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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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최승희崔承喜 : 1911.11.24 ~ 1969.8.8
북한의 무용가로 소개된다. 일제 치하 시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임용을 대기하던 중 오빠 최승일의 도움으로 일본인 무용가 石井漠(이시이 바쿠)로부터 춤을 사사 받게 되어 그의 무용단에서 활동한 후, 조국으로 돌아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한국의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고국의 민족 현실과 문화적 인식의 낙후 등으로 경제력에 쫓기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며, 구미 각국의 순회공연을 통해 ‘東洋의 舞姬’로 불리며 우리 춤에 대한 연구와 함께 동양을 대표하는 춤꾼으로서 당당히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자연히 친일 무용가로 활동하다 일제가 항복하자 돌아올 조국이 없어진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하여 평양에서 조선 춤의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힘쓰며 살다가 죽은 것으로 전해지나 그의 사망에 대하여 여러 추측이 난무한데, 남편 안막이 북에 의해 숙청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 더 자세한 내용을 아래의 두산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이견이 있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오빠 최승일(崔承一)을 따라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열린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발표회를 구경한 것을 계기로 그의 연구생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과 1928년 연이어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경성공연에 출연하여 유명해졌으며,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1930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비롯해 4회의 신작발표회를 가졌으며, 그 후 한성준(韓成俊)에게 고전무용을 배움으로써 창작무용의 뿌리를 조선춤에 두게 되었다. 1931년 문학운동가 안막(安漠)과 결혼, 1933년 이시이와 합류하여 1934년 일본청년회관에서 신작발표회를 열어 승무·칼춤·부채춤·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 격찬을 받았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이어 1937년 구미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고, 1940년 미국을 비롯한 남아메리카대륙까지 진출, 세계적 무용가가 되었다. 1942년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도쿄[東京]로 돌아와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독무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광복 후 위문공연을 하였다는 이유로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을 받았고,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였다.
1946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전쟁 중인 1950년 말에는 베이징[北京] 중앙희극원에서 무용반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으나,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연구소도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었다. 그 후 <조선민족무용 기본>, <조선아동무용극 기본> 등의 저서를 냈으며, 1967년 숙청당하였다. 한국에 신무용의 뿌리를 내린 그녀의 작품세계의 근원은 한국의 민속춤이었다.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과 동양의 신비한 매력이 담긴 춤사위로 세계 각국의 칭송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 무용계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2006년 3월에 전 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을 함광복 씨는 재미동포신문 신한민보 1938년 2월 3일자에서 최승희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 다음은 최승희 기념 사업회를 통해 옮겨온 내용이다.
『1937년 미 대사관의 소개로 바킨스라는 흥행사를 소개받아 1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등에서 4차례의 공연을 갖는다. 그 뒤 NBC 라디오방송국 흥행회사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미국의 2대 매니저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는 3번째의 동양인 예술인이 되었다. 평론가들은 균형 잡힌 몸매, 정교한 손, 조각적인 동선, 우아함과 격정적인 매력을 갖춘 춤이라고 극찬하였다.
2년간 유럽과 남미 순회공연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최승희는 '동양의 무희', '세계적 무희'로서 첫 관문을 통과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제 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 라반(Lavan, R.), 비그만(Wigman, M.), 리파르(Lifar, S.), 안튼 돌린 등과 나란히 심사위원이 되는 영광을 주었다.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 S.)의 기획 아래 NBC 전국 체인과 제휴 하면서 미국에서 10회, 프랑스에서 23회, 벨기에에서 9회, 네덜란드에서 11회, 남독일에서 2회, 그리고 중남미에서 61회 등 약 150회에 달하는 서구 공연을 하였다. 동양적인 무용예술에 매료된 유럽 지식인들은 최승희의 팬임을 자칭했다.
피카소와 마티스, 로맹 롤랑과 가와바타 야스나리, 주은래 등이 최승희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특히 피카소는 그 감동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또 로버트 테일러가 영화출연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42년 12월 6일(동경의 제국화랑에서는 '춤추는 무희' 최승희를 주제로 한 최승희 무용화 관람회가 열림)일본으로 돌아온 지 4개월 만인 그해 일본 제국극장(수용인원 2천 명)에서 17일간 24회하는 기록적인 장기공연을 가진 것이다.
이것으로써 그녀는 세계 최초의 장기 독무 기록을 세웠으며 관객은 매회 초만원이었다. 대표작과 조선춤뿐 아니라 일본춤, 중국춤까지 선보임으로써 새로운 춤을 위한 시험 무대로 삼기까지 하였다. 이후 1944년 1월 27일부터 2월 25일까지 동경 제국극장에서의 20일간 23회 일본 장기 공연을 하게 된다.
발레로 시작한 그녀의 춤은 현대무용과 서양의 캐릭터를 거쳐 1930년대부터 연구한 한국춤, 유럽공연 이후부터 시도된 동양무용의 세계를 뻗어 갔다. 그녀의 춤 동작은 우아하다기보다는 흥겨운 멋이 있었도 낙천성과 풍자 희극적인 요소가 강하여 움직임이 매우 역동적이었다.
춤 동작 이외에 표현력에서도 남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을 중심으로하는 얼굴 표정이 작품마다 달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었다.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 무용 100년>에 의하면 1964년까지 평생 모두 310편 이상의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그 가운데 120여 편이 한국무용이었고 나머지는 현대무용, 동양무용, 일본무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공연 기록은 통산 2천 5백회 이상이었다. 』
2. 내 마음속에 들어온 글귀
1 영혼의 몸짓
학교를 마칠 때까지
어린 나의 가슴속에는 늘 예술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는 매와 같이 높이 날아서 나의 예술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소망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기구하고 험난했다. 그러한 나의 소망과 정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벌써 몇 번째 쓰라린 맛을 보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생활을 짓누르고 있는 경제 문제 때문이었다.
예전에 우리 집은 소위 조선에서 말하는 양반의 가문으로, 어느 정도 풍요한 생활을 누려 왔다. 그러한 까닭에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에는 아무런 부족함과 궁색함이 없이 따뜻한 비잔 이불과 요 위에서 세상의 괴롭고 마음 아픈 불행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면서 지냈다. p10
나는 어린 비둘기와 같이 어머님과 아버님께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것도 아침 이슬처럼 잠깐 동안의 시간이었다. p11
나와 서모庶母
작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다. 그분은 본래 남의 첩 노릇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당당한 양반 집안의 규수로서, 어느 양반 댁의 당당한 신사紳士에게 시집을 갔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이 일찍 죽고 말았다.
마땅히 과부가 된 작은어머니는 그대로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인해 혼자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혼인이란 것도 생각지도 않은 악당들에게 속아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또다시 세상의 차디찬 물결 위에서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쯤 화려한 생활을 하는 나의 아버지와 이런 환경에 처한 작은어머니가 만나 뜨거운 사랑으로 연을 맺게 된 모양이었다.
오빠와 나는 이 아버님의 첩을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인자한 품위가 환하게 빛나는 어머님과는 달리 이 두 번째 어머니를 언니나 아주머니를 대하듯이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맞아들였던 것이다. p16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귀금속과 보석 같은 것을 하나씩 팔아서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이미 몰락해 버린 아버지로부터 절연이 선고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동시에 별다른 방책이 없던 그녀는 가난하고 순결한 생활에서, 동시에 별다른 방책이 없던 그녀는 가난하고 순결한 생활에서, 개미가 먹이를 하나씩 옮겨 나르듯이 자기의 몸을 깎으면서까지 우리 식구들을 부양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작은어머니의 존재가 이성적으로는 이미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부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나 역시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 점잖게, 그야말로 옛날 대갓집 본처로서 모든 일을 관대하게 보시는 어머님의 가슴속 깊이, 이 작은어머니의 존재가 얼마나 괴로움과 쓰라림을 주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람의 마음대로는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버지는 결코 나쁜 어른이 아니었으며, 또한 서모도 결코 미워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님만 불쌍하게 생각 되었다. 어린 나의 마음은 어찌할 수 없는 분노로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다른 방도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서모는 어쩐 일인지 아버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아주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었다. 또한 나의 어머님에게도 마치 자신의 친언니에게 하는 것처럼 깍듯하게 그녀를 공경하며 성실하게 대해 주었다. p19
나의 결심과 나의 성격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만큼 마음이 약했으나,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힘으로 무너져 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늙어 가시는 양친이 남은 인생을 안락하게 해드려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몇 번이나 했다.
