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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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I. 저자에 대하여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 조셉 캠벨. 하지만 신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랬다. 그렇더라도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조지 루카스는 그에게 영감을 받아 스타워즈를 만들어 냈다.
조셉 갭벨은 1904년 뉴욕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신화에 대한 관심은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에서 기병대에게 토벌되는 인디언 이야기를 다룬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본다. 그는 거기서 기병대장이 아닌 토벌되는 인디언에게 강하게 매혹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그를 신화 해설가로 만든 사건이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그의 종교가 무척 궁금했다. 책 속에서 끝내 그의 종교를 알 수 없었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다. 아마도 신화 해설가로서 어느 특정 종교에 귀의 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일까 그의 신화이야기는 객관적인 토대를 갖추었다.
그가 동서양의 종교를 두루 경험하게 된 것은 1924년 유럽여행 중에 만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그 후 그는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진다.
1927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고, 1928년 뮌헨대학으로 옮겨 산스크리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 괘테와 토마스만의 문학, 프로이트와 융의사상을 공부하였다. 하지만 공부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대공황에 따른 경제적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년 뒤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극빈한 생활 속에서 독서에 몰두하다가, 1933년에 겨우 모교인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의 교사로 임명되었고 수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프레이저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다음 해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되어 이후 38년 동안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캠벨은 1942년 융 학파가 주도하는 볼링켄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어, 인도 예술과 신화에 관한 침머의 연구들을 편집하였다. 194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이 대표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1949년, 볼링켄 시리즈의 하나로 출판되었고 그것은 국립예술문자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훌륭한 신화 강연자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87년 10월 30일, 캠벨은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해 12월, 빌모이어스와의 TV 인터뷰가 방영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외에도,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 』(1972), 『양생 수거위의 비행 The Flight of th Wild Gander』(1969),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 』4부작(1959-1968)과 그이 신화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1974) 등이 있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1p
캠벨..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 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12p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 12p
로마속담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14p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15p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週期)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16p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 - 힌두경전 18p
1. 신화와 현대 세계
“그래요.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이것이 나의 첫 대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5p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6p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8p
‘완전’한 것은, 보고 있으면 조금 싫증이 난다. 이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이것 때문입니다. 28p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29p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29p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29p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0p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再會)랍니다. 31p
결혼은 관계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33p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3p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34p
어떤 문화권이든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36p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게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41p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2p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48p
서구에서는 특정한 집단 문화에 제국주의적 밀어붙이기를 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만물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밀어붙이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본성의 세계를 열게 된다면 가능성은 그 안에 있습니다. 59p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禪師)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59p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61p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1p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62p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생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응,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해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73p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74p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76p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77p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79p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81p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6p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86p
폴리네시아 속담처럼, 때로는 “고래 잔등 위에서 송사리를 낚는” 수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고래 등에 서 있습니다. 87p
꿈꾸는 시간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잠들어서,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삶의 조건과, 그 조건과 관련된 우리 현세적 삶의 현장을 꿈꾸게 되는 시간을 말하지요. 87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고 깊은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p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89p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89p
융 박사는 꿈에는 두 종류, 즉 개인적인 꿈과 원형적인 꿈 혹은 신화 차원의 꿈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인적인 꿈은 그 개인의 연상을 통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 그 사람 삶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느냐, 그 개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느냐, 이런 것을 알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꿈이 신화의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올 때도 있습니다. 91p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91p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2p
뱀은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96p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96p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96p
뱀은 시간의 장(場),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97p
이름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그것은 모든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101p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 한다”고 했지요. 102p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102p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大倧敎)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3p
신 혹은 창조자가 모신(母神)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모두 이 모신의 몸입니다. 몸 아닌 곳은 없습니다. 103p
밀교에 따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필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104p
에덴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입니다. 105p
왜 우리도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잖아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109p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113p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도덕경 114p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17p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118p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어 줄 수는 없는 거지요.
