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香仁 이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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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하여]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 (개정판) 창작과 비평사(2007) 백낙청 옮김
저자: 아르놀트 하우저
1892년 헝가리 출생. 문학사가. 예술사회학자.
1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부다페스트, 빈, 베를린, 빠리 등지의 각 대학에서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를 전공. G.루카치, K.만하임 등과 함께 1910년대 말 형성된 부다페스트 “일요 서클”의 일원으로 활동.
부다페스트대학 교수로 잠시 재직한 뒤, 1912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수학.
헝가리 쏘비에뜨 정권 붕괴 이후 빈으로 망명했고, 1938년 나찌의 빈 점령 후 런던으로 이주. 1951~57년 영국 리즈대학 전임강사.
1978년 타계.
저서로 『예술사의 철학』(1958)『예술연구의 방법론』(1960)『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매너리즘 연구』(1968)『예술사회학』(1974)『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음
백낙청:
1938년생. 고교 졸업 후 도미하여 브라운대와 하바드대에서 수학. 이후 재도미하여 1972년 하바드 대학서 D. H. 로런스 연구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이래 편집인•발행인 등을 역임하며 분단현실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왔다. 서울대 명예교수, 시민방송 RTV 명예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 있다.
저서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2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민족문학의 새 단계』『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흔들리는 분단체제』『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과 평론선집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외에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21세기의 한반도 구상』등 다수의 편저서가 있다. 제2회 심산상, 제1회 대산문학상(평론부문), 제14회 요산문학상, 제5회 만해상 실천상 등을 수상했다.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들]
제1장 선사시대
선택을 모르고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연상태”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인 반면, 틀에 박힌 예술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문명의 단계까지는 아직 요원했던 것이다. 14/
근대 예술이 한 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겨우 달성한 시각적 안식의 통일성을 구석기 시대 회화는 처음부터 힘 안들이고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방법을 개선해 나가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하는 일은 없으며 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눈으로 본 것과 머리로 아는 것 사이의 이원적 대립은 구석기 시대 전체를 통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16/
이 시대의 예술이 적어도 그 의식적인 목표에서는 심미적 효과가 아니라 마술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이들 그림에 나오는 짐승들이 흔히 창이나 화살을 맞은 상태로 그려져 있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린 다음에 실제로 창과 화살로 찔렀다는 사실이다. 20/
화가와 조각가의 존재가 허용되었다면 그것은 곧 그 사회가 이들 “비생산적”인 전문가들에게도 나눠줄 만한 물질적 여유를 가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유치한 사회학의 주장처럼 예술의 융성기는 곧 경제적 번영기라는 식으로 이 원칙을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35/
선사 시대 예술의 유물들이 예술 사회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각별히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당시의 예술이 후세의 예술에 비해 현저하게 그 사회적 조건에 좌우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며 주어진 사회적 조건과 예술 형식의 관계가 이후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37/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신석기 시대가 끝나면서 일어난 생활상의 변화는 이 시대가 시작할 때의 변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전면적인 것이었고 경제와 사회의 변혁 또한 그만큼 심대한 것이었다. 단순한 소비에서 생산으로 원시적 개인주의에서 공동작업으로의 발전이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면 신석기 시대와 다음 경계선을 이루는 것은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시작, 도시와 시장의 발생, 인구의 집중과 분화 등이다. 45/
이집트 예술의 초기 작품이 후기 작품보다 덜 양식화되고 덜 인습적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보수주의나 인습주의가 결코 이집트 민족의 인종적 특질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의 전체적 발전에 따라 변화해가는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을 가장 뚜렷하게 말해준다. 56/
정면성의 원리에 따라 인체를 묘사할 경우 상체가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상자와의 어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61/
바빌로니아의 예술가로서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는 만큼 바빌로니아 예술의 시대 구분은 왕들의 통치기간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73/
고대 오리엔트 예술 전체에서 끄리띠 섬의 예술만큼 사회학적으로 해명하기 곤란한 예술은 없다. 75/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시인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의 상층을 차지하게 된 무사계급의 세속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문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은 동시에 시인의 역할까지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이제 사제층과는 달리 범접할 수 없는 익명의 권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문학은 집단의 권위를 대변하는 신성함을 잃게 되었다.
