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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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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일 17시 04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변화경영연구소의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연구원들의 글이나 메일링리스트에서 자주 접한 이름이기는 했지만, 나에겐 너무나도 낯선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 뿐 아니라,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했던 비교신화학이라는 분야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직업상으로나 그 동안의 개인적 관심사와도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게 느껴졌다.

과제를 시작하면서 '사부님(아직 자격은 없지만, 감히 사부님이라는 호칭을 쓰기로 한다)께서는 왜 우리 지원자들에게 조셉 캠벨을, 그것도 첫 만남의 상대로 소개를 시켜주신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분명 이유가 있었을 터이니,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그저 내 나름대로 추측하는 것 외에 무슨 다른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나와 조셉 캠벨의 만남을 주선한 이유는 분명 우리 둘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개팅을 주선할 때에도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든 서로 어울리는 짝을 찾아 맺어주어야 하는 것이 기본 아니던가. 나와 조셉 캠벨 사이의 공통점, 내가 그로부터 배우고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우선의 목표였다.

조셉 캠벨은 1987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신화에 대한 연구'로 요약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뉴욕 자연사 박물관을 찾았던 경험이 어린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을 했다. 그 때 본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물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신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일생을 비교 신학과 비교 종교학의 연구에 몰두하도록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생물학, 수학, 영문학, 중세문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티어를 배우고 독일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할 정도로 그는 타고난 학자였다.

내가 그에게 특히나 매력을 느낀 점은 그가 지독할 정도로 연구에만 몰두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학자라는 점도 있었지만, 정규학위과정을 무시하고 홀로 연구를 진행할 정도로 자신이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소신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에만 의존한 묵묵한 그의 연구 스타일 또한 마음에 들었다.

1929년 그는 유럽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콜롬비아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중세문학에 대한 연구 계획을 거절당하자, 학위과정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후 5년 동안 캠벨은 하루 중 16시간의 시간을 4시간씩 네 단위로 구분하여 세 단위를 독서와 연구에, 한 단위를 휴식에 활용하는 생활을 철저하게 유지하며 고된 연구를 진행했다. 물론 자신은 절대 고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캔터베리 스쿨을 거쳐,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이 교수가 된 뒤 신화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 연구의 결과로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탄생했다. 이후 모든 문화권의 신화 속에 숨겨진 신화의 원형을 찾아내고자 노력한 끝에 4부작으로 된 <신의 가면 The Mask of God>을 발표한다.

이 외에도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애생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연구활동을 펴지다 1987년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조셉 캠벨은 이 책에서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천복'을 따르며 살아간 사람이다. 스스로 찾은 길에 대한 한 치의 의심과 두려움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 장인(匠人)이다. 내가 내린 결론 이것이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간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을 보는 것. 그것이 사부님께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도록 한 이유였다. 나에게 만큼은 확실히 그랬다.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 (빌모이어스의 서문 중 21p)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9.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샤먼 아그쥬가르쥬크의 말)

10.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 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영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10.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우리의 직과,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2.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 (중략)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15.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15.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16. 사냥꾼과 사냥감이 딘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속에서 하나도 동아리가 된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말)

18.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 타인에 대한 능별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19.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20. 그의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머 존재하는 지혜와 해각을 믿는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린다.

21.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22.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제1장. 신화와 현대 세계

25. 나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제라고 해서 관심을 두는 것은 신용하지 않아요. 내가 신용하는 것은 어찌어찌 하다보니 사로잡히게 되는 주제입니다.

25.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26. 앞에서 말한 고전 이야기를 마음에다 담아 놓으면 그 이야기가 나날이 일어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터인데 말입니다.

26.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는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8.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정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28.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29.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재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29.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31.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31.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33.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4.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42.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떤 개인이 전시에 한 일을 상식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전시에 그 개인은 개인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개인보다 훨씬 상위 개념인 어떤 무리, 바로 그 자신이 섬기기로 한 무리의 대리자로서 행동한 것 아닙니까?

47.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만, 숲 속에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47.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56.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59. 서구에서는 특정한 집단 문화에 제국주의적 밀어붙이기를 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만물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밀어붙이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본성의 세계를 열게 된다면 가능성은 그 안에 있습니다.

59.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여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2.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 현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종교의 실패를 증명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65.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73.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중략)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놓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4.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78.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용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78.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시애틀 추장의 말)

80. 우라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81.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제2장. 내면으로의 여행

83.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83. 모이어스 -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이 저라는 존재의 바탕, 제 앞을 살던 모든 존재에게서 물려받은 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서 그렇습니까?
캠벨 - 그래요

85. (신화는)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85.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86. 신화가 바로 이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신화는 우리 인류에게 전형적인 어떤 것을 알려주니까요.

