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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4일 11시 08분 등록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 1892 -1978 ]

운동을 핑계 삼아 읽던 책을 펼쳐 둔 채 잠시 산책길에 나섰다. 하나의 ‘화두’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책’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사유(思惟)를 끝없이 구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한히 넓혀 주는 것인가?’
철학자는 ‘쉽고 단순한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명명했었다. 20대의 학창시절에, 지금도 그 해답이 유효한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지만 지금 나 또한 명확한 해답이 있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문해 본다.
“정말 책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그 당연한 사실을 정말 모른단 말이냐?”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책읽기로 인하여 나에게 나타난 이상증세는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인쇄된 것이라면 무조건 읽어 내려가는 증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심’이다. 당연한 것에의 의심. ‘책 이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심도 그 증상중의 하나다. 책은 단순한 나를 혼란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때론 희열의 도가니로 몰아넣게도 했다. 말하자면 나 자신이 책에 상당히 많이 휘둘렸다는 이야기다. 아직은 덜 어물고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이라.

하우저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 또다시 허우적거린다. 예술, 문학, 심지어 인간행위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 시대성을 담고 있음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의심’이라는 증상으로 인하여 하우저에게 딴지를 건다.
‘인간 창조물을 사회학적 관점을 떠나 초월을 향한 인간의 갈망 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순수한 표현의 시각으로 볼 수는 없는가?’

하우저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자네가 풀어낼 일이다.’

1. 저자에 관하여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 -1978)
헝가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빈 등을 돌며 문학사와 철학, 미술사를 연구한 예술 사회학자다. 마르크ㅡ 드보르자크, 게오르크 짐멜 등을 스승으로 했다.
20세기를 살다간 유태인 학자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이 ( 우리를 인내의 세계로 인도했던 에릭 홉스 봄 역시 그러했다.) 하우저도 1938년 나치가 빈을 점령하자 1951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6년간을 리즈 대학에서 강의 했다. 그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학문적 내용을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의 예술사를 사회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연구 방법은 1910년대 에 형성된 부다페스트의 ‘일요 서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루카치(G. Llukacs. 1885-1971)가 중심이었던 이서클은 현대 문학과 예술은 물론 문화 전반에 대해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하우저가 영국에 머문 1950년대에, 선사시대부터 근대문학. 음악, 미술. 건축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망라하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년)을 썼다.
그 밖의 저서로는 [예술사의 철학-1958년], [예술연구의 방법론-1960년], 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 매너리즘의 연구-1968], [예술사회학-1974], [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14] 자연주의적 예술은 처음에는 선을 중심으로 하여 대상을 비교적 딱딱하고 어색하게밖에 그릴 줄 모르는 모사에서 출발하여 드디어는 자유분방하고 재기 넘치며 거의 인상 주의적이라할 만한 수법에까지 이르는 예술이다. 그리하여 후기로 올수록 시각적 인상을 재현함에 있어 점점 더 회화적이고 순간적· 즉흥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도화의 정확성은 비상한 숙달의 경지에 이르러 점차 그리기 어려운 자세나 각도에서 순간적인 신체의 움직임과 몸짓에 이르기까지 더욱 대담한 생략과 중첩의 기법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선사시대의 자연주의는 결코 경직되고 정체된 하나의 공식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살아있는 형식으로서 현실재현이라는 과업을 위해 너무나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며 그 성과도 천차만별인 것이다. 선택을 모르고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연 상태’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인 반면, 틀에 박힌 예술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문명의 단계까지는 아직 요원했던 것이다.

[17] 구석기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림 속의 짐승을 죽이면 실제의 짐승도 죽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20] 즉 마술이라는 목적이야말로 이 예술로 하여금 자연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요인이었다. 실물을 닮지 않은 그림이란 단순히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쓸모도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22] 자연주의적 양식은 구석기시대의 종말까지, 그러니까 수천 수만 년 간 지속되었다. 예술사에서 최초의 양식변화를 이루는 전환점이 나타나는 것은 구석기 시대가 신석기 시대로 이행하면서였다.

[22] 예술은 이제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보다 사물의 이념이나 개념 내지는 본질을 포착하려 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상징의 창조에 주력한다. 바위에 그려진 신석기시대의 그림들은 사라의 모습을 두어 개의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암시하고 있다.

[25] 미술과 주술 대신 종교적 의식과 예배행위가 등장한다. 구석기 시대는 종교가 없는 시대였다.