기원전 12세기의 아카이아왕이나 귀족들, 즉 이 시대의 “영웅시대”라는 명칭을 붙이게 해준 영웅들은 스스로를 “뭇 도시의 약탈자”라고 자랑스럽게 칭한데서 알 수 있듯이 강도요 해적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세속적, 비종교적이고 그들의 명성의 가장 빛나는 면류관에 해당하는 뜨로이 전설은 그들의 약탈과 해적 행위를 시적으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87/
..시인들이 청중으로 생각한 것은 호전적인 토지 소유 귀족들이 아니라 싸움을 즐기지 않는 도시 귀족들이었다. 97/
기원전 700년을 전후한 이 시대에 와서 조형 예술 분야에서도 작자의 서명이 있는 최초의 작품이 나왔다. 그 효시를 이루는 것은 아리스토토노스의 이름이 새겨진 항아리인데 이것은 현존하는 예술 작품 중 작자의 서명이 담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00/
인간은 생활을 위한 직접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비교적 안전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종전에 필요에 따라 무기나 도구로서 발명한 정신적 수단을 유희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전혀 혹은 거의 관계가 없는 일들에 관해서 원인을 캐고 설명을 구하고 인과관계를 찾기 시작한다. 113/
지배계급이 “목적 없는” 예술이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술이 주술이나 종교, 과학이나 실용행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117/
일반 시민은 입장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는 데다 도리어 극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하여 보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흔히 민주주의의 최고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나, 실은 이것이야말로 일반 민중이 연극의 운명에 대해 발언할 길을 처음부터 막아버린 요인이었다. 122/
그리스 비극은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극”이었다. 124/
소피스트에 이르러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식인 개념과 마주치게 되는데, 선사시대 및 역사 시대 초기의 사제층이나 호메로스 시대의 음유시인들과 같은 일정한 직업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층에 항시 인력을 수급할 수 있을 만큼 폭 넓은 인간 수원지(水源地)로서의 지식층이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 131/
플라톤은 미래의 이상국가에서 예술가를 추방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는 경험적 현실의 세계나 현상계의 감각적 인상, 즉 완전한 가상(假像)내지 부분적인 진리에 집착하며 모든 것을 가시적인 표현수단으로 잡으려고 하여 순수한 정신적 당위의 세계인 순수 이데아를 저속하게 만들고 왜곡시키기 때문이라 하겠다. 141/
절충주의는 헬레니즘 시대 학문적 업적의 근본적 특징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예술 작품의 근본적 특색이기도 하다. 147/
그리스 고전 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조각이었던 것처럼 로마시대 후기 및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의 민중예술, 즉 모든 사람을 향해 모든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는 예술이기도 했다. 154/
노예노동과 육체노동이 결부되었다는 사실은 원시적인 체면의식의 보존을 조장한 것일 뿐 육체 노동을 천시하는 체면 의식 그 자체는 노예제라는 제도보다 분명히 오래된 것이었다. 161/
제4장 중세
그리스도교 예술은 그리스도교 발생과 동시에 성립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180/
고전기 그리스 로마의 사실주의에서 멀어져 간 그리스도교 예술은 두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하나는 상징주의적 방향으로…………………..또 하나의 방향은 정경이나 동작 또는 일화적인 사건 등을 보는 사람 눈 앞에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서사시적 설명적 양식
이다. 180~181/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이 그 서툰 솜씨를 극복한 것은 관용령(寬容令)이 발포되어 이 예술이 국가 및 궁정, 그리고 상류사회와 교양계층의 정통적인 예술이 된 이후의 일이다. 183/
그리스도교 예술관의 가장 현저한 특색은 예술을 도덕적 교육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예술 작품은 흔히 단순한 선전 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오로지 교리 주입수단으로 생각된 적은 한번도 없다. 이 점에서 고대의 예술관과 그리스도교의 예술관은 애초부터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185/
비잔띤 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이러한 군대와 관료기구 덕분이며 황제가 경제적인 행동의 자유를 향유하고 대지주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189/
서방에서도 비잔띤에서 만큼 완전한 제정일치가 행해진 나라는 없었고 근세사에서도 군주에 대한 봉사가 신에 대한 봉사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비잔띤에 비길 만한 국가는 없었다. 189/
…우상 파괴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결과적으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기는 황제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부단히 증대해가고 있던 수도원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데 있다. 200/
