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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10일 12시 25분 등록
1. 프롤로그

우리들 스스로 우리의 멋을 알아볼 수 없는 현실을 볼 때 문득 라파이유 박사의 간인에 대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문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창조되고 발전해가지만 변화의 속도는 더디다. 문화는 여러 세대 동안 의미 있는 변화를 겪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가 정말로 변화할 때, 그 변화는 우리의 뇌처럼 강력한 각인 장치를 통해 일어난다. 어쩌면 일본 식민지 시대에 교묘한 수단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처럼 5천년의 장고한 역사도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던져버린 채 눈앞에 나와 있는 문제만 고민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경제나 영화, 오락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각자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한국인에 대한 자화상과 미의식은 우리 스스로가 찾지 못하면 금새 없어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눈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우리의 미의식에 대한 저자의 냉철한 논리와 따끔한 일침이 돋보였다.

우선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에 대한 미의식이 가슴 저리에 아파왔다. 정작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헤 벌리며 웃는 꼴이 눈에 아른거렸다. 훈장까지 주어가며 칭찬했던 그러한 일이 아프기만 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편협한 생각과 군국주의 망령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추악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글이나 평론이 아닌 실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멋이라는 서산에 있는 삼존마애석불을 다녀와서 그런 실망감, 현재로서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우리의 미를 다시 찾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미를 좀더 쉽게 다가가고 오래토록 보존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아무 관리인도 없이 방치되어 사리지는 삼존마애석불의 미소가 처량하기만 하였다.

아직도 청산되지 못하는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뇌리 속에 각인된 망령의 정체를 깨달은 것도 큰 수확이다. 백의민족에 대한 짧은 생각과 새로운 의미의 소색에 대한 이야기, 발효와 곰삭은 맛에 대한 음식의 멋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 가장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상극과 상생의 묘미였다. 목(木)이 뚫고 나오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水生木의 상생의 힘이고, 또 하는 金克木의 상극의 힘입니다. 봄에는 줄가기 뻗쳐 오를 때 금이 적당히 억제하여 목의 생명력이 흩어지지 않고 한 줄기로 힘차게 뻗어 오르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상극은 나를 죽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련을 주어 나를 다듬어 주는 고마운 힘입니다.(어윤형, 음양오행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상극과 상생의 순환 속에서 서로 공존과 창조의 길에 대한 저자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우리는 이 같은 공존을 혹은 옛것 쪽으로 되돌리거나 혹은 새것 쪽으로 밀어붙이기 보다는 그것들을 하나로 버무려 내는 모순적인 공존을 통해 창조의 길로 나아가는 유연하고도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새것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남은 옛 것의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278p)


2. 작가에 대하여

저자 강영희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9년에 서울대학교 입학 동양사학과를 전공하였으며, 1986년에 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고, 1990년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원 졸업 후에 1994년에 사회평론지인 길의 편집위원, EBS 문학기행 인터뷰어, CTN 문화산책, EBS 교양강좌, 방송대학 TV 우리시대 고전이야기 등 문화평론 및 방송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때 방송과 평론을 기반으로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풀빛미디어,1998.4)와, 『강영희의 문화읽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월간 사회평론 길,1994.9),그리고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풀빛미디어,1998.4) 세권의 책을 내고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그의 평론 중에서 문화에 대한 글에서 그가 추구하는 문화평론의 길을 엿볼 수 있었다.