소년은 개미 떼를 가리키며 대답합니다.
“이게 모두 이 땅을 거쳐간 인드라다. 여러 겁을 통하여 이들은 저 바닥의 개미에게 고귀한 신으로 환생한다. 환생 한 뒤, 괴물의 정수리에 벼락을 떨어뜨리고는 ‘나 정말 대단하구나’하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130p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p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다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34p
"나무 위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아주 약삭빠른 녀석들이다. 그런데 한 마리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는데, 다른 한 마리는 먹지 않고 관찰만 한다.“
자, 나무의 과실을 먹는 새는 그 과실을 죽이고 있지요. 그러나 관찰만 하는 새는 필경은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 결국, 생명은 생명을 먹고서 산다는 이야깁니다. 136p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137p
"선생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138p
3. 태초의 이야기꾼들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라는 관념은 보이지 않는 사회(즉 저승)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그 사회는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승을 떠나면 나타납니다. 145p
사람은 죽임을 통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관계 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내가 죽인 짐승도 죽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것으로 됩니다. 태고의 사냥꾼들에게는 동물신이 있었어요. 145p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156p
'아름다움‘이라는 문제에 생각이 미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일까? 새들의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새들에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들이 지닌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일까?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158p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159p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162p
무의식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을 무의식에 빠뜨리는 다른 방법도 있다고 해요. 이런 상태가 끝나면 무의식에 빠져 있던 사람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순식간에 의식 상태로 되돌아오는 거지요. 172p
블랙 엘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다.”
그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성스러운 산이라고 한 것은 사우드 다코타에 있는 하아네이 봉우리입니다.
이어서 그가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
이것이 진짜 신화적인 깨달음입니다. 그는 국지적(局地的)인 숭배상(崇拜像)인 하아네이 산과, 세계의 산이라는 암시적 의미를 확연하게 갈라놓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세계의 軸)을 말합니다. 173p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 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서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175p
4. 희생과 천복(天福)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0p
사람들은 동물과 식물을 신화화함으로써 땅을 창조의 성소로 요구합니다. 이들은 땅에다 영적인 힘을 투자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신전 같은 곳, 말하자면 명상의 자리가 됩니다. 180p
사르트르 성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제단은 십자가의 중심에 있지요. 이 구조는 상징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많은 교회가 극장처럼 지어집니다. 보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당은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이지 ‘쇼’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쇼’를 가슴으로 감지합니다. 우리는 열여섯 살 때부터 이미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186p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신성(神性)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다고요. 중세의 성모 숭배 신앙 체계에도 이 정신이 있었어요. 바로 이 정신에서 13세기 프랑스의 성당 문화가 흘러나옵니다. 189p
식물은 스스로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195p
나무의 경우, 사지를 자르면 다른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도마뱀 종류가 아닌 한, 동물의 사지는 한번 잘리면 다시 자라나오지 않지요.
따라서 숲과 농경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문화는 먹기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195p
세상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네 민족의 이름은 인류를 의미하는 단어로 부르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는 ‘웃기는 얼굴’이라느니, ‘비뚤어진 코’니 하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붙인다는 겁니다. 200p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1p
죽음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 양자는 한 사상(事象), 즉 ‘존재’의 두 측면이니까요. 205p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211p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18p
"주님, 저에게 가르치셨으면 이들에게도 가르치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르치셨으면 이들이 저를 이렇게 대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가르치시지 않았어도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 주님과 그분 하신 일에 복 있을진저.“ 221p
"신비주의자가,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을 금욕과 죽음을 통하여 반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정통 신앙 사회의 기능이다.“ 221p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5p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6p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p
5. 영웅의 모험
어머니가 영웅이라....... 참 근사한 발상이군요. 232p
[코란]은 “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태 전승에 나오는 영웅은 무서운 시험을 겪어야 보상을 받지요. 233p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233p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34p
톨스토이는 “그 지도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인가, 아니면 무리의 선두에 선 자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234p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나폴레옹은, 20세기 히틀러의 19세기 판입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 역시 무서운 사건이었지요. 235p
그렇다면 영웅주의에는 도덕적인 목표가 있습니까?
