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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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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02시 2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작가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향이 있어요.
이 분의 글에서는 제사할 때 피우는 향 냄새가 나요.
매캐하고, 코를 아프게 하는 바로 그 향이요…
뿌옇고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를 신비함이 풍겨 나오죠.

책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난 신성하며, 열정적이다 못해 광적인,
신을 향한(또는 내 자신을 향한) 제의가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팔소리, 두둥 두둥 북소리와 신비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죠.
그리고 알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나 또한 흥에 겨워 춤을 추기 시작해요.
그 격정의 순간 한 소년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어요.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 소년도 나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해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가 나에게 이야기 하기 시작해요.

그는 한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어, 인디언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박물관을 찾은 그는 한 코너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 되었어요.
그 후 인디언 신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종교학 수업 시간,
그는 평소처럼 인디언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어요.
그러다 그는 인디언 신화와 종교 속 이야기들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가 당시에 얼마나 흥분 했는지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어요.
그는 앞으로 신화에 대해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해요.
그의 눈빛 속에는 자신의 천복을 발견한 자의 신성한 그 무엇이 담겨 있었어요.

난 자신의 운명을 찾은 그를 축복하며 덩실 덩실 춤을 추었어요.

20대 초반의 청년이 나를 찾아 왔어요.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그는 신화를 깊이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있데요.
앞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신화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거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는 조용히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를 떠나려 했어요.
떠나는 그를 잡고 싶었지만,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걸 알기에 그를 보내 주었어요.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죽기 전에 남기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이죠.


집에 돌아와 피곤한지 깊은 잠에 빠져 들었어요.
꿈 속에 한 연금술사가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 어떤 아쉬움도 없이 평온하고, 편안해 보여요.
존경을 가득 담아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어요.
그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그의 연금술은 이 세상 최고였어요.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보잘 것 없는 이야기들이 그의 입을 거치고 나면,
신성하고 아름다운 금빛 이야기로 변해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그의 손을 거치고 나면,
이 세상의 가장 심오한 진리를 담은 하나의 이야기로 변해요.

그의 금빛 이야기들이 세상에 퍼져나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기 시작해요.

신화가 결코 하늘 위의 이야기가 아님을,
땅 위의 우리들 안에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 섥혀,
우리의 내면 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신화라는 지도를 이용해 우리 안의 영적 잠재력을 깨닫는 순간,
우리 모두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말이죠.

그의 삶은 모험 이였어요.
그는 신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이로서 그 또한 우리의 영웅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캠벨씨.
당신으로 인해 나 또한 천복을 따라 사는 삶이 그리워 졌어요.
잘가요. 캠벨씨.
당신이 보고파 지면 또 다시 당신의 글을 찾아갈께요. 그 때까지 안녕….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 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 P.9

이런 사회의 대표자인 대통령을 백주에 암살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게서 살아 있는 삶의 순간을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지요. 결국 사회는 대동 단결의 감각을 되찾기 위한 보상적인 의례를 요구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나흘 동안만은 만장일치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이벤트에 동시에 참가하게 된 겁니다. P.10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1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P.12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이 아니라오 P.14


1. 신화와 현대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P.25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P.28

인도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P.71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73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P.74

우리는 이 땅을, 갓난나이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을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P.81


2. 내면으로의 여행

그들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90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입니다. P.98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P.10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P.120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거시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들이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P.121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P.133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P.134


3. 태초의 이야기꾼들

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드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P.143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 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이랍니다. P.156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씨가 앉아 있는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P.175


4. 희생과 천복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177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느닞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179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P.180

마음에 드는 자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 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190

동남 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의 해골 사냥 전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해골 사냥은 신성한 행위, 신성한 살인입니다.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제 몫의 살인을 해야 합니다.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다음 세대가 오게 하려면 앞 세대는 모두 죽어야 한다….. 이것이 이 의례의 의미입니다. 아이를 끼치거나 낳으면 곧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아이는 새 생명입니다. 앞 세대는 이 새 생명의 보호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P.209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P.211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하와이 경찰관은 자기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던 청년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쇼펜하우어는, 자세히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장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P.211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P.215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드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ㅓㅅ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P.217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P.221

