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7년 12월 31일 08시 4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아르놀트 하우저는 1892년, 헝가리의 작은 도시인 테메스바(Temesvar)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독일 이주민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프랑스도 능숙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망명 생활 때문일 것이다. 그의 집안은 그다지 교육에 열정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아르놀트 하우저는 평생의 동료가 되는 칼 만하임과 그의 스승 게오르그 루카치를 만나게 된다. 1915년 경이었다. 당시 루카치는 '일요회'라는 12명 이내의 소수로 운영되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회원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만남을 가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문학에 대한 토론과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부다페스트, 빈, 베를린, 파리 등지의 대학에서 문학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특히 파리에서 하우저는 그의 또 다른 정신적 스승인 앙리 베르그송을 만나게 된다. 전후 1919년, 루카치의 도움으로 잠시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기도 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면서 그는 곧 빈으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50년 동안 그는 유럽 이곳 저곳을 떠돌게 된다.

망명 생활은 그에게 큰 시련이었지만, 훗날의 연구 활동을 위한 풍부한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그는 베를린 대학의 사회과학자인 게오르그 짐멜, 막스 베버 등의 사회학적 연구에 영향을 받았고, 파리와 이탈리아에서는 직접 미술품을 접하며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가게 된다. 또 빈에서는 생계를 위해 영화사의 사환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이 때의 생생한 경험은 훗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The Social History of Art)'의 '영화의 시대'를 집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치가 독일을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그는 다시 영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곳에서 오랜 시간 그와 고생을 함께 한 아내가 사별했다. 이런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당시 런던에 머물던 칼 만하임으로부터 예술 사회학 선집의 짧은 서문을 부탁 받게 된 그는, 서문에 필요한 마땅한 참고 서적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직접 체계적인 예술 사회학을 집필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영국의 대영 도서관에서 자신의 역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The Social History of Art)'를 집필하게 된다. 1940년,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낮에는 영화사에서 사환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저녁 시간과 주말을 이용한 오랜 작업의 결과였다. 그는 '예술사의 철학'에서 말한다.

"제 자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저는 늦포도를 따는, 즉 첫서리가 내린 후 포도가 가을의 향내를 그윽하게 내뿜을 때 포도송이를 수확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최초의 주목할 만한 책을 쓴 것은 47세와 57세 사이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창조의 정점이 지나가 버린 연배입니다. 이것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이루어진 10년간입니다."

마침내 집필을 마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영국 미술사가 '허버트 리드'의 보증으로 1951년 영국에서 책을 출간하게 되었고, 1954년 독일어판이 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 리드 대학의 전임 강사직을 얻게 되었고, 50년대 말 미국에서 교환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8년 '예술사의 철학(The Philosophy of Art History)', 1965년 '매너리즘(Mannerism: The Crisis of the Renaissance and the Origin of Modern Art), 1974년 '예술의 사회학(Sociology of Art)' 등의 책을 집필했다. 1977년에야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다시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978년 부다페스트에서 눈을 감는다.

그는 끝없는 방랑을 통해 적절한 균형 감각을 익힌 세계 시민이었고, 역사와 사회학이란 렌즈를 통해 서양 예술의 사회학적 좌표를 확립하고자했던 예술사가였으며, 무엇보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상을 꿈꾸었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평생을 방랑했던 외로운 독학자이자, 지적 보헤미안(Intellectual Bohemian)이었던 그에게 어울리던 영화 대사 한 구절을 바치며 저자 소개를 마무리한다.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포도농장의 주인이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웨이트리스 마야의 말이다.

“와인은 살아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오묘한 맛을 내니까요. 와인이 그 절정에 이르면, 마치 우리가 61세가 되는 것처럼 그 맛은 서서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기울기 시작하죠. 그럴 때 그 맛이란 …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2. 내 가슴에 들어온 글귀

제1장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1. 1830년의 세대
 
(13) 과거의 문학과 우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과거의 문학을 이해하자면 우리 쪽에서 특별한 입장을 견지하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러면서도 자칫하면 잘못 해석하거나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17) 18세기까지는 작가란 단지 독자층의 대변인에 불과했다. 하인과 관리들이 그들의 물질적 재산을 관리하듯이 작가들은 독자의 정신적 재산을 관리했다. …… 그러므로 현실의 독자의 이상적 독자(혹은 잠재적 독자)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도 생기지 않았다. …… 이때부터 모든 예술가는 반대되는 두 질서인 보수적 귀족의 세계와 진보적 부르즈와의 세계 사이에서, 즉 이른바 절대적이라고 하는 낡은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그룹과 바로 이런 가치조차도 시대적인 제약을 받으며 좀더 자기와 맞으면서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는 다른 가치도 있다는 신념에 근거를 둔 그룹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0) 현실은 기계적, 자기충족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없고 생명을 잃었다. 지금까지 개인의 자연적 환경이요 유일한 활동무대였던 사회는 모든 의의, 더욱 높은 목표를 위한 모든 가치를 상실했으며, 그러면서도 사회에 순응하여 그 안에서 그것을 위해서 살라는 요구는 더욱 강해진 것이다.
 
(21) 돈이 공적, 사적 전생활을 지배하여, 모든 것이 돈 앞에 굴복하고 돈에 봉사하며 돈에 의해 더럽혀진다.
 
(26) 획기적인 혁신은 그가 신문의 연간 구독료를 다른 것들의 반인 4프랑으로 고정시키고 결손분을 선전광고의 수입으로 메우려고 생각한 점에 있다.
 
(26-27) 그들은 신문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광고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구미에 당기고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1) 스땅달의 환멸은 그래도 공격적, 외향적, 무정부주의적이지만 플로베르의 체념은 수동적, 자아중심적, 허무주의적인 것이다.

(33)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는 사실 한편으로는 산업주의와 보조를 같이하여 진행된 분업화의 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 기계화된 생활에 먹혀들어갈 위험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예술의 방파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편으로 예술의 합리화, 탈합리화, 협소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생활의 일반적인 기계화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독자성과 자발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34)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따름인가? 이 질문은 자기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뿐만 아니라 예술의 복합적 구조의 어떤 요소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예술작품은 유리 자체의 구조나 투명도, 색깔에는 관계없이 다만 그것을 통해 인생을 관찰할 수 있는 하나의 유리창과 비교되어 왔다. 이런 비유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관찰과 인식의 단순한 도구, 즉 그 자체로서는 이해상관이 없으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수단으로만 봉사하는 창유리나 안경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문 저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창유리의 구조에만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다면, 예술작품은 또한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립적 형식체로,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의 결합체로 생각된다. …… 예술작품의 의미는 줄곧 이 두 관점 사이를-생활과 모든 작품외적 현실에서 단절된 하나의 존재라는 관점과, 생활과 사회와 실제에 의해서 제약된 하나의 기능이라는 관점 사이를 왕래한다.
 
(35) 예술작품의 가장 불가사의한 역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또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그리고 역사적, 사회학적으로 제약을 받는 구체적인 감상자층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도대체 대중을 안중에 두려고 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는 데에 있다.
 
(35) 하나의 테제, 하나의 도덕적인 목적, 하나의 실제적인 의도에 의해서 환영을 파괴하는 것은 한편으로 순수하고 몰입적인 예술감상을 방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관객이나 독자의 전존재를 휘어잡으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작품에 참여하도록 한다.
 
(36) 이 자연주의도 낭만주의에 대해서 모순된 관계에 서 있다. 그 이중감정은 주로 연속되는 두 세대 사이에서 혹은 교대되는 두 정신적 경향 사이에서 일어나곤 하는 마찰에 상응한다. 자연주의는 낭만주의의 연장이며 그 해체이고, 스땅달과 발자끄는 낭만파의 가장 정통적 상속자이면서 가장 장경한 반대자이기도 한 것이다.
 
(39) 이제 스토리의 심리적 움직임에 주의가 집중되고, 외부적 사건들은 그것이 정신적 반응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문제가 된다. 소설의 이러한 심리화는 그 시대의 문화가 경험한 내면화, 주관화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다. ……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형태인 교양소설(Bildungsroman)에서 내면화의 경향은 한층 강력하게 표현된다.
 
(41) 그들의 태도는 낭만파의 현실모멸과 괴테식의 낭만주의 비판을 모두 극복한 것이다. 사회문제의 헤결 가능성에 관해서 일체의 환상을 허락치 않는 냉철한 현실사회 분석에서 그들의 비관주의가 생겨난다.
 