도덕적인 목표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구하는 것, 특정 개인을 구하는 것, 어떤 관념을 받드는 것이 될 수 있지요.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지요. (중략)
반대 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235p
선생님의 신화 연구에서 이에 대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인류의 열망과 생각의 표준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인간의 탐색은 결국, 천 년 전에 이 땅에 살았든 천 년 뒤에 이땅에 살게 되든, 우리 인간이 공유하는 열망과 생각을 반영하는 것입니까?
‘통찰의 탐색(vision quest)'이라고도 불러도 좋은 특정한 신화 유형이 있어요. 통찰의 탐색은 홍익(弘益)의 탐색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237p
옛날의 세계는, 영웅이 대적하러 달려나가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영웅의 영적인 준비에 반응하는 세계였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지금은, 우리의 물리학, 마르크시스트 사회학, 행동심리학 등을 통해 해석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자극에 반응하는 범용한 전선(電線) 덩어리에 더도 덜도 아닙니다. 이러한 19세기의 해석이 현대 생활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쥐어 짜내고 만겁니다. 240p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최고 기술자였던 다이달로스는, 자기 손으로 만들었던 크레타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날개를 아들 이카로스에게 달아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말아라.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태양의 열기에 네 날개의 밀랍이 녹을 터이니, 필경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낮게 날지도 말아라.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네 날개를 적실 것이야.” 242p
사람들은 다이달로스 이야기보다는 이카로스 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문제는 이카로스가 아니라 이 우주인을 바다에 추락시킨 날개 속에 들어 있는 태도인데도요.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242p
신화학적 의미에서 그는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요. 만일 이들이 그보다 30년 전에 나왔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에 알맞았을 겁니다.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246p
신화가 지니는 우주론 및 사회학과의 관계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에요. 이 관계는 여전히, 우리가 속한 이 새 세계에 적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255p
잠깐만이라도 이 세상의 기원 신화(起源神話)를 접어두고(기원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이 뭐라고 말해줄 테니까),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게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5p
전설에 나오는 마술은,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부처도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었답니다. 부처는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했지요. 260p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3p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됩니다. 263p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p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271p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273p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276p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77p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278p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口號)였데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279p
예술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상당수의 예술가는 제자에게 이런 식의 홀로 날기를 허락합니다. 285p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285p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296p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6p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연지사가 아닌 게 어디 있어요? 이것은 우연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느냐 여부와 관련되는 문젭니다.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299p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301p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모이어스 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320p
"그대들 남성은, 궁극적인 존재의 신비에게서 힘을 부여받았는데 조금 전에 그대들이 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의 신비는 그대들에게 힘을 부여할 수도 있고 그 힘을 거두어갈 수도 있다.“ 332p
어머니는 모든 자식을 고루 사랑합니다. 멍청한 자식도 사랑하고, 똑똑한 자식도 사람하고, 말썽꾸러기도 사랑하고, 착한 자식도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에게는 자식의 성격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되지요.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가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334p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336p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이 둘의 타락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지요.
죄악으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이 행위가 음유시인들에게는 절대로 지탄을 받아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경험인 거지요.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349p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요. 첫째는 절제, 둘째는 용기, 셋째는 사랑, 넷째는 충성, 그리고 다섯째는 예의 바름입니다. 예의 바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를 이르는 겁니다. 351p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은 사람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를 찬양했지요. 그 상처는, 거기에 그 상처를 낸 바로 그 무기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는 상처였지요. 355p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356p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뜨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어떤 작가는 다음같이 짤막한 시 한줄로 기나긴 성배 전설에 대한 서사시의 서문을 삼습니다.