천복 같은 것과는 상과넚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3

천복에 이르는 거지요.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에도,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가 때나 내려올 때나……(중략)……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다…… 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것입니다. P.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223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과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씩 정도는 약 반 시간씩 개인 면담을 하고는 했어요. 가령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P.224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느나?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P.225

그란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자,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나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일자리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런데 내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P.225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P.226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P.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6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P.227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227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을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할 하게 될 것임을…. P.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P.229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 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P.229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자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30

그런데 전장에서 전사한 병사와 출산 때 죽은 어머니는 똑같이 최고천을 배정받지요. 말하자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P.231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자면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 P.232

<코란>은 “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P.233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P.233

도덕적인 목표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구하는 것, 특정 개인을 구하는 것, 어떤 관념을 받드는 것이 될 수 있지요.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지요. 물론 반대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 옹호하려는 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일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이것은 반대편 입장에서 보아서 그럴 뿐입니다. 반대 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P.235

영웅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여행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웅과 그렇지 않은 영웅이 있는 것이지요. 전자의 영웅은 모듬살이의 필요에 반응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하러 떠납니다. P.238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P.239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44

신화학적 의미에서 그는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요. 만일 이들이 그보다 30년 전에 나왔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에 알맞았을 겁니다.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것을 분위기라고 해도 좋을까요. 하여튼 명상적이고 동양 음악적인 분위기를 더한 거지요. 동양 음악은 수십 년 전에 벌써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습니다. 그저 호기심의 대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틀즈 이후에 와서야 우리 젊은이들은 그게 뭔지 냄새를 맡았던 거죠. 지금에 와서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이제는 이런 음악이 명상의 보조 수단이라는 그 원래의 의도에 맞아덜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비틀즈가 얻은 명성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P.246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배는 갈가리 찢기고, 선원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오디세우스만 파도에 실려 출렁거립니다. 부러진 돛대에 매달려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해변에 닿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혼자 되고 말았구나. 결국은 혼자 되고 말았구나” P.247

그래요.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P.254

옛 이야기는 우리의 외양과 정서적 태도를 다듬고, 우리 삶에 목표를 부여해왔으면, 우리 행위에 에너지를 공급해왔고, 고통을 성별해 왔으며 우리 교육의 길잡이 노릇을 해왔다. 그래서 아침에 잠을 깨어도 우리는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온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옛이야기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도 우리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P.254

여기 있는 나는 여든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몇 권은 족히 될 책을 쓰고 있어요.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런 아이가 부러워요.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 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 P.258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현대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신화 모티프를 선택해서 길잡이로 삼는 것도 좋겠지요. P.264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P.265

아시겠지만 그 영화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겁니다. 이건 중요해요.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물론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생명이 있는 곳은 가슴이니까요. 벤 케노비가, “포스가 너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포스’는 프로그램된 정치적 힘이 아니라, 우리 생명의 힘, 생명의 에너지인 겁니다. P.266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P.270

내가 장담하거니와, 상관이 있어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다스 베이더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다스 베이더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스므이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불열증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0

우리도 바로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영적으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을 위하여 육체적 욕망과 공포를 희생시키는 일…… 바로 이거 아닙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에서, 육체가 우리의 깊디깊은 삶의 정체를 깨달아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조만간 무엇이, 이 이승의 삶이라는 꽃을 잘 가꾸는가를 알아내어 그것에 헌신해야 합니다. P.271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P.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P.272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272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던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P.273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P.273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3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여자는 자기의 용을 죽인 셈이지요. P.275

그래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P.275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P.276

