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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7일 01시 33분 등록
1. 프롤로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이 동북아 삼국은 가까운 지척 거리에 있으면서도 먼 옛날부터 이처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나라도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발전한 무술(武術)은 한국에서는 무예(武藝)가 되었고, 일본에 가서는 무도(武道)가 되었다. 한문을 공통으로 사용했고, 불교와 문화를 서로 공유하였으며 서로 침략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군사력이 아닌 경제전쟁과 영토 분쟁으로 긴장과 열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우연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개인적인 일로 일본을 네 차례나 다녀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충실했던 나에게 일본은 무력을 앞세운 공격적인 나라라는 이미지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자비해지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독립군을 고문하고 정신대, 가미가제 특공대 등 역사책에서 숱하게 보았던 그 단어들의 실체를 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갔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눈을 씹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행 중 가이드의 말로는 군국주의는 일부 몰지각한 군인들의 행동으로 일본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는 대답을 듣고 거대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중 세간에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발간되고 잠시 후에 “일본은 있다” 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없다’라는 시원함과 일본은 ‘없다’라는 애매함, 그 공간속에 갇혀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잊혀지기 무섭게 교과서 왜곡 문제에서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참 어려운 나라였다. 네 번씩이나 방문을 하고도 더욱 더 알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마지막 여행은 운 좋게 꿈 벗 한사람이 살고 있어서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뭔가 명쾌함을 찾으려는 욕심은 아직도 없어지지 있었다. 특히 그들의 경제력, 그리고 잘 운영되는 사회시스템은 참으로 부러운 면이 많았다. 아마 가장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장애인에 대한 그들의 정책이었다. 한참 지하철이나 횡단보도가 장애인들에게 위험하다는 방송이 연일 나오고 있을 때 일본에 갔었다. 동경은 매 노선마다 하루 두세 편씩 장애인 전용버스가 배정되어 있었고, 그 지역에 사는 장애인들에게 공지가 되어 언제든지 이용할 수가 있었다. 장애인들의 도우미 등 우리나라에서는 집행하기 어려운 문제를 일본은 실행하고 있었다.

일본은 없다와 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보면서 그들의 단점이나 약점 비열한 것을 보면서 우리가 좋아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보는 만큼 볼 수 있고,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한순간의 재미를 위해 자기를 파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일본은 있다 하여 우리스스로를 비하한다거나, 우리의 처절했던 역사를 호도한다면 그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라고 한다.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일본의 관점에서 국화와 칼은 좀 더 나은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다. 문화의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일본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조금 더 세분화하고 나누어 볼 수 있게 하였다. 베네딕크가 바라본 대로 일본인은 거대한 모순과 양면성이 있다는 것. 그것이 서양인의 바라보는 획일적 세계관과 공동의 이익을 위한 국가의 탄생과 운영이라는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모순이 있다는 것과 끊임없이 개선해 나간다는 것.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것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2. 작가에 대하여

저자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6.5~1948.9.17)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09년 바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다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하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세상의 주의를 끈 일은 시인으로서였고, 앤 싱글턴 이란 필명을 가졌다. 그녀는 “진실로 중요한 미지의 나라를 발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녀는 이 모험을 러시아어나 프랑스 어를 배워서 “참으로 운문에 정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녀는 미개 문화가 저마다 회화나 문학의 대작에 견줄만한 그 무엇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또한 항아리 가에 새겨넣은 디자인을 시스틴 성당의 천정의 벽화와 비교한다든가 딸기 따는 노래를 셰익스피어와 비교하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의 개인의 예술작품과 미개 문화를 비교해야 할 것이라고 느꼈다. 단일한 예술만을 비교하면 미개 문화는 내놓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미개 문화를 하나의 전체-종교, 신화, 남자와 여자의 일상의 생활방식-로서 받아들일 경우 그 내면에 있는 일관성과 복잡성은 미학적으로 볼 때 다른 어떤 단일한 예술 작품만큼이나 자칭 탐험가를 만족시켜줄 것이다.