[26] 궁극적으로 신석기시대의 새로운 예술양식을 낳은 요인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채집· 수렵민들의 기생적이고 순전히 소비적이던 경제생활이 농경· 목축민들의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경제로 이행했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구석기시대 마술 중심의 일원론적 세계관이 애니미즘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인바, 이 세계관 자체도 새로운 경제형태의 산물이었다. 구석기시대 그림의 작자는 그 자신이 사냥꾼이었다.

[30] 그리하여 우리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조형예술의 세 가지 근본 형식, 즉 ‘모방’과 ‘사실전달’과 ‘장식’, 바꾸어 말하면 자연주의적 모사와 상형문자적 기호 및 추상적 장식의 세 가지 모두가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34] 고도로 발달한 구석기 시대의 회화기술로 미루어볼 때 그것을 그린 사람이 딜레땅뜨가 아니라 훈련된 전문가로서 자기 생활의 상당 부분을 예술의 습득과 실천에 할애하여 하나의 독립된 직업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유물들과 더불어 발견된 ‘스케치’나 ‘초벌그림들’, 또는 선생이 손을 본 흔적이 있는 ‘학생 그림’들은 화가라는 직업이 사제관계에 따른 학파라든가 지역별 유파와 전통을 갖출 정도로 전문화되었음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화가 겸 마술사’인 이들이야말로 전문화 및 직업분화를 이룬 최초의 본보기인 셈이다.

[45] 단순히 소비에서 생산으로, 원시적 개인주의에서 공동작업으로의 발전이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면 신석기시대와 다음 시대의 경계선을 이루는 것은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시작, 도시와 시장의 발생, 인구의 집중과 분화 등이다.

[47] 이 예술을 단 하나의 원리만으로 설명하고자 이 예술의 내부에 정적인 요소와 동적인 요소, 보수적 요인과 진보적 요인, 형식존중과 형식파괴의 요인들이 병존하고 있음을 무시하려 한다면 이 예술의 본질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예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고루한 전통적 형식의 배후에서 실험적인 개인주의와 탐구적인 자연주의의 생동감을, 도시의 생활감정에서 우러나와 신석기 시대의 정체적 문화를 와해시키고 있는 힘들을 느껴야만 한다.

[50] 그들은 현존 질서가 조금이라도 변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종류의 개혁에 대해 그랬듯이 예술에서도 여하한 혁신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으며, 전통적인 종교와 신조 또는 고래의 예배형식 못지않게 예술에서도 옛날부터 나려오는 규범들을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보았다.

[53] 작업이 가정경제에서 분리된 시장제도는 하나의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그것은 때때로 받는 주문에 응하여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순수한 직업으로 영위되는 동시에 자유시장을 위해 상품을 만드는, 체계적인 생산에 의거한 독립산업의 싹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원시생산자를 장인으로 전환시켰을 뿐 아니라 이들을 가정경제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게 해주었다.

[55] 더구나 이집트에서는 독창적인 모티프가 특별히 높이 평가된 적은 한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대체로는 도리어 금기시될 정도였던만큼 예술가의 유일한 자랑은 빈틈없고 단단한 것을 만든다는 데 있었다.

[56] 이 경우 새로운 도시문명이라는 특수한 생활조건, 이전시대보다도 훨씬 분화된 사회생활, 수공업의 전문화 및 상업의 개방적 정신 등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개인주의의 방향이 강력하게 추진되었음이 분명하며, 후대에 이르면 이것이 자신의 지배권 유지에 급급한 보수세력에 의하여 방해당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질식당했던 것이다.

[61] 이집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게, 보는 사람의 눈을 속이려는 갖가지 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비속하고, 야비한 구석이 있고, 엄격한 형식으로 요구하는 추상적· 형식적 예술의 수법 쪽이 자연주의적 예술이 쓰는 착각 효과보다 더 ‘고상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60] 여기서 말하는 ‘정면성’의 원리란 랑에 및 에르만이 발견한 인체묘사의 법칙으로서, 이 법칙에 따르면 인체는 그것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든간에 가슴의 표면만은 그 전부가 감상자 쪽을 향하도록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3] 반면 궁정예술이나 귀족예술은 무대의 틀, 무대조명, 단산의 높이 등이 강조되는 점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인위적이고 주문에 응하여 만들어진 예술이요, 그 발주자는 환각 따위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그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라는 전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6] 제재에서는 새로운 세계의 입김이 느껴지고 인물의 표정에는 새로운 정신 및 새로운 감각성이 반영되고 있는데, 정면성이나 봉합적 묘사법, 대상의 사회적 지위에 척도를 맞추고 있는 탓으로 실제 인물의 크기와는 전혀 어긋나는 비례 등은 올바른 형식을 규정하는 여타의 규칙들과 더불어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69] 즉 이집트는 중제국에서 신제국까지의 기간에 군대라고 하는 형태로 사회 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세력에게 출세의 기회를 제공하는 군국주의 국가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더욱더 중앙집권적 경향이 강해지고 점차 소명해가고 있던 봉건귀족을 제국 직속의 관리들로 대체하는 관료국가를 형성했던 것이다.