“모든 행동은 좋게도 결과하고 나쁘게도 결과하느니......”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359p
권력! 권력이에요. 유럽 역사의 근본적인 충동은 권력 충동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 종교 전통으로 흘러들어 왔어요. 362p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 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5p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367p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370p
이 세상에도 지옥은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371p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373p
8. 영원의 가면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 375p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顯現)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이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376p
우리의 삶에서, 우리 몸이 지니는 에너지에서 나오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은 우리 몸 안에서 서로 맹렬하게 갈등한답니다. 377p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378p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건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80p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고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383p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384p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94p
괴테는, 신성(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조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조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395p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을 ‘비바케(viveka)'라고 합니다.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어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자,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째깍, 째깍, 째깍 흐리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404p
III. 내가 저자라면
먼저 신화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제가 감히 한 분야의 선각에게 무례를 범하게 됨을 용서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상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책을 논하기에 전 신화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사람이 태어난다. 삶에 구실을 한다. 그리고 죽음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짐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다시 태어난다. 마음 속 깊이 묻힌다. 그림으로 새겨지더니 어떤 삶은 문자로 그 영원성을 더해 간다. 다시 태어났다. 현현(顯現) 그것은 처음과 끝이 다시 만나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느낀 이 책의 전체적 흐름이다. 솔직히 신화에 대한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단군신화, 박혁거세 등에 대한 이야기도 시험지를 통해 본 것이 전부다. ‘신화의 힘’ 이 책을 30패이지 넘기는데 2시간을 쏟았다. 앞이 막막했다. 400페이지를 15로 나누면 26시간이다. ‘오 마이 갓’ 그러던 중 눈에 띠는 구절이 들어왔다.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34p
저자의 신화에 대한 첫 대면은 사람을 섬기는 사회로 시작된다. 신보다 사람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글귀를 일찍 만난 건 행운이다. 뭔 내용의 책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나선 여정에 말동무를 만났다. 책에서 저자를 봤다. 행복한 여정이었다.
책의 순서를 가만히 다시 드려다 봤다.
신화와 현대 세계 - 내면으로의 여행 - 태초의 이야기꾼들 - 희생과 천복 - 영웅의 모험 - 조화여신의 은혜 - 사랑과 결혼 이야기 - 영원의 가면에 이르기 까지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그야말로 절묘하다. 옛 이야기인 신화가 현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가만히 명상하며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태초의 이야기꾼들을 만난다. 1장에서 3장까지의 이야기다. 특히 2장 ‘내면으로의 여행’에서 들려준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하자는 저자의 말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고 깊은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p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이 다음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꿈, 그것이 신화 속에 등장한단 말인가.
그는 4장 ‘희생과 천복’을 통해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5장 ‘영웅의 모험’에서 자비(慈悲)를 말한다.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신의 현현인 영웅.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301p
5장 영웅의 모험 이후 저자는 조화여신의 은혜 - 사랑과 결혼 이야기 - 영원의 가면으로 이어지는 만물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과정은 마치 어머니 품속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는 괴테의 말을 빌어 신화는 살아있는 자의 것임을 이야기한다.
“신성(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395p
이 책은 신화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신화가 주는 의미를 폭넓게 이야기하고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고,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 물론 그의 생각과 다른 종교의 단면은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향은 같다. 다만 가는 길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데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의 평화가 꽃피는 것이 아닐까.
이책을 읽으면서 특히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2장 ‘내면으로의 여행’ 이었다. 사실 2장은 이 책의 전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장 부터는 ‘내면으로의 여행’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봐도 될 정도로 한 장의 구성이 탄탄하다. 특히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137p 라는 ‘키르티무카’에 대한 예화는 압권이었다.
한가지 못내 아쉬운 것은 미래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없었다. 신화 자체가 옛이야기 이고 그것으로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라지만 어쨌든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주제에 없었다. 다만 영원의 가면을 통해 자아를 찾으라는 메시지로 아쉬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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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I. 저자에 대하여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 조셉 캠벨. 하지만 신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랬다. 그렇더라도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조지 루카스는 그에게 영감을 받아 스타워즈를 만들어 냈다.
