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 조회 수 3245
- 댓글 수 1
- 추천 수 0
1. 저자에 대하여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ser:
1892년 헝가리 출생으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문학사가, 예술사회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이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부다페스트, 비엔나, 베를린, 빠리 등지의 각 대학에서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를 전공하였으며, 미술사가 마르크스 드보르자크,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 등으로부터 배웠다.
G. 루카치, 만하임 등과 함께 1910년대 말 부다페스트 ‘일요 써클의 일원으로 활동(1915~1917년)하였다.
부다페스트 대학 교수로 잠시 재직한 뒤, 1921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수학하고, 헝가리 소비에트정권 붕괴 이후 비엔나로 망명(1차 세계대전 후 중부 유럽을 휩쓸었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카치와 함께 헝가리 정치에 관여했지만 1919년 혁명정부가 무너지자 50여년의 긴 망명길에 오른다.) 하였으며, 1938년 나찌의 비엔나 점령 후 런던으로 이주했다.
1951~1957년 영국 리즈대학 전임강사를 거쳤으며,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영국으로 유랑하며 생존문제로 고통 받으면서 그는 47~57세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썼으며, 1978년 타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에『예술의 철학』(1958),『예술연구의 방법론』(1960),『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매너리즘 연구』(1968),『예술사회학』(1974),『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다.
[이 책 개정판에 대하여]
이 책이 처음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66년 『창작과비평』지를 통해서였다. 각종 금기에 묶여 있던 데다 서구 예술사학계의 동향이 미처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르놀트 하우저와 이 책은 이후 유럽 예술사학, 특히 진보적 좌파 예술사학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마치 1951년 영어판으로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독일어판은 1953년) 이 책이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누린 것과 비슷한 정도의 은근한 인기와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이다.『창작과비평』의 번역·연재분에 새로운 부분을 추가해 1974년에는 이 책의 가장 뒷부분이 '현대 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81년까지'고대·중세 편', '근세 편 상','근세 편 하'라는 부제를 달고 모두 4권의 분량으로 완간되었다.
이 책의 여러 미덕 가운데 첫째로는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까지 인류 문화사상의 거의 전 시기와 분야를 통괄하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꼽는다. 마흔여덟의 나이로 이후 10년에 걸친 이 방대한 저술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하우저는 부다페스트·베를린·빠리·로마·빈 등 유럽 각지의 대학과 일터에서 문학·미술사·철학·사회학·역사학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섭렵했고,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새로운 예술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영화사의 홍보과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지식은 책만의 산물이 아니라 체험의 산물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사회·경제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그에 따라 개별 작품들과 사회역사적 상황을 적절히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그 예술사적 의미를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은 어떤 사회과학적 이론에 얽매인 잣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작품 개개에 대한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분석과 함께 예술 자체에 대한 유연한 태도가 더욱 돋보인다. “모든 예술은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져 있지만 예술의 모든 측면이 사회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저자의 이러한 기본자세로 하여 25년여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책은 서양예술사를 비판적으로 개관하는 가장 좋은 자료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첫 소개부터 완역까지 15년이 걸린 작업 속에서도 미진함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이 해를 거듭할수록 구투(舊套)의 번역어와 옛날식 표기들이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갈급한 상황으로 원서의 가장 뒷부분이 창비신서 1권으로 번역·출간되어 순서가 다소 바뀐데다가, 책의 부제에서 보듯 시기 구분 역시 자의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개정판에서는 현재 맞춤법에 따른 정확한 표기와 시대감각에 맞는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고 책의 순서를 바로잡았으며 부제도 원서에 따라 새로 달았다. 특히 3·4권의 경우 당시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서에 없는 장 제목들을 만들었던 것을 본래대로 돌려놓고 양식에 따른 장 제목들을 붙였다. 번역에 있어서는, 시기를 두고 따로 출간되어 두서없는 용어들을 모두 통일하였고 서양사·미술사 분야에서 통용되는 전문어들을 찾아 넣었다. 또한 그간 우리 지식사회의 성장을 반영하여 옮긴이 주를 일일이 검토한 뒤 적절히 교체, 추가 또는 삭제하였다. 본문 중에 소개되는 예술작품들의 도판을 새로 넣어 책의 이해를 도운 것이 개정판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전 4권 총 129컷의 흑백 도판을 본문중에 삽입하였고, 그중 중요한 작품들은 따로 권별 컬러 화보를 만들어 책 첫머리에 붙였다. 이로써 하우저의 이 책은 다시 또 한 세대의 지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인터파크 제공]
2. 내 마음속에 들어온 글귀
제1장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1. 1830년의 세대
도처에서 우리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생활양식에 부딪히고 그래서 스스로 과거와 단절된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문학에서만큼 그 단절이 심한 분야는 없을 것이다. 이미 단순한 역사적 관심거리로 변한 과거의 문학과, 이 시기에 성립되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현대적 의의를 가지는 새로운 문학 사이의 경계는 에술사상 가장 뚜렷한 단절을 보여준다. 그 경계 이후의 작품들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의 인생문제와 직접 관계를 가지는 살아 있는 현대의 문학이 성립된다. p13
19세기의 토대
19세기 혹은 '19세기'라는 말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시대는 1830년경에 시작한다. 19세기의 토대 윤곽, 즉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질서, 그 여러 원리와 모순이 여전히 계속되는 경제체제, 그리고 대체로 오늘날에도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가지고 있는 문학이 형성된 것은 겨우 7월 왕정 기간 중이다.
스땅달과 발자끄의 소설은 우이 자신의 생화, 즉 우리 자신의 인생문제, 과거의 세대들은 알지 못했던 도덕적 어려움과 갈등을 다룬 최초의 책들이다. p14
작가와 독자층
그들은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미리 발견하여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대중의 개념체계와 사고범주와 가치기준을 창조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독자의 나팔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이익대변인이자 교사이고 나아가서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성직자 같은 권위를 되찾기까지 하는 것이다. p18
사회주의 이론의 대두
이른바 ‘자유주의적’ 지배정당은 그래서 혁명적인 반대세력들에게 완전히 포위되며, ‘시민군주’라고 하던 루이 필리쁘는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와 완전히 대립하게 된다. p23
저널리즘과 문학
1830년부터 1848년 사이에 생활의 정치화가 진행됨에 따라 문학에서의 정치적 경향도 강화되었다. p25
문학과 일간신문의 결합은 어느 동시대인의 의견에 따르면 공업적 목적을 위한 증기의 사용처럼 혁명적인 효과를 가지며, 문학적 생산의 모든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p26
신문소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연재소설이었다. p27
문학작품은 이제 문자 그대로‘상품’이 된 것이다. p28
연재소설은 문학의 유례없는 대중화, 독자대중의 거의 완전한 평준화를 의미한다. p30
낭만주의의 변모
1848년까지는 대부분의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이 행동주의적인 방향을 취했고 그 이후엔 정적주의로 변모한다. 스땅달의 환멸은 그래도 공격적ㆍ외향적ㆍ무정부주의적이지만 플로베르의 체념은 수동적ㆍ자아 중심적ㆍ허무주의적인 것이다. p31
‘예술은 위한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는 낭만주의에서 유래했고 자유를 위한 투쟁의 한 수딘을 대변한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예술이론의 결과이며 어느정도는 그 결산이기도 하다.
시민계급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예술의 이상적 본성과 정치를 초월하는 예술가의 높은 서열을 강조한다. p33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는 사실 한편으로는 산업주의와 보조를 같이하여 진행된 분업화의 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ㆍ기계화된 생활에 먹혀들어갈 위험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예술의 방파제 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예술의 합리화∙ 탈미술화∙ 협소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생화의 일반적인 기계화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독자성과 자발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p34
1830년경의 자연주의
1830년경의 예술적 주류들-‘사회적 예술‘,’양식파’ 그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은 복합적이고 흔히 모순된 상호관계로 얽혀 있다. p25
자연주의는 동일한 자연의 개념에 확고하게 근거를 둔 잔일하고 명백한 예술관이 아니라, 수시로 변모하면서 그때마다 일정한 목적과 구체적 과제를 지향하는, 그때그때 특별한 연상을 초점을 두는 인생해석이다. p36
근대적 사회소설의 현성
소설의 역사는 중세의 기사들에 관한 서사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p37
소설양식의 발전과정에서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형태인 교양소설에서 내면화의 경향은 한층 강력하게 표현한다. p39
사회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관해서 일체의 환상을 허락치 않는 냉철한 현실사회 분석에서 그들의 비관주의가 생겨난다. p41
사회소설
스땅달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를 묘사하는 데도 무엇보다 ‘국가의 메커니즘’에 주의를 집중한다. 발자끄는 이와 달리 자기 사회구조의 기초를 경제에 두고, 어느 정도 사적 유물론의 학설을 앞질러 체현하고 있다. p42
스땅달의 정치적 연대기
스땅달에게 새로운 사회는 무엇보다도 그 통치형태에 의해서, 권력의 교체와 계급이라는 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의 변화에 의해서 예 사회와 구별된다. 자본주의 체제란 그에게 있어 정치적 개조의 결과인 것이다. p44
낭만주의와의 투쟁
스땅달은 엄격한 합리주의자요 실증주의자이다. p51
스땅달의 낭만적 경향
스땅달의 소설들은, 무엇보다 마음의 움직임과 감정의 메커니즘과 작자의 정신활동을 포착하려고 하는 일기장과 스케치들의 집합 같은 느낌을 준다. 표현과 고백과 주관적 전달이 진정한 목적이며, 체험의 흐름 및 그 흐름의 리듬 자체가 정말 소설의 대상인 것이다. p55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의 심리학과 연대적 심리학
스땅달 예술의 심리적 수법의 핵심은 독자를 움직여서 작과의 관찰과 분석에 적극 참여하도록 자극할 것을 꾀하는 데 있다.
스땅달의 심리적 수법은 개성의 논리적 통일성이 아니라 인물들의 개별적인 태도 펴명에 근거를 두며, 그림의 윤곽이 아니라 그 음영과 색가(色價,valeuer)를 강조한다. p56
발자끄의 사회학
발자끄의 인물들은 스땅달의 인물들에 비하면 수미일관하고 모순되며 문제성이 적다. 그들은 어느 정도 고전적∙낭만적 문학의 심리학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p58
자본주의의 병리학
돈은 인간을 자기에게서 소외시키고, 이상을 파괴하며, 재능을 타락시키고, 예술가와 시인과 학자를 더럽히며, 천재를 범죄자로 만들고, 타고난 지도자를 모험가나 노름꾼으로 만든다. p62
사고의 이데올로기성
발자끄와 맑스 사이의 근복적 차이는<인간극>의 작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여타의 계급투쟁과 똑같이, 즉 이익과 특권을 위한 투쟁으로 판단한 데 있다. p64
‘리얼리즘의 승리’
발자끄의 세계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실을 냉정하고 정직하게 관찰하는 리얼리즘이다. p65
발자끄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작가의 사고와 감정이입을 통해 독특하게 고안된 것이다. p68
연작 형식의 재흥
모든 예술작품은 가장 자연주의적인 것조차도 현실의 이상화이며, 하나의 전설, 일종의 유토피아이다. p68
발자끄 예술의 비밀
발자끄는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문학의 순수 예술성에서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의 심미주의에 이르는 발전 사이에 끼인 일시적인 현상을, 예술이 눈앞의 생활문제에 완전히 흡수된 짧은 시간을 대변한다. 19세기의 작가 중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발자끄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예술적 순수주의와 관계가 더 적은 작가는 없다.
발자끄의 소설은 그야말로 모든 미학적 규범을 무시하고도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인 것이다. p72
발자끄의 미래상
발자끄가 그의 작품에서 자신의 세대보다 다음 세대의 모습을 더 잘 그린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이미 지적해온 사실이다.
발자끄는 관찰보다 미전이 더 강했던 문학적 예언자의 한 사람이다. p74
그는 그 자신 속에서 이미 불씨를 죽여버린 것이다.
그는 생활과 대중으로부터 예술이 소외된 결과를 인식했으며, 예술을 위협하는 심미주의와 허무주의와 자기파괴의 위험을 가장 학식 있고 날카로운 동시대인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제2제정하의 무서운 현실로 될 것이었다. p75
3. 내가 저자라면
책 부피도 그다지 부담되지 않고, 종이 재질도 보기 드물게 매끄러워 기분 좋게 빼들면서 “역시 창작과비평사는 달라, 표지 디자인도 잘 꾸몄네.” 하고는 무심히 고른 것이 그만 함정이었던가. 유라시아제국사의 징기스칸 이야기처럼 해당부분을 그냥 읽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뿔싸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낱권으로 제작되어서 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내용이 세계적 작품을 심도 있게 다루며 문학과 예술을 사회사적으로 고찰해서 그런지 쉽지가 않다.
솔직히 책을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계절 탓인지 긴장이 풀렸는지 그저 졸리기만 했고, 지난번의 호이징하의 호모루덴스란 책처럼 읽다보면 딴 생각이거나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고 있어서 몇 번이나 되돌이표로 돌아갔지만, 예를 든 작품들의 내용을 몰라 그런지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가 되어 여전히 억지로 읽혀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건데, 이유는 내용을 모르고 비평을 들을 때처럼 집중이 안 되어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인용문을 쓰려고 보니 도대체 어디서 끊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게 스리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그것도 여간 곤란한 사항이 아닌데다가, 거의가 모르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불어나서 정리하여 쓰기에도 벅차게 느껴졌다.
어쨌든 이토록 조목조목 숨도 쉬지 않고 계속 연결하고 비교 분석하여 이어지는 저자의 주장을 보자니, 그 방대한 지식과 해박함에 가히 고개가 절로 가로 저어진다. 현재로서는 다시 찬찬히 살펴보기 전에는, 그리고 책에 나오는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좀 더 깊은 탐구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내게는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겠다. 그러나 이름만 대면 금방 알만한 석학들이 이 책을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니 꼭 다시 읽고 느껴야 할 것이리라.
이 책은 총4권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제1권은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의 내용을 다루었고, 제2권은 르네쌍스ㆍ매너리즘ㆍ바로크를 내용으로 하며, 제3권은 로코코ㆍ고전주의ㆍ낭만주의를 설명하였는데,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나중 내용인 제4권 자연주의와 인상주의ㆍ영화의 시대를 읽었다.
제4권 자연주의와 인상주의ㆍ영화는 다시 제2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장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파트는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으로 차지하였고, 제2장 영화의 시대 부분의 내용은 그리 많지가 않다.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의 해박한 사회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서양의 문학과 예술을 설명한 개설서이다. 제 1권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에서 제 4권 20세기 초의 영화예술에 이르기까지 서양문화를 저자의 독특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총정리 하였다. 또한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사회ㆍ경제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개별 작품들과 사회역사적 상황을 적절히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그 예술사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문학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고 그 시대의 환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문예사의 여러 단계마다 역사와 사회적 통일체 즉 시대, 민족, 지역 등에 따라 각각의 문예사조를 인정하게 되고, 이는 역사적 양식으로서 파악될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문주의적 교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예술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지식과 원근법적인 인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여러 추천인들은 말하고 있으나 내겐 역시나 어렵게 느껴졌다.
IP *.70.72.121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ser:
1892년 헝가리 출생으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문학사가, 예술사회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이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부다페스트, 비엔나, 베를린, 빠리 등지의 각 대학에서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를 전공하였으며, 미술사가 마르크스 드보르자크,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 등으로부터 배웠다.
G. 루카치, 만하임 등과 함께 1910년대 말 부다페스트 ‘일요 써클의 일원으로 활동(1915~1917년)하였다.
부다페스트 대학 교수로 잠시 재직한 뒤, 1921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수학하고, 헝가리 소비에트정권 붕괴 이후 비엔나로 망명(1차 세계대전 후 중부 유럽을 휩쓸었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카치와 함께 헝가리 정치에 관여했지만 1919년 혁명정부가 무너지자 50여년의 긴 망명길에 오른다.) 하였으며, 1938년 나찌의 비엔나 점령 후 런던으로 이주했다.