어떤 시대의 각 예술 장르가 얼마만큼 자연주의적인가 하는 것은 비록 그 시대가 동질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도 그 시대의 일반적 문화단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각 장르의 성격, 역사, 독자적 전통에 의해서도 좌우되는 것이다. 207/
카롤링어 왕조 예술에서 소규모 작품이 환영받았다는 점을 당시의 생활이 아직 다분히 유목민적 요소를 가진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성격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유목 민족은 일찍이 거대한 기념비적 예술을 낳은 예가 없고 되도록 작고 간단하게 운반할 수 있는 장식품만을 만드는 법이라고 말한 학자도 있다. 220/
영웅시를 민중 예술로 보는 낭만파의 이론은 본질적으로는 영웅 서사시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요소를 해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이 지닌 선전도구로서의 기능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대한 영웅시대의 무사 귀족들이 문학에 흥미를 기울인 것은 실리의 입장에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226/
그러나 수도원 내에서의 노동이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속죄나 처벌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라든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도 “저급한 기예”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노동이 삶의 존엄성과 직결된다는 생각은 당분간 아직 요원한 이야기였다. 235/
예술가가 항상 익명으로 일했다는 것도 중세에 관한 낭만주의자들의 신화에 속한다. 240/
로마네스크 예술은 수도원의 예술임과 동시에 귀족계급의 예술이기도 했다. 이 사실이야말로 아마 수도사 집단과 귀족계급 사이의 정신적 연대관계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고대 로마의 고위 제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세교회의 요직도 귀족계급 출신자에게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수도원장이나 주교들이 봉건제도와 그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귀족계급 출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경제적 및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242/
봉건제도는 9세기 국가가 이러한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출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로서의 권한, 예컨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 대신 군사적인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세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244/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건축주의 의향이 의향이었던만큼 절대적인 권력과 무진장한 재산의 표현으로서 사람을 위압하는 장대한 건축물이 되었다. 251/
고딕의 발생은 근세 예술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자연에 대한 충실, 감정의 깊이, 감각성과 감수성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양식상의 이상은 고딕의 소산이었다. 263/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시의 시민층은 아직 완전히 대접받지는 못해도 어떻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회집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그들은 근세사의 주역을 맡았고 서양문화에 자신의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되는 이른바 “제3계급’으로서 모든 사회활동의 표면으로 떠 오르게 되는 것이다. 269/
기사계급이 세습적인 신분으로 변화하고 외부에 대해 폐쇄적인 군인계층이 된 시점이야말로 중세 귀족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의 하나이고 기사계급의 역사에서는 단연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이 시점을 경계로 하여 기사계급은 귀족사회에서 빠뜨릴 수 없는, 더욱이 구 귀족에 비해서 압도적인 다수에 해당하는 요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사의 계급적 이상, 귀족의 계급의식, 계급적 이데올로기는 이때부터 비로소, 그것도 바로 이 기사계급에 의하여 형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76/
습관적인 독서는 이전의 경건한 청중을 무성의한 독자로 바꾸기도 했지만 동시에 감식안을 갖춘 독서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301/
“신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이러한 정신적 변혁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말에는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일체의 신학적 변호가 포함되어있다. 308/
실재론은 정체적, 보수적인 세계관의 표현이요, 유명론은 동적 진보적 자유주의적인 세계관의 표현이었다. 모든 개별적 사물이 존재의 일부임을 보증하려는 유명론은 사회의 최하급 출신자에게도 상승의 길이 열려 있는 사회질서에 어울리는 철학인 것이다. 316/