내가 학교에 다녔던 때는 지금과 많이 달라서, 나는 우리 학급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그리고 다른 애들보다 나이도 어렸던 까닭에 선생님은 물론이고 친구들이 나를 무척 사랑해 주었다.
남들이 내게 마음이 연약하다고 말하지만 성격은 매우 밝고 확실하다는 말을 그들로부터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조금이나마 내가 의지가 강하고 노력하는 여성처럼 보이는 것도 여학교 시절에 겪은 고생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나의 성격은 승일 오빠로부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오빠는 진보적 ‘인텔리’로서 문학가였다. 신극 방면에 활동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나에 대한 오빠의 애정과 지도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수시로 나를 격려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장려해 주었다.
오빠는 나에게 사물에 대한 정당한 관찰과 이해의 길을 열어 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어떠한 난관에도 버티고 헤쳐 나갈 용기를 안겨 주었다.
나는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아 주로 시와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꿀처럼 달고 꿈처럼 헛된 작품들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을 뿐더러 아무런 재미를 주지 못했다. 나는 주로 작품들이 현실 속을 파고 들어가는 생활 의식이 풍부한 작품을 애독하였다. 석천탁목石川啄木의 시와 노래를 한없이 애독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생각과 감정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무용의 밑바탕을 흐르는 힘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렵게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내가 앞으로 나갈 길에 대해서는 뾰족한 방책이 없었다. 한번은 이러한 일이 있었다. 모교의 교원 회의 결과, 나를 학교 급비생給費生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일 년 동안 있다가 동경에 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p22
음악 교사인 김영환金永煥 선생님은 내가 음악가가 될 소질이 있다고 보시고 나에게 “너는 반드시 음악가가 되어라.”하고 당부하셨다.
김 선생님과 오빠가 자기 일처럼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의논한 결과,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가장 돈이 적게 드는 사범학교師範學校에 입학하라는 것이었다.
오빠와 김 선생님의 뜻에 따라 나는 사범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에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입학시험에 합격하자, 모두들 나의 손을 잡고 즐거워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p23
석천탁목 선생의 시와 노래는 내 안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나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생에 관한 문제에 푹 빠져있었다. p24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아버님과 어머님만은 이내 오빠와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 시작했다.
석정막 선생님은 여러 가지로 나를 시험한 뒤에 무겁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입문을 승낙한다.”
참으로 어렵게 받아 낸 허락이었다. p26
고향을 떠나 새로운 연구에
무장경武藏境에 있는 석정 선생님의 연구소에서 나는 정성을 다해 무용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것은 죽을힘을 다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석정 선생님도 열성으로 나를 지도해 주었다. 나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열과 성을 다해 배웠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연구해야 한다는 목표를 잊지 않았다. p32
“이곳 사람들은 우리 집이 구차해서 딸을 기생으로 팔았다고들 수군거린단다. 너는 기어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란 듯이 돌아와서, 이러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해 주어라.”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가슴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하였다.
‘내 반드시 훌륭한 무용가각 되리라, 꼭!’
고향에 있는 승일 오빠는 나의 몸을 걱정해 주고 오로지 나를 격려해 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오빠의 편지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조선 사람으로서 지금껏 무용에 뜻을 둔 사람은 없다. 나는 조선을 대표해서 향토의 전통과 풍습을 다시 살리는 멋진 무용을 만들어 내겠다.’
이런 생각으로 나에게 맡겨진 커다란 일에 책임감과 함께 높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p33
이러한 나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는 석정선생님 부부는 나의 모든 어려운 점을 세심하게 돌보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보다도 더한 사랑으로서 나를 지도해 주었다. 정든 고향 땅을 떠난 나에게 선생님 부부는 아낌없이 정을 쏟아 주었다.
그 열성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지도로 인해,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수업 시절을 너무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한 선생님이 갖고 있는 무용에 대한 불타는 정열,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전진하는 열성과 진실한 태도가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큰 교훈이 되었다. 참으로 위대한 교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행복하고 비장한 삼 년 동안의 수업 시절이 어느 틈에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p34
독립 무용 연구소 개설
비록 나의 힘이 아직은 부족하지만 고향에서 기어이 새로운 무용 예술을 뿌리내려 보고자 단단히 마음먹었다. 허물어져 가는 우리의 고전무용을 어떻게든지 부활시켜 보고자 하는 꿈이 너무나도 간절하고 컸었다. 이러한 결심으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삼 년 동안에 아홉 번의 신작 무용을 발표하면서 미숙하나마 나의 무용 인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무용이라는 예술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상대로 새로운 무용을 알리는 작업은 실로 몽상에 가깝다는 사실에 심한 환멸을 느끼면서 슬피 울기도 했다.
일 년 동안 괴롭고도 험한 싸움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 다행이도 차츰 영화와 연극처럼 무용도 그 수요와 지지층이 늘어가는 추세였다. 즉, 무용 애호가들이 점차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우리들은 비로소 이러한 현상에 커다란 행복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정신적으로 자위하는 일시적인 인식의 차이일 뿐, 물질적으로는 괴로움의 깊이가 다할 뿐 이었다. p38
그 첫째 원인은 무용단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연구생들에게 월사금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활비에서부터 소소하게 용돈 쓰는 일까지 모두 나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몹시도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예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단독 공연 이외에는 어떠한 공연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념 하나로 나는 조그마한 연구소를 삼 년 동안 지켰다. 그러다가 뜻밖에 1933년 봄, 나는 또다시 일본 동경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p39
결혼전후
고향에 돌아와 머물고 있는 동안 나의 무용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내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일상생활도 그렇지만, 나의 예술적 소양이 아직도 부족하고 미숙하며 또한 여성으로서의 내 자신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 활동이나 일상생활에서도 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p40
결국 1932년 봄, 내 나이 스무 살 때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하며 서울에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조선에서 무대에 서는 여자라면 거의 모두가 사내들의 장난감이 되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넘나들며 무절제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결혼은 말없는 항의와도 같았다. p41
한 사람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바른 길을 걸어갈 것과 무용가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 서로 상충되는 일이라, 두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착한 아내와 평범한 어머니가 되는 길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길은 반드시 양립하게 되며, 또한 양립시키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여 나는 변함없이 무용 작업을 계속하였다. 제5회 작품을 발표할 때는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p42
출발전야
석정막 무용회의 밤.
이 밤은 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인상 깊은 밤이었다. 종소리가 울리자 불이 꺼지고 ‘제라진’을 통해 코발트 빛과 그린 빛이 교착하는 가운데 무슨 곡조인지 장중한 피아노의 멜로디가 시작되면서 석정막 씨의 독무<수인囚人>이 시작되었다.
쇠사슬에 얽혀 무거운 걸음으로 무대를 밟는 그의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아, 그때 나는 ‘저것은 춤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껏 춤이란 기쁘고 즐거울 때만 추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무언가 무겁고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그 굵은 쇠사슬을 끌고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고는 두 팔을 들어 환희를 표하면서 무대에 고꾸라지고 만다. 다시금 종소리가 울리면서 조명이 꺼지면서 천장의 전등이 켜진다. p52
누이에게 주는 편지 - 최승일
“그런데 오빠, 나는 대관절 내년에 졸업을 하게 되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너는 무엇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니?”
“음악학교에 가는 것.”
“그렇지. 너는 노래를 잘 부르고 율동체조도 잘 하겠다, 가만히 있어 봐.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
“무슨 생각?”
