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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일 07시 56분 등록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조셉캠벨·빌 모이어스 대담/이윤기 옮김/이끌리오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 조셉 캠벨(1904∼1987)

우리시대의 위대한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이자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자이기도 한 조셉캠벨. 그는 1987년 이 사회에 신화를 통한 깨달음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겨놓고 죽음과 화해를 하였다. 그의 영결식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진행되었는데 바로 그 자리는 75년전 소년 캠벨이 위대한 신화학자로 성장하기 위한 상상력을 키우던 바로 그 곳이기도 했다. 그의 아쉬운 죽음앞에서 혹자는 위와 같은 말로 다음과 같은 말로 떠나간 그를 칭송하였다.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13P)

그는 1904년 뉴욕의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던 중 우연히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본 후 강력한 이끌림에 의해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고 이를 계기로 신화 이야기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직접 그의 말을 통해 들어 보자.

"나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카톨릭 과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核)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그러다가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만 겁니다. 인디언을 좀더 알고 싶었지요.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디언에 관해 쓰여진 그 시절의 책을 사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서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39P)

그는 인디언의 이야기를 접하고 보면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전세계의 신화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평생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그는 특히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후에는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으며 많은 제자들을 키우는데 온 힘을 쏟았다. 특히 그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구하는 일반인이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였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189-190P)

조셉 캠벨의 방법론을 읽으면서 구본형 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우리에게 자기 삶을 변화시키고 가꾸어 가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과 같지 아니한가! 지금 내가 하고자 절실히 바라는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 과정도 이와 같이 독서를 통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구본형선생님이 수 많은 책 중에서 하필이면 조셉캠벨의 ≪신화의 힘≫을 4기 연구원 2차 레이스의 첫 번째 책으로 정한 이유가 이러한 방법론에 대해 알려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이유가 맞든 틀리든 간에 이 책에 담긴 수많은 교훈과 가르침들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슴 깊이 새기면서 갈 내용들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 조셉 캠벨의 저서
≪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4권) / ≪신화와 함께 살기≫ /
≪신화의 세계≫ / ≪세계의 영웅신화≫ / ≪야생 수거위의 비행≫ /
≪신화 이미지≫ /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신화의 힘≫ / ≪신화와 함께 하는 삶≫ / ≪현대인을 위한 신화≫

- 참된 삶을 얻는 방법(조셉 캠벨)
① 자신의 삶을 혼자서 생각할 특별한 공간을 찾아라. 이 공간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되게 하라. 주기적으로 이곳에 들러 자신을 새롭게 하라. 이 곳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창조할 작은 왕국이다.
② 읽고 싶은 책은 모두 읽어라. 항상 생각하고, 읽고, 성장하라.
③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라.
④ 돈만 보고 일을 하지는 말아라. 그 가치를 믿지 않는 일을 하고 돈을 받으면 영혼을 파는 셈이다.
⑤ 자신의 천복을 발견했다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추구하라. 용기와 담대함을 지녀라.
⑥ 사람들은 살아온 배경과 문화, 종교가 각자 다르지만 소망과 꿈을 갖고 있고 나름의 약점이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우주는 하나의 방이며 우리는 모두 그것의 안녕을 위해 공동의 책임을 진다. 연민을 품어라.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라.
⑦ 자신의 천복을 추구하면 우주가 당신을 위해 열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길이 항상 순탄하리라는 말은 아니다.
⑧ 삶은 환희와 비극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상태로 완벽하다. 당신은 세상에서 슬픔을 제거하지 못하며 자연을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 원하는 삶을 창조할 힘이 있다.
⑨ 삶에서 좌절하고 낙담했다면 무언가 대책을 마련하라. 삶을 바꾸어라.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지 말라. 자신을 구할 사람은 자신 뿐이다.
⑩. 특별한 삶을 이끌어라. 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 역자 이윤기

소설가이자 저명한 번역가이기도 한 이윤기님은 모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쓴 글만 해도 상당히 많은데 이렇게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30대엔 경험을 쓰고, 40대엔 경험을 재해석을 합니다. 50대엔 상상력이 다른 상상력을 점화시키는 시기라고 봅니다. '역사'는 좋은 비상구겠죠."

활동분야 : 문학·신화학
출생지 : 경북 군위군
주요수상 : 제29회 동인문학상(1998), 한국번역가상(2000), 제8회 대산문학상(2000)
주요작품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1·2·3》(2000~2002),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신화》(2002), 《숨은 그림 찾기 1》(1998), 《두물머리》(2000)

1947년 5월 3일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출생하였다.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이후,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가 1996년까지 미시간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을 지냈으며, 1997~2000년 동대학교 사회과학대 비교문화 연구원을 지냈다.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약 200권을 번역하였는데, 토머스 불핀치(Thomas Bulfinch)의 《그리스·로마신화》(1989)를 비롯하여, 《그리스인 조르바》 《뮈토스》 《변신이야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등이 있다. 특히 1980년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열풍을 몰고온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은 그의 번역으로 유명하다.

