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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7일 02시 14분 등록


금빛 기쁨의 기억

강영희 저, 일빛


1. 저자에 대하여

<길><사회평론> 등의 잡지를 통해 프리랜서 인터뷰어로 활동해왔으며, 94년『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화비평서를 통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준 바 있는 문화평론가.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1994)]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난다(1998)]가 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7년 전부터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한동안 무위도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비롯해서,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대만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에 대한 잡문을 써온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이다.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15) 우리는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제로섬(zero-sum) 게임과도 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세계인의 파이가 커질수록 한국인의 파이는 줄어든다.

(22)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문물에 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한 고전인이었던 것이다.(김용옥, ‘도올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 ‘석도화론’)

(27) 그(백남준)에게 있어 전통이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이다.

(28)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32)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이 ‘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41)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별다른 욕망이나 반성도 없이,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한순간에 변화를 맞이한다. 이것은 ‘기차가 있는 풍경’ 속에 존재함으로써, 근대문명의 총아인 기차의 속도감에 정서적으로 기대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기차가 있는 풍경’이란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 속에서 근대화를 향해 강박적으로 내몰리는 조선사람의 조급함을 상징하는 기호다.

(42)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47)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찰나(刹那)인 동시에,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永劫)이다.

(49)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

(57) 피카소에 의해 간택된 아프리카의 민예는 아프리카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카소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점,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조선이 민에가 그것의 발견자인 일본인의 놀라운 직관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듯이 말이다.

(60) 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새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같은 근대 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불렀다.

(61) 서양은 어디까지나 행위자(actor)이고 동양은 수동적인 반응자(reactor)이다. 서양은 동양의 행동의 모든 측면에 관하여 관찰자이고, 재판관이며, 배심원이다.(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73) 왕궁의 뜨락에 깔린 박석(薄石)이 반듯반듯한 전돌이 아니라 삐뚤삐뚤한 화강암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82)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인욕(人慾)의 삶에는 반드시 쓸쓸함의 정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엔카의 애상이나 벚꽃의 허무로 대표되는 일본적 감상주의의 본질이다.

(85) 순종과 은총의 함수관계 속에서 은총을 댓가로 순종을 강요당하는 거세된 존재인 일본적 인간상이 그들의 마음에 달콤한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92) ‘선의 비밀’을 풀지 못하면 ‘조선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야나기의 말은 진술이었다. 그러나 ‘선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편견을 버려야 했다.

(93) 그들(한국)의 미의식은 주제가 정지태에 있지 않고 힘찬 운동 계열에 있다는 것, 자웅이 합체 되고 음양이 하나 되어, 마치 태초에 내딛는 첫발가국과도 같이 고도로 응축된 힘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 이같은 미의식으 특성은 비단 사신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옥의 지붕곡선이나 의복의 선, 도자기의 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것들은 근엄하게 팔장을 낀 듯한 정지태에서 벗어나, 살아숨쉬며 꿈틀거리며 심지어는 슬쩍 말까지 걸어오는 듯한 움직임의 기미를 드러낸다.

(113) 조선의 둥근 달항아리는, 그(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처럼 한국의 미가 타력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빙그레 곰삭은 웃음으로 전해준다. 그것은 철없는 아이의 천진함이 아니라 철없는 아아와도 같은 경지에 올라선 대가(大家)의 원숙함에 비유된다.

(124)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깍아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자닌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127) 아름다움에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잎 지는 자연. 두 볼을 발그스레 물들이고 웃음 짓는 어린아이, 고혹적인 여인의 자태 위에 신비스런 보살의 모습이 겹친 석굴암 관음보살입상. 마음을 황홀하게 들어올리는 천상의 음악을 들려주는 봉덕사 신종의 비천상. 이쯤 되면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이 덧붙이는 것이 도리어 객쩍은 일이다.

(127-128)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화두를 짐지고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취향을 손에 쥐고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누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저마다의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남의 취향이 아닌 나의 취향을 통해 그곳에 도달한다. 서구인은 서구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황금비라는 취향을 만들어냈고, 한국인은 한국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다른 이름의 취향을 만들어냈다.

(130) 그러면, 아름답다는 말 그 자체는 무슨 뜻인가. 이 어원을 캐 보는 것은 한국적 미의식의 구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아름다움이란 말의 고어원형(古語原形)은 ‘아다옴’이다. ... 이 아다옴의 아은 ‘사(私)’의 고훈(古訓)이다. .... 아다옴의 다옴은 답(如)이니 꽃답다, 사나이답다 등의 현행어에 그대로 살아 있는 말로서 같다는 뜻의 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원의는 ‘私好’의 뜻으로 제 마음과 같다.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 된다.(조지훈, ‘멋의 연구’

(131) 진 • 선 • 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정신미(精神美)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138) 바위 속에서 부처님의 얼굴을 찾아낸 그이들은 깍아지른 바위 앞에 옹색하게 버티고 서서, 바위들 가운데 제일 단단하다는 화강암을 조심스럽게 깎아 내려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처님들은 저토록 넉넉한 웃음을 머금고 계시다.

(145) “뜯어 보믄 잘 못 생겨서 잘 생긴 것도 있어라우”라는 도공의 말이 여기에 들어 맞는다. ‘잘 생긴 것’은 형(形)이요 ‘잘 못 생긴 것’은 상(象)이다.