(43) 즉 그는 학문, 예술, 도덕이 그때그때 존재하는 형태란 정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현실의 여러 기능이며,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로 규정되는 부르즈와 문화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44)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한다”라는 쥘리앵 쏘렐의 마끼아벨리식 신조는 여기서 발자끄 자신이 거듭 사용한 고전적 문구, 즉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한자리 차지하려는 사람은 세상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문구로 표현된다.
 
(48)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증오한다. 그러나 항상 그 민중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51) 스땅달은 엄격한 합리주의자요 실증주의자이다. 모든 형이상학, 모든 단순한 사변, 독일적인 애매한 관념론은 그에게 생소할뿐더러 증오의 대상이기조차 하다.
 
(54) 스땅달의 주인공들에게는 현재의 즐거움이란 없다. 행복은 언제나 그들 뒤에 놓여 있으며, 그것이 벌써 지나가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행복이라 생각한다. 멋모르고 생각없이 지냈으며 막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이 허송해버린 베르지와 베리에르에서의 나날이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중한 시절이었다는 쥘리앵의 깨달음, 거기에 들어 있는 슬픔보다 더 절실하게 스땅달의 생활감정에 담긴 비극을 표현하는 것은 없다.
 
(54) 릴케(R.M. Rilke)는 사자 우리 앞에서 물은 적이 있다. “누가 아는가,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 울타리 앞에 있는지 혹은 뒤에 있는지?”-이것은 정말 스땅달적 물음이며 지극히 낭만적인 물음이다.
 
(55) 모짜르트가 항상 객관적이며 필연적인 확고한 플랜을 좇는 것같이 보이는 데 반하여,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모든 주제, 모든 모티프, 모든 음조가 마치 “나는 이렇게 느끼니까” “나에겐 이렇게 들리니까” “나는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고 작곡자가 말하고 있는 듯이 울린다.
 
(57) ‘자잘한 진실들’(petits faits vrais)을 나열하는 스땅달적 수법은 정신생활이 하찮고 일시적이며 본래적으로 불합리한 현상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성이란 변덕스럽고 정의될 수 없으며 본성을 바꾸고 통일성을 깨뜨리기 쉬운 무수한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57) “인생이란 좀더 단순하다”
 
(58-59) 우리는 여기서 발자끄 예술의 하나의 신비와 마주서게 되는데, 그것은 전혀 고르지 않은 가치의 구성요소로써 그처럼 압도적 효과를 얻는다는 점에서 예술사에서 가장 불가해한 현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59) ‘개인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62) 인간 영혼을 짓누르는 이 자연의 힘, 이 물질의 지배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돈은 인간을 자기에게서 소외시키고, 이상을 파괴하며, 재능을 타락시키고, 예술가와 시인과 학자를 더럽히며, 천재를 범죄자로 만들고, 타고난 지도자를 모험가나 노름꾼으로 만든다.
 
(63)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똑같으며, 누구나 자기의 편의를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사회는 전적으로 계급투쟁의 논리에 지배되고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이의 싸움은 한계를 모른다. “모든 권력은 자기보존을 추구하며”(<시골의사>, 1833) 모든 피압박계급은 압제자의 파멸을 꾀한다-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64) 그는 <고기 낚는 여인>(La Rabouilleuse, 1841-~42)에서 “덕은 생활의 여유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며, <잃어버린 환상>에서 보트랭은 사람은 바람직한 지위와 그에 어울리는 재산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정직 따위의 사치”부릴 수 잇다고 이야기한다.
 
(64) “혁명은 무엇보다 먼저 물질계와 이해관계에서 일어나며, 다음에 관념으로 확대되고, 마지막으로 원칙이 된다.”
 
(68-69) 발자끄의 현실묘사는 대부분의 자연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자의적이다. 그의 작품세계가 실감을 주는 것은 주로 자신의 기분에 독자를 예속시키는 독단과, 경험적 실제 현실과의 경쟁을 처음부터 배제한 그의 소설세계의 소우주적 전체성을 통해서이다.
 
(69) 고전주의적 예술작품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자신의 미학적 영역 내부에 엄격하게 고립된 채 서로 나란히 서 있다. 모든 형태의 자연주의, 즉 하나의 실제 모델에 명백히 의존하는 모든 예술은 이러한 미학적 영역의 내재성을 깨뜨리며, 이질적인 여러 예술적 표현들을 자기 속에 포용하는 모든 연작 형식은 개개 예술작품의 자주성을 헤친다.
 
(70) 프루스트는 바그너와 발자끄의 연작 형식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었다. …… “음악가(즉 바그너)는 타인의 눈으로, 동시에 창작자의 눈으로 자기 작품을 보았을 때 발자끄와 똑 같은 황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 그리하여 그는 같은 등장인물들이 여러 작품에 거듭 나옴으로써 하나의 싸이클로 통일된다면 훨씬 더 아름다우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자기의 작품에 마지막 손질을, 가장 탁월한 손질을 가했다. … 부가적이긴 하지만 결코 인공적이 아니며 …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만큼 더 진실하고 생생한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한 것이다.”
 
(74) 발자끄는 관찰보다 비전이 더 강했던 문학적 예언자의 한 사람이다. ‘예언’과 ‘비전’이란 물론 결점을 들춰낼수록 오히려 그 마술적 영향력이 늘어가기만 하는 것 같은 그의 예술 앞에서 무어라 해야 좋을지 모르는 우리의 당혹스러움과 무력을 감추기 위한 낱말일 따름이다.
 
 
2. 제2제정기의 문화
 
(80) 저급하고 불확실하고 쉽게 만족되는 취미가 유행의 주도권을 잡은 반면,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들의 노력에 충분한 보상을 해줄 능력이 없는 소수 전문가계층의 소유물이 되었다.
 
(81)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이다. 진실감에 대한 자연주의의 가정이 새롭기는 하나, 이러한 가정이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제나 자의적이기 마련이다. …… 19세기 후반에 자연주의적 예술이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관념론과 전통주의의 정신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 및 합리주의적, 기술중심적 사고방식의 승리에 따른 한 징후일 따름이다.
 
(82) 너무 예술적으로 완벽한 구성을 회피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언제나 미완성 상태에 있을 수박에 없다는 사실에서 각기 나오고 있는 것이다.
 
(85)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도 리얼리스트, 즉 진짜 진실의 참다운 벗입니다.”
 
(87) 이러한 하잘것없고 ‘비(非)시적’인 주제의 선택에서 우리는 꾸르베, 밀레, 도미에 등의 인물선택에서 본 것과 같은 민주적 정신의 표현을 본다.
 
(87) 낭만주의자들이 성스러운 숲의 시를 그렸다면 자연주의자들은 시골생활의 산문을 그린 셈이다.
 
(88) “살아있는 예술을 만든다”(faire de l’art vivant)는 꾸르베의 격언이나 도미에가 신조로 삼았다는 “자기 시대에 속해야 한다”(Il faut etre de son temps)는 말은 모두 똑 같은 생각, 즉 낭만주의자들이 소외상태를 극복하고 예술가를 개인주의에서 건져내려는 욕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97) 22세 때의 위기의 겪어내기까지 그는 환상과 우울증과 감정적 폭발로 고민하는 자이자 신경질과 민감성으로 인해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하나의 병자였다. 온통 예술에 바쳐진 그의 생활, 규칙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작업태도, 그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비인간성과 그의 스타일에 있어서 비인격성-한마디로 말해 그의 예술적 이론과 실천 전부가 사실은 그러한 파멸로부터 자신을 구하려는 결사적 노력인 것이다.
 
(98) 무엇보다도 플로베르는 발자끄의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효과와 반대로 모든 멜로드라마적이고 모험소설적인 것의 포기, 심지어는 단지 스릴만을 주는 플롯의 완전한 포기를 대표하며,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일상생활을 즐겨 그리고, 인물 창조에서 모든 극단을 피하고 선, 악 어느 한 면만을 강조하지 않으며, 그리고 모든 주의와 선전과 도덕적 교훈 등 사건진행에 대한 일체의 직접적 간섭이나 사실의 직접적 해석을 피하는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99) “우리는 인생을 말하기 위해 태어났지 소유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하나의 예술관 및 세계관으로서 낭만주의의 출발점을 이루었던 저 삶의 포기가 가장 극단적이고 철저한 형태를 취한 것이요, 동시에 플로베르의 분열된 감정의 논리 그대로 그것은 낭만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거부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플로베르가 문학은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라고 외쳤을 때 그는 문학의 순수성뿐 아니라 감정의 순수성도 동시에 지키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99) 플로베르는 ‘관념’과 ‘육신’의 구별이나 예술을 위해 삶을 버리는 결단 자체가 사실은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비낭만적인 해결은 오직 삶 자체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01) 플로베르의 부르즈와 기질은 무엇보다도 꼼꼼한 작업방법과 엄격한 자기단련, 그리고 이른바 천재형의 무질서한 창작방식에 대한 반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그날그날의 임무’에 관한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좋든 실든, 영감이 떠오르든 안 떠오르든 하나의 규칙적인 부르즈와적 직업으로서 글쓰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았다.
 
