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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00시 53분 등록
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이윤기 옮김


I. 저자에 대하여

저자: 조셉 캠벨(1904~1987)
1904년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나 평생을 비교신학자로서 서로 다른 문화권 신화와 종교의 공통되는 현상과 기능을 평생 연구하신 분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를 접하고,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이들 민화와 아더왕 전설의 상징체계가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데 착안, 모든 문화권 신화를 두루 꿰는 신화의 본(원형)을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연구를 집성한 노작이 4부작으로 된 그의 주저인 <신의 가면>이며, 이 주저의 서곡으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생물학적 수준에서만 아니라 그 영적 역사에서도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통일성은 하나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펼쳐져 왔고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화를 삶의 토대이고 무시간적 도식(schema)이며 경건한 공식(formula)이다. 신화가 자신의 특질을 무의식적으로부터 꺼낼 때 삶은 그 속으로 들어간다” 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言外)의 뜻을 거기에다 심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 만한 현대적 길잡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하여 배우고 책을 스승으로 삼아 탐구하였습니다.

1925년과 1927년에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문학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스트어를 공부하였습니다.
1934년 이래로 사라로렌스 대학의 문학부 교수로 재직하였고, 프리스턴 대학의 볼링겐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다. 볼링겐시리즈는 신화, 종교, 철학, 심리를 두루 연계하는, 인간과 문학의 뿌리에 대한 연구가 집약되어있는 총서입니다.

역자: 이윤기
<우주와 역사>(M. 엘리아데), <샤마니즘>(M. 엘리아데), <인간과 상징>(G융),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캠벨), <신의 가면>(조셉 캠벨)을 감전현상을 체험하게 하였던 “유독한(?)”명저로 꼽고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신화학, 종교학, 심리학적 관심을 두루 싸잡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것을 앞세워 관심하는 분야의 책이며, 현재는 경기도 과천의 집필실에서 신화연구 및 소설쓰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10)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11) 캠벨은 언젠가,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루카스의 영화를 보고는, 영웅의 역정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2)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5)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21)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이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1. 신화와 현대세계
(29)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33)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 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35)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43) 그래요. 보수 종교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어요. 보수 종교는 퇴화한 어떤 형태, 더 이상 삶을 섬기지 못할 어떤 모습을 지향합니다.

(64) 베이루트에서 치고 받는 세 신화학은 결국 현대 세계를 때려눕히고 있어요. 이들은 저희 신화학이 미래를 이끌 자격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71)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하게 합니다. 우리가 피마리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78)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2. 내면으로의 여행
(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여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9) 몽상가, 심지어는 영적인 지도자, 영웅의 상당수도 신경증의 언저리를 맴돈다지 않습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91) 신화가 지니는 중용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92)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7)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115)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것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117) 그러나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123) 내 생각으로는, 문제가 있는 것은 사무직 성직자가 하는 일입니다. 사무직 성직자는 은유가 암시하는 바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선악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1) 가령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말이지요.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155)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158)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성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성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일까….. .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161)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 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164) 소녀는 초경(初經)을 맞으면서 여자가 됩니다. 여자에게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거죠. 말하자면 자연이 여자에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175) 그럼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 희생과 천복
(17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189)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205) 잘 짜여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22)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부모가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지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과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씩 정도는 약 반 시간씩 개인 면담을 하고는 했어요. 가령 학생들과 독서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요.
시인들은 시 쓰는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 자기 삶의 방법을 천복에 맞추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다른 일에 관심을 쏟지요.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끼여들거나 군대에 입대하여 흥미도 관심도 없는 전쟁터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천복을 붙잡기가 어렵습니다.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재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할 당연한 불쌍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5. 영웅의 모험
(229)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232)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보다는 밖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더 영웅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니까요.

(234)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41) 신화의 이면에 있는 세계는, 영적 가치라고는 모두 고갈되어버린 우리 세계인 것 같고요. 사람들은 발기 불능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는, 불감증, 권태, 보편적인 질서로부터의 소외감…… .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내려진 저주 같아 보입니다. 우리 심층의 갈망을 일깨워줄 영웅이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T.S.엘리엇의 <황무지>가 그리고 있는 게 바로, 모이어스 씨가 지적하고 있는 무기력한 삶과 강요된 삶으로 빚어지는 사회학적인 침체 상황입니다. 이런 삶은 우리의 영적인 삶, 우리 잠재력, 우리의 육체적인 힘을 촉발할 수 없지요. 세계대전이 무엇이던가요? 이런 삶이 지배하는 분위기가 빚어낸 전쟁 아니던가요?

