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12월 14일 11시 55분 등록
1장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도는 이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무는 모든 것의 근원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을 때 신비함을 알게 되고,
욕심을 가지면 분명한 것을 보게 된다.
신비함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문이다.


도덕경의 이 첫 번째 장에서 노자는 우리에게 '도란 이름이 있기도(有) 하고 없기도(無) 하다(Tao is both named and nameless)'고 말한다. 서구적인 사고로 볼 때 이 말은 모순적이다.—실제로도 모순적이다. 모순적인 생각은 음(陰)과 양(陽)의 사상이나 여성성(feminine)과 남성성(masculine) 그리고 사물을 '이것'과 '저것'으로 동시에 편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동양적인 사고(concepts)에 뿌리 깊이 박혀있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이렇게 반대되는 개념들을 마치 서로를 부정하고 양립할 수 없는(incompatible)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깊이 배어든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이에 따라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라고 말한다(asking). 도(道)는 모든 것이 비롯되는, 알 수도 없고(unknowable), 볼 수도 없는(unseeable) 영역(realm)인 동시에 도(道)는 모든 것의 내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 이 볼 수 없는 것(신비, myster)을 보고자 할 때, 우리는 형태(form)를 가진 외부 세계(outer world of form, 노자는 이를 만물이라고 불렀다)라는 관점에서 이를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노자는 그 신비함을 보려고 애쓰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또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원하는 것(wanting, 欲)과 원하지 않는 것(allowing, 無欲)이 (마치 연속체의 신비로운 끝처럼)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더 많은 모순적인 생각을 실행(연습)하도록 하는 것이다.

원한다는 것(欲)은 우리가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의 물리적인 표현이다. 즉, 받아들이기 위한 내적인 세계의 준비인 셈이다. 노자에 따르면, 도의 신비함을 알거나 보기를 원하면 다양한 징후를 통해 그 흔적을 보게 되지만 그것이 도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이걸로 끝은 아니다. 이 원함(desiring)의 땅으로부터 신비한 도의 만개는 시작된다. 이것은 마치 원함(wanting)이 힘들이지 않는 허함(allowing)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원함(Desiring)이 흔적을 본 사람들의 것이라면, 원하지 않음(desireless)는 신비함 그 자체를 본 사람들의 것이다.

노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의 세상이 이런 모순적인 절차의 충분한 실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집에서 키운(homegrown) 달콤한 토마토와 봄 수선화를 가꾸고 원하는 것(desiring)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allowing)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제 생활 속에서 '원함'을 포함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그들이 허함(allowing)과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라; 예를 들면, 잠자리에 드는 대신 잠자기를 원하는 것. 살을 빼는 대신 살빼기를 원하는 것. 사랑하는 대신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 도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In this reference to the Tao), 원하지 않는 것(desireless, 無欲)는 신뢰하고(trusting), 허락하고(permitting) 그리고 내버려두는 것(allowing)이다. 원하는 것(desire, 欲)은 원하지 않음(無欲)의 시작이요 토양이고, 또한 원하는 것(wanting, 欲)은 내버려 두는 것(allowing)의 처음이며 토대이다. 그것들은 같기도 하고 또한 다르기도 하다.

원하는 것과 내버려 두는 것 사이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는 시간에 집중하라. 피아노를 치려고 연습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려고 노력하거나 또는 자전거를 타려고 애쓰는 것은 실제로 피아노를 치고, 차를 몰고, 자전거를 타는 것과는 같기도 하고 또한 다르기도 하다. 일단 외부 세계의 활동을 원하고 배우게 되면, 일부러 애쓰지 않고 내버려 두게 되는 시기가 찾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몸 안에서 이 노력함과 내버려둠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후자의 힘들이지 않는 느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연습은 보이지 않는 신비함과 우리 세계의 보이는 현상인 만물(10,000 things)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만물(10,000 things)은 범주가 나뉘어(categorized) 분류되고(classified) 과학적으로 규정된 지구상의 물체들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달하고 확인하는데 유용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술적인 전문지식이나 과학적인 범주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 인간의 눈이나 간과 같은 신체 기관은 물론 밀과 같은 곡식조차도 창조해낼 수 없다. 이러한 것들 하나하나는 (알려진(known) 그리고 규정된(named) 세계를 구성하는 나머지 것들과 함께) 영원한 도, 그 신비로움 속에서 나온다. 세상이 단지 이름으로 규정된 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우리도 (물질적으로) 우리 몸을 구성하는 피부와 뼈 그리고 체액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도 이처럼 말하는 혀와 듣는 귀 그리고 분명한 것과 신비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눈에 보이지 않게 생기를 불어넣는 영원한 도인 셈이다. 의식적으로 이 이름없는 신비를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도를 연습(수련?, practice)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해로울까? 물론 그렇지 않다. 노상 강도를 당하거나 부적절한 대우를 받는 순간에도 그 신비함을 믿어야 한다는 뜻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걸까? 아니다. 이것은 신비로움 속에 머물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여러분을 통해 그 신비로움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신비로움을 펼쳐지도록 내버려둠과 동시에 형태(form) 안에 머무는 모순을 허락하는 것을 뜻한다.