(103) 플로베르는 작가생활 초기(1851년9월)에 “인생에서 참되고 좋은 유일한 것, 그것은 예술”이라고 말했고, 말기(1875년12월)에는 다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작품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103) “삶이란 너무 추악해서 그것을 피함으로써만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의 세계에서나 가능합니다”라고 플로베르는 신음한다.
 
(105) “글나부랭이에 미쳐서 네 마음이 메말라버렸다”
 
(105) 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잇고 한번도 자신이 정말 쓰고 싶은 것을 정말 쓰고 싶은 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의 편지에서 하나의 공식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107) 플로베르의 말대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큰 재난이 아니라 작은 재난들이다”라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 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는 인식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서글픈 사실이다. 이러한 점진적이고 눈에 안띄고 그러면서도 막을 길 없는 쇠진의 경험, 거창한 파국이 갖는 놀라운 효과조차 만들어주지 않는 조용한 삶의 침식의 경험은 <감정교육>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현대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108) 하지만 과거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와 그에 따른 하나의 위안, 즉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의 깨진 조각들을 묻어버리는 시간이 또 “잃어버린 의미의 싹과 흔적을 도처에 남긴다”는 사살에서 얻는 위안은, 모든 현재는 메마르고 무의미하며 과거조차 그것이 현재인 동안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는 낭만적 감정의 지속이며 확대이다. ……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하잘것없고 공허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을 이어주는 사슬에는 항상 어느 한 고리가 빠져 있고 객관적 무의미와 순전히 주관적인 의미가 안겨주는 서글픔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09)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생활의 물질적 조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하기는 하지만, 그 조건들이 불변의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113) 물론 예전에도 엉터리 화가와 재능 없는 작가들이 있었으며, 아무렇게나 후닥닥 만들어진 작품과 서투르고 시시한 예술적 아이디어가 있었다. …… 그러나 이제 이러한 가짜가 완전히 행세를 하며, 진짜의 껍데기를 쓰고 진짜를 대신하는 일이 통례가 된다. …… 대중이 알면서도 일부러 자기의 수준 밑으로 내려간 ‘휴식’으로서의 예술,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은 이 시기의 발명인데, 그것은 모든 창작형태를 지배하지만 특히 가장 거침없고 과감한 대중예술인 연극에서 그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다.
 
(116) 시민계급의 삶을 이상화하는 작업의 기초로서 결혼과 가족이란 제도만큼 적합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사심 없는, 가장 고상한 감정이 존중되는 사회형태의 하나로서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서술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봉건적 속박이 풀어진 이래 사유재산의 안정과 영속을 여전히 보장해주는 유일한 제도였던 것도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117-118) 한 등장인물이 작가의 스피커 이상의 다른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도덕원리가 순전한 추상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배후의 이데올로기가 예술적 형상화로써 하나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20) ‘대단원’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다. 해답이 틀리다면 계산 전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뒤마 2세는 말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결론, 해결, 그 마지막에 맞추어 작품을 꾸며야 하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렇게 뒷걸음질쳐나가는 방법이야말로 ‘잘 만들어진 각본’을 조립해내는 타산적 능력과 진정한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자신을 내맡기는 비합리적 충동 사이의 차이를 무엇보다도 날카롭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120) 그러나 셰익스피어 연극의 효과는 순전한 수학적 관계의 범위 이상의 무한한 성분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 반하여, ‘잘 만들어진 각본’의 효과는 오로지 술수와 충격적인 효과의 연속에만 의존한다.
 
(121) 오히려 예술은 사건이 절정에 달하는 장면을 적당히 미리 준비하고 뒤얽힌 매듭을 매끈하게 푸는 데 있다는 것이다.
 
(125) 오페레타가 사람들의 기강을 문란하게 한 것은 그것이 모든 ‘고상한’ 것을 비웃는다거나 고전과 고전비극과 낭만주의 오페라에 대한 조소가 실상은 위장된 형태의 사회비평이었던 때문이 아니라, 권위를 원칙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권위에 대한 신앙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129) 마이어베어가 만든 오페라의 유형은 모두 무대의 매력을 결합하고, 청각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시각에 호소하는 음악과 노래와 춤의 이질적 혼합체를 창조하여 그 모든 요소가 관중을 현혹시키고 질리도록 되어 있었다.
 
(131) 올바르게 지적된 것처럼 개인적 체험과 개인적 발견에서 출발하여 자기 나름의 어떤 매너리즘으로 끝나는 보통 예술가들의 전형적 코스와 반대로, 그는 당대의 지배적 인습들을 아무런 내적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가 점차 자기의 길을 찾아 독창성에 이른다.
 
 
3. 영국과 러시아의 사회소설
 
(133) 니체가 지적한 대로, 위대한 대가들 중에서 스물여덟살이나 되어서도 바그너처럼 그렇게 조잡한 음악가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플로베르의 예외를 빼고는 확실히 어떤 위대한 예술가도 그처럼 오랫동안 자기의 소질을 의심한 이는 없다.
 
(133) 그들은 다 같이 자기중심주의와 심미주의에 대한 희망 없고 끝이 없는 싸움을 계속했던 동일한 후기 낭만파 세대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141) 현대 상징주의의 지나치게 정밀하고 지적이며 그 서정성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특징, 신낭만주의의 냉혹한 우아함과 얼마간 꾸며낸 무뚝뚝함, 세기전환기 예술의 억지 수줍음과 절제 및 그 은밀성과 비밀주의 등은 부분적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이 인공적인 스타일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다.
 
(142) 예술적 타락이 사회 전체를 사로잡은 병의 증상으로 여겨진 적은 없었으며, 예술과 생활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의식이 러스킨 이후만큼 분명해진 적도 없었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술과 취미의 저하를 일반적 문화위기의 징후로 파악한 최초의 인물이요, 오늘날에도 충분히 인정되지 못한 기초적 원리, 즉 미의 감각과 예술의 이해력이 각성되자면 먼저 사람의 생활조건이 달라져야 한다는 원리를 발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143-144) 사회적 현실과 사회생활 속에서의 예술의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면서도 그는 중세적 미의 이상을 낭만적으로 사랑한다. 민중에 의해서 민중을 위하여 창조된 예술의 필요성을 설교하지만, 자신은 한결같이 부자에게만 허용되고 교양인만이 즐길 수 있는 물건들을 생산하는 하나의 쾌락적 딜레망뜨인 것이다.
 
(145-146) 예술의 전역사는 표현의 기술적 수단의 계속적인 혁신과 개선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의 원활한 정상적 발전은 이들 수단의 남김없는 활용과 지배의 과정으로, 능력과 의도, 표현매체와 표현내용의 조화된 일치로 정의할 수 있다.
 
(146) 그는 예술을 “노동의 기쁨의 표현”으로 정의한다. 그에게 예술은 행복의 한 원천일뿐더러 무엇보다도 어떤 행복감의 결과이며, 예술의 참다운 가치는 창작과정에 있다. 예술가는 작품에서 자기 고유의 생산성을 맛보는데, 그것은 예술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의 기쁨이다.
 
(151-152) 우리 시대의 대중작가란 디킨즈와 반대로 언제나 독자에게로 기어내려가야만 한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체스터턴(G.K. Chesterton, 1874~1936, 영국의 소설가, 문필가)은 옳게 지적했다. 그들과 독자 사이에는 진정한 작가와 당대의 평균적인 독자층 사이에 비하여 비록 전혀 성질이 다르고 훨씬 덜 깊은 것이라 하더라도 여하튼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하나의 단절이 존재한다. 디킨즈에 있어서 그러한 단절은 문제될 여지가 없다. 그는 일반의 의식을 뚫고 들어가 영국 독서층의 상상세계에 자리를 잡게 된 가장 포괄적인 인물군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이 인물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내적 관계도 그의 독자들의 그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155) 플로베르, 모빠쌍 및 공꾸르 형제가 그들의 보수주의에도 불구하고 고개 숙일 줄 모르는 반항아임에 반하여, 디킨즈는 정치적 진보성과 기존 상황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지배체제의 전제들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일개 온순한 시민이었떤 것이다. 그는 다만 소시민의 부담과 불평을 알고 있었고, 부르즈와 사회의 기초를 뒤흔들지 않고 고칠 수 있는 악에 대해서만 싸웠을 따름이다.
 