…예술이 그 원시성의 마지막 잔재를 청산하고 이미 표현 수단자체를 추구하여 싸울 필요가 없게 되는 순간, 기성품처럼 준비되어 아무데나 응용할 수 있는 기술에서 오는 위험이 머리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고딕과 더불어 근대 예술의 서정성이 시작되었지만 그 기술 만능주의 역시 고딕에서 시작되었다. 324/
…길드는 그 자체로서는 비록 아무리 반자유주의적인 존재였다 하더라고 건축 장인조합에 비하면 바로 예술가의 자유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진보를 나타내고 있었다. 331/
중세 후기는 출세한 시민계급이 형성된 시대일 뿐 아니라 시대 그 자체가 시민계급의 시대였다. 334/
12세기 및 13세기까지만 해도 시민계급은 자기들의 물질적 생존 근거와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싸웠는데 이제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사회진보를 위해 투쟁하던 진취적인 계층으로부터 현상에 만족하는 보수적인 계급으로 변모한 것이다. 335/
중세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운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339/
중세 말기 부르즈와 시대의 인간은 이 세상을 피안적인 일에만 흥미를 갖고 있었던 그의 선인들과는 다른 눈으로,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 말하자면 그들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가는 다채롭고 무궁무진한 인생의 흐름 가에 서서 거기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것에 비상한 관심을 느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345/
[내가 저자라면]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동일해 보이는 그것이 완전히 모습을 달리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실이나 사물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에 의해 그 만큼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재미는 그런 여러 가지 시각들 덕택에 새로운 색깔을 발견하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책은 예술의 역사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해 중세까지 기술되어 있는 데 생각보다 읽히는 게 좀 더뎠다. 우선 글자가 너무 작고 빽빽하다는 점, 문장이 길다는 점이겠지만 독자의 예술에 관한 무지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뿌듯한 맛이 느껴지는 책이다. 예술의 생성과정과 그 배경의 이야기, 그 사회학적인 근거들은 자연스러운 수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를 그린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그들이 권위를 가지게 되는 사회적 구조, 더 나아가 각 시대별로 예술과 사회구조의 밀접한 관계는 상당히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신화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봐왔던 트로이 전쟁에 대해서는 약탈문화를 시적으로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하고 있다. 헬레네, 아킬레우스, 헥토르 등은 얼마나 많은 영화에 등장하고 멋지게 표현되어 왔는가? 저자의 책을 읽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화에 불과하다는 소리에 약간 섭섭하기도 하다.
노동에 관한 관점은 어찌 보면 동서양이 비슷한 관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육체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글을 쓰는 사람이 훨씬 존경 받는 사회. 그래서 예술에서도 조형예술가의 대접은 옛날부터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해있었으며 그것이 제대로 존중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었음이다.
사람도 성장기를 거쳐 어른이 되듯 예술도 무슨 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전에 미리 그런 모습의 징조를 갖춘다. 예술 사조가 변해가는 배경에는 반드시 그 사회의 현실과 연관이 되어있다. 그리고 역시 그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예술 또한 역동적으로 움직여 왔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러한 배경에 관한 설명이 아주 풍부하고 논리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었다.
역자인 백낙청은 1999년 개정판을 내면서 저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서 하우저의 사회사적 관점이 온갖 말밥에 오르고 흰눈질을 당할지언정 필화를 일으키지 않을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험난한 시대였음에도 정말 용케 그 시대에 이런 관점을 피력할 수 있었구나 할 만큼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직선적이고 명쾌하다. 예스 노우가 분명한 명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얼만큼 공부하면 이런 안목을 가지게 될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무리 훌륭한 예술품을 감상해도 데면데면하고 말았는데 이번 책은 안목과 인식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한번에 담기긴 힘들겠지만 이런 인식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반갑다고 말해야겠다.
