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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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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일 16시 35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처음 보는 낯설은 이름.
그런데 주위에 알아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대학자였다.

1904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
1915년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깊은 관심.
1927년 컴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으로 문학석사 학위 취득
1934년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교편.
1938년 대학원생 진 어드먼과 결혼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출간
1959~1968년 <신의 가면> 출간
1971년 <어디서나 읽는 융 이야기> 편집
1984년 <영혼이 닿은 우주 공간> 출간
1985~1986년 다큐멘터리 <신화의 힘> 촬영
1987년 하와이에서 83세로 운명.

‘이런 사람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되뇌이며, 저자의 ‘신화의 힘’을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넘김의 시간이 계속될수록 그가 단순한 신화학자일 거라는 내 편견은 여지 없이 깨졌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폭넓은 지식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로움을 느끼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구나 인터뷰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박학다식함은 불세출의 ‘인문학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해도 그리 과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종교학, 철학, 심리학, 신화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천착하는 21세기의 미켈란젤로와 같은 사람이다.

난 솔직히 이러한 저자를 만나면, 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지식과 얄팍한 지혜가 온통 벌거벗겨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세상에는 왜 이리 잘난 사람들이 많지?’라는 예의바르지 못한 한탄과 더불어 ‘이 사람에게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겸손함으로 고개 숙인다.

먼저 저자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와 같은 저작들을 함께 일정 이상 소화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들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솔직히 일주일 동안 <신화의 힘>을 정독해나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물리적으로 다른 책들에 대해 욕심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저자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가운 사실은 저저의 행적을 읽어가면서, 그가 어린 시절 인디언의 역사와 철학에 심취했으며, 인디언 추장들의 연설문을 편집하여 출간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류 중에서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평화적이며 가장 성스러웠던 인류가 ‘인디언’임을 이미 굳게 믿고 있다. 저자의 글들을 읽어가면서 인디언들의 종교관, 세계관과 거의 일치한다는 생각은 거의 굳어 졌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76p

저자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을 무려 4페이지나 할애에서 인디언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한다.(p78~81) 인디언의 사상을 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범심론’ (汎神論) or ‘범재신론’(汎在神論)으로 분류한다. 범심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명에 ‘신’(神)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범재신론은 범심론의 사상과 뜻을 같이하면서 신은 모든 만물에 깃들여 있으면서도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똥에도 도(道)가 있다.’는 말은 노장사상의 기반도 범심론과 의미를 함께 함을 알 수 있다. 가장 대중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경우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범심론적인 측면이 강함을 살펴볼 수 있다.(물론 기독교 신자들은 범심론이라는 개념을 싫어하지만~)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읽는 구약/신약 성경에는 금서로 취급되어 빠진 <도마복음서>를 살펴보면,

나는 빛이다. 그 빛은 모든 것 위에 있다. 나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왔고, 나에게로 돌아갔다. 나무를 잘라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에 있다. 돌을 들어보라. 그러면 거기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도 다른 측면에서 신(神)을 인격화된 절대 실재로 인정하는 것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 세계의 법칙과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철학과 그 맥락을 함께 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행적을 살펴보다 한 측면으로만 이야기를 전개한 것 같다.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저자의 여러 신화들의 해석, 영웅의 개념, 원형의 의미보다 종교적 측면에서 대단히 반가웠고 배울 수 있었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빌 모이서스의 서문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12P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P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15P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15P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18P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18P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21P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21P

1.신화와 현대 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29P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0P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31P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33P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3P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非意圖的)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7P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48P

시애틀 추장은 명문(名文)의 해답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78~81P

2.내면으로의 여행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Upanishads,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을 나타내는 성전 ? 옮긴이》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86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 89P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90P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96P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96P
대부분의 문화에서 뱀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97P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97P
대극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황급히 부끄러운 곳을 가립니다. 100P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二元性)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101P
동일성만 인식하는 의식에서 이원성에 참여하는 의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식이 이렇게 옮겨가야 시간의 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101P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2P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3P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는 것이 초월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도약대라고는 할 수 있겠지요. 초월성이라는 것은 초월하는 것,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시공(時空)의 장(場)에 있는 만물은 ‘이원적’입니다. 신의 화신(化身)은 남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 자신이 바로 신의 화신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형이상학적 이원성의 두 측면 중 한 측면으로만 태어난 것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밀교(密敎)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104P

왜 우리도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잖아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109P

누군가가 글자 그대로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관념....... 이것이 바로 ‘인위주의’라는 겁니다. 이 인위주의의 사고방식은 어린아이들의 사고방식과 비슷합니다. 여기에 테이블이 있다. 이 테이블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이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식입니다. 결국, 세상이 여기에 있으니까 누군가가 만들었을 거라는 것이지요. 111P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114P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만일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 먹는 것이나 같지요. 116P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117P

우리는 하느님을 정말 많은 방법으로 인격화할 수 있습니다. 신이 한 분이던가? 신이 여러 분이던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생각의 카테고리에 묶여 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존재, 생가하려는 그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127P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들어 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행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133P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여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138P

3.태초의 이야기꾼들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을 하지 않는다는 식의 자기 희생적인 금제(禁制)를 지킵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해 일조의 ‘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 짐승의 죽음은 자기네들로 인한 것이고, 또 그 짐승의 공기가 자기네들의 음식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동일시, 신화적인 동일시가 개입합니다. ‘죽음’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147P