“승희야, 내 얘기 좀 들어 볼래?” 네가 아직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너한테 말해 보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이야기책을 번역하여 어느 달에는 약 사오십 원의 수입이 있기도 해.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도저히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를 거느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머지않아 엄청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예술에 대한 노력은 적어지고 생활을 위해 다른 에너지를 짜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히 월급쟁이 살림꾼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너의 언니는 사상이나 됨됨이가 훌륭한 주부감이니 나는 손도 대지 않겠다. 그리고 너의 작은 오빠는 벌써 중학교에 다니는 몸으로 처자가 있다. 그런데다가 우리 집안에 돈이 없다. 그러니 졸업을 하면 그날부터 다만 몇 푼짜리 날품팔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것은 너 한 사람이다. 가만히 있어 봐. 사람이란 기회가 있는 법이다. 내년 봄을 기다려 보자.” p68
“오빠! 저는 요사이 무용 예술이란 어떤 것이라는 것과 예술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그것은 이런 데서 발견됩니다. 석정 선생님이 처음 독일에서 돌아와 산전경작씨의 반주로 안무된 작품과 요사이 만드는 작품의 차이가 왜 그다지도 정신과 감흥이 다릅니까? 저는 차차 석정 선생님에게 환멸을 느껴갑니다. 요사이 그의 예술에는 詩가 없어요. 그것도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그는 춤을 춰서 수십 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집이 없으니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는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은 마치 관솔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러시아의 제실무용학교에서 우러난 전통적 무용을 부숴버리고 민중의 힘과 노동의 시가 무용화된 예술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독일 워크맨의 무용-이사도라 던컨이나 이진스키의 음악에 종속화된 무용을 박차버리고 무용독자의 생명력을 지닌, 음악이 없는 그의 무용을 보고 싶어요. 오빠! 이것이 나만의 생각일까요, 제게는 너무도 이른 생각일까요? 편지해 주세요.”p69
“오빠! 저는 요사이 몸 성히 잘 다니기는 합니다만 웬일인지 때로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것은 저의 건강 때문입니다. 오빠도 신문이나 잡지에 난 것을 보셨겠지만 스기야먀 씨나 개조사의 야마모도 씨 같은 분은 저더러 보통 사람보다는 세 배 정도의 일을 한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그만큼 바쁩니다. 이러다가 혹시 무대 위에서 쓰러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됩니다. 그러나 일본 전국이 내가 가는 곳마다 환영해 주고 격려 일색입니다. 글러 때마다 저는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한편으로 눈물겹게 기뻐서 어떤 일이 있든지 나는 폭탄과도 같은 위대한 정열을 가졌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끝까지 내가 무대 위에서 고꾸라질 때까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p71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서양으로 싸우러 갑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고 그 민족의 예술도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고요. 애굽埃及이 망했으나 그 민족과 그 민족의 예술은 망하지 아니하였으며 유대猶太는 망했으나 그 민족은 망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중국이 망할지라도, 국가는 망해도 민족은 영원히 망하지 아니한다.” p72
그렇다. 이제 우리 조선은 최승희라는 한 사람이 조선 민족을 세계무대에 내놓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깊이 재인식해야 할 줄로 안다. p73
왜 그런고 하니 가무기歌舞技하면 삼백 년 전의 가무기와는 그 형태가 다르다. 그것은 역사의 진화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조선 리듬이라 하더라도 오백 년 전의 조선 리듬과 지금의 조선 리듬에는 알 수 없는 변화가 있으리라고 믿으며 또 있어야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네가 조심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요즈음 너의 명성을 세상에 떨칠수록 예술가로서 갖기 쉬운 자만심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때로는 예술가들이 대단히 위험한 탈선을 하기 쉬우니 특히 너는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거리끼는 일은 요사이 “최승희는 조선을 팔아먹는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하다면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왜 그런 소문이 있는가 하면 동경에서 조선 춤을 추어서 그것이 평판이 좋다는 말이 나돌아서 어찌어찌하여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자기 민족적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하고 이해하여 그것을 예술화하는 것이 예술가가 해야 할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민족 예술이 되는 동시에 또한 ‘인터네셔널 예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75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괴나리봇짐 짊어지고 지구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 보렵니다.” p76
끝으로 네가 지구를 돌아 조선을 찾아올 때에는 ‘무엇을 어떻게 가져오느냐.’ 그것이 이 오라비에게는 가장 크게 기대되는 일이다. p77
형제에게 보내는 글 - 최승희
자기의 예술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나처럼 아직 미완성의 무용가에게는 한 가지 고통 일 수는 있어도 결코 행복스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태여 내가 나의 무용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 것은 여러 감상자들에게 내 작품 속에서 숨겨져 있는 어떤 독창성에 대해서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감상자들에게 한낱 정당한 비판의 재료만이라도 되어 준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p78
크로이츠베르크의 무용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사하로프적 요소가 그냥 배열되어 표현 되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나 같은 젊은 무용가에게는 그러한 무용의 자립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p79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것은 다만 예전부터 있어 온 진기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무용으로 하여금 자기가 속해 있는 생활에 대한 적응과 자기의 육체적 가능성 위에 서서 표현하는 자기 형성의 획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내가 조선풍 무용을 자기의 레퍼토리 속에 넣는 이유는 결국에 있어서 조선의 무용을 널리 외국에 알려, 비록 절름발을 끌며 가더라도 붙여서 따라가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조선은 오랜 옛날 자기만의 훌륭한 무용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후세에 내려오면서 이 땅의 자손들은 소동파나 두보, 이태백 등을 추억 가운데 암중모색할 줄은 알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자기 겨레의 우수한 예술 유산에 대해서는 오히려 모멸의 눈동자를 돌릴 뿐이었습니다. p80
그랬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 조선의 무용이란 겨우 그 빈사의 상태를 기생들에 의하여 주석酒蓆 같은 데서나 명맥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무용이라고 할 만한 존재도, 그리고 거기에 대한 관련 문헌도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 사람의 아르헨티나, 한 사람의 긱구고로菊五郞도 갖지 못했으며 이렇다 할 만한 무용가라고는 한 명도 없는 이 땅의 무용 현장에 있어서, 나의 고대 예술의 재흥이란 시도는 그렇게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퍽이나 곤란하고 복잡할 것입니다.
나의 조선풍 무용이란 것은 조선에 남아 있는 적은 것을 소재로 삼는다든지 또는 새롭게 창조하여 무대 위에서 이를 소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p81
그리고 나의 이와 같은 민족무용의 양식화에 대하여 혹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한 아무런 독자성이나 창조성을 인증치 않을 것입니다. 나의 이 양식화의 방법이란, 스페인 무용에 있어서 아르헨티나적인 방법이나 인도 무용에 있어서의 우데- 상가- 적인 방법에의 형식적 모방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국제적 경험일 것입니다.
아직 나의 조선풍의 무용이란 것은 완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마는 나는 내가 하는 무용 속에서 동양적인 빛과 향기를 캐내어 찾아보자는 데에 그 뜻이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나의 예술의 본의가 숨어 있는 것이며 내가 일생을 바쳐 걸어 나갈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의 이 동양적인 무용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나의 무용이라 것이 과연 창조적인 것이냐 또는 그렇지 않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의 단순한 복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에 대한 해석의 상위相違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최후에 나는 근대 무용이란 것과 민족 무용의 양식화된 것과의 거리를 얼마간이라도 단축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82
나는 이번 길에 세계무대에 나서서 세계 각국의 모든 무용을 똑바로 배우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서 내 무용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자립성을 밝혀 보겠습니다. p83
고뇌의 표현 - 최승희
내가 무용의 길로 나서게 된 동기는 석정막 선생님의 공연을 서울에서 관람하고 감격했던 때부터입니다. 그전부터 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일생의 목표를 삼으리라고 결심한 것은 그때입니다. 석정막 선생님의 춤에 매료된 것은 그의 춤이 보여주는 어두움 때문이었습니다. <수인囚人>이라든가 <멜랑콜리>에는 인생의 고뇌를 표현한 억센 힘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기구한 운명에 시달리던 조선 민족의 고뇌를 무용을 통해서 세상에 호소하고 싶은 생각이 그때 작은 내 가슴에도 하나 가득 찼던 것입니다. p86
내가 실력 이상으로 유명해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한편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요즘의 평가가 진정으로 나의 예술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만, 아무리 뽐내도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오늘 이후의 예술이 불안스럽고 겁이 납니다. 그러므로 더 힘껏 노력을 해서 만약 현재 인간의 절반이 일종의 유행처럼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절반을 내 예술의 참된 지원자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전심전력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여자의 몸은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도무지 행동이 대담해지지 못하고 있으니....... .
조선무용을 말하자면 원래는 퍽 원시적인 것인데 선이 고운 것이 그 특색입니다. 일본 무용처럼 부분적인 움직임이 아니고 전신을 이용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단순하고 내용이 빈약한 것이 흠입니다. 지금 내가 추는 춤은 모두, 어렸을 적에 본 것들입니다. 기생 춤도 그렇고 민족무용도 그렇고 조선무용을 이제야 발표했습니다만 벌써 오래전부터 생각해 내려온 것들입니다. p88
민속 무용으로서 독창적 경지를 전개해 나가기 위하여 본령인 서양무용 가운데 그 민속 무용을 잘 섞어 넣어가야 한다는 데에 나의 고심이 있습니다. 향토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나머지 너무 그쪽으로 쏠려 사도에 빠져서는 안 되겠으므로 나는 항상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용가로서의 기교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월한 향토예술을 세상에 소개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사도에 빠지지 않는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놓고 싶습니다.