1951~1957년 영국 리즈대학 전임강사를 거쳤으며,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영국으로 유랑하며 생존문제로 고통 받으면서 그는 47~57세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썼으며, 1978년 타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에『예술의 철학』(1958),『예술연구의 방법론』(1960),『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매너리즘 연구』(1968),『예술사회학』(1974),『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다.
[이 책 개정판에 대하여]
이 책이 처음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66년 『창작과비평』지를 통해서였다. 각종 금기에 묶여 있던 데다 서구 예술사학계의 동향이 미처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르놀트 하우저와 이 책은 이후 유럽 예술사학, 특히 진보적 좌파 예술사학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마치 1951년 영어판으로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독일어판은 1953년) 이 책이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누린 것과 비슷한 정도의 은근한 인기와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이다.『창작과비평』의 번역·연재분에 새로운 부분을 추가해 1974년에는 이 책의 가장 뒷부분이 '현대 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81년까지'고대·중세 편', '근세 편 상','근세 편 하'라는 부제를 달고 모두 4권의 분량으로 완간되었다.
이 책의 여러 미덕 가운데 첫째로는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까지 인류 문화사상의 거의 전 시기와 분야를 통괄하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꼽는다. 마흔여덟의 나이로 이후 10년에 걸친 이 방대한 저술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하우저는 부다페스트·베를린·빠리·로마·빈 등 유럽 각지의 대학과 일터에서 문학·미술사·철학·사회학·역사학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섭렵했고,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새로운 예술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영화사의 홍보과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지식은 책만의 산물이 아니라 체험의 산물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사회·경제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그에 따라 개별 작품들과 사회역사적 상황을 적절히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그 예술사적 의미를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은 어떤 사회과학적 이론에 얽매인 잣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작품 개개에 대한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분석과 함께 예술 자체에 대한 유연한 태도가 더욱 돋보인다. “모든 예술은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져 있지만 예술의 모든 측면이 사회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저자의 이러한 기본자세로 하여 25년여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책은 서양예술사를 비판적으로 개관하는 가장 좋은 자료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첫 소개부터 완역까지 15년이 걸린 작업 속에서도 미진함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이 해를 거듭할수록 구투(舊套)의 번역어와 옛날식 표기들이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갈급한 상황으로 원서의 가장 뒷부분이 창비신서 1권으로 번역·출간되어 순서가 다소 바뀐데다가, 책의 부제에서 보듯 시기 구분 역시 자의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개정판에서는 현재 맞춤법에 따른 정확한 표기와 시대감각에 맞는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고 책의 순서를 바로잡았으며 부제도 원서에 따라 새로 달았다. 특히 3·4권의 경우 당시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서에 없는 장 제목들을 만들었던 것을 본래대로 돌려놓고 양식에 따른 장 제목들을 붙였다. 번역에 있어서는, 시기를 두고 따로 출간되어 두서없는 용어들을 모두 통일하였고 서양사·미술사 분야에서 통용되는 전문어들을 찾아 넣었다. 또한 그간 우리 지식사회의 성장을 반영하여 옮긴이 주를 일일이 검토한 뒤 적절히 교체, 추가 또는 삭제하였다. 본문 중에 소개되는 예술작품들의 도판을 새로 넣어 책의 이해를 도운 것이 개정판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전 4권 총 129컷의 흑백 도판을 본문중에 삽입하였고, 그중 중요한 작품들은 따로 권별 컬러 화보를 만들어 책 첫머리에 붙였다. 이로써 하우저의 이 책은 다시 또 한 세대의 지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인터파크 제공]
2. 내 마음속에 들어온 글귀
제1장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1. 1830년의 세대
도처에서 우리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생활양식에 부딪히고 그래서 스스로 과거와 단절된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문학에서만큼 그 단절이 심한 분야는 없을 것이다. 이미 단순한 역사적 관심거리로 변한 과거의 문학과, 이 시기에 성립되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현대적 의의를 가지는 새로운 문학 사이의 경계는 에술사상 가장 뚜렷한 단절을 보여준다. 그 경계 이후의 작품들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의 인생문제와 직접 관계를 가지는 살아 있는 현대의 문학이 성립된다. p13
19세기의 토대
19세기 혹은 '19세기'라는 말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시대는 1830년경에 시작한다. 19세기의 토대 윤곽, 즉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질서, 그 여러 원리와 모순이 여전히 계속되는 경제체제, 그리고 대체로 오늘날에도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가지고 있는 문학이 형성된 것은 겨우 7월 왕정 기간 중이다.
스땅달과 발자끄의 소설은 우이 자신의 생화, 즉 우리 자신의 인생문제, 과거의 세대들은 알지 못했던 도덕적 어려움과 갈등을 다룬 최초의 책들이다. p14
작가와 독자층
그들은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미리 발견하여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대중의 개념체계와 사고범주와 가치기준을 창조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독자의 나팔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이익대변인이자 교사이고 나아가서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성직자 같은 권위를 되찾기까지 하는 것이다. p18
사회주의 이론의 대두
이른바 ‘자유주의적’ 지배정당은 그래서 혁명적인 반대세력들에게 완전히 포위되며, ‘시민군주’라고 하던 루이 필리쁘는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와 완전히 대립하게 된다. p23
저널리즘과 문학
1830년부터 1848년 사이에 생활의 정치화가 진행됨에 따라 문학에서의 정치적 경향도 강화되었다. p25
문학과 일간신문의 결합은 어느 동시대인의 의견에 따르면 공업적 목적을 위한 증기의 사용처럼 혁명적인 효과를 가지며, 문학적 생산의 모든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p26
신문소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연재소설이었다. p27
문학작품은 이제 문자 그대로‘상품’이 된 것이다. p28
연재소설은 문학의 유례없는 대중화, 독자대중의 거의 완전한 평준화를 의미한다. p30
낭만주의의 변모
1848년까지는 대부분의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이 행동주의적인 방향을 취했고 그 이후엔 정적주의로 변모한다. 스땅달의 환멸은 그래도 공격적ㆍ외향적ㆍ무정부주의적이지만 플로베르의 체념은 수동적ㆍ자아 중심적ㆍ허무주의적인 것이다. p31
‘예술은 위한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는 낭만주의에서 유래했고 자유를 위한 투쟁의 한 수딘을 대변한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예술이론의 결과이며 어느정도는 그 결산이기도 하다.
시민계급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예술의 이상적 본성과 정치를 초월하는 예술가의 높은 서열을 강조한다. p33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는 사실 한편으로는 산업주의와 보조를 같이하여 진행된 분업화의 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ㆍ기계화된 생활에 먹혀들어갈 위험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예술의 방파제 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예술의 합리화∙ 탈미술화∙ 협소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생화의 일반적인 기계화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독자성과 자발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p34
1830년경의 자연주의
1830년경의 예술적 주류들-‘사회적 예술‘,’양식파’ 그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은 복합적이고 흔히 모순된 상호관계로 얽혀 있다. p25
자연주의는 동일한 자연의 개념에 확고하게 근거를 둔 잔일하고 명백한 예술관이 아니라, 수시로 변모하면서 그때마다 일정한 목적과 구체적 과제를 지향하는, 그때그때 특별한 연상을 초점을 두는 인생해석이다. p36
근대적 사회소설의 현성
소설의 역사는 중세의 기사들에 관한 서사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p37
소설양식의 발전과정에서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형태인 교양소설에서 내면화의 경향은 한층 강력하게 표현한다. p39
사회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관해서 일체의 환상을 허락치 않는 냉철한 현실사회 분석에서 그들의 비관주의가 생겨난다. p41
사회소설
스땅달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를 묘사하는 데도 무엇보다 ‘국가의 메커니즘’에 주의를 집중한다. 발자끄는 이와 달리 자기 사회구조의 기초를 경제에 두고, 어느 정도 사적 유물론의 학설을 앞질러 체현하고 있다. p42
스땅달의 정치적 연대기
스땅달에게 새로운 사회는 무엇보다도 그 통치형태에 의해서, 권력의 교체와 계급이라는 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의 변화에 의해서 예 사회와 구별된다. 자본주의 체제란 그에게 있어 정치적 개조의 결과인 것이다. p44
낭만주의와의 투쟁
스땅달은 엄격한 합리주의자요 실증주의자이다. p51
스땅달의 낭만적 경향
스땅달의 소설들은, 무엇보다 마음의 움직임과 감정의 메커니즘과 작자의 정신활동을 포착하려고 하는 일기장과 스케치들의 집합 같은 느낌을 준다. 표현과 고백과 주관적 전달이 진정한 목적이며, 체험의 흐름 및 그 흐름의 리듬 자체가 정말 소설의 대상인 것이다. p55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의 심리학과 연대적 심리학
스땅달 예술의 심리적 수법의 핵심은 독자를 움직여서 작과의 관찰과 분석에 적극 참여하도록 자극할 것을 꾀하는 데 있다.
스땅달의 심리적 수법은 개성의 논리적 통일성이 아니라 인물들의 개별적인 태도 펴명에 근거를 두며, 그림의 윤곽이 아니라 그 음영과 색가(色價,valeuer)를 강조한다. p56
발자끄의 사회학
발자끄의 인물들은 스땅달의 인물들에 비하면 수미일관하고 모순되며 문제성이 적다. 그들은 어느 정도 고전적∙낭만적 문학의 심리학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p58
자본주의의 병리학
돈은 인간을 자기에게서 소외시키고, 이상을 파괴하며, 재능을 타락시키고, 예술가와 시인과 학자를 더럽히며, 천재를 범죄자로 만들고, 타고난 지도자를 모험가나 노름꾼으로 만든다. p62
사고의 이데올로기성
발자끄와 맑스 사이의 근복적 차이는<인간극>의 작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여타의 계급투쟁과 똑같이, 즉 이익과 특권을 위한 투쟁으로 판단한 데 있다. p64
‘리얼리즘의 승리’
발자끄의 세계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실을 냉정하고 정직하게 관찰하는 리얼리즘이다. p65
발자끄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작가의 사고와 감정이입을 통해 독특하게 고안된 것이다. p68
연작 형식의 재흥
모든 예술작품은 가장 자연주의적인 것조차도 현실의 이상화이며, 하나의 전설, 일종의 유토피아이다. p68
발자끄 예술의 비밀
발자끄는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문학의 순수 예술성에서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의 심미주의에 이르는 발전 사이에 끼인 일시적인 현상을, 예술이 눈앞의 생활문제에 완전히 흡수된 짧은 시간을 대변한다. 19세기의 작가 중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발자끄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예술적 순수주의와 관계가 더 적은 작가는 없다.
발자끄의 소설은 그야말로 모든 미학적 규범을 무시하고도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인 것이다. p72
발자끄의 미래상
발자끄가 그의 작품에서 자신의 세대보다 다음 세대의 모습을 더 잘 그린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이미 지적해온 사실이다.
발자끄는 관찰보다 미전이 더 강했던 문학적 예언자의 한 사람이다. p74
그는 그 자신 속에서 이미 불씨를 죽여버린 것이다.
그는 생활과 대중으로부터 예술이 소외된 결과를 인식했으며, 예술을 위협하는 심미주의와 허무주의와 자기파괴의 위험을 가장 학식 있고 날카로운 동시대인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제2제정하의 무서운 현실로 될 것이었다. p75
3. 내가 저자라면
책 부피도 그다지 부담되지 않고, 종이 재질도 보기 드물게 매끄러워 기분 좋게 빼들면서 “역시 창작과비평사는 달라, 표지 디자인도 잘 꾸몄네.” 하고는 무심히 고른 것이 그만 함정이었던가. 유라시아제국사의 징기스칸 이야기처럼 해당부분을 그냥 읽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뿔싸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낱권으로 제작되어서 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내용이 세계적 작품을 심도 있게 다루며 문학과 예술을 사회사적으로 고찰해서 그런지 쉽지가 않다.
솔직히 책을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계절 탓인지 긴장이 풀렸는지 그저 졸리기만 했고, 지난번의 호이징하의 호모루덴스란 책처럼 읽다보면 딴 생각이거나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고 있어서 몇 번이나 되돌이표로 돌아갔지만, 예를 든 작품들의 내용을 몰라 그런지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가 되어 여전히 억지로 읽혀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건데, 이유는 내용을 모르고 비평을 들을 때처럼 집중이 안 되어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인용문을 쓰려고 보니 도대체 어디서 끊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게 스리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그것도 여간 곤란한 사항이 아닌데다가, 거의가 모르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불어나서 정리하여 쓰기에도 벅차게 느껴졌다.
어쨌든 이토록 조목조목 숨도 쉬지 않고 계속 연결하고 비교 분석하여 이어지는 저자의 주장을 보자니, 그 방대한 지식과 해박함에 가히 고개가 절로 가로 저어진다. 현재로서는 다시 찬찬히 살펴보기 전에는, 그리고 책에 나오는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좀 더 깊은 탐구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내게는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겠다. 그러나 이름만 대면 금방 알만한 석학들이 이 책을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니 꼭 다시 읽고 느껴야 할 것이리라.
이 책은 총4권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제1권은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의 내용을 다루었고, 제2권은 르네쌍스ㆍ매너리즘ㆍ바로크를 내용으로 하며, 제3권은 로코코ㆍ고전주의ㆍ낭만주의를 설명하였는데,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나중 내용인 제4권 자연주의와 인상주의ㆍ영화의 시대를 읽었다.
제4권 자연주의와 인상주의ㆍ영화는 다시 제2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장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파트는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으로 차지하였고, 제2장 영화의 시대 부분의 내용은 그리 많지가 않다.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의 해박한 사회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서양의 문학과 예술을 설명한 개설서이다. 제 1권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에서 제 4권 20세기 초의 영화예술에 이르기까지 서양문화를 저자의 독특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총정리 하였다. 또한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사회ㆍ경제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개별 작품들과 사회역사적 상황을 적절히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그 예술사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문학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고 그 시대의 환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문예사의 여러 단계마다 역사와 사회적 통일체 즉 시대, 민족, 지역 등에 따라 각각의 문예사조를 인정하게 되고, 이는 역사적 양식으로서 파악될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문주의적 교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예술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지식과 원근법적인 인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여러 추천인들은 말하고 있으나 내겐 역시나 어렵게 느껴졌다.
댓글
1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써니
위에 인용문에 이어서...
2. 제2제정기의 문학
낭만주의자들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 작가의 사회적 지위가 떨어진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비우호적인 대중으로부터의 피난처를 개인주의에서 구했다. 그들의 실향감은 쓰디쓴 적대의식으로 나타났다.
다음 세대의 작가들은 한층 더 오만해져서 자신의 독립을 시위하는 것조차 사절하면서 비인격성과 무감각이라는 시위적인 베일 속에 스스로를 감추기에 이르렀다.
낭만주의 이래로 문학은 작가와 독자 간의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작가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예찬하는 행위로 변했다. p76
새로운 지배계급의 생활태도와 취미
제2제정기는 절충주의의 고전적 시대라 할 수 있다. p79
예술적으로 중요한 경향들이 이때처럼 당대인들에게 괄시받은 적은 없고, 다른 어느 시기에 관해서도 이처럼 미학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현상을 소재로 삼는 예술사나 문학사가 당시의 실제 예술생활을 그리는 데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진 적도 없다. 다시 말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진보적 경향들의 여사와, 일시적인 성공과 영향력으로 현재를 지배하는 경향들의 역사가 전혀 다른 두 계열의 사실을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제2제정기의 예술생활을 지배한 것은 물질적으로 안락하고 정신적으로 태만한 부르즈와지의 구미에 맞는 안이하고 기분 좋은 작품이었다.
저급하고 불확실하고 쉽게 만족되는 취미가 유행의 주도권을 잡은 반면,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들의 노력에 충분한 보상을 해줄 능력이 없는 소수 전문가계층의 소유물이 되었다. p80
자연주의의 개념
이 시기의 자연주의는 차후의 여러 발전 형태들의 싹을 모두 내포하고 있으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을 낳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끝내 재야파 예술-다시 말해 일반대중 틈에서는 물론 자신들 가운데서도 소수파의 스타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p80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습관을 지닌 낭만주의이다. 진실감에 대한 자연주의의 가정이 새롭기는 하나, 이러한 가정이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제나 자위적이게 마련이다. 자연주의와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후자의 과학주의, 즉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원칙을 적용한 데에 있다.
