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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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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21시 40분 등록
하나, 저자에 대하여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주어진 시간 동안 책은 어찌됐건 읽었냈지만 저자에 대해 개인적인 평가를 하라니...어떤 작가가 쓴 책 한권을 읽고 그 작가를 평가하려면 평가자가 대단한 경지에 있어야 할 듯 하다. 더우기 이름조차 생소한 작가라면 무슨 말이 필요있으랴!

시간이 좀 더 있으면 저자가 쓴 다른 종류의 책도 좀 읽어 보고 할텐데...


저자는 미국 뉴욕 화이트플레인의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다. 어릴때 그의 아버지가 미국자연사 박물관에 데려갔고 거기서 미국 인디언 전시물들을 본 이후 인디언 문화에 매료된다. 특히 인디언신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것이 전생애에 걸쳐 캠벨을 신화연구에 몰두하도록 하며 인류문명과 신화를 연결시키는 노력을 계속하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해본 적은 없지만 어린 조셉 캠벨에게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가지 신비한 고대의 유물들 앞에 선 어린 조셉 캠벨에게 펼쳐진 신비한 신화의 세계, 이는 집안의 종교였던 카톨릭 신앙보다 보다 훨씬 강하게 그를 지배했으리라.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적성이 인문학에 있음을 깨닫고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1925년에 영문학 학사, 그리고 1927년에 중세문학 석사 학위를 각각 받는다. 그는 또한 육상선수로서도 활동하며 각종 대회에 참석하여 상을 받기도 한다. 인문학으로 인생의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그가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천복을 좇는 첫번째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컬럼비아 대학 장학생으로 유럽에 건너가 프랑스 파리 대학과 독일의 뮌헨 대학에서 고대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고 불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게되었다고 한다. 유럽에 있는 동안 '잃어버린 세대'에 큰 영향을 받은 저자는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등의 작품에 심취하게 되는데 그들은 향후 저자의 생애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클레와 피카소를 통해 현대미술에 눈뜨게 되고 프로이트와 융의 작품에도 심취하게 된다. 신화와 인간의 집단적무의식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이들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크리쉬나무티와도 친구가 되는데 그를 통해 힌두철학과 신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불교와 동양의 신화를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은 이런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1929년 미국에 돌아와 유럽에서 했던 공부를 계속하고자 했으나 컬럼비아 대학으로부터 더이상의 지원을 받지못해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제도권교육을 다시는 받지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몇주 후에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저자는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5년동안 혹독하게 자기를 단련한다. 나중에 어느 책에서 말하기를 하루를 네시간 단위의 네번의 세션으로 나누고 그중 세번째까지는 독서 그리고 나머지는 휴식...이렇게 해서 하루 9시간을 순전히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위대한 대학자의 길이 혼자서 책을 읽는 독학을 통해 이룩되었다니...대단할 따름이다. 저자가 책에서도 얘기하지만 마음에 드는 작가의 책을 골라 모조리 읽다 보면 일정한 관점을 얻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이 열린다고 했는데 아마 이때 얻게된 경험을 전달해주는 것이리라.

그 기간동안 1년간 캘리포니아를 여행했고 막 떠오르기 시작하던 존 스타인벡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켄터베리 스쿨에서 1년 동안 교편을 잡은 동안에도 독학을 이어갔으면 이를 통해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했던 칼 융의 사상을 깊히 연구했고 스테켈로 부터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꿈의 해석, 무의식 이론을 문화인류학과 문학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던 심리학자였다.


1934년 사라로렌스 대학의 교수직을 제의받아 강의를 시작했으며 1972년 퇴직하기 전까지 38년간 교편을 잡는다. 1938년 제자중의 하나인 무용수 진 에드만과 결혼한다.