갑골문에 따르면 문이라는 글자는 가슴에 문신을 새겨 넣은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따라서 문이란 작게는 문양(文樣)에서 크게는 인간이 만들어낸 삶의 무늬(양식) 전반, 즉 예악, 제도, 교육 같은 문물의 조화로움을 가리킨다. 그리고 화(化)란 본래 ‘요술 부리다’ 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형태만 변하는 다채로운 모양새를 말한다. 요약마한 문화란 인간이 만들어낸 삶의 무늬가 조화로운 문물을 통해 구현되고, 그것이 다채로운 빛깔과 모양새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문이 오늘의 문화에 가까운 인문적인 뜻을 담고 있다면 화란 오늘의 예술에 가까운 미적인 뜻을 담고 있다고도 하겠다. 이 같은 삶의 무늬의 다채로움이란 오랜 세월 덧쌓여 이룩되므로, 문화의 본 뜻 속에는 역사적 ‘전통’의 개념이 깊숙이 들어 앉아 있다. 따라서 문화의 창조란 전통의 문채가 당대의 삶속에서 활력 있게 숨 쉬고 있거나, 전통의 문채를 당대의 감수성으로 체화해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최초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평론/평론의 본질을 말하다. 중에서 인용)

일종의 깨달음과 같은 섬광, 온통 뒤죽박죽으로 흩어져있던 것을 다시 추슬러 한국의 미를 다시 찾았던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중간 중간에 나오는 책들의 흔적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음양오행에서부터 한국인의 멋,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론에 대한 논리 정연한 일침 들, 식민사관의 뿌리 깊은 금제를 시원하게 풀 수 있는 힘, 어쩌면 이것도 한국의 미에서 본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바로 한국인의 미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금빛기쁨의 기억』이 바로 그를 떠나게 했던 답이 아닐까. 문화평론의 세계에서 번번히 부딪히는 식민사관의 잔재들을 청산하는 커다란 방패와 창을 만든 느낌이었다. 결국 문화의 창조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보게 되었다.

베니스의 앞바다 사진 밑에 나와 있는 말이다.
“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타마리아 델타 살루테에서 본 바다, 문화창조란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역도적이고 개방적인 미지(未知)의 유토피아를 향해 걸어나가는 자들의 것임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 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지은이의 글>

(5) 뭔가를 기억하려고 무지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지워진 기억의 저편에서 아무것도 건져 올리지 못해 채 빈손으로 남았던 안타까움이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안타까움이 부끄러움으로 거쳐 기쁨으로 거듭난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 서린동에 두고 온 꿈과 조선에 두고 온 꿈을 한꺼번에 되찾았고, 마치 부절이라도 맞추듯이 양자가 하나임을 발견하는 기쁨까지 받아 안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중얼거린다. 사랑아. 너로 하여 나는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

(6) 공적인 담론과 사적인 취향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 둘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회통되어야 하마, 창조적 모순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공자님이 그랬듯이 성찰 또는 취향을 가능하게 하는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 성찰 또는 취향의 여백을 거느리지 않은 진리란, 도그마요 사기요 심지어는 삿대질로 끝나버릴수도 있다는 것

<제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6) 한국인은 자신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모순된 상황으로 몰렸다. 한 쪽에는 척사와 쇄국에서 민족주의와 주체사상에 이르는 구호가, 다른 한쪽에는 개화에서 세계화에 이르는 구호가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인에게는 자기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자화상과 자기를 바꾸려는 자화상이 공존하게 되었다.

(18) 진실을 말하면 겸재는 동북아시아의 문화권 전체를 시야 속에 확보한 세계인인 동시에 진경산수의 아름다움을 시야의 중심에 놓은 한국인 이였고, 겸재의 진경산수는 ‘밖으로 향한 안테나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되돌아본’ 결과 탄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 토속성과 세계성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한국인인 나에게 주어진 길인 반면 ‘남을 흉내 내는 것’은 세계인 백남준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25) 이것들은 세계인에 대한 한국인의 승리도 아니고,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승리도 아니며, 그 같은 제로섬 게임을 벗어나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의 열매다.

(28)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간의 엔트로피 법칙 또는 불가역성은 덧없음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진리를 탄생시킨 우주의 원죄다.

(32) 반복하자면, ‘기억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37) 하지만 오늘의 만남은 어제의 방문과 별개의 것이다. 오늘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제의 유물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시대착오적 딜레탕띠즘 대신 ‘기억속이 심상’에 새로운 양식을 덧입히는 동시대적인 다어너미즘과 만난다. 바로 이 언저리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전통과 마주친다.