신화학 저서로는 각각 신화를 이해하는,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키워드로 풀어 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1·2·3》(2000~2002)가 대표적이다. 이외에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신화》(2002)가 있다.

장편소설로는 《하늘의 문》(1994), 《햇빛과 달빛》(1996), 《뿌리와 날개》(1998), 《나무가 기도하는 집》(1999), 《그리운 흔적》(2000) 등이 있으며, 소설집으로는 《나비넥타이》(1998), 《두물머리》(2000)가 있다. 연작장편소설로는 《내 시대의 초상》(2003)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어른의 학교》(1999),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2000), 《이윤기가 건너는 강》(2001), 《무지개와 프리즘》(2002) 등 다수가 있다.

19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 1》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한국번역가상과 소설집 《두물머리》로 제8회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8P)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隱居)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9P)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대단히 현대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10P)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11P)

캠벨은 언젠가,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11P)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 합니다.(12P)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은 것이이야 합니다."(12P)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12P)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12P)

'지적 가능성을 강타하는 에너지의 폭풍'(12P)

누구의 말마따나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13P)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14P)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15P)

메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15P)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정말 귀를 기울인다면) 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15P)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15P)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15P)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동물의 주님이 인간에게 동물의 삶과 죽음을 다스릴 권능을 넘겨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냥이라는 행위는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공희제, 供犧祭)가 되고, 사냥꾼은 그 동물이 희생하여 다시 한번 재물이 되어달라고 비는 마음으로, 죽은 동물의 영혼과 화합을 기도하는 일련의 몸짓을 보인다.(16P)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週期) 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16P)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 당하고 만다.(16P)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7P)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17P)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 ≪힌두 경전≫ (18P)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18P)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18P)

그는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머 존재하는 지혜의 해각(海角)을 믿는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린다. 이 지혜의 해각을 찾는 일은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의 중심과제'이다.(19P)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 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19P)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21P)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 사람이었다.(21P)


1. 신화와 현대 세계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25P)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26P)

만일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따사로움의 모든 것, 정겨움의 모든 것, 유머의 모든 것은 내 고향이 알고 있는 이 같은 사랑에서 유래합니다.(27P)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28P)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29P)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30P)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30P)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再會)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31P)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31P)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33P)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34P)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41P)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43P)

삶이라고 것은 곧 명상입니다.(47P)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47P)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48P)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48P)

어쩌면 이 행성에서의 삶은 이로써 끝날지 몰라도 우주의 끝은 아니에요.(52P)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56P)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59P)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61P)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이 진리를 떠나 있지 않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진리를 떠나 있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기만 하면 곧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70P)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71P)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73P)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74P)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74P)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76P)

신화의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77P)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시애틀 추장》 (79P)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시애틀 추장》 (80P)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81P)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86P)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우파니샤드(Upanishads,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의 위달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86P)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87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89P)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89-90P)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91P)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92P)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96P)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世界樹)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98P)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對極)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102P)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102P)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의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102P)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103P)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106P)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107P)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113P)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도덕경≫ (114P)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115P)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117P)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118P)

창조적인 글을 써 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120P)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127P)

"말썽? 인생이라는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 ≪조르바≫ (133P)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135P)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139P)


3. 태초의 이야기꾼들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141P)

인간의 발달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142P)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즉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꺼이들고,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142P)

육신이 그 힘의 절정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143P)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145P)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하는 것이지요.(162P)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165P)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神話化)하는 것입니다.(168P)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具體)이다.(175P)


4. 희생과 천복(天福)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드러나는 관념적인 성소(聖所)이다.(179P)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 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여백은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179P)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肉)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空),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187P)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89P)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189-190P)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209P)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11P)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211P)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213P)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213P)

"나는 매일 저 아래(지하철로)에서 조금씩 죽어간다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215P)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217P)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218P)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222P)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226P)

천복을 쫓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쫓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227P)


5.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229P)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잇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229P)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230P)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234P)

의식은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합니다.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234P)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239P)

동화는 어린이들의 신화예요. 각 나이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신화가 있어요. 나이를 먹게 되면 튼튼한 신화가 필요해집니다.(253P)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幻)’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254P)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삶과 우주에,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假定)과 근본적인 믿음에 부여하는 줄거리라는 것입니다.(254P)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272P)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273P)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273P)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273P)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273P)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276P)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278P)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278P)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279P)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쫓으면 되는'겁니다.(287P)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287P)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296P)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299P)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301P)

진정한 예술가는, 조이스의 이른바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301P)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302P)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303P)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303P)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307P)

영어에는 '아버지와 화해[atonement]'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이 화해는 곧 '하나 되기[at-one-ment]'랍니다.(307P)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322P)

이 '존재하는 만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를 인도어로는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이건 남성 명사도, 여성 명사도 아닌 중성 명사예요. 여자를 인도어로는 '마야-샤크티-데비'라고 합니다. 이건, '생명을 주신 여신이자 형상을 주신 어머니'라는 뜻입니다.(332P)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334P)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336P)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336P)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귀로 드 보르네이유≫ (339P)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귀로 드 보르네이유≫ (339P)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순수한 개인적 성격의 사랑)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345P)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350P)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가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353P)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 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355P)

