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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9일 02시 13분 등록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근세편 상(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저자 Arnold Hauser / 번역 백낙청, 반성완 / 출판 창작과 비평사


Ⅰ. 저자에 대하여
1892 헝가리 테메스바~1978 헝가리 부다페스트.
문학사가·예술사회학자.

유대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빈 등의 대학에서 문학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1919년에 성립된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하에서 G. 루카치의 도움으로 잠시 부다페스트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다 이 정권이 붕괴하자 빈으로 망명했다. 1938년 나치가 빈을 점령하자 다시 영국으로 망명했고, 1940~50년 영화사의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주저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했다. 이 책은 1951년 영어로 된 책이 처음 나왔고 1954년 독일어판이 출간되었다. 1951~57년 영국 리즈대학의 전임강사를 지냈고 1950년대말과 1960년대초에는 미국 대학에서 교환교수로도 활동했다.

그의 학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910년대 말에 형성된 부다페스트의 '일요 서클'이었다. 루카치를 중심으로 카를 만하임, 발라츠 등이 속해 있던 이 서클에서는 현대문학과 예술을 포함해 정신과학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토의되었다. 그의 연구의 특징인 예술사의 사회학적 연구방법론, 예술담당자로서의 지식층에 대한 연구, 영화예술에 대한 관심 등은 이 서클을 통해 얻어졌다. 또 1920, 1930년대에는 A.리글의 바로크 연구, H. 뵐플린의 양식사 연구, 드보르자크의 역사주의적 예술사 연구를 섭렵했고, 지멜, 좀바르트, 막스 베버 등의 사회학자에게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파리와 이탈리아에 머물며 미술품을 직접 연구했다.

그밖의 주요저서로는 〈예술연구의 방법론〉(1960)·〈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예술의 사회학〉(1974)·〈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다.


아래의 글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홈페이지에 실린 ‘바람구두’님의 저자와 그의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관한 글입니다.

(출처:http://windshoes.new21.org/person-hauser.htm)


1. 헝가리의 유태인으로 태어난 하우저

아놀드 하우저는 1892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있던 헝가리의 작은 도시 테메스바(Temesvár)의 유태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19세기를 1830년에 시작해서 1910년까지 연속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므로 그가 출생한 1892년으로부터 그가 성인으로 성장해가던 시기의 대부분은 19세기를 살았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 말은 물론 그가 전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분히 19세기적 지식인의 교양을 바탕으로 한 인물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원저명은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이다. 원저명대로 하자면 "문학"보다 "예술"이 먼저 나와서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가 되어야 마땅한 번역일 테지만, 이 책은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가 아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되었다. 하우저 자신은 문학, 특히 소설은 18세기의 예술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예술사가 이전에 미술사가, 미술비평가란 점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오늘날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모국어격인 독일어권은 물론이고, 프랑스, 영미 문화권에도 널리 알려진 20세기 유럽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루카치", "아도르노"와 비슷한 계열의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사상적으로는 이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당시 테메스바는 헝가리 영토였지만 그의 부모는 독일 이주민이었고, 그런 덕분에 아놀드 하우저는 어려서부터 독일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했다. 또 그의 부친은 독일어는 물론 헝가리어, 세르비아어까지 똑같이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생업을 제외하고 독서에도 열중하는 교양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우저의 회고에 따르면 부친의 손에 한 번도 책이 들려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그의 가정은 문화적인 교양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정신적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이곳에서 앞으로 평생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가 될 칼 만하임(『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과 그의 스승이 될 게오르그 루카치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헝가리 출신 지식인 중 만하임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플로렌스와 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 레더러, 라스크 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에른스트 블로흐, 파울 에른스트와도 깊은 친교를 가졌다. 그가 헝가리로 돌아온 것은 1915년 무렵의 일이었고, 칼 만하임과 아놀드 하우저 등은 곧 그의 제자가 되었다. 루카치는 "일요회(Sontagskreise)"라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의 회원 수는 열두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임에 속하기 위한 특별한 규정 같은 것은 없었으나 이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만남을 가졌고, 종종 만남은 그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길고긴 설전이 되곤 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점증해가고 있는 독일의 팽창주의를 염려했고, 문학을 토론했으며, 예술을 포함에 정신과학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토의 했으며, 마르크스스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2. 고달픈 망명생활과 문학과 예술의 사회학

하우저는 독일어만큼 프랑스어도 잘했다고 하는데, 그는 문학사를 전공했지만 문학사보다는 미술사 특히 조형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그는 고대의 조형예술가(조각가)들이 시인보다 낮은 지위에 머물렀던 원인을 분석하는데 많은 공력을 기울였던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하우저는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빈의 대학에서 문학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전후 잠깐이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1919년) 루카치의 도움을 받아 잠깐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에 취임하기도 했지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곧 빈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의 망명은 그가 앞으로 전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망명자 생활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술사에 있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의 양식사 연구, 드보르작(Max Dvorak)의 역사주의적 예술사 연구 등을 폭넓게 섭렵하였고, 또 이들과 사상적으로 결별했다. 그는 모든 예술양식 및 예술적 기호의 변화는 외적인 영향(하부구조의 변화)의 요구에 의해 생겨나며 그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대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런 생각이 녹아들어 훗날 평생의 저작으로 남게 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뿌리가 되었다. 그는 떠돌이 망명자생활 동안 베를린 대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자들 게오르그 짐멜, 베르너 좀바르트, 막스 베버 등의 사회학적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파리와 이탈리아 등에 머무는 동안엔 직접 미술품을 접하여 안목을 넓혔다. 비록 고달픈 망명자 생활이었으나 그에겐 훗날 예술사 연구의 기초가 된 셈이었다. 하우저 내외는 독일을 떠나 빈에 정착하게 된다. 비록 헝가리로 돌아갈 순 없더라도 헝가리에 가까이 살고 싶다는 부인의 희망 때문이긴 했지만 하우저는 빈에서 더욱더 고달픈 생활을 해야만 했다. 독일에서 그는 출판사 일과 서적 판매업을 했는데 빈에서는 아무도 그를 고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놀드 하우저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별 볼일 없는 영화사의 사환으로 일했다.

비록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덕분에 아놀드 하우저는 수백, 수천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경험,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것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작품이 복제 가능해짐에 따라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가 '회화를 대하던 보수적 태도에서 영화를 대하는 진보적 태도'로 변화"하였고, "영화에서는 관중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일치한다. 영화의 관객은 이전 회화 감상자처럼 위계 질서적 매개를 통해 개별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집단 수용의 형태로 감상하기에 그 반응이 다르다."고 말했던 바로 그 변화를 그는 바로 영화사의 책상에 앉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빈에서의 망명생활도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오고 말았다. 나치 독일이 빈(오스트리아)을 점령하자 그는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의 망명생활 역시 그에겐 고달픈 것이었다. 그는 돈도, 명성도, 목적도, 희망도 없이 떠도는 망명자였다. 그는 이곳에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아내와 사별하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그는 이런 곤궁과 비참 속에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대영도서관에 갔다.
그는 그의 저술 《예술사의 철학》에서 그곳의 기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언제나 그곳을 기억할 때면, 나는 그와의 털끝만한 연대성도 감히 느끼지 못합니다만, 그곳에 앉아있는 순간은 바로 내가 다름 아닌 성소에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

런던에서의 1940년부터 1950년까지 아놀드 하우저는 어느 영화사에서 ‘사환이 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직장일이 끝난 저녁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10여 년에 걸쳐 빈에서 착수했던 영화미학과 예술사회학에 관한 저술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하우저는 먼저 런던에 와 있던 칼 만하임으로부터 그가 담당하고 있던 예술사회학에 관한 선집의 100여쪽에 달하는 짧은 서문을 청탁받는다. 그는 서문을 집필하기 위해 관련 서적들을 찾았으나 마땅히 참고할 만한 책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아놀드 하우저로 하여금『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를 집필하게 만든 동기였다. 하우저는 짧은 서문을 쓰는 대신에 보다 체계적인 예술사회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의 일이었다.