(38)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근대화가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미로 서구화에 일본화를 겹쳐놓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 개화, 과학, 합리, 이성과 동일시되기도 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는 데 필요한 성찰의 여백은 실종된 바면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급급한 조급함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42) 역사의 시간과 숨 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이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이 같은 조급함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낳은 혁명의 열기로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수백 수천만 명을 남태평양과 중국 대륙에 묻는가 하면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국으로 몰아간 제국주의적 팽창의 광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7) 시간과의 경쟁을 위해 기차가 있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근대 한국의 내면은 어떤 것이었을까. 기차가 있는 풍경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달리는 방향을 향한 기차의 속도감을 온 몸으로 느낀다. 이 같은 사정은 기차에 올라타고 난 다음에 훨씬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기차의 방향에 따라 존재의 방향이 결정되며 기차의 속도에 따라 존재의 속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차가 있는 풍경속 근대 한국인의 내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그것은 조급함이다.

(47)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찰나인 동시에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이다.

(48)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의 통제력이 현자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

(50) 지난 세기의 한국인의 내면은, 이처럼 습득해야할 낯선 취향과 청산해야할 낯익은 취향의 쌍들의 들고남으로 온통 분주했다. 여기서 세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형식의 후예인 우리 역시 자신의 취향을 혐오하고 타인의 취향을 선망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50) 자신의 취향 위에 타인의 취향을 겹쳐놓은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조적 모순이다. 문제는 타인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을 양자택일의 제로섬 게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서구화로서의 근대화의 비극에 있다.

(51) 이것이 바로 자신의 취향과 타이의 취향이라는 모순을 창조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결실을 수확하는 만고불변의 공식이 아니겠는가.


<제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59) 하지만 한국인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은 일본인의 미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예술을 소중하게 여긴 일본인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 나머지, 그의 ‘사랑’뒤에 숨은 ‘진실’도 알아보지 않은 채 그의 한국 예술론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한국인의 태도는 달라져야 한다. ‘사랑과 진실’이라는 연속극 제목처럼, 중요한 것은 한국예술에 대한 사랑 자체가 아니라 그 같은 사랑 뒤에 숨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63) 멍청하고 순박한 인간 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흙 묻고 지푸라기 묻은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의 산물로서 제국 일본에 의해 조작된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자화상이다. 인격을 상실하고, ‘사물적인 격’을 지닌 존재에게 미의식 대신 무의식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바로 야나기의 조선 예술론의 핵심이다.

(64) 이제 한국인은 일본인 야나기가 한국 예술에 쏟은 사랑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그가 이 같은 사랑을 발판으로 삼아 돌연 감상자에서 창작자의 자리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한국의 도자기는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의 아름다움은일본인의 안목이라는 것이다.

(71) 한국 예술은 일본인의 미의식에 의해서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한국 예술에는 자율적인 가치의 척도가 주어지지 않으며, 타율적인 척도로나마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된 미의식의 위계질서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같은 주장의 언저리에서 한국 예술에 대한 따뜻한 눈길 너머에 존재하는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치는 것은 필연적이다.

(72) 이것은 제국의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인의 사정을 알아보고 보호해준다는 저 흉악한 제국주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그는 가장 낮은 증에서 가장 높은 질을 찾은 이 같은 타력과 자력의 관계가 역사상 유례가 없다는 주장까지 덧붙인다.

(76) 일본의 국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질서에 동참하는 ‘세계인’이기를 거부하고 ‘일본인’이기만을 고집한, 이를테면 동북아시아 세계의 왕따를 자처한 일본의 독자적인 사상이다.

(78) 따라서 국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일본인이 조선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예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거기서 ‘일본적인 것’을 발견했을 경우에 한정된다. 야나기가 바로 그런 경우다. 야나기가 한국 예술을 사랑한 것은 거기서 중국적인 작위를 따르는 도학의 삶 대신 일본적인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욕의 삶을 중시하는 국학의 이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80) 결국 야나기가 사랑한 것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창조된 한국 도자기가 아니라, 일본인의 미의식에 따라 향유된 또 하나의 한국 도자기였다.