자연주의는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을 거의 전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서 가져온다. p81
꾸르베와 자연주의 미술
자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가의 운동에서 시작한다. 그 첫 대가는 꾸르베인데, 그는 서민대중 출신이며 부르즈와적 범절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는 예술가다.
「오르낭에서의 매장」이 전시되었을 때 샹플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부터 비평가들은 리얼리즘에 찬성이냐 반대이냐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 이 유명한 낱말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일상생활이 이처럼 솔직하고 잔인하게 그려진 적이 없기는 하지만 새로운 예술의 개념이나 그 실제 작품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p83
꾸르베와 그의 지지자들의 정열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신감은 자기들의 진리의 전위대요 미래의 선구자라는 신념에서 오는 것이다.
1850년대의 보수주의 비평가들은 자연주의에 대한 널리 알려진 반론들을 이때부터 이미 들고 나오며, 그들의 반자연주의적 태도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사회적 편견들을 미학적 논쟁의 전개로써 은폐하고자 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평론가들이 정말 꺼린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자연주의가 현실을 얼마나 모방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실을 모방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도미에(H. Daumier)는 국가의 지주가 되는 부르즈와지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브르즈와의 정치와 법률과 오락을 비웃고, 부르즈와적 관습과 예절 뒤에 감춰진 그 모든 도깨비놀음 같은 희극을 폭로한다. 여기서 주제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다 정치적 배려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p86
새로운 예술의 사회적 성격
풍경화조차도 기존 사회의 문화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 된다. p86
새로운 예술의 사회적 성격은 화가들 자신이 좀더 긴밀히 뭉치고 예술가촌을 만들고 생활양식 면에서 서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경향에서도 드러난다. p88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
자연주의 미술과 당시의 우아한‘벽 장식물’을 갈라놓은 것과 똑같은 간격이 당시의 본격적인 문학과 대중문학, 본격음악과 경음악 사이에 존재했다.
낭만주의는 아직도 사회의 넓은 계층에 호소할 수 있는 대중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는데 반해, 자연주의는 적어도 그 가장 중요한 작품들에서는 일반 독자의 흥미를 끌 요소가 전혀 없게 된다.
예술에서 윤리문제를 떠난 접근법을 옹호하는 만큼,‘예술을 위한 예술’의 배격은 곧 자연주의에 대한 공격을 겸할 수 있었다. p94
자연주의의 승리
플로베르의 피소사건과 쎈세이션을 일으킨「보봐리 부인」의 성공은 자연주의를 둘러싼 싸움을 이 새 조류의 승리로 끝맺는다. p95
플로베르는 스스로 대혁명과 계몽철학의 정통적 후계자라 생각하며 당대의 정신적 타락을 볼떼르에 대한 루쏘의 불행한 승리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p96
플로베르와 낭만주의
플로베르는 비낭만적인 18세기의 마지막 유물인 합리주의에 집착한다. p96
플로베르에 있어 유미주의는 낭만주의에 있어 그것이 가졌던 사회학적 의미에 비할 수 있는 이미 참을 수 없게 된 현실로부터의 일종의 도피인 것이다.
플로베르는 작품을 씀으로써 낭만주의에서 벗어난다.
그는 낭만주의의 허황된 꿈의 허위성과 불건전함을 폭로하기 위해 낭만적 꿈의 세계를 일상생화의 현실과 직면 시키는 자연주의자가 된다. p97
그러나 플로베르의 개성배제와 중립성은 그의 자연주의의 논리적 귀결만은 결코 아니며, 예술작품에서 대상은 그것 자체의 생생한 실감을 통해 효과를 거두어야지 작자 자신의 개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미학적 요구에 일치하는 것만도 아니다. p98
플로베르의 비정함은 단순한 하나의 수법상의 원칙이 아니라 예술가의 새로운 도덕관념, 새로운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말하기 위해서 태어났지 소유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하나의 예술관 및 세계관으로서 낭만주의의 출발점을 이루었던 저 삶의 포기가 가장 극단적이고 철저한 형태를 취한 것이요, 동시에 플로베르의 분열된 감정의 논리 그대로 그것은 낭만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거부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p99
혼란되고 자기도취된 젊은 시절의 낭만적 기질이 그를 인간으로서 및 예술가로서 파멸시킬 뻔했다는 깨달음에서 플로베르는 새로운 생활양식과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냈다.
플로베르는 ‘관념’과 ‘육신’의 구별이나 예술을 위해 삶을 버리는 결단 자체가 사실은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비낭만적인 해결은 오직 삶 자체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p99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이 사회생활의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은 플로베르 이후의 일로서 7월 왕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p100
풀로베르와 시민계급
낭만주의에 대한 풀로베르의 반감은 하나의 인간형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반발심, 무책임한 몽상가와 이상주의자에 대한 그의 혐오감과 직결 되어 있다. p101
유미주의적 허무주의
그러나 플로베르의 유미주의 같은 입장은 결코 단순 명백하고 최종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항상 그 방향을 바꾸며 스스로를 의문해보는 변증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p102
예술은 낭만주의와 갈등을 겪으면서 그 자연발생적인 활력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예술가가 자기 자신, 자기의 낭만적 근원, 자신의 성향 및 충동과 싸우는 가운데 쟁취하는 대상이 되었다. p103
보바리 부인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은 이중의 의미에서 진실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낭만주의뿐 아니라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자신이 맡은 문단의 심판자적 역할 역시 하나의 환상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자주 가졌음에 틀림없다. p105
자기기만과 삶의 변조에서, 누군가 플로베르의 철학을 일컬어 말한 단어를 빌린다면 이러한 ‘보바리의주의’에서, 플로베르는 건드리는 것마다 왜곡하고 마는 현대적 주관성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다. 우리가 현실을 하나의 왜곡된 변형을 통해서만 체험하며 우리들 사고 작용의 주관적 형식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느낌은『보바리 부인』에서 처음으로 그 완벽한 예술적 표현을 얻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프루스트의 환각주의까지는 거의 직코스인 셈이다.
의식에 의한 현실의 변형은 칸트가 이미 지적한 문제로서, 이러한 왜곡작용은 19세기를 통해 때로는 의식적인 요소가 더 많고 때로는 무의식적인 면이 더 큰 자기기만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역사적 유물론, 정신분석학 등 그것을 파헤치고 밝혀내려는 많은 노력을 불러일으켰다. p106
플로베르의 시간관
하나는 별 쓸모없는 낭만적인 시골 여인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재산도 있고 웬만큼 재주도 있지만 자신의 지적 능력과 재능을 낭비해버리는 어느 부르즈와 젊은이의 이야기인 플로베르의 두 주요 소설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p106
비극 형식의 근저에는 인간을 단 한 번의 결정타로 파멸시키는 초시간적 운명의 개념이 있듯이, 소설 형식의 원리는 삶을 좀먹어 들어가는 시간의 개념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비극에서 ‘운명’이 초인적 스케일과 형이상학적 힘을 갖는 것처럼 소설에서는 ‘시간’이 거대하고 거의 신화적인 차원에 다다르는 것이다. 플로베르는『감정교육』에서- 이 소설이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만- 지나가는 시간 및 지나간 시간이 항상 우리 삶에서 현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했다. p107
졸 라
플로베르는 19세기의 감정곡선에 있어서 가장 낮은 한 점을 표시한다. 졸라의 작품은 우울한 어조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나타내며 낙관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p108
이 부르즈와의 세계관은 낙관적인 요소나 비관적인 요소와 관련되는 한에서 하층계급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이고 모순되어 있다.
졸라의 모든 과학적 사고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성격을 지니며, 개량주의적ㆍ개화주의적인 계몽철학의 정신으로 채워져 있다. p109
졸라의 연작소설에 바탕이 되는 기본 관념은 마치 하나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계획처럼 보인다. p111
부르즈와지의 ‘이상주의’
급진적인 유물론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러한 경향 때문에 자연주의 문학은 극히 환상적인 현실상을 내보인다.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의 예술이 생산된 시기인 제2제정기는 동시에 현대를 풍미하고 있는 악취미와 비예술적 통속물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대중이 알면서도 일부러 자기의 수준 밑으로 내려간 ‘휴식’으로서의 예술,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은 이 시기의 발명인데, 그것은 모든 창작형태를 지배하지만 특히 가장 거침없고 과감함 대중예술인 연극에서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p113
새로운 연극관객
소설과 회화에서는 그래도 부르즈와지의 취미에 맞는 경향과 더불어 자연주의가 번성하지만, 연극에서는 부르즈와지의 흥미와 생각에 반대되는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p114
근대 프랑스 연극사의 결정적 전환점은 스크리브에 의하여 대변된다. p115
가정의 우상화
시민계급의 삶을 이상화하는 작업의 기초로서 결혼과 가족이란 제도만큼 적합한 것은 없었다.
부르즈와 연극에서는 사랑의 의미와 가치가 그 지속성에 있고, 일상적 결혼생활의 시험을 견뎌낸다는 데 있다. p116
‘잘 만들어진 각본’
제2제정기는 낭만주의 시대와 반대로 합리주의와 반성과 분석의 시기이다. p118
무엇보다도 전혀 뜻밖의 사건전환에 대한 관중의 기대, 그 의식적인 자기기만과 게임 규칙의 저항 없는 수락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약속인 것이다. p119
‘대단원’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다. 해답이 틀리다면 계산 전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뒤마 2세는 말한다. p120
발전의 연속은 혁명 이후의 멜로드라마와 보드빌르, 18세기의 가정극과 희극, 꼬메다아 델라르떼와 몰리에르를 거쳐 로마의 희극과 중세 소극의 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에 대한 ‘잘 만들어진 각본’ 작가들의 공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p122
오페레타
제2제정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여러모로 가장 의미심장한 예술적 창작은 오페레타이다. p122
오페레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기이하게 느껴지는 점은 그 환전한 비현실성이요, 잇따라 지나가는 장면들의 가공적∙환상적인 성격이다. p123
오페레타는 철저한 ‘자유방임’의 세계, 즉 경제적∙사회적 및 도덕적 자유주의의 서계, 누구나 체제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세계의 산물이었다. p124
오페레타의 성장은 음악에 대한 저널리즘(시사성)의 침투를 뜻한다. p126
로씨니는 오펜바흐를 ‘샹제리제의 모차르트’라 불렀으며, 바그너도 이 판단에 동의했다(물론 선망의 라이벌이 죽은 뒤에야 그랬지만). p127
오페레타는 이제 근심과 위험이 없는 행복한 생활의, 그러나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전원목가의 그림처럼 보이게 되었다. p128
그랜드 오페라
‘종합예술’이란 관념은 여기서 바그너보다 훨씬 앞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 아무도 그것을 계획적으로 정식화할 생각을 하기 이전에 당신들의 어떤 필요를 표현했다. p129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
당대의 모든 중요한 대표자들 중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양식에 가장 가까이 전급해 있다. p130
바그너가 ‘그랜드 오페라’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훨씬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가장 내면적이요 사적이며 가장 승화된 감정의 표현을 제2정기의 화려한 허식과 결합시킨 형식에 그가 계속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p131
3. 영국과 러시아의 사회소설
이성주의자와 공리주의자
산업주의의 경제적 원리를 대변한 공리주의자들은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제자들로서, 그들은 저절로 움직이도록 방임해두는 경제가 자유주의의 정신에 일치될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의 이익에도 가장 잘 합치된다는 이론을 주창하였다.
공리주의에 대한 반동이 제2의 낭만주의를 낳았는데, 이 제2의 낭만주의에서는 사회적 부정에 대한 투쟁과 ‘음울한 학문’(dismal science, 칼라일이 경제학을 비꼬아서 한 말-옮긴이)의 구체적 학설에 대한 반대보다, 반공리주의자들로서 해결할 능력도 의욕도 문제에 가득 찬 현재로부터 버크(E. Buke, 1729~97)와 코울리지(S.T. Coleridge)와 독일 낭만주의의 비합리주의로 도피하려는 충동이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다. p136
제2의 낭만주의 운동
1832년에서 1848년까지의 기간은 가장 날카로운 사회적 위기의 시대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유혈적 충돌로 점철된 불안의 시기다. p136
당대의 문학은 낭만적 향수로 가득 차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와 상업주의와 근대사회의 사정없이 비인간적인 경쟁과 싸늘한 현실의 법칙들이 없는 중세와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으로 채워져 있다. 디즈데일리의 봉건주의는 정치적 낭만주의요, ‘옥스퍼드 운동’(1883년경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창조된 영국 국교준봉國敎(덧말:국교)遵奉(덧말:준봉)운동)은 종교적 낭만주의이며, 칼라일의 당대 문화 비판은 사회적 낭만주의요, 러스킨(J. Ruskin)의 예술철학은 미학적 낭만주의로서 이 모든 이론과 경향들은 자유주의와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현재의 복잡한 문제성을 떠나서 더 높은 초인간적ㆍ초자연적 질서에서, 개인주의ㆍ자유주의 사회의 혼란을 벗어난 어떤 영구불변의 상태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것이다. 가장 크고 유혹적인 목소리는 칼라일의 음성으로서, 그는 무쏠리니(B. Mussolini)와 히틀러(A. Hitler)로의 길을 준비한 마법의 풍적수風(덧말:풍)笛手(덧말:적수)들 중에서 최초이자 가장 개성적인 인물이었다. p138
러스킨의 심미적 이상주의
러스킨은 칼라일의 직법 후계자다. 그는 칼라일에게서 산업주의와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논지를 인계받고, 영혼과 신이 사라져버린 근대문명에 대한 칼라일의 탄식을 되풀이하며, 중세와 기독교적 서구의 공동체 문화에 대한 열광을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추상적인 영웅숭배를 의미 있는 미의 예찬으로, 막연한 사회적 낭만주의를 구체적 과업과 분명히 정의할 수 있는 목표를 가진 하나의 심미적 이상주의로 변형시켰다. p138
빅토리아조 회화의 주제는 역사∙시∙일화로 충만되어 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문학적인’ 회화인데, 이렇게 문학적 요소를 많이 포함해서라기보다 회화적 가치가 너무나도 빈약해서 유감스러운 하나의 잡종예술이다. p139
라파엘 전파
라파엘 전파의 그림은 빅토리아조의 다른 모든 예술과 똑같이 문학적이요 ‘시적’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주의, 그 역사적ㆍ종교적 및 시적 테마, 종교적 알레고리, 그리고 동화의 상징성을 풀잎 하나, 치마 주름 하나 놓치지 않고 상세한 부분까지 그대로 재생하는 일종의 사실주의와 결합시킨 것이다. p140
라파엘 전파는 대부분의 빅토리아인처럼 이상론자요 도덕가이며 위선적인 관능파인 것이다.