IP *.48.43.19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 (개정판) 창작과 비평사(2007) 백낙청 옮김
저자: 아르놀트 하우저
1892년 헝가리 출생. 문학사가. 예술사회학자.
1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부다페스트, 빈, 베를린, 빠리 등지의 각 대학에서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를 전공. G.루카치, K.만하임 등과 함께 1910년대 말 형성된 부다페스트 “일요 서클”의 일원으로 활동.
부다페스트대학 교수로 잠시 재직한 뒤, 1912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수학.
헝가리 쏘비에뜨 정권 붕괴 이후 빈으로 망명했고, 1938년 나찌의 빈 점령 후 런던으로 이주. 1951~57년 영국 리즈대학 전임강사.
1978년 타계.
저서로 『예술사의 철학』(1958)『예술연구의 방법론』(1960)『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매너리즘 연구』(1968)『예술사회학』(1974)『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음
백낙청:
1938년생. 고교 졸업 후 도미하여 브라운대와 하바드대에서 수학. 이후 재도미하여 1972년 하바드 대학서 D. H. 로런스 연구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이래 편집인•발행인 등을 역임하며 분단현실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왔다. 서울대 명예교수, 시민방송 RTV 명예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 있다.
저서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2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민족문학의 새 단계』『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흔들리는 분단체제』『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과 평론선집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외에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21세기의 한반도 구상』등 다수의 편저서가 있다. 제2회 심산상, 제1회 대산문학상(평론부문), 제14회 요산문학상, 제5회 만해상 실천상 등을 수상했다.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들]
제1장 선사시대
선택을 모르고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연상태”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인 반면, 틀에 박힌 예술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문명의 단계까지는 아직 요원했던 것이다. 14/
근대 예술이 한 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겨우 달성한 시각적 안식의 통일성을 구석기 시대 회화는 처음부터 힘 안들이고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방법을 개선해 나가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하는 일은 없으며 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눈으로 본 것과 머리로 아는 것 사이의 이원적 대립은 구석기 시대 전체를 통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16/
이 시대의 예술이 적어도 그 의식적인 목표에서는 심미적 효과가 아니라 마술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이들 그림에 나오는 짐승들이 흔히 창이나 화살을 맞은 상태로 그려져 있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린 다음에 실제로 창과 화살로 찔렀다는 사실이다. 20/
화가와 조각가의 존재가 허용되었다면 그것은 곧 그 사회가 이들 “비생산적”인 전문가들에게도 나눠줄 만한 물질적 여유를 가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유치한 사회학의 주장처럼 예술의 융성기는 곧 경제적 번영기라는 식으로 이 원칙을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35/
선사 시대 예술의 유물들이 예술 사회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각별히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당시의 예술이 후세의 예술에 비해 현저하게 그 사회적 조건에 좌우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며 주어진 사회적 조건과 예술 형식의 관계가 이후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37/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신석기 시대가 끝나면서 일어난 생활상의 변화는 이 시대가 시작할 때의 변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전면적인 것이었고 경제와 사회의 변혁 또한 그만큼 심대한 것이었다. 단순한 소비에서 생산으로 원시적 개인주의에서 공동작업으로의 발전이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면 신석기 시대와 다음 경계선을 이루는 것은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시작, 도시와 시장의 발생, 인구의 집중과 분화 등이다. 45/
이집트 예술의 초기 작품이 후기 작품보다 덜 양식화되고 덜 인습적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보수주의나 인습주의가 결코 이집트 민족의 인종적 특질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의 전체적 발전에 따라 변화해가는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을 가장 뚜렷하게 말해준다. 56/
정면성의 원리에 따라 인체를 묘사할 경우 상체가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상자와의 어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61/
바빌로니아의 예술가로서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는 만큼 바빌로니아 예술의 시대 구분은 왕들의 통치기간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73/
고대 오리엔트 예술 전체에서 끄리띠 섬의 예술만큼 사회학적으로 해명하기 곤란한 예술은 없다. 75/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시인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의 상층을 차지하게 된 무사계급의 세속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문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은 동시에 시인의 역할까지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이제 사제층과는 달리 범접할 수 없는 익명의 권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문학은 집단의 권위를 대변하는 신성함을 잃게 되었다.
