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8년 2월 15일 09시 02분 등록
1. 프롤로그

최근 사극 인기에 세종의 열풍이 더해졌다. 딱딱한 책이나 실록이 아닌 살아있는 세종의 모습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드라마적인 연출의 의도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세종대왕. 당신을 가장 잘 표현할 말은 없을까? 동방의 성주, 성군, 많은 호칭이 있었지만 2% 부족했다. 그러다가 찾은 것이 바로 주춧돌이었다. 반석, 당신은 조선이라는 신생국을 든든한 주춧돌 위에 올려놓았고, 500년 조선역사의 기초 공사를 하였다. 당신의 많은 업적들의 특징을 꼽으라면 바로 이 주춧돌이다. 사소하고 쉽게 끝날 것 같은 사안도 빙산 밑의 거대한 부분까지 검토가 있었고, 뿌리 깊은 곳의 핵심을 짚었다. 시간이 필요한 사항은 기다릴 줄 알았고, 인재가 없으면 인재를 양성했다. 조세와 관련된 사항은 18년 동안 토론을 하여 시행한 제도도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낼까? 다스림의 중심에는 바로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런 사랑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신은 그런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신 분이셨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연 중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변화가 가장 심했던 기간이 고려왕조의 몰락과 조선이 성립되는 1200년대라고 한다. 20세기 초의 개화기가 가장 격동의 시기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의아했다. 통치체제가 바뀌었고, 사회, 문화적 토대가 바뀌었다고 한다. 조세제도에서부터,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맺음이 바로 세종, 당신의 시대적 소명이었다.

세종에 대한 딱딱한 책보다는 풀어서 쓴 글이 좋았고, 기존의 치적 위주의 위대한 리더로서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종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 많이 와 닿았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거대한 보물이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의 시야속에 있던 남대문 하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불손한 후손들에게 조선왕조실록은 그야말로 천혜의 보고인 것이다. 조상들은 자기가 살아온 길을 목숨을 걸고 남겼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2. 저자에 대하여

저자는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원래 정치학도였던 그는 독일의 사회·정치·철학자 막스 베버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치학을 전공하다가 돌연 실록으로 방향을 전환한 계기가 궁금하였다. 어린 시절 한학자 집에서 태어난 저자는 중학교 3학년 까지 사서삼경을 떼었고, 한문의 길이 실록의 길로 간 이유였다. 그 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정조의 성왕론과 경장정책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텍스트로서 역사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문화콘텐츠'의 보고내지 '국왕의 리더십과정'에 관한 좋은 텍스트로 보면 전혀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정치학과 실록의 겹눈을 가진 저자는 조선의 역대 군왕을 정치학과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책을 내고 있다. 그의 꿈은 실록대학을 세워, 외국인들에게 세종실록을 영어로 강의하는 것이다.

주요 저서로는 <세종처럼, 2008>, <정치가 정조> (2001), <몸의 정치> (2000) 등 10여 편의 저서와 역서가 있으며, <경국대전의 정치학>등 5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역사와 사회>의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06 광주비엔날레 전시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 가슴을 치는 구절들

<세종을 그리며>

(8) 사실 나는 ‘정치’란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개의 진실과 복수의 가치들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마치 큐빅과 같이 여러 개의 국면들이 맞붙어 공존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서설 세종과 새롭게 만나기 위해>

(22) 말하자면 세종은 태종이 ‘발견’한 국가의 존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시대에 ‘문화의 정치’로 전환시켜 공고화하려 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젊고 유능한 집현전의 문신들에게 역사와 고제를 연구하게 하는 한편, 한 달에 평균 6~7회 꼴로 열린 국정세미나(慶筵)에서 국가 방책을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였다.(재위 32년간 총 1,898회의 경연개최)

<태종이 본 세종 - 국왕의 조건, 그리고 세종 정치의 비전>

(31) 아! 성균관이 어떤 곳인가? <주례>의 다섯가지 학교 중 하나인 남학(南學)의 명칭을 따 세운 성균관은 이 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이 아니던가. 특히 성균(成均), 즉 “음악의 가락을 맞추듯 사람의 과불급을 조정해 인재를 고르게 양성한다.”는 건학 이념만큼이나 고상한 성균관은 명실공히 벼슬길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정치 엘리트들의 사교클럽이기도 했다.