1919년 인류학을 접하고 2년후 다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절대적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었다. 보아스 교수는 미국 국적의 인류학자로 미국 인류학의 시조(始祖)라고 일컬어진다. 독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물리학과 지리학을 공부하였다. 1883∼1884년 북극해의 배핀섬 원정에 참가하여, 에스키모 조사를 한 뒤부터 인류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얼마 뒤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되어 인류학을 강의하였으며,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집약적 실지조사를 하여 많은 업적을 올렸다. 역사주의적인 입장을 중시하면서 문화를 통합적 전체로서 고찰하였으며, 문화영역 ·주변영역 ·부족유형등의 개념을 안출하여 뒷날의 기능주의적 연구를 위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기존 인류학이 사회인류학 또는 고고학적인 형질인류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반하여 보아츠 교수는 진화론적 도식을 타파하고, 특수한 문화를 조사하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런 보아즈 교수의 영향으로 베네딕트는 남태평양의 미개한 세 개의 부족을 직접 면담하고 관찰하면서 문화의 패턴이라는 인류학의 명저를 발간하게 된다. 당시 문화라는 말은 인류학를 연구하는 몇 몇 사람에 의하여 불리는 전문적인 용어였다. 「문화의 패턴」에서 베네딕트는 문화가 선진국, 후진국과는 상관없이 인류가 서로 다른 지역과 생활에 따라 발전시켜온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게 되며, 상대적 문화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게 된다. 「문화의 패턴」 서문에서 베네딕트는 이런말을 하였다.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가치는 절대주의자의 철학의 그것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관례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것이며 그러한 견해 안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심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이 비관주의를 야기하는 까닭은 전통적인 공식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지, 그것이 본질적으로 곤란한 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의견이 상식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금세 좋은 생활을 위해서 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보루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신념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또 인류가 생활의 소재로부터 스스로 창조한, 누구에게나 타당한 공존의 생활양식을 희망의 근거와 관용의 새로운 토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뉴욕, 1958년 10월 보아츠 교수의 또 다른 제자이자, 베네딕트와 절친한 친구였던 마가레트 미드는 「문화의 패턴」에서 베네딕트의 신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식은 인간에게 과거에 알려져 있던 것보다 더 큰 인간의 미래에 대한 지배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그녀의 건전한 신념 때문인 것으로 나는 믿는다. 이 신념은 독자에게 하나의 놀라움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그녀의 건전한 신념은 1939년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광기의 인종차별속에서 「인종 : 과학과 정치학」(Race : Science and Politics)의 집필에 쏟았다. 전쟁 중에는 전쟁상태로 인하여 접근이 불가능한 루마니아, 독일, 네덜란드, 타이등의 문화를 연구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일본을 연구하기 위하여 미국내 거주자들의 아이덴디티를 연구하여 문화 분석에 재능을 나타내었다. 이런 배경으로 나온 책이 바로 일본을 연구한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word)이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3. 가슴을 치는 구절

<제1장 연구과제 일본>

(11) 그렇지만 이러함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낱줄과 씨줄이 된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이다. 일본인을 최고도의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15) 나는 사회 과학자들이 구하는 해답의 많은 부분이 일본 문화의 규범과 가치 속에 깊이 배어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탐구하는 편이 한층 더 만족스러운 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6) 일본인들은 그들의 세계 확장 계획은 물론 일상의 사소한 일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일본인들은 놀랄 만큼 솔직했다. 물론 일본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전체모습을 그대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어느 민족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일본에 관해 연구하는 일본인은 그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흔하며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문제를 빠뜨리고 만다. 미국인이 미국에 관해 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들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종족이다.

(29)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하 것은 바로 그들의 견해가 어떠한 가이다. 그들의 견해는 그들의 습속,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비평, 자기나라 역사에 관한 신화, 축제일의 연설들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간접적 표현에 기초를 두고 연구할 수가 있다.


(30) 나는 일본인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처음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어구나 관념들이 이상하게 여겨졌으나 마침내는 중요한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친 감정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과 악덕인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체계는 전혀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아니고 유교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제2장 전쟁 중의 일본>

(32)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33) 그러나 이러한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계층 제도에 대한 신앙과 신뢰이다. 그것은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40)모든 것이 예기되고 모든 것이 충분이 계획된 일이라는 가정에 서야 만 일본인은 일체의 사태는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바란 것이라는 것, 결코 수동적으로 당하고 있지 않다는 그들에게 필수적인 주장을 계속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46) 그들에게 천황은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이다. “천황이 없는 일본이란 진정한 일본이 아니다.” “천황이 없는 일본이란 생각할 수 없다.” “일본 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이며, 국민의 종교 생활의 중심이다. 청환은 초종교적 대상이다.” 설령 일본이 전쟁에 패하였다 하더라도 패전의 책임은 천황에게 없다. “국민은 천황이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패전이 되더라도 책임은 내각과 군 지휘관이 져야 하며,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 “설령 일본이 지더라도 일본인은 열명이면 열명 다 천황을 계속 숭배할 것이다.