기원전 12세기의 아카이아왕이나 귀족들, 즉 이 시대의 “영웅시대”라는 명칭을 붙이게 해준 영웅들은 스스로를 “뭇 도시의 약탈자”라고 자랑스럽게 칭한데서 알 수 있듯이 강도요 해적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세속적, 비종교적이고 그들의 명성의 가장 빛나는 면류관에 해당하는 뜨로이 전설은 그들의 약탈과 해적 행위를 시적으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87/
..시인들이 청중으로 생각한 것은 호전적인 토지 소유 귀족들이 아니라 싸움을 즐기지 않는 도시 귀족들이었다. 97/
기원전 700년을 전후한 이 시대에 와서 조형 예술 분야에서도 작자의 서명이 있는 최초의 작품이 나왔다. 그 효시를 이루는 것은 아리스토토노스의 이름이 새겨진 항아리인데 이것은 현존하는 예술 작품 중 작자의 서명이 담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00/
인간은 생활을 위한 직접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비교적 안전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종전에 필요에 따라 무기나 도구로서 발명한 정신적 수단을 유희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전혀 혹은 거의 관계가 없는 일들에 관해서 원인을 캐고 설명을 구하고 인과관계를 찾기 시작한다. 113/
지배계급이 “목적 없는” 예술이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술이 주술이나 종교, 과학이나 실용행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117/
일반 시민은 입장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는 데다 도리어 극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하여 보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흔히 민주주의의 최고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나, 실은 이것이야말로 일반 민중이 연극의 운명에 대해 발언할 길을 처음부터 막아버린 요인이었다. 122/
그리스 비극은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극”이었다. 124/
소피스트에 이르러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식인 개념과 마주치게 되는데, 선사시대 및 역사 시대 초기의 사제층이나 호메로스 시대의 음유시인들과 같은 일정한 직업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층에 항시 인력을 수급할 수 있을 만큼 폭 넓은 인간 수원지(水源地)로서의 지식층이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 131/
플라톤은 미래의 이상국가에서 예술가를 추방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는 경험적 현실의 세계나 현상계의 감각적 인상, 즉 완전한 가상(假像)내지 부분적인 진리에 집착하며 모든 것을 가시적인 표현수단으로 잡으려고 하여 순수한 정신적 당위의 세계인 순수 이데아를 저속하게 만들고 왜곡시키기 때문이라 하겠다. 141/
절충주의는 헬레니즘 시대 학문적 업적의 근본적 특징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예술 작품의 근본적 특색이기도 하다. 147/
그리스 고전 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조각이었던 것처럼 로마시대 후기 및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의 민중예술, 즉 모든 사람을 향해 모든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는 예술이기도 했다. 154/
노예노동과 육체노동이 결부되었다는 사실은 원시적인 체면의식의 보존을 조장한 것일 뿐 육체 노동을 천시하는 체면 의식 그 자체는 노예제라는 제도보다 분명히 오래된 것이었다. 161/
제4장 중세
그리스도교 예술은 그리스도교 발생과 동시에 성립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180/
고전기 그리스 로마의 사실주의에서 멀어져 간 그리스도교 예술은 두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하나는 상징주의적 방향으로…………………..또 하나의 방향은 정경이나 동작 또는 일화적인 사건 등을 보는 사람 눈 앞에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서사시적 설명적 양식
이다. 180~181/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이 그 서툰 솜씨를 극복한 것은 관용령(寬容令)이 발포되어 이 예술이 국가 및 궁정, 그리고 상류사회와 교양계층의 정통적인 예술이 된 이후의 일이다. 183/
그리스도교 예술관의 가장 현저한 특색은 예술을 도덕적 교육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예술 작품은 흔히 단순한 선전 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오로지 교리 주입수단으로 생각된 적은 한번도 없다. 이 점에서 고대의 예술관과 그리스도교의 예술관은 애초부터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185/
비잔띤 제국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이러한 군대와 관료기구 덕분이며 황제가 경제적인 행동의 자유를 향유하고 대지주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189/
서방에서도 비잔띤에서 만큼 완전한 제정일치가 행해진 나라는 없었고 근세사에서도 군주에 대한 봉사가 신에 대한 봉사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비잔띤에 비길 만한 국가는 없었다. 189/
…우상 파괴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결과적으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기는 황제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부단히 증대해가고 있던 수도원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데 있다. 200/