성배는, 뭐라고 할까…….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357-358P)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開花)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358P)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 (358P)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359P)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359P)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칼 구스타브 융≫ (360P)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 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361P)

청교도들은 결혼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결혼을 하면 날마다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랑과 용서의, 현재 진행형 성사(聖事)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365P)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366P)

사랑은 곧 신의 임재(臨在)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370P)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373P)


8. 영원의 가면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375P)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378P)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이지요.(378P)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 ≪칼 구스타브 융≫ (379P)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379P)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380P)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나’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380P)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381P)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383P)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387P)

삶의 본원은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387P)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394P)

괴테는, 신성(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394P)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412P)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412P)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 (413P)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414P)

'옴(AUM)‘은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옴‘은 소리나는 것, 곧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우주는 존재의 ’옴‘송입니다. ’옴‘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414P)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415P)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원인 모를 편두통에 시달렸다. 물론 연구원 2차 테스트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무한한 신화의 세계, 작가의 거침없는 종교관, 가히 혁명이랄 수 있을 정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대극을 통한 가치관까지, 일반 관념의 경계를 뛰어 넘는 수많은 언표들이 책 속을 뛰쳐나와 나의 머리 속을 마구 헤짚고 다녔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 편두통은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조셉 캠벨이 이 책을 통해 강렬하게 전하는 메시지는 계속하여 내 잠재력을 자극할 것이며, 삶에 지쳐 널부러져 있을 때면 내 삶의 천복을 쫓으라고 계속 속삭일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담형식으로만 이루어진 글임을 알 수 있다.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과 저널리스트인 빌 마이어스의 TV 대담내용을 그대로 책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일반적인 1인칭 화자형의 책들과는 많이 다른 좀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대담 형식이다 보니 그에 따른 장단점도 눈에 띄었다.

장점으로는 조셉 캠벨이 설명하고 있는 다소 난해한 부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하여 대담자인 빌 모이어스가 되묻기, 반복, 부연설명을 통해 우리에게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반대로 단점은 주제에서 주제로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지나치거나 생락되고 넘어갈 때가 있어 내용 이해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부분은 대화를 글로 옮김으로 대담형식상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이 책의 장점은 폭넓은 주제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일으키도록 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신화 이야기를 등장시켜 개인의 삶에 대한 의미, 대극(對極)의 개념, 죽음과 재생, 사랑과 결혼, 행복, 의식과 무의식, 영웅과 지도자, 신화를 통한 종교 바라보기까지 우리 삶의 전반적인 모든 부분을 정의하고 분석하며 재해석하고 있다. 조셉 캠벨은 신화가 주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삶을 확장시킬 수 있으며 의식의 변모를 통해 영적인 죽음을 한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의식의 변모라고 거듭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작은 시작이요,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단점으로는 종교론자가 읽을 경우 거부감을 일으키다 못해 책을 집어 던질 수 있을 정도의 파격적 표현과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는 이 같은 내용으로 인해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을 때마다 친구들에게 본인은 번역한 죄 밖에 없으니 조셉 캠벨에게 가서 따지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종교에 대한 위험수위는 높아 보인다.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97P)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世界樹)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98P)

기독교에 대한 짧은 지식만으로 이 내용을 반박하거나 그렇다고 호응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이 부분 만큼은 학설적 관점으로 접어두기로 했다. 교과서에 나온다고 모든 내용이 옳은 것은 아니다. 조셉 캠벨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관점에서 나와 같은 것은 아니다. 배울 것은 배우고 아니다 싶은 것은 다양한 관점 상 하나의 의견으로 남겨두고 싶다. 훗날 내가 이 말을 한 캠벨의 나이가 되었을 때 다시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의 삶을 살다보면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할 때가 있다. 특히 현재의 삶에서 탈피하여 무언가 변화를 원하고자 할 때 현실의 벽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가장 슬퍼한다. 또한 무언가 결정을 해야할 때, 최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할 때, 무엇이 옳은 것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 때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주저 앉고 만다. 이럴 때 조셉 캠벨은 인생 선배로써 되살아나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결심하라고 조언해 주고 있다.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2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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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1 10:38:00 *.70.72.121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359P)"

재우님이야 말로 변.경.연의 로망스가 될 것을 믿어요. 인용문을 읽는 동안 골고루 안정된 의식의 느낌을 받았어요.

빨리 남해에서 만났으면 좋겠네요. 로망재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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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2:32:19 *.125.205.55
저도 처음 책을 접했을때 너무 당황했습니다.
정말이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더라구요..ㅋㅋ
그런데 히한하게도 넘기면 넘길수록 뭔가가 나올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양재우님의 인상적인 마지막 구절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어쩌면 지금이 천복을 누리고 있는지도..ㅎㅎ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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