(90) 국학적인 자연주의에 토대를 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씌운 ‘무작위의 미’ 나 ‘비애의 미’와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도리어 일본인의 미의식이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로 되돌려줘야 한다.

(94) 제국의 지식인 야나기는 제국과 식민지의 위계질서에 따라 한 단계 높은 자리에서 식민지의 예술을 내려 보았다. 그는 한국인의 미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한국 예술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한국 예술의 ‘선의 아름다움’에서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의 정서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후광 앞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안경을 쓰고 있던 일본 청년 야나기의 눈에 비친 환상의 실체였다.

(94)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98) 여기서 우리는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옥의 지붕곡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진 것은 장마철의 집중호우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빗물을 빨리 배수시키기 위한 과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100) 그들의 미의식은 주제가정태에 있지 않고, 힘찬 운동계열에 있다는 것. 자웅이 합체되고 음양이 하나 되어, 마치 태초에 내딛는 첫발자국과도 같이 고도로 응축된 힘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 이 같은 미의식의 특성은 비단 사신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옥의 지붕곡선이나 의복의 선, 도자기의 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것은 근엄하게 팔짱을 낀 듯 한 정지태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며 심지어는 슬쩍 말까지 걸어오는 듯한 움직임의 기미를 드러낸다.

(102) 특히 사대와 사대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특히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일환이었던 조선의 사대란 적극적인 세계화 정책의 일환이었을 따름이지 소극적인 사대주의적 근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103) 하지만 일본인의 자의식을 잣대로 한국사를 해석할 까닭은 없다. ‘작은 것을 보살피고 큰 것을 섬기는’ 자소사대(字小事大)의 준말인 사대는, 동북아 세계질서의 중심인 중국과 중국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자율적 질서의 메커니즘이었다. 이 같은 사대의 질서 속에 비애의 정서 따위가 끼여들 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105)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가 발견된다. 한국인의 미의식 속에서는 야나기의 말맞다나 일본적인 기교에 해당하는 ‘꼼꼼함’ 무엇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분방한’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흔히 격(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 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릿속의 점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 거리’라고나 할까

(107)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바꿔 말하면 격이 맞는 변격, 변격이면서도 격에 제대로 맞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113) 그러나 조선의 달 항아리는 그의 말처럼 한국의 미가 타력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빙그레 곰삭은 웃음으로 전해준다. 그것은 철없는 아이의 천진함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경지에 올라선 대가의 원숙함에 비유된다. 그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수양을 비롯한 피나는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며, 다시 그 같은 경지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을 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경지이다.

(118) 야나기가 한국 예술에서 민예성을 발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의 눈으로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로 정신의 격을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자 창작이다. 난쟁이의 잣대로 거인의 키를 잰 것이라고 할까. 그것은 한국 예술의 상의 미의식을 일본인의 형의 미의식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다. 본래 상과 형은 한데 어우러져 사물의 형상을 이루되, 근본적으로 양자는 서로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120) 난행을 무릅쓰고 자력의 일문을 빠져나가는 일본인의 근대적 미의식과 자유니 의식이니 하는 것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 채 타력의 성불에만 의존하는 한국인의 전근대적 무의식의 선명한 대비, 그 같은 선명함으로 한층 도드라지게 만들어준 근대의 눈부신 태양 앞에서 아득히 자신을 놓아 버린 사람들, 야나기가 마련해준 조선 예술의 천진한 민예성, 조선 도공의 순박한 무지 따위로 자신의 누추함을 가까스로 가리운 근대 한국인의 슬픈 자화상, 이제는 이 같은 식민의 담론과 결별할 때가 되었다.