둘, 내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괴테가 <파우스트>에다 쓴 게 바로 이것인데, 루카스는 시쳇말에다 옷을 입혔지요. 결국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 아니겠어요?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1 p)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야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 p)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끈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 (아내 진에게 구혼할 때 이 방법을 쓴 것을 보면 딱 한 번은 예외를 허용한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가름침의 방법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

그는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15 p)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 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19 p)


1. 신화와 현대 세계

예전에는 그리스 문학, 라틴 문학 그리고 성서와 관련된 문학이 교육 과정의 일부를 이루었어요. 하지만 교육 과정에서 이런 게 다 떨어져나간 지금은 신화에 관한 정보를 얻을 길이 깜깜해지고 말았어요. 앞에서 말한 고전 이야기를 마음에다 담아 놓으면 그 이야기가 나날이 일어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런 게 없어진 것을 보니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걸 잃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문학을 대신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26 p)


그럴 수밖에 없지요,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29 p)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어떻게 경험하실 수 있었습니까?....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30 p)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픔답게 깨닫게 됩니다. (33 p)

롤로 메이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 범죄가 이토록 많이 일어나는 것은 젊은 남녀에게 위대한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36 p)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 p)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2 p)

조금 전에도 말했습니다만, 신문을 한번 보세요. 엉망진창입니다.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50년 전에는 온당했던 것이 지금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과거에는 미덕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고요. 과거에는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43 p)

내 의식 역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옵니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 전과 아예 다른 고대에 섭니다. 그러다가 나는 밖으로 나와 거리의 군중과 합류합니다. 자, 이 경우는 내가 성당 안에서 가지고 있던 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다가 거리로 나오면, 문득 내 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데 지금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겠지요. (48 p)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마리가 끼여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59 p)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과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다른 말로 하면,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유파가 있습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19세기 학자들은 신화나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기도라고 생각했지요. 그거야 마술이지 어디 신화나 종교이겠어요?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62 p)

오류의 가능성에서 온전하게 해방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느님에 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65 p)

그렇지요.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만일에 '노자'가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설이 옳다면)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71 p)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3 p)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신화의 두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75 p)

하지만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이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 세대를 거쳐, 내림으로 물려받은 옛 이야기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판인데, 새것도 아직은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군요?

성서에 바탕을 둔 우리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의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이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더 이상 우리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76 p)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사상입니다. (77 p)

그것이 바로 미래 신화의 바탕입니다. 그 바탕은 벌써부터 여기에 있어요.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78 p)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는 왜,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제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까?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이 저라는 존재의 바탕, 제 앞을 살던 모든 존재에게서 물려받은 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서 그렇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3만 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몸과 그 기관이 똑같고 에너지도 똑같은 몸을 지니고 있어요.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 건 우리는 똑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즉 아기 시절을 거치고 성적으로 성숙한 청년이 되고, 어린 시절의 의존적인 시기에서 독립적인 한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모하는 시기를 거치고, 결혼하고, 그러다 몸이 기울고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러고는 죽는 단계를 거친다는 겁니다. (84 p)

그렇다면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예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선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85 p)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86 p)

꿈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가령 "시험에 붙을 것이냐" 또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꿈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꿈은 순전히 개인적인 꿈입니다. 다음에는, 시험에 붙느냐 마느냐가 그저 개인적인 문제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게 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88 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선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 p)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2 p)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98 p)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동,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7 p)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114 p)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한 것이지요. 인도에는 두 종류의 신화, 즉 민간의 관념과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아주 멋진 말이 있어요. 민간의 관념이 지니는 측면은 '데시(desi)'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지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회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젊은이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 생활로 나서고, 들판으로 나가 사냥하는 법을 배웁니다. "응, 군인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러면 사회를 위해서 군인이 되어 싸워야지", 젊은이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path)'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이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122 p)

사제와 샤먼의 차이는, 사제는 기능적이지만 샤먼은 경험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 전통에 따르면 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수도사입니다. 사제는 사회를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고요....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경험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것이 무엇이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124 p)

본질적으로,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서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133 p)

