍에까지 새로운 수호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신사를 만들어 정신적인 통일을 했는데 우리는 같은 유신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런 수호신 같은 것들을 미신이라고 다 철거했다. 그러나 일본은 수천년 동안 내려온 토착신앙을 기초로 신토이즘을 만들고, 서양에서 교육제도를 받아들여 교육칙력을 만들었고, 그 교육칙령을 쓴 사람이 <해석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퇴계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바로 메이지유신 시대의 교육헌장이었다. 우리는 그 백년 후에 이퇴계 선생 사상 근처에도 가지 못한 국적 불명의 교육헌장을 만든다.
일본은 거기서부터 우리와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일본보다 백년 늦게 같은 유신이라는 말을 썼지만 우리의 토착 신앙을 다 때려부수었고, 한문권에서 이탈하고, 차의 세계에서 이탈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일본을 방문하지 하지 않고 일본만의 정서를 어떻게 추출하였는지 매우 궁금했다. 이 책을 통해 코리아니티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는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단지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고, 차이를 통한 전체를 통찰해보는 방법을 적용하였다는 개괄적인 이야기만 접하였다.

나는 여기서 일본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보려고 한다. 다른 자료는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이 책에 적혀있는 내용으로만 분석해보려고 한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우리 한국인에게 일본의 국민성을 분석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서양인의 눈으로 동양에 속하는 일본을 분석한 것이기에 서양과 동양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개인 중심의 서양과 관계 중심의 동양 사이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동양인이고 한국인이기에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을 찾아낼 수 있다.

즉, 책 속에 담겨있는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문화에 우리의 눈에 비친 일본의 특수성을 결합하면 일본다운 정서만을 뽑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출발점으로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오랜 기간 동안 되새겨온 이야기 하나를 선정하여 그 속에 담겨있는 정서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였다. 마치 우리나라의 <아리랑>에 해당하는 일본의 이야기를 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채로 걸러서 남는 부분이 일본성이 아닐까 기대해본다. 물론 채가 어떤 채인가가 중요한 부분이 이기도 하고, 남는 부분이 시대가 변하면서 내용이 진부한 것으로 치부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사람의 정서에 뿌리내려 꾸준히 이어져 오는 그 무엇인가는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본인 대다수가 국민적 서사시로 인정하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 역사에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끊임없이 전해져서 활자로 인쇄되고 영화로도 되풀이되어 제작되었다. 바로 <47인의 사무라이>이다. 47인의 묘소에는 예부터 지금까지 명소가 되었고, 참배객도 수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에 일본의 국민정서로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이제야 일류가 주목받는 이유뿐만 아니라 같은 동양권이면서 한국과 다른 정서가 무엇인지를 대략 알 수 있다. <국화와 칼> 속에 적혀있는 줄거리를 여기 적어볼까 한다. 이 이야기 속에 일본인의 모든 정서가 담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용이 길더라도 적는다.

『 아사노 영주는 바쿠후로부터, 전국의 모든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쇼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관장하는 두 명의 다이묘 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 접대역은 모두 시골 다이묘였다. 따라서 궁정의 매우 신분이 높은 다이묘인 기라 영주에게 필요한 예법을 지도 받아야 했다. 아사노 영주의 가신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오이시(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가 있었더라면 주군에게 빈틈없이 조언을 했을 것이나 공교롭게도 그는 고향에 가 있었다. 그리고 아사노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융통성이 없어서 지도자에게 바칠 충분한 선물을 생각해 내지 못하였다. 기라의 지도를 받고 있던 또 한 사람의 다이묘의 부하들은 세상살이에 능숙한 사람들로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지도자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냈다. 그래서 기라 영주는 아사노 영주에게 필요한 예법을 잘 가르쳐 주지 않고, 더군다나 고의로 전혀 맞지 않는 복장을 입고 의식에 나오도록 지시하였다.