어떤 시대의 각 예술 장르가 얼마만큼 자연주의적인가 하는 것은 비록 그 시대가 동질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도 그 시대의 일반적 문화단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각 장르의 성격, 역사, 독자적 전통에 의해서도 좌우되는 것이다. 207/
카롤링어 왕조 예술에서 소규모 작품이 환영받았다는 점을 당시의 생활이 아직 다분히 유목민적 요소를 가진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성격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유목 민족은 일찍이 거대한 기념비적 예술을 낳은 예가 없고 되도록 작고 간단하게 운반할 수 있는 장식품만을 만드는 법이라고 말한 학자도 있다. 220/
영웅시를 민중 예술로 보는 낭만파의 이론은 본질적으로는 영웅 서사시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요소를 해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이 지닌 선전도구로서의 기능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대한 영웅시대의 무사 귀족들이 문학에 흥미를 기울인 것은 실리의 입장에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226/
그러나 수도원 내에서의 노동이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속죄나 처벌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라든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도 “저급한 기예”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노동이 삶의 존엄성과 직결된다는 생각은 당분간 아직 요원한 이야기였다. 235/
예술가가 항상 익명으로 일했다는 것도 중세에 관한 낭만주의자들의 신화에 속한다. 240/
로마네스크 예술은 수도원의 예술임과 동시에 귀족계급의 예술이기도 했다. 이 사실이야말로 아마 수도사 집단과 귀족계급 사이의 정신적 연대관계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고대 로마의 고위 제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세교회의 요직도 귀족계급 출신자에게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수도원장이나 주교들이 봉건제도와 그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귀족계급 출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경제적 및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242/
봉건제도는 9세기 국가가 이러한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출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로서의 권한, 예컨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 대신 군사적인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세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244/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건축주의 의향이 의향이었던만큼 절대적인 권력과 무진장한 재산의 표현으로서 사람을 위압하는 장대한 건축물이 되었다. 251/
고딕의 발생은 근세 예술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자연에 대한 충실, 감정의 깊이, 감각성과 감수성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양식상의 이상은 고딕의 소산이었다. 263/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시의 시민층은 아직 완전히 대접받지는 못해도 어떻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회집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그들은 근세사의 주역을 맡았고 서양문화에 자신의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되는 이른바 “제3계급’으로서 모든 사회활동의 표면으로 떠 오르게 되는 것이다. 269/
기사계급이 세습적인 신분으로 변화하고 외부에 대해 폐쇄적인 군인계층이 된 시점이야말로 중세 귀족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의 하나이고 기사계급의 역사에서는 단연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이 시점을 경계로 하여 기사계급은 귀족사회에서 빠뜨릴 수 없는, 더욱이 구 귀족에 비해서 압도적인 다수에 해당하는 요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사의 계급적 이상, 귀족의 계급의식, 계급적 이데올로기는 이때부터 비로소, 그것도 바로 이 기사계급에 의하여 형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76/
습관적인 독서는 이전의 경건한 청중을 무성의한 독자로 바꾸기도 했지만 동시에 감식안을 갖춘 독서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301/
“신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이러한 정신적 변혁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말에는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일체의 신학적 변호가 포함되어있다. 308/
실재론은 정체적, 보수적인 세계관의 표현이요, 유명론은 동적 진보적 자유주의적인 세계관의 표현이었다. 모든 개별적 사물이 존재의 일부임을 보증하려는 유명론은 사회의 최하급 출신자에게도 상승의 길이 열려 있는 사회질서에 어울리는 철학인 것이다. 316/