도를 행하라; 신비로움 속에 사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라. 노자가 이 첫 번째 장에서 말한 것처럼 "신비로움(mystery)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문이다."

다음은 이 문장을 21세기에 적용할 수 있는 매일의 습관으로 바꾸기 위한 나의 조언(advice)이다.

항상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세상이 그냥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라. 예를 들면, 모든 것은 신이 주신 순서에 따라 뻗어나갈 것이므로 관계를 그냥 놓아두라.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너무 열심히 노력하지 말아라. (그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라.) 여러분의 친구와 자녀, 부모님 그리고 상사 또는 다른 누구라도 너무 깊이 이해하려 애쓰지 말아라. 도는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기대하던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상황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연습하라(practice). 긴장을 늦추고 보내주어라.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고, 여러분이 그 순간 속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세상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예리한 관찰자가 되라. 판단을 보류하고 더 많이 들어라(judge less and listen more). 매력적인 신비로움과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불확실성에 마음을 여는 시간을 가져라.

이름 짓고(naming) 분류하기(labeling)를 그만두는 연습

이름을 정하는 것(labeling process)은 우리 대부분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다. 우리는 소위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사물을 올바르게 정의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대부분의 교육기관은 모든 것을 구별하고(identify), 특정한 범주에 대한 지식을 가진 졸업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꼬리표를 부여한다. 그러나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직함이나 학위 또는 특유의 이름표가 진정한 우리를 정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이 물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아닌 것처럼 (물은 aqua, Wasser 또는 H2O라는 말로도 정의될 수 없다.) 이 우주의 무엇도 그것에 붙여진 이름과는 다르다. 사물의 범주를 나누기 위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동물, 꽃 광물 그리고 인간은 결코 정확하게 묘사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는 우리에게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항상 나누고 외우는 대신에 보고 느끼는 것의 장엄함(magnificence)을 만끽해야 한다(쬐다, bask).

지금 도를 행하라.(Do the Tao Now)

오늘 하루 중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 혹은 상황과 관련해서 겪고 있는 귀찮고 짜증나는 일에 주목하라. 원함(desire)과 허함(allowing) 사이에서 여러분이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마음으로 그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도를 행하겠다고 (혹은 도를 연습하겠다고) 결심하라. 그 성가신 일이 사라져버리길 바라는 동시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모순을 허락하라.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그것을 찾아보아라.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몸 속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어라.

아무런 편견 없이 마음을 열고,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신비로움과 친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넓게 가져라. 그리고 그 느낌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에 주목하라. 아마도 뱃속을 돌아다니고(loop-de-loops), 골격을 단단하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거나 때론 목을 조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느낌을 여러분 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메신저로 여기고 내버려두어라. 그리고는 판단을 미루고 주의를 기울여라. 그 느낌이 사라지길 바라는 자신의 마음에 주목하라. 그리고 정답게 그 느낌을 살펴보아라. 어떤 느낌이든 간에 그냥 받아들여라. 규정하고, 설명하고 방어하지 말고 내면의 신비로움과 만나라. 처음에는 혼자서 알아내야 하는 미묘한 느낌(차이? Distinction)일 것이다. 여러분 혼자서 만이 신비로움과 함께하는 경험을 위한 (여러분) 존재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You alone can prepare the ground of your being for the experience of living the mystery.)




2장
 
하늘 아래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선한 것이 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만들어내고
어려움은 쉬움 속에서 태어난다.
긴 것은 짧은 것으로 인해 정해지고
높은 것은 낮은 것으로 인해 정해진다.
앞과 뒤는 함께 가게 된다.