조셉 갭벨은 1904년 뉴욕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신화에 대한 관심은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에서 기병대에게 토벌되는 인디언 이야기를 다룬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본다. 그는 거기서 기병대장이 아닌 토벌되는 인디언에게 강하게 매혹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그를 신화 해설가로 만든 사건이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그의 종교가 무척 궁금했다. 책 속에서 끝내 그의 종교를 알 수 없었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다. 아마도 신화 해설가로서 어느 특정 종교에 귀의 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일까 그의 신화이야기는 객관적인 토대를 갖추었다.
그가 동서양의 종교를 두루 경험하게 된 것은 1924년 유럽여행 중에 만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그 후 그는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진다.
1927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고, 1928년 뮌헨대학으로 옮겨 산스크리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 괘테와 토마스만의 문학, 프로이트와 융의사상을 공부하였다. 하지만 공부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대공황에 따른 경제적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년 뒤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극빈한 생활 속에서 독서에 몰두하다가, 1933년에 겨우 모교인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의 교사로 임명되었고 수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프레이저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다음 해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되어 이후 38년 동안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캠벨은 1942년 융 학파가 주도하는 볼링켄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어, 인도 예술과 신화에 관한 침머의 연구들을 편집하였다. 194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이 대표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1949년, 볼링켄 시리즈의 하나로 출판되었고 그것은 국립예술문자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훌륭한 신화 강연자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87년 10월 30일, 캠벨은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해 12월, 빌모이어스와의 TV 인터뷰가 방영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외에도,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 』(1972), 『양생 수거위의 비행 The Flight of th Wild Gander』(1969),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 』4부작(1959-1968)과 그이 신화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1974) 등이 있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1p
캠벨..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 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12p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 12p
로마속담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14p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15p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週期)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16p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 - 힌두경전 18p
1. 신화와 현대 세계
“그래요.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이것이 나의 첫 대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5p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6p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8p
‘완전’한 것은, 보고 있으면 조금 싫증이 난다. 이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이것 때문입니다. 28p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29p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29p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29p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0p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再會)랍니다. 31p
결혼은 관계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33p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3p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34p
어떤 문화권이든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36p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게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41p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2p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48p
서구에서는 특정한 집단 문화에 제국주의적 밀어붙이기를 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만물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밀어붙이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본성의 세계를 열게 된다면 가능성은 그 안에 있습니다. 59p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禪師)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59p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61p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1p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62p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생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응,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해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73p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74p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76p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77p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79p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81p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6p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86p
폴리네시아 속담처럼, 때로는 “고래 잔등 위에서 송사리를 낚는” 수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고래 등에 서 있습니다. 87p
꿈꾸는 시간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잠들어서,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삶의 조건과, 그 조건과 관련된 우리 현세적 삶의 현장을 꿈꾸게 되는 시간을 말하지요. 87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고 깊은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p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89p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89p
융 박사는 꿈에는 두 종류, 즉 개인적인 꿈과 원형적인 꿈 혹은 신화 차원의 꿈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인적인 꿈은 그 개인의 연상을 통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 그 사람 삶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느냐, 그 개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느냐, 이런 것을 알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꿈이 신화의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올 때도 있습니다. 91p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91p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2p
뱀은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96p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96p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96p
뱀은 시간의 장(場),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97p
이름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그것은 모든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101p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 한다”고 했지요. 102p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102p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大倧敎)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3p
신 혹은 창조자가 모신(母神)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모두 이 모신의 몸입니다. 몸 아닌 곳은 없습니다. 103p
밀교에 따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필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104p
에덴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입니다. 105p
왜 우리도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잖아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109p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113p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도덕경 114p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17p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118p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어 줄 수는 없는 거지요.