“제 자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저는 늦포도를 따는, 즉 첫서리가 내린 후 포도가 가을의 향내를 그윽하게 내뿜을 때 포도송이를 수확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최초의 주목할 만한 책을 쓴 것은 47세와 57세 사이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창조의 정점이 지나가 버린 연배입니다. 이것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이루어진 10년간입니다.” <아놀드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p.415 >

마침내 그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탈고했으나 누구도 무명의 학자가 저술한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선뜻 출판해주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뒤라 『반지의 제왕』도 J.R.R.톨킨의 희망과 상관없이 3권으로 분재되어 출판되던 때였다.) 이 무렵엔 그의 친구 칼 만하임이 이미 사망하고 난 뒤였으므로 그를 보증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대영도서관에서 알게 된 영국의 미술사가 "허버트 리드"가 아놀드 하우저의 저작에 주목해 그의 출판보증인이 되어 주었다. (공교롭게도 허버트 리드와 아놀드 하우저의 입장은 정반대의 것이었지만… 아놀드 하우저는 예술현상을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 반면에 리드는 형이상학을 좀더 중시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1951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책으로 출간되었고, 1954년 독일어판이 출간되면서 아놀드 하우저는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영국 리드 대학에서 전임 강사직을 얻게 되었고,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미국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교환교수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한 이론적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예술사의 철학』(1958)을 출판했고, 그의 만년에 저술한 『예술의 사회학』(1974)은 자신의 예술이론과 연구방법론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그는 『예술사의 철학』을 통해 20세기의 전자공학과 산업생산의 발달, 기계적으로 생산되고 복제되는 대중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3. 예술도 천재도 시대의 산물이다

아놀드 하우저를 문화연구(Cutural Studies)의 시조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화연구의 중요한 방법론 혹은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가 지닌 미덕들이 또한 "문화연구"의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함께 하고 있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란 학문은 특히나 실천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대부터이다. 외국의 경우 학제간 연구로 활성화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대학원 과정에서만 일부 다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문화연구는 일종의 비판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정치경제학이 담당했던 역할의 일부를 맡고 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정치경제학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명제가 경제결정론(경제환원론)으로 비판받으면서 - 이 비판은 실제 역사 현실에서 노동자 계급이 늘 자신의 하부구조에 맞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며, 상부구조가 어떻게 하부구조를 왜곡하고 변형하는가에 대한 비판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없고, 변혁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 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연구(고정된 '학문'이 아닌)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예술은 역사와 사회의 관계에 의한 것이란 주장"은 그가 처음 이 주장을 펼친 것이 1950년대 초엽의 일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술작품(현상)은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탄생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예술사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하우저 이전까지 예술은 이데아의 모사와 같은 형이상학적 입장에서 이해되었고, 예술은 천재들의 놀라운 업적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르네쌍스의 예술관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천재 개념의 발견이다. 예술작품은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고 자주적 인격은 전통, 이론, 규범은 물론 작품까지도 넘어서서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며 작품은 그 법칙을 이러한 인격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이념,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자주적·창조적 인격의 소유자는 작품보다 더 풍부하고 심원하여 어떠한 객관적 형상으로도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이념이 그것이다. …<중략>… 천재란 곧 신의 선물이요 남에게 양도될 수 없는 타고난 창조력이라는 이념, 천재가 따를 수 있고 또 따라야만 하는 독자적이고도 일회적인 예술의 법칙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천재적 예술가의 특성과 고집에 대한 합리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자유경쟁에 입각한 동적인 사회의 본질 때문에 중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에서보다 개인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지배자들이 그들을 선전해야 할 필요성과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급규모로써는 도저히 예술시장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예술의 수요가 급증했던 르네쌍스의 사회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권, 94-95쪽>

비록 아놀드 하우저 자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 입장이나 실천적 입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스스로를 마르크스의 동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바라본 예술사 속에는 마르크스 이론이 녹아있다. 하우저는 르네상스 이래 서구세계를 지배해온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각에서 벗어나 예술을 예술 그 자체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왜 그 작품이 그 시대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마치 한 시대가 산출한 예술작품은 예술가 개인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의 작품이며, 예술이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계급의 문제라고 역설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문화연구가 문화적 관습과 권력과의 관계, 사회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의 문화, 정치적 비판과 행동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문화, 비판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사회를 재구성하고, 근본적으로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변모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하우저와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우저의 모든 관점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는 그의 저서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한 종에 불과하며, 이 또한 광고는 물론 수용자(독자)들 자신에게도 일종의 문화예술교양서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이 잘 반증해주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우저의 생애와 저술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그 자신이 다른 입장에서 비판한 T.W.아도르노처럼 유럽적 교양(지식)을 주된 입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우저에게 있어 초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뵐플린의 "형식주의적 전통 내지는 자율적인 예술적 구성물에 대한 내재적 고찰방식"에서 그가 탈피하게 된 계기가 '새로운 예술' 영화의 발견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발터 벤야민처럼 대중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 대중예술에 비해 고급예술(high art)의 우위를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점 등에서 최근의 조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하우저의 입장과 관점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의 대중문화론자들 매튜 아놀드, 리비스의 엘리트주의적 관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우저는 과거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현대 산업사회를 소외의 시대로 보았다는 점에선 - 대중사회에서는 예술이 수용자에게 제기하는 요구들이 줄어들고 예술의 질적 수준이 저하됨에 따라 예술의 위기가 초래 - 대중문화론자들의 관점과 일치했으나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과거의 예술과 문화의 '독점 상황'이 사라지게 된 이상, 이제는 감상자 모두가 일종의 비평가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매체의 다원화와 교육의 확산에 의한 매개활동을 통해 그러한 비평가적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라 말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매개활동을 통한 예술의 대중화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

하우저는 과거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현대 산업사회를 소외의 시대로 보았다는 점에선 - 대중사회에서는 예술이 수용자에게 제기하는 요구들이 줄어들고 예술의 질적 수준이 저하됨에 따라 예술의 위기가 초래 - 대중문화론자들의 관점과 일치했으나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과거의 예술과 문화의 '독점 상황'이 사라지게 된 이상, 이제는 감상자 모두가 일종의 비평가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매체의 다원화와 교육의 확산에 의한 매개활동을 통해 그러한 비평가적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라 말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매개활동을 통한 예술의 대중화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문화정책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이 예술의 세계에서도 발전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의 회피가 되고 만다는 데에 가장 큰 난점이 있다. 즉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결책을 발견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길은 없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 324-325쪽 중에서>