아사노 영주는 기라 영주가 가르쳐 준 복장을 하고 영예로운 날에 임하였다. 그러나 아사노는 자기가 모욕당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칼을 뽑아 미처 다른 사람이 말리기도 전에 기라의 이마를 베었다. 기라의 모욕에 복수하는 것은 명예를 중시하는 인간으로서 그가 당연히 해야 할 행위(즉 이름에 대한 기리)였으나, 쇼군의 어전에서 칼을 뽑는 것은 주에 반하는 행위였다. 아사노 영주는 이름에 대한 기리라는 점에서는 훌륭한 행동을 한 것이지만, 셋푸쿠의 예법에 따라서 자살하는 것 이외에는 주와 화해할 길이 없었다. 그는 그의 집으로 돌아와 셋푸쿠의 차림을 갖추고, 오로지 그의 가장 총명한 그리고 가장 충실한 가신인 오이시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였다. 두 사람이 긴 결별의 시선을 교환한 후 이미 예법에 따라 앉아 있던 아사노 영주는 자기의 배를 칼로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에 반하여 바쿠후의 책망을 받은 고인의 뒤를 상속하려는 친척이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아사노의 번지는 몰수되고 가신은 주인없는 로닌이 되었다.

기리의 의무로 말하면, 아사노 가의 가신은 망군에 대하여 주군과 마찬가지로 셋푸쿠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주군에 대한 기리로 주군이 이름에 대한 기리를 위해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면, 기라가 그들의 주군에 가한 모욕에 대한 항의를 표명한 것이 된다. 그런데 오이시는 마음속으로 셋푸쿠는 그들의 기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가치없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다른 사무라이들이 그의 주군인 아사노 영주를 기라 영주로부터 떼어 놓았기 때문에 다하지 못했던 복수를, 그들이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라 영주를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일을 성취하려 한다면, 아무래도 주를 위반하게 된다. 기라 영주는 바쿠후와 너무나도 긴밀한 관계에 있어, 로닌들이 정부로부터 원수를 갚는 허락을 받아 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에 복수를 계획하는 일단의 사람들은 그 허락 이전에 복수를 끝마친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 계획을 포기하겠다는 최후의 기한을 정해서, 그 계획을 바쿠후에 제출한다. 이 제도 덕택에 운이 좋은 약간의 사람들은 주와 기리를 화해시킬 수가 있었다. 오이시는 그와 그의 동지에게는 이 길이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에 아사노의 가신이었던 로닌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기라를 칠 계획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로닌들의 수는 300명 이상에 달하였는데, 1940년도에 일본 학교에서 가르치던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셋푸쿠하자는 의견에 동의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이시에게는 그 모두가 무한한 기리 - 일본어로 표현하면 마코토노기리(진정한기리) - 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 따라서 그들을 신뢰하고 기라에 대한 보복과 같은 위험한 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시적인 기리밖에 갖지 않은 인간과 진정한 기리를 가진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으로서, 그는 주군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를 내놓아 보았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그들의 가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므로, 그들이 이미 자결에 동의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시험법이었다. 재산 분배의 기준에 관하여 로닌들 사이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우두머리 집사는 가신 중에서 최고의 보수를 받고 있던 사나이였는데, 재산을 종래의 봉록 액수에 따라 분배할 것을 주장하는 일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오이시는 전원에게 균등하게 분배할 것을 주장하는 일파의 지도자였다. 이리하여 로닌 중에 누가 일시적인 기리를 가진 인간인가가 분명히 가려지자 오이시는 우두머리 집사의 재산 분할안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승리를 얻은 패거리가 탈퇴하여 떨어져 나가는 것을 묵인하였다. 우두머리 집사는 도망쳤다. 그 때문에 ‘개 같은 사무라이’, ‘기리를 모르는 인간’, ‘신의도 도리도 모르는 인간’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오이시는 오직 47명만이 그의 복수 계획을 몰래 털어놓을 수 있는 기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오이시와 맺어진 이들 47명의 로닌은 신의, 애정, 기무 등 무릇 그들의 숙원 달성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것을 배제한다는 서약을 하였다. 기리가 그들에게 최고의 법도가 되었다. 47명의 로닌은 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맹세하였다.