…예술이 그 원시성의 마지막 잔재를 청산하고 이미 표현 수단자체를 추구하여 싸울 필요가 없게 되는 순간, 기성품처럼 준비되어 아무데나 응용할 수 있는 기술에서 오는 위험이 머리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고딕과 더불어 근대 예술의 서정성이 시작되었지만 그 기술 만능주의 역시 고딕에서 시작되었다. 324/
…길드는 그 자체로서는 비록 아무리 반자유주의적인 존재였다 하더라고 건축 장인조합에 비하면 바로 예술가의 자유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진보를 나타내고 있었다. 331/
중세 후기는 출세한 시민계급이 형성된 시대일 뿐 아니라 시대 그 자체가 시민계급의 시대였다. 334/
12세기 및 13세기까지만 해도 시민계급은 자기들의 물질적 생존 근거와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싸웠는데 이제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사회진보를 위해 투쟁하던 진취적인 계층으로부터 현상에 만족하는 보수적인 계급으로 변모한 것이다. 335/
중세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운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339/
중세 말기 부르즈와 시대의 인간은 이 세상을 피안적인 일에만 흥미를 갖고 있었던 그의 선인들과는 다른 눈으로,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 말하자면 그들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가는 다채롭고 무궁무진한 인생의 흐름 가에 서서 거기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것에 비상한 관심을 느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345/
[내가 저자라면]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동일해 보이는 그것이 완전히 모습을 달리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실이나 사물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에 의해 그 만큼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재미는 그런 여러 가지 시각들 덕택에 새로운 색깔을 발견하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책은 예술의 역사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해 중세까지 기술되어 있는 데 생각보다 읽히는 게 좀 더뎠다. 우선 글자가 너무 작고 빽빽하다는 점, 문장이 길다는 점이겠지만 독자의 예술에 관한 무지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뿌듯한 맛이 느껴지는 책이다. 예술의 생성과정과 그 배경의 이야기, 그 사회학적인 근거들은 자연스러운 수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를 그린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그들이 권위를 가지게 되는 사회적 구조, 더 나아가 각 시대별로 예술과 사회구조의 밀접한 관계는 상당히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신화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봐왔던 트로이 전쟁에 대해서는 약탈문화를 시적으로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하고 있다. 헬레네, 아킬레우스, 헥토르 등은 얼마나 많은 영화에 등장하고 멋지게 표현되어 왔는가? 저자의 책을 읽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화에 불과하다는 소리에 약간 섭섭하기도 하다.
노동에 관한 관점은 어찌 보면 동서양이 비슷한 관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육체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글을 쓰는 사람이 훨씬 존경 받는 사회. 그래서 예술에서도 조형예술가의 대접은 옛날부터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해있었으며 그것이 제대로 존중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었음이다.
사람도 성장기를 거쳐 어른이 되듯 예술도 무슨 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전에 미리 그런 모습의 징조를 갖춘다. 예술 사조가 변해가는 배경에는 반드시 그 사회의 현실과 연관이 되어있다. 그리고 역시 그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예술 또한 역동적으로 움직여 왔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러한 배경에 관한 설명이 아주 풍부하고 논리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었다.
역자인 백낙청은 1999년 개정판을 내면서 저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서 하우저의 사회사적 관점이 온갖 말밥에 오르고 흰눈질을 당할지언정 필화를 일으키지 않을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험난한 시대였음에도 정말 용케 그 시대에 이런 관점을 피력할 수 있었구나 할 만큼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직선적이고 명쾌하다. 예스 노우가 분명한 명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얼만큼 공부하면 이런 안목을 가지게 될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무리 훌륭한 예술품을 감상해도 데면데면하고 말았는데 이번 책은 안목과 인식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한번에 담기긴 힘들겠지만 이런 인식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반갑다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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