이런 종류의 판단에는 두 측면이 있어요. 하나는 어떤 행동의 장에서 우리의 판단, 또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관찰자로서의 판단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독이 있는 뱀은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삶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 행동의 장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뱀이 사람을 물려고 하면 우리는 뱀을 때려 죽이고 맙니다. 이 경우 우리가 부정한 것은 뱀이 아니고 그 상황입니다. (136 p)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의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139 p)


3. 태초의 이야기꾼들

그렇고 말고요. 사람을 죽여 그 사람을 먹는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겠지요? 대초원 사냥꾼들이 짐승을 보는 시각은 짐승을 하등하게 보는 오늘날의 우리 시각과는 다릅니다. 이들에게 짐승은 적어도 동등한 존재, 때로는 우월한 존재이기도 하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힘이 있지요. 가령 샤먼은 자주, 짐승의 영을 수호령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샤먼이 특정 짐승의 혼령을 자기의 보호자, 혹은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151 p)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165 p)

이것은 진짜 신화적인 깨달음입니다. 그는 국지적인 숭배상인 하아네이 산과, 세계의 산이라는 암시적 의미를 확연하게 갈라놓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axis mundi, 세계의 축-옮긴이)'를 말합니다.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175 p)


4. 희생과 천복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다듬은 돌과 바위뿐입니다. 조그만 땅다람쥐와 커다란 올빼미가 사는 숲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 생명의 힘과 권능과 가능성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들이 삶의 일부분이 되면 우리에게로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가 늘 우리 안에 메아리친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곧 자연이니까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178 p)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는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우리의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 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179 p)

자연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초자연적인 법률이 백성들에게, 관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 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초자연이라는 관념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관념 아닙니까? (188 p)

그러나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 p)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190 p)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204 p)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하지만 융 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214 p)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2 p)

부모는 자식에게, "너는 법과대학에 가야 해. 법관이 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 이런 말을 능히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자,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225 p)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6 p)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p)


5. 영웅의 모험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어쩌면 영웅의 기질이나 자격 같은 것이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39 p)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지닌 아담은 이 유혹자에게서 뱀을 보며 공포를 느낍니다. 욕망과 공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감정에 지배됩니다. 욕망이 미끼라면 죽음은 낚시바늘인 것이지요. (257 p)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가로 선 아래에서, 즉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이런 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예요. 전혀 새로운 요구 체제가 우리의 의식 아래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나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여기에 아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장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소년들은 "나를 이렇게 충동질하는 이게 대체 무엇일까", 소년들은 "나를 이렇게 충동질하는 이 신비로운 것은 대체 무엇일까"하고 의아해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지요....신화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런 문제를 이해하게 하는 데 필요한 기본 교육 자료였어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적당한 신화 교육을 베풀고 있지 못해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 사회 안에서 행동 통일을 하는 데 그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지요. 나에게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62 p)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 p)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3 p)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9 p)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87 p)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열 수 있습니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디다. 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 (302 p)



6. 조화여신의 은혜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어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기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근본으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곧 어머니 원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언제 또 가부장적 원리로 되돌아갈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334 p)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결국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전통에 반하는, 다시 말해서 교회 전통에 반하는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들게 했겠군요. 그런데 이게 어째서 서구 문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 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343 p)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자기 경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느낌의 경험에서 우러난 사랑이 그렇다는 뜻입니까?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0 p)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약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었어요.....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65 p)


8. 영원의 가면

신비를 체험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차원이 있다는 걸 압니다. 여러 <우파니샤드>중 하나에서 적절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375 p)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80 p)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394 p)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 (413 p)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414 p)


셋, 내가 저자라면....