하우저의 지적 작업이 지닌 최고의 미덕은 그가 서양의 문학과 예술 사조, 철학과 미학, 역사, 정신분석학과 사회학에 두루 통달한 박학다식(博學多識)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입장에서 "사회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학과 예술을 설명하고 양자를 변증법으로 꿰어내는 솜씨" 때문이다. 하우저는 사회적 조건이 변함에 따라 예술의 주체로서 작가와 독자가 다른 계급의식과 미의식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예술이 펼치는 파노라마를 마치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따라가듯 정신없이 펼쳐 보인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전지식이 풍족하지 않은 일반인 읽어내기엔 분명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만한 지적 수준에서 이만한 지평을 대중에게 폭넓은 깊이를 획득하여 펼쳐 보이는 책은 현재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가야할 길

아놀드 하우저가 마르크스의 이론적 틀과 변증법적 방법론은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실천과 경제환원론이 예술의 문제, 문화의 문제를 규정지을 수 있다는 입장에는 확실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것은 문화연구의 입장과 흡사하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나치의 독일 지배에 대한 반성에서 출현했던 것처럼, 영국의 문화연구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대한 영국 내 신좌파의 반응으로 출현했다는 것과 묘한 일치를 보인다. 문화연구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문화를 계급간 헤게모니(도덕적이고 지적인 지도력)를 놓고 벌이는 대립과 충돌의 장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문화연구에 대해 "가면을 쓴 마르크스주의"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연구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과 더불어 성별, 인종적 혈통에 따라 불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문화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문화유물론을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문화연구는 문화적 힘이 어떻게 사회구조에 역사적 형태를 부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사회구조를 분석한다. 문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역사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연구는 역사와 경제 결정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된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드러내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그의 시각이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서구에서 출간된 많은 통사들이 그러하듯 실제로는 "서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제1세계의 문학사는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고, 제2세계의 문학사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노출한다. 문화연구 역시 오늘날 몇 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학계 외부에서 대립적인 지적 전통의 하나로 출발했던 문화연구가 점차 학제 내부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연구 역시 점차로 학문의 한 분야로, 학문제도와 권력구조의 일부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문화연구가 마치 서구(미국과 유럽이 제공하는)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대중문화를 정당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아메리카나이제이션의 문제). 그렇기에 문화연구는 결과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의 문화적 식민지화 작업에 봉사할지도 모를 앵글로색슨의 하위계급에 대한 연구이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지역연구여야 하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연구들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비판이론으로서의 새로운 틀을 갖추어야만 할 때이다. < 200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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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옮긴 이 가운데 한 명인 반성완은 이 책이 지닌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유럽의 예술과 문학을 통사적으로 서술한 유일한 저서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항 · 필적할 만한 저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비록 문학에 한정되어 있고 또 방법론을 달리하고 있지만 역시 통사적 성격을 띠고 씌어진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와 쿠르티우스(E.R.Curtius)의 『유럽문학과 중세라틴문학』과 함께 날이 갈수록 미시적 연구에만 빠져드는 제도권 중심의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사를 사회사적 시각에서 조감해보려는 문학도에게는 일종의 교과서적 역할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하우저는 문학사가이기 이전에 미술사가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형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일종의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는 예술사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다. 그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양식사적 현상, 즉 매너리즘을 셰익스피어 문학 해석에 적용시키고 있다든가 20세기 전위문학의 특성을 현대의 영상예술에서 찾는다든가 하는 등의 그의 미술사가로서의 시각이 없었더라면 아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은 현대예술을 음악과 문학의 관련 속에서 보는 아도르노의 예술이론의 특징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셋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일반적 이론과 구체적 작품 비평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잘 매개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보이는 몇몇 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하우저의 뛰어난 실제 비평은, 그가 정해놓은 이론의 틀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의 예술사가 빠지기 쉬운 도식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술사가로서의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과 입장은 이론적 · 체계적 비평에 매우 강한 루카치와 개별적 예술품에 날카로운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아도르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보는 것처럼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이 서로 연결짓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연구나 예술연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갖는 이러한 특징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하우저의 사회사(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의 특징은 이미 언급한 대로 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이 빠지기 쉬운 도식적 구성과 방법론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현대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여러 사회학적 인식은 그에겐 예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예술적 현상이 전체적으로 보면 예술 외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요소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예술의 어떤 실체 내지 본질이 있다고 믿고 듯 하다. 이러한 예술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는 이러한 예술의 본질적 면을 예술의 형식 내지 양식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과 자율성, 그리고 예술이 갖는 보편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뵐플린 식의 양식사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인다든가, 현대 예술의 특징을 16세기의 매너리즘적 양식의 연속선상에서 고찰한다든가, 아니면 ‘예술의 종말론’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현대예술의 존립근거와 기능을 옹호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의 예술관의 이러한 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연구방법론에 대한 그의 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Ⅱ. 가슴으로 읽는 글귀(인용)
제1장 르네쌍스

[9] (중세와 근대의 실질적인 전환은)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경계는 아마도 중세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사이, 즉 화폐경제가 다시 활기를 띠고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나며 현대의 시민계급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2세가 말경으로 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 고딕의 자연주의와 비교해 보면 르네쌍스가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변화란, 형이상학적 상징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 예술가의 목적이 점차 더 단호하게 그리고 더 의식적으로 감각세계의 묘사로 좁혀지고 있는 데 불과하다.

[11] 사회가 경제가 속박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비례해서 예술 또한 점차로 아무런 스스럼없이 직접적인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게 된다.

[15] 발전 속에서도 이른바 변화하지 않는 요인들이란 따지고 보면 십중팔구 그에 앞선 역사적 단계의 잔재이나, 아니면 아직 연구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충분히 밝혀질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성급한 대용물이기 일쑤이다.

[15] 민족 내지 국민의 개체적 특성이란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때마다 딴 의미를 갖는다.

[16] 르네쌍스 초기 예술가 중에서 이 ‘이상양식’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술관의 본질은 통일성의 원칙과 전체 효과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데 있다. 아니면 적어도 통일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며, 아무리 풍부한 내용과 색감을 활용하더라도 하나의 통일된 인상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 시도된다는 데 있다.

[17] 고딕 예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시선을 한 부분에서 딴 부분으로 옮아가도록 만들며, 르네쌍스 예술은 절대로 세부적인 묘사에 머물게 하지 않고 한 부분을 전체에서 떼어낼 수 없게 만들며 심지어는 모든 부분을 동시에 파악하도록 강요한다.

[18] 새로운 예술관(르네쌍스의 예술관)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그 전체가 하나의 통일체가 되어야 한다.

[19] 외부적·역사적 영향이 결코 정신적 변화의 최종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하나의 외부적 영향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부적 영향을 수용할 전제조건이 아미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외부적 영향과 함께 일어나는 제현상의 현실화는 외부적 영향 그 자체만으로 해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러한 제 현상이 어느 시기에 와서 현실화되느냐 하는 문제, 즉 현실성 그 자체가 밝혀져야 한다.

[22] 개개의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합치되고, 관계가 숫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조화를 이루며,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서 모순이 배제되고, 그리고 공간부분들 상호간에도 모순이 배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미적 감정을 갖게 된다.