라파엘 전파의 미술은 하나의 심미주의적 운동, 극진한 미의 예찬, 예술을 근거로 한 생활의 평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리스킨의 예술철학 자체가 벌써 그러한 것처럼 ‘예술을 위한 예술’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최고 가치가 ‘선량하고 위대한 영혼’의 표현에 있다는 명제는 모든 라파엘 전파의 확신과 일치했다. 그들은 명랑하고 향락적인 형식주의자들임은 사실이나, 자기들의 형식과 유희가 더 높은 목적과 교육적 효과를 가진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p141
월리엄 모리스
빅토리아 시대의 일련의 대표적 사회적인비평가들 중에서 제3의 인물인 월리엄 모리스는 사상 면에서 러스킨보다 휠씬 더 수미일관되고 실천적인 면에서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p143
문화적 문제로서의 기술
러스킨은 예술의 타락 원인을, 현대 공장의 기계적 생산방식과 분업이 노동자와 노동 사이의 어떤 내적인 관계를 막는다는 사실, 즉 노동의 정신적 요소가 제거되고 생산자가 자기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에서 찾았다. p144
예술의 전역사는 표현의 기술적 수단의 계속적인 혁신과 개선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p145
월리엄 모리스는 수공업에 대한 열광에서뿐 아니라 기계적 생산에 대한 편견에서도 러스킨을 뒤따르지만, 그는 기계의 기능을 자기 스승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p146
사회소설의 형성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과 문명비평에서 거론되던 사회적 제현상은 또한 당시 영국 소설
근대적 사회소설은 프랑스에서와 같이 영국에서도 1830년경에 성립하여 나라가 혁명의 벼랑에 서 있던 1840년부터 1850년까지의 소란스러운 시기에 그 절정을 맞이한다. p148
의 주제를 이룬다. p146
월터 스콧에 이르러서 비로소 소설은, 디포우나 필딩 또는 리처드슨이나 스몰렛(T. Smollett, 1721~71)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다시 ‘사회적'으로 된다. p148
1816년부터 1850년까지 영국에서는 평균 잡아 매년 100편의 소설이 나오고 대부분의 소설류인 1853년의 간행서적은 25년 전에 나온 작품의 세배에 이른다. p149
소설의 월간출판은 근본적으로 신문 연재소설의 등장에 대응하는 책판매의 혁신을 뜻하며,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비슷한 결과들을 낳았다. p150
다킨즈의 대중성과 위대성
다킨즈의 성공은 동시에 새로운 출판방식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는 작품을 사서 읽고 즐기는 과정 즉 문화적 소비의 민주화에 따른 모든 혜택과 손해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의 대중성은 그의 작가적 위대성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될 뿐이다. p150
다킨즈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성공적인 문필가의 한 사람이며, 아마도 근대의 위대한 작가들 중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중작가란 디킨즈와 반대로 언제나 독자에게로 기어내려 가야만 한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체스터턴(G.K. Chesterton, 1874~1936, 영국의 소설가, 문필가)은 옳게 지적했다. p151
영화가 우리 시대의 ‘동시대적 예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은 생생한 당대적 문학이었으며, 그 예술적 결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살아 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예술이라는 탁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p153
디킨즈의 사회의식
디킨즈는 처음부터 예술적 및 이념적으로 진보적인 무학의 새로운 타입을 대변했다. p153
디킨즈는 자기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다. 한편으로 그는 사회에 대해서 지극히 매섭게 비난을 퍼붓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승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회악의 영향범위를 과소평가한다. p154
디킨즈는 생활과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사실적 예술의 한 대표자요 ‘자잘한 진실들’을 나열하는 수법의 완벽한 대가일 뿐 아니라, 영국 문학에 그 가장 중요한 자연주의적 업적을 보태준 예술가이다. p157
빅토리아조 중기의 소설
빅토리아 시대의 독서층은 이미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는 두 개의 써클로 나뉘어졌으며, 디킨즈는 상류계급의 독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받지 못한 마구잡이 대중들의 작가로 통했다. p158
1851년의 세계박람회는 영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빅토리아조의 중기는 초기에 비하여 번영과 안정의 시대인 것이다. p159
죠지 엘리어트의 세계관은 이 시대의 정치적 분위기를 특히 잘 대표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 사회현실은 이미 서술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죠지 엘리어트는 언제나 인간들 상호간의 의존관계를, 그들이 자기 주위에 만들어놓고 행동과 말 하나하나로 그 작용력을 넓혀가는 자장을 묘사한다. 사회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적극적인 현실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 견뎌야 하며 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p160
죠지 엘리어트
영국 소설사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은 죠지 엘리어트의 작품과 함께 완수된다. 외적 사건과 모험 대신에, 사회적 문제와 갈등 대신에 도덕적 문제와 위기가 작중상화의 중심에 서게 된다. p160
죠지 엘리어트는 영국 소설에서 지식인을 적절하게 묘사할 줄 안 최초의 인물이다. p161
발자크의 강점은 체험의 묘사이고, 죠지 엘리어트의 강점은 체험의 분석이다. 지성의 힘으로 그녀는 하나의 새로운 이상과 ‘좌절된 인생’에 대한 새로운 개념에 도달하며, 그리하여 그녀는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이 거의 예외 없이 속해 있는 저 ‘실패한 인간들’의 계열에 하나의 새로운 타입을 첨가한다. p162
부르즈와지와 지식인
그러나 죠지 엘리어트의 주지주의는 사회소설의 심리화에 대한 진정하고 최종적인 근거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문제가 심리적 문제 뒤로 물러나게 되는 발전의 한 증상일 뿐이다. p162
지식인은 브르즈와 계급에서 태어났고, 그 선구자는 프랑스 대혁명에의 길을 준비한 시민계급의 저 전위였다. 그들의 문학적 이상은 계몽주의적ㆍ자유주의적인 것이며, 인간적 이상은 인습과 전통에 속박 받지 않는 자유로운 진보적 인간성의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p164
중세의 수도사와 반대로 근대 지식인은 재산 정도와 직업이 각기 다른 여러 계층의 출신자들로 성립되고, 따라서 서로 다른 계층들의, 때로는 적대적인 계층들의 이해와 관점을 대변한다. p165
보헤미안에게 있어서는 지식인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접촉점은 이런 일반적 공감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실상 보헤미안들은 그들 자신이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이다. p166
러시아의 지식인
근대 러시아 소설은 본질적으로 러시아 지식인의 산물인데, 이들은 제정 러시아의 기성체제와 결별한 정신적 엘리트들로서 문학은 무엇보다도 사회비판으로, 그리고 소설은 ‘사회소설’로 이해한다. 러시아에서는 사회적 의의 또는 효율성을 내세우지 않는 단순한 오락문학이나 순수한 심리분석으로서의 소설은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장르이다.
러시아에서 지식인의 개념은 항상 행동주의의 개념과 직결되어 있고, 민주주의적 반대세력과 지식인 간의 연관은 서구에서보다 훨씬 긴밀하다.
근대 러시아 문학은 온통 반항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p167
새로운 교양계층은 귀족과 평민을 아울러 포함하고, 상∙하층의 계급 이탈자들로 보충되는 잡다한 집단이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12월 당원과 비슷한 세계관을 지닌 이른바 ‘참회하는 귀족’들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서는 소상인∙하급관리∙도시의 성직자∙해방된 농도 등의 아들로서 흔히 ‘혼합된 형통의 사람들’이라 불리며 그중 대부분은 ‘자유로운 예술인’, 학생, 가정교서, 신문기자 등의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p168
서구파와 슬라브파
서구지형적인 지식인의 합리주의에 자극되어 슬라브주의라는 형태로 일어나는 지적 반작용은 유럽에서 이보다 반세기 앞서 프랑스 대혁명에 대i한 반동으로 일어난 낭만주의적 역사주의와 전통주의에 대응하는 것이다. p169
슬라브주의가 보수주의나 반동주의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파 중에도 민주주의의 반대자가 있는 것처럼 슬라브파 가운데도 참된 민중의 벗이 있는 것이다. p170
이제 슬라브파와 서구파는 그들의 목표보다도 투쟁방법으로 서로 분간하기 쉬워진다.
러시아의 모든 정신적 엘리트들은 루쏘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예술과 문학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p171
러시아인들은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소외, 그리고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이라는 유럽의 운명적인 대문제를‘자유’의 문제로 정립했다.
서구의 소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독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파멸하는 개인을 묘사함으로써 끝나는 데 비해, 러시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그리고 같은 여자들의 사회에서 이탈하도록 하려는 악령과의 투쟁을 묘사한다. p172
러시아 소설의 행동주의
러시아 소설은 서구소설보다 훨씬 더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향문학(Tendenzliteratur)이다. 서구문학에서보다 사회문제가 훨씬 더 많은 지면과 훨씬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훨씬 더 오랫동안 더 절대적으로 그 우위를 지켜나간다. 제정러시아의 압제하에서는 지적 에너지가 문학을 통해서 밖에 작용할 수 없었으며 검열제도는 문학작품을 사회비판이 가능한 유일한 배출구로 만들었다. p173
자기소외의 심리학
러시아 소설의 놀라운 점은 그 연천年淺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높은 경지
까지 이르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로부터 주도권을 넘겨받아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고 생기 있는 문학형식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p174
근대 심리학은 영혼의 분열상을 -어떤 구체적인 내적 갈등으로 선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부조화를-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셰익스피어와 기타 엘리자베스 시대 작품들의 심리적 모순들은 단순이 불합리한 것으로서 고전주의적 종합 이전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p175
자기 스스로의 갈등에 빠져 어떠한 합리적 단일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영혼을 좀 너무 뻔하지만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내주는 것은 이른바 이중인간(Doppelganger)의 개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이 개념을 작중인물 묘사의 한 고정수단으로 이어받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격의 통일성의 완전한 분해-즉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상호모순만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 자체의 끊임없는 이전과 변모, 재평가와 재해석을 뜻하는 와해-는 낭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투쟁을 통해 낭만주의와 반낭만주의적 태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p176
도스또예프스기의 신비주의와 리얼리즘
도스또예프스끼으 심리적 통찰이 갖는 깊이와 섬세함은 그가 현대 지성인의 문제성을 체험하는 강도에서 온다. p177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순전한 난쎈스인 반면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인류를 가난과 치욕에서 건져낼 것을 절규하고 있다.
그의 예술에는 발자끄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치고 모욕당한 삶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이 있으며, 비록 그의 소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것이 단순히 문학적 관습이나 낭만주의의 상투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빈곤의 존엄성 같은 것이 있다. p178
하지만 도스또예프스키를 혁명적 대중의 대변자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민중’을 이상화하고 슬라브주의적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업 플로레타리아트나 농민들과 아무런 긴밀한 점이 없다. 그가 정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지적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p179
도스또예프스기의 사회철학
도스또예프스기와 디킨즈의 이율배반적이고 여러모로 정리 안된 사회관과, 그들 아버지의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 및 그들 자신이 일찍이 사회적 신분 상실의 느낌을 맛보았던 경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p181
도스또예프스끼의 자연주의와 낭만주의
사회소설의 역사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는 무엇보다도 현대의 대도시를 그 소시민과 프롤레타리아트 군중, 소규모 장사치와 하급관리, 학생과 창녀, 무위도식자와 빈민들을 망라하여 처음으로 자연주의적으로 그려낸 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p181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은 그의 정신성의 눈에 안 띄고 대부분 무의식적인 전재 중의 단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p182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러나 낭만주의의 높은 지대에서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도 헤맸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적 고백문학의 연장일 뿐 아니라 낭만주의 모험소설 및 괴기소설의 연속이기도 하다. p184
도스또예프스끼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정신적 존재들의 유토피아적 고도孤島는 실상 하나의 좁은 새장임이 드러난다. p185
도스또예프스끼의 극적 형식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도스또예프스끼의 걸작들의 극적 형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이러한 형식적 특징을 단지 극적 효과를 거두는 한 방법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돌스또이 소설의 광활하고 도도한 서사시적 흐름과 대조시킨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연극적 수법을 쓰는 것은 단순히, 여러 갈래의 줄거리가 한데 만나고 폭발할 듯하던 갈등이 드디어 폴발하는 클라이맥스를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줄거리 전체에 극적 생기를 채워주고 서사시적 인생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p186
본질적이고 표현적이고 그러나 모자이끄식으로 뜯어맞춘 에피소드들을 위해서 연속성을 희생함으로써 그것은 현대 표현주의 소설형식의 원칙을 예고해준다. 설명과 심리학적 분석과 철학적 토론에 비해 서술이 줄어들며, 소설은 대화장면과 내면의 독백과 거기에 작가가 덧붙이는 논평과 객담을 모아놓은 것이 된다. p187
도스또예프스끼의 표현주의
이러한 방법은 서사적 장르로서의 소설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의 스타일로부터도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심리관찰이 날카롭기로 말한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연주의 소설의 가장 발달된 형태를 대표하지만, 정상적이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그리는 것이 자연주의라고 할 때 꿈처럼 과장된 상황과 환상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을 즐겨 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태도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리얼리즘을 사랑한다. 환상적인 것에 접근하는 리얼리즘을... 현실보다 더 환상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현실보다 더 있기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보다 더 정확한 정의는 없다. p187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
여러 가지 극단적인 대조에도 불구하고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는 개인주의와 자유의 문제에 관한 그들의 태도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p188
똘스또이의 작품에서는 자유의 문제가 도스또예프스끼의 경우에 비해 훨씬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똘스또이에 있어서도 이 문제는 심리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도덕적으로 가장 풍부한 단서가 되는 그의 작중인물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p189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의 반개인주의에는 그들의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개인주의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반대이유는 좀 더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p190
똘스또이의 분별과 도스또예프스끼의 노출증, 전자의 자제와 후자의 ‘사람 많은 데서 발가벗고 춤추기’-<악령>에 나오는 한 인물이 말하듯이-의 대조는 볼떼르와 루쏘를 갈라놓았던 것과 똑같은 신분적 격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작품을 두고 말한다면 똘스또이는 때때로 도스또예프스끼와 똑같이 무절제하고 자의적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둘 다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불안정한 19세기의 전형적 대표인 도스또예프스끼에 비해 똘스또이를 18세기의 아들일라고 부른 것은 옳은 말이었다. p191
똘스또이의 정치관
그러나 이러한 루쏘주의도 고독과 뿌리 없는 삶과 사회적 실향의 운명에 대한 똘스또이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p192
이러한 개인 윤리적 이상은 또한 그의 정적주의를 수반하며 악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배제한 비폭력주의와, 사회현실이 아닌 개인의 영혼을 고치려는 그의 노력이 뒤따른다. 1905년 혁명이후 그는「노동자들에게」라는 호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경의 원인이 사람들 자신 속에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있다는 생각처럼 해로운 것은 없다.” 외부현실에 대한 똘스또이의 수동적 태도는 배부른 지배계급의 평화주의와 일치하며 그들의 수심에 쌓인 자기비난적 자학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평민대중의 생각과 감정에는 전혀 생소한 태도를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똘스또이도 도스또예프스끼와 마찬가지로 어떤 좁은 정치적 범주에 집어넣어지지 않는다.
똘스또이는 혁명가가 아닐 뿐 아니라 모든 혁명적 태도의 명백한 적이기 조차 하다. 그러나 발자끄, 플로베르, 공꾸르 형제 등 서구에서의 ‘질서’와 사회적 화해의 주창자들과 그가 구별되는 것은 똘스또이는 혁명가들의 테러리즘도 용인하지 않지만 기존 정부의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더욱 냉담하다는 것이다. p193
실상 똘스또이의 경우에 우리는 ‘리얼리즘의 승리’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승리’를, 즉 귀족에 의한 편견 없는 사회 묘사뿐 아니라 타고난 반동주의자에 의한 혁명적인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p194
똘스또이의 합리주의
똘스또이의 예술과 사상을 불모성과 무기력의 운명으로부처 지켜주는 것은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합리주의 정신이다.
