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8년 2월 1일 15시 25분 등록
갑자기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에 갖고 있는 시집들을 찾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이 있어 뽑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름 아닌 헤르만헤세(1877년-1962년)의 <정원 일의 즐거움>이란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언제 샀나 싶게 기억에서도 완전히 잊혀진 책인데,
한 페이지를 읽다가 어느덧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제 패턴입니다. 우연히 끼어들어온 어떤 것 때문에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일은 잠시 미뤄두는 것 말이죠.

어쨌든 이 책은 법정스님이 <걷기 예찬>,<할아버지의 기도>와 함께
감명깊게 읽었다며 일반에 추천한 책 3권에 속한 책입니다.
톨스토이나 소로우의 책과는 또 다른 헤세만의 냄새가 나는 자연에 대한 교과서라고 할까요.
사실 내가 읽었던 헤세 책이라고는<데미안>밖에는 당장 생각이 안나는데,
그의 냄새 운운하는 건 좀 건방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번역자의 손을 통해 전달되는
헤세만의 향기와 기운은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기 같은 글에, 평범하지 않은 생각과 깊이있는 통찰들이 담겨 있고
생성을 기다리는 설렘, 생명이 움트는 환희, 흙으로 돌아가는 소멸의 아름다움까지
자연과 생이 만나서 이루는 의미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어서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인생 후반기에 들어 집필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직접 정원을 가꾸며 수채화를 그리며 보낸
헤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헤세 스스로가 그린 멋진 수채화들이
이 책의 갈피 마다 많이 들어 있어 읽는 감동을 더해줍니다.

헤세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스위스의 한적한 시골에 은둔하며 정원을 가꾸는 일에 심취하였다고 합니다.

"헤세는 비인간적인 기계 문명에 반기를 든 작가이며 폭력적인 세상에 깊이 고뇌한 작가였다.
방랑과 뿌리내림,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고향에 대한 향수 사이의 상반되는 인력 속에서 살았고,
자연에서 삶의 근원을 발견하였다.
헤세에게 정원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구체적인 생활공간이었으며,
혼란스럽고 고통에 찬 세계에서 물러나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장소였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꿈의 집>에서)이다.
이 책에 시인 헤세가 세운 나라가 있다. (출판사 리뷰)

아직 이 책을 다 끝낸 것은 아니나 여기 저기 파편 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글들이 있어 나름대로 편집해 봅니다.

주머니칼

어제 주머니 칼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 일로 인해 내가 열중하는 철학이나 운명에 대한 자세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깨닫는다.
..이 사소한 분실로 나는 엄청나게 우울해지고 말았다.
잃어버리 주머니 칼은 지금까지 살면서 갖가지 변화를 겪어오는 중에도 끝까지 지니고 있던
몇 안되는 물건 중의 하나였다.
...그 칼은 오래도록 땅을 파고 나무를 심고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고 과일을 수확하는 일을 하는 동안
나와 함께 있었다.
수천 번도 넘게 주머니에 넣었다 꺼내며 나는 그 칼과 지냈다.
..전쟁이 나고 망명의 시간을 지내며 그 칼은 이제 쓸 일이 없게 되어버렸다...
가족과도 헤어지고 깊은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나의 삶과 야망, 나의 지식과 나의 자아가
천천히 송두리째 순수한 재로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훗날, 그 자아나 욕망, 허영과 인생의 온갖 혼탁한 마력이 또 다시 옭아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하나의 은신처를 이제 찾았다. ..고향을 만들고 소유하는 일이 나한테는 평생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 고향이 내 마음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이처럼 긴 여정 나와 함께 한 주머니칼이 없어진 것을 나는 못내 아쉬워한다.
그런 나의 모습은 영웅적인 일도 현명한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영웅도 현자도 되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을 위해서라면 내일도 시간이 있을테니까. (1924년)

처음 핀 꽃

시냇가에/붉은 실버들이 폈다 지고/이제는/주렁주렁 달린 노란 꽃들이/금빛 눈을 활짝 열었다
나를, 오래 전 순수를 잃은 나를/항금같던 인생의 아침이/그 추억이 뒤흔든다
말간 꽃이 나를 응시한다/꽃을 꺾으려다 나는/늙은 나는, 그냥 두고/집으로 돌아간다

고독하고 의연한 나무들

나무들은 나의 시선을 가장 끄는 강력한 설교자다. 나는 나무를 숭배한다.
아름답고 강인한 나무보다 더 성스럽고 더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나무의 나이테와 상처가 아문 자국에는 나무가 겪었던 온갖 투쟁과 고뇌,아픔,
갖가지 행복과 번영의 이야기들이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무들은 성스럽다.
나무에 귀 기울이고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삶의 근원적인 법칙을 배운다.