(53) 일본인의 병력 소모이론을 가장 극단까지 이르게 한 것은 그들의 무항복주의였다. 서양의 군인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중과부적이란 점을 알면 항복을 한다. 그들은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자기들을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살아있음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명단이 본국으로 통지된다.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국민으로서도 또 그들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도 모욕을 받지 아니한다.

(56) 항복의 치욕은 일본인의 의식 속에 깊이 박혀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전쟁 관례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행동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56) 서구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의 가장 현저한 차이는 일본 병사들이 포로로 연합군에게 협력한 점이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생활규칙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명예를 잃은 자이며, 일본인으로서의 그들의 생명은 끝났던 것이다.

<제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61) 모든 국가가 세계 속에서 각기 알맞은 자기 위치를 갖게 하는 데 대한 일본의 정부의 정책은 불변이다. 일본정부는 현사태의 영구화를 참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각국이 세계 속에서 각기 알맞은 위치를 즐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 정부의 근본적인 정책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66) 그것은 머리를 수그리는 사람이 사실은 자기 뜻대로 처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상대방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권리를 승인하는 것이며, 절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 지위에 당연히 돌아가는 어떤 책임을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성별과 세대의 구별과 장자 상속권에게 입각한 계층 제도가 가정생활의 근간이다.

(70) 알맞은 위치라는 것은 단지 세데 차이만이 아니라 연령의 차이에도 적용되다. 일보인은 극단적인 무질서 혼란 상태를 표현할 때, 어떤 일이 “난형난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고기도 아니고 새도 아니다”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실제 일본인의 사고로는 마치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람은 맏형으로서의 성격을 어디까지나 가져야 하는 것이다.

(72) 일본에는 세대와 성별과 연령에서 오는 특권이 이처럼 크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멋대로 하는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받은 사람들은 멋대로 하는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받은 인간으로서 행동한다.

(73) 일본인은 누구나 우선 가정 내부에서 계층 제도의 습관을 배우고 그것을 경제활동이나 정치 생활 등 넓은 영역에 적용한다. 그가 실제로 집단 속에서 지배력을 가진 인물이든 아니든, 자기보다 위의 ‘분수에 맞는 위치’를 갖는 자에 대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경의를 표하도록 배운다.

(79) 일본의 봉건사회는 복잡한 계층으로 나눠지고, 각자의 신분은 세습적으로 정해졌다. 도쿠가와는 이 제도를 고정시켜 카스타마다의 일상 행동을 세밀히 규정하였다. 각 가정의 가장은 문 앞에 그의 계급적 지위와 세습적 신분에 관한 소정의 사실을 게시해야 했다. 입을 수 있는 의복, 사먹을 수 있는 음식, 생활할 수 있는 집의 종류도 그 사람의 세습적 신분에 따라 규정되었다. 황실과 궁정 귀족 밑에 신분 순으로 무사, 농민, 상인의 네 가지가 일본의 카스트였다.

(82) 사무라이와 다른 세 계급, 즉 농, 공, 상인과의 사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 세 계급은 ‘서민’이였지만, 사무라이는 그렇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그들의 특권으로서, 또 그 카스타의 표시로서 허리에 찬 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는 도쿠가와 시대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서민에 대해 칼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법령이 “사무라이에 대해 무례하게 군다든가, 그들의 상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서민은 즉석에서 참해도 좋다.” 고 규정한 것은 이전부터의 관습에 법적 효력을 부여한 것에 지니지 않는다.

(88) 실상 일본인이 천황에 대해 품고 있는 관념은 태평양 여러 섬에서 종종 목격되는 관념과 같은 것이다. 그는 어떤 경우에는 정치에 관여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관여하지 않는 신성 수장이다. 태평양 어느 섬에서는 그는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며, 어느 섬에서는 그 권력을 타인에게 위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항시 신성한 존재였다.