그가 신앙에 도달한 것은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p194
똘스또이의 서사시적 양식
똘스또이에 있어 현대문명의 인습성과 정신적 공허에 에의 환멸은 플로베르나 모빠상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다. 그의 환멸은 결코 허무주의에 다다르지 않으며 삶 전체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규탄에 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멸을 안겨주는 삶이 너무 무감동한 것이라면 환멸을 느끼는 주인공은 너무나 주정적이고 시적이고 공상적이기 때문이다. p196
똘스또이 소설의 형식이 서구소설의 형식과 그처럼 다른 것도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그의 개념이 플로베르의 개념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서 주로 연유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연극적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면, 똘스또이의 소설은 서사시적-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같은-성격을 지니고 있다. 똘스또이 자신이 그의 소설을 호메로스에 비교했고, 이러한 비교는 똘스또이 비평의 상투적 공식이 되어 있다. p197
4. 인상주의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경계선은 유동적인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두 경향을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양식의 변화가 점진적이었던 것은 그 시대의 경제적 발전이 연속적이었고 사회적 권력관계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에 부합되는 현상이다. p199
생활감정의 역동화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존속에 대한 순가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가 일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 이라는 느낌, 두 번 다시 발 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p202
예술적 표현을 순간적 분위기에 귀속시키는 데에는 동시에 인생에 대한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태도, 수용적∙관조적 주체로서의 방관자의 역할에 대한 만족, 멀찍이서 바라볼 뿐 뛰어들지는 않겠다는 입장, 요컨대 전적으로 심미주의적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인상주의는 자기중심적인 심미적 문화의 정점으로서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삶에 대한 낭만주의적 체념의 극단적 귀결을 의미한다. p203
인상주의의 방법
스타일 면에서 인상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단지 자연주의의 일관된 발전형태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전형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추상적인 관념에서 시간적ㆍ공간적으로 규정된 구체적 체험으로 나아감을 자연주의라고 한다면 인상주의의 현실묘사는 순간적ㆍ일회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의 중요한 성과에 포함될 수 있다. p203
이전의 모든 예술이 종합의 결과라면 인상주의는 분석의 결과이다. p204
사람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려낸다는 사실과 그 그림들의 무형식성을 거만한 도발행위로 간주했고, 자기들이 조롱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복수를 가했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색채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근거한 현실상을 변화시키고 일그러뜨린다. p206
인상주의는 언제나 대상을 이런 형태 없는 표면색채로 그리는데, 그 색체는 신선함과 강한 감각성 때문에 매우 직접적이요 생생한 인상을 주지만 그러나 그림의 환각적 효과를 상당히 경감시키며 인상주의적 방법이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인습임을 무엇보다도 뚜렷이 드러내준다. p207
회화의 우위
19세기 후반에는 회화가 주도적 예술이 된다. 문학 분야에서는 아직 자연주의를 둘러싼 싸움이 한창인 시기에 회화에서는 인상주의가 하나의 독립된 양식으로 발전한다.
인상주의와 관객층
인상주의는 단지 그 시대의 모든 예술장르를 지배한 하나의 시대양식일 뿐 아니라 또한 보편타당한 ‘유럽적’ 양식으로서도 최후의 것-취미의 전반적 합의에 근거를 둔 마지막 예술경향이다. 인상주의가 해체된 이래 여러 다른 예술장르들 또는 여러 다른 국가와 문화들을 양식상으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p208
인상주의에는 또한 부르즈와 예술관객들이 좋아하지 않을 서민적 체취란 조금도 없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의 ‘귀족적 양식’으로서 우아하고 까다로우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며, 감각적∙향락적이요, 값진 것과 희한한 것에 애착을 가지며, 엄격하게 개인적인 체험 즉 고독과 고립의 경험 및 극도로 섬세한 감각과 신경의 경험에 몰두한다. p210
자연주의의 위기
문학의 역사는 회화의 역사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자연주의의 위기는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위기를 말해주는 한 징후로서 1885년경에야 뚜렷해지지만, 그 전조는 1870년경에 벌써 나타난다. p215
1870년 프랑스는 가장 심각한 정신적∙도덕적 위기에 봉착하는데, 그 ‘지적 쎄당’이 바레스의 주장처럼 결코 군사적 패배에 결부된 것은 아니며, 그 ‘치명적인 삶의 권태’가 부르제의 생각처럼 유물론과 상대주의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p216
사람들은 존재의 신비와 영혼의 깊이에 관하여 허튼소리를 지껄이게 되었다. 이성적인 것을 천박하다고 타박하며, 미지의 불가지의 것을 찾아 느끼려고 한다. p218
심미적 쾌락주의
심미주의는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발전의 절정에 달한다. 그 특징적 성격들, 즉 인생에 대한 수동적이요 순전히 관조적인 태도, 체험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및 쾌락주의적인 감각주의는 이제 예술 일반의 평가기준이 된다.
인생에 대해 철저히 수동적인 관조적 태도의 세계관으로서 근대 심미주의는 그 이론적 기초에 있어 예술을 의지로부터의 구제로, 욕망과 걱정을 가라앉히는 진정제로 정의한 쇼펜하우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미적 세계관은 이 의지와 격정에서 해방된 예술의 관점에서 전존재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p220
‘인공적 생활’
인상주의의 심미적 세계관은 예술에 있어 완벽한 자가수정自家受精 과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예술가는 바로 예술가를 위해서 작품을 만들고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본 세계의 형식체험, 즉 예술 자체가 예술의 참다운 대상이 된다. p220
자연 자체는 추하고 범속하고 무형식적 이어서 예술을 통해서야 비로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된다.
문화의 인공성에 대한 열광은 어떤 점에서 낭만주의적 현실주의적 현실도피의 새로운 한 형태일 따름이다. p221
이러한 세계관 전체의 신비주의가 어디보다도 더 강하게 표현된곳은 아마 빌리에 드 릴르-아당의 단편<베라>일 것이다. p223
낭만주의 이래의 모든 진보적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역시 하나의 반항적 예술이며, 인상주의자들이 늘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삶에 대한 인상주의적 태도에 원래부터 잠재해 있는 그 반항성은 부르즈와 관객층이 이 새로운 예술을 배척한 이유의 일부를 설명해준다. p224
데까당스
18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당대의 심미적 쾌락주의를 ‘데까당스’라고 즐겨 불렀다. 그러나 데가당스의 개념은 심미주의의 개념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 특징들, 그러니깐 무엇보다도 문화의 몰락과 위기라는 느낌, 즉 흥망성쇠라는 한 생명과정의 종말에 서 있으며 한 문명의 해체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을 포함한다. p224
‘데까당’들은 양심의 가책을 지닌 쾌락주의자요, 바르베 도르빌리(Barbey d'Aurevilly)나 위스망, 베를렌느, 와일드 및 비어즐리(A.V. Beardsley)처럼 카톨릭교회의 품에 몸을 내던진 죄인들이었다. 이러한 죄의식이 다른 어디서보다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낭만주의의 사춘기적 심리학에 완전히 지배받은 그들의 사랑의 개념이다. p226
예술가와 부르즈와 인생관
인상주의의 시대는 사회에서 소외된 현대적 예술가의 극단적인 두 타입, 즉 새로운 보헤미안과 서구문명으로부터 먼 이국으로 도망하는 예술가를 낳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아직‘푸른 꽃’(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소설 제목이자 낭만주의적 이상의 상징), 꿈과 이상의 나라를 찾고 있었으나, 이제 보들레르는 “그러나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만이 참 여행자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짜 도망이요, 무엇이 끌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구역질나기 때문에 떠나는 미지에의 여행인 것이다. p228
보헤미안의 변모
프랑스에서 보헤미안(boheme)은 단일하고 명백한 현상이 아니다. 뿌치니(G. Puccini)의 오페라에 나오는 경박하고 귀여운 젊은이들이 악령에 사로잡힌 랭보나 범죄성과 종교적 신비주의 사이에서 방황한 베를렌느와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p229
다음 세대의 보헤미안, 거리의 맥주집에 본부를 둔 전투적 자연주의의 보헤미안, 즉 샹플뢰리∙꾸르베∙나다르, 뮈르제 등이 속해 있던 세대는 이와 달리 진정한 보헤미안, 즉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술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즈와 사회의 한계선 바깥에 서서 호기에찬 유희로서가 아니라 절박한 필연성으로 부르즈와지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술 프롤레타리아트였다. p230
상징주의
1890년 이후‘데까당스’란 말은 암시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상징주의’가 주도적 예술경향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p233
한편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에서, 즉 시의 핵심으로서의 메타포의 발견에서 시작하여 인상주의의 풍성한 형상들로 인도한 발전과정의 총결산을 대변한다. p234
상징주의에서 시란, 그 자체로서 독립된 언어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그리고 감각의 여러 다른 영역들 사이에서 창조해내는 관계들과 일치된 표현 바로 그것이다. p234
상징주의는 시의 임무가 명확한 형태의 틀에 박을 수 없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p235
시인이란‘예시자’(voyant)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들을 정상적 기능의 관습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분리시켜서 비자연화ㆍ비인간화시킬 용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현대문학 전반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랭보였던 것이다. p236
‘순수시’
플로베르는 이미 주제 없는 책을, 순수한 형식, 순수한 스타일, 순수한 장식으로서의 책을 쓴다는 생각을 했었다.‘순수시’의 이념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그에게서였다. p237
영국에서의 모더니즘
왕정복고(1660) 이후의 영국에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처럼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는 없다. 대영제국은 오랜 번영기를 거친 뒤 이제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는 또 빅토리아조직 정신의 위기로 전개되었다. ‘대불황’은 1870년대 중엽에 시작하여 10년이 채 못 되어 끝나지만 이 기간 동안에 영국의 시민계급은 왕년의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p240
젊은이들의 자아 실현추구와 낡은 초개인적 형식에 대한 그들의 투쟁은 새로운 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현상이지만 1880년대 영국문학 및 예술에서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비정치적 개인주의에 성격을 띠였다. p241
그들의 반속운동反俗運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부르즈와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이해 못하는 시민들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물혐오는 그것 자체가 다시 하나의 새로운 인습이 되고 마는데, 영국에서 모더니즘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속물혐오의 경향이다. p241
역설 취향은 단순한 반항심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 본래의 근원은‘부르즈와를 놀래키려는’기도에 있음이분명하다. p242
댄디즘
예술가의 언사나 사고방식뿐 아니라 옷차림이나 생활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특이성과 매너리즘은 예술의 멋을 모르고 공상을 모르며 거짓말 잘하고 위선적인 속물적 세계관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극단적인 댄디즘(dandyism)은 인상주의 스타일의 모든 매력적인 요소를 과시하는 그들의 현란한 말솜씨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항의의 일부를 이룬다. p242
지성주의
프랑스 문학에 있어 강력한 직관주의적 흐름이 개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적 경향을 이루는 지성주의知性主義는 영국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비록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지만 메레디스와 헤리제임즈도 그와 같은 지성주의의 기반위에 서있다.
국제적 인상주의
19세기 말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유럽전역에 걸쳐 주도적인 양식이 된다.
프랑스 이외의 문학에서는 묘사의 인상주의적 특징들이 상징주의적 특징보다 더 뚜렷이 부각된다. p247
일체의 행동을 외면하고 체험의 흐름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포기하는 인상주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시인들이다. p248
체호프
유럽에서 인상주의 역사상 가장 눈에 띠는 현상은 러시아가 인상주의를 받아들려 인상주의 운동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체호프 같은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p249
인생에 있어 무능과 실패의 변호자로서 체호프에 앞서 도스또예프스끼나 뚜르게네프 같은 선구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실패와 고독을 가장 훌륭한 인물들의 숙명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체호프의 작중인물들은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무력감과 절망감 및 불치의 의지력 마비증세, 다른 한편으로는 노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수동성과 나태의 세계관, 인생에서 목표라던가 종국에 달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느낌은 작품의 형식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지연주의 연극의 문제
플롯도 극적 진적도 없는 이러한 연극이 생긴 이래로 사람들은 그 존재 이유에 대해, 즉 도대체 이것도 정말 희극인지 연극인지, 무대를 위한 예술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을 품어왔다. p251
자연주의 연극은 현재적 소극장 운동을 향한, 다시 말해서 극적 갈등의 내면화 및 무대와 관객 간의 좀 더 친밀한 연관성을 향한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P252
연극에서 사건의 줄거리 보다 내면성, 기분, 분위기, 서정성 등이 우위에 놓이게 되는 현상은 인상주의 그림의 경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적인 요소가 차츰 제거되어 감을 뜻한다. p253
새로운 연극에 대해 가해진 가장 격렬한 비판은 그 결정론과 상대주의에 대한 것으로써, 이는 물론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p254
입 센
근대연극 사상 중심인물은 입센이다. 단순히 그가 19세기 최대의 연극인이었다는 이유에서 만이 아니라, 당대의 세계관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가장 강렬하게 희곡으로 표현한 사람이 입센이었다는 이유에서도 그렇다. 그의 예술가적 발전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이루는 것은 그의 세대의 숙명적인 문제였던 유미주의와의 결산이다. p256
프랑스의 자연주의 전체가 이상과 현실, 시와 진실, 시와 산문의 갈등을 그 중심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19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들은 누구나 현대문화의 치명적 불행이 현실감각의 결여에 있음을 지적했다. p257
입센이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떨친 것은 주로 그의 연극이 지닌 사회적 교훈 때문 이였다.
이 사회적 교훈은 결국 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라든가 자기실현의 임무, 편협하고 우둔하며 생명력을 상실한 부르즈와 사회의 인습에 대항하여 자기 자신의 본질을 관철하는 과제라든가 하는 단 하나의 이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었다. p258
유럽에서 입센은 그의 현대주의, 반속물주의, 일체의 인습에 대한 가열한 투쟁 때문에 철두철미 진보적인 인사로 통했으나, 좀 더 충분한 문맥 속에 그의 정치적 견해가 비쳐진 그의 조국에서는 급진적인 비외론손과 대조적으로 보수파의 대작가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사적 위치에 관한 한 노르웨이 바깥에서의 평가가 더 정확했다. p259
버나드 쇼
버나드 쇼는 입센의 유일한 진짜 제자이자 후계자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계속하고 이 세기의 유럽이 당면한 중대한 문제에 관환 토론을 심화시킨 유일한 작가인 것이다. 낭만주의적 영웅의 가면을 벗기고 극적이고 비극적인 거창한 제스처에 대한 신앙을 깨뜨리는 작업이 그에 이르러 완수된다. p260
결국에 가서 밝혀질 대로 밝혀진 일이지만, 쇼는 본질적으로 부르즈와 계급과의 연대감에서 움직인 작가였고 예로부터 이 계급의 정신적 습성의 하나인 자기비판의 메가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p262
폭로의 심리학
세기전환에 있어 세계적인 기본 방향을 규정해주는 심리학은‘폭로의 심리학’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둘 다 인간의 정신생화의 표면,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동의 동기에 관해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그의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 혹은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p262
폭로적 기술에 의해 무장된 유물론 자체가 사실은 그 폭로의 대상이 된 부르즈와적ㆍ자본주의적 세계관의 한 소산 이었다. p263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은 그 결론에서 좀 더 낙관적이기는 하지만, 그 후에 나온 정신분석 이론과 마찬가지로 유럽이 그 넘치는 자신감을 상실한 심리상태의 표현이었다. p264
프로이트
가장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사상가 일지라도 자기 사상의 궁극적인 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학설을 전개해 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p264
토마스만은 프로이트가 무의식ㆍ감정ㆍ충동ㆍ꿈 등 그의 연구대상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비합리주의에 깊이 연루되어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단지 인간의 내면세계의 어두운 면에 최대의 관심을 집중한 신낭만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만이 아니고, 문명과 이성 이전의 어떤 경지를 되찾으려는 낭만주의적 사고 전체의 시원관도 깊은 연관이 있다. p265
정신분석에 있어 비합리주의의 진짜 위험은 그 소재의 선택이나 문명에 더럽혀지지 않은 원시적 인간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그 근본 이론이 단순히 충동과 생물학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266
프로이트는 그가 살던 시대의 극복자요 그 시대가 자기 영혼을 팔아넘겼던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에 대해 투쟁 했던 인물이지만, 당시에 그는 그 시대의 업적과 결합 양쪽 모두의 무수히 많은 측면에서 얽혀 있었다. p266
실용주의
우리가 진리라고 일컬었던 것들은 실상은 삶을 촉진 시키고 삶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하며 권력을 고양 시키는 거
2. 제2제정기의 문학
낭만주의자들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 작가의 사회적 지위가 떨어진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비우호적인 대중으로부터의 피난처를 개인주의에서 구했다. 그들의 실향감은 쓰디쓴 적대의식으로 나타났다.
다음 세대의 작가들은 한층 더 오만해져서 자신의 독립을 시위하는 것조차 사절하면서 비인격성과 무감각이라는 시위적인 베일 속에 스스로를 감추기에 이르렀다.
낭만주의 이래로 문학은 작가와 독자 간의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작가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예찬하는 행위로 변했다. p76
새로운 지배계급의 생활태도와 취미
제2제정기는 절충주의의 고전적 시대라 할 수 있다. p79
예술적으로 중요한 경향들이 이때처럼 당대인들에게 괄시받은 적은 없고, 다른 어느 시기에 관해서도 이처럼 미학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현상을 소재로 삼는 예술사나 문학사가 당시의 실제 예술생활을 그리는 데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진 적도 없다. 다시 말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진보적 경향들의 여사와, 일시적인 성공과 영향력으로 현재를 지배하는 경향들의 역사가 전혀 다른 두 계열의 사실을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제2제정기의 예술생활을 지배한 것은 물질적으로 안락하고 정신적으로 태만한 부르즈와지의 구미에 맞는 안이하고 기분 좋은 작품이었다.