(246)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251) 만일에 어떤 이야기가 이른바 원형적인 모험(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야기, 혹은 성인으로서 살게 될 새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다룬 이야기)을 다룬 것이라면 그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도중에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본보기가 되어줄 테니까요.

(255) 그래요.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 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263) ‘자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자기’와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자기’ 즉 진짜 ‘자기’가 있을 수 있겠는데요.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 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271) 천만에요! 그렇지가 않아요. 스승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소수겠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것에 반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와 같아요.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273)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276) 스승이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 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본이 너무 다양하게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많은 본 중에서 하나를 고르다가 결국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살다 갑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하나의 본을 선택하면 곧 거기에 적응되어 나가지요? 그러다 나이를 좀 먹어 중년을 넘기면 사람에게 직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알게 되지요.

(277) 13세기 판 <성배를 찾아서>를 읽을 당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이것이 바로 서구인의 독특한 정신적 과녁이자 이상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적 진실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구성원의 의무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지요.

(278)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84)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285) 예술 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상당수의 예술가는 제자에게 이런 식의 홀로 날기를 허락합니다. 많은 예술가가 실제로 그 홀로 날기를 보려고 제자를 가르치고요. 그러나 개중에는 날 준비가 끝났는데도 제자를 계속해서 학교에 잡아두는 스승도 있어요. 이렇게 되면 제자는 아주 다루기 까다롭게 되어가면서 결국은 스승을 험담하게 되지요. 이건 전적으로 스승의 잘못입니다.

(287) 아무리 신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좆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행복을 좇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뿐이지요.

(291)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천복을 좇아라, 삶의 기회를 잡아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라고 가르치신다는데, 혹시 이 신화를 들려주시면서, 모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곧 모험에 대한 보답이다, 이렇게 가르치시는지요?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302)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예술뿐인가요?

내가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얽힌 숲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디다. 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

(303)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6. 조화여신의 은혜
(304) 어머니가 양친 중의 으뜸자리에 속하고, 삶의 근원인 종교 체계도 있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식과 더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까닭이야 간단하지요. 우리는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의 경험을 어머니와 함께 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결국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323)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35) 옛날에는 스승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그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즉 옛날의 스승들에게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삶의 단서를 줄 의무가 있었지요. 그래서 사제들이 있었고, 의례라는 게 있었던 겁니다.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3)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

이것은 개성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나는 서구를 위대하게 한 것, 다른 전통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답니다.

결국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전통에 반하는..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 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344) 믿으니까 고해를 해야지요. 고해를 할 때는 그 동안 지은 죄를 줄줄이 꿰어냅니다. 그런데 죄악에 집착해 있으니까 신부 앞에서, “이런 주일에는 죄라고는 하나도 안 지었으니까, 신부님, 저를 축복해주세요!”. 이런 말은 하게 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되니까요. 삶의 의지를 이렇게 짓밟아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라는 겁니다.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50)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그러면 자기 손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서구식 개인주의는 이런 낭만적인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고 말고요. 동양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종류의 개인주의를 읽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게 사회적 시스템이 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게 서구 사회에서는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4) “오히려 그들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간을 정제(精製)하는 힘으로, 인간을 더 높은 존재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대놓고 찬양했다. 그들은 그 힘이, 사랑을 통하여, 개인의 고뇌와 기쁨을 통하여 마음을 인간 존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락으로 여는 것이라고 믿었다.”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예요.

(358)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359) “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
이게 바로 유럽의 시작입니다.
유럽의 시작이라니요?
개인주의가 꽃 피는 유럽, 성배 전설이 있는 유럽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360) 이때부터 5년 동안이나 온갖 시련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뒤에야 그는 다시 성으로 돌아와 왕을 치료하려면, 병든 사회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질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입니다.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겁니다.

(361) 글쎄요. 마틴 루터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음유시인입니다.

(362) 권력! 권력이에요. 유럽 역사의 근본적인 충동은 권력 충동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종교 전통으로 흘러 들어 왔어요.

(363) 1260년경에 이 철학자는, 세 번째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되려 한다고 쓰고 있어요. 세 번째 시대는 성령이 개인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시대라는 겁니다. 이 시대에는 말씀으로 된 메시지를 육화시키거나, 그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다 동등한 존재가 된다, 이게 바로 이 세 번째 시대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교회가 생기면서 이스라엘이 고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개인적인 경험이 생기면서 이번에는 교회가 고물이 되는 것입니다.