소년은 개미 떼를 가리키며 대답합니다.
“이게 모두 이 땅을 거쳐간 인드라다. 여러 겁을 통하여 이들은 저 바닥의 개미에게 고귀한 신으로 환생한다. 환생 한 뒤, 괴물의 정수리에 벼락을 떨어뜨리고는 ‘나 정말 대단하구나’하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130p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p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다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34p
"나무 위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아주 약삭빠른 녀석들이다. 그런데 한 마리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는데, 다른 한 마리는 먹지 않고 관찰만 한다.“
자, 나무의 과실을 먹는 새는 그 과실을 죽이고 있지요. 그러나 관찰만 하는 새는 필경은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 결국, 생명은 생명을 먹고서 산다는 이야깁니다. 136p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137p
"선생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138p
3. 태초의 이야기꾼들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라는 관념은 보이지 않는 사회(즉 저승)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그 사회는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승을 떠나면 나타납니다. 145p
사람은 죽임을 통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관계 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내가 죽인 짐승도 죽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것으로 됩니다. 태고의 사냥꾼들에게는 동물신이 있었어요. 145p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156p
'아름다움‘이라는 문제에 생각이 미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일까? 새들의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새들에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들이 지닌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일까?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158p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159p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162p
무의식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을 무의식에 빠뜨리는 다른 방법도 있다고 해요. 이런 상태가 끝나면 무의식에 빠져 있던 사람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순식간에 의식 상태로 되돌아오는 거지요. 172p
블랙 엘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다.”
그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성스러운 산이라고 한 것은 사우드 다코타에 있는 하아네이 봉우리입니다.
이어서 그가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
이것이 진짜 신화적인 깨달음입니다. 그는 국지적(局地的)인 숭배상(崇拜像)인 하아네이 산과, 세계의 산이라는 암시적 의미를 확연하게 갈라놓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세계의 軸)을 말합니다. 173p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 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서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175p
4. 희생과 천복(天福)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0p
사람들은 동물과 식물을 신화화함으로써 땅을 창조의 성소로 요구합니다. 이들은 땅에다 영적인 힘을 투자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신전 같은 곳, 말하자면 명상의 자리가 됩니다. 180p
사르트르 성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제단은 십자가의 중심에 있지요. 이 구조는 상징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많은 교회가 극장처럼 지어집니다. 보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당은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이지 ‘쇼’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쇼’를 가슴으로 감지합니다. 우리는 열여섯 살 때부터 이미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186p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신성(神性)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다고요. 중세의 성모 숭배 신앙 체계에도 이 정신이 있었어요. 바로 이 정신에서 13세기 프랑스의 성당 문화가 흘러나옵니다. 189p
식물은 스스로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195p
나무의 경우, 사지를 자르면 다른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도마뱀 종류가 아닌 한, 동물의 사지는 한번 잘리면 다시 자라나오지 않지요.
따라서 숲과 농경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문화는 먹기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195p
세상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네 민족의 이름은 인류를 의미하는 단어로 부르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는 ‘웃기는 얼굴’이라느니, ‘비뚤어진 코’니 하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붙인다는 겁니다. 200p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1p
죽음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 양자는 한 사상(事象), 즉 ‘존재’의 두 측면이니까요. 205p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211p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18p
"주님, 저에게 가르치셨으면 이들에게도 가르치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르치셨으면 이들이 저를 이렇게 대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가르치시지 않았어도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 주님과 그분 하신 일에 복 있을진저.“ 221p
"신비주의자가,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을 금욕과 죽음을 통하여 반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정통 신앙 사회의 기능이다.“ 221p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5p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6p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p
5. 영웅의 모험
어머니가 영웅이라....... 참 근사한 발상이군요. 232p
[코란]은 “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태 전승에 나오는 영웅은 무서운 시험을 겪어야 보상을 받지요. 233p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233p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34p
톨스토이는 “그 지도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인가, 아니면 무리의 선두에 선 자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234p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나폴레옹은, 20세기 히틀러의 19세기 판입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 역시 무서운 사건이었지요. 235p
그렇다면 영웅주의에는 도덕적인 목표가 있습니까?