[30] 르네쌍스경제의 새로운 것은 합목적성 그 자체라든가 더 낫고 한층 더 목적에 부합되는 생산방법이 알려지는 즉시 재래적인 생산방법을 초기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재래의 전통까지도 주저없이 희생시키는 그 철저성과 일체의 경제생활의 요인을 숫적으로 계산화해서 장부에 기입하는 비정할 정도의 객관성에 있다.

[31] 상업화과정의 본질은 기압가의 활동에서 점차 손으로 하는 일이 적어지고 그 대신 계산적이고 추론적인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 뿐 아니라, 기업가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꼭 새로운 상품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자본주의 경제 원칙을 인식하고 있다는 데 있다.

[40] (르네쌍스사회와 같이) 경제적으로 이미 분화가 많이 진행되고 정신적으로 복잡하게 된 사회에서는, 어떤 예술 활동의 주역을 담당하던 계층이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상실하여 다른 계층이 문호의 새로운 담당자가 된다든가 그들 자신의 정신적 태도에 변화가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예술 양식이 일조일석이 없어지는 일은 없다.

[40] 보다 발전된 문화에서는 상이한 계층과 이 계층에 의존하고 있는 상이한 예술가, 세대가 다른 예술소비자와 생산자, 젊은 세대와 구세대, 선구자와 낙오자가 어디서나 항상 병존하게 마련이다.

[47] “나는 50여년 동안 돈을 벌고 쓰는 데에만 몰두해 왔다. 이제 와서 나에게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나에게 더 많은 만족과 희열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 조반니 루첼라이
* ‘길드의 예술활동’ 중에서. 시민계급은 교화나 사원에 헌납하기 위해 예술품을 주문했다. 조반니 루첼라이도 그러했다.

[49] 순수한 예술품과 가구 공예품 사이에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동질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동질성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고도로 무목적적이고 비실용적인 예술의 독자성이 점차 인식되고, 그 독자성이 공예품의 기계적 성격과 대조되면서부터이다.

[53] 신플라톤주의는 현실세계의 운명은 현실세계를 실제로 관장하는 실권자들에게 내맡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철학자는 피치노가 주장하듯이 유한한 현실세계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초시간적인 관념의 세계 속에 살려고만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적 자유의 마지막 자취까지도 말살하고 일체의 정치적 참여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던 로렌쪼와 같은 지배자에게 이러한 철학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57] 아무튼 예술적인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의 관심이란 진정한 예술적 관심이라기보다 오히려 종교적·향토애적 관심이었을 것이다.

[59] 르네쌍스 문화의 주역을 담당한 계층은 당시의 인문주의적·신플라톤주의적 정ㄴ신조류에 관련된 계층, 즉 대체로 르네쌍스의 중요한 예술품들은 이러한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60] 예술가들은 교회와 길드로부터 독립한 댓가, 그리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세간의 갈채와 명성을 얻는 대신에 지불한 댓가로 결국 인문주의자들을 예술문제의 심판자로 인정해야만 했다.

[62]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잇는 결합 가능성과 또 주인·조수·도제들이 자주 똑같은 작품을 두고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매우 분석하기 힘들 정도의 양식 혼합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개인적인 차이가 실질적으로 융화된 하나의 공동형식을 낳는데 이러한 공동형식에서는 무엇보다도 수공업적 전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63] 처음부터 일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만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고 제자와 조수들과는 도저히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미켈란젤로에 와서 비로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점에서도 미켈란젤로는 최초의 현대적 예술가인 셈이다.

[69] 예술가들인 길드에서 독립하게 된 것은 그들의 높아진 자존심 때문이라거나, 시인 또는 학자들과 동렬에 서겠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에가 아니라, 사회가 그들의 봉사를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을 확보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요켠데 당시 미술가의 자존심이란 다름아닌 그들이 지닌 시장가치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71] 길드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생산자에게 유리하도록 방비하는 데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었다.

[72] 스승들의 모방 대신에 자연의 연구를 내세워 이론적으로 처음 정리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인데, 물론 그것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 s전에 이루어진 바 전통에 대한 자연주의와 합리주의의 승리를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자연연구를 기초로 해서 성립된 그이 예술이론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그사이에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73] 레오나르도의 주장에 의하면, 회화는 한편으로는 일종의 정밀한 자연과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학문의 위에 군림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학문이 ‘모방되어 질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비인격적인 것인데 반해 예술은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에 직결되어 잇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레오나르도는 회화가 ‘기본학예’의 하나로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요구를 정당화하면서 예술가의 수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화가가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73] ‘회화는 말 없는 시고, 시는 말하는 회화’ -씨모니데스(Simonides : 기원전 6~5세기 그리스의 시인)

[77] 미켈란젤로는 드디어 그 저의 예술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사회적 명성에 도달하게 된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위대성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그는 공적인 명예나 칭호, 포창 따위는 아예 사절했다. 그는 군주와 교황들과의 교제를 우습게 알았다. 그는 그들의 반대자가 될 수조차 있는 입장이었다. 그는 백작도, 추밀원의 고문관도, 교황청의 감독관도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는 자신에게 오는 편지에 화가나 조각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단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띠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77] 그는 그림을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대리석 덩어리로부터 단순히 자기 비전의 마력에 의해 온갖 형상들을 창조해내기를 원했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부심이라든가 자신이 장인이나 엉터리 예술가들·시정배들보다 높은 존재라는 의식만이 아니고, 평범한 일상적인 현실과 접하는 데 대한 일종의 불안감마저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고독하고 자신 속의 어떤 마력적인 힘에 쫒기는 근대적 예술가, 즉 자신의 상념에만 사로잡혀 있고 자신의 상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으며 자신의 재능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예술가적 사명 위에 어떤 높은 힘이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79] 사람들은 오랫동안 예술 속에서 개성의 표현을 찾고 이를 높이 평가하던 끝에야 비로소, 예술이 더 이상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주관적인 ‘어떻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80] 종교가 더 이상 정신활동의 모든 영역을 지배·통일하지 못하게 되자 곧 온갖 정신적 형식들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대두 했고 그 자체로서 의미와 목적을 지닌 예술이라는 하나의 형식도 상상할 수가 있게 되었다. 예술도 포함한 모든 문화현상을 종교적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그 후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세문화의 단일성을 회복하고 예술로부터 그 자율성을 완전히 박탈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예술은 비록 그것이 예술 이오의 목적에 사용된 경우에라도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고 또 의미가 있는 것이 되었다.

[81] 천재개념의 발달고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보가 내디뎌진 것은 업적 그 자체보다는 업적을 내는 능력이, 작품보다는 예술가 자신이, 작품의 완전한 성공여부보다는 작품에 나타난 의도와 사상이 더 중요시되면서이다.

[81] 소묘나 스케치는 르네쌍스인들에게는 예술적인 형상화라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기록으로서, 즉 예술적 창작과정을 나타내는 기록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86] 19세기에서는 예술은 세계인식의 수단이었고 인생을 경험하고 인간을 분석·해명하는 하나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인식에 주안점을 둔 이러한 자연주의는 그 근원을 바로 15세기에 두고 있는 것이다. 15세기에서 예술은 처음으로 과학적 훈련을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에 투자해 놓았던 자본금으로 살아가고 있다.