(156-157) 그의 다정다감은 흔히 무서운 잔인성을 감추는 가면일 뿐이요, 그의 유머는 눈물 속의 웃음이며, 그의 좋은 기분은 목을 조르는 듯한 삶의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가장 마음씨 좋은 그의 주인공들의 모습 뒤에는 찌푸린 얼굴이 숨어 있고, 그의 부르즈와적 예의범절은 언제나 범죄성과 가까이 맞붙어 있으며, 그가 좋아하는 선조대대의 세계란 음산한 고물창고요, 그의 엄청난 활동력과 생의 환희는 죽음의 그림자 한가운데 서 있으며, 그의 사실성은 일종의 열병적인 환각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분명히 의젓하고 똑바르고 존경 받음직한 이 빅토리아인은 무시무시한 꿈에 시달리는 절망적 초현실주의자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161) “최고의 사명과 선택받음이란 환각제 없이 일하는 것이요, 맑은 정신으로 눈을 똑똑히 뜨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끝까지 견디며 사는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1860년의 어떤 편지에 쓰고 있다.
 
(164-165) 그러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계급이 어떻게 경제적, 정치적 모든 실권을 소유한 계급에게 질투와 선망과 증오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174) 사회소설은 발자끄에서, 교양소설은 플로베르에서, 삐까레스끄 소설은 디킨즈에서 각기 그 완성을 보듯이 심리소설은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에 이르러 그 완전한 성숙기에 들어간다.
 
(176) 우리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시작이 아니라 끝이요, 그의 모든 독창성과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구 심리소설의 업적을 순순히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일관되게 발전시킨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7) 모든 충동, 모든 감정, 모든 생각은 그것이 이 인물들의 의식에 나타나는 순간 그 정반대의 충동, 감정, 생각을 낳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주인공들은 항상 그들이 선택해야 하는데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와 자기분석 및 자기비판은 그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타이며 몸부림이다.
 
(180) 그런데 한 작가의 세계관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누구의 편을 드느냐보다는 오히려 그가 누구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느냐 하는데 있다.
 
(181) 도스또예프스끼와 디킨즈의 이율배반적이고 여러모로 정리 안된 사회관과, 그들 아버지의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 및 그들 자신이 일찍이 사회적 신분 상실의 느낌을 맛보았던 경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183) 그의 정신성이란 완연히 하나의 열병에 가까우며, 모든 경험을 그 마지막 한 오라기까지 규명하고 모든 감정을 그 충동 하나하나까지 추궁하며 생각을 더욱더 멀리 밀고 나가서 그 생각의 모든 결과를 시험해보고 온갖 사상의 가장 깊은 무의식적 원천에까지 내려가보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186) 도스또예프스끼에 의하면 인간존재의 의미는 그 시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목표의 생겨나고 사라짐, 어제의 기억과 내일에 대한 환상, 끊임없이 쌓이면서 우리를 묻어버리는 그 세월 속에 잇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발가벗겨져 몇 개의 간단명료한 공식으로 환원되는 것처럼 보이는 고조된 순간들, 인간의 본질 그대로의 진정한 자기임을 느끼고 자신의 자아 및 자신의 운명과 일치됨을 선언하는 그런 지고의 순간에 있는 것이다.
 
(186) 도스또예프스끼는 항상 최고의 행복과 가장 완벽한 조화의 느낌을 초시간성의 체험으로 묘사했다. 무엇보다도 간질병 발작이 일어나기 전의 므이슈낀의 상태가 그렇고, 끼릴로프의 ‘5초동안’-그 황홀감이 오래 계속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가 말하는-이 그렇다. 이러한 순간에 그 정점에 달하는 그런 삶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시간의 느낌에 바탕을 둔 플로베르적 소설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소설과거의 공통점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187) 그는 “나를 심리학자라고들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나는 더욱 높은 차원의 리얼리스트일 뿐이다. 즉 나는 인간 영혼의 심층을 속속들이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이러한 심층이란 인간의 비합리적인 면, 귀신들리고 꿈같고 도깨비 같은 면을 뜻한다. 그것은 표면의 진실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자연주의를 요구하며, 실생활의 요소들이 환상적으로 서로 섞이고 서로 어지럽게 밀어대고 서로 다투어 눈을 끄는 현상에 눈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리얼리즘을 사랑한다. 환상적인 것에 접근하는 리얼리즘을 … 현실보다 더 환상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현실보다 더 있기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189) 즉 자유를 없애면 제도의 경직화를 낳고 종교를 교회로, 개인을 국가로, 물음과 찾음의 불안을 교리 속에의 안주로 대체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내면적 자유를 뜻하지만 그 때문에 끝없는 투쟁을 의미하고, 교회는 내면적 속박을 의미하는 대신 동시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생각이 얼마나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며 그의 도덕적 및 정치, 사회적 입장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저 악명 높은 반동분자이자 독단론자 도스또예프스끼는 그의 작품을 하나의 해결 안된 질문을 던짐을써 끝맺고 있는 것이다.
 
(190) 개인주의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반대이유는 좀더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개체화의 원칙 자체가 민중과 민족과 공동체 사회를 통해 그 구체적 역사적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정신, 원초적 단일자 내지는 초월적 관념으로부터의 탈락이라고 본다. 그에 반해 똘스또이는 순전히 합리적이고 행복론적인 이유로 개인주의를 배격했다. 사회로부터 개인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행복이나 만족을 가져올 수 없고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평안과 만족을 가져올 수 없고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헌신함으로써만 평안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1) 귀족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즉 그의 출생과 혈통에 의해 지위를 가짐에 반해 평민은 그의 재능과 개인적 능력 및 업적에 의존하는 것이다.
 
(194-195) 그가 <참회록>에서 말했듯이, 그를 기독교인으로 만든 것은 “불안과 고독과 고아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하느님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한 불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 자신의 미미함과 덧없음에 대한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이 그를 독실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사랑이 없는 것을 의식하여 사랑의 사도가 되고, 인간에 대한 그 자신의 불신과 경멸을 속죄하기 위하여 인간적 유대를 찬양하며,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으므로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외친다. 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하나의 ‘합목적적’인 고행이요 동양적 규범에 따른 기독교의 수행이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의 그의 도피는 기독교적 겸허라기보다는 귀족적인 당당함을 보여준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정복하고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199) 예술가 체호프(A. Chekhov)가 생각했듯이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족할지는 모르지만, 자기 시대의 주인 노릇을 하려면 동시에 올바른 해답까지도 제시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4. 인상주의
 
(201) 특히 과거의 문화사와 발전추이와 비교하고 그것이 예술에 끼친 영향을 놓고 볼 때 병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친 듯한 발전속도와 무엇에 쫓기는 듯한 여러 변화들이다. 즉, 기술의 빠른 발전은 유행의 교체를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예술적 취미 기준의 혼란을 야기하며, 오직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쉴새없이 새것을 추구하는 흔히 무의미하고 실속 없는 쇄신욕구를 초래하는 것이다. 기술의 성과에서 실제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기업가는 새로 고쳐 만든 신식 제품에의 수요를 인위적인 수단으로 높이지 않을 수 없으며, 새것이 언제나 더 나은 것이라는 느낌이 가라앉을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낡은 일용품이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으로 보충하고 게다가 새것이 점점 빨리 나오게 되면 이에 따라 물질적 자산에 대한 집착이 약해지고 또한 곧 정신적 자산에 대한 집착마저 희미해지며, 결과적으로 철학적, 예술적 평가의 변화속도가 유행의 변화속도에 적응하게 된다. 이리하여 현대의 기술은 유례없이 생활감정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거니와, 인상주의에 표현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새로운 동적인 감정인 것이다.
 
(201) 인상주의는 유례없이 도시적인 예술인데, 그것은 다만 인상주의가 풍경으로서의 도시를 발견하고 그림을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도시인의 눈으로 보고 현대적 기술인의 극도로 긴장된 신경으로 외부 세계의 인상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의 다양한 변화, 신경질적인 리듬, 갑작스럽고 날카롭지만 언제나 사라지게 마련인 인상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도시적 양식인 것이다.
 