도덕적인 목표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구하는 것, 특정 개인을 구하는 것, 어떤 관념을 받드는 것이 될 수 있지요.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지요. (중략)
반대 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235p
선생님의 신화 연구에서 이에 대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인류의 열망과 생각의 표준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인간의 탐색은 결국, 천 년 전에 이 땅에 살았든 천 년 뒤에 이땅에 살게 되든, 우리 인간이 공유하는 열망과 생각을 반영하는 것입니까?
‘통찰의 탐색(vision quest)'이라고도 불러도 좋은 특정한 신화 유형이 있어요. 통찰의 탐색은 홍익(弘益)의 탐색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237p
옛날의 세계는, 영웅이 대적하러 달려나가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영웅의 영적인 준비에 반응하는 세계였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지금은, 우리의 물리학, 마르크시스트 사회학, 행동심리학 등을 통해 해석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자극에 반응하는 범용한 전선(電線) 덩어리에 더도 덜도 아닙니다. 이러한 19세기의 해석이 현대 생활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쥐어 짜내고 만겁니다. 240p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최고 기술자였던 다이달로스는, 자기 손으로 만들었던 크레타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날개를 아들 이카로스에게 달아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말아라.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태양의 열기에 네 날개의 밀랍이 녹을 터이니, 필경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낮게 날지도 말아라.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네 날개를 적실 것이야.” 242p
사람들은 다이달로스 이야기보다는 이카로스 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문제는 이카로스가 아니라 이 우주인을 바다에 추락시킨 날개 속에 들어 있는 태도인데도요.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242p
신화학적 의미에서 그는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요. 만일 이들이 그보다 30년 전에 나왔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에 알맞았을 겁니다.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246p
신화가 지니는 우주론 및 사회학과의 관계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에요. 이 관계는 여전히, 우리가 속한 이 새 세계에 적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255p
잠깐만이라도 이 세상의 기원 신화(起源神話)를 접어두고(기원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이 뭐라고 말해줄 테니까),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게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5p
전설에 나오는 마술은,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부처도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었답니다. 부처는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했지요. 260p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3p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됩니다. 263p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p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271p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273p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276p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77p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278p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口號)였데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279p
예술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상당수의 예술가는 제자에게 이런 식의 홀로 날기를 허락합니다. 285p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285p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296p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6p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연지사가 아닌 게 어디 있어요? 이것은 우연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느냐 여부와 관련되는 문젭니다.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299p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301p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모이어스 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320p
"그대들 남성은, 궁극적인 존재의 신비에게서 힘을 부여받았는데 조금 전에 그대들이 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의 신비는 그대들에게 힘을 부여할 수도 있고 그 힘을 거두어갈 수도 있다.“ 332p
어머니는 모든 자식을 고루 사랑합니다. 멍청한 자식도 사랑하고, 똑똑한 자식도 사람하고, 말썽꾸러기도 사랑하고, 착한 자식도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에게는 자식의 성격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되지요.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가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334p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336p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이 둘의 타락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지요.
죄악으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이 행위가 음유시인들에게는 절대로 지탄을 받아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경험인 거지요.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349p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요. 첫째는 절제, 둘째는 용기, 셋째는 사랑, 넷째는 충성, 그리고 다섯째는 예의 바름입니다. 예의 바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를 이르는 겁니다. 351p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은 사람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를 찬양했지요. 그 상처는, 거기에 그 상처를 낸 바로 그 무기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는 상처였지요. 355p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356p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뜨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어떤 작가는 다음같이 짤막한 시 한줄로 기나긴 성배 전설에 대한 서사시의 서문을 삼습니다.