[86] 모든 지식인 계층은 문인이든 예술가이든 간에 사회적 근거를 상실한 ‘비시민적’이고 원한에 가득찬 보헤미안으로 되지 않으면 보수적·수동적이며 지배계급에 추종하는 아카메이션으로 될 위험에 봉착했다. 이러한 양자택일 앞에서 인문주의자들은 상아탑 속에 도피함으로써 결국은 그들이 피하고자 했던 두 가지 위험에 모두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만다.

[97] 르네쌍스 전성기 예술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또 이 시기의 예술양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실은 미켈란젤로는 거의 전적으로, 라파엘로는 많은 부분을 바티칸을 위해서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르네쌍스 전성기의 ‘위대한 양식’은 오로지 바티칸을 위한 예술활동 속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다른 곳에서 형성된 여러 예술경향은 이 ‘위대한 양식’에 비하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외없이 촌스러운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로마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고상하고 배타적이고 교양과 학식이 철저히 배어 잇고 또 세련화된 형식문제들만을 위해 철저하게 몰두하고 있는 예술양식을 찾아보기도 힘든 것이다.

[99] 고전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모든 부분의 조화’라는 미에 대한 규정은 이미 알베르띠에서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란 것은 전체의 미를 손상하지 않고서는 전체작품에서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낼 수도 없고 무엇을 첨가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01] 친꿰첸또의 모든 예술적 형식주의는 어느 의미에서는 당시의 상류층이 자신들에게 부과했던 도덕개념·예의범절의 형식주의와 상응하는 것이다. 마치 귀족계급과 귀족적 사고 방식을 가진 사회계층이 그들의 삶을 감정의 무정부상태에서 보호하기 위해 삶을 하나의 형식적 규범의 통제하에 두는 것처럼, 그들은 예술에서도 이러한 감정표현을 확고하고도 추상적이며 비인격적인 형식이라는 검열에 의해서 종속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생에서건 예술에서건 자기 통제와 감정의 억제 및 자발성·영감·황홀감 등의 규제가 지상의 명령이었다.

[101] “자기 작품에서 품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가능한 적은 수의 인물만을 그려야 한다. 마치 군주들이 말을 적게 함으로써 그들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과 마찬가리조 예술가들도 인물의 수를 줄임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알베르띠

[102] 예술을 통해 ‘보다 높은 법칙성’을 표현하고 그리하여 세상에는 보편적이고 확고부동하며 침해될 수 없는 기준과 원칙 및 불변하는 절대적 의미가 지배하여 또 이러한 의미를 인간들이-비록 모든 인간들을 아니지만-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형식은 이러한 사회의 이념에 부합해서 규범적이 되어야만 하고, 또 당대의 지배체제가 원하는 바대로 궁극적이고 완결된 인상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103] 예술에서 보이는 조화는 현실생활의 모든 투쟁이 배제된 유토피아적 이상이며, 그것도 민주주의적인 원칙이 아니라 전제주의적인 원칙의 지배 결과로 생겨난 이상인 것이다. 그 작품들은 삶의 무상성과 일상성을 벗어난 고양되고 세련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양식 원리는 이들 작품들의 묘사가 본질적인 것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104] 중세에서는 비감성적 정신과 비정신적 육체 사이에는 서로 융화할 수 없는 대립과 갈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 꽈뜨로첸도에 이르면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중세적 대립관계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시애에는 아직도 정신의 중요성이 육체의 아름다움과 무조건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육체의 아름다움을 배제하고 있지도 않고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전성기 르네쌍스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105] 그들의 위엄은 나체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조금도 손상이 가지 않았다 그들의 지체의 품위있는 생김새, 동작의 우아한 조화와 장중한 위엄은, 그들이 평소에 입는 묵직하고 주름이 깊이 잡혀 있으며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는, 정성들여 선택된 고상한 의상과 똑같은 고귀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07] 예술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대극성(對極性)은 대로는 약화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로는 한번도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르네쌍스의 진정한 유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2장 매너리즘

[112] 어째서 뵐플린(Heinrich Wolflin)이 말한 것처럼 전성기 르네쌍스는 오르자 마자 다시 하강해야만 하는 ‘좁은 산마루’로 머물러야만 했던가? 심지어 이 산마루는 뵐플린이 기술한 것보다도 더 좋은 산마루였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의 작품에서도 이미 고전주의를 와해시키는 맹아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13] 사회적 발전의 연속성이 예술적 발전의 연속성을 뒷받침해 주지 않았더다면 예술적 발전의 연속성을 지향하는 그들(전성기 르네쌍스의 젊은 예술가들)의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115]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예술 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고, 매너리즘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신경질적인 긴장은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매너리즘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117] 공간통일성의 해체는, 화면의 인물들을 재는 척도나 주제상의 의미가 논리적ㅇ로 파악할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다.

[117] 혼합된 현실상에 가장 가까운 것은 꿈인데, 꿈은 현실의 여러 관계를 폐기하고 사물들을 추상적인 상호관계 속에 넣으면서도 동시에 개개의 사물을 가장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도하는 것이다. 매너리즘의 이러한 꿈과 같은 세계는 현대의 초현실주의를 상기시킨다.

[120] 고딕이 인간의 형상에 영혼을 불어 넣음으로써 근대적 표현주의 예술의 발전에 커다란 첫걸음을 내디뎠다면, 이제 매너리즘은 르네쌍스의 객관주의를 해체하고 그 대신 예술가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하며 관중의 개인적인 체험에 호소함으로써 그와 같은 발전을 향한 두 번째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123] 영주들이 그들의 토지를 직접 경영하지 않고 소작을 시킨 이후로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산하의 수가 줄어 들었고 이로써 중앙권력의 강대화가 이루어질 전제조건이 주어졌던 것이다.

[127] 종교개혁운동의 변질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서 진행되었고, 그것도 인쇄술이 발명되어 팜플렛이 마구 쏟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진행되었다.

[130]「최후의 심판」(1534~1541)에 오면 이러한 새로운 정신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이제 이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더 이상 완성과 힘과 젊으의 기념비가 아니라 곤혹과 절명의 표현이며, 감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혼돈으로부터 구원을 갈구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이다. 자신을 바치고 속세적·육체적·육감적인 일체의 것을 자신 속에서 용해·소멸시키려는 욕망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130] 씨스띠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은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최초의 근대 작품이며, 이 점에서 아직 ‘아름답지’ 안았고 다만 표현력이 풍부했던 중세의 미술작품을 연상시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은 중세의 작품과는 크게 다르다. 이 작품은 아름답고 완전무결한 형식에 대한 매우 힘들여 얻어진 항의이자 일종의 선언이며, 그 선언의 형식무시 자체에 어떤 공격적이고도 자기파괴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보띠첼리나 뻬루지노가 같은 장소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예술적인 이상을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자신이 일지기 그곳 천정그림을 그릴 때 추구했던 목적도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 예배당 전체의 존재이유이자 르네쌍스의 모든 조형예술의 근원이 되었던 바로 그 ‘미’의 이념들도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결코 무책임한 일개 괴짜의 실험작이 아니라 기독교세계의 가장 명망높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서, 그것도 기독교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인 교황의 개인 예배당의정면벽을 장식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예술작품이었다. 그야말로 한 세계의 몰락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33] 당시의 중·소 군주들은 모두가 이미 완전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마끼아벨리에 의해 이러한 정치적 합리주의의 이론이 공식적으로 표현되었고 이 이론의 의식적·계획적·현실주의적인 실천을 최초로 냉철하게 옹호한 것이 그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마끼아벨리는 그가 설던 시대의 대표자이자 대변자였을 따름이다.