(153) 상(象)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生氣)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165)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175) 서글픔일랑 진즉에 통과하여 저만치 흥에 겨운 얼굴, 해학과 신명의 가락 위에 얹어 놓은 자화상.

(179) 사람은 누구나, 그리고 민족은 어느 민족이나 각자 나름의 한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문제는 각자가 간직한 바 자기 몫의 한을 어떻게 초극하느냐 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 한국인은 한을 삭이면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그 한을 즐기면서 멋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천이두 『한의 구조 연구』)

(185)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한영우, ‘우리 옛 지도와 그 아름다움’)

(189) 지도를 그릴 때에도 땅이 살아 있다고 보고 생명체적 요소를 강조해서 그렸고, 산과 강은 뼈와 혈관으로 이해하여 맥을 강조해서 그렸다.

(197) 한국인에게 풍경이란 자연적인 것인 동시에 인문적인 것이다. 인문적인 예찬(禮讚)이 덧붙고 나서야 비로소 자연과 인간은 하나가 되어, ‘풍경’으로 완성된다.

(198)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만의 경관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경관의 일부가 되어 이루어지는 경관체험이 보다 인상적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공간취향 또는 공간적인 자의식을 얻는다.

(202) 색상의 문제뿐 아니라 색배열 또는 색구성의 문제 역시 색 취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색이란 사실상 어떤 풍경과 관련된 시각 이미지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색배열 또는 색구성의 문제가 색상의 문제보다 중요할는지도 모른다.

(210) 여백(餘白)은 빈공간으로 나타나지만, 동양화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양화에 있어서 공간은 문자 그대로 빈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그들은 그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빈틈없이 그려 넣는다. 그러나 동양화에 있어서 공간은 그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비가시적인 풍요로움으로부터 실체인 모든 것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기도 한다. ... 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박용숙, ‘한국미술의 해학정신’)

(219)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처럼 일면적이며 배제적인 성격을 지닌 이데올로기의 한 자락을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일부로 삼아서는 안 된다.

(226)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불행한 근대사와 함께 찾아온 기억의 상실이 그러했듯이, 소망의 이십일 세기와 함께 찾아 올 기억의 회복 역시 혁명적인 난장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문화와 예술의 몫이 아니라 일상과 취향의 몫이 될 것이며, 일상과 취향의 혁명이 문화와 예술의 변화로 이어지는 한 판의 반전으로 전개될 것이다.

(231)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끌리며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취향은 갈짓자의 것이어서, 옳고 그른 잣재가 있는 것도 아니며 변덕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231-232)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 개성 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236)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46) 조선 선비의 탈속적인 자의식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자의식을 해소시킨 것이 아니라, 탈속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되 그 안에서 속세의 인간을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게 가다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62)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 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도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271) '남의 유행'을 참고로 해서 '토속적인 자기'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이랄까? 아니면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본' 것이랄까. 이것이 바로 김정희의 창작방법론으로 거론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올바른 해석이다.

(277) 새로운 전통의 창조란 언제나 개인의 개성이 집단의 개성을 뛰어넘고 이것이 다시 집단의 새로운 개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78) 흔히 두 개의 길이 있다고들 한다. 하나는 한국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인의 길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의 물음은 애당초 잘못된 것이라고. 백남준과 겸재가 그랬으며 추사도 그랬듯이,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을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으로 여겼으며, 이같은 회통(會通)적인 사고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3. 내가 저자라면

무엇보다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한 저자의 ‘물밑 작업’에 박수를 보낸다. 책 뒷부분의 참고도서의 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삽화나 글에서 저자의 발로 뛴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몇번이고 답사했음을 알 수 있다.

디테일의 승리도 눈에 띈다. 책 곳곳에 배열된 그림과 문화재 등의 사진이 더해져 책의 맛이 좋다. 국문학과 출신답게 어휘, 단어 사용의 폭넓음에 혀를 내두른다. 책 구석구석에 아름다운 단어들을 많이 접할 수 있어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역시, 나는 아직 ‘멋’을 모른다는 것이다. 수많은 삽화들 중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작가의 ‘글’이 보태져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 – p. 49

작가의 표현이 좋다. 우리는 식민사관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거부하는 천륜을 어기는 짓을 했다. 또한 그 반작용으로 우리 아버지만이 최고라고 생각했거나 아버지의 정신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 또한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의 편향을 주의하며 균형을 잘 잡아갈 때 우리는 세계사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소득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 뒷심이 부족하다. 서문을 빼고(서문은 너무 힘을 주었다), 1장부터 쏟아낸 문제제기와 한단계 한단계 풀어나가는 능력은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힘을 잃는다. 사부 표현대로 “이 책은 결국 본인의 예언대로 잡문에 그치고 말았다.”

예술 분야 중에서 ‘소리(음악)’가 빠졌다. 우리의 음악 속에서 한국인의 미의식을 끌어내는 작업이 없다. 물론 소리는 글이나 사진으로 표현해 내기에 여러움을 알고 있으나 그 느낌을 충분히 적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 제목도 약간 어색하다. ‘금빛 기쁨의 기억’ 이라는 제목과 ‘한국인의 미의식’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아마도 저자의 어린 시절 서린동에서의 기억이 조선(朝鮮)에 대한 기억과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의 기쁨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좋긴 하나 보편성이 떨어진다. 저자 고유의 기억과 조선의 기억을 아우르는 멋진 제목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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