[70] 지배층에 속한 사람은 항상 궁정풍의 권위를 재현하는 양식으로 그려진 반면 하층민 사람들은 통속적인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다.

[72] 그렇지만 도시와 깊숙이 결부된 역동적인 경제를 가졌던 바빌로니아 예술 쪽이 이집트 예술보다 형식의 자유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은 다른 경우에는 항상 올바른 것으로 도어 있는 사회학상의 원칙, 즉 전통주의적인 농업경제로부터 엄격한 기하학 양식이 발생하고 유동적인 도시경제는 자유분방한 자연주의를 낳는다는 이론과 모순된다.

[75] 이 문화영역 속에서는 엄격한 전통과 고정된 형식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나갔는데 끄리띠에서는, 더욱이 예술 이외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은 주위 세계와 동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채롭고 분방하며 대담하고 생동감있는 일대 드라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76] 그러나 무엇보다도 끄리띠 예술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에에게 해 지역에서는 상업, 그 중에서도 특히 외국과의 교육이 고대 오리엔트의 다른 지역과는 반대로 지배계급 자신의 손으로 영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여기서는 모든 개혁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하는 상인계급의 정신에 가해지는 다른 것으로부터의 제재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보다 적었던 것이다.

[78] 끄리띠 사람들이 기념비적인 장대하고 엄격한 양식의 작품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이집트 예술과 같은 웅대한 예술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이 그들의 취미와 예술의욕에 맞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88]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쟁탈의 대상이요 개인적 모험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완력과 용기, 숙련과 지략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89] 문학의 사명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싸움터로 몰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로 끝난 싸움 뒤에 장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름을 들어 칭송하며 그들의 명예를 드높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되었다.

[93] 이러한 대중화 과정은 원래의 설화들이 서사시라는 새로운 형태로 그 발상지인 그리스 본토로 돌아가 거기서 음유시인들에 의해 전파되고 아류들에 의해 윤색되어 마침내는 비극작가들에 의해 변용됨으로써 완성된다.

[97] 그러나 결국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귀족의 세계관 자체가 변모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 시인들 자신이 자기의 도덕적 기준을 귀족이 아닌 어떤 신흥계층의 세계관에 맞추어 재조정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다. 어쨌든 시인들이 청중으로 생각한 것은 호전적인 토지소유 귀족들이 아니라 싸움을 즐기지 않는 도시 귀족들이었다.

[101] 그러다가 상업의 번성과 부유해진 도시, 성공적인 식민활동의 산물인 아케이즘과 더불어 새로운 기념비적 건축과 조형예술의 시대가 열린다. 이것은 지방농민에서 도시지배층의 수준으로 입신출세한 엘리뜨를 가진 사회의 예술이자 토지에서 거둔 수입을 도시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상공업에까지 손을 뻗기 시작한 귀족들의 예술이었다.

[102] 그들이 도시의 시민층에게 점차로 경제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그들의 주요 수입원인 지대가 새로 발흥한 화폐경제에서 연유한 막대한 이윤에 비해 가치를 상실해가는 과정은 아케이즘 시대 초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위기적 상황에서야 비로소 귀족계급은 자신의 본질적 특성을 의식하게 된다. 이제 처음으로 자기들의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하층계급과의 경제적 경쟁에서의 열세를 보상받으려 하는 것이다.

[104]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여전히 그리스 도처에서 갈채를 받고 이를 모방하는 자들이 다투어 나온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귀족계급으로서는 진부한 영웅설화보다는 시사적인 문제를 좀더 직접적으로 다루는 그리스 본토박이 문학인 합창대용 서전시화 사상시 쪽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104] 그들의 문학은 주관적 정서의 표현이자 정치적 선전과 도덕철학을 겸한 것이었고 그들 자신은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귀족 및 전민족의 교육자요 정신적 지도자였다.