[133] 카톨릭교회의 보호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교황의 생명을 위협하고 기독교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파괴했던 카알5세야말로 가차없은 현실주의자가 아니고 무엇이었단 말인가?

[134] 현실은 그 자체의 엄격한 필연성을 따를 수 밖에 없고 어떠한 이론도 이 무자비한 현실의 논리 앞에서는 무력하며 따라서 우리는 이 논리에 적응하거나 그에 의해 파괴당할 수밖에 없음을 새로운 경제체재는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134] 지배자와 피지배가, 주인과 종,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존재한 이래로 언제나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위한 두 개의 상이한 도덕적 기준이 있어왔다. 마끼아벨리는 단지 이러한 도덕적 이원성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국가의 정사에서는 사생활화 다른 행동기준이 통용되며 무엇보다도 성실과 정직이라는 기독교적 도덕원칙이 국가와 군주의 행동기준을 절대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139]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예술배척은, 예컨대 실제로는 우상파괴적이 아니라 단순한 정화운동적인 성격을 띠었던 싸보나롤라의 예술에 대한 태도보다도, 심지어는 비잔틴의 우상파괴운동-주자하다시피 이 운동은 그 화살이 우상 자체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우상숭배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는 자들에게 향했던 것인데-보다도 더 비타협적이고 철저하였다.

[141] 예술가들은 설령 그들이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깊은 신앙심을 가진 경우라도 예술적 전통의 현세적이고도 이교도적인 요소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표현수단이 지닌 상이한 요소들 사이의 내적 모순을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해결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러한 갈등의 중압감을 견뎌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기교적 세련에 도취하거나 아니면 미켈란젤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도피하였다.

[141] 중세 예술가들에서는 그들의 종교적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들의 예술적 창조의 영감을 얻어내는 원천도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충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진정한 창조적 예술가였기 때문이었다. 중세에서는 한 예술가가 창작을 그만두는 순간 그는 정말로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었다.

[141] 중세에서는 미켈란젤로가 겪었던 바와 같은 양심의 갈등이란 생겨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그 까닭은 우선 예술가로서 예술 이외의 딴 방법으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시대의 엄격한 사회질서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직업 이외에는 생존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2] 개인주의 문화는 중세에서 이들에게 폐쇄되었던 무수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자유라는 진공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때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142] 예술가 들고 하여금 그들의 세계상을 다시 정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16세기의 정신적 변혁기에서,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지도를 그대로 따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신들의 내면적인 충동에만 의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자유와 강제의 틈바구니에서 찢겨졌고, 또한 정신적 세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들에게서 처음으로 우리는 현재적 의미의 예술가, 즉 생에 굶주려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도피적이며, 역사적으로 구속되어 있으면서 겁 없이 반항적이고, 노출증에 가깝도록 자신을 내세우는 주관주의와 더불어 마지막 비밀은 끝까지 감춰두는 폐쇄성을 지니는 동의 내적 분열로 신음하는 예술가의 등장을 보게 된다.

[143] 르네쌍스에서 자연은 예술적 형식의 근원이었고, 예술가들은 자연에 산재하고 있는 미의 요소들을 수집·정리하는 ‘종합’의 행위를 통해 형식을 획득하였다. 그러니까 예술의 패턴은 비록 주관에 의해 조직되지만, 그 원형은 이미 객관 속에 있었다.

[143] 로마쪼와 페대리고 쭈가리는 모두 예술의 근원을 자기발동적인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쪼에 의하며 예술적 천재는 신의 힘이 자연에서 작용하는 것같이 예술에서 작용하며, 쭈까리에 의하면 예술적 상념-그이 이른바 ‘내부의 뎃상’은 예술가의 영혼에 있어서의 신성의 나타남인 것이다.

[143] 예술가의 영혼 속에서 사물의 진정한 형식은 신적인 정신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생겨난다. - 페데리고 쭈까리

[148] 예술가들의 이러한 신분상승과 상류층의 예술계 참여는, 비록 우회적으로나마 개개 예술에서의 기술의 독자성을 지양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나아가서는 예술은 원칙적으로 하나라는 이론을 낳게 하였다.

[150] 공간성이 처음으로 생동하는 삶의 원칙이 되고, 빛과 분위기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중세의 말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르네쌍스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이러한 공간의식은 공간에 대한 일종의 집념으로까지 변한다. ...... 배경에 금빛을 까는 기법과 원근법은 단순히 배경을 처리하는 두 개의 상이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대하는 두 가지의 기본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쪽이 인간에서 출발한다면 다른 한쪽은 세계에서 출발하며, 한쪽이 공간에 대한 인물의 우위성을 강조한다면, 다른 한쪽은 공간을 표상의 기본요소 내지 감각적 체험의 실제로 간주해서 공간이 인간의 실제성을 지배하도록 마들고 인간의 형상이 공간에 흡수되도록 만든다.

[151] “공간은 그 장소에 가져다 놓은 물체보다도 먼저 있다.” - 폼포니우스 가우리쿠스(Pomponius Cauricus)

[157] ‘소박하지 않다’는 것은 르네쌍스 이후의 모든 예술에 공통적으로 해당될 수 있는 의식의 자기성찰이라는 뜻으로만 아니라, 예술가가 현실 자체를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의식적·의도적으로 현실을 ‘자기 식으로’ 표현하고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면 그의 모든 작품에 ‘내가 보는 바로는’이라는 제목을 두루 달아줄 수 있다는 바의 의미에서 ‘소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브뤼겔의 예술에는 물론 전 매너리즘 예술에 나타나는 획기적인 새로운 특징이자 그야말로 근대적인 특징이다.

[157] 예술에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모사(模寫)한다든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묘사하는 것은 대체로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사회계층들, 말하자면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억압되어 있거나 상승하려는 계층들은 그들이 목적으로 설정한 생활상태의 묘사를 보기 원하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오려 하고 있는 현재의 생활 상태의 묘사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소박한 생활과 센티멘탈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일반적으로 그러한 생활을 넘어 서 있는 사람들이기 쉽다.

[161] 돈 끼호테가 그들의 세상과 그의 이상들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현실에 마술에 걸린 탓으로 돌리고 사물의 주관적 질서와 객관적 질서 사이의 간극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이제 그에게는 꿈의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의 세계이고 현실은 그 반대로 악마들로 가득 찬 마법의 세계로 보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161] 외부적 현실이 이상주의에 의해서 조금도 변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주의 역시 외부적 현실에 의해서 조금도 영향받지 않으며 이와 같이 주인공과 주위 현실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황에서는 일체의 행동이란 현실과 아무런 맥락도 맺지 못하고 그저 현실을 지나쳐버리고 마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164] 무대에 등장하는 딴 인물보다도 주인공들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주인공들이 군주나 장군, 아니면 귀족계급의 사람들이어야만 했고, 또한 그들 운명의 급회전(急回轉)을 통해 관중에게 주는 인상을 더 깊게 하기 위해서는 주인공들이 가능한 한 높은 위치에서 떨어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68] 셰익스피어가 군주제나 시민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그 자신이 그처럼 많은 이익을 보았던 국가적 흥륭과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도 비극적인 세계관과 깊은 비관주의를 작품 속에 표현했다는 사실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강한 사회적 책임감과 세상일들이 그렇게 다 잘되어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잘 알 수 있다.