숨이 막힐 듯한 열정과, 고뇌하는 인생, 완벽한 예술, 완전한 예술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 저 크로이츠베르크의 춤을 보고 나는 그 위엄에 완전히 압도당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어두운 인생을 내다보는 듯한 무용이 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정말로 존경할 만한 무용가입니다. p89
2 민족혼의 승화
무용은 마음의 창窓 - 무용가 석정막
인기라는 것을 되지 못하게 경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속을 쪼개어 보고 싶다.
인기라는 것은 갖고 싶을 때 마음대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권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노력과 그것으로써 따라오게 되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이나 우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만은 정확한 사실이다. p93
나는 일찍이 런던 체재 중에, 지금은 고인이 된 이사에의 바이올린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음악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 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모든 예술 작품을 대할 때는 이사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무용을 보는 것은 무용 작품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다만 눈으로 보기만 하는 무용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접촉을 의미하는 무용이다. 무용을 통해서 여사 자신의 마음과 만났을 때에, 비로소 보는 삶이 마음을 뛰게 하는 무용인 동시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야 마는 듯한 그 기백은 그녀의 무용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곧 대중적 의미와도 분류되는 것이다. p95
무희舞姬 최승희론論 - 소설가 川端康成
천혜의 체구와 재능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p107
민족 무용가로서의 최승희 - 평론가 園池公功
최 여사의 무용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말하는 바와 같이, 그녀는 참으로 우수한 육체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무용가로서 행복한 일이다. p111
최승희의 무용 예술 - 板단直子
그녀는 꾸며낸 형식을 춤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는 데에 즐거움을 가지고 춤을 추는 것이니, 춤과 자기가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춤이 ‘몸에 붙어 있다’ ‘춤이 참으로 몸에 붙어 있다’는 경지는 흔히 하는 말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p140
장쾌한 진로를 축복한다 - 평론가 박영희
끝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돌진해 나아가는 그녀의 용맹스러운 자세야말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신뢰를 자아낸다. p155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기대 - 화가 안석주
나는 끝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값싼 저널리스트들의 변하기 쉬운 그 붓끝을 경계하고, 자중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위대한 최승희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어느 때든지 고국에 돌아와서 조선의 예원을 위하여 위리와 함께 노력해 보자고 감히 제안한다. p171
3. 내가 저자라면
하나, 역사와 인생의 구름을 뚫고 폭탄 같은 위대한 정열로서 자신을 진화시켜나간 시대의 춤꾼 최승희
이 책은 1911년부터 1969년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직접 쓴 원고를 정리해 묶은 것으로 본문을 보면 고어체가 그대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최승희를 두고 말한다. 춤이 몸에 붙어있는 여인 최승희라고. 그녀는 참으로 우수한 육체의 소유자이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무용에 대한 창조성과 자립성을 위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추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사랑한 춤은 어두움을 표현한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우리 나라의 암울하고 참담한 현실과도 같았다고 그녀는 설명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그녀는 숨이 막힐 듯한 열정과, 고뇌하는 인생, 완벽한 예술, 완전한 예술의 극치를 표현하고자 혼신을 다하여 춤을 추기를 원했고 추었다고 자부한다. 그렇듯 혼을 불어넣은 그녀의 춤은 역사가 진화하듯 그와 더불어 그의 일생을 통해 춤으로서 개인 최승희의 진화를 꿈꾸었고, 그것은 또한 이 나라 민족혼과 예술혼의 조화로운 승화로서 조선의 불멸의 춤꾼 최승희로 영원히 살아 있고자 염원함과 의지의 발로 였으리라.
오늘 우리들에게 최승희야 말로 스승을 뛰어넘고 국가를 뛰어넘어 세계의 무대에서 당당히 우뚝 선 동양과 조선의 춤꾼 최승희로 거듭난 선각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두울, 개인적으로 나는 그녀의 보살춤이 생각나서 이 책을 흔쾌히 집어 들었다. 이제 그녀는 가고 없고 그러나 그 춤은 어딘가에 누군가의 숨결과 더불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기에 기회가 닿으면 꼭 보살춤을 보고 싶다. 나는 언제가 TV에 최승희로부터 보살춤을 배웠다고 하는 춤꾼의 손동작을 보고 TV속으로 들어가 확인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었다. 정말이지 꼭 한 번 보고 싶은 열망 가득하였는데 자서전을 써치하던 중 이 책을 보고 반가이 골라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별로다. 186쪽에 불과한 이 책은 춤꾼 최승희의 생애를 다 담아내지 못한 느낌이다.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식으로 배우고 처세하며 살았다. 그의 운명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말해준다. 그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지식인으로 그의 춤으로써 유명세를 떨치며 여러 사람들 가운데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가 일제 치하의 시절이라 그녀는 친일했고 친중했으며 또 세계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며 우리 민족의 정신과 우리의 춤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몸부림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대게의 모든 국민들이 일본의 피압박 속에서 나라 잃은 설움에 착취당하고 있을 때, 재능과 기회를 살려 일본이라는 무대에 진출하여 자유와 호사를 누린 것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그런 그는 해방 후 조국의 품에 돌아와 안기지 못하고 그의 삶과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월북하기까지 했다. 그곳에서 남편 안막은 결국에 숙청을 당하였고 최승희가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그의 생애가 오죽이나 답답하고 험난한 것이던가.
그녀는 살아서도 최승희요 죽어서도 최승희이다. 단지 그때 이 나라 조선의 현실이 너무도 암울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기구한 운명만큼이나 한 개인으로서의 그녀의 삶과 재능도 기구할 수밖에는 없던 시대에 태어난 우리 대한 조선의 딸인 그를 두고 친일파라거나 월북 하였다고 해서 이리 저리 우리의 문화들을 다 빼고 나면 우리의 역사에서 남아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해 본다. 이는 지난 역사가 이들을 심판하기보다 후대가 지난한 역사를 이해하고 우리의 민족혼과 문화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고 기리며 발굴하고 보존해 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초보의 글쓰기를 하는 나는 인간 최승희가 한 인간으로서 시대를 살아간 큰 인물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일본인으로 혹은 중국사람처럼 살게 된 것은 그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우리는 배우고 익혀서 더 나은 삶을 구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이라는 우리 민족의 이름과 함께 인간 최승희와 여인 최승희가 남기고 싶었을 민족혼과 예술혼에 대해 나는 느끼고 싶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는 없다. 이 책은 의도된 자랑과 변명과 경력위주로 쓰여 진 감이 없지 않다. 최승희는 죽었고 누군가에 의해 재본된 듯한 최승희는 어쩐지 무대 위의 인형극처럼 의도된 조립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서전은 논문이나 작품집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서전은 본인의 정신으로 본인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에 의해 육필로 쓰여야 제 맛이 나고 그 밖의 다른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한다.
세엣, 최승희는 춤뿐만 아니라 음악도 잘 했고 문학도 좋아했는데 그의 그러한 뛰어난 재능처럼 글솜씨도 대단하게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힘이있게 느껴진다. 다만 시대상 마음 놓고 자유로이 표현하지 못한 감이 들기는 해도 그 시절 그 때 이 정도라면 가히 파격적 예술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문체는 왠만한 소설가를 뺨칠 정도로 간결하고 메시지 전달력도 정확함이 돋보인다. 전체적 짜임도 나쁘지 않고 다만 조금 안타까운 것은 더 많은 내용과 이야기거리가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운 감이 들고, 좀 더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였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왜냐하면 의도된 듯 약간의 무슨 홍보책자 같은 생각이 드는 내용과 구성으로 변질된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네엣, 책 표지에 대하여
책의 겉표지가 검정 바탕에「불꽃」이라는 은색의 책 제목의 활자와 더불어 마치 물속 고기들의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듯하다. 활자체가 ‘불’이라는 글자는 마치 홀홀 타오르는 불처럼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솟아오르는 듯하고, ‘꽃’이라는 글자는 정말 한 다발의 꽃의 생애를 예술가의 인생과 함께 살짝 늘어뜨려 마치 가냘픈 여인의 숨결을 부드럽게 감싸는 옷자락처럼 혹은 꽃처럼 수줍고도 정갈하며 가지런한 향기를 뿜어내어 은은하고 고요하다.
나는 어느 출판사나 그 책의 제목과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함축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여, 출판사가 작가와 독자 사이를 최대한 아우르며 그 책에 저자와 독자와 함께 녹아 스며들듯 혼신의 힘을 쏟아 한권의 책을 완성시켜 나가는데 조금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책은 사람이고 인격이며 우리의 과거고 역사이며 동시에 현실이고 미래의 희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온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특히나 제목의 활자체가 책 내용과 아주 잘 조화된 점이 돋보인다.