86.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6.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87. 만물의 바탕 자리는 바로 우리 존재의 바탕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여기저기에 널린 온갖 잡사를 보고는 하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89.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92.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101. 즉 하나에서 둘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것은 의식이, 동일성만 인식하는 의식에서 이원성에 참여하는 의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식이 이렇게 옮겨가야 시간의 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101. 초월한 존재는 기왕에 알려진 바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102.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103.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차상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이랍니다.

106.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7.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중략)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7.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109. 그러니까 우리가 신화를 다루는 것은 신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09. 왜 우리는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잖아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111. 신화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가령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의 신화이지요. 인류는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들끼리,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112.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태초에는 지금으로 보면 두 사람이 합쳐진 것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 있었어요. 이런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어요. 즉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남성과 남성이 합쳐진 것, 여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이것들을 각각 둘로 갈랐어요. 하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들은 끊임없이 그 짝을 찾아서 원초적인 합일 상태를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도 원래의 반쪽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을 진력한다는 겁니다.

114.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도덕경)

114.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117.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줍니다.

119.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20.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124.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경험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눈을 본 적조차 없는 열대 지방 사람들에게 스키의 재미를 아무리 설명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이다.

126.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133.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고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135. 헤이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38.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제3장. 태초의 이야기꾼들

141.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2.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143.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145. 즉 매장 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른 삶의 존재에 관한 관념,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이라는 관렴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145.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을 버티어주는군요

145.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147.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151. 이들에게 짐승은 적어도 동등한 존재, 때로는 우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힘이 있지요. 가령 샤먼은 자주, 짐승의 영을 수호령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샤먼이 특정 짐승의 혼령을 자기의 보호자, 혹은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155.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156. 만물이 비롯될 때에는, 지혜와 지식은 짐승들에게만 있었다. '절대적 존재'인 티라와가 인간에게는 직접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라와 신은 어떤 짐승을 인간에게 보내고, 그 짐승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현현한다. 인간은 그런 짐승, 하늘의 해, 달, 별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162.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하는 것이지요.

168,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70. 여자는 생명이고 남자는 생명의 종입니다.

175. 신은, 중심의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175.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제4장. 희생과 천복

17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상체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177. 사는 곳을 성화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178.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17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이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마롤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179.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185. 처음 이 도시의 중심에는 교회가 세워졌어요. 이게 제대로 된 도시 구조 아닙니까? 성당이라는 것은 영적인 중심이고, 바로 이 중심에서 모든 것이 사방으로 방사되어 나가야 하니까요.

187.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189.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90.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190.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191. 벌판에서 자연 조건과 악전고투하면서 자연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사냥꾼에게, 평생을 해도 사냥에서 같은 상황을 두 번 경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195.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198. 그러니까 문화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같은 이야기가 퍼져 있을 수도 있는 것이군요. 이런 사실이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모이어스)
신화를 읽다 보면 가장 놀라운 게 바로 그 점이지요. 나는 평생 이 짓을 해왔습니다만,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이 놀라고는 합니다.

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203. 농경 문화권에서 어떤 것이 제물로 희생될 경우는 다릅니다.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됨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지요? 바로 그의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204.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204.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209.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사자의 신이자 사자의 심판자인 동시에 생명을 생성시키는 신이기도 해요.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211.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17.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21. 민주주의가 뭡니까? 다수의 의견은 정치는 물론 사고에서도 효과적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그러나 사고의 경우 다수는 항상 그릅니다.

221.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 마지막 구절)

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4.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제5장. 영웅의 모험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30.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230. 오토 랑크는 <영웅의 탄생 신화>라는 작은 책에서, 양수에서 수생동물 상태를 지나고, 공기를 호흡하는 포유동물 상태를 지나 홀로 서기까지는 엄청난 심리적, 육체적 변모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라고 주장하지요.

231. 그런데 전장에서 전사한 병사와 출산 때 죽은 어머니는 똑같이 최고천을 배정받지요. 말하자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니까요.

232. 얼마나 영웅적인지 상관없이, 늘 일어나는 일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해요. 그러니까 모성은 이제 별로 신기할 것이 없는 준재가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237.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244. 캠벨 - 과학은 바야흐로 신비주의의 차원으로 넘어 들어오고 있어요. 과학은 머지 않아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벼랑으로 접근하고 있지요.
모이어스 - 벼랑이라고 하시면?
캠벨 - 벼랑이지요. 벼랑 이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벼랑 아래에 있는 것은 인간에게서 탐구 가능한 범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벼랑은 이 양자가 만나는 곳이지요. 삶의 바탕...... 이게 도대체 무엇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심지어는, 원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 아니면 이 둘을 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존재에 대한 정보가 없어요.