(93) 일본이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보다도 더 많은 계급간의 이동을 승인한 것은 기묘하고도 이외의 일이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무엇보다도 유력한 증거는 귀족과 서민사이에 계급투쟁이 행해진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93) 일본인이 상세한 행동의 지도를 좋아하고 신뢰한 것에는 그럴만한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지도는 사람이 규칙에 따르는 한 반드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부당한 침략에 대한 항의를 인정하였다. 또 그것을 교묘히 조종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제4장 메이지 유신>

(101)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하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목표란 일본을 세계열강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봉건 계급을 욕하지도 않았고 무일푼의 상태로 몰아넣지도 않았으며, 이들에게 많은 질록을 주어 그 미끼로 메이지 정부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농민의 처우를 개선하였다.

(109) 일본의 정치형태외 이와 유사한 서구 여러 나라의 사례 사이의 참된 차이는 그러한 형식에 있지 않고 기능적인 면에 있다. 일본인은 과거의 체험을 통해서 만들어 냈고, 그들이 윤리 체계와 예절 속에 격식화되어 있는 낡은 복종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 국가는 ‘각하’들이 알맞은 우치에 있어 직분을 다하며 반드시 그의 특권이 존중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것은 해당 정책이 시인되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특권의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괘씸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114) 이와 같이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정치에서는 국가의 기능이 미치는 영역을 종교에서는 국가 신토의 영역을 신중히 구획하였다. 그들은 다른 영역을 국민의 영역에 맡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직접 국가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새로운 계층 제도의 최고 관리인인 그들 자신의 손에 지배권을 두려워했다.

(120) 이와 같이 일본인은 끊임없이 계층 제도를 고려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다듬어 나갔다. 가정이나 개인간의 관계에서는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 종교, 군대, 산업에서는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자기들의 특권의 범위를 넘어서면 반드시 처벌된다.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은 일본인은 불만 없이 잘 살아간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이것이 일본인의 인생에 대해 판단하는 특징을 이룬다. 이것은 평등과 자유 기업에 대한 신뢰가 미국인 생활양식의 특징인 것과 같다.

(121)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을 다른 나라에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들은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도덕체계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 질 수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다른 나라들에는 그러한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본만의 산물인 것이다.


<제 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129) 일본인은 또한 교사와 주인에 대해서도 특수한 온을 느낀다. 그들은 모두 무사히 세상살이를 살 수 있도록 원조해준 은인들이기 때문에, 장래 언젠가 그들이 어려워져서 무엇이 부탁하면 원하는 것을 듣고 해결해주어야 하고, 또한 그들이 죽은 후에라도 어린아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 사람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하며,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부채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갈수록 이자가 붙는 것처럼 더욱 불어난다. 어떤 사람에게도 온을 받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130) 그러나 이처럼 일본문화의 특수성이 온의 부담을 가볍고 지기 쉬운 것으로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일본에서 감정을 상하지 않고 온을 ‘입은 것’은 행복한 경우이다. 일본인은 우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음으로서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142) 우리는 일본인 사이에서 누가 누구에게 온을 입혔다고 말할 때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봇창이 보잘 것 없는 빙수 한 그릇의 채무를 그처럼 과대시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인은 빙수 가게에서 신세를 진다든지, 어머니를 잃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오랫동안의 헌신이라든가. ‘하치’처럼 충실한 개의 헌신 등을 돈을 빌려주는 것과 같은 척도로 재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렇게 한다.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존중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은 데에는 더없이 타고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제 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149) 일본인들은 이처럼 중국의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은 완전히 달리 해석하여 그 지위를 저하시키고 말았다. 그 대신 일본에서 효행이란 기무가 조건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령 부모의 악덕이나 부정을 보고도 못본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에도 이행해야만 하는 의무가 되었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의무와 충돌할 경우에만 폐기할 수 있는 것으로, 부모가 존경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든가 자신의 행복을 깨드린다는 이유만으로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152) 이처럼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이 효행 속에 포함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부로로부터 받은 채무에 대해 자식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보은이다.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개인의 정당한 행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간섭의 사례라고 여겨지고 있다 .일본인은 은혜의 요청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 간섭을 ‘외부로부터’의 간섭으로 보지 않는다.

(153)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람 이외의 조상에 대한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에게 집중한다.