(202)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장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존속에 대한 순간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가 일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라는 느낌, 두 번 다시 발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03)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해간다는 현실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203) 순간과 변화와 우연의 우위는 미학적으로 말하면 분위기가 생활을 지배한다는 것, 말하자면 변화기 쉬울뿐더러 분명치 않고 모호한 속성을 가진 사물과의 관계가 삶에서 지배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술적 표현을 이처럼 순간적 분위기에 귀속시키는 데에는 동시에 인생에 대한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태도, 수용적, 관조적 주체로서의 방관자의 역할에 대한 만족, 멀찍이서 바라볼 뿐 뛰어들지는 않겠다는 입장, 요컨대 전적으로 심미주의적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인상주의는 자기중심적인 심미적 문화의 정점으로서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삶에 대한 낭만주의적 체념의 극단적 귀결을 의미한다.
 
(205) 색체를 강조하여 화면 전체를 색체와 명암효과의 조화로 만들려는 욕망이 목표요, 공간이 평면에 흡수되고 물체의 조형성이 해체되는 것은 이에 따른 부득이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206)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한 대상에서 연상하는 ‘기억된 색채’가-그것은 실로 오랜 경험과 습관의 결과인데-직접적 지각에서 얻어진 구체적 인상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인상주의는 이론적으로 정립된 색채를 떠나 실제의 감각으로 파고드는데 그것은 결코 어떤 자연발생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인위적이요 극도로 복잡한 심리학적 과정이라 할 것이다.
 
(209)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것처럼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없으며, 낯선 사람들의 떼거리 속에서처럼 외롭고 버림받은 느낌이 강한 경우도 없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생기는 기본적인 두 감정, 즉 한편으로 남이 봐주지 않는 데서 혼자 있다는 느낌과 다른 한편으로 번잡한 교류와 끊일 사이 없는 움직임과 쉴새없는 변화의 인상이 가장 섬세한 기분과 가장 신속한 자극의 교체를 결합시키는 인상주의적 생활감정을 낳게 되는 것이다.
 
(210) 인상주의에는 또한 부르즈와 예술관객들이 좋아하지 않을 서민적 체취란 조금도 없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의 ‘귀족적 양식’으로서 우아하고 까다로우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며, 감각적·향락적이요, 값진 것과 희한한 것에 애착을 가지며, 엄격하게 개인적인 체험 즉 고독과 고립의 경험 및 극도로 섬세한 감각과 신경의 경험에 몰두한다.
 
(218) 사람들은 존재의 신비와 영혼의 깊이에 관하여 허튼 소리를 지껄이게 되었다. 이성적인 것을 천박하다고 타박하며, 미지의 것과 불가지의 것을 찾아 느끼려고 한다. 그들은 현세부정적인 ‘금욕적 이상’을 신봉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니체와 더불어 왜 정말 그것이 필요한지 묻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219-220) 그것은 예술의 세계를 인생의 환멸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된 보상으로, 원래 불완전하고 불명료하게 마련인 인간존재의 참다운 실현이요 완성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이 예술의 형태를 취할 때 더 아름답게 보이고 더 화해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최후의 위대한 인상주의자요 심미적 쾌락주의자인 프루스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억과 환상과 심미적 체험 속에서만 인생이 비로소 뜻기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체험을 가장 강렬하게 실감하는 것은 현실 가운데서 인간이나 사물들과 마주칠 때가 아니라-이러한 체험의 ‘시간’과 실감은 늘 ‘잃어버리고’마니까-우리가 ‘시간을 되찾을’ 때, 이미 우리 삶의 행위자가 아니고 관찰자일 때, 예술작품을 창조하거나 감상할 때, 즉 우리가 기억을 할 때라는 것이다.
 
(221) 이른바 자연의 매혹보다 도시, 도시적 문화, 도시적 오락, ‘인공적 생활’ 그리고 ‘인공낙원’이 비할 데 없이 더 매력적일 뿐 아니라, 또한 더욱 정시적이요 영혼에 파고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 자체는 추하고 범속하고 무형식적이어서 예술을 통해서야 비로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된다.
 
(223) “나는 기억하고 있어. … 실은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눈치빠른 독자라면 누구나 현실의 엄중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완고한 거부와 기독교적 현세부정 사이의 유사성을 간과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또한 아무도 어떤 고정관념의 집요함과 종교적 신앙의 견고함 사이의 차이를 잘못 보아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225) 데까당들에게는 ‘모든 것이 심연’이요 모든 것이 삶의 불안과 불안전으로, 보들레르가 노래하듯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막연한 전율로” 가득 차 있다.
 
(226) 창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227) 예술간란 존재의 역설은 그가 인생을 묘사해야 하면서 그 인생 자체로부터 쫓겨나 있다는 데 있다.
 
(228) 낭만주의자들은 아직 ‘푸른 꽃’(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소설 제목이자 낭만주의적 이상의 상징), 꿈과 이상의 나라를 찾고 있었으나, 이제 보들레르는 “그러나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만이 참 여행자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짜 도망이요, 무엇이 끌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구역질나기 때문에 떠나는 미지에의 여행인 것이다.
 
(232)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처럼 쉽게 행복하다는 사실을 동정합니다. 사람이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기 위해서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보았어야 하지요.” - 보들레르
 
(234) 특히 말라르메가 시의 본령을 음악에서 탈환하는 것으로 이해한 점에서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적’이다. 그러나 비합리주의적·정신주의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상징주의는 또한 자연주의적·유물론적 인상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반동을 뜻한다. 인상주의에서는 감각정 경험이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최종적인 것임에 반하여, 상징주의에서는 일체의 경험적 현실은 단지 관념세계의 비유일 뿐인 것이다.
 
(236) 시인은 말라르메가 강조한 대로 “단어들 자체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야”한다. 시인은 언어의 흐름에, 이미지와 환상의 자발적인 연속에 자기가 운반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가 이성보다 더 시적일뿐더러 더 철학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36) 시인이란 ‘예시자’(voyant)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들을 정상적 기능의 관습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분리시켜서 비자연화·비인간화시킬 용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현대문학 전반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랭보였던 것이다.
 
(236) 본질적으로 소박하고 정상적인 정신적 태도란 예술적으로 불모이고, 시인이란 사물들의 숨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 속의 자연인을 극복해야 한다는 느낌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237)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권의 책으로 되기 위하여 존재한다”
 
(238) 그는 불확실한 것, 수수께끼 같은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추구한다. 표현이 막연할수록 암시성이 더욱 풍부해보인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란 그의 의견에 의하면 “독자가 그 열쇠를 찾아야 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이어야 하기”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239) 그의 시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관념의 압축과 이미지의 비약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결코 언제나 예술적 관념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유희적인 언어의 취급방식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241) 그러나 이제는 사회생활의 모든 규범이 일거에 그 구속력을 상실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문젯거리가 되며 논의의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다.
 
(243) 댄디는 현대에도 아직 실천 가능한 모든 신사다운 미덕을 체현한다. 그는 어떠한 사태에도 신사답게 대처할 줄 알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으며, 절대로 천하게 구는 법이 없고 스또아주의자의 냉정한 미소를 결코 잊는 법이 없다. 이러한 댄디의 존재야말로 퇴폐의 시대에 있어 영웅주의의 마지막 발현이요, 인간적 긍지의 한가닥 남은 박은 빛이며 낙조와도 같은 것이다.
 
(244) “체험의 결실이 아니라 체험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다. … 이 황홀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성공을 의미한다.
 
(245) 헤라끌레이또스적인 의미에서 “만물은 유전”하고 인생은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는만큼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진리, 즉 순간의 진리, 오로지 순간으로부터 앗아낼 수 있는 환희와 쾌락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어떠한 순간도 그 순간 고유의 매력과 내적 힘과 아름다움을 음미하지 않고는 흘려보내지 않는 일이다.
 