(37) 고려라는 그림위에 조선왕조의 무늬를 그려 넣으려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정해 정치적 화음을 이루려는 것이 세종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성균지법을 통해 과불급을 조정하는 조선의 대사악 이야말로 세종이 지향했던 역할이 아니었을까?

(42) 그리고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역모에 따르던 자들은 대체로 심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크든 작든 국왕의 호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국왕의 호의를 입은 공신이나 외척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권력의 완성’을 위해 국왕의 권좌까지 빼앗으려고 했다.

(46) 군주가 문무를 겸비하지 못할 경우 정권의 안정 역시 보장할 수 없다. 국왕의 말이 아무리 타당하고 논리적이라고 해도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추진력을 잃을 수 있다. 예부터 ‘무장하지 않은 예언가’들이 단명하고 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황희가 본 세종- 대마도 정벌과 공세적 안보정책>

(49) 한마디로 황희가 세종의 신뢰와 보호 덕택으로 청백리로 거듭났다면, 세종 역시 황희의 보필로 ‘동방의 성주’가 될 수 있었다.

(59) 내가 남원에 유배 가 있던 4년여의 세월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조선왕조에 대한 신민들의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태조께서 창업하신 지 30년이 지났으니, 이제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었게니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곳 남쪽 변방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곳 남쪽 변방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 겨우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65)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제되고’ ‘버려져 있는’ 조선의 인재들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리라. 그래서 “농사짓는 자들이 왕의 땅에서 밭 갈려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왕의 저자에서 물건을 쌓아 놓으려 하며, 벼슬할 만한 자들이 왕의 조정에 나아가려는” 여건을 만들어야 하리라.

<황희가 본 세종 - 조선에 살고 싶다. 집단 귀화현상>

(70) 왜인과 여진족들이 이처럼 집단적으로 귀화해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왜인 변삼보라가 말했던 것처럼 ‘조선의 어진 정치’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 아무리 국왕이고 관리라 하더라도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우리 조선의 정치였다.

(77) 정치적 언어란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기 마련이고, 그 말이 다른 장소, 다른 곳에 전달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왕과 같은 최고 지도자의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79) 강희맹에 따르면 아무리 급하다 해도 인재를 다른 세대에서 끌어다 쓸 수는 없다. 그 시대의 문제는 그 시대의 인재를 가지고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와 반드시 ‘물리쳐야 할 인재’를 구분해야 한다. “오랑캐를 누를 만한 위엄을 가지고 있으나 늘 자신을 단속하는 사람, 충성과 의분이 격렬해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 등은 모두 국가의 운명을 맡길만한 신하이자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이다.

(85) 아전을 어떻게 단속하고 이용하는가에 따라서 전제의 시책은 물론이고, 모든 지방행정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성과였다.

(86) 실로 내 인생의 최대의 반전은 ‘간악한 소인’(조말생의 평)에서 ‘청렴한 정승’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태종과 세종의 인재를 가려내고 기르는, 그래서 공적에 의해서 허물을 극복하게 만드는 ‘살림의 정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조가 본 세상,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살핌의 정치>

(97)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해도 오히려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104) 법령은 후세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따라서 큰 폐해가 없다면 마땅히 준봉해서 시행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만약 한 몸의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서둘러 뜯어고치려 한다면 그 고치는 것이 끝이 없을 것이다.

(107) 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현실적으로 한명의 유능한 관료를 키우고 선발하기까지 들어간 비용은 도대체 얼마인가. 그리고 공직자의 권위가 실추되면 국가의 신뢰도는 어떻게 되며, 국가를 믿을 수 없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국가가 붕괴된’ 고려 말의 혼돈 상태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르며 살아야 했는가.