247. 광명이라는 존재 앞에서. "아, 쇠고기 샌드위치나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고방식, 이게 얼마나 참람한 겁니까? 그 광명을 내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읽을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

248.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놓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숩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의 길일 겁니다.

251.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도시는, 살던 곳에서 탐색의 여행을 떠나, 무서운 시련이나 모섬을 이겨낸 영웅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255. 내가 그 책(천의 얼굴을 가지 영웅)을 쓴 40여 년 전에 견주면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적인 삶의 양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따라서 잠깐만이라도 이 세상의 기원 신화를 접어두고,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9.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하느님은 글자 그대로 저기에 있다. 이거야말로 글자 그래도 하느님 말씀이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워지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지요.

263.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명령과지시를 받으면서 살지요.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4.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괴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2.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273.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276.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278.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86.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위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중략)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중략)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지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91.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296.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296.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정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7. 고통세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298. 우리 삶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열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밖에는 탓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카르마의 의미)

301.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301.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303.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303.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제6장. 조화여신의 은혜

319.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320.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332.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는 곳, 그러니까 성 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334.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기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근본으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곧 어머니 원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336.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제7장.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3. 여기에 견주에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

343. 모이어스 - 결국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전통에 반하는, 다시 말해서 교회 전통에 반하는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들게 했겠군요. 그런데 이게 어째서 서구 문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캠벨 -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중략) 사랑을 선택하는 데도 그래야 하지요.

347. 단테는, 지옥에서 벌을 받는 상태는 결국 지상에서 우리가 이루려던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했지요.

358. 모이어스 - 토마스 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말은 성배의 상징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까?

359.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360.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360. 낭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365.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73.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8장. 영원의 가면

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379. 아시다시피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아와 탐욕 같은 기본적인 동물적 경험 단계에서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393. 우리의 정신 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자세한 데까지 같을 수가 없어요.

393.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405.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412. 그러니까 어떤 일의 책임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보여도 그 사람을 비방할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 뒤에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의지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지요. 우리가 그 의지의 조장대로 움직이느냐 여부도 모르는 일이고요.

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413.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 (까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


III. ‘내가 저자라면’ -

나에게 "신화의 힘"은 낯선 저자에 낯선 내용만으로도 모자라 책의 형식 또한 날 당황스럽게 했다. 일반적인 스토리가 아닌 저널리스트인 빌모이어스와의 대담을 그대로 책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가끔씩 잡지의 인터뷰 기사에서 접해 본 형식이긴 하지만, 이 많은 분량의 내용을 이 같은 방식으로 읽고 나니 생각을 정리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미국의 사회교육방송인 PBS의 채널에서 무려 6시간짜리 시리즈로 방송된 대담 내용이라 한다.

신화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책의 구조와 핵심내용을 명확히 짚어내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두 명의 절대 고수끼리 주고받는 문답내용은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나를 책 속에서 헤매도록 만들었다.

1장. 신화와 현대세계 -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재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29p). 신화란 우리가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낄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신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가에 대해 말한다. 이는 조셉 캠벨이 신화를 연구하는 이유, 신화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 우리가 신화를 접하고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도입부에서 명쾌하게 제시한다.

2장. 내면으로의 여행 - 신화와 인간 내면(의식)의 관계를 설명한다.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이고 공적인 꿈으로, 우리에게 의식 너머에 있는 전형적인 어떤 것들을 알려준다. 융 박사에 의해 집단 무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이 어떤 것이 바로 신화의 관념이며, 이 책에서는 원형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107p)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화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공통된 마음을 읽어 낼 수 있다. 이 같이 우리 내면과 신화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신화를 알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원형, 집단 무의식 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에 대해 다루고 있는 다른 책에서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인간 정신의 진화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진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의식혁명(Power vs Force)'에서 어느 종족이나 바닥 모를 잠재 의식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공통된 체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며, 이를 '의식의 데이터베이스(The Database of Consciouness)'나 '끌개장(Attractor Fields)' 이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역시 수많은 신화 속에 숨겨진 공통된 그 무엇과 다를 바 없다.