IP *.70.72.121
최승희崔承喜 : 1911.11.24 ~ 1969.8.8
북한의 무용가로 소개된다. 일제 치하 시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임용을 대기하던 중 오빠 최승일의 도움으로 일본인 무용가 石井漠(이시이 바쿠)로부터 춤을 사사 받게 되어 그의 무용단에서 활동한 후, 조국으로 돌아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한국의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고국의 민족 현실과 문화적 인식의 낙후 등으로 경제력에 쫓기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며, 구미 각국의 순회공연을 통해 ‘東洋의 舞姬’로 불리며 우리 춤에 대한 연구와 함께 동양을 대표하는 춤꾼으로서 당당히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자연히 친일 무용가로 활동하다 일제가 항복하자 돌아올 조국이 없어진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하여 평양에서 조선 춤의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힘쓰며 살다가 죽은 것으로 전해지나 그의 사망에 대하여 여러 추측이 난무한데, 남편 안막이 북에 의해 숙청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 더 자세한 내용을 아래의 두산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이견이 있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오빠 최승일(崔承一)을 따라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열린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발표회를 구경한 것을 계기로 그의 연구생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과 1928년 연이어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경성공연에 출연하여 유명해졌으며,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1930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비롯해 4회의 신작발표회를 가졌으며, 그 후 한성준(韓成俊)에게 고전무용을 배움으로써 창작무용의 뿌리를 조선춤에 두게 되었다. 1931년 문학운동가 안막(安漠)과 결혼, 1933년 이시이와 합류하여 1934년 일본청년회관에서 신작발표회를 열어 승무·칼춤·부채춤·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 격찬을 받았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이어 1937년 구미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고, 1940년 미국을 비롯한 남아메리카대륙까지 진출, 세계적 무용가가 되었다. 1942년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도쿄[東京]로 돌아와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독무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광복 후 위문공연을 하였다는 이유로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을 받았고,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였다.
1946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전쟁 중인 1950년 말에는 베이징[北京] 중앙희극원에서 무용반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으나,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연구소도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었다. 그 후 <조선민족무용 기본>, <조선아동무용극 기본> 등의 저서를 냈으며, 1967년 숙청당하였다. 한국에 신무용의 뿌리를 내린 그녀의 작품세계의 근원은 한국의 민속춤이었다.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과 동양의 신비한 매력이 담긴 춤사위로 세계 각국의 칭송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 무용계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2006년 3월에 전 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을 함광복 씨는 재미동포신문 신한민보 1938년 2월 3일자에서 최승희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 다음은 최승희 기념 사업회를 통해 옮겨온 내용이다.
『1937년 미 대사관의 소개로 바킨스라는 흥행사를 소개받아 1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등에서 4차례의 공연을 갖는다. 그 뒤 NBC 라디오방송국 흥행회사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미국의 2대 매니저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는 3번째의 동양인 예술인이 되었다. 평론가들은 균형 잡힌 몸매, 정교한 손, 조각적인 동선, 우아함과 격정적인 매력을 갖춘 춤이라고 극찬하였다.
2년간 유럽과 남미 순회공연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최승희는 '동양의 무희', '세계적 무희'로서 첫 관문을 통과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제 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 라반(Lavan, R.), 비그만(Wigman, M.), 리파르(Lifar, S.), 안튼 돌린 등과 나란히 심사위원이 되는 영광을 주었다.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 S.)의 기획 아래 NBC 전국 체인과 제휴 하면서 미국에서 10회, 프랑스에서 23회, 벨기에에서 9회, 네덜란드에서 11회, 남독일에서 2회, 그리고 중남미에서 61회 등 약 150회에 달하는 서구 공연을 하였다. 동양적인 무용예술에 매료된 유럽 지식인들은 최승희의 팬임을 자칭했다.
피카소와 마티스, 로맹 롤랑과 가와바타 야스나리, 주은래 등이 최승희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특히 피카소는 그 감동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또 로버트 테일러가 영화출연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42년 12월 6일(동경의 제국화랑에서는 '춤추는 무희' 최승희를 주제로 한 최승희 무용화 관람회가 열림)일본으로 돌아온 지 4개월 만인 그해 일본 제국극장(수용인원 2천 명)에서 17일간 24회하는 기록적인 장기공연을 가진 것이다.
이것으로써 그녀는 세계 최초의 장기 독무 기록을 세웠으며 관객은 매회 초만원이었다. 대표작과 조선춤뿐 아니라 일본춤, 중국춤까지 선보임으로써 새로운 춤을 위한 시험 무대로 삼기까지 하였다. 이후 1944년 1월 27일부터 2월 25일까지 동경 제국극장에서의 20일간 23회 일본 장기 공연을 하게 된다.
발레로 시작한 그녀의 춤은 현대무용과 서양의 캐릭터를 거쳐 1930년대부터 연구한 한국춤, 유럽공연 이후부터 시도된 동양무용의 세계를 뻗어 갔다. 그녀의 춤 동작은 우아하다기보다는 흥겨운 멋이 있었도 낙천성과 풍자 희극적인 요소가 강하여 움직임이 매우 역동적이었다.
춤 동작 이외에 표현력에서도 남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을 중심으로하는 얼굴 표정이 작품마다 달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었다.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 무용 100년>에 의하면 1964년까지 평생 모두 310편 이상의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그 가운데 120여 편이 한국무용이었고 나머지는 현대무용, 동양무용, 일본무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공연 기록은 통산 2천 5백회 이상이었다. 』
2. 내 마음속에 들어온 글귀
1 영혼의 몸짓
학교를 마칠 때까지
어린 나의 가슴속에는 늘 예술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는 매와 같이 높이 날아서 나의 예술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소망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기구하고 험난했다. 그러한 나의 소망과 정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벌써 몇 번째 쓰라린 맛을 보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생활을 짓누르고 있는 경제 문제 때문이었다.
예전에 우리 집은 소위 조선에서 말하는 양반의 가문으로, 어느 정도 풍요한 생활을 누려 왔다. 그러한 까닭에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에는 아무런 부족함과 궁색함이 없이 따뜻한 비잔 이불과 요 위에서 세상의 괴롭고 마음 아픈 불행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면서 지냈다. p10
나는 어린 비둘기와 같이 어머님과 아버님께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것도 아침 이슬처럼 잠깐 동안의 시간이었다. p11
나와 서모庶母
작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다. 그분은 본래 남의 첩 노릇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당당한 양반 집안의 규수로서, 어느 양반 댁의 당당한 신사紳士에게 시집을 갔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이 일찍 죽고 말았다.
마땅히 과부가 된 작은어머니는 그대로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인해 혼자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혼인이란 것도 생각지도 않은 악당들에게 속아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또다시 세상의 차디찬 물결 위에서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쯤 화려한 생활을 하는 나의 아버지와 이런 환경에 처한 작은어머니가 만나 뜨거운 사랑으로 연을 맺게 된 모양이었다.
오빠와 나는 이 아버님의 첩을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인자한 품위가 환하게 빛나는 어머님과는 달리 이 두 번째 어머니를 언니나 아주머니를 대하듯이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맞아들였던 것이다. p16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귀금속과 보석 같은 것을 하나씩 팔아서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이미 몰락해 버린 아버지로부터 절연이 선고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동시에 별다른 방책이 없던 그녀는 가난하고 순결한 생활에서, 동시에 별다른 방책이 없던 그녀는 가난하고 순결한 생활에서, 개미가 먹이를 하나씩 옮겨 나르듯이 자기의 몸을 깎으면서까지 우리 식구들을 부양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작은어머니의 존재가 이성적으로는 이미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부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나 역시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 점잖게, 그야말로 옛날 대갓집 본처로서 모든 일을 관대하게 보시는 어머님의 가슴속 깊이, 이 작은어머니의 존재가 얼마나 괴로움과 쓰라림을 주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람의 마음대로는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버지는 결코 나쁜 어른이 아니었으며, 또한 서모도 결코 미워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님만 불쌍하게 생각 되었다. 어린 나의 마음은 어찌할 수 없는 분노로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다른 방도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서모는 어쩐 일인지 아버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아주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었다. 또한 나의 어머님에게도 마치 자신의 친언니에게 하는 것처럼 깍듯하게 그녀를 공경하며 성실하게 대해 주었다. p19
나의 결심과 나의 성격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만큼 마음이 약했으나,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힘으로 무너져 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늙어 가시는 양친이 남은 인생을 안락하게 해드려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몇 번이나 했다.