(247) 사람들은 찰나적이고 거의 포착할 수 없는 느낌의 서정시, 불명확하고 정의할 수 없는 감각적 자극, 연한 색깔과 피로한 음성 등을 노래하는 서정시들을 이리저리 되씹는다. 애매하고 막연한 것, 우리의 감관으로 겨우 잡힐까말까 하는 것들이 시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249) “지금 이곳이 동시에 피안이기도 하다”는 사실 앞에서의 놀라움, “모든 인간이 각기 자기의 길을 간다”는 데 대한 낭패감,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크나큰 의문-“한 사람이 살다가 죽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떻게 그가, 그라는 인간만이, 정신적인 의미에서 살 수 있었던가 하는 비밀을 가지고 가버린다”는 수수께끼. 여기서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죽는다”라는 발자끄의 말을 생각해보면 1830년 이래 유럽의 인생관이 얼마나 수미일관하게 전개되어왔는가를 알 수 잇다. 이 인생관에는 항상 지배적이고 점점 더 깊어지는 한가지 불변의 특징이 있다. 소외와 고독의 의식이 그것이다.
 
(251) 체호프의 희곡형식은 아마도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연극적이지 않은, 아마도 ‘극적인 고비’라든가 돌발사건이나 긴장이 가장 미미한 역할을 하는 형식일 것이다. 그의 연극처럼 사건이 적고 극적인 갈등이 적은 연극은 없다. 등장인물들은 싸우지도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으며 누구에게 정복되지도 않는다. 그냥 자기들 스스로 몰락하고 서서히 망해가며 아무 사건도 희망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들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인생을 고스란히 내맡기는데, 이 운명은 파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멸을 통해 완성된다.
 
(253) 인간이란 그때그때의 경우, 즉 유전, 환경, 교육, 천성, 장소, 계절, 우연 등 여려 영향의 소산으로서 인간의 행위는 어느 한가지 동기에서가 아니라 수많은 일련의 동기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256) “내 여행의 제일 큰 수확이 무엇이었는가를 지금 말하라고 한다면, 이제까지 나에게 큰 지배력을 갖고 있던 유미적인 것, 자신의 독자적 존재 이유를 주장하는 고립적인 유미주의를 나 자신의 내부로부터 몰아냈다는 사실을 들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유미주의는 이제 내게는 종교에서 신학이 암적인 존재이듯이 시에서 암적인 존재로 보입니다.”
 
(257) 이러한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처음으로 종교적·윤리적 체험이 미나 천재와 전혀 무관하며 신앙상의 영웅이란 예술적인 천재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 키에르케고르였다.
 
(258) 입센은 근본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로서 개성적 자유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앗고, 일체의 외부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은 그 자신을 위해 매우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데 반해 사회는 그를 위해 별로 해줄 게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262) 니체와 프로이트는 둘 다 인간의 정신생활의 표면,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동의 동기에 관해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그의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 혹은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263) 맑스의 역사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핵심은 계급적으로 분화되고 분열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사유라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통찰이다.
 
(264) 정신의 자율성이란 하나의 허구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때로는 우리 자신의 적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힘의 노예라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266) “지성의 목소리는 희미한 소리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남이 귀를 기울여줄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리고 수없이 거듭 거절을 당한 끝에 결국 지성의 소리는 듣는 사람을 찾고야 만다.
 
(267) “진리가 어떤 절대의 팔에 매달려 있던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라고 니체는 말한다. 자기 목적으로서의 학문, 무(無)전제의 진리, 이해를 초월한 미, 무아의 도덕 등은 니체 및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268) 현실이란 떼어놓을 수 없는 주체·객체의 관계로서 그 개별적인 구성요소는 서로서로의 의존관계를 떠나서는 규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우리는 변하고 있고 객체의 세계도 우리와 더불어 변하고 있다. 자연현상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어떤 발언이 설혹 100년 전에는 진리였다 하더라도 오늘날엔 이미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이란 우리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운동·발전·변화의 와중에 있으며 항상 새롭고 예상 못한 우연한 현상의 총화요, 언제나 완결되었다고 볼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269)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요, 그 속에서 이념과 이상이 가치를 잃고 삶과 정신이 실체를 상실하는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 본연의 삶에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그렇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시간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 프루스트의 말대로 진정한 낙원이란 잃어버린 낙원이기 때문이다.
 
(279) 왜냐하면 프루스트에 의한 인생 가치의 전도는 병든 한 인간의, 생매장된 한 인간의 지위와 자기기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제2장 영화의 시대
 
(286) 1930년대의 역사는 사회비판의 시대, 사실주의와 행동주의의 시대의 역사다. 모든 정치적 입장이 극단화한 시대이며, 오직 극단적인 해결만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서 모든 온건주의자들의 역할이 끝났다는 신념이 널리 퍼진 시대다.

(287) 우리는 과연 대중사회 및 대중적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겠다. … 현대문명의 타락과 소외에 대한 책임을 이러한 "대중의 봉기" 탓으로 돌리고 정신과 영혼의 이름으로 이 봉기를 공박하려는 노력처럼 이 시대의 지배적 문화관을 잘 나타내주는 것도 없다.

(289) 인상주의 이후의 예술은 이미 자연의 재현이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다. 이 예술이 자연과 갖는 관계는 일종의 폭력적인 것이다. 굳이 더 덧붙이자면 현실과 나란히 공존하고 있으나 현실을 대체할 의사는 없는 그러한 대상들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마술적 자연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290) 현대예술은 인상파의 부드러운 화음과 아름다운 색조를 거부하는, 근본적으로 '보기 싫은' 예술이다. 회화에서는 '회화적' 가치를 부인하고, 시에서는 정서의 조화와 아름답고 일관성있게 구성된 이미지를 배격하며, 음악에서는 멜로디와 음조를 파괴한다.

(293) 다다운동 전체의 의의는 기존의 모든 형식과 상투구의 유혹에 저항했다는 데 있다. 기성 양식이 손쉬운 대신 오래 사용된 탓에 가치를 잃었으며, 대상을 왜곡하고 표현의 자발성을 파괴하는 까닭이다.

(293) 19세기가 항상 낡은 것과 새것, 전통적 형식과 개인의 자연발생적 창조력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데 그쳤던 반면에, 다다이즘은 닳아빠진 기존의 모든 표현방법의 전면적 파괴를 요구한다. 이들은 완전히 자연발생적인 표현을 요구하는데, 이 경우 그들의 예술이론은 하나의 자기모순에 빠지는 결과에 이른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이 (적어도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사전달을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동시에 모든 의사소통의 수단을 부인하고 파괴할 수 있겠는가?

(294)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예술사적 의의는 그 운동의 공식 대변인들의 작품에 있다기보다 상징주의 운동 말기에 이르러 문학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그리고 삶과 완전히 절연된 문학 형식의 불모성을 지적했다는 데 있다.

(295) 그들의 선언문에서도 말했듯이, "영원의 척도로 재볼 때 모든 인간행위는 쓸데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295)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는 1922년에 동시에 발표되어 새로운 문학의 대조적인 두 가지 기본 음정을 들려주었다. 조이스의 소설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의 방향으로, T.S. 엘리어트의 시는 상징주의와 형식주의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두 작가에게서 다 주지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지만, T.S. 엘리어트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교양경험'인데 반해 조이스의 경우는 '원초체험'이다.

(295) 교양경험에서는 역사적 문화와 정신적 전통 그리고 문학의 사상적, 형식적 유산이 영감의 원천이 된다. 반면 원초경험의 경우 직접적인 생활현실과 존재의 문제가 그 원천을 이룬다. T. S. 엘리어트나 발레리에서 출발점은 항상 어떤 개념이나 사상 아니면 어떤 문제이고, 조이스나 카프카에서는 어떤 비합리적인 체험, 어떤 비전 또는 어떤 형이상학적, 신화적 이미지이다.

(296) 삐까소의 절충주의는 인격의 통일성에 대한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파괴를 뜻하는 것이며 그의 수많은 모방은 독창성의 숭배에 대한 항의이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여 형식의 자의성을 좀더 강력히 보여주려는 그의 왜곡 변형 수법은 무엇보다도 '저연과 예술은 완연히 다른 현상이다'라는 명제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니 '그렇게 밖에는 달리 못한다'느니 하며 자존심과 자만심에 가득 찼던 낭만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빠까쏘는 스스로 요술장이도 되고 익살맞은 패러디스트가 되기도 한다.

(297)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의 방법에 '자동기술법'을 보완함으로써 이미 혼돈으로부터, 무의식과 비합리의 세계로부터, 꿈과 영혼의 통제 안된 영역으로부터 새로운 지식, 새로운 진리, 새로운 예술이 나오리라는 믿음을 표명한 셈이다.