[176]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는 가장 분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당대 최고의 문학자였던 그가 또한 가장 인기있는 극작가였다는 사실이나 오늘날의 우리들에게서 가장 사랑을 받는 작품들이 또한 그의 동시대인들에게서도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광범위한 관객층이 경우에는 교양있는 계층이나 전문가라는 사람들보다 더 정확히 작품을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177] 셰익스피어가 상대하던 관객은 경제적으로나 신분·교양 면으로나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즉 그의 관객 속에는 선술집을 찾는 사람들과 교양있는 상류층 사람들, 그리고 특별히 교양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완전히 무식하지도 않은 중산층의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79] 극장에서 사회의 여러 계층이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회생활의 다이나믹한 성격 때문이었다. 계급과 계급간의 경계선이 유동적이 됨으로써, 비록 객관적인 차별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지만 주관적 개체들은 한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181] 전후사정을 두고 보면 왜 중세에는 비극이 없었고, 왜 고대의 비극도, 그 종말이 비극으로 끝나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바의 비극과 근본적으로 다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에 상응하는 비극적 드라마의 형식이 발견되고 극적 갈등이 주인공의 행동으로부터 주인공의 깊은 내면세계로 옮겨지는 것은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왜냐하면 직접적 현실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적 행동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시대만이 비로소 이념에는 어긋나지만 현실상황에 부합하는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장 바로끄

[192] 바로끄시대에 와서는 예술은 엄격한 의미에서 어떠한 통일적 성격을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된다. 이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적이고, 분석적이자 종합적인 것이다.

[195] 바로끄예술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전경을 지나치게 크게 그리고 전경의 인물들을 보는 사람의 바로 눈 앞에 돌출하도록 하며, 배경의 사물은 원근법적으로 급격하게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공간은 그 자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란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은 화면에 극히 가까운 시점이 주어짐으로써 공간이 자기 자신에 종속되어 있고 자신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형식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을 상재적인 것으로, 엄격한 것을 자유스러운 것으로 대치하려는 바로끄의 경향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은 ‘개방적’인 비건축적 형식을 즐겨 쓴다는 사실이다.

[195] 뵐플린의 말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바로끄가 지향하는 바는 화면을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독립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러나 관람객이 한순간이나마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지니는 장면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 전체를 의도가 없이 그리 된 것으로 보이도록 할 것을 노리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바로끄 예술은 ‘영화적’이다.

[196]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명료한 것으로부터 덜 명료한 것으로, 뻔히 드러나는 것으로부터 감춰진 것으로 나아가는 예술문화 내부에서의 연속적인 발전이, 너무 명백하고 확실한 것에 대한 점증하는 혐오감에 일조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예술 감상자들은 그들의 교양과 예술이해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와 같은 자극의 상승을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것과 어려운 것, 그리고 복잡한 것을 통한 자극과 병행해서 무엇보다도 감상자에게 묘사된 화면의 무궁무진하고 파악하기 힘들며 무한함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 바로끄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모든 바로끄 예술은 이러한 경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197] 바로끄 예술에서는 통일성이 추후에 달성된 결과가 아니라 예술적 창조 자체의 선행조건이다. 예술가는 처음부터 하나의 비전을 대상에 접근하기 때문에 일체의 특수적이고 개벌적인 것은 결국 이러한 비전 속에 용해되는 것이다.

[197] 르네쌍스가 예컨대 건물의 각층을 수평선에 의해 서로 분리시킨 반면에 바로끄는 이를 관통하는 둥근기둥과 벽기둥 양식을 통해 통일시키고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각 구성부분들을 주요한 모티브에 종속시키고 하나의 주된 효과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회화의 구도는 흔히 단 하나의 대각선이나 하나의 색체부분에 의해 지배되고 잇고, 조각형식은 하나의 곡선에 의해서, 음악작품은 전체를 주도하는 하나의 솔로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198] 순형식적인 근거만으로써는 왜 하나의 발전과정이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엄격한 것에서부터 더욱 엄격한 것으로 나아가지 않고, 엄격한 것에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를 결코 해명하지는 못한다. 발전의 ‘정점’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역사적 상황, 즉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상황이 일정한 방향으로의 발전을 종결시키고 그 발전 방향을 바꾸게 되는 순간이 ‘정점’이 되고 여기서 새로운 전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양식의 변화는 오로지 외부적인 사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 결코 자체 내의 시한을 지난 것은 아닌 것이다.

[199] 정신적 분석과정을 촉진하는 발전은 동시에 문화적 생산품을 보급하고 상이한 문화영역 간의 상호영향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각국의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통합하는 일에도 공헌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서라도, 바로끄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창조의 하나인 새로운 자연과학과 자연과학적 지향을 지닌 새로운 철학이 처음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학문에 표현되었던 보편적인 세계감정은 또한 당대의모든 복잡다기한 예술생산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단순히 세계가 지구와 인간의 주위를 도는 것을 종지했음을 뜻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더 이상 어떠한 중심정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동일한 모습과 가치를 지닌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부분들의 통일성은 오로지 자연법칙의 보편타당성 속에서만 드러남을 뜻하는 것이었다.

[200] 자신을 완전히 압도하고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를 이해하고 그 법칙을 산출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의식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한한 인간의 자아감정의 원천이 되었다.

[201] 딜타이는 “현대 유럽의 범신론의 성립은 위대한 13세기 이후 3세기에 걸친 정신적 변혁의 소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 끝에 나타난 것은 세계의 재판관으로서 신에 대한 외경심 대신에 이른바 ‘형이상학적 전율’,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을 앞에 둔 불안이었고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끊임없는 긴 숨결에 대한 경탄이었다.
바로끄의 모든 예술은 이러한 전율과 무한한 공간의 메아리 및 모든 존재의 상호관련성으로 충만해 있다. 예술작품은 그 총체성에서, 모든 부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라는 점에서, 우주의 상징이 된다.

[202] 까라치가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일체의 근대적 ‘교회예술’의 역사가 이들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너리스트들의 난해하고 복잡한 상징주의를 간단하고 명백한 알레고리로 바꾸어 놓았는데, 여기서부터 우리들에게 낯익은 상징과 형식들, 삽자가, 머리 위의 후광, 백합, 두개골, 하늘을 쳐다보는 시선, 사랑과 고뇌의 희열 등이 그려진 근대의 성화(聖畵)가 발전한다. 종교예술은 이대 비로소 결정적으로 세속적 예술과 구분된다.

[203] 까라바지오가 실패가 사회학적으로 더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적어도 중세 이후로 자신의 예술적 특성으로 인해 실패했고 훗날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바로 그 특성 때문에 동시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샀던 최초의 예술가이가 때문이다.

[204] 로마교항청은 가톨릭 신앙을 보급·선전하기 위하여 ‘민중예술’을 육성하고자 했으나 그 민중성은 이념과 형식의 단순성에 한정된 것이었고 평민적 표현방식의 직접성은 피하고자 했다. 그림 속의 거룩한 인물들은 신자들에게 가능한 한 깊은 이산을 주도록 그려져야 했지만, 여하한 경우에도 그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내려와서는 안되었다. 예술작품은 신도들을 권유하고 설득하며 압도하는 일을 해야 했지만, 이러한 일들은 정선된 고상한 언어로 행해져야만 했다.