내가 학교에 다녔던 때는 지금과 많이 달라서, 나는 우리 학급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그리고 다른 애들보다 나이도 어렸던 까닭에 선생님은 물론이고 친구들이 나를 무척 사랑해 주었다.
남들이 내게 마음이 연약하다고 말하지만 성격은 매우 밝고 확실하다는 말을 그들로부터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조금이나마 내가 의지가 강하고 노력하는 여성처럼 보이는 것도 여학교 시절에 겪은 고생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나의 성격은 승일 오빠로부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오빠는 진보적 ‘인텔리’로서 문학가였다. 신극 방면에 활동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나에 대한 오빠의 애정과 지도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수시로 나를 격려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장려해 주었다.
오빠는 나에게 사물에 대한 정당한 관찰과 이해의 길을 열어 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어떠한 난관에도 버티고 헤쳐 나갈 용기를 안겨 주었다.
나는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아 주로 시와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꿀처럼 달고 꿈처럼 헛된 작품들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을 뿐더러 아무런 재미를 주지 못했다. 나는 주로 작품들이 현실 속을 파고 들어가는 생활 의식이 풍부한 작품을 애독하였다. 석천탁목石川啄木의 시와 노래를 한없이 애독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생각과 감정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무용의 밑바탕을 흐르는 힘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렵게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내가 앞으로 나갈 길에 대해서는 뾰족한 방책이 없었다. 한번은 이러한 일이 있었다. 모교의 교원 회의 결과, 나를 학교 급비생給費生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일 년 동안 있다가 동경에 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p22
음악 교사인 김영환金永煥 선생님은 내가 음악가가 될 소질이 있다고 보시고 나에게 “너는 반드시 음악가가 되어라.”하고 당부하셨다.
김 선생님과 오빠가 자기 일처럼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의논한 결과,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가장 돈이 적게 드는 사범학교師範學校에 입학하라는 것이었다.
오빠와 김 선생님의 뜻에 따라 나는 사범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에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입학시험에 합격하자, 모두들 나의 손을 잡고 즐거워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p23
석천탁목 선생의 시와 노래는 내 안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나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생에 관한 문제에 푹 빠져있었다. p24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아버님과 어머님만은 이내 오빠와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 시작했다.
석정막 선생님은 여러 가지로 나를 시험한 뒤에 무겁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입문을 승낙한다.”
참으로 어렵게 받아 낸 허락이었다. p26
고향을 떠나 새로운 연구에
무장경武藏境에 있는 석정 선생님의 연구소에서 나는 정성을 다해 무용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것은 죽을힘을 다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석정 선생님도 열성으로 나를 지도해 주었다. 나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열과 성을 다해 배웠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연구해야 한다는 목표를 잊지 않았다. p32
“이곳 사람들은 우리 집이 구차해서 딸을 기생으로 팔았다고들 수군거린단다. 너는 기어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란 듯이 돌아와서, 이러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해 주어라.”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가슴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하였다.
‘내 반드시 훌륭한 무용가각 되리라, 꼭!’
고향에 있는 승일 오빠는 나의 몸을 걱정해 주고 오로지 나를 격려해 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오빠의 편지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조선 사람으로서 지금껏 무용에 뜻을 둔 사람은 없다. 나는 조선을 대표해서 향토의 전통과 풍습을 다시 살리는 멋진 무용을 만들어 내겠다.’
이런 생각으로 나에게 맡겨진 커다란 일에 책임감과 함께 높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p33
이러한 나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는 석정선생님 부부는 나의 모든 어려운 점을 세심하게 돌보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보다도 더한 사랑으로서 나를 지도해 주었다. 정든 고향 땅을 떠난 나에게 선생님 부부는 아낌없이 정을 쏟아 주었다.
그 열성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지도로 인해,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수업 시절을 너무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한 선생님이 갖고 있는 무용에 대한 불타는 정열,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전진하는 열성과 진실한 태도가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큰 교훈이 되었다. 참으로 위대한 교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행복하고 비장한 삼 년 동안의 수업 시절이 어느 틈에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p34
독립 무용 연구소 개설
비록 나의 힘이 아직은 부족하지만 고향에서 기어이 새로운 무용 예술을 뿌리내려 보고자 단단히 마음먹었다. 허물어져 가는 우리의 고전무용을 어떻게든지 부활시켜 보고자 하는 꿈이 너무나도 간절하고 컸었다. 이러한 결심으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삼 년 동안에 아홉 번의 신작 무용을 발표하면서 미숙하나마 나의 무용 인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무용이라는 예술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상대로 새로운 무용을 알리는 작업은 실로 몽상에 가깝다는 사실에 심한 환멸을 느끼면서 슬피 울기도 했다.
일 년 동안 괴롭고도 험한 싸움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 다행이도 차츰 영화와 연극처럼 무용도 그 수요와 지지층이 늘어가는 추세였다. 즉, 무용 애호가들이 점차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우리들은 비로소 이러한 현상에 커다란 행복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정신적으로 자위하는 일시적인 인식의 차이일 뿐, 물질적으로는 괴로움의 깊이가 다할 뿐 이었다. p38
그 첫째 원인은 무용단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연구생들에게 월사금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활비에서부터 소소하게 용돈 쓰는 일까지 모두 나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몹시도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예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단독 공연 이외에는 어떠한 공연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념 하나로 나는 조그마한 연구소를 삼 년 동안 지켰다. 그러다가 뜻밖에 1933년 봄, 나는 또다시 일본 동경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p39
결혼전후
고향에 돌아와 머물고 있는 동안 나의 무용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내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일상생활도 그렇지만, 나의 예술적 소양이 아직도 부족하고 미숙하며 또한 여성으로서의 내 자신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 활동이나 일상생활에서도 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p40
결국 1932년 봄, 내 나이 스무 살 때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하며 서울에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조선에서 무대에 서는 여자라면 거의 모두가 사내들의 장난감이 되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넘나들며 무절제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결혼은 말없는 항의와도 같았다. p41
한 사람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바른 길을 걸어갈 것과 무용가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 서로 상충되는 일이라, 두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착한 아내와 평범한 어머니가 되는 길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길은 반드시 양립하게 되며, 또한 양립시키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여 나는 변함없이 무용 작업을 계속하였다. 제5회 작품을 발표할 때는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p42
출발전야
석정막 무용회의 밤.
이 밤은 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인상 깊은 밤이었다. 종소리가 울리자 불이 꺼지고 ‘제라진’을 통해 코발트 빛과 그린 빛이 교착하는 가운데 무슨 곡조인지 장중한 피아노의 멜로디가 시작되면서 석정막 씨의 독무<수인囚人>이 시작되었다.
쇠사슬에 얽혀 무거운 걸음으로 무대를 밟는 그의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아, 그때 나는 ‘저것은 춤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껏 춤이란 기쁘고 즐거울 때만 추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무언가 무겁고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그 굵은 쇠사슬을 끌고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고는 두 팔을 들어 환희를 표하면서 무대에 고꾸라지고 만다. 다시금 종소리가 울리면서 조명이 꺼지면서 천장의 전등이 켜진다. p52
누이에게 주는 편지 - 최승일
“그런데 오빠, 나는 대관절 내년에 졸업을 하게 되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너는 무엇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니?”
“음악학교에 가는 것.”
“그렇지. 너는 노래를 잘 부르고 율동체조도 잘 하겠다, 가만히 있어 봐.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
“무슨 생각?”