(124) 우리는 그의 글 속에 들어있는 경애의 태도에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폄하의 태도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근대적인 우월감을 배경으로 해서 조선 예술을 ‘잡기적인 민예’로 깎아 내린 폄하의 태도는 물론이요. 조선 예술을 일본 국학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실현한 ‘예술적인 명물’로 높여 올린 경애의 태도 모두 조선 예술의 참 얼굴과는 무관하다.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을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깎아 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 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127) 아름다움에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129)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된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된다는 것. 이 같은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가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장면이다. 신은 창조의 막바지인 엿새 날에 사람을 만들어냄으로써 창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이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는 것이다.

(129)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다옴’의 본 뜻이 사호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취향 아닌가.

(130) 저다움의 취향이 성찰의 강을 거슬러 창조의 피안으로 올라간다는 것, 이것은 취향이 단지 미와 관련된 것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성찰의 강에서 피어나는 안개에는 미뿐 아니라 진과 선도 한데 섞여있다. 그리하여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삶의 지혜를 대표하는 미의식은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대표한다.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멋’이라는 이름의 미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132)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형과 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거시 사물의 형상이다.

(139) 따라서 취향으로서의 한국인의 미의식에는 음양오행사상으로 체계화된, 상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사상 담겨있다. 특히 상이란 형상에서부터 심사에 까지 걸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속에는 미의 문제뿐만 아니라 진과 선의 문제까지 포함된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미의식을 돌아보는 것은 한국인의 가치관 전반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142) 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된, 그로부터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의 미학이 아닌 원경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과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하기보다 아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 있게 보인다면 그 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146) 비로소 우리는 일그러진 달 항아리와 휘어진 대들보를 향해 ‘형의 어눌함’의 후광에 해당하는 ‘상의 세련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 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 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성이나 비 균제성의 본질이다.

(152) 깃과 옷고름을 비대칭으로 배치하여 균형을 깨는 듯 하면서도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한복 저고리의 구조적 아름다움도 이 같은 비균제성의 구체적인 예다. 의복의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무의식의 산물일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같은 비 균제성이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 생겨난 미의식의 산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162) 이 처럼 발효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 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열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163) 따라서 우리는 먼저 발효 맛의 취향과 화해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되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허기에 따른 마구잡이식 뷔페에서 벗어나 ‘기억속의 심상’과 알뜰하게 손잡은 입맛을 살리는 정갈한 밥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호사스런 취미와 구별되는 까다로운 취향이 옹골지게 자리잡아갈 때에만,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생기발랄하며 웅숭깊은 것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164) 상생이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서로 상자와 살릴 생자가 합쳐져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뜻을 나타내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서로 돕고 이해하며 서로 생각해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165) 상극 역시 만물의 생성변화에 필요악인 까닭에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상극관계를 애당초 부정하고 회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166) 발효의 원리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그것이 부패와 관련된 미생물의 활동을 억누르고 발효와 관련된 효모균의 활동을 북돋운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금을 첨가하여 음식물을 부패시키는 균들을 죽이고 소금에 견디는 유익한 균들만 활동하도록 하는 식이다. 따라서 발효 원리의 핵심은 부패균을 죽이는 상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발효균을 살리는 상생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169) 비보의 원리란 이처럼 상극적인 것을 향해 대립과 투쟁을 전개하는 대신 허전한 곳을 메우고 험악한 곳을 달래는 보완과 화해를 통해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상생적인 조화로움을 통해서만 생기를 얻을 수 있고, 상극적인 부조화를 통해서는 사기에 노출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176) 가동적인 정지태, 박수근의 기름장수, 김기창의 아악처럼 움직이고 있으되 멈춰 있으며, 멈춰있으되 움직이고 있는 것. 그런데 바로 그 멈춰있음 때문에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 이것은 웃고 있으되 울고 있으며, 그 울음 때문에 웃음 이상의 웃음을 머금게 하는 한국인의 미소와도 통한다. 이 같은 멈춤의 그늘, 울음의 그늘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 몸으로 부딪혀온 ‘상극적인 것’의 살아 있는 과거이며, 이 같은 그늘은 슬며시 드리운 웃음 이상의 웃음, 움직임 이상의 움직임은 한국인이 오랜 세월 온 마음으로 삭혀온 ‘상생적인 것’의 살아있는 미래다.