(156)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들은 서양 여러 나라를 시찰한 후, 이들 나라에서는 모든 역사가 지배자와 인민 사이의 투쟁에 의해 형성되어 있어, 이것은 일본 정신에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귀국 후 헌법에다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될 수 없는’ 존재로서 국무장관의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조항을 삽입하였다. 천황은 책임있는 국가의 원수로서가 아니라 일본 국민 통합의 최고의 상징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161) 일반 행정에서는 주는 죽음에서부터 납세에 이르는 모든 의무를 수행시키는 강제력이 되었다. 징세관, 경찰관, 지방 징병관은 신민이 바치는 주를 매개하는 기관이다.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의 최고의무, 즉 고온(皇恩)을 갚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거리의 정지신호등에서부터 소득세 이르는 어떤 법률도 새로운 법률이 나올 때마다, 그것이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이라면 온 나라가 분개하곤 한다.

(163) 외국인 기자 한 사람이 서술한 바와 같이, 아침에는 소총을 겨누면서 착륙했지만, 점심때는 총을 치워버렸고, 저녁때는 이미 장신구를 사러 외출할 정도였다. 일본인은 이제 평화의 길을 따름으로써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 했던 것이다. 1주일 전까지는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 해 드리기 위해서 죽창이라도 오랑캐를 격퇴하기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했었다.

(164) 일본인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지불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 대신 일본인은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즉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복의 명령이긴 했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

<제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167) 기리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종류로 나누어진다. 여기세서 ‘세상에 대한’ - 문자 그대로는 ‘기리를 갚는 것’-이라 부르는 것은 동년배에게 온(恩)을 갚는 의무이고, ‘이름에 대한 기리’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die Ehre)와 같은 것으로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 어떤 비난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이다. 기무는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계약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178) 기리에 몰린 인간은 때때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커진 부채의 변제를 강요당한다. 어떤 사람이 한 상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상인이 소년시절에 배운 어떤 교사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그가 젊었을 때에는 그 교사에게 기리를 갚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지금까지 경과된 세월동안에 그 부채는 점점 더 불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 상인은 그 부채를 ‘세상에 대한 기리로 본의 아니게’ 지불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제 8장 오명을 씻는다>

(183)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스토이시즘, 즉 자제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이다. 여자는 분만 할 때 큰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고, 남자는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 초연해야 한다. 홍수가 마을을 덮칠 때에도 체면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필수품만을 챙겨서 높은 지대로 피난 간다. 그곳에는 아비규환이나 우왕좌왕, 낭패를 당한 기색이 없다. 추분 무렵 폭풍우가 엄습해 올 때에도 같은 자제가 요구된다.

(185) “진정한 존엄성이란 항상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자기에게 알맞은 지위를 차지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왕이나 백성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토크빌이라면 계급 차별은 그 자체로는 결코 굴욕적이지 않다는 일본인의 태도를 이해하였을 것이다.

(193) 이상과 같은 방법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일본인은 실패로 인해 치욕을 당하는 기회를 피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모욕 받는 오명을 씻는 의무를 대단히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될 수 있는 한 모욕을 느끼는 기회가 적도록 일을 처리하게 한다. 이 점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오명을 씻는 데 중점을 두는 태평양 여러 섬의 많은 부족과 비교할 때 뚜렷하게 다른 점이다.

(205)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 하여 절망에의 자포자기적인 굴복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어떤 경우에 자살은 이름에 대한 기리에서 당연히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장 훌륭한 행동방식이 된다.

(209) 실제로 일본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맹렬한 노력과 단순한 답보 상태인 무기력 사이를, 기분이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인 것이다. 일본인은 지금에 와서는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옹호하는 데 모든 뜻을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연합국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10)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은 그 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들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214) 싸쓰마 사건과 조슈 사건에 관하여 노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양이의 선봉이었던 이들 번이 취한 표변의 배후에 어떠한 복잡한 동기가 숨어 있다 해도 이 행동이 입증하는 현실주의와 냉정성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적 현실주의는 일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명이다. 달과 같이 기리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 배척법안을 만들게 하고, 해군군축조약을 크나큰 국가적 치욕으로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그처럼 불행한 전쟁 계획으로 내몰게 한 것은 그 어두운 면이었다. 1945년 항복의 여러 결과를 호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은 그 밝은 면이었다. 일본인 변함없이 일본 특유의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제9장 인정의 세계>

(217)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은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게 해두어야 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221) 잠 또한 일본인이 애호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가장 완성된 기능의 하나이다. 그들은 어떤 자세로든, 또 우리는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아래서도 너끈히 잘 잔다. 이 사실은 서구의 많은 연구가를 놀라게 하는 점이다. 미국인은 불면과 정신적 긴장을 거의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다.