말하자면 서구인들은 ‘나’ 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적 진실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 사회를 보면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과자 같아요. 이런 사회 구성원의 의무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지요. P.277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P.277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79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는, 낙타를 순치하는 수많은 ‘강제’인 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P.284

우리는 예술을 공부하고 예술의 기법을 배우러 가서 스승이 강요하는 것만 열심히 좇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기법을 쓰기는 쓰되 스승이 시키는 대로 쓸것이 아니라, 한번 자기 식으로 써보고 싶을 때가 오지요. 이게 바로 사자의 행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이 때가 되면 학생은 스승에게서 배운 모든 기법을 버립니다. 자기에게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바로 이때부터 예술가로서의 홀로서기가 시작됩니다. P.284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P.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P.287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87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을 좇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권능자들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지요. P.291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 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P.296

이 여자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기의 고통은 기왕에 지은 죄에 대한 징벌, 혹은 장차 지을 죄를 경계하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이 여자에게 정신적인 고통까지 안겼지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P.297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이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P.298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어디에선가 전쟁이 터지면 젊은이들은 징집을 당하겠지요. 그러면 바로 이 우연지사와 함께 5-6년은 좋이 썩어야 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내가 충고해 주고 싶은 것은, 징집당했다고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의지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P.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P.299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P.301

나는 보통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P.301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의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있음의 모험이지요. P.303


6. 조화여신의 은혜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05

어머니는 ‘여기’에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돌보고, 아버지를 찾으러 떠날 나이가 될 때까지 아들을 가르칩니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07

태고의 모신 신화에 나오는 모신들은, 누가 어떻게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원래 우주의 모습으로 존재하던 여신들입니다. 따라서 마르둑 신의 위대한 창조적 행위는 사실 불필요한 행위입니다. 그 조모신의 몸을 잘라 우주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왜, 그 조모신 자체가 우주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남성 위주의 신화는 남신을 불러들여 창조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합니다. P.314

아 놀라워라, 아, 놀라워라, 아, 놀라워라!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예요. P.319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P.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P.320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 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P.333

이 사회에서 어떤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는 우리의 기대는 우리 인간의 정신에 어떤 변화가 와야, 이로써 사회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회, 그 사회의 어떤 무리와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특정 무리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느냐?”하는 질문입니다. P.334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면서 야훼는 남성을 창조하되 먼저 형상을 빚고 여기에 다 생명을 부여합니다. 결국 야훼 자신은 그 형상 안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신은 다릅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P.336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P.337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 같은 기능 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P.343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되니까요. 삶의 의지를 이렇게 짓밟아 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라는 겁니다. P.344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5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347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P.349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P.350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예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예요. P.355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창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창에 상처를 입지요? 이 세상에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그 창을 상처에 문지르는 것뿐이다… 이런 유의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P.356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P.359
질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입니다.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겁니다. P.360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P.365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예요.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P.365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P.367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 P.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P.375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P.387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제인 존재를, 우리 나름의 표현법을 통해서 그려내려고 하는 일에 지나지 못합니다. P.410

자, 그렇다면 이 일관된 구성은 누구 손에서 이루어지느냐?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P.411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잇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P.412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P.414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P.415


3. 내가 저자라면

아… 어렵다…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신화의 힘~ 젠장!!

첫번째 책이 조셉 캡벨의 저서인 걸 안 순간 잠깐 공포에 사로잡혔다. 예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으며 느꼈던 고통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때 끝까지 다 읽지도 못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느낌에 결국 포기해 버리지 않았던가… 신도 무심하시지… 날 골탕 먹이기로 작정했나 보다.

신화의 힘, 이 놈은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다. 그래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전체적인 뼈대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고, 서술형이어서 찬찬히 읽다 보면 앞뒤 문맥의 연결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화의 힘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옮겨 담은 책이어서 그런지 글의 흐름을 파악하기 참으로 난해하다. 이 얘기를 하다 난데없이 다른 얘기로 넘어가는데 그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조금 이해 될 만 하면 날 놀리듯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린다. 아주 약이 올라 죽겠다. 괜히 두 번째, 세 번째 연구원 과제도서만 기웃거렸다.