그래서 성인은 뚜렷한 이중성과 모순적인 조화에 마음을 열고 산다.
성인은 무위로 행하고 행동으로 가르친다.
소유하지 않고 그것을 기르고
성인은 일을 하지만 그것은 보답을 바래서가 아니고
성인은 경쟁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일은 끝나면 잊혀지고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지속되는 까닭이다.


모순된 조화 속에서 살아가기(Living the Paradoxical Unity)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중성(duality)이나 판단(judgment)을 야기하는 사고 체계(a belief system)에서 비롯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 문화 속에서 아주 일반적이며, 때로는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여러분이 이 도덕경의 2장을 읽으면서 모순된 조화의 의미를 탐험하길 바란다(encourage). 생각을 바꾸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고 진정한 하나됨(oneness, or 완전함)의 환희를 느끼게 된다.

누구나 아름다움이 추함에 반해서 결정되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추함을 낳고, 추함에 대한 생각은 반대로 아름다움을 만든다. 이중적 사고 체계(duality belief system)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개념들이 이처럼 정반대의 것에 따라 결정되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키가 큰 사람이란 그보다 키가 작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존재할 수 없다. 낮은 밤과 대치를 이루고, 여성의 반대편에 남성이 있다.

만약 여러분이 모든 것을 이처럼 서로 반대되는 이중적 구조로 보는 대신에 완전한 하나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바로 노자가 "성인은 뚜렷한 이중성과 모순적인 조화에 마음을 열고 산다."라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결국 반대라는 개념은 물질의 세상(world of 10,000 things)에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Imagine the perfect oneness coexisting in the apparent duality, where opposites are simply judgments made by human minds in the world of 10,000 things.) 수선화는 데이지(장미가 더 어울릴 듯)가 더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and the eagle and the mouse have no sense of the opposites we call life and death. 나무나 꽃 그리고 동물들은 추함이나 아름다움을 따지지 않는다.(모른다.); 그들은 어떠한 심판도 내리지 않은 채 영원한 도와의 조화 속에서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성인은 이중성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어떤 견해를 만드는 대신 그것의 근원을 폭넓게 다룬다(synthesize). 판단하지 않고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노자가 우리에게 이르는 길이다. 그는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서 통합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선물한다. 조화가 궁극적인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이중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The perfection of the Tao is allowing apparent duality while seeing the unity that is reality.) 삶과 죽음은 결국 같은 것이다. 또한 선과 악은 판단의 문제이며 이들은 서로를 (규정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통합된 삶의 모순이며, 이것이 영원한 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일단 이분법의 논리를 넘어서거나 최소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그들은 마치 썰물과 밀물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흐른다.

삶의 매 순간마다 모순 속에 살며 이를 호흡하는 습관을 가져라. 우리의 몸은 물질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거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물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이러한 한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무한하고 형체가 없는 것들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여러분은 세속적인 물질인 동시에 도이기도 한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을 모두 여러분 안에 머무르게 하라. 그 상반된 생각들이 서로를 중화시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품어라. 여러분의 자유의지와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굳게 믿어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러분 내부에 있는 강렬한 에너지에 몸을 맡겨라. 선과 악은 한 곳에서 나온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다시 말해서, 영원한 도의 조화로움과 한결같은 접촉을 유지하는 반면 물질 세계의 이중성을 수용해라. 그러면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게 만들어야 할 필요 같은 것은 없어질 것이다.

노자가 오늘날의 세상을 보았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했을 것이다.

조화로운 삶을 살아라.(live a unified life)

모든 것을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으로 구분 짓는 그릇된 성향을 버리고 조화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놓아라. 아름답다거나 못생겼다는 판단은 물질 세계의 것이지 도의 기준은 아니다. 이중성이라는 것이 결국은 일종의 마인드 게임(mind game)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 보이는 모습 그대로이다. (비판이 항상 필요하거나 유용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펼쳐진 도를 보고, 본 그대로 평화롭게 머물러라. 마땅히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 착한 짐승이 되어 자유롭게 움직여보라. 예를 들면, 한 마디의 수달(수달 대신에 새는 어떨까?)이 되어서 "수달다운" 삶을 사는 여러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여러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아름답거나 못생기지도 않았으며, 부지런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은, 그저 한 마리의 수달일 뿐이다.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자유롭게, 평화롭게 그리고 재미있게 물 속을 헤엄치거나 뭍에 오르는 한 마리의 수달 말이다. 육체를 벗어나야 할 순간이 오면 조화의 순수한 신비 속으로 여러분만의 공간을 찾아 떠나라. 이것이 바로 노자가 "일은 끝나면 잊혀지고,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지속되는 까닭이다"라는 말을 통해 뜻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서, 꼭 죽어야만 영원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 몸 안에 갇힌 채로도 얼마든지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숨어있던 이중성과 판단의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 이들을 그저 완전한 조화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도를 연습(practice)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분법의 논리를 만들어낼 때조차도 항상 조화로움을 간직할 수 있다.