저급하고 불확실하고 쉽게 만족되는 취미가 유행의 주도권을 잡은 반면,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들의 노력에 충분한 보상을 해줄 능력이 없는 소수 전문가계층의 소유물이 되었다. p80
자연주의의 개념
이 시기의 자연주의는 차후의 여러 발전 형태들의 싹을 모두 내포하고 있으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을 낳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끝내 재야파 예술-다시 말해 일반대중 틈에서는 물론 자신들 가운데서도 소수파의 스타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p80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습관을 지닌 낭만주의이다. 진실감에 대한 자연주의의 가정이 새롭기는 하나, 이러한 가정이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제나 자위적이게 마련이다. 자연주의와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후자의 과학주의, 즉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원칙을 적용한 데에 있다.
자연주의는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을 거의 전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서 가져온다. p81
꾸르베와 자연주의 미술
자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가의 운동에서 시작한다. 그 첫 대가는 꾸르베인데, 그는 서민대중 출신이며 부르즈와적 범절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는 예술가다.
「오르낭에서의 매장」이 전시되었을 때 샹플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부터 비평가들은 리얼리즘에 찬성이냐 반대이냐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 이 유명한 낱말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일상생활이 이처럼 솔직하고 잔인하게 그려진 적이 없기는 하지만 새로운 예술의 개념이나 그 실제 작품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p83
꾸르베와 그의 지지자들의 정열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신감은 자기들의 진리의 전위대요 미래의 선구자라는 신념에서 오는 것이다.
1850년대의 보수주의 비평가들은 자연주의에 대한 널리 알려진 반론들을 이때부터 이미 들고 나오며, 그들의 반자연주의적 태도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사회적 편견들을 미학적 논쟁의 전개로써 은폐하고자 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평론가들이 정말 꺼린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자연주의가 현실을 얼마나 모방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실을 모방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도미에(H. Daumier)는 국가의 지주가 되는 부르즈와지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브르즈와의 정치와 법률과 오락을 비웃고, 부르즈와적 관습과 예절 뒤에 감춰진 그 모든 도깨비놀음 같은 희극을 폭로한다. 여기서 주제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다 정치적 배려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p86
새로운 예술의 사회적 성격
풍경화조차도 기존 사회의 문화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 된다. p86
새로운 예술의 사회적 성격은 화가들 자신이 좀더 긴밀히 뭉치고 예술가촌을 만들고 생활양식 면에서 서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경향에서도 드러난다. p88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
자연주의 미술과 당시의 우아한‘벽 장식물’을 갈라놓은 것과 똑같은 간격이 당시의 본격적인 문학과 대중문학, 본격음악과 경음악 사이에 존재했다.
낭만주의는 아직도 사회의 넓은 계층에 호소할 수 있는 대중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는데 반해, 자연주의는 적어도 그 가장 중요한 작품들에서는 일반 독자의 흥미를 끌 요소가 전혀 없게 된다.
예술에서 윤리문제를 떠난 접근법을 옹호하는 만큼,‘예술을 위한 예술’의 배격은 곧 자연주의에 대한 공격을 겸할 수 있었다. p94
자연주의의 승리
플로베르의 피소사건과 쎈세이션을 일으킨「보봐리 부인」의 성공은 자연주의를 둘러싼 싸움을 이 새 조류의 승리로 끝맺는다. p95
플로베르는 스스로 대혁명과 계몽철학의 정통적 후계자라 생각하며 당대의 정신적 타락을 볼떼르에 대한 루쏘의 불행한 승리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p96
플로베르와 낭만주의
플로베르는 비낭만적인 18세기의 마지막 유물인 합리주의에 집착한다. p96
플로베르에 있어 유미주의는 낭만주의에 있어 그것이 가졌던 사회학적 의미에 비할 수 있는 이미 참을 수 없게 된 현실로부터의 일종의 도피인 것이다.
플로베르는 작품을 씀으로써 낭만주의에서 벗어난다.
그는 낭만주의의 허황된 꿈의 허위성과 불건전함을 폭로하기 위해 낭만적 꿈의 세계를 일상생화의 현실과 직면 시키는 자연주의자가 된다. p97
그러나 플로베르의 개성배제와 중립성은 그의 자연주의의 논리적 귀결만은 결코 아니며, 예술작품에서 대상은 그것 자체의 생생한 실감을 통해 효과를 거두어야지 작자 자신의 개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미학적 요구에 일치하는 것만도 아니다. p98
플로베르의 비정함은 단순한 하나의 수법상의 원칙이 아니라 예술가의 새로운 도덕관념, 새로운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말하기 위해서 태어났지 소유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하나의 예술관 및 세계관으로서 낭만주의의 출발점을 이루었던 저 삶의 포기가 가장 극단적이고 철저한 형태를 취한 것이요, 동시에 플로베르의 분열된 감정의 논리 그대로 그것은 낭만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거부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p99
혼란되고 자기도취된 젊은 시절의 낭만적 기질이 그를 인간으로서 및 예술가로서 파멸시킬 뻔했다는 깨달음에서 플로베르는 새로운 생활양식과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냈다.
플로베르는 ‘관념’과 ‘육신’의 구별이나 예술을 위해 삶을 버리는 결단 자체가 사실은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비낭만적인 해결은 오직 삶 자체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p99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이 사회생활의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은 플로베르 이후의 일로서 7월 왕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p100
풀로베르와 시민계급
낭만주의에 대한 풀로베르의 반감은 하나의 인간형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반발심, 무책임한 몽상가와 이상주의자에 대한 그의 혐오감과 직결 되어 있다. p101
유미주의적 허무주의
그러나 플로베르의 유미주의 같은 입장은 결코 단순 명백하고 최종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항상 그 방향을 바꾸며 스스로를 의문해보는 변증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p102
예술은 낭만주의와 갈등을 겪으면서 그 자연발생적인 활력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예술가가 자기 자신, 자기의 낭만적 근원, 자신의 성향 및 충동과 싸우는 가운데 쟁취하는 대상이 되었다. p103
보바리 부인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은 이중의 의미에서 진실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낭만주의뿐 아니라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자신이 맡은 문단의 심판자적 역할 역시 하나의 환상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자주 가졌음에 틀림없다. p105
자기기만과 삶의 변조에서, 누군가 플로베르의 철학을 일컬어 말한 단어를 빌린다면 이러한 ‘보바리의주의’에서, 플로베르는 건드리는 것마다 왜곡하고 마는 현대적 주관성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다. 우리가 현실을 하나의 왜곡된 변형을 통해서만 체험하며 우리들 사고 작용의 주관적 형식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느낌은『보바리 부인』에서 처음으로 그 완벽한 예술적 표현을 얻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프루스트의 환각주의까지는 거의 직코스인 셈이다.
의식에 의한 현실의 변형은 칸트가 이미 지적한 문제로서, 이러한 왜곡작용은 19세기를 통해 때로는 의식적인 요소가 더 많고 때로는 무의식적인 면이 더 큰 자기기만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역사적 유물론, 정신분석학 등 그것을 파헤치고 밝혀내려는 많은 노력을 불러일으켰다. p106
플로베르의 시간관
하나는 별 쓸모없는 낭만적인 시골 여인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재산도 있고 웬만큼 재주도 있지만 자신의 지적 능력과 재능을 낭비해버리는 어느 부르즈와 젊은이의 이야기인 플로베르의 두 주요 소설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p106
비극 형식의 근저에는 인간을 단 한 번의 결정타로 파멸시키는 초시간적 운명의 개념이 있듯이, 소설 형식의 원리는 삶을 좀먹어 들어가는 시간의 개념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비극에서 ‘운명’이 초인적 스케일과 형이상학적 힘을 갖는 것처럼 소설에서는 ‘시간’이 거대하고 거의 신화적인 차원에 다다르는 것이다. 플로베르는『감정교육』에서- 이 소설이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만- 지나가는 시간 및 지나간 시간이 항상 우리 삶에서 현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했다. p107
졸 라
플로베르는 19세기의 감정곡선에 있어서 가장 낮은 한 점을 표시한다. 졸라의 작품은 우울한 어조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나타내며 낙관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p108
이 부르즈와의 세계관은 낙관적인 요소나 비관적인 요소와 관련되는 한에서 하층계급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이고 모순되어 있다.
졸라의 모든 과학적 사고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성격을 지니며, 개량주의적ㆍ개화주의적인 계몽철학의 정신으로 채워져 있다. p109
졸라의 연작소설에 바탕이 되는 기본 관념은 마치 하나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계획처럼 보인다. p111
부르즈와지의 ‘이상주의’
급진적인 유물론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러한 경향 때문에 자연주의 문학은 극히 환상적인 현실상을 내보인다.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의 예술이 생산된 시기인 제2제정기는 동시에 현대를 풍미하고 있는 악취미와 비예술적 통속물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대중이 알면서도 일부러 자기의 수준 밑으로 내려간 ‘휴식’으로서의 예술,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은 이 시기의 발명인데, 그것은 모든 창작형태를 지배하지만 특히 가장 거침없고 과감함 대중예술인 연극에서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p113
새로운 연극관객
소설과 회화에서는 그래도 부르즈와지의 취미에 맞는 경향과 더불어 자연주의가 번성하지만, 연극에서는 부르즈와지의 흥미와 생각에 반대되는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p114
근대 프랑스 연극사의 결정적 전환점은 스크리브에 의하여 대변된다. p115
가정의 우상화
시민계급의 삶을 이상화하는 작업의 기초로서 결혼과 가족이란 제도만큼 적합한 것은 없었다.
부르즈와 연극에서는 사랑의 의미와 가치가 그 지속성에 있고, 일상적 결혼생활의 시험을 견뎌낸다는 데 있다. p116
‘잘 만들어진 각본’
제2제정기는 낭만주의 시대와 반대로 합리주의와 반성과 분석의 시기이다. p118
무엇보다도 전혀 뜻밖의 사건전환에 대한 관중의 기대, 그 의식적인 자기기만과 게임 규칙의 저항 없는 수락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약속인 것이다. p119
‘대단원’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다. 해답이 틀리다면 계산 전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뒤마 2세는 말한다. p120
발전의 연속은 혁명 이후의 멜로드라마와 보드빌르, 18세기의 가정극과 희극, 꼬메다아 델라르떼와 몰리에르를 거쳐 로마의 희극과 중세 소극의 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에 대한 ‘잘 만들어진 각본’ 작가들의 공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p122
오페레타
제2제정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여러모로 가장 의미심장한 예술적 창작은 오페레타이다. p122
오페레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기이하게 느껴지는 점은 그 환전한 비현실성이요, 잇따라 지나가는 장면들의 가공적∙환상적인 성격이다. p123
오페레타는 철저한 ‘자유방임’의 세계, 즉 경제적∙사회적 및 도덕적 자유주의의 서계, 누구나 체제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세계의 산물이었다. p124
오페레타의 성장은 음악에 대한 저널리즘(시사성)의 침투를 뜻한다. p126
로씨니는 오펜바흐를 ‘샹제리제의 모차르트’라 불렀으며, 바그너도 이 판단에 동의했다(물론 선망의 라이벌이 죽은 뒤에야 그랬지만). p127
오페레타는 이제 근심과 위험이 없는 행복한 생활의, 그러나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전원목가의 그림처럼 보이게 되었다. p128
그랜드 오페라
‘종합예술’이란 관념은 여기서 바그너보다 훨씬 앞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 아무도 그것을 계획적으로 정식화할 생각을 하기 이전에 당신들의 어떤 필요를 표현했다. p129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
당대의 모든 중요한 대표자들 중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양식에 가장 가까이 전급해 있다. p130
바그너가 ‘그랜드 오페라’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훨씬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가장 내면적이요 사적이며 가장 승화된 감정의 표현을 제2정기의 화려한 허식과 결합시킨 형식에 그가 계속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p131
3. 영국과 러시아의 사회소설
이성주의자와 공리주의자
산업주의의 경제적 원리를 대변한 공리주의자들은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제자들로서, 그들은 저절로 움직이도록 방임해두는 경제가 자유주의의 정신에 일치될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의 이익에도 가장 잘 합치된다는 이론을 주창하였다.
공리주의에 대한 반동이 제2의 낭만주의를 낳았는데, 이 제2의 낭만주의에서는 사회적 부정에 대한 투쟁과 ‘음울한 학문’(dismal science, 칼라일이 경제학을 비꼬아서 한 말-옮긴이)의 구체적 학설에 대한 반대보다, 반공리주의자들로서 해결할 능력도 의욕도 문제에 가득 찬 현재로부터 버크(E. Buke, 1729~97)와 코울리지(S.T. Coleridge)와 독일 낭만주의의 비합리주의로 도피하려는 충동이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다. p136
제2의 낭만주의 운동
1832년에서 1848년까지의 기간은 가장 날카로운 사회적 위기의 시대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유혈적 충돌로 점철된 불안의 시기다. p136
당대의 문학은 낭만적 향수로 가득 차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와 상업주의와 근대사회의 사정없이 비인간적인 경쟁과 싸늘한 현실의 법칙들이 없는 중세와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으로 채워져 있다. 디즈데일리의 봉건주의는 정치적 낭만주의요, ‘옥스퍼드 운동’(1883년경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창조된 영국 국교준봉國敎(덧말:국교)遵奉(덧말:준봉)운동)은 종교적 낭만주의이며, 칼라일의 당대 문화 비판은 사회적 낭만주의요, 러스킨(J. Ruskin)의 예술철학은 미학적 낭만주의로서 이 모든 이론과 경향들은 자유주의와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현재의 복잡한 문제성을 떠나서 더 높은 초인간적ㆍ초자연적 질서에서, 개인주의ㆍ자유주의 사회의 혼란을 벗어난 어떤 영구불변의 상태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것이다. 가장 크고 유혹적인 목소리는 칼라일의 음성으로서, 그는 무쏠리니(B. Mussolini)와 히틀러(A. Hitler)로의 길을 준비한 마법의 풍적수風(덧말:풍)笛手(덧말:적수)들 중에서 최초이자 가장 개성적인 인물이었다. p138
러스킨의 심미적 이상주의
러스킨은 칼라일의 직법 후계자다. 그는 칼라일에게서 산업주의와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논지를 인계받고, 영혼과 신이 사라져버린 근대문명에 대한 칼라일의 탄식을 되풀이하며, 중세와 기독교적 서구의 공동체 문화에 대한 열광을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추상적인 영웅숭배를 의미 있는 미의 예찬으로, 막연한 사회적 낭만주의를 구체적 과업과 분명히 정의할 수 있는 목표를 가진 하나의 심미적 이상주의로 변형시켰다. p138
빅토리아조 회화의 주제는 역사∙시∙일화로 충만되어 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문학적인’ 회화인데, 이렇게 문학적 요소를 많이 포함해서라기보다 회화적 가치가 너무나도 빈약해서 유감스러운 하나의 잡종예술이다. p139
라파엘 전파
라파엘 전파의 그림은 빅토리아조의 다른 모든 예술과 똑같이 문학적이요 ‘시적’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주의, 그 역사적ㆍ종교적 및 시적 테마, 종교적 알레고리, 그리고 동화의 상징성을 풀잎 하나, 치마 주름 하나 놓치지 않고 상세한 부분까지 그대로 재생하는 일종의 사실주의와 결합시킨 것이다. p140
라파엘 전파는 대부분의 빅토리아인처럼 이상론자요 도덕가이며 위선적인 관능파인 것이다.