[105] 다시 말해서 돈만 주면 누구에게나 변설을 제공한 후대의 쏘피스뜨와 그 점에서 같았고, 사실 그는 쏘피스뜨들이 가장 경멸받았던 바로 그면에서 그들의 선구자였던 것이다.물론 귀족 중에는 진정한 뜻에서의 딜레땅뜨들이 있어 때에 따라 합창대용 서정시의 작곡이나 공연에 참가한 것이 사실이지만, 대개는 역시 작자와 공연자가 모두 직업적인 사람들로서 그들은 직업의 분화라는 점에서 전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105] 음유시인의 경우에는 아직 시인과 가인을 겸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기능이 갈라져 시인은 그의 시를 노래 부르는 가수가 아니고 가수는 시인이 아니게 되었다.

[105] 아마도 이러한 분업의 가장 눈에 띄는 결과는 예술가가 철저한 기능공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사실로서, 기술뿐 아니라 내용도 문제삼게 마련인 시인의 경우는 그래도 아마추어성의 흔적이나마 남아 있으나 가수의 경우에는 그러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07] 도시적인 생활양식과 상업이 발달하고 경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으로 됨에 따라 정신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107] 경제적 개인주의의 대두와 함께 서사시 편찬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하는 서정시인과 더불어 문학의 영역에서도 주관주의가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09] 참주제는 권력의 군주제적 중앙집권이라는 점에서 귀족제 이전 단계로의 역행을 뜻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혈연국가의 해체를 위한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자 토지귀족에 의한 민중의 착취에 한계를 긋고 가정경제·자연경제적 생산에서 교역과 화폐경제의 전환을 완수함으로써 지주층에 대한 상인층의 승리를 초래한 것이다.

[109] 참주들 자신도 그 대부분의 귀족출신인 부유한 상인들로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그리고 소수 특권층과 농민들 사이의 나날이 증대해가는 알력을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한 인물들이었다.

[109] 상업귀족이었던 그들의 궁정은 영웅시대의 해적귀족의 궁정만큼이나 호화판이었고 예술적인 장식이 풍성하기로는 오히려 그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110] 그들의 지배하에서 경제적인 자유주의가 허용되고 예술이 장려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술을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선전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을 현혹시키는 아편으로도 이용한 것이다.

[111] 그 이전 시대의 예술과 비교할 경우 참주정치 시대 예술의 가장 눈에 띄는 특색은 참주제 시대의 예술이 종교적인 요소를 별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112] 따라서 이 시대에는 예술이 종교로부터 주문이나 자극을 받던 옛 시대와는 반대로 예술가의 향상된 솜씨가 도리어 종교심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112] 이제 예술은 이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예술뿐 아니라 모든 정신적 형식이 처음에는 오직 실용적 목적과의 관련에서 결정된다. 그러나 정신의 발현인 예술형식은 그 최초의 실제적 사명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과 경향, 즉 애초의 목적에서 떠나 자율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가능성과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생활을 위한 직접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비교적 안전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종전에 필요에 따라 무기나 도구로서 발명한 정신적 수단을 유희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전혀 혹은 거의 관계가 없는 일들에 관해서 원인을 캐고 설명을 구하고 인과관계를 찾기 시작한다. 실용적인 지식은 특수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순수한 연구가 되고,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추상적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으로 전환한다. 이리하여 원래는 마술이나 종교의 부속품, 선전과 자기찬미를 위한 도구, 또는 신과 악령과 인간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예술도 순수하고 자율적인, 즉 ‘이해타산을 떠난’ 형식, 예술 그 자체와 아룸다움만을 위한 예술로 변한다.

[114]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개별적으로 자율화된 사실의 이면에는 정신기능의 형식과라는 전제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활동이 이미 실생활에서의 효용만은 기준으로 하지 않고 활동 자체의 독자적인 완벽성이라는 관점에서도 평가되도록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16] 자의식이라는 것, 즉 당면한 현실적 필요의 차원을 넘어 자기 자신에 관한 총체적인 앎을 추구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최초의 위대한 추상행위였고, 개개의 정신형식을 그것이 인생 전체 속에서 그리고 통일된 세계상 내부에서 가지는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또 하나의 공적이었다.