“승희야, 내 얘기 좀 들어 볼래?” 네가 아직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너한테 말해 보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이야기책을 번역하여 어느 달에는 약 사오십 원의 수입이 있기도 해.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도저히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를 거느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머지않아 엄청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예술에 대한 노력은 적어지고 생활을 위해 다른 에너지를 짜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히 월급쟁이 살림꾼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너의 언니는 사상이나 됨됨이가 훌륭한 주부감이니 나는 손도 대지 않겠다. 그리고 너의 작은 오빠는 벌써 중학교에 다니는 몸으로 처자가 있다. 그런데다가 우리 집안에 돈이 없다. 그러니 졸업을 하면 그날부터 다만 몇 푼짜리 날품팔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것은 너 한 사람이다. 가만히 있어 봐. 사람이란 기회가 있는 법이다. 내년 봄을 기다려 보자.” p68
“오빠! 저는 요사이 무용 예술이란 어떤 것이라는 것과 예술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그것은 이런 데서 발견됩니다. 석정 선생님이 처음 독일에서 돌아와 산전경작씨의 반주로 안무된 작품과 요사이 만드는 작품의 차이가 왜 그다지도 정신과 감흥이 다릅니까? 저는 차차 석정 선생님에게 환멸을 느껴갑니다. 요사이 그의 예술에는 詩가 없어요. 그것도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그는 춤을 춰서 수십 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집이 없으니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는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은 마치 관솔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러시아의 제실무용학교에서 우러난 전통적 무용을 부숴버리고 민중의 힘과 노동의 시가 무용화된 예술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독일 워크맨의 무용-이사도라 던컨이나 이진스키의 음악에 종속화된 무용을 박차버리고 무용독자의 생명력을 지닌, 음악이 없는 그의 무용을 보고 싶어요. 오빠! 이것이 나만의 생각일까요, 제게는 너무도 이른 생각일까요? 편지해 주세요.”p69
“오빠! 저는 요사이 몸 성히 잘 다니기는 합니다만 웬일인지 때로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것은 저의 건강 때문입니다. 오빠도 신문이나 잡지에 난 것을 보셨겠지만 스기야먀 씨나 개조사의 야마모도 씨 같은 분은 저더러 보통 사람보다는 세 배 정도의 일을 한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그만큼 바쁩니다. 이러다가 혹시 무대 위에서 쓰러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됩니다. 그러나 일본 전국이 내가 가는 곳마다 환영해 주고 격려 일색입니다. 글러 때마다 저는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한편으로 눈물겹게 기뻐서 어떤 일이 있든지 나는 폭탄과도 같은 위대한 정열을 가졌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끝까지 내가 무대 위에서 고꾸라질 때까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p71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서양으로 싸우러 갑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고 그 민족의 예술도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고요. 애굽埃及이 망했으나 그 민족과 그 민족의 예술은 망하지 아니하였으며 유대猶太는 망했으나 그 민족은 망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중국이 망할지라도, 국가는 망해도 민족은 영원히 망하지 아니한다.” p72
그렇다. 이제 우리 조선은 최승희라는 한 사람이 조선 민족을 세계무대에 내놓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깊이 재인식해야 할 줄로 안다. p73
왜 그런고 하니 가무기歌舞技하면 삼백 년 전의 가무기와는 그 형태가 다르다. 그것은 역사의 진화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조선 리듬이라 하더라도 오백 년 전의 조선 리듬과 지금의 조선 리듬에는 알 수 없는 변화가 있으리라고 믿으며 또 있어야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네가 조심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요즈음 너의 명성을 세상에 떨칠수록 예술가로서 갖기 쉬운 자만심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때로는 예술가들이 대단히 위험한 탈선을 하기 쉬우니 특히 너는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거리끼는 일은 요사이 “최승희는 조선을 팔아먹는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하다면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왜 그런 소문이 있는가 하면 동경에서 조선 춤을 추어서 그것이 평판이 좋다는 말이 나돌아서 어찌어찌하여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자기 민족적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하고 이해하여 그것을 예술화하는 것이 예술가가 해야 할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민족 예술이 되는 동시에 또한 ‘인터네셔널 예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75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괴나리봇짐 짊어지고 지구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 보렵니다.” p76
끝으로 네가 지구를 돌아 조선을 찾아올 때에는 ‘무엇을 어떻게 가져오느냐.’ 그것이 이 오라비에게는 가장 크게 기대되는 일이다. p77
형제에게 보내는 글 - 최승희
자기의 예술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나처럼 아직 미완성의 무용가에게는 한 가지 고통 일 수는 있어도 결코 행복스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태여 내가 나의 무용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 것은 여러 감상자들에게 내 작품 속에서 숨겨져 있는 어떤 독창성에 대해서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감상자들에게 한낱 정당한 비판의 재료만이라도 되어 준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p78
크로이츠베르크의 무용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사하로프적 요소가 그냥 배열되어 표현 되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나 같은 젊은 무용가에게는 그러한 무용의 자립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p79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것은 다만 예전부터 있어 온 진기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무용으로 하여금 자기가 속해 있는 생활에 대한 적응과 자기의 육체적 가능성 위에 서서 표현하는 자기 형성의 획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내가 조선풍 무용을 자기의 레퍼토리 속에 넣는 이유는 결국에 있어서 조선의 무용을 널리 외국에 알려, 비록 절름발을 끌며 가더라도 붙여서 따라가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조선은 오랜 옛날 자기만의 훌륭한 무용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후세에 내려오면서 이 땅의 자손들은 소동파나 두보, 이태백 등을 추억 가운데 암중모색할 줄은 알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자기 겨레의 우수한 예술 유산에 대해서는 오히려 모멸의 눈동자를 돌릴 뿐이었습니다. p80
그랬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 조선의 무용이란 겨우 그 빈사의 상태를 기생들에 의하여 주석酒蓆 같은 데서나 명맥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무용이라고 할 만한 존재도, 그리고 거기에 대한 관련 문헌도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 사람의 아르헨티나, 한 사람의 긱구고로菊五郞도 갖지 못했으며 이렇다 할 만한 무용가라고는 한 명도 없는 이 땅의 무용 현장에 있어서, 나의 고대 예술의 재흥이란 시도는 그렇게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퍽이나 곤란하고 복잡할 것입니다.
나의 조선풍 무용이란 것은 조선에 남아 있는 적은 것을 소재로 삼는다든지 또는 새롭게 창조하여 무대 위에서 이를 소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p81
그리고 나의 이와 같은 민족무용의 양식화에 대하여 혹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한 아무런 독자성이나 창조성을 인증치 않을 것입니다. 나의 이 양식화의 방법이란, 스페인 무용에 있어서 아르헨티나적인 방법이나 인도 무용에 있어서의 우데- 상가- 적인 방법에의 형식적 모방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국제적 경험일 것입니다.
아직 나의 조선풍의 무용이란 것은 완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마는 나는 내가 하는 무용 속에서 동양적인 빛과 향기를 캐내어 찾아보자는 데에 그 뜻이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나의 예술의 본의가 숨어 있는 것이며 내가 일생을 바쳐 걸어 나갈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의 이 동양적인 무용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나의 무용이라 것이 과연 창조적인 것이냐 또는 그렇지 않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의 단순한 복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에 대한 해석의 상위相違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최후에 나는 근대 무용이란 것과 민족 무용의 양식화된 것과의 거리를 얼마간이라도 단축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82
나는 이번 길에 세계무대에 나서서 세계 각국의 모든 무용을 똑바로 배우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서 내 무용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자립성을 밝혀 보겠습니다. p83
고뇌의 표현 - 최승희
내가 무용의 길로 나서게 된 동기는 석정막 선생님의 공연을 서울에서 관람하고 감격했던 때부터입니다. 그전부터 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일생의 목표를 삼으리라고 결심한 것은 그때입니다. 석정막 선생님의 춤에 매료된 것은 그의 춤이 보여주는 어두움 때문이었습니다. <수인囚人>이라든가 <멜랑콜리>에는 인생의 고뇌를 표현한 억센 힘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기구한 운명에 시달리던 조선 민족의 고뇌를 무용을 통해서 세상에 호소하고 싶은 생각이 그때 작은 내 가슴에도 하나 가득 찼던 것입니다. p86
내가 실력 이상으로 유명해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한편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요즘의 평가가 진정으로 나의 예술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만, 아무리 뽐내도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오늘 이후의 예술이 불안스럽고 겁이 납니다. 그러므로 더 힘껏 노력을 해서 만약 현재 인간의 절반이 일종의 유행처럼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절반을 내 예술의 참된 지원자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전심전력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여자의 몸은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도무지 행동이 대담해지지 못하고 있으니....... .
조선무용을 말하자면 원래는 퍽 원시적인 것인데 선이 고운 것이 그 특색입니다. 일본 무용처럼 부분적인 움직임이 아니고 전신을 이용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단순하고 내용이 빈약한 것이 흠입니다. 지금 내가 추는 춤은 모두, 어렸을 적에 본 것들입니다. 기생 춤도 그렇고 민족무용도 그렇고 조선무용을 이제야 발표했습니다만 벌써 오래전부터 생각해 내려온 것들입니다. p88
민속 무용으로서 독창적 경지를 전개해 나가기 위하여 본령인 서양무용 가운데 그 민속 무용을 잘 섞어 넣어가야 한다는 데에 나의 고심이 있습니다. 향토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나머지 너무 그쪽으로 쏠려 사도에 빠져서는 안 되겠으므로 나는 항상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용가로서의 기교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월한 향토예술을 세상에 소개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사도에 빠지지 않는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놓고 싶습니다.