(297) 비합리적이고 직관적인 것을 예술적 판단과 비판정신에 의해 통어하며 무분별 대신 분별로써 원칙을 삼았던 종래의 창작방법과 비교해볼 때, 결과적으로 다른 점은 초현실주의 방법이 더 현학적이고 독단적이며 신축성이 없다는 특징을 들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의 처방에 비하면 프루스트의 방법은 얼마나 더 효과적인 것인가. 프루스트도 일종의 몽유병적인 상태에 들어가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수동적으로 회상와 연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버렸지만, 동시에 그는 끝내 엄격한 사상가요 극히 의식적으로 창작하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298) "내가 당신의 예술에서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의식적인 면이 아니라 의식적인 면입니다."

(298) 초현실주의자들의 기본 체험은 '제2의 현실'의 발견이다. 이 제2의 현실은 비록 일상경험의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나 일상적인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까닭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우리들 경험에 드러나는 심연과 공백을 통해서 그 존재를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원현상이 카프카와 조이스의 작품에서만큼 날카롭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298) 디테일을 세심하게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그러한 디테일들의 관계를 자의적으로 조합하는 수법은 초현실주의가 꿈속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두 가지 다른 차원, 다른 영역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 뿐 아니라 이러한 두 영역이 너무나 철저히 상호 침투하고 있어 그 어느 하나를 다른 영역에 종속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둘을 단순히 반대명제로 대응시킬 수도 없다는 느낌을 나타내고 있다.

(299) 모든 것이 서로 관련지어질 수 있고, 모든 것이 그 자체 외에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으며, 모든 것이 전체의 어떤 법칙을 자기 속에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모든 것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세계, 또는 모든 것이 동등한 의의를 지닌 세계에서 인간은 탁월한 존재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심리학은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300) 프루스트의 작품은 현대사회의 총괄적인 묘사를 담고 있다고 흔히들 말하는 뜻에서만이 아니라, 현대인의 모든 욕망과 충동, 재능, 콤플렉스, 합리성, 비합리성 등 그 정신구조 전체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01) 이제 와서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의식 내용의 동시성이며, 또한 개인과 종족과 인류 전체, 과거의 현재성, 여러가지 다른 시점들의 뒤섞임과 내면적 체험의 변화무쌍한 유동성, 영혼을 싣고 흐르는 시간의 흐름의 무한성,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 즉 주체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여러 매개체들을 이제 더 이상 분별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301) 새로운 시간 개념의 기본 요소는 '동시성'이며 그 본질은 시간적 요소의 공간화인데, 이러한 시간 개념은 제일 나이 어린 예술이요 배르그쏭의 철학과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한 장르인 영화예술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 영화의 수법과 새로운 시간 개념의 특징은 너무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어서 현대예술의 시간 범부가 영화의 정신에서 태어난 것처럼 느껴지며, 현대예술에서 영화가 비록 질적으로 가장 풍부한 장르는 못 되더라고 스타일 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장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02) 영화와 다른 얘술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즉 영화에서는 공간이 시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시간은 또 어느 정도 공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302) 말하자면 공간은 바로 우리 눈 앞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무제한적인 미완성의 공간이며 그것 자체의 역사, 그것 자체의 유일무이한 순간, 그리고 그 나름의 순서와 단계를 지닌 공간이다.

(303) 우리는 다른 장르에서는 오직 공간 속에서만 자유롭게 움직였는데, 이제 영화에서는 시간 속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방향과 전혀 관계없이 마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가듯이 시간상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움직인다. 사건 진행과정의 여러 단계를 분해하여, 말하자면 공간적 질서의 원칙에 따라 이것들을 배합하는 것이다. 즉 시간은 한편으로는 그 연속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고정된 일방통행적 성격을 잃어버린다.

(305) 시간의 부단한 굴절과 변동을 통해, 영화감상 체험의 본질을 이루는 가동성(可動性)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의 참된 공간화는 평행하는 플롯들의 동시성이 묘사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일어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각기 다른 사건을 동시적으로 체험할 때 비로소 시간과 공간 사이로 움직이며 시간적 질서와 공간적 질서의 범주를 모두 요구하는 일종의 부동(浮動)상태에 들어간다. 사물이 멀고도 동시에 가까운 상태, 시간적으로 서로 가까우면서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먼 상태에서 비로소 시, 공간의 내적 결합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러한 시, 공간의 통합 - 또는 말을 바꾸면 시간의 2차원성 - 이야말로 영화 본연의 세계이며 영화적 대상 성립의 기본 범주가 되는 것이다.

(306) 여하튼 영화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나 그 두 선의 교차와 사건 전개의 이중성, 그리고 대립되는 행동들의 동시성이다.

(306) 현대의 시간 경험은 무엇보다 우리가 그 속에 던져져 있는 순간의 의식, 즉 현재의 의식이다. 오늘의 인간에게는 모든 시사적인 것, 동시대적인 것, 현시점에 함께 얽혀 있는 것들이 특별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306) 현대인의 정신세계는 직접적 현재성과 동시성의 느낌에 젖어 있다. 현대인은 갖가지 사물 및 사건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상호작용에서 현대도시의 거대함과 현대 기술문명의 기적을, 그리고 그 사상세계의 복잡성과 그 심리의 애매성을 체험하고 있다. '동시적인 것'의 매력 - 한편으로는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상이하고 상호 무관하고 모순된 것을 수없이 많이 체험하는가 하면 한편으론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것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지구상에 서로 격리된 여러 곳에서 같은 일이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 이러한 매혹적 발견과 그에 따른 세계주의를 현대의 기술문명은 현대인에게 의식시켜 주었는데 이러한 세계주의야말로 새로운 시간 개념의 근원이며 현대예술이 삶을 경련적으로 그리는 원인일 것이다.

(307) 이러한 경험이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구분하려는 노력이 프루스트의 관점에서 더욱 무의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 사람 특유의 전형적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다시 성인이 되더라도 항상 근본적으로 동일한 체험을 한다. 어떤 사건의 의미는 그 사건을 겪고 견뎌낸 여러 해 후에야 비로소 머리에 떠오르기 일쑤다. … 인생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항상 이러저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고, 따라서 세월의 흐름에 대한 유일한 자기 방어를 자기 체험의 고정된 정형성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모든 체험들은 말하자면 한꺼번에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동시성은 결국 시간의 부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부정은 물질세계의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저 내면성을 되찾으려는 투쟁이 아니겠는가?

(308) 조이스에게도 시간이란 인간이 그 위를 오락가락하는 방향없는 길과 같은 것이다.

(308) 이 수법의 영화적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조이스가 이 소설의 각 장을 순서대로 쓰지 않고 영화제작에서 늘 그러듯이 플롯의 전후순서를 떠나 여러장을 한꺼번에 쓰곤 했다는 사실이다.

(309) 정신활동 과정의 대위법과 그 내면적 상호연관의 음악적 구조를 발견한 것은 베르그쏭이었다. 마치 우리가 한 음악작품을 제대로 듣는 경우 지금 울려나오는 음정 하나하나와 그 전에 나온 모든 음정들의상호관계를 귀에 담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고 중요한 경험에서는 우리가 과거에 체험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 영혼을 마치 하나의 악보처럼 읽게 된다. 그리하여 두서없이 뒤섞인 소리들의 혼돈상태를 지양하고 여러 음정의 예술적 합창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309)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서서 더욱더 넓은 정신적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게다. 영화는 시간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발전을 또 한걸음 밀고 나갔다. 전에는 음악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던 경험을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끔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 아직 비어 있는 이 새로운 형식을 참다운 삶으로 가득 채워줄 예술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312) 이들은 아무 형체없이 몰려들었다가 또 형체없이 쏟아져나간다. 그들은 이질적이고 불투명하며 무정형의 군중으로서 그 윤관은 유동적이며, 단지 그들이 모든 사회적 범주에 두루 걸쳐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계급적 성격이나 교양에 비추어볼 때 유기적으로 형성되고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그 어떤 사회계층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불투명한, 단 하나의 공통점을 지녔을 따름이다.

(313) 영화관에는 입은 옷 그대로, 연속 상영 도중 아무때나 지나는 길에도 들를 수 있는 것이다. 영화예술의 일상적 양상은 영화관람 행위의 즉흥적이고 서민적인 성격과도 일치하고 있다.