[117]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인간중의 일부가 자율적인, 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다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잉여노동력과 여가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지배계급이 ‘목적 없는’ 예술이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술이 주술이나 종교, 과학이나 실용행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118] 민주제는 온갖 세력의 경쟁을 자유롭게 방임하고 모든 인간을 개인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평가하여 각자에게 최고의 능력을 발휘시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인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평준화하고 출생에 따른 특권을 폐지한다는 점에서는 반개인주의적 이기도 하다.

[121] 고전양식을 ‘이상주의’라고 부르고, 고전주의 예술을 ‘있어야 할 더욱 좋은 세계’와 ‘이상적 인간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사고방식은 이 시대에 지배적이던 귀족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직접적인 표현인 것이다.

[121] 비극은 그 외면적인 형식에서는, 즉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즉 소재가 된 영웅전설이나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123] 이렇게 욕심 없고 자연주의적이며 민중적인 연극은 고전적 작품만을 상연한 공설극장에 비하면 훨씬 길고 연속적인 역사를 가졌고 공연품목도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웠는데, 다만 그 작품들은 오늘날 거의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만일 이것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 문학에 관해서, 그리고 아마 그리스 문화 전체에 관해서도 지금과는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124] 이제 도 다시 시인은 더 높은 진리의 수호자로 떠받들어지고 민중을 더 높은 인간성으로 이끄는 교육자로 간주되게 되었다는 사실도 연극의 정치화라는 이 현상과 직결된 것이다.

[130] 예술작품의 가치와 사회적 조건을 일 대 일로 간단하게 대응시킬 수는 없다. 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가지가지의 요소를 그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는 것뿐이며, 이러한 요소들이 동일할 경우에 거기서 생기는 예술작품의 질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131] 소피스트들은 인간에게는 무한한 교육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혈통에 대한 예로부터의 신비적 사고방식과는 바대로, ‘덕’은 후천적으로 계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138] 에우리삐데스가 최초로 대표한 시인의 유형이 근대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 특성으로 요약된다. 즉, 예술가로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 자신도 세상에 등돌린 천재의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이다.

[139] 물론 ‘열광’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문학작품의 모태는 시인의 기술적 능력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영감이 되는데, 플라톤의 이러한 학설은 결코 시인을 무슨 신적인 존재로 승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과 그 작품 사이의 간격을 강조하고 시인 자신은 신이 그 목적 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140] 플라톤이 국가의 통치를 맡기고자 했던 정신적 엘리뜨란 예로부터 내려오는 특권 상층계급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일반 민중은 정치에 조금도 개입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확식하고 있었다.

[143] 기원전 4세기의 아탄에서는 이제 더 이상 대신전이 세워지지 않게 되고 건축계에서 조각가들에게 대량의 주문을 하는 일도 없어졌다. 이 시대에 큰 건축물이 만들어진 것은 동방에서였다. 따라서 기념비적인 조각의 새로운 발전도 그쪽에서 일어났다.

[147] 헬레니즘 이전 시대의 예술양식도 물론 완전한 통일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류층의 엄격한 형식주의적 예술양식과 더불어 형식적으로 좀 더 자유로운 하층계급의 예술양식이 병존하는가 하면, 보수적인 종교예술과 진보적인 세속예술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일한 사회계층으로부터 전혀 상이한 여러 예술양식이나 취미경향이 생겨나고, 전혀 다른 양식의 예술작품이 동일한 사회계급 및 동일한 교양층을 위해 만들어진 시대는 헬레니즘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153] 민중적 경향이 귀족계급의 예술을 제압한 정도도 각 예술장르에 따라 다르며 수세에 몰린 귀족계급의 예술은 하층계급 사람들은 거의 알 수 없는 일종의 인상주의적 표현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최후의 몸부림을 치다가, 드디어는 고대 로마 말기에 가서 서민적 예술의 소박성과 표현주의적 솔직성을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157] 로마시대 후기의 예술양식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상주의적 양식이다. 이것은 연속적 묘사법에서 볼 수 있는 서사시적 양식과는 반대로 오히려 서정적인 것으로, 단 한번뿐인 통일적인 시각상을 그 주관적인 순간성 그대로 포착하려는 것이다.