(223) 일본인의 생각에 따르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단신하는 것은 얼마나 ‘단련;’이 잘 되어 있는 가를 아는 특히 뛰어난 감별법이다. 따뜻함을 멀리가하고 수면을 줄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식 또는 고난을 참고,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먹지 않았으면서도 이쑤시개를 입에 물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이다.

(231) 완고한 전통적 일본인은 음주와 식사를 엄중히 구별한다. 술이 나오는 마을의 연회에서 누군가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이미 술 마시기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두개의 ‘세계’를 확실히 구별한다. 집에서도 식후에 술을 마시는 일은 있지만, 술과 밥을 동시에 먹는 일은 없다. 차례로 어느 한 쪽의 즐거움에 전념한다.

(236) 일본인 관중에게는 화면에 나타나는 인물이 모두 전력을 다해 은혜를 갚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영호는 군국주의자들의 선전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영화의 후원자들은 일본 관중이 그것을 보아도 결코 반전사상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10장 덕의 딜레마>

(257) ‘군인칙유’는 여러 페이지에 걸친 문서이다. 그것은 주의 깊게 몇 가지 항목 알래 배열되고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인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서구인에게 칙유의 교훈은 모순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거기에는 선과 덕이 참다운 목표로 제시되어 있고, 서구인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되어 있다. 또한 공도의 옳고 그름을 잘 가늠하지 못하고 사정의 신의를 지켜 불명예한 최후를 마친 옛날 영웅호걸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이어 이와 같은 옛날 영웅호걸의 “이런 적지 않는 예를 엄히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훈계하고 있다.

(275) 일본인의 생활에서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를 심각하게 느
끼는 부족 또는 국민이 그러하듯이, 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다만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 하는 것을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의 행동방침을 정한다. 모두가 같은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여 서로가 지지하고 있을 때에는 일본인은 쾌활하고 편하게 행동할 수 있다.

<제 11장 자기수양>

(284) 일본인의 타인에 대한봉사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은 물론 이러한 상호 의무로서, 그것은 남에게서 받은 것에 대하여 같은 양을 변제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계층적 관계에 선 사람까리 서로 그 책임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자기희생의 도덕적 지위는 미국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일본인은 이제까지 항상 특히 기독교 선교사의 자기희생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보여 왔다. 그들은 유덕한 사람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자기 소망의 억압이라고 생각해서든 안 된다고 주장한다.

(286) 일본에서 ‘능력’을 기르는 자기 훈련의 근거는 그것이 처세 태도를 개선한다는 점에 있다. 훈련의 첫 무렵에 사람들은 도저히 참을 수없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 느낌은 이내 사라진다고 한다. 그것은 나중에는 훈련이 즐거움이 되거나 혹은 훈련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견습 점원은 장사에 도움이 되고, 소년은 주도를 배우며,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맞추게 된다.

(308) 일본인의 자기 훈련의 철학은 일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개개의 일본인의 생활체험에서 떼어 내어 고찰하는 한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다. 그들이 ‘보는 나’로 귀속시키고 있는 이 ‘하지’의 의식이 얼마나 무겁게 일본인을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지만, 그들이 정신통어 철학의 참된 의미는 일본의 어린아이 양육법을 설명하지 않은 한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제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310) 일본의 생활 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과 정반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저변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는 최대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락된다. ㅇ유아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층을 통하여 몇 십 년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로 상승하여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마찬가지로 수차니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348) 종래 모든 서구인이 묘사한 일본인의 성격적 모순은 일본인이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것인 일본인의 인생관에 그 어떤 측면도 무시할 수가 없는 이원성을 가져다준다. 그들은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하여 그 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도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 때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래에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천국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인간은 본디 선하고 신들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비할 바 없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들의 유년 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350) 일본인이 사용하는 두세 개의 상징적 물건은 자녀 훈육의 불연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그들의 양면적 성격을 분명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가장 빠른 시기에 형성된 ‘부끄러움 없는 자아’이다. 그들은 그 ‘부끄러움 없는 자아’를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본다. 그들은 “거울은 영원한 순결성을 비춘다.”고 말한다. 그것은 허영심을 기르는 것도 아니고, ‘방해하는 자아’를 비추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혼이 깊은 곳을 비춘다. 인간은 그곳에서 자신의 ‘부끄러움 없는 자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354) 이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이원성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이 된 후 로맨틱한 연애에 빠지는가 하면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가족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한다. 쾌락에 빠져들고 안일을 탐하는가 하면, 극단적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해치운다. 신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가정교육이 그들을 때때로 겁 많은 국민으로 만들고 있지만, 또한 그들은 때로는 저돌적으로 보일 만큼 용감하다.