난 신화에 대해 문외한이고, 관심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극도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편이다. 그러니 남들은 이해가 되는 부분도 나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야기 간의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게 더욱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이 꼭 안개 가득한 숲을 헤매다 간신히 빠져 나온 뜨내기 여행자의 기분과 같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겠는가.

처음 1장까지는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주제가 ‘신화와 현대세계’ 이듯이 현대 세계 속에서 신화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듯 했다. 하지만 2장에 들어서자마자 초입부터 헤매기 시작한다. 분명 주제는 ‘내면으로의 여행’인데 2장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그것과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찾지 못하고 한참을 미로 속을 헤매다 결국 길을 잃고 만다.

내가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뒷 이야기가 앞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 앞 사람이 한 질문에 답하거나, 그 이야기에서 연상되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해 되겠지, 기대해 보았지만, 이러한 막연한 느낌은 마지막 장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5장만이 주제에 충실하였고, 가장 잘 이해되었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흥미진진한 신화 이야기를 곁들인 것은 참 고마웠다. 무슨 말인지 이해 안 되다가도 신화를 읽으며 어렴풋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사진이 많은 것도 생생한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무언가 멋진 글을 쓰고 싶은 욕심에 2번이나 재차 읽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초조한 마음에 시간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칼럼부터 올리고 찬찬히 1번을 더 읽었다. 하지만 별반 나아진 게 없다. 지금 내 머리 속에 남는 것이라고는 신화이야기 몇 편과 영웅와 천복에 관한 그의 이야기 조금...... 그게 전부이다. 그래서 난 감히 이 책의 전체적인 뼈대를 논할 수 없다. ‘내가 저자라면’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에 부끄러워질 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찾는 것이 삶의 의미가 아닌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는 저자의 말로 나의 부족함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면 지나칠까… 비록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신화라는 비밀스런 세계에 푹 빠져 지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인 캠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감칠 맛 나는 신화 이야기와 그 해설은 나를 너무나 즐겁게 해 주었다. 신화 속에 감추어진 그 은밀함,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신화의 이중성,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것의 깊이…
그랬다. 신화로 인해 나는 10일 내내 황홀했다.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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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숙
2008.03.02 15:57:06 *.51.218.168
안나, 화이팅, 아주 좋아요.
저자소개 매우 창의적이고, 책을 아주 잘 이해했군요.
안나가 저자소개에 쓴 것처럼 신화라는 지도를 이용해 우리 안의 영적 잠재력(천복)을 깨닫고 그 것을 따르면 우리도 모두 영웅이 될 수 있겠지요.천복을 따라 멋진 한 판의 춤으로 인생을 살다 간 캠벨은 우리 모두의 영웅이구요.
안나가 저자 소개에 어렵다고 너스레를 떤 것은 그냥 애교로 보여요. 책을 통찰하는 안나의 안목을 오히려 배우고 싶어요.
글 잘 읽었어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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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나
2008.03.03 13:43:50 *.117.73.63
언니는.... 자꾸 붕붕 띄어 주면 안 되요~ 그럼 나 진짜 잘 하는 줄 알고 방방 뛰어 다닌단 말이죠. 다들 왜 이러실까... 날 잘 알면서... ㅋㅋ
고마워요. 그래도 13기 동기 언니와 함께 해서 참 든든해요. 우리 끝까지 화이팅하자구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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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3 20:10:55 *.70.72.121
올 한 해 살아있음의 모험심을 마음껏 누려라.
그리하여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으로써 영적 잠재력을 왕성히 촉발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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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2:46:26 *.125.205.55
와~~ 유명하신 분이군요.ㅎㅎ

박안나님 글에서 생기가 느껴져요.

봄날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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