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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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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20시 11분 등록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 1988) ★★★★☆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2002, ㈜이끌리오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에는 정작 조셉 캠벨의 서문은 없다. 당연한 것이, 그가 죽은 뒤에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자료로 추론해보면, 1985년 이 책의 근거가 되는 공동 저자인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이 녹화되었고, 1987년 10월 조셉 캠벨이 죽고, 1988년 초에 방송이 된 후 곧 원본이 출판되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초판은 1992년에, 개정판은 2002년에 나왔다.

조셉 캠벨(1904~1987)은 미국 신화학 교수이며 비교신화학자, 비교종교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뉴욕 중상류층 카톨릭 가정 너그러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인디언 토템기둥과 가면에 매료되어,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하여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가 되었다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사람은 참 ‘복 받은 인생’이구나, 천복을 따르는 ‘순탄한 인생’을 살았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인생기록을 살펴보면 이런 단순한 생각이 여지 없이 무너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위와 같이 꿈과 희망의 소년시절을 거쳐, 1921년 Dartmouth 대학에 입학,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나 이내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영문학(1925 학사)과 중세문학(1927 석사)을 전공한다. 1927년 유럽으로 건너가 고전불문학과 산스크리트를 공부한다. 유럽에 있는 시기에 지적•예술적 혁신기인 ‘Lost Generation’의 많은 영향을 받는데, 특히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 등의 작가와 칼 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9년 컬럼비아 대학으로 복귀하여 유럽에서 넓힌 관심분야에 맞게 본인의 전공인 중세문학에 덧붙여, 산스크리트와 모던 아트를 연구하려는 그의 계획이 학교로부터 거부당하자 박사학위를 포기하는데, 이후 전통적인 학위과정의 공부와는 결별한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대공황이 시작되고, 그는 뭘 할지를 고민하면서 1934년에 Sarah Lawrence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기까지 5년 간의 강도 높은 독자적인 공부[독서]를 진행하였다. 1938년에 결혼 했고, 1972년 교수직에서 은퇴하였다.

이제, 조셉 캠벨이 이 책 ≪신화의 힘≫에서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문명비판, 기존 종교에 대한 불신, 천복을 따르라("follow your bliss")는 조언, 영웅의 모험, 더 나아가 집단과 개인을 동시에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의 강조하는 이유를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 책의 전편을 통해 느끼게 되는 그의 꼬장꼬장함과 반골기질, 끈기 등을 말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신화와 현대 세계>
p.29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p.37 오늘날 우리는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에 살고 있어요.

p.38 나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p.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p.60~61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구속적인 범주라는 것이 없어요.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학은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신화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없어요.

p.64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p.77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이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눈이요. 이것이 곧 이 땅의 음성입니다. …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p.78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가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p.78 <시애틀 추장의 글>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인지요?
… 우리는, 땅이 사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내면으로의 여행>
p.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깊은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p.97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p.107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p.115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서적 전승은 모두 이른바 자연 종교의 타락이라는 문맥에서 논의되고는 합니다. 자연 종교가 사회적 종교로 변질하면 자연과의 관계를 제대로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p.117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p.133 본질적이고,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태초의 이야기꾼들>
p.166 교회는, 전례(典禮) 언어로 번역되던 미사까지도 상당히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해 냅니다.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를 일상성의 마당에서 ‘몰아낸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사제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곳, 그곳이 제단입니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제와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외계를 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제들이 성소를 돌려놓아 버렸어요. 세상과 오순도순 지내보자는 거겠지요.

<희생과 천복(天福)>
p.179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179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p.186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줍니다.

p.188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초자연이라는 관념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관념 아닙니까?

p.189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자연 자체를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p.190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서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p.190 샤먼과 사제의 중요한 차이 : 어떤 사회가 어떤 신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섬길 경우, 사제는 의례를 집행하는 기능인으로 서품을 받습니다. …그러나, 샤먼의 권위는 그 자신의 심리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지, 사회가 부여한 성직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p.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p.212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해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p.217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p.221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다수라는 것은 항상, 먹을 것, 살 데, 자식들, 재물 이상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요.

p.221 ≪바비트≫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天福)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p.222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223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들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지요.
…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붙잡고, “이 학생은 여기에 매달리게 해주어야겠구나”, 이런 결심을 하고는 합니다.