(109) 무엇이 나로 하여금 태종 임금의 믿음을 얻게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국왕 개인’이 아닌 ‘왕명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우선성이며, 공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공공성이라는 나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109) 태종께서도 바로 이 점을 인정하셨는지 상왕으로 계실 때 주상께 “이 사람은 곧 나의 주춧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춧돌을 다듬고 아껴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하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돌도 방치하거나 잘게 쪼개 쓴다면 결코 그 구실을 할 수 없다. 반면, 버려진 돌도 귀하게 여기고 다듬든 석공을 만나면 궁궐의 주춧돌이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인재를 귀하게 여기고 정당한 대우를 할 때 훌륭한 인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대우는 하지 않으면서 훌륭한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씨 뿌리지 않고 열매가 맺히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박연이 본 세종> 조선의 황종음을 찾아라>

(140) 그야말로 “음악이란 하늘에서 생겨나서 사람들에게 연결되는 것이고, 텅빈 허공에서 울어나서 자연계의 현실로 존재한다(악학궤범)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표현할 것이다.

(146) 상께서는 못난 나를 다듬고 가르치시면서 일을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내게 여러 차례 말씀하시곤 하였다. “너는 내가 아니었으면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네가 아니면 역시 음악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147) 당신은 내게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우리 조선의 자연의 소리를 느끼며, 군신들의 호흡을 담아서 그야말로 ‘조선의 음악’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고 계셨다. 그리고 바로 그 음악을 적을 수 있는 악보와 악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지상과제로 주셨으며, 당신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백성의 소리를 담은 당대 최고의 음악정치를 펼치려 하신다는 깊은 뜻을 내 나이 70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정인지가 본 세종, 학문사대주의를 넘어서>

(152) “글 배우는 사람은 문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옥사 다스라는 자도 그 곡절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1443년 겨울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신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이었다. 상께서는 후자, 즉 억울한 옥살이를 없애는 데 초점을 맞추셨다.

(164) 정음 창제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나 자신이다. “지혜로운 자는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 는 말처럼, 훈민정음은 정말로 배우기 쉬운 문자였다. 주상의 설명을 듣고 불과 한나절 만에 나는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는 물론이고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167) 이번 중국 사신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우리 자존감의 회복이었다. “스스로 자기를 무시한 다음에 비로소 남들에게 멸시받는다.”는 말처럼, 내 것을 내가 존종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런 자존감을 가지고 내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때 비로소 상대방의 존경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168) 이렇게 볼 때, 고려 말의 위기는 사실상 지성의 위기였다.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약탈도 무서웠고, 무능한 국왕과 원의 간섭도 개탄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한스런 것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음풍농월로 시절을 보내는 지식인들의 고루함이었다. “도덕의 으뜸”이요, “유가의 종장”이란 말을 들었던 이제현과 이색 역시 성리학을 수입하는데 급급했을 뿐,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라의 앞길을 헤치고 시대를 이끌어갈 탁연한 지성이 없었던 것. 그것이 바로 고려 말 위기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184)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유교 이외의 사상에 대해서도 “투철하게 그 근원을 캐어본” 다음에 “나라에 이롭고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상께서는 특히 “비록 주자의 말이라도 또한 다 믿을 수 없을 듯하다.”고 해 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김종서가 본 세종- 파저강 토벌을 위한 대토론>

(206) 솔직히 말해서 거의 모든 사안을 “의논해서 아뢰라”는 상의 정치방식이 아랫사람들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신하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주상의 의도야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적절하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늘 맡은 직무를 연구하고 생각하여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211) 늘 그러셨듯이, 상께서는 이 문제도 ‘숙의’와 ‘전장’ 이라는 방식으로 결정하셨다. 충분한 찬반토론을 거쳐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미리 짚어본 다음, 그 일을 주관할 사람에게 “전적으로 주장”하게 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천·장영실 팀에게 천문가 기술을 맡길 때나 박연에게 “오로지 음악을 맡아 주관하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숙주가 본 세종 - 싱크탱크 집현전의 두 가지 길>