3장. 태초의 이야기꾼들 - 신화와 의례는 자연이 가르치는 삶과 인간의 삶을 조화시키는 수단이었다. 의례는 한 개인의 삶을 보다 큰 그 이상의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를 자연의 법칙에 화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의례에 참가하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장에서는 의례라는 사회적 약속을 통하여 예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신화와 자신들의 삶을 연관시켰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의례란 앞서 말한 원형에 접근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4장. 희생과 천복 - "천복을 좇으면, 나는 상체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177p). 캠벨은 천복을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자신 스스로도 신화에 대한 연구를 천복으로 여기고 이를 평생토록 따르는 삶의 살았다. 영적인 중심이 없는 현대의 도시 구조, 갈수록 의례를 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천복을 찾을 노력조차 하지 않는 우리들에 대해 캠벨은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앞 장에서 사회 속에서의 신화의 실현에 대해 언급했다면, 이 장에서는 개인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신화의 실현에 대해 말하고 있다.

5장. 영웅의 모험 -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간의 삶 자체는 끊임없는 심리적, 육체적인 변모의 과정을 거치기에 모든 인간은 곧 영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영웅적인 삶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대한 탐색의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사부님 또한 그의 저서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에서 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도 오랜 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어, 문을 열어줘도 밖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새들에 비유하고 있다. "삶이 있는 곳에 늘 변화가 함께 있다. 삶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죽음은 바다와 같이 모든 삶의 강물을 받아들인다.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는 곳에는 늘 과거의 죽음이 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며 도약을 예비한다."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138p)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바로 신화와 종교를 통해 가능하다. 캠벨이 말하는 천복을 따르는 자, 즉 영웅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6장. 조화여신의 은혜 -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도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305p). 신화 속에서의 여성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다. 아버지는 사회 성격이나 질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반면, 어머니는 자식에서 본성을 부여하며, 모든 것을 감싸는 포괄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따라서 인간이 근본을 추구하고 이로 돌아감은 어머니의 원리로 돌아감을 뜻한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336p)

7장. 사랑과 결혼 이야기 - 진정한 사랑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경험이어야 한다. 이는 사회의 전통에 반하는 짓이지만, 이런 체험을 통해 기존의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력대로 사는 우리 세계와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다. 사회의 전통을 허물고 철저하게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사는 삶을 강조하고 있지만, 또한 삶과 고통이 별개가 아님을 인식하고 우리 밖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말한다.

8장. 영원의 가면 - 우리의 정신 안에는 인류의 공통적인 어떤 힘이 들어있다는 것을 수많은 신화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신화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영적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그 동안의 현실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 뒤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근원적인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충분히 언급되었던 신화 속에 숨겨진 원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캠벨이 일생을 바쳐 연구한 결과이자,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신화의 힘"은 단순한 스토리로서 전달되는 신화가 아닌, 그 안에 감추어진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캠벨의 의지의 결과이다. 대담의 기록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각 장을 통틀어 책 제목과 같이 진정한 신화의 힘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삶 속에 이를 끌어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신화라는 것이 캠벨의 말처럼 영원한 진리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현실의 우리 삶 속에서 그러한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추구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아쉬운 느낌이다. 특히 시대가 갈수록 그 모습이 사라지고,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변형되어 가는 의례는 신화와 현대를 연결하는 구체적인 연결점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역할을 가볍게 다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렵지만 다 읽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책을 읽는 내내 등산이나 마라톤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높이가 어느 정도 있는 산을, 특히나 동행하는 사람 없이 홀로 올라가는 동안에 힘이 들어 고통이 밀려올 때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라톤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꽤 오랜 시간을 달리는 중에도 숨이 차 고통스러울 때면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는 무모한 짓을 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역설적인 칭찬이다. 힘들 걸 뻔히 알면서 시작한 것에 대한 기특함,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고 말 것이라는 확신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신화의 힘을 읽고 이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1차 합격자를 발표하면서 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지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난 이런 종류의 고통 끝에 오는 쾌감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기에 그것을 위해 숨을 헐떡이며 신화라는 산을 오르고, 조셉 캠벨의 뒤를 좇아 달렸다. 물론 결과에 대해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글을 쓰는 것은 최고의 배움이라는 생각에 힘을 얻어 첫 관문을 무사히 마침을 홀로 자축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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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03.01 17:59:52 *.67.52.174
초면에 이렇게 말쓰드려도 예의에 어긋나겠지만,
정말 잘 쓰셨습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 편히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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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1 20:53:01 *.70.72.121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간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을 보는 것. 그것이 사부님께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도록 한 이유였다. 나에게 만큼은 확실히 그랬다.>

<190.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

올 한 해 가장 질기게 물고 늘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얼마나 질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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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2:40:34 *.125.205.55
한방에 책을 정리하시는 솜씨. 많이 배워갑니다.

최지환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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