라파엘 전파의 미술은 하나의 심미주의적 운동, 극진한 미의 예찬, 예술을 근거로 한 생활의 평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리스킨의 예술철학 자체가 벌써 그러한 것처럼 ‘예술을 위한 예술’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최고 가치가 ‘선량하고 위대한 영혼’의 표현에 있다는 명제는 모든 라파엘 전파의 확신과 일치했다. 그들은 명랑하고 향락적인 형식주의자들임은 사실이나, 자기들의 형식과 유희가 더 높은 목적과 교육적 효과를 가진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p141
월리엄 모리스
빅토리아 시대의 일련의 대표적 사회적인비평가들 중에서 제3의 인물인 월리엄 모리스는 사상 면에서 러스킨보다 휠씬 더 수미일관되고 실천적인 면에서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p143
문화적 문제로서의 기술
러스킨은 예술의 타락 원인을, 현대 공장의 기계적 생산방식과 분업이 노동자와 노동 사이의 어떤 내적인 관계를 막는다는 사실, 즉 노동의 정신적 요소가 제거되고 생산자가 자기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에서 찾았다. p144
예술의 전역사는 표현의 기술적 수단의 계속적인 혁신과 개선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p145
월리엄 모리스는 수공업에 대한 열광에서뿐 아니라 기계적 생산에 대한 편견에서도 러스킨을 뒤따르지만, 그는 기계의 기능을 자기 스승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p146
사회소설의 형성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과 문명비평에서 거론되던 사회적 제현상은 또한 당시 영국 소설
근대적 사회소설은 프랑스에서와 같이 영국에서도 1830년경에 성립하여 나라가 혁명의 벼랑에 서 있던 1840년부터 1850년까지의 소란스러운 시기에 그 절정을 맞이한다. p148
의 주제를 이룬다. p146
월터 스콧에 이르러서 비로소 소설은, 디포우나 필딩 또는 리처드슨이나 스몰렛(T. Smollett, 1721~71)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다시 ‘사회적'으로 된다. p148
1816년부터 1850년까지 영국에서는 평균 잡아 매년 100편의 소설이 나오고 대부분의 소설류인 1853년의 간행서적은 25년 전에 나온 작품의 세배에 이른다. p149
소설의 월간출판은 근본적으로 신문 연재소설의 등장에 대응하는 책판매의 혁신을 뜻하며,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비슷한 결과들을 낳았다. p150
다킨즈의 대중성과 위대성
다킨즈의 성공은 동시에 새로운 출판방식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는 작품을 사서 읽고 즐기는 과정 즉 문화적 소비의 민주화에 따른 모든 혜택과 손해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의 대중성은 그의 작가적 위대성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될 뿐이다. p150
다킨즈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가장 성공적인 문필가의 한 사람이며, 아마도 근대의 위대한 작가들 중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중작가란 디킨즈와 반대로 언제나 독자에게로 기어내려 가야만 한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체스터턴(G.K. Chesterton, 1874~1936, 영국의 소설가, 문필가)은 옳게 지적했다. p151
영화가 우리 시대의 ‘동시대적 예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은 생생한 당대적 문학이었으며, 그 예술적 결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살아 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예술이라는 탁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p153
디킨즈의 사회의식
디킨즈는 처음부터 예술적 및 이념적으로 진보적인 무학의 새로운 타입을 대변했다. p153
디킨즈는 자기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다. 한편으로 그는 사회에 대해서 지극히 매섭게 비난을 퍼붓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승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회악의 영향범위를 과소평가한다. p154
디킨즈는 생활과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사실적 예술의 한 대표자요 ‘자잘한 진실들’을 나열하는 수법의 완벽한 대가일 뿐 아니라, 영국 문학에 그 가장 중요한 자연주의적 업적을 보태준 예술가이다. p157
빅토리아조 중기의 소설
빅토리아 시대의 독서층은 이미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는 두 개의 써클로 나뉘어졌으며, 디킨즈는 상류계급의 독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받지 못한 마구잡이 대중들의 작가로 통했다. p158
1851년의 세계박람회는 영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빅토리아조의 중기는 초기에 비하여 번영과 안정의 시대인 것이다. p159
죠지 엘리어트의 세계관은 이 시대의 정치적 분위기를 특히 잘 대표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 사회현실은 이미 서술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죠지 엘리어트는 언제나 인간들 상호간의 의존관계를, 그들이 자기 주위에 만들어놓고 행동과 말 하나하나로 그 작용력을 넓혀가는 자장을 묘사한다. 사회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적극적인 현실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 견뎌야 하며 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p160
죠지 엘리어트
영국 소설사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은 죠지 엘리어트의 작품과 함께 완수된다. 외적 사건과 모험 대신에, 사회적 문제와 갈등 대신에 도덕적 문제와 위기가 작중상화의 중심에 서게 된다. p160
죠지 엘리어트는 영국 소설에서 지식인을 적절하게 묘사할 줄 안 최초의 인물이다. p161
발자크의 강점은 체험의 묘사이고, 죠지 엘리어트의 강점은 체험의 분석이다. 지성의 힘으로 그녀는 하나의 새로운 이상과 ‘좌절된 인생’에 대한 새로운 개념에 도달하며, 그리하여 그녀는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이 거의 예외 없이 속해 있는 저 ‘실패한 인간들’의 계열에 하나의 새로운 타입을 첨가한다. p162
부르즈와지와 지식인
그러나 죠지 엘리어트의 주지주의는 사회소설의 심리화에 대한 진정하고 최종적인 근거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문제가 심리적 문제 뒤로 물러나게 되는 발전의 한 증상일 뿐이다. p162
지식인은 브르즈와 계급에서 태어났고, 그 선구자는 프랑스 대혁명에의 길을 준비한 시민계급의 저 전위였다. 그들의 문학적 이상은 계몽주의적ㆍ자유주의적인 것이며, 인간적 이상은 인습과 전통에 속박 받지 않는 자유로운 진보적 인간성의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p164
중세의 수도사와 반대로 근대 지식인은 재산 정도와 직업이 각기 다른 여러 계층의 출신자들로 성립되고, 따라서 서로 다른 계층들의, 때로는 적대적인 계층들의 이해와 관점을 대변한다. p165
보헤미안에게 있어서는 지식인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접촉점은 이런 일반적 공감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실상 보헤미안들은 그들 자신이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이다. p166
러시아의 지식인
근대 러시아 소설은 본질적으로 러시아 지식인의 산물인데, 이들은 제정 러시아의 기성체제와 결별한 정신적 엘리트들로서 문학은 무엇보다도 사회비판으로, 그리고 소설은 ‘사회소설’로 이해한다. 러시아에서는 사회적 의의 또는 효율성을 내세우지 않는 단순한 오락문학이나 순수한 심리분석으로서의 소설은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장르이다.
러시아에서 지식인의 개념은 항상 행동주의의 개념과 직결되어 있고, 민주주의적 반대세력과 지식인 간의 연관은 서구에서보다 훨씬 긴밀하다.
근대 러시아 문학은 온통 반항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p167
새로운 교양계층은 귀족과 평민을 아울러 포함하고, 상∙하층의 계급 이탈자들로 보충되는 잡다한 집단이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12월 당원과 비슷한 세계관을 지닌 이른바 ‘참회하는 귀족’들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서는 소상인∙하급관리∙도시의 성직자∙해방된 농도 등의 아들로서 흔히 ‘혼합된 형통의 사람들’이라 불리며 그중 대부분은 ‘자유로운 예술인’, 학생, 가정교서, 신문기자 등의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p168
서구파와 슬라브파
서구지형적인 지식인의 합리주의에 자극되어 슬라브주의라는 형태로 일어나는 지적 반작용은 유럽에서 이보다 반세기 앞서 프랑스 대혁명에 대i한 반동으로 일어난 낭만주의적 역사주의와 전통주의에 대응하는 것이다. p169
슬라브주의가 보수주의나 반동주의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파 중에도 민주주의의 반대자가 있는 것처럼 슬라브파 가운데도 참된 민중의 벗이 있는 것이다. p170
이제 슬라브파와 서구파는 그들의 목표보다도 투쟁방법으로 서로 분간하기 쉬워진다.
러시아의 모든 정신적 엘리트들은 루쏘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예술과 문학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p171
러시아인들은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소외, 그리고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이라는 유럽의 운명적인 대문제를‘자유’의 문제로 정립했다.
서구의 소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독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파멸하는 개인을 묘사함으로써 끝나는 데 비해, 러시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그리고 같은 여자들의 사회에서 이탈하도록 하려는 악령과의 투쟁을 묘사한다. p172
러시아 소설의 행동주의
러시아 소설은 서구소설보다 훨씬 더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향문학(Tendenzliteratur)이다. 서구문학에서보다 사회문제가 훨씬 더 많은 지면과 훨씬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훨씬 더 오랫동안 더 절대적으로 그 우위를 지켜나간다. 제정러시아의 압제하에서는 지적 에너지가 문학을 통해서 밖에 작용할 수 없었으며 검열제도는 문학작품을 사회비판이 가능한 유일한 배출구로 만들었다. p173
자기소외의 심리학
러시아 소설의 놀라운 점은 그 연천年淺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높은 경지
까지 이르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로부터 주도권을 넘겨받아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고 생기 있는 문학형식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p174
근대 심리학은 영혼의 분열상을 -어떤 구체적인 내적 갈등으로 선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부조화를-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셰익스피어와 기타 엘리자베스 시대 작품들의 심리적 모순들은 단순이 불합리한 것으로서 고전주의적 종합 이전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p175
자기 스스로의 갈등에 빠져 어떠한 합리적 단일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영혼을 좀 너무 뻔하지만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내주는 것은 이른바 이중인간(Doppelganger)의 개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이 개념을 작중인물 묘사의 한 고정수단으로 이어받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격의 통일성의 완전한 분해-즉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상호모순만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 자체의 끊임없는 이전과 변모, 재평가와 재해석을 뜻하는 와해-는 낭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투쟁을 통해 낭만주의와 반낭만주의적 태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p176
도스또예프스기의 신비주의와 리얼리즘
도스또예프스끼으 심리적 통찰이 갖는 깊이와 섬세함은 그가 현대 지성인의 문제성을 체험하는 강도에서 온다. p177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순전한 난쎈스인 반면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인류를 가난과 치욕에서 건져낼 것을 절규하고 있다.
그의 예술에는 발자끄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치고 모욕당한 삶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이 있으며, 비록 그의 소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것이 단순히 문학적 관습이나 낭만주의의 상투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빈곤의 존엄성 같은 것이 있다. p178
하지만 도스또예프스키를 혁명적 대중의 대변자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민중’을 이상화하고 슬라브주의적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업 플로레타리아트나 농민들과 아무런 긴밀한 점이 없다. 그가 정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지적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p179
도스또예프스기의 사회철학
도스또예프스기와 디킨즈의 이율배반적이고 여러모로 정리 안된 사회관과, 그들 아버지의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 및 그들 자신이 일찍이 사회적 신분 상실의 느낌을 맛보았던 경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p181
도스또예프스끼의 자연주의와 낭만주의
사회소설의 역사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는 무엇보다도 현대의 대도시를 그 소시민과 프롤레타리아트 군중, 소규모 장사치와 하급관리, 학생과 창녀, 무위도식자와 빈민들을 망라하여 처음으로 자연주의적으로 그려낸 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p181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은 그의 정신성의 눈에 안 띄고 대부분 무의식적인 전재 중의 단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p182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러나 낭만주의의 높은 지대에서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도 헤맸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적 고백문학의 연장일 뿐 아니라 낭만주의 모험소설 및 괴기소설의 연속이기도 하다. p184
도스또예프스끼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정신적 존재들의 유토피아적 고도孤島는 실상 하나의 좁은 새장임이 드러난다. p185
도스또예프스끼의 극적 형식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도스또예프스끼의 걸작들의 극적 형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이러한 형식적 특징을 단지 극적 효과를 거두는 한 방법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돌스또이 소설의 광활하고 도도한 서사시적 흐름과 대조시킨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연극적 수법을 쓰는 것은 단순히, 여러 갈래의 줄거리가 한데 만나고 폭발할 듯하던 갈등이 드디어 폴발하는 클라이맥스를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줄거리 전체에 극적 생기를 채워주고 서사시적 인생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p186
본질적이고 표현적이고 그러나 모자이끄식으로 뜯어맞춘 에피소드들을 위해서 연속성을 희생함으로써 그것은 현대 표현주의 소설형식의 원칙을 예고해준다. 설명과 심리학적 분석과 철학적 토론에 비해 서술이 줄어들며, 소설은 대화장면과 내면의 독백과 거기에 작가가 덧붙이는 논평과 객담을 모아놓은 것이 된다. p187
도스또예프스끼의 표현주의
이러한 방법은 서사적 장르로서의 소설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의 스타일로부터도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심리관찰이 날카롭기로 말한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연주의 소설의 가장 발달된 형태를 대표하지만, 정상적이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그리는 것이 자연주의라고 할 때 꿈처럼 과장된 상황과 환상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을 즐겨 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태도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리얼리즘을 사랑한다. 환상적인 것에 접근하는 리얼리즘을... 현실보다 더 환상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현실보다 더 있기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보다 더 정확한 정의는 없다. p187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
여러 가지 극단적인 대조에도 불구하고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는 개인주의와 자유의 문제에 관한 그들의 태도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p188
똘스또이의 작품에서는 자유의 문제가 도스또예프스끼의 경우에 비해 훨씬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똘스또이에 있어서도 이 문제는 심리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도덕적으로 가장 풍부한 단서가 되는 그의 작중인물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p189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의 반개인주의에는 그들의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개인주의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반대이유는 좀 더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p190
똘스또이의 분별과 도스또예프스끼의 노출증, 전자의 자제와 후자의 ‘사람 많은 데서 발가벗고 춤추기’-<악령>에 나오는 한 인물이 말하듯이-의 대조는 볼떼르와 루쏘를 갈라놓았던 것과 똑같은 신분적 격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작품을 두고 말한다면 똘스또이는 때때로 도스또예프스끼와 똑같이 무절제하고 자의적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둘 다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불안정한 19세기의 전형적 대표인 도스또예프스끼에 비해 똘스또이를 18세기의 아들일라고 부른 것은 옳은 말이었다. p191
똘스또이의 정치관
그러나 이러한 루쏘주의도 고독과 뿌리 없는 삶과 사회적 실향의 운명에 대한 똘스또이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p192
이러한 개인 윤리적 이상은 또한 그의 정적주의를 수반하며 악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배제한 비폭력주의와, 사회현실이 아닌 개인의 영혼을 고치려는 그의 노력이 뒤따른다. 1905년 혁명이후 그는「노동자들에게」라는 호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경의 원인이 사람들 자신 속에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있다는 생각처럼 해로운 것은 없다.” 외부현실에 대한 똘스또이의 수동적 태도는 배부른 지배계급의 평화주의와 일치하며 그들의 수심에 쌓인 자기비난적 자학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평민대중의 생각과 감정에는 전혀 생소한 태도를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똘스또이도 도스또예프스끼와 마찬가지로 어떤 좁은 정치적 범주에 집어넣어지지 않는다.
똘스또이는 혁명가가 아닐 뿐 아니라 모든 혁명적 태도의 명백한 적이기 조차 하다. 그러나 발자끄, 플로베르, 공꾸르 형제 등 서구에서의 ‘질서’와 사회적 화해의 주창자들과 그가 구별되는 것은 똘스또이는 혁명가들의 테러리즘도 용인하지 않지만 기존 정부의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더욱 냉담하다는 것이다. p193
실상 똘스또이의 경우에 우리는 ‘리얼리즘의 승리’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승리’를, 즉 귀족에 의한 편견 없는 사회 묘사뿐 아니라 타고난 반동주의자에 의한 혁명적인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p194
똘스또이의 합리주의
똘스또이의 예술과 사상을 불모성과 무기력의 운명으로부처 지켜주는 것은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합리주의 정신이다.