“모든 행동은 좋게도 결과하고 나쁘게도 결과하느니......”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359p
권력! 권력이에요. 유럽 역사의 근본적인 충동은 권력 충동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 종교 전통으로 흘러들어 왔어요. 362p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 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5p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367p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370p
이 세상에도 지옥은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371p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373p
8. 영원의 가면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 375p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顯現)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이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376p
우리의 삶에서, 우리 몸이 지니는 에너지에서 나오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은 우리 몸 안에서 서로 맹렬하게 갈등한답니다. 377p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378p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건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80p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고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383p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384p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94p
괴테는, 신성(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조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조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395p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을 ‘비바케(viveka)'라고 합니다.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어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자,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째깍, 째깍, 째깍 흐리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404p
III. 내가 저자라면
먼저 신화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제가 감히 한 분야의 선각에게 무례를 범하게 됨을 용서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상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책을 논하기에 전 신화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사람이 태어난다. 삶에 구실을 한다. 그리고 죽음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짐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다시 태어난다. 마음 속 깊이 묻힌다. 그림으로 새겨지더니 어떤 삶은 문자로 그 영원성을 더해 간다. 다시 태어났다. 현현(顯現) 그것은 처음과 끝이 다시 만나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느낀 이 책의 전체적 흐름이다. 솔직히 신화에 대한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단군신화, 박혁거세 등에 대한 이야기도 시험지를 통해 본 것이 전부다. ‘신화의 힘’ 이 책을 30패이지 넘기는데 2시간을 쏟았다. 앞이 막막했다. 400페이지를 15로 나누면 26시간이다. ‘오 마이 갓’ 그러던 중 눈에 띠는 구절이 들어왔다.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34p
저자의 신화에 대한 첫 대면은 사람을 섬기는 사회로 시작된다. 신보다 사람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글귀를 일찍 만난 건 행운이다. 뭔 내용의 책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나선 여정에 말동무를 만났다. 책에서 저자를 봤다. 행복한 여정이었다.
책의 순서를 가만히 다시 드려다 봤다.
신화와 현대 세계 - 내면으로의 여행 - 태초의 이야기꾼들 - 희생과 천복 - 영웅의 모험 - 조화여신의 은혜 - 사랑과 결혼 이야기 - 영원의 가면에 이르기 까지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그야말로 절묘하다. 옛 이야기인 신화가 현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가만히 명상하며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태초의 이야기꾼들을 만난다. 1장에서 3장까지의 이야기다. 특히 2장 ‘내면으로의 여행’에서 들려준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하자는 저자의 말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고 깊은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p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이 다음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꿈, 그것이 신화 속에 등장한단 말인가.
그는 4장 ‘희생과 천복’을 통해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5장 ‘영웅의 모험’에서 자비(慈悲)를 말한다.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신의 현현인 영웅.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301p
5장 영웅의 모험 이후 저자는 조화여신의 은혜 - 사랑과 결혼 이야기 - 영원의 가면으로 이어지는 만물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과정은 마치 어머니 품속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는 괴테의 말을 빌어 신화는 살아있는 자의 것임을 이야기한다.
“신성(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395p
이 책은 신화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신화가 주는 의미를 폭넓게 이야기하고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고,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 물론 그의 생각과 다른 종교의 단면은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향은 같다. 다만 가는 길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데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의 평화가 꽃피는 것이 아닐까.
이책을 읽으면서 특히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2장 ‘내면으로의 여행’ 이었다. 사실 2장은 이 책의 전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장 부터는 ‘내면으로의 여행’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봐도 될 정도로 한 장의 구성이 탄탄하다. 특히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137p 라는 ‘키르티무카’에 대한 예화는 압권이었다.
한가지 못내 아쉬운 것은 미래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없었다. 신화 자체가 옛이야기 이고 그것으로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라지만 어쨌든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주제에 없었다. 다만 영원의 가면을 통해 자아를 찾으라는 메시지로 아쉬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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