대학신입생 이후에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어보는 인문학 서적, 결코 간단치 않은 주제 그리고 대담형식의 특이한 구성. 이것이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처음 접한 인상이다. 누구보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요점을 잘 잡아서 읽는다고 자신했는데 그 동안 각종 처세술과 재테크 혹은 업무와 관련된 책만 읽었던 나에게 처음부터 너무나도 큰 도전이었다. 읽는 속도가 느린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정신을 집중해서 읽고 지나가도 내용이 머리속에 바로바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흡사 비전문분야의 영문원서를 읽어나갈 때의 당혹감이었다.

더군다나 몇권의 번역서에 대한 안좋은 기억으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번역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는데 첫 도전이 번역된 책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라니.... 하지만 그 우려는 말로만 듣던 베스트셀러 작가 이 윤기씨의 매끄러운 번역으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고 번역서에 대한 기억도 많이 치유를 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동안 잊고 지내왔던 '신화'라는 분야를 새롭게 눈뜨게 해준 책이었고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의 첫 단추를 꿰게 해준 책이니 열심히 한번 논해보자.

저자가 이책에서 얘기하고자 했던 바는 아래의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413 p)]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타고난 우리의 소명 또는 적성, 이것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신화의 역할이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신화를 잊고 사는 것이라고...그러다 보니 자신의 천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이를 회복하려면 결국 우리는 다시 예전의 인류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화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신화와 현대 세계'에서 저자는 현대문명과 소원해진 신화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예전에 신화가 했었던 역할, 예를 들면 문학교육과정의 일부로서 신화, 그리고 신화가 개인의 삶에서 가졌던 기능들이 사라졌음에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우리의 삶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신화의 측면들-성당에 들어가면 의식이 고양되는 것-을 말하며 신화의 역할이 회복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내면으로의 여행'에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꾸는 꿈과 달리 신화는 집단적인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사회적이며 공적인 꿈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다 같고,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동, 같은 공포를 가진 인간으로부터 공통되는 바탕에서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희생과 천복'에 이르러 저자는 비로소 얘기하고자 했던 바-천복에 대한 얘기를 처음 꺼내기 시작한다. 삶의 바퀴테를 붙잡는 삶이 아닌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린다고 했는데 이는 남으로부터 강요된 주변인의 삶이 아닌 자신이 타고 태어난 강점을 살려사는 중심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태초부터 나라는 존재를 위해 예비되어있던 삶이며 이렇게 살아야만 인생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도 한다.

'영웅의 모험'에서는 결국 천복의 길에 이르기 위해 우리의 무의식속에 숨어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내면에 귀기우릴 것과 신화에서 공포를 극복하고 용기있는 삶을 살다간 영웅들 처럼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버리고 앞으로 전진할 것을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영원의 가면'에서는 우리마음의 중심으로 돌아가 두려움과 욕망이 없던, 삶이 처음 시작되었던 때의 자아의 중심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는 잘 들어오지 않던 책의 주제가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다 보니 어느새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 저자가 특정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전개를 해나가는 방식이 아닌 대담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글이다 보니 신화와 관련된 저자에 해박한 지식을 생생히 전달해주는 장점이 있는 반면 나같은 신화와 인문분야의 문외한에게는 무척이나 산만하게 느껴지는 전개방식이었다. 특히 여덟장에 걸친 이야기들이 유사하게 반복되며 장마다 끝맺음 없이 넘어가기에 주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힘들었고 '스타워즈'도 중간중간 예를 들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쭉 그 의미를 풀어주었다면 좀 더 신화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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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3:06:28 *.125.205.55
김영율님의 내가 저자라면을 읽어 보면서 다시금 책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신화~~~

신화의 한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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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4 20:51:40 *.70.72.121
< 우리마음의 중심으로 돌아가 두려움과 욕망이 없던, 삶이 처음 시작되었던 때의 자아의 중심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두려움도 욕망도 없이 우린 과연 행복할까요? 삶이 처음 시작되었던 때의 자아의 중심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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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환
2008.03.06 11:00:39 *.143.170.4
두려움도 욕망도 없는,,, 해탈,도통하면 그럴수 있을까요~~
행복이라기 보다는 평온한 자리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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