그가 신앙에 도달한 것은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p194
똘스또이의 서사시적 양식
똘스또이에 있어 현대문명의 인습성과 정신적 공허에 에의 환멸은 플로베르나 모빠상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다. 그의 환멸은 결코 허무주의에 다다르지 않으며 삶 전체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규탄에 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멸을 안겨주는 삶이 너무 무감동한 것이라면 환멸을 느끼는 주인공은 너무나 주정적이고 시적이고 공상적이기 때문이다. p196
똘스또이 소설의 형식이 서구소설의 형식과 그처럼 다른 것도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그의 개념이 플로베르의 개념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서 주로 연유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연극적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면, 똘스또이의 소설은 서사시적-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같은-성격을 지니고 있다. 똘스또이 자신이 그의 소설을 호메로스에 비교했고, 이러한 비교는 똘스또이 비평의 상투적 공식이 되어 있다. p197
4. 인상주의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경계선은 유동적인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두 경향을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양식의 변화가 점진적이었던 것은 그 시대의 경제적 발전이 연속적이었고 사회적 권력관계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에 부합되는 현상이다. p199
생활감정의 역동화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존속에 대한 순가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가 일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 이라는 느낌, 두 번 다시 발 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p202
예술적 표현을 순간적 분위기에 귀속시키는 데에는 동시에 인생에 대한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태도, 수용적∙관조적 주체로서의 방관자의 역할에 대한 만족, 멀찍이서 바라볼 뿐 뛰어들지는 않겠다는 입장, 요컨대 전적으로 심미주의적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인상주의는 자기중심적인 심미적 문화의 정점으로서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삶에 대한 낭만주의적 체념의 극단적 귀결을 의미한다. p203
인상주의의 방법
스타일 면에서 인상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단지 자연주의의 일관된 발전형태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전형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추상적인 관념에서 시간적ㆍ공간적으로 규정된 구체적 체험으로 나아감을 자연주의라고 한다면 인상주의의 현실묘사는 순간적ㆍ일회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의 중요한 성과에 포함될 수 있다. p203
이전의 모든 예술이 종합의 결과라면 인상주의는 분석의 결과이다. p204
사람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려낸다는 사실과 그 그림들의 무형식성을 거만한 도발행위로 간주했고, 자기들이 조롱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복수를 가했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색채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근거한 현실상을 변화시키고 일그러뜨린다. p206
인상주의는 언제나 대상을 이런 형태 없는 표면색채로 그리는데, 그 색체는 신선함과 강한 감각성 때문에 매우 직접적이요 생생한 인상을 주지만 그러나 그림의 환각적 효과를 상당히 경감시키며 인상주의적 방법이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인습임을 무엇보다도 뚜렷이 드러내준다. p207
회화의 우위
19세기 후반에는 회화가 주도적 예술이 된다. 문학 분야에서는 아직 자연주의를 둘러싼 싸움이 한창인 시기에 회화에서는 인상주의가 하나의 독립된 양식으로 발전한다.
인상주의와 관객층
인상주의는 단지 그 시대의 모든 예술장르를 지배한 하나의 시대양식일 뿐 아니라 또한 보편타당한 ‘유럽적’ 양식으로서도 최후의 것-취미의 전반적 합의에 근거를 둔 마지막 예술경향이다. 인상주의가 해체된 이래 여러 다른 예술장르들 또는 여러 다른 국가와 문화들을 양식상으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p208
인상주의에는 또한 부르즈와 예술관객들이 좋아하지 않을 서민적 체취란 조금도 없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의 ‘귀족적 양식’으로서 우아하고 까다로우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며, 감각적∙향락적이요, 값진 것과 희한한 것에 애착을 가지며, 엄격하게 개인적인 체험 즉 고독과 고립의 경험 및 극도로 섬세한 감각과 신경의 경험에 몰두한다. p210
자연주의의 위기
문학의 역사는 회화의 역사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자연주의의 위기는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위기를 말해주는 한 징후로서 1885년경에야 뚜렷해지지만, 그 전조는 1870년경에 벌써 나타난다. p215
1870년 프랑스는 가장 심각한 정신적∙도덕적 위기에 봉착하는데, 그 ‘지적 쎄당’이 바레스의 주장처럼 결코 군사적 패배에 결부된 것은 아니며, 그 ‘치명적인 삶의 권태’가 부르제의 생각처럼 유물론과 상대주의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p216
사람들은 존재의 신비와 영혼의 깊이에 관하여 허튼소리를 지껄이게 되었다. 이성적인 것을 천박하다고 타박하며, 미지의 불가지의 것을 찾아 느끼려고 한다. p218
심미적 쾌락주의
심미주의는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발전의 절정에 달한다. 그 특징적 성격들, 즉 인생에 대한 수동적이요 순전히 관조적인 태도, 체험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및 쾌락주의적인 감각주의는 이제 예술 일반의 평가기준이 된다.
인생에 대해 철저히 수동적인 관조적 태도의 세계관으로서 근대 심미주의는 그 이론적 기초에 있어 예술을 의지로부터의 구제로, 욕망과 걱정을 가라앉히는 진정제로 정의한 쇼펜하우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미적 세계관은 이 의지와 격정에서 해방된 예술의 관점에서 전존재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p220
‘인공적 생활’
인상주의의 심미적 세계관은 예술에 있어 완벽한 자가수정自家受精 과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예술가는 바로 예술가를 위해서 작품을 만들고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본 세계의 형식체험, 즉 예술 자체가 예술의 참다운 대상이 된다. p220
자연 자체는 추하고 범속하고 무형식적 이어서 예술을 통해서야 비로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된다.
문화의 인공성에 대한 열광은 어떤 점에서 낭만주의적 현실주의적 현실도피의 새로운 한 형태일 따름이다. p221
이러한 세계관 전체의 신비주의가 어디보다도 더 강하게 표현된곳은 아마 빌리에 드 릴르-아당의 단편<베라>일 것이다. p223
낭만주의 이래의 모든 진보적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역시 하나의 반항적 예술이며, 인상주의자들이 늘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삶에 대한 인상주의적 태도에 원래부터 잠재해 있는 그 반항성은 부르즈와 관객층이 이 새로운 예술을 배척한 이유의 일부를 설명해준다. p224
데까당스
18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당대의 심미적 쾌락주의를 ‘데까당스’라고 즐겨 불렀다. 그러나 데가당스의 개념은 심미주의의 개념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 특징들, 그러니깐 무엇보다도 문화의 몰락과 위기라는 느낌, 즉 흥망성쇠라는 한 생명과정의 종말에 서 있으며 한 문명의 해체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을 포함한다. p224
‘데까당’들은 양심의 가책을 지닌 쾌락주의자요, 바르베 도르빌리(Barbey d'Aurevilly)나 위스망, 베를렌느, 와일드 및 비어즐리(A.V. Beardsley)처럼 카톨릭교회의 품에 몸을 내던진 죄인들이었다. 이러한 죄의식이 다른 어디서보다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낭만주의의 사춘기적 심리학에 완전히 지배받은 그들의 사랑의 개념이다. p226
예술가와 부르즈와 인생관
인상주의의 시대는 사회에서 소외된 현대적 예술가의 극단적인 두 타입, 즉 새로운 보헤미안과 서구문명으로부터 먼 이국으로 도망하는 예술가를 낳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아직‘푸른 꽃’(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소설 제목이자 낭만주의적 이상의 상징), 꿈과 이상의 나라를 찾고 있었으나, 이제 보들레르는 “그러나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만이 참 여행자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짜 도망이요, 무엇이 끌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구역질나기 때문에 떠나는 미지에의 여행인 것이다. p228
보헤미안의 변모
프랑스에서 보헤미안(boheme)은 단일하고 명백한 현상이 아니다. 뿌치니(G. Puccini)의 오페라에 나오는 경박하고 귀여운 젊은이들이 악령에 사로잡힌 랭보나 범죄성과 종교적 신비주의 사이에서 방황한 베를렌느와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p229
다음 세대의 보헤미안, 거리의 맥주집에 본부를 둔 전투적 자연주의의 보헤미안, 즉 샹플뢰리∙꾸르베∙나다르, 뮈르제 등이 속해 있던 세대는 이와 달리 진정한 보헤미안, 즉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술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즈와 사회의 한계선 바깥에 서서 호기에찬 유희로서가 아니라 절박한 필연성으로 부르즈와지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술 프롤레타리아트였다. p230
상징주의
1890년 이후‘데까당스’란 말은 암시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상징주의’가 주도적 예술경향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p233
한편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에서, 즉 시의 핵심으로서의 메타포의 발견에서 시작하여 인상주의의 풍성한 형상들로 인도한 발전과정의 총결산을 대변한다. p234
상징주의에서 시란, 그 자체로서 독립된 언어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그리고 감각의 여러 다른 영역들 사이에서 창조해내는 관계들과 일치된 표현 바로 그것이다. p234
상징주의는 시의 임무가 명확한 형태의 틀에 박을 수 없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p235
시인이란‘예시자’(voyant)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들을 정상적 기능의 관습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분리시켜서 비자연화ㆍ비인간화시킬 용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현대문학 전반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랭보였던 것이다. p236
‘순수시’
플로베르는 이미 주제 없는 책을, 순수한 형식, 순수한 스타일, 순수한 장식으로서의 책을 쓴다는 생각을 했었다.‘순수시’의 이념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그에게서였다. p237
영국에서의 모더니즘
왕정복고(1660) 이후의 영국에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처럼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는 없다. 대영제국은 오랜 번영기를 거친 뒤 이제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는 또 빅토리아조직 정신의 위기로 전개되었다. ‘대불황’은 1870년대 중엽에 시작하여 10년이 채 못 되어 끝나지만 이 기간 동안에 영국의 시민계급은 왕년의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p240
젊은이들의 자아 실현추구와 낡은 초개인적 형식에 대한 그들의 투쟁은 새로운 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현상이지만 1880년대 영국문학 및 예술에서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비정치적 개인주의에 성격을 띠였다. p241
그들의 반속운동反俗運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부르즈와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이해 못하는 시민들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물혐오는 그것 자체가 다시 하나의 새로운 인습이 되고 마는데, 영국에서 모더니즘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속물혐오의 경향이다. p241
역설 취향은 단순한 반항심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 본래의 근원은‘부르즈와를 놀래키려는’기도에 있음이분명하다. p242
댄디즘
예술가의 언사나 사고방식뿐 아니라 옷차림이나 생활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특이성과 매너리즘은 예술의 멋을 모르고 공상을 모르며 거짓말 잘하고 위선적인 속물적 세계관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극단적인 댄디즘(dandyism)은 인상주의 스타일의 모든 매력적인 요소를 과시하는 그들의 현란한 말솜씨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항의의 일부를 이룬다. p242
지성주의
프랑스 문학에 있어 강력한 직관주의적 흐름이 개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적 경향을 이루는 지성주의知性主義는 영국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비록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지만 메레디스와 헤리제임즈도 그와 같은 지성주의의 기반위에 서있다.
국제적 인상주의
19세기 말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유럽전역에 걸쳐 주도적인 양식이 된다.
프랑스 이외의 문학에서는 묘사의 인상주의적 특징들이 상징주의적 특징보다 더 뚜렷이 부각된다. p247
일체의 행동을 외면하고 체험의 흐름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포기하는 인상주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시인들이다. p248
체호프
유럽에서 인상주의 역사상 가장 눈에 띠는 현상은 러시아가 인상주의를 받아들려 인상주의 운동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체호프 같은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p249
인생에 있어 무능과 실패의 변호자로서 체호프에 앞서 도스또예프스끼나 뚜르게네프 같은 선구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실패와 고독을 가장 훌륭한 인물들의 숙명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체호프의 작중인물들은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무력감과 절망감 및 불치의 의지력 마비증세, 다른 한편으로는 노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수동성과 나태의 세계관, 인생에서 목표라던가 종국에 달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느낌은 작품의 형식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지연주의 연극의 문제
플롯도 극적 진적도 없는 이러한 연극이 생긴 이래로 사람들은 그 존재 이유에 대해, 즉 도대체 이것도 정말 희극인지 연극인지, 무대를 위한 예술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을 품어왔다. p251
자연주의 연극은 현재적 소극장 운동을 향한, 다시 말해서 극적 갈등의 내면화 및 무대와 관객 간의 좀 더 친밀한 연관성을 향한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P252
연극에서 사건의 줄거리 보다 내면성, 기분, 분위기, 서정성 등이 우위에 놓이게 되는 현상은 인상주의 그림의 경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적인 요소가 차츰 제거되어 감을 뜻한다. p253
새로운 연극에 대해 가해진 가장 격렬한 비판은 그 결정론과 상대주의에 대한 것으로써, 이는 물론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p254
입 센
근대연극 사상 중심인물은 입센이다. 단순히 그가 19세기 최대의 연극인이었다는 이유에서 만이 아니라, 당대의 세계관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가장 강렬하게 희곡으로 표현한 사람이 입센이었다는 이유에서도 그렇다. 그의 예술가적 발전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이루는 것은 그의 세대의 숙명적인 문제였던 유미주의와의 결산이다. p256
프랑스의 자연주의 전체가 이상과 현실, 시와 진실, 시와 산문의 갈등을 그 중심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19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들은 누구나 현대문화의 치명적 불행이 현실감각의 결여에 있음을 지적했다. p257
입센이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떨친 것은 주로 그의 연극이 지닌 사회적 교훈 때문 이였다.
이 사회적 교훈은 결국 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라든가 자기실현의 임무, 편협하고 우둔하며 생명력을 상실한 부르즈와 사회의 인습에 대항하여 자기 자신의 본질을 관철하는 과제라든가 하는 단 하나의 이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었다. p258
유럽에서 입센은 그의 현대주의, 반속물주의, 일체의 인습에 대한 가열한 투쟁 때문에 철두철미 진보적인 인사로 통했으나, 좀 더 충분한 문맥 속에 그의 정치적 견해가 비쳐진 그의 조국에서는 급진적인 비외론손과 대조적으로 보수파의 대작가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사적 위치에 관한 한 노르웨이 바깥에서의 평가가 더 정확했다. p259
버나드 쇼
버나드 쇼는 입센의 유일한 진짜 제자이자 후계자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계속하고 이 세기의 유럽이 당면한 중대한 문제에 관환 토론을 심화시킨 유일한 작가인 것이다. 낭만주의적 영웅의 가면을 벗기고 극적이고 비극적인 거창한 제스처에 대한 신앙을 깨뜨리는 작업이 그에 이르러 완수된다. p260
결국에 가서 밝혀질 대로 밝혀진 일이지만, 쇼는 본질적으로 부르즈와 계급과의 연대감에서 움직인 작가였고 예로부터 이 계급의 정신적 습성의 하나인 자기비판의 메가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p262
폭로의 심리학
세기전환에 있어 세계적인 기본 방향을 규정해주는 심리학은‘폭로의 심리학’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둘 다 인간의 정신생화의 표면,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동의 동기에 관해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그의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 혹은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p262
폭로적 기술에 의해 무장된 유물론 자체가 사실은 그 폭로의 대상이 된 부르즈와적ㆍ자본주의적 세계관의 한 소산 이었다. p263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은 그 결론에서 좀 더 낙관적이기는 하지만, 그 후에 나온 정신분석 이론과 마찬가지로 유럽이 그 넘치는 자신감을 상실한 심리상태의 표현이었다. p264
프로이트
가장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사상가 일지라도 자기 사상의 궁극적인 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학설을 전개해 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p264
토마스만은 프로이트가 무의식ㆍ감정ㆍ충동ㆍ꿈 등 그의 연구대상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비합리주의에 깊이 연루되어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단지 인간의 내면세계의 어두운 면에 최대의 관심을 집중한 신낭만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만이 아니고, 문명과 이성 이전의 어떤 경지를 되찾으려는 낭만주의적 사고 전체의 시원관도 깊은 연관이 있다. p265
정신분석에 있어 비합리주의의 진짜 위험은 그 소재의 선택이나 문명에 더럽혀지지 않은 원시적 인간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그 근본 이론이 단순히 충동과 생물학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266
프로이트는 그가 살던 시대의 극복자요 그 시대가 자기 영혼을 팔아넘겼던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에 대해 투쟁 했던 인물이지만, 당시에 그는 그 시대의 업적과 결합 양쪽 모두의 무수히 많은 측면에서 얽혀 있었다. p266
실용주의
우리가 진리라고 일컬었던 것들은 실상은 삶을 촉진 시키고 삶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하며 권력을 고양 시키는 거
VR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