(314) 예술의 품질과 대중적 인기는 항상 어떤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315) 대중과의 관계에서 성공 여부는 미적 질의 문제를 넘어선 기준에 따라 정해진다. 그들은 예술적으로 좋고 나쁜 점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그들에게 확신을 주거나 불안을 주는 여러 인상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예술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그들에게 맞게, 다시 말해서 매력있는 소재로 제시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

(315) 오직 젊은 예술만이 대중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장르가 오래되면 그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발전단계들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형식과 내용의 적절한 결합을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예술이 젊은 동안에는 그 내용과 표현 형식 사이의 관계가 자연스럽고 단순하다. 즉 주제에서 형식으로 직통하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316) 영화의 대량 관객은 이러한 평준화 과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영화가 수지를 맞추려면 이러한 지적 평준화 작용의 근원이 되는 계층에 뿌리박지 않을 수 없다.

(317) 그들은 언제나 상하 양면으로부터 위협을 느끼면서도 막연한 희망이나 가상적인 장래를 버리기보다는 자신의 참된 이익을 희생시켜왔다. 그들은 실제로는 하층 부르즈와지의 운명을 누리면서도 상층 부르즈와지의 일부로 간주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확고하고 선명한 사회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만큼 일관된 의식이나 세계관이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영화업자들은 사회의 이러한 뿌리 잃은 요소들이 아무런 방향감각도 못 가졌다는 사실에 마음놓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분별하고 무비관적인 낙관주의가 소시민적 인생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대립이라는 것이 결국 별 것 아니라고 믿고, 따라서 영화 속의 인물들이 한 사회계층에서 다른 사회계층으로 쉽사리 옮겨가는 영화들을 보기 좋아한다.

(317) '모든 사람은 자기 행운의 창조자다' - 이것이 중간계급의 가장 중대한 신조이며, 입신 출세가 그들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는 원망적(願望的) 환상의 기본 주제를 이루고 있다.

(317) 활동 사진이 영화예술로 발달하는 데는 두가지 업적이 그 기초를 이루었다. 하나는 미국의 영화감독 그리피스의 공로라고 하는 클로즈업의 발명이요, 다른 하나는 이른바 '쇼트 커팅'이라 하여 러시아인들이 발견한 새로운 화면삽입 수법이다.

(321) 정말 어려운 문제는 그리스의 예술과 서사시가 특정한 사회발전 형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예술이 아직도 우리에게 심미적 만족을 주고 어떤 면에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모범이요 모델로 남아있다는 사실에 있다.

(321) 기계는 영화의 기원이요 수단이요 가장 적절한 대상이기도 하다. 영화는 '제조'되는 것이다.

(322) 기계가 바로 창조적 주체와 그의 작업 사이에, 그리고 감상하는 주체와 그의 예술 감상 행위 사이에 개입하는 것이다. 기계적인 것,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영화의 기본 현상이다. 각종 경주와 차 또는 비행기 여행, 도주와 추격, 공간적 장애의 극복, 이러한 것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테마이다. 운동, 속력, 속도를 묘사할 때처럼 영화가 득의양양해지는 적은 없다.

(322) 영화는 무엇보다도 '사진'이며, 이 사실은 곧 그것이 기계적으로 만들어지고 기계적 재생을 목표삼은 공업기술적 예술임을 의미한다.

(322) 영화란 그 현실묘사에서 인간 아닌 물질적 사실이 많으면 많을수록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323) 사실 그대로, 진실 그대로인 것 - 즉 '다큐먼트'가 될 수 있는 것 - 에 대한 집념은 현대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323) 이러한 장르의 가장 똑똑하고 재주있는 대표자들은 그들의 작품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될 것을 구태여 고집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예술은 항상 하나의 부산물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목젹을 수행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이라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324)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것이다. 참된 예술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 오늘날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치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길은 없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지금까지 읽은 책들과 감상했던 작품들의 예술사적, 사회적 위치를 돌이켜보게 한다. 지표와 좌표를 그려보게 한다. 떠나온 세계, 혹은 잊어버리고 있던 그리운 세계를 되돌아보게 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해하지도 못한 채 들춰보던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 그리고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접어야만 했던 책들 …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평했던 황지우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젊은 시절 나는 이 책에 가득 실린 잘 익은 포도송이를 따먹으면서 비로소 예술에 도취한 눈을 얻었다. 적어도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 하는 예술사적 지리감각을 얻었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예술에 대한 인문주의적 교양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나 예술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나 그것의 원근법적인 인식을 제공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예술 작품이 단지 예술가 개인의 창작물이 아님을, 그가 살던 사회와 환경을 고려해야 함을 다시 깨달았다. 하버드대 마음/뇌/행동 연구소의 소장이자 과학사가 앤 해링턴(Anne Harrington)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 해면동물과 같다. 해면동물은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 즉 바닷물을 흠뻑 흡수한다. 해면동물의 생리적인 면은 그런 환경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해면동물의 생리와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을 별도로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바닷물은 해면동물의 내부적인 작용의 일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교수 제럴드 잘트먼의 말처럼 우리는, 또한 예술가는 "생물학적 세계와 무관한 사회적 환경에서 굴러다니는 생물학적 알사탕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회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돈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경제적 요인의 영향을 받으며, 예술 감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중심이 서양, 특히 유럽 중심의 예술사에 치우쳐 있고, 또 전체 이론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는 비판을 가할 수는 있겠지만, 서양 예술의 역사적, 사회적 지형도를 일목요연하게 그려낸 그의 섬세하고 통찰력있는 안목과 오랜 망명 생활로 다져졌을,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그의 균형 감각을 폄하하긴 쉽지 않으리라.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영화의 시대'를 읽으면서 느꼈던 지적 모험의 미세한 떨림과 예술사의 끝 너머, 구름 저 편을 보려 하는 저자의 치열한 열정이 주었던 간질간질하고 짜릿한 감동은 한동안 쉽게 잊기 힘들 듯 하다. 특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인적 관심사와 맞물려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내 마음을 흔들었던 그의 책 속의 몇 구절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정신적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부닥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이러한 개념의 애매한 사용으로, 그것은 또한 우리가 가장 흔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예술양식과 그때그때의 지배적인 사회형태 사이에 결국은 일종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이색적인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으며, 이런 대담한 유추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보려는 유혹만큼 큰 유혹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찌기 베이컨이 말했던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진리탐구에 치명적인 것으로, 그가 경고했던 우상에 이어 '애매성의 우상'(idola aequivocationis)이라 이름지어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학 1 中)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서서 더욱더 넓은 정신적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게다. 영화는 시간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발전을 또 한걸음 밀고 나갔다. 전에는 음악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던 경험을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끔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 아직 비어 있는 이 새로운 형식을 참다운 삶으로 가득 채워줄 예술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학 4 中)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것이다. 참된 예술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 오늘날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길은 없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학 4 中)

이 책을 읽는 동안 미셸 투르니에의 재미있는 글을 만났다. 다음은 '짧은 글 긴 침묵"이란 그의 산문집 중 한 구절이다.

"사진기의 매력은 대부분 렌즈라는 동그란 구멍에 섬세미묘하고 살아 있는 정교함을 갖춘 하나의 기관을 추가시켜주는 조리개 장치의 덕을 보고 있다. 그것은 중심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고 가까워지게 할 수도 있는 금속판들로 된 꽃잎들로 렌즈의 사용면적을 넓히고 좁힌다. … 조리개를 닫으면 암실에 들어가는 빛의 양이 감소하지만 반면에 화상의 깊이는 깊어진다는 사실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반대로 조리개의 직경이 커지면 밝기는 커지지만 깊이는 줄어든다.

사실 깊이와 밝기가 반비례하고, 한쪽을 가지려면 다른 한쪽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딜레마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정신적 유형 중 어느 한쪽에 속한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밝기를 택하든가 반대로 어둑어둑한 깊이를 택하든가 한다."

조리개와 정신적 유형을 연결시킨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예술사에 대한 글을 쓴다면 이렇게 우리 몸의 감각, 특히 시각 또는 카메라의 조리개와 연결시켜 본 예술사는 어떨까?

가령 고전 작품이 개인이나 특정 주제에 초점이 맞춰진 열린 조리개의 세계였다면, 현대에 오며 점차 더 조리개가 조여져 선명한 풍경이 되고, 그러다 더 이상 조리개를 조일 수 없게 되자, 갑자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휙 돌려버린 듯한, 순간의 인상을 담는 흐릿한 풍경을 담아 내기도 하고,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세계, 혹은 그도 모자라 꿈같은 풍경을 담아내는 만화경 같은 다면의 거울이나 다중 초점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계를 현대 예술과 연결시켜 해석해본다면...


IP *.60.237.5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