[159] 그리스, 로마 예술에서 대상의 묘사는 정면성에서 출발하여 다시 정면성으로 귀착했다. 즉 일면적이고 직선적인 아케이즘 양식에서 출발하여 자유스러운 고전주의 시대와 극도의 긴장에 찬 할레니즘기 바로끄를 거쳐 로마시대 후이게 이르러서는 다시 평면적이고 좌우의 균형을 지키며 매우 엄숙한 일종의 정면종중주의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177] 일반적으로 중세예술의 특색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특징들, 그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단순화와 양식화의 경향, 공간적인 깊이나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무시한 자의적은 취급 등은 중세 초기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도시적 화폐경제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예술 및 문화의 근본적인 특색으로서 시종일관했던 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다.

[184]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형식은 그리스도교가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준 후에도 기껏해야 그 본래의 자족성을 잃었을 뿐, 의연히 현존하는 유일한 표현수단으로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의사전달을 위해 이를 사용하는 길밖에 없었다.

[191] 그리스도교 에술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나 비잔띤 예술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비잔띤 황제가 이미 누리고 있던 권력과 권위를 서방의 카톨릭 교회도 목표로 감았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목적은 동서가 모두 같았다. 즉 절대적 권위, 초인간적 위대함, 신비적인 위엄 등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204] 농민예술은 모두 민중예술이라고 처음부터 정의하거나 민중예술이란 교양수준이 비슷한 다수 다중을 위한 비교적 단순한 예술이라고 해석한다면, 민족대이동 시대의 예술은 곧 민중예술이었다. 그러나 민중예술이라는 말을 전문가가 직업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예술작품이라고 해석한다면, 이 시대의 예술은 결코 민중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

[219] 이렇게 제각기 다른 양식이 성립하게 된 원인은 각자의 국적이나 각 제작소의 지방적 전통의 차이보다도 오히려 주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식상의 어떤 공통점을 제하고는 동일한 사본제작소에서 전혀 상이한 종류의 사본 들, 즉 고대풍을 따른 사치스러운 궁정양식 사본과 간단한 스케치풍으로 주석을 대신하는 수도원 양식 사본이 함께 만들어졌을 것이다.

[227] 낭만주의자들은 모두 영웅서사시는 개개의 시인이 그 직업적 기술을 구사하여 의식적으로 만든 것일 수 없고 소박한 민중이 무의식적·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243] 막대한 재산과 다수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수도원장들을 포함한 수도회들은 또한 막강한 교황들을 배출했고 황제나 왕에 대한 가장 강력한 조언자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경쟁자이기도 했던 만큼, 일반 민중에게는 세속의 권력자나 마찬가지로 아득하게 높은 존재였다.

[247] 중세 초기 경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인 동시에 이 경제가 당신이 정신문화에 가장 깊이 영향을 끼친 측면은 자급에 필요한 한도를 넘어서 생산하려는 의욕이 전혀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 따라서 기술적인 발명이나 생산체제의 개혁을 일체 외한 채 전통적인 생산방법과 구래의 생산속도가 언제까지나 온존되었다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262] 계급과 신분 위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봉건사회는 개개인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하는 데에는 아직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개인을 위한 기념비라는 개념은 이미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64] 물론 이전의 시대에도 수공업자나 상인이 없지는 않았고 독립적인 수공업도 농가나 귀족의 저택, 수도원의 영지나 주교 직속의 제작소 등 이른바 ‘폐쇄적 가정경제’의 틀 안에만 머문 것이 아니며, 농촌인구의 일부는 일찍부터 자유시장을 위하여 수공업 제품의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277] 기사계급의 낭만적 이상주의와 의식적이고 감상적인 영웅주의는 실은 재탕된 이상주의요 영웅주의였으며 그것은 기사계급의 명예라는 개념을 형성해나간 신흥 귀족의 자의식과 야심에 주로 기인한 것이었다.

[279] 기사도덕은 해방된 시민계급의 세계관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러한 좁은 의미의 귀족적 덕목의 함양에 힘을 기울인 점에서는 시민계급의 영리정신과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304] 그들은 도시의 시민계급 및 직업적인 기사 계급을 출현시킨 것과 동일한 경제기구의 변혁, 동일한 사회적 변동의 산물이며 징후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사회적 기반을 상실한 근대 인텔리 계층의 중요한 특색을 더러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 및 지배계급에 대해 조금도 존경심이 없으며 모든 전통과 풍습에 대해서 처음부터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종의 반역이요, 자유 사상가였다.

[307]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 문학의 부르즈와화라는 현상은 크게 촉진된다. 문학 및 그 독자가 시민화되었다.