그들의 첫 번째 과제는 기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흩어져서 명예라는 것은 일체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가장하였다. 오이시는 가장 저속한 창녀집에 틀어박혀 추악한 싸움질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이와 같은 방종한 생활을 핑계삼아 아내와 헤어졌다. 이것은 법률에 위반하는 행위를 하려는 일본인 누구나가 통상 사용하는, 또한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처자는 그와 더불어 궁극적 행위의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시의 처는 울며 그와 헤어졌지만 그의 아들은 로닌의 무리에 가담하였다.

도쿄(에도)의 모든 사람들은 보복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억측을 하였다. 로닌들을 존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그들이 기라 영주의 살해를 기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47명의 로닌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기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그들의 장인들은 그런 치욕스러운 행동에 분개하여 그들을 집에서 쫓아내 결혼을 취소시켰고, 그들의 친구는 그들을 조소하였다. 어느 날 오이시의 친한 친구가 술에 취해 여자와 희희낙락하고 있는 오이시를 만났다. 그런데 오이시는 이 친구에게조차 주군에 대한 기리를 부정하였다. 그는 “뭐, 원수를 갚는다고? 바보같이, 인생이란 모름지기 재미있게 웃으면서 지내는 것이 제일이야. 술을 마시고 노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어”라고 말하였다. 친구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오이시의 칼을 칼집에서 뽑아 보았다. 아마 오이시의 말과는 달리 잘 닦여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칼은 새빨갛게 녹이 슬어 있었다. 친구는 오이시의 말이 본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길거리에서 술에 만취되어 있는 오이시에게 공공연히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었다.

로닌의 한 사람은 복수에 참가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처를 창녀로 팔아 넘겼다. 이 여자의 오빠 역시 로닌의 한 사람이었으나 복수의 비밀이 누이동생에게 알려졌다는 것을 알고, 충성의 증거를 보여 줌으로써 오이시의 복수 일당에 가담하기 위해서라도 설득하여 자기 칼로 누이동생을 죽이려 하였다. 어떤 로닌은 의부를 죽였다. 또 어떤 로닌은 기라 저택의 내부 정보를 알아내어 적당한 공격 시기를 정하기 위하여 자기 누이동생을 원수인 기라 영주의 심부름꾼 첩으로 들어가 살게 하였다. 그 결과 그녀는 복수가 성공한 후에 자살하였다. 비록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기라 영주를 곁에서 섬긴 과오를 죽음으로 씻어야 했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12월 14일 밤, 기라가 주연을 베풀어 경호하는 사무라이들은 취해 있었다. 로닌들은 방어가 견고한 기라의 저택을 습격하여 호위하는 사무라이들을 베고 곧바로 기라 영주의 침실로 향하였다. 그는 거기 없었으나 침상을 아직 따뜻하였다. 로닌들은 그가 저택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그들은 숯을 저장하는 광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로닌의 한 사람이 광의 벽 밖에서 창을 찔러 넣어 보았으나 도로 빼낸 창 끝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창은 기라의 몸에 박혔으나 창을 도로 빼낸 창 끝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창은 기라의 몸에 박혔으나 창을 도로 빼낼 때 기라는 옷깃으로 피를 닦아 냈던 것이다. 그의 이런 꾀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로닌들은 그를 끌어냈다. 그런데 그는 자기는 기라가 아니고 우두머리 집사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47로닌 중의 한 사람이 아사노 영주가 쇼군의 궁정에서 기라를 칼로 벤 흉터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흉터에 의해 그는 틀림없는 기라로 밝혀졌다. 로닌들은 그 자리에서 그에게 즉시 셋푸쿠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물론 이 사실은 그가 비겁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닌들은 그들의 주군인 아사노 영주가 셋푸쿠할 때 쓴 칼로 그의 목을 치고 격식에 따라 그 목을 씻었다. 이리하여 본래의 소망을 달성한 일행은 대오를 정비하고 두 번 피를 머금은 칼로 절단된 머리를 가지고 아사노의 묘를 향해 출발하였다.
도쿄 시중은 로닌들의 훌륭한 행동을 알고 완전히 열광하였다. 로닌들의 의로운 마음을 의심한 가족이나 의부들은 앞을 다투어 로닌들을 포옹하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찾아왔다. 넓은 영지를 가진 영주들은 연도에서 그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로닌들은 묘 앞에 나아가 목과 절단된 머리를 가지고 아사노의 묘를 향해 출발하였다.
도쿄 시중은 로닌들의 훌륭한 행동을 알고 완전히 열광하였다. 로닌들의 의로운 마음을 의심한 가족이나 의부들은 앞을 다투어 로닌들을 포옹하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찾아왔다. 넓은 영지를 가진 영주들은 연도에서 그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로닌들은 묘 앞에 나아가 목과 칼, 그리고 망군에 대한 봉고문을 바쳤다. 이 봉고문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존령을 뵈옵기 위해 왔습니다. (중략) 우리는 영주님이 이룩하려 하시다가 미처 이루지 못하신 복수를 수행하지 않고는 묘전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일일천추의 마음으로 오늘을 애타게 기다려 왔습니다. (중략) 우리는 지금 묘전에 기라 영주를 모시고 왔습니다. 이 단도는 지난해 애용하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칼입니다만, 지금 돌려 드리겠습니다. 원컨대 이 단도를 쥐고 다시 원적의 목을 쳐서 영원히 유한을 푸십시오. 이상 우리 47인, 삼가 존령께 말씀 올립니다.