(250) 세종께서는 집현전을 “국가의 인재가 모인 터전”으로 간주하고 계셨다. 그래서 재위 16년부터는 우리가 강독한 분량을 기록했다가 월말에 보고하게 하는가 하면, 매월 열흘에 한 차례씩 당상관이 시문의 글제를 내어 시험 치르게 하고, “일등으로 합격한 시와 문을 가려서 월말에 모두 등사해 보고”하도록 하셨다. “

(250) “그대들은 마음을 태만하게 갖지 말고 학술을 전업으로 하여 종신토록 이에 종사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라.” 아 ‘종신토록 학술에 전념하라.’ 는 그 말씀.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나 행복한 일인가. 이 피 튀기는 살벌한 정치 세계의 현장에 비하면...

(256) 처음에 없었던 조건들이 나타나면서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충신’의 이름이, 그리고 그에겐 ‘역도’의 이름이 씌여졌다. 바로 그 점이 성삼문과 박팽년이 그처럼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역사속의 또 다른 사명이었다. 세종의 ‘팔진도’를 되살리고 안착시키는, 우리 모두가 꿈꾸었던 정치적 이상이 바로 그것이다. 실로 당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는 죽었고, 그 뜻을 살리기 위해 나는 살았다.

<정조가 본 세종- 맡기고, 예비하고, 기회를 활용하라>

(276) 이처럼 세종께서는 권한을 위임하고, 체계적인 기근 구제 방법을 마련하시고, 예방적인 정사를 베푸셨다. 당신은나라의 큰 방향만 의논하여 정하시고, 신료들로 하여금 “내가 곧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충직하게 자기 일을 하도록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277) 나는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몰두했고, 정작 해야 할 것을 등한시 했다. 처음에 알 수 없었던 위기의 실체, 일들의 실마리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지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흘려보낸 시간의 보복, 잃어버린 기회들의 채찍이 무섭기만 하다.

4. 내가 저자라면

책을 읽는 중간에, 새로운 도전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었다. 보통 역사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것은 실록과 그의 실적에 편중되기 십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9명의 관점은 새로운 도전의 성공이라고 본다. 역사적인 기록을 현대에 다시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한 사람의 세밀한 기록을 역으로 바꾸어서 정리하고 유추하는 일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태종이 본 세종의 모습에서 궁금한 점이 많이 풀렸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이해가 되었던 부분이 바로 조선의 국가관이었다. 태종이 충녕에게 국왕을 물려준 것도 바로 조선의 국가관의 이해였다. 이런 전문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도 도움이 되었다. 뒷장으로 나오는 황희, 허조,박연,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의 설명은 각 분야별로 세종의 인간적인 부분을 들여다 보는데 유용했다.

조금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이 바로 수양대군과 정조였다. 수양대군은 어찌보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계유정난과 생육신, 사유신등의 피바람을 보면서 그가 과연 대왕을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았다. 정조가 바라본 대왕의 모습은 의외로 소탈하였다. 자료를 찾던 중 대왕과 정조의 차이점을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었다.

'소 몰던 세종과 소 끌던 정조' 세종은 신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천천히 소를 몰듯 정국을 운영한 반면, 정조는 신료들을 가르키려 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재위 19년의 혁신 무력감에 시달린 모습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세종대왕의 인간적인 면, 그리고 하나의 치적속에 녹아있는 백성과 신하에 대한 사랑을 느낄수가 있었다.

동문수학한 성삼문을 사사하고 난 후, 신숙주의 독백이 허공에 울린다.