한그루의 나무는 말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생각이 숨겨져 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내 모습과 내 피부 밑에 흐르는 혈관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내 우듬지에 매달린 가장 작은 잎사귀가 벌이는 유희, 내 가지에 난 아주 작은 상처조차 유일한 것이다.
내 사명은 일회적인 것에서 영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

요즈음 답답한 더위에도 개의치 않고 자주 밖으로 나갔다.
이 아름다움이 얼마나 덧없고 그것이 얼마나 빨리 작별을 고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달콤한 성숙함은 얼마나 갑작스럽게 시들어 버리는가.
나는 늦여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냄새 맡고 싶어한다.
이 풍요로운 여름이 내 감각에 제공하는 모든 것을 맛보고 싶다.
내가 경멸하는 소유욕에 들떠, 늦여름의 영상을 이렇듯 격렬하게 잡아두고 싶어 괴로와하다니.
갑작스레 부지런을 떤다. 연필과 붓과 펜, 물감을 들고
화려하게 피었다 사라지는 이런 저런사물들의 풍요를 내 곁에 남기려 애쓴다.
시간이 지나면 세계가 한 때는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며 완벽한 모습을 띤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저녁 식사를 한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 앉아 빵과 과일을 먹는다.
..지금은 등의자에 앉아 있다.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쉬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저녁 무렵의 불그스레 빛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는데는 15분 정도가 걸린다.
..어둠 속 저 너머에 서 있는 산들이 홀연 섬뜩하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불을 켠다.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나직하게 날개짓을 하며 날아든다.
..나방의 날개에 감도는 적갈색과 자주색, 그리고 회색..거기에는 창조의 비밀이 새겨져 있다.
온갖 마법과 온갖 저주와 수천의 얼굴을 가지고서 그 비밀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반짝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꺼져 간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우리는 확실하게 붙잡을 수 없다.
스케치를 하고 생각에 잠기고, 글을 쓰는 일이 대단한 일이 못되듯이..(1930)

즐거운 정원

지난해의 죽음에서 양분을 얻어 소생하지 않는 여름은 없다.
모든 식물은 흙에서 자라 나올 때 그러했듯 역시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간다.
아주 이따금,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어느 한 순간,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유독 우리 인간만이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사물의 불멸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뿐인 인생인 양 자기 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1908)

오래된 나무를 슬퍼하며

혼자 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 대신에 작은 물건들과 사귀게 되었다.
산책을 나갈 때 들고 가는 지팡이, 우유를 마실 때 쓰는 찻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꽃병, 과일이 담긴 그릇,
재떨이, 녹색 갓을 쓴 책상 전등, 인도에서 가져온 청동으로 만든 작은 크리슈나 신상,
벽 위에 걸린 그림들이 나와 교제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대는 나의 작은 집 벽을 가득 채운 책들이다.
그러나 내 방에서 바라본 풍경들, 이 정원 테라스와 덤불, 그리고 나무들은 내가 앉아있는 방과
그 안에 있는 물건들 보다도 더 가깝게 내 삶에 속해 있다.
그들이야말로 내 진정한 친구들이며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이다.

내가 정원 위로 눈길을 보내면, 정원은 단지 황홀해하거나 혹은 무관심한 시선을 던지는 이방인을 보듯이
그렇게 나를 대하지 않는다. 정원은 나에게 무한히 많은 것들을 준다.
지난 수년 동안 밤낮으로, 매 시간마다 모든 계절과 모든 날씨 속에서 정원과 나는 친밀해졌다.
그곳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의 잎사귀들과 그들이 꽃피고 열매 맺는 모습은 물론,
생성하고 소멸해 가는 모든 과정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친구였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나무들 가운데 한 그루라도 잃어버린다면 나한테는 친구 한 사람을 잃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 중의 가장 아름다웠던 나무는 이제 거기 없다.
태풍에 쓰러져 없어진 나무는 유다의 나무라 불리는 서양밥태기나무다.
내가 이곳에 살게 된 것은 바로 그 나무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전쟁이 끝날 무렵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이곳에 올 때 나는 도피자의 심정이었다.
그때까지 내 삶은 전쟁으로 인해 죄초되고 말았다.
나는 이곳에서 일하고 생각에 잠기면서 파괴된 세계를 내 내면으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머물 곳을 찾아 이 집에 들렀을 때,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으나
여주인이 작은 베란다로 나를 인도한 그 순간, 나는 이곳에 살기로 결정했다.
돌연 내 발치에 펼쳐진 정원 한가운데 분홍빛으로 환하게 웃던 나무 한 그루.
그것이 바로 유다의 나무였다.
사랑하는 친구를 무덤에 묻고, 그의 관이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사라질 때에도
나는 죽음이 친구에게 위안이 되리라 믿었다.
그는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은 세상을 벗어나 위안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은 유다의 나무를 나는 그렇게 위로할 수가 없다.
그 나무의 거대한 시체가 정원 안에 누워 있다. (1927년)