(17) 한국인의 자화상을 묘사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한과 울음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자화상에서는 울음만이 아니라 웃음도 묻어난다. 결국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180)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적인 정서의 한복판에 한(恨)이 자리 잡고 있다는 식의 처량하고 자기연민으로 넘치는 주장은 그만두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의 정서 역시 한국적인 정서의 일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서 과거의 상처를 미래의 청사진 위에 들이대는 어리석은 주장을 계속할 까닭이 없다. 다만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상극적인 것의 늪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계하기 위해, 지난 세기의 한에 대한 답론을 우리 역사책의 한 켠에 선명하게 기록해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186)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린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평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간적 취향이 발붙일 자리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190) 오늘의 우리는 어제 우리의 자리로서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가는 중이다.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의 경쟁’에 쫓겨 성찰의 자세를 내던진 지난 세기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하지만 한 세기 동안 공론적인 비판의 장에서 배제되었던 그것을 이제 와서 고스란히 되살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우리들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겨를 없이 식민지가 되어 버렸고, 해방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길로 달려 나갔다. 일제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전통문화와 사상을 폄하하였고, 자본주의는 그것에 치명타를 입혔으나, 그 과정을 통해 진지한 비판이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철저한 비판의 시기를 갖지 못하고, 그것을 완결하지 못하고 이제 다시 계승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비극이다. (양계초· 풍우란 외 지음,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편역자 서문)

(200) 공간 취향이라는 말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당신의 마음속에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과 무관한 동기에 따라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공간적 심상이 있다면 그 같은 공간적 심상으로부터 문화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통찰을 제공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적 취향이며 저 다음의 미의식의 교두보라고 말할 수 있다. 옛집이라는 것. 고향이라는 것. 낯익은 등산로,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는 ‘그때 그곳’이나 미지의 ‘어느 곳’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208) 따라서 한국인의 색 취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색채적 심상의 바탕색에 해당하는 소색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다양한 질감을 지닌 생기 넘치는 소색의 아름다움, 은은하고 투명하면서도 깊은 맛을 지닌, 미묘한 뉘앙스의 매력, 천연 그대로의 색을 간직한, 격있고 깊이 있는 아름다움, 이것은 태토의 종류에 따라 눈빛같은 설백이나 젖빛같은 유백, 잿빛이 도는 회백을 띠는 백자의 색이나 지백이라 불리는 한지의 색, 모시나 삼베, 옥양목이나 광목 같은 옷감의 색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뉘앙스를 지닌 것이다.

(216) 일본인 야나기 말고도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최현배 같은 몇몇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백의가 망국민의 비애를 상징한다고 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망국민의 비애를 한국인의 백의에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인데,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사에 숙명적인 사대주의나 낙인을 찍은 식민사관이야말로 이 같은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223)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어느새 친근한 벗 인양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는 백의민족의 표상을 향해 ‘백의민족이여 안녕, 그동안 겪어내야 했던 뼈아픈 이십세기여 안녕, 이십 세기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데올로기여 안녕. 역사의 갈피 속으로 영원한 안녕! 이라는 단호한 고별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231)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다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 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미의 절정이다. 수많은 풀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이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가진 것은 그것이 빛깔과 향기를 달리하는 수많은 생명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개성 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236)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 내는’ 데 몰두 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 내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45) 말하자면 그들(선비)들은 현실적인 실존과 이상적인 풍류를 양 어깨에 짊어진 채 현실적인 실존을 이상적 풍류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존재들이다. 이 같은 노력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존재의 에너지야말로 그들의 자화상에 해당하는 운룡의 주위에 해학적인 즐거움을 감돌게 한 원천이다.