그들의 기리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제 주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양자를 일치시키는 길은 죽음 외에는 없다. 그들은 미리 신고하지 않고 복수하는 것을 금하는 국법을 어겼다. 그러나 주를 배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사 그것이 어떤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주의 이름 아래 요구되는 사항을 수행해야만 했다. 바쿠후는 47로닌에게 셋푸쿠를 명령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의 국어 독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들은 주군의 원수를 갚았기 때문에, 그 확고한 기리는 영구 불멸의 귀감으로 간주해야 할 일이었다. (중략) 그래서 바쿠후는 숙고 끝에 셋푸쿠를 명하였다. 그것은 바로 일석이조의 방책이었다.』(p 245)

루스 베네딕트가 분석한 일본다운 정서를 위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일본인은 명예를 중시한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사회 속의 관계에서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을 필수 덕목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 명예에 오점이 생긴다면 서슴없이 자살로 이어진다. 서양에서는 자살이 죄악시 되지만 동양에서 특히 일본에서는 명예를 회복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 명예는 계층에 따라 체면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어린 새는 먹이를 찾아 울지만, 사무라이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는 일본 속담이 있다.

둘째, 일본인은 의리를 중시한다. 그 의리 때문에 명예, 의, 심지어 가족까지도 희생시킨다. 일본 속담에 ‘의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 의리로 인해서 빚이 생기고, 이 빚을 꼭 갚아야 하는 은혜로 여긴다.

셋째, 일본인은 성실하다. 달리 말하면, 꾸준히 개선을 추구한다. 혁명이나 혁신보다는 안정 속에 개선을 선호한다. 그래서 카이젠, 장인 등 일본 나름대로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도 한 목표를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같은 동양권이고 바로 이웃하는 나라이면서도 너무도 다른 일본이다. 역사적으로 숙명적인 관계에 있기에 개인적으로도 이 책은 쉽게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고, 더 집중하여 읽었다. 요즈음 한류다 일류다 하여 자기 나라의 시장이 잠식되는 것을 우려하고, 자신의 문화가 퇴색되는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문화의 기원이 어디인가보다는 타 문화를 잘 활용하여 우리 것을 빛내는 것이 더 중요한 점이다.

일본을 가보지 못한 나에게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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