(356) 그러나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많은 요구를 한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여 비방을 받는 큰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처럼 맛을 알게 된 개인적인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은 인생의 중대사에서는 그러한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패턴을 위반하는 소수의 인간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상실하는 위험에 빠진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진로를 정하며, 세상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360) 칼을 찬 인간에게 칼을 녹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 은 각자 자기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 지속성의 결여, 실패 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를 승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에서 자기 책임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미국에서보다 훨씬 철저하게 해석된다. 이러한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 서가 아니며,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368) 일본인을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기는 하나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조직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찍이 메이지 시대에 행한 것 같이 제도 그 자체에는 조금도 비난을 퍼붓지 않고도 가장 철저한 변혁을 실현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복고, 즉 과거로 ‘복귀하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혁명가가 아니다.

(371) 일본이 평화국가로 출발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 방침에 대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일본인은 양자택일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다.

(384) 현재 일본인은 군국주의를 실패로 끝난 한 줄기의 광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군국주의가 과연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실패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동정을 주시하리라. 만일,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본은 스스로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리라. 만일, 다른 나라들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되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하였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해설>

(404)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일본말을 아는 것과 일본 문화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일본 문화에 대해 많이 알고 또한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우리가 일본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저작임에 분명하다.


4.내가 작가라면

먼저 작가의 분야의 필요성을 알게 해준 책이었다. 원래 베네딕트 교수는 그의 스승 보아츠 교수의 수제자로 현장 관찰 및 조사에 의한 인류학을 연구하였다.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화와 칼은 일본을 직접 가보지 않고 각종 문헌이나 미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과의 면접조사에서 출발하였다. 전문분야는 방법론에 문제가 있을뿐 응용할 수 있는 분야은 무한대이다. 보고를 발견하기 위하여 저자는 이름없는 남태평양의 섬에서 몇년간을 원주민들과 같이 지내야 하는 힘든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독일에서 발생한 인종차별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류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한 지식인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세계 2차대전이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로 비참한 종말을 맞았지만, 패전국의 처리에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가 맞는 전문분야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처음에 책장을 넘길때에는 일본인과 일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을 수있다는 자신감과 기쁨이 있었다. 하지만 책장이 뒤로 넘어갈 수록 오히려 더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아마 일본은 '있다'. '없다' 류의 책에서 바라본 얄팍한 사건에 줄줄이 나오는 일본인의 문화를 단편적으로 바라봐서 그런지 몰라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전쟁중인 적국에 대한 평가와, 그러한 역사를 캐는 신중한 작업이 눈에는 보이지만, 어영부영한 것, 그리고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지는 것을 보고 조금 더 답답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메이지 유신을 커다란 획으로 온(恩)과 기무(義務)와 기리(義利)로 일본인의 문화와 성격을 설명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의 교육법에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조금씩 더 읽어나가면서 근간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
하였다. 그것도 동양에 대한 연구가 없던 사람이 이정도의 해석이 가능한 것도 대단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적국이며 역사적으로 최초로 본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받은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고, 진주만에서 수많은 미군들이 희생된 상황에서 적국에 대한 문화적 차이를 알기 위하여 인류학자에게 연구를 의뢰하는 미국의 전력도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그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도 순수한 분야로서 연구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인의 느낌을 해설하는 데는 조금 부족했다는 점을 들수가 있다. 아마 문학작품과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의 면담에 의한 부분이라고는 하지만, 칼의 공격성과 수양, 절도등 날카로운 느낌과 국화의 화려함을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 유교적인 충과 효, 인 등 중국에서 발생한 유교의 기본원리와 유학적 이론이 일본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조금더 보완해주었다면 일본 뿐만 아니라 동양을 이해하는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역자의 말대로 일본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할 대상이다. 너무 감정적으로 맞서기 보다는 조금더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할 것이다. 단순히 있다와 없다라고 극명한 판단이 아닌 그들의 행동을 미리 앞서서 볼 수 있는 일본을 좀더 다양하게 알 수 있는 책을 더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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