(246) 이상을 통해 우리는 조선선비의 탈속적인 자의식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자의식을 해소시킨 것이 아니라, 탈속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되 그 안에서 속세의 인간을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게 가다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미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주위를 감도는 해학적인 즐거움이다. 속세를 넘어 탈속의 경지로 들어서는 존재의 역동성이 ‘가동적 정지태’의 미학 끄트머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해학적인 즐거움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258) 우리는 이 ‘어른 같은 아이’를 장욱진의 동심에서도 찾아볼 수 잇거니와, 그의 동심에는 적요와 명랑, 쓸쓸함과 즐거움이 함께 한다. 쓸쓸함과 즐거움이 함께 하다는 것. 이것은 자신들의 몫인 인간의 문화를 천지인 전체의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기 위한 비보물로 간주한 한국인이 어느 순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적인 자의식 자체를 놓쳐 버렸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저만치 탈속의 풍류를 지향한 현세의 실존에는 어딘가 허무의 느낌이 덧붙기도 했으며, 동시에 어딘가 별유천지 비인간의 느낌이 묻어나기도 했다.

(268) 기쁨, 산다는 것의 기쁨, 육체의 기쁨,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 살아있는 우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 이것이 바로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로 승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한국적인 감성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윤 개인의 예외적인 성취가 아니라 민족예술운동의 본질에 숨겨진 창조적 에너지의 일부였던 것이다. 민족 예술운동의 본질에 숨겨진 창조적 에너지였을 것이다.

(278) 우리는 이 같은 공존을 혹은 옛것 쪽으로 되돌리거나 혹은 새것 쪽으로 밀어붙이기 보다는 그것들을 하나로 버무려 내는 모순적인 공존을 통해 창조의 길로 나아가는 유연하고도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새것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남은 옛 것의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4. 내가 저자라면

글을 읽는 내내 준엄한 호통에 후련함을 느꼈다. 식민사관에 의해 금제가 펑하고 풀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문화평론가의 자리에서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식민사관에 의해 점철된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야나기 무네요시의 깊은 쇠사슬을 끊고 나온 단호함과 준엄함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주제나 현상에 대한 냉철한 논리와 그것의 뿌리까지 보여주는 명쾌함이 좋았다. 현재 내가 화두로 삼고 있는 공무원이라는 것도 이렇게 세세하게 풀 수는 없을까. 두려움도 들고 희망도 보인다.

중간 중간 들어있는 친숙한 이미지와 방대한 인용문들 속에서도 전개의 흐름이 계속 이어졌다. 광범위한 주제이면서도 백남준, 정선, 추사 등의 짧은 일화로서 설명의 도구가 되었다. 자칫 이론적으로 지루하게 흐르는 이야기들이 저자의 경험과 인용한 책에서 쉽게 풀렸다.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재미였다.

특히 3부의 한국인의 미의식은 우리가 그동안 들어왔던 어렴풋한 느낌에 대한 사진 같은 명료함이 있었다. 음양오행에서 시작된 기본 원리에서부터 풍수, 음식, 예술, 의복 등 설명의 순서도 좋았고, 인용한 책들도 좋았다. 미의식에 대한 종합판 성격이 들었다. 또한 우수한 토속성을 가지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감도 들었다.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3부의 미의식에 대하여 4부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내일의 한국인은 어떠해야 하나? 문화적인 원대한 비전제시가 조금 약한 느낌이었다. 화통적인 사고로 대체되지만 이어령 교수님의 디지로그에서 말한 대로 디지털과 아나로그의 조합이라는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직도 사회저변에 깔려있는 조급함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될 문제이다. 먹고 사는 것이 아닌 즐기고 과시하는 자본주의 일면은 파멸과 추악함이 있을 것이다. 상생과 상극의 원리로 본다면 성장과 개발이라는 하나의 축으로는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다. 우리의 미의식이 쌓여있는 무한의 보고에서 새로운 형태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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