(365) 어떤 결혼에서는 그렇고 어떤 결혼에서는 안 그렇죠.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었어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지요.

더 정확하게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366)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결혼은 진짜 결혼의 초보 같은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367) “사랑에 빠지면 여자가 아홉 배쯤 더 좋아하지요”

(369)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8. 영원의 가면
375
(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380)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비, 화합, 타자와의 동일성, 혹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자리잡게 된 바람직한 자아 초월적인 원리와의 동일성 체험은, 종교적인 삶과 체험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이라야 평생을 바쳐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완벽한 경험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381)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랜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지요.

(387)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종류의 인생이 있어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즉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렐리기오’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미지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393) 바로 그겁니다.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95) 비교신화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사실 나는 약간 두려워했어요. 학생들의 종교적인 신앙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나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던 거지요. 그러나 곧 정 반대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학생들에게 종교 전통이라는 것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되었어요. 그런데 학생들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이미지를 비교하다가 종종 자기네 종교의 이미지가 지닌 전혀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다른 문화권 이미지에, 자기네 이미지 이상의 내적. 영적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을 때 특히 그렇지요.

(398) 절정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는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나는 절정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이게 어떤 경험인지 알았습니다만. 내 경우에는 운동 경기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412)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413)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III. 내가 저자라면

가슴으로 사는 삶, 천복, 영혼의 잠재력, 존재되기, 아름다움과 환희 등을 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자 합니다. 신화나 지혜의 이야기 속에서 메타포, 즉 비유와 상징으로 묻혀있는 이러한 빛을 해박하고 넓은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문화와 지역이 다르고 시대가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신화나 전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영혼과 죽음 그리고 성장과 변화 등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가 아주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이런 울림들이 시대와 종족을 초월하여 인류 전체에 고루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이나 영혼이 의도된 권력에의 의지나 잘못된 교리 해석으로 왜곡되고 있으며,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연적인 본성이나 인류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잠재력을 무한하게 펼치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서로의 믿음이나 관점을 열어서 바라보자고 이야기 합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구조는 인류의 영혼과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아주 깊이 묻혀있는 유물을 캐듯이 천천히 조심스럽고 집어 올려 이해하기 쉽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 순서가 현대라는 특수한 환경을 거쳐서 내면으로 들어와 내면의 힘과 의지를 짚어보고 결혼이나 성장하는 단계들을 통과하여 영원으로 귀향하는 구조로 흐름을 타듯이 엮여있어 읽는 것을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자연과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큰 구조와 흐름을 보여주기 위하여 다양한 주제를 논하고 있으며 다양한 주제들이 개별적으로 전개된 듯 하지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이 전체적인 큰 구조나 흐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일관되게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신화 또는 영혼이나 정신을 다루게 되면 종교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 등과 엮이게 되고 이러한 불편한 고리들이 이야기 전개를 어렵게 하고 옆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 몰고 갑니다. 가끔은 가슴이 조마조마한 부분이 있지만 전체 흐름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아쉬운 부분으로 <스타워즈> 영화를 통하여 대화를 너무 많이 이끌어 가고 있어 논의 전개가 따분해지는 부분이 있고, 화폐에 그려진 그림에 대하여 너무 장황하게 펼쳐놓아 지루함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성경을 과도하게 인용하고 인용된 것을 대립되는 상황으로 몰고가 읽는 사람과 긴장관계를 오랫동안 만들어 내는 것도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어렵게 보이는 신화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가슴이나 영혼을 터치하여 울림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발견하고 탐색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좋은 조언자 역할도 해주는 데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여운을 가지고 음미한 부분은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고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는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라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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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3 16:31:41 *.70.72.121
91) 신화가 지니는 중용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성실한 책읽기를 하셨네요. 인용문과 함께 독자를 편하게 해 주었어요.

이 과정과 함께 빛의 에덴을 향한 책읽기와 글쓰기로 천복을 누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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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2:43:33 *.125.205.55
제가 뵈었던 어떤분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그분이 아닐까 하구요.

강종출님의 다시 문을 두드리는 모습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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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출
2008.03.04 00:06:17 *.34.47.25

반갑습니다.

어디서 뵈었던 멋진 그 분이 맞을 듯 하네요.



끝까지 건승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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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출
2008.03.04 00:19:37 *.34.47.25

써니님.

많은 힘이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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