[308] 이들 조형예술 작품에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에서보다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지는 서양 정신의 일대 전환 즉 신의 나라로부터 자연계로,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바로 주변적인 것으로, 엄청난 종말론적 신비로부터 인간세계의 좀 더 범상한 문제로의 복귀가 한층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 있으며, 예술적인 관심의 중심이 위대한 상징이나 형이상학적인 종합이라는 데서 떠라 직접 체험 가능한 것, 감각적이고 일회적인 것의 묘사로 이동하는 경향도 문학영역에서보다 먼저 나타나 있는 것이다.

[321] 예술의욕과 기술은 예술작품 발생과정의 어느 단계에서도 서로 독립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불가분하게 얽혀 있어 양자의 분리란 이론상의 편의로서나 가능한 것이다. 양자 중에 한쪽만을 떼어내서 다른 한쪽과 무관한 변수로 독립시키는 것은 그 한쪽의 원리를 부당하고 비합리적으로 다른 쪽 위에 놓는 것이며, ‘낭만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323] 고정된 입방체적인 형태가 해체되고 조각이 건축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고대의 고전미술이 감상자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저 조상의 회전이라는 현상을 향해 고딕 미술이 내디딘 첫걸음 이었다.

[331] 길드 규약이 주인급 장인의 이주의 자유를 제한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는 그들 스스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332] 중세미술의 발전방향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미술가의 작업장이 점차로 건축현장으로 부터 떨어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35] 자연경제가 화폐경제로 이행함과 더불어 이제까지는 정도의 차는 있으니 독립적인 존재이던 대귀족들은 왕의 보호를 받는 신분으로 전락했다.

[342] 후기고딕의 민중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장르는 단 하나 희곡뿐이다. 물론 이것도 ‘민중’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고대 그리스 초기부터 미무스의 형태로 전해지고 중세의 종교적· 세속적 희곡으로 계승된 진정한 민중적 전통의 계속이었다.

[347] 액자는 그 앞에 광대한 세계가 열려져 있는 창틀처럼 느껴지고 그 ‘창’ 앞뒤의 공간은 연속된 단일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제 와서야 비로소 회화적인 공간은 깊이와 본질성을 획득했다. 따라서 고대나 중세 초기의 미술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일을 중세 말기의 미술이 이루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간, 즉 현대의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공간을 묘사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시대의 역동적인 생활감정에서 생긴 ‘영화적’ 시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관점. 1.나는 ‘나’ 자신이다. - 존재하는 ‘나’로서의 ‘나’
관점2. 엄마, 한 사람의 아내, 딸, 고모, 누이, 며느리, 친구 등 - 사회적 역할로서의 ‘나’
→ 나는 나를 벗어나 사회적 존재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나는 여전히 나인가?

숲 속의 나무와 화분에 심어진 나무는 그 형태를 달리한다. 숲속의 나무는 숲의 외형적 조건에 만들어진 ‘나무’인 것이다. 그러나 ‘나무’라는 본질에는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외형적 변화를 가져왔을 뿐이다.

74년에 처음 국내에 출간된 하우저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개정판을 읽어내려 갔다. 이전의 것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수정되고 보충된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개정판을 읽는 것이 나에게는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진보적 예술사학을 대표하는 명저로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시작하여(라스코 동굴벽화)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까지 인류 문화의 전반에 관한 분야를 통괄하고 있다. 몇 권의 책으로 엮어진 그 첫 번째 책 1권은 선사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예술을 ‘ 사회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예술작품이란 사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사회적 힘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사를 고차원적인 이념에 얽매이거나 단일한 예술 양식으로 압축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이 사회적 산물이고 사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임이 분명할 지라도 예술 자체가 온전히 사회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즉, 인간의 모든 전시활동이 사회.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개별 작품과 사회 역사적 상황을 적절히 연결 시켜 해석해 나간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내가 우려한 점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곁들여 설명하건데 ‘모든 예술작품은 사회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만 예술이 사회학적 측면만으로 정의 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진 좁은 시야로서 그의 방대한 문화사적 예술사에 대한 단정적 결론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단지 그의 방대한 지적인 탐닉과 해박한 지식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예술에 대한 그의 폭 넓은 시각에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예술의 사회적 측면과 인간 개인의 ‘초월을 항한 갈망의 표출’ 그 양 다리 사이에서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의 나머지 문화사적 예술론을 읽어 내려 갈 일이 내가 하우저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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