p.225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p.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갈 것이다.

p.22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영웅의 모험>
p.229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p.237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이렇게 되면 영웅에게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弘益)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p.251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도시는, 살던 곳에서 탐색의 여행을 떠나, 무서운 시련이나 모험을 이겨낸 영웅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p.262 나에게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p.262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p.263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p.265 다스 베이더(영화 스타워즈의 등장인물)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p.270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가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解離)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 217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p.272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
용(龍)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p.278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방향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서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p.283 오디세우스는 이승의 가치에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의 삶의 가치에 충실하는 방법을 받아들입니다. …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입니다. …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지,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 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다시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흡사 그대를 떠난 바퀴처럼 말이지요. 이제 이 아이에게는 복종해야 할 법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필요에서 제정된 법률도 없고, 지역 사회를 위해 제정된 법률도 없습니다.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p.284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p.291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p.300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p.313 인류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 : 셈족이 모신신앙(母神信仰) 체계를 지닌 농경문화권을 침략함으로써 남성 위주의 신화가 두드러지게 됩니다.
(p.312)이러한 외침은 기원전 4천 년 기에 심각한 위험을 조성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해 집니다. 농경문화권에 대한 외침의 세력은 북에서 밀려들고 남에서 밀려들어와 거대한 도시들을 하룻밤 사이에 쓸어버립니다.

p.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 해본 적이 있던가요?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9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그렇지요.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의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이런 거지요.

p.350 자기 손으로 자기 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서구적 개인주의는 이런 낭만적인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고 말고요. 동양의 이야기에도 이런 종류의 개인주의를 읽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게 사회적 시스템이 되지 못했어요. …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p.356~357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p.361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텨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 만큼 어려워집니다.

p.368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입니다.

p.369~370 일반적으로 신화는 개인의 사랑 문제는 다루지 않아요. 결혼을 허락 받았기 때문에 결혼한다. 특정 족속에 속할 경우, 이 족속과는 결혼할 수 있지만 저 족속과는 안 된다. 뭐 이런 걸 다루는 정도에 그치지요. …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체험이지요. …
트리스탄은 사랑을 경험하지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사랑을 말하고 있잖아요?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p.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 할 수 있지요.

<영원의 가면>
p.396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p.397 신화와 우리 유태-기독교의 차이는, 전자의 이미저리는 약간 유머러스하다면 후자의 이미저리는 지나치게 삼엄한 데가 있다는 것이지요. 신화의 이미지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해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 종교를 보세요. 모든 것이 살풍경하고 심각해요. 가령 야훼를 두고 농담을 할 수 있던가요?

p.405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에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p.409 영원은 영속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상적 관계의 체험 속에서도 그 영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p.413 우리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를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은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은 겁니다.

p.413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p.415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필멸하는 측면과 영생하는 측면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관한 나의 체험에서 나는, 그 체험에는 현세적인 관계의 체험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물론, 관계에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나는 그런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요, 계시의 순간이요, 광명의 순간입니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
p.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p.12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점이다.