숨이 막힐 듯한 열정과, 고뇌하는 인생, 완벽한 예술, 완전한 예술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 저 크로이츠베르크의 춤을 보고 나는 그 위엄에 완전히 압도당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어두운 인생을 내다보는 듯한 무용이 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정말로 존경할 만한 무용가입니다. p89
2 민족혼의 승화
무용은 마음의 창窓 - 무용가 석정막
인기라는 것을 되지 못하게 경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속을 쪼개어 보고 싶다.
인기라는 것은 갖고 싶을 때 마음대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권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노력과 그것으로써 따라오게 되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이나 우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만은 정확한 사실이다. p93
나는 일찍이 런던 체재 중에, 지금은 고인이 된 이사에의 바이올린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음악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 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모든 예술 작품을 대할 때는 이사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무용을 보는 것은 무용 작품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다만 눈으로 보기만 하는 무용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접촉을 의미하는 무용이다. 무용을 통해서 여사 자신의 마음과 만났을 때에, 비로소 보는 삶이 마음을 뛰게 하는 무용인 동시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야 마는 듯한 그 기백은 그녀의 무용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곧 대중적 의미와도 분류되는 것이다. p95
무희舞姬 최승희론論 - 소설가 川端康成
천혜의 체구와 재능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p107
민족 무용가로서의 최승희 - 평론가 園池公功
최 여사의 무용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말하는 바와 같이, 그녀는 참으로 우수한 육체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무용가로서 행복한 일이다. p111
최승희의 무용 예술 - 板단直子
그녀는 꾸며낸 형식을 춤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는 데에 즐거움을 가지고 춤을 추는 것이니, 춤과 자기가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춤이 ‘몸에 붙어 있다’ ‘춤이 참으로 몸에 붙어 있다’는 경지는 흔히 하는 말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p140
장쾌한 진로를 축복한다 - 평론가 박영희
끝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돌진해 나아가는 그녀의 용맹스러운 자세야말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신뢰를 자아낸다. p155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기대 - 화가 안석주
나는 끝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값싼 저널리스트들의 변하기 쉬운 그 붓끝을 경계하고, 자중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위대한 최승희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어느 때든지 고국에 돌아와서 조선의 예원을 위하여 위리와 함께 노력해 보자고 감히 제안한다. p171
3. 내가 저자라면
하나, 역사와 인생의 구름을 뚫고 폭탄 같은 위대한 정열로서 자신을 진화시켜나간 시대의 춤꾼 최승희
이 책은 1911년부터 1969년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직접 쓴 원고를 정리해 묶은 것으로 본문을 보면 고어체가 그대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최승희를 두고 말한다. 춤이 몸에 붙어있는 여인 최승희라고. 그녀는 참으로 우수한 육체의 소유자이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무용에 대한 창조성과 자립성을 위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추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사랑한 춤은 어두움을 표현한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우리 나라의 암울하고 참담한 현실과도 같았다고 그녀는 설명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그녀는 숨이 막힐 듯한 열정과, 고뇌하는 인생, 완벽한 예술, 완전한 예술의 극치를 표현하고자 혼신을 다하여 춤을 추기를 원했고 추었다고 자부한다. 그렇듯 혼을 불어넣은 그녀의 춤은 역사가 진화하듯 그와 더불어 그의 일생을 통해 춤으로서 개인 최승희의 진화를 꿈꾸었고, 그것은 또한 이 나라 민족혼과 예술혼의 조화로운 승화로서 조선의 불멸의 춤꾼 최승희로 영원히 살아 있고자 염원함과 의지의 발로 였으리라.
오늘 우리들에게 최승희야 말로 스승을 뛰어넘고 국가를 뛰어넘어 세계의 무대에서 당당히 우뚝 선 동양과 조선의 춤꾼 최승희로 거듭난 선각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두울, 개인적으로 나는 그녀의 보살춤이 생각나서 이 책을 흔쾌히 집어 들었다. 이제 그녀는 가고 없고 그러나 그 춤은 어딘가에 누군가의 숨결과 더불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기에 기회가 닿으면 꼭 보살춤을 보고 싶다. 나는 언제가 TV에 최승희로부터 보살춤을 배웠다고 하는 춤꾼의 손동작을 보고 TV속으로 들어가 확인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었다. 정말이지 꼭 한 번 보고 싶은 열망 가득하였는데 자서전을 써치하던 중 이 책을 보고 반가이 골라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별로다. 186쪽에 불과한 이 책은 춤꾼 최승희의 생애를 다 담아내지 못한 느낌이다.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식으로 배우고 처세하며 살았다. 그의 운명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말해준다. 그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지식인으로 그의 춤으로써 유명세를 떨치며 여러 사람들 가운데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가 일제 치하의 시절이라 그녀는 친일했고 친중했으며 또 세계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며 우리 민족의 정신과 우리의 춤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몸부림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대게의 모든 국민들이 일본의 피압박 속에서 나라 잃은 설움에 착취당하고 있을 때, 재능과 기회를 살려 일본이라는 무대에 진출하여 자유와 호사를 누린 것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그런 그는 해방 후 조국의 품에 돌아와 안기지 못하고 그의 삶과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월북하기까지 했다. 그곳에서 남편 안막은 결국에 숙청을 당하였고 최승희가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그의 생애가 오죽이나 답답하고 험난한 것이던가.
그녀는 살아서도 최승희요 죽어서도 최승희이다. 단지 그때 이 나라 조선의 현실이 너무도 암울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기구한 운명만큼이나 한 개인으로서의 그녀의 삶과 재능도 기구할 수밖에는 없던 시대에 태어난 우리 대한 조선의 딸인 그를 두고 친일파라거나 월북 하였다고 해서 이리 저리 우리의 문화들을 다 빼고 나면 우리의 역사에서 남아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해 본다. 이는 지난 역사가 이들을 심판하기보다 후대가 지난한 역사를 이해하고 우리의 민족혼과 문화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고 기리며 발굴하고 보존해 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초보의 글쓰기를 하는 나는 인간 최승희가 한 인간으로서 시대를 살아간 큰 인물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일본인으로 혹은 중국사람처럼 살게 된 것은 그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우리는 배우고 익혀서 더 나은 삶을 구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이라는 우리 민족의 이름과 함께 인간 최승희와 여인 최승희가 남기고 싶었을 민족혼과 예술혼에 대해 나는 느끼고 싶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는 없다. 이 책은 의도된 자랑과 변명과 경력위주로 쓰여 진 감이 없지 않다. 최승희는 죽었고 누군가에 의해 재본된 듯한 최승희는 어쩐지 무대 위의 인형극처럼 의도된 조립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서전은 논문이나 작품집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서전은 본인의 정신으로 본인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에 의해 육필로 쓰여야 제 맛이 나고 그 밖의 다른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한다.
세엣, 최승희는 춤뿐만 아니라 음악도 잘 했고 문학도 좋아했는데 그의 그러한 뛰어난 재능처럼 글솜씨도 대단하게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힘이있게 느껴진다. 다만 시대상 마음 놓고 자유로이 표현하지 못한 감이 들기는 해도 그 시절 그 때 이 정도라면 가히 파격적 예술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문체는 왠만한 소설가를 뺨칠 정도로 간결하고 메시지 전달력도 정확함이 돋보인다. 전체적 짜임도 나쁘지 않고 다만 조금 안타까운 것은 더 많은 내용과 이야기거리가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운 감이 들고, 좀 더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였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왜냐하면 의도된 듯 약간의 무슨 홍보책자 같은 생각이 드는 내용과 구성으로 변질된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네엣, 책 표지에 대하여
책의 겉표지가 검정 바탕에「불꽃」이라는 은색의 책 제목의 활자와 더불어 마치 물속 고기들의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듯하다. 활자체가 ‘불’이라는 글자는 마치 홀홀 타오르는 불처럼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솟아오르는 듯하고, ‘꽃’이라는 글자는 정말 한 다발의 꽃의 생애를 예술가의 인생과 함께 살짝 늘어뜨려 마치 가냘픈 여인의 숨결을 부드럽게 감싸는 옷자락처럼 혹은 꽃처럼 수줍고도 정갈하며 가지런한 향기를 뿜어내어 은은하고 고요하다.
나는 어느 출판사나 그 책의 제목과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함축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여, 출판사가 작가와 독자 사이를 최대한 아우르며 그 책에 저자와 독자와 함께 녹아 스며들듯 혼신의 힘을 쏟아 한권의 책을 완성시켜 나가는데 조금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책은 사람이고 인격이며 우리의 과거고 역사이며 동시에 현실이고 미래의 희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온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특히나 제목의 활자체가 책 내용과 아주 잘 조화된 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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