"그대들은 마음을 태만하게 갖지 말고 학술을 전업으로 하여 종신토록 이에 종사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라.” 아 ‘종신토록 학술에 전념하라.’ 는 그 말씀.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나 행복한 일인가. 이 피 튀기는 살벌한 정치 세계의 현장에 비하면...(250p)
IP *.99.241.60

프로필 이미지
미국한인
2008.02.23 04:20:22 *.129.41.132
태종이 먼저 태어났는데 어떻게 세종을 볼수 있었나요

정조 이산이 안중근을 안창호를 볼수 있었나요
프로필 이미지
최영훈
2008.02.24 07:56:14 *.118.101.235
세종, 실록밖으로 행차하다는 책은 역사적 사실을 쓴 책이 아니고, 역사소설의 한 형태입니다. 태종(1367년~1422년)이 본 세종(1397년~1450년) 세자를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바뀌고, 1418년 세종이재위하고 4년후인 태종이 승하할때까지의 기록을 토대로 이 장을 쓴 것 같습니다.

실제 태종이 세종의 재임 후반기를 보지 못하였을 뿐이지,세자를 바꾸고 왕으로 책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종이 왕으로 책봉된 뒤에도 군권은 태종에게 있었습니다. 군권에 대한 말 한마디로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제거되었고, 대마도 정벌도 태종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저자인 박현모 선생이 "태종이 본 세종편"을 넣은 것은 세자를 바꾸어 나라를 맡기게된 이유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양녕대군보다 똑똑하고 유능했다는 점을 많이 들었는데, 저자는 태종의 국가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책 본문중에 이런 얘기가 나오더군요

고려라는 그림위에 조선왕조의 무늬를 그려 넣으려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정해 정치적 화음을 이루려는 것이 세종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성균지법을 통해 과불급을 조정하는 조선의 대사악이야말로 세종이 지향했던 역할이 아니었을까? (37P, 태종이 본 세종)

저는 이책에서 딱딱한 실적위주, 코끼리 만지기식의 세종대왕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를 든든한 반석위에 올려놓으려는 고뇌하고 인간적인 면을 세종의 주변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실록이라는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이라, 실록을 정확히 모르는 저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552 17: 동방견문록 [2] 김귀자 2006.07.05 2225
3551 [독서28]①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素田 최영훈 2007.10.16 2225
3550 27. 경영의 미래(두번째), 게리 해멀 강훈 2011.10.31 2225
3549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 윌리암 브리지스 file 최재용 2013.10.13 2225
3548 [20] 다이앤 애커먼의 <천개의 사랑> -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1] 먼별이 2009.09.06 2226
3547 '프로페셔널의 조건' - 피터 드러커 [1] 희산 2009.10.13 2226
3546 철학 이야기_구해언 어니언 2014.06.17 2226
3545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 삶을 '의도대로' 살게 하는 부추김 file [1] 보따리아 2017.12.30 2226
3544 거대한 미래지도 [2] 한명석 2006.10.30 2227
3543 미완의 시대(에릭홉스봄의 자서전) [2] 강종출 2007.03.11 2227
3542 [01]신화의 세계 - 조셉 캠벨 [4] 양재우 2008.04.08 2227
3541 북리뷰32-서양철학사 [2] 박경숙 2010.10.31 2227
3540 코끼리와 벼룩 - 찰스 핸디 혁산 2009.10.26 2228
3539 1. <신화와 인생> 조셉캠벨 미나 2011.04.03 2228
3538 북리뷰 42. 신화의 힘_조셉 캠벨(심층 읽기) 박상현 2011.01.10 2229
3537 <한승원의 글쓰기 비법 108가지> file 제이와이 2014.02.04 2229
3536 아니타 로딕의 남다른 비지니스 [1] 김귀자 2006.04.03 2231
3535 [36]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수정) [1] 한정화 2007.12.14 2232
3534 [32]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 인용문 3부 수희향 2009.11.28 2232
3533 '미래의 물결' - 자크 아탈리 [1] 희산 2010.03.29 2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