[206] 부용(Bouillon) 공작은 세기의 중엽쯤에는 빠리를 세계의 수도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프랑스는 이때 정치적으로만 유럽의 지배적 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교양과 취미에 관련된 모든 일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교황청의 세력이 약화되고 로마가 빈곤해 감에 따라 예술의 중심지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던 국가형태, 즉 절대군주제가 그 완성에 이르고 예술 생산이 가장 중요한 수단들을 구사할 수 있었던 나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219] 예술감상자 자체내에서 두 개의 파, 즉 진보와 혁신을 적대시하는 그룹과 새로운 경향에 처음부터 호의적인 자유주의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두 파의 상호대립, 추상적이고 계획적으로 제시된 예술이론과 생동적이고 실천 속에서 발전하는 예술이론 사이의 대립이야말로 바로끄와 그 후의 예술양식들에 그 독자적인 현대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220] 예술은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감동’ 시키고자 하며 예술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이성의 태도가 아니라 ‘감정’의 태도라고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은 두 보스(Jean-Baptiste Du Mos, 1670~1742)였다.

[220]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누구든지 전문가에 대한 비전문가의 우월성을 내놓고 주장하게 되었고, 끊임없이 한가지 일에만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둔화되기 마련이며 반대로 애호가나 문회한의 감정은 언제나 신선하고 자연스럽다는 견해를 표명하게 되었다.

[225] 무대의 남녀 주인공들은 아무리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도 그들의 훌륭한 교양을 잊지 않았고 ‘므슈’ ‘마담’ 하며 서로 깍듯이 존칭을 썼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공손하고 고상한 태도를 지녔지만,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본심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형식일 따름이었다. 그것은 모든 형식과 언어가 그러하듯 진실된 것과 진실되지 못한 것을 동일한 어휘로 표현했던 것이다.

[233] 시민계급은 규모가 큰 장식적인 예술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238] 예술가가 그의 사회적 근거를 상실하고 그의 생존이 문제시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 그가 생산한 것이 과잉상태이기 때문에 그 자신도 잉여의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 홀렌드의 미술품 매매 붐에 대해서

[239] 미술품 매매업의 형성과 독립화는 근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발전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한 장르만을 취급하는 화가의 전문화를 초래했는데, 그 까닭은 화상들이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가장 잘 팔리는 종류의 그림만을 화가들로부터 요구했기 때문이다.

[241] 작가와 화가들의 수입의 격차에서 우리는,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과 정신노동에 종사하며 수공업과 무관한 사람들에 대한 보다 높은 평가가 여전히 지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43] 리글은 예술사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원시적 시기에는 모든 것이 객체인 데 반해 두 번째의 현대적 시기에는 모든 것이 주체라고 한다. 이 명제에 의하면 고대로부터 바로끄까지의 발전과정은 첫 번째에서 두 번째의 시기로의 점진적인 이행과정에 불과하며, 17세기의 홀란드회화는 일체의 객관적 사물이 주관적 의식의 단순한 인상 내지 체험으로 보여지는 현대적 상황으로 나가는 도상에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것이다.

[244] 홀란드사회는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만을 허용했고, 그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순간 가차없이 그를 버렸던 것이다. 예술가의 정신적 실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험에 처해 있기 마련이다. 권위주의적 시회질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질서도 예술가에게는 완전히 편안한 것이 못된다. 전자가 그의 자유를 속박한다면 후자는 그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유 속에서만 안전하게 느끼는 예술가가 있는가하면, 안전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쉬는 예술가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책의 저자가 되어보는 것을 어려울 것 같다. 우선 나는 이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탓이다. 저자조사를 하면서 웹에서 찾아낸 글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탓도 있다. 책 읽기가 어려우서 웹에서 찾아서 도움을 받았는데, 그것이 내가 생각을 갖는 것보다는 더 커져서 압도해 버렸다. 그 글을 읽고난 후의 나의 독서는 길잡이의 말이 맞나를 확인하는 정도에 머물러 버렸다. 저자와 그의 저서의 기술방법의 비평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되어버렸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다. 어떤 대목에서는 한두페이지를 뒤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할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이 오랜 연구를 거쳐서 무겁게 쓰여진 책을 볼때마다 약간은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거의 대부분을 놓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것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 첫번째 읽는 것은 이런 것이 있구나하고 읽고, 두번째 읽을 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시 천천히 읽어서 파악해야 했다. 컬처코드의 클로테르 라파이유의 말을 빌어서 변명을 하자면, 내게는 이런 류의 지식이 각인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배경지식을 갖고자 공부하여도 외워지지 않아서 남는 것이 거의 없다. 내게 있어 뭔가를 기억하는 것은 느낌일 뿐이지, 지식이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체계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은 사상사, 사회사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회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내게는 어려운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양식이나 사회에 따른 시대구분이나 혹은 양식을 규정하는 이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기 때문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르고 무작정 읽었다.

읽다보니 회화에 대해서, 예술가에 대해서, 작품이 시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해서 서술하는 대목들에 흥미가 갔다. 또 흥미가 있었던 부분은 작품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었다. 저자가 사회사를 서술하려고 끌여들여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다. 상식의 부족함을 한탄해야 했다. 저자가 기술하는 내용을 거의 놓친 듯 하다.

저자 조사를 하고 나서야 저자인 A. 하우저가 문학보다는 회화부분에 대해서 식견이 높고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여 예술과 사회사를 기술했음을 알았고, 사그가 기술하는 사회사가 예술작품과 그것이 나오게된는 배경, 즉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의 사상을 기술하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이번에 읽기를 선택하지 않은 다른 시대에 대해서도 나중에 읽어보고 싶다. 물론 읽고나서 이번처럼 지식의 부족으로 일부밖에 얻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번은 거치고 싶다. 그것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한 개체가 자신의 짧은 생애에서 그 종이 오랜세월동안 거친 것을 모두 거친다는 것과 같이, 나의 짦은 의식의 흐름 속에 나 자신을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를 한번쯤 거치게 하고 싶다. 내가 읽었던 시대,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이 예술가들이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고, 또 사회에서 어떤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알았더라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나는 그것을 책을 통해서라도 짧게라도 경험해 보고 싶다.

Ⅳ. 기타(책에서 언급한 화가와 그림 몇점)


플라톤(左)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묘사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부분 그림).


라파엘로, 1509, 프레스코
바티칸 궁정 장식화로 54명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대부분 철학자,천문학자,수학자들이다. 배경건물은 베드로 성당을 연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책을 끼고 토론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그림의 핵심을 이룬다.


도나뗄로 , 340 x 390 cm


도나뗄로, <다비드>, 1435


Giotto,
지오또, 이태리 자연주의 최초의 거장


Giotto,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변용>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성모>, 1534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성 바울의 회심>


미켈란젤로,<삐에타>


페터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젊은 여인의 초상>, 1620-1630년경
목판에 유채, 97 x 67.8 cm
17세기 바로끄의 대표작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불그스레한 볼과 새하얀 피부, 탐스럽고 육감적인 여인의 신체 표현은 전성기 루벤스의 트레이드마크이다.
IP *.72.1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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