4. 희생과 천복(天福)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P

모이어스…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9P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입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189P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90P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215P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天福)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221P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P

5. 영웅의 모험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229P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전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233P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263P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증에 잇는 것을 거머쥡니다. 272P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2P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273P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273P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잇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273P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276P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278P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을,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86P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6P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연지사가 아닌 게 어디 있어요? 이것은 우연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느냐 여부와 관련되는 문젭니다.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어디에선가 전쟁이 터지면 젊은이들은 징집을 당하겠지요. 그러면 바로 이 우연지사와 함께 5~6년은 좋이 썩어야 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내가 충고해주고 싶은 것은, 징집당했다고 여기지 밀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우리 의지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299P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301P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니다. 302P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모이어스 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320P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공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353P

여기에는 ‘내’가 있고, 여기에는 ‘그’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있는 겁니다.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 365P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66P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마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366P

8. 영원의 가면

《우파니샤드》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375P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378P

나는 그때, 우리는 자아나 욕망에 의지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 안의 인류(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자각하는 문맥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뜻으로 한말이었어요. 힌두교 경전에 보면, “오로지 신만이 신을 섬길 수 있다”는 말이 나와요.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나’ 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381P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랜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지요. 382P

삶의 본원 :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사람의 현상을 놓고 자꾸만 그러한 현상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 하느님이 만드신 거야”, 이러고 말겠어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삶의 본원인 겁니다. 387P

영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404P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412P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 412P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413P
"아버지의 왕국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 413P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3P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415P


3. 내가 저자라면

저자의 책을 한 번 정독하고 소화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을 논하라고 했는데, 전체 구성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중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는데~ 왜 이러지? 내 머리가 나쁜가?

더 없는 행복 : 천복을 따르라.

“해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 우파니샤드 -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p375

위의 글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이키루>(살다)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아무 의미 없이반복적인 생활을 하던 공무원 과장이 말기 위암 판정을 받고 삶의 의미에 대해서 몸부림 치는 과정에서 어느 날 우연히 저녁 석양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과거에는 왜 몰랐을까?’라는 감동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저자는 ‘영원’(永遠)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영원한 행복은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천국, 극락에서의 삶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임을 말이다.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이게 바로 그겁니다. ? p272

저자는 ‘천복(天福)을 따르라’라고 강조한다. 천복(天福)? 나에겐 꽤나 생소한 단어였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사전적 의미는 ‘하늘이 내려 준 복’이라고 나와있다. 이 문구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늘이 내려 준 복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많은 시간 고민했다. 일반적인 해석은 천복을 따르라는 문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 또는 소명의 의미인 것 같다. 자기다운 길, 자기답게 사는 것. 그 모든 것이 천복을 따르는 삶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구도 보인다.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 p 381

천복은 영어로 ‘Bliss’이다. Bliss는 천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지복(至福)이라는 의미도 있다. 지복의 사전적 의미는 ‘더 없는 행복’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 더 없는 행복을 느끼라는 뜻은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천국이라는 것이, 영원이라는 것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천국임을 말하고 있다.

영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404P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분들은 매일 매일이 좋다고 한다. 깨달음의 순간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온다고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감탄하는 경지라고 말하는 데, 저자 또한 이러한 경지에 있는 것 같다.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415P

종교에서는 ‘더 없는 행복’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해 공통적으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사랑은 단순한 이성적 사랑이 아닌, 타인을 위한 희생과 봉사라고 한다. 즉 이타적인 삶 말이다. 이는 각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초월’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몇가지 의견

책을 구성하는데, 종교에 대한 이해와 흐름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주었다면, 조금 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신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힌두교, 기독교, 불교, 인디언사상과 같은 모든 종교철학을 모두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리학 ‘융’에 많은 영향을 받아 심리학적 개념들을 차용한 것 같은 데, 다른 지면을 통해 융의 심리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신화와 관련된 사진, 그림, 삽화와 책의 내용과의 상호관계가 이해되지 않았다. 부가적으로 초보적인 독자를 위해 각 사진, 그림, 삽화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해 주었다면, 신화의 이해가 더욱더 흥미롭고 재미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부분은 저자의 다른 책들을 소화하면서 해결될 것으로 믿지만.

혹자가 쓴 글을 보았는데, 구본형 선생님의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라는 책이 ‘신화의 힘’의 플롯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알았다. 신화 속 영웅들의 행적인 입문 ? 출사 ? 귀환이라는 전체 구성 말이다. 대단한 직관력을 소유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백하건대 책을 읽고 난 뒤, 이러한 전체적인 숲의 흐름들을 읽어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음을 느끼며 글을 줄인다.

IP *.244.22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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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1 19:04:37 *.70.72.121
천복 그것은 자신을 향해 가야만 하는 그 길이 아닐까요? 지복이 더 없는 행복이라면 아마도 생명줄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276P >

님께서 쓰신 인용문 가운데 그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요. 좋은 경험을 절실히 만들어 나가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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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2:36:25 *.125.205.55
“해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저도 이부분이 그렇게 와닿았습니다.

박중환님 함께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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