정원에서 보낸 시간

그것(정원)은 우리를 열정과 충동의 사려깊은 주인이 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계도하고 세상을 가르치고,
이념으로부터 역사를 만들어내려는 그 열정, 저 격렬한 쾌락을 우리는 자제해야 한다.
지금 세상은 안타깝게도 이 고귀한 충동이 다른 모든 이들을 피와 폭력과 전쟁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세계가 거칠고 격렬한 충동에 지배되는 동안에도, 그러니 우리는 겸허해지자.
가능하면 세계가 질주하며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도 저 영혼의 고요함을 잊지 말자.
서둘러 세계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말자.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갈 것이다.

헨네트 남작부인에게

이 세계는 암울해 보입니다.
그래도 봄은 오고, 어느 꽃이나 다 영원하고 쾌활한 웃음을 보여줍니다.
(1942.3)

크루트 비트발트에게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습니다.
세계는 시끄러움과 불안으로만 이루어진 듯 보입니다.
그러나 풀과 수목은 변함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 어느날인가 세상이 완전히 콘크리트 상자들로 덮여 버린다 할지라도
구름들의 유희는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은 예술의 도움을 빌어 여기저기에 신성한 곳으로 통하는 문 하나를 열어둘 것입니다.(1949.1)


IP *.248.75.5

프로필 이미지
소은
2008.02.01 15:29:24 *.18.196.118
자연과 친밀히 교제하며 마음을 나누는 헤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정직하게 반나절을 노동으로 보내고, 또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불을 밝히고 글을 '쓰는 노년의 헤세의 모습은 아마도 동양의 현자, 바로 그 모습일 것 같습니다.내가 막연히 생각해오던 독일의 참여적 지성 헤세와는 그 이미지가 사뭇 다릅니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과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책 한 권 읽고도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많이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책은 참 진실한 향기를 지닌 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2.01 17:04:43 *.70.72.121
좋아요. 잘 읽고 있군요. 그대의 감성이 잘 묻어나는 글귀들을 모았네요. 많이 읽고 많이 쓰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며.
프로필 이미지
부지깨이
2008.02.02 09:41:04 *.128.229.81

작년에 튜립 구근을 심어두는 것을 잊었다. 다시 봄이 오는 구나. 봄이 이렇게 밝게 다가 오는 지 예전엔 몰랐구나. 올해는 꽃을 즐기리라.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92 [44] 생각의 탄생 교정 한정화 2008.02.26 2588
1291 신화의 힘, 조셉 캠벨 [3] 홍현웅 2008.02.26 2621
1290 [47] 불꽃/ 춤꾼 최승희 자서전 [2] 써니 2008.02.25 3141
1289 [독서45]정석 목민심서/정약용. 다산연구회 편역 [1] 素田 최영훈 2008.02.24 4175
1288 2. 한국의 고집쟁이들_박종인 file [2] 맑은 2008.02.18 2741
1287 1. 끊임없이 사장을 꿈꿔라_양찬일 맑은 2008.02.16 2685
1286 [독서44]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박현모 [2] 素田 최영훈 2008.02.15 2624
1285 질문이요. [5] 맑은 2008.02.14 2445
1284 [46]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J. 파머 [4] [1] 써니 2008.02.10 5118
1283 춤추듯 변화하라 : 캐럴 에이드리언 소현 2008.02.10 3427
1282 부유한 노예 [3] 바람처럼 2008.02.09 3261
1281 [45]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 린다 스펜스 [2] 써니 2008.02.08 10135
1280 어린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가-프랑수아즈 돌토 우제 2008.02.04 3936
1279 [44] 낯선 곳에서의 아침/ 구본형 써니 2008.02.03 2530
1278 [43] 이미지와 환상 - 다니엘 부어스틴 [2] [1] 校瀞 한정화 2008.02.01 6529
» 헤르만 헤세 <정원 일의 즐거움> [3] 소은(蘇隱) 2008.02.01 3721
1276 [독서43]뼛속까지내려가서써라/나탈리골드버그 素田최영훈 2008.01.31 2484
1275 [번역008] 12장 내면의 신념에 따른 삶(Living with Inner Conviction) 香山 신종윤 2008.01.31 3976
1274 [43] 마크 트웨인 자서전/ 마크 트웨인 [1] 써니 2008.01.29 3607
1273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1] 우제 2008.01.28 4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