p.13 그(조셉 켐벨)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p.15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전체적인 뼈대>
대담 진행자인 빌 모이어스의 짧지 않은 서문(14 페이지)은 서문치곤 가볍지 않은 내용으로써 신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포함한) 독자에게는 처음부터 부담을 주는 면이 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읽어보면 조셉 캠벨과 그의 신화학을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정보가 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1장 ‘신화와 현대세계’에서는 현대사회에서의 신화의 가치를 설명하면서, 신화의 중요한 기능 및 현대사회에서의 신화의 부재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미래의 신화에 대해 어떤 한 집단의 신화가 아닌 이 땅의, 지구의 신화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다분히 코스모폴리탄적인[지구적인 – 이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 같다]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2장 ‘내면으로의 여행’ : 신화와 꿈 그리고, 원형적인 무의식과 개인적인 무의식 간의 구별 등을 통해 신화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로 우리를 이끈다. 또한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사회적 종교와 자연 종교를 구분 지으면서 후자를 지지한다.
3장 ‘태초의 이야기꾼들’ : 현대사회에서의 의식(儀式)의 축소와 그 부정적 영향에 대해 말하며, 한편으론 서구사회의 개인주의를 일부는 부정적으로도 일부에선 긍정적으로도 평가하고 있다.
4장 ‘희생과 천복’ : 이 책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인 천복(天福 - Ananda)을 언급하며, 현대사회가 개인의 천복 찾기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특히, 아이에게 천복을 찾아주는 방법을 언급한 부분은 꽤 흥미 있다.
5장 ‘영웅의 모험’ : 4장의 ‘희생과 천복’과 함께 이 책의 중심 메시지를 이루는데,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점점 더 자기 찾기가 힘들어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현실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 데까지 가야 함을 제시한다.
6장 ‘조화여신의 은혜’ - 모신신앙(母神信仰)이 언제, 어떻게 부신신앙(父神信仰)으로 바뀌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흥미롭다.
7장 ‘사랑과 결혼 이야기’ – 12세기 유럽의 음유시인들이 관심을 갖은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아모르적’ 사랑으로부터 (당시 교회에 대한)용기가 나오고, 개인이 중요해지고, 개인적인 경험과 이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어, 이후 서구식 개인주의가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설명은 여러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 서양과 동양의 비교 도구로 활용될 수 있겠다.
8장 영원의 가면’ – 가려진 영원의 참 뜻을 말해준다. 즉, 시간의 영속이라는 식의 영원은 없으며, 소중한 영원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순간들이 곧 영원이라고 하며, 필멸하는 측면과 영생하는 측면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인생을 사는 우리들을 위로하면서, 이 책을 끝맺고 있다.

<감동적이었던 부분>
이 책은 단순히 신화학에 국한된 책이 아니다. 신화학과 문명비판 그리고 자기계발서의 혼합이랄까. 물론, 조셉 캠벨은 신화학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은 ‘신화’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켰다는 점이다. 신화는 인류 공통의 유산이며,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첨단문명 속에서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시간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호기심과 놀라움을 선사한다.
특히, 많은 영웅들 – 프로메테우스, 오디세우스, 석가, 보살, 예수 등 – 의 이야기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자기 세계를 열고, 세계에 기여한다는 자각한 자들의 공통적인 삶의 모습을 알게 될 때, 세계의 다양한 신화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다는 것처럼, 늘 깨어있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궤적에도 영웅의 모험과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 점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 하고 싶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얼마 동안은 신화나 종교 심지어는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에 대한 관심까지도 일정부분 제고됨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만큼 이 책에는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이 있다. 이런 증세(?)는 일독 후 가족등산을 가서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 날 봉우리에서 본 하늘의 전경이 다른 때와는 달리 ‘저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으니…

<보완점>
이것이 ‘대담 형식의 책’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제의 일관성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전체 흐름을 보면, 신화의 영역이 줄어들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해 걱정에서 시작하여, 천복•영웅신화를 통한 개인의 홀로서기를 강조하다가, 모신신앙•사랑•결혼•영원 등의 다양한 주제의 대담으로 마무리 되고 있으니 말이다.
단순한 것으로는, 중간 중간에 다른 주제로 갑자기 전환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 중요한 것으로는 각 장 마다 몇 가지 주제 중심으로 분리되다 보니 ‘신화’라는 주제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 측면에서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일부 남게 되는 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의문 중의 하나가, 저자(캠벨)는 신화를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라 하면서 그 사회에 소속되는 절차로써의 ‘의례’의 필요성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의미하는 사회가 인류전체[地球]를 의미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또 한편으로 강조하는 ‘개인주의’와의 조화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제시가 약하다는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다. 결국, (긍정적인 성격인 것이겠지만) 전체주의적인 것 같기도 하면서 개인주의 같기도 하다는 말인데…
결국, 조셉 캠벨이 똑똑한 개인이 강조되는 영웅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는 아닐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면서 이 글을 마친다. Ω
IP *.152.13.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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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3:00:45 *.125.205.55
와 멀리 보이는 남산...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산이 관악산이가요.
수리산에서 본 모습이 저럴까 생각해봅니다.

p.12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점이다.

멋진 글 다시 읽고 갑니다.

김용빈님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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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4 20:34:09 *.70.72.121
<p.78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가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

개인의 이성적인 균형감 참 중요하지요. 아마 모두가 그렇다면 참 살기 좋을 텐데 말예요. 재미없을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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