덜 애쓰고 더 많이 성취하라.(Accomplish much by trying less)

노력(effort)은 전체의 한 조각일 뿐이다; 나머지 조각은 바로 노력(노력하지 않음, 무위(無爲), non-effort)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를 한데 녹여서 버무려라.(Fuse these dichotomies) 이것이 바로 (결과에 무엇을 더하지 않는(without attachment to outcome)) 노력이 필요 없는 실행(무위(無爲)의 행(行)))이다. 이것은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You make an attempt, assume a position, listen to the music, and let go all at the same time, allowing yourself to easily move with your partner. 흔히 서로 반대라고 말하는 것들을 판단하거나 두려워하는 대신 조화롭게 하나로 묶어라. (a fine effort와 같은) 분류하고 규정하는 행위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노력한다는 것은 노력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믿음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길에 떨어진 휴지 조각을 주우려고 시도하는 것은 실제로 휴지를 주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단 휴지를 주워 올리면 노력하는 것과 노력하지 않는 것 사이의 관련은 사라진다. '수고(effort)'와 '노력(trying)'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판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음을 이해하라.(그냥 '행동하라'라고 번역해도 될 듯, 근데 너무 'XX하라'가 많아서…) 여러분은 결과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경쟁할 수도 있다.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없애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그들은 하나로 통합시키고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한 입장에서 상대방을 규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도덕경의 제 2장 오늘날의 표현에 맞게 요약한다면, 노자가 '그대로 내버려두어라(Just be)'라고 할 것이다.

지금 도를 행하라.(Do the Tao Now)
IP *.223.85.195

프로필 이미지
종윤
2007.12.14 11:58:32 *.223.85.195
2장의 '지금 도를 행하라.(Do the Tao Now)' 부분은 오후에 짬짬이 올리겠습니다.

진도가 더뎌서 마음이 바쁘긴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점점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생깁니다. 초벌로 빨리 가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계속 생각하고는 있는데... 생각같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계속 노력해야겠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할리보이
2007.12.17 11:08:20 *.133.238.5
번역문 같지 않은 번역문...

원어를 보지않아 단정할 수 없으나,
번역문이라고 하기엔 매우 깔끔하게 잘 씌여진 것 같습니다.

현재 직업이 뭔지는 모르나, 그쪽으로 직업을 삼으셔도 될 듯,,,
프로필 이미지
정양수
2007.12.18 16:51:27 *.83.206.30
잘 읽고 있습니다. 덕분에...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번역002] 제 1장 Living the Mystery [3] [2] 香山 신종윤 2007.12.14 2169
1211 [국화와 칼] 서양과 다른 동양, 한국과 다른 일본 여해 송창용 2007.12.14 7067
1210 (34)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3] 時田 김도윤 2007.12.16 2407
1209 [36]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수정) [1] 한정화 2007.12.14 2233
1208 국화와 칼(菊と刀) / 루스 베네딕트 [3] [2] 香仁 이은남 2007.12.19 2301
1207 [36]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1] 써니 2007.12.12 2349
1206 국화와 칼 - 루스베네딕트 [2] [4] 우제 2007.12.12 2341
1205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file [1] 호정 2007.12.11 4463
1204 (35)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 장파 박승오 2007.12.10 2359
1203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소현 2007.12.10 2319
1202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2] 자로 2007.12.09 6003
1201 아름다운 경영 [8] 한명석 2007.12.09 2314
1200 [독서35]동양과서양,그리고 미학/장파 素田 최영훈 2007.12.07 2718
1199 [35]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장파 校瀞 한정화 2007.12.10 2861
1198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 장파(張法) 香仁 이은남 2007.12.06 4644
1197 [번역001] 서문 - Change Your Thoughts...... [2] 香山 신종윤 2007.12.06 2158
1196 (33)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 장파 file 時田 김도윤 2007.12.06 2651
1195 [35]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장파 써니 2007.12.03 3150
1194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우제 2007.12.04 2564
1193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中西美學與文化精神) / 장파(張法) (1) file [3] 호정 2007.12.03 3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