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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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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3일 00시 12분 등록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1904- 1987)

나는 최고의 신화학자로서 그를 가장 잘 표현 한 한마디는 이 책의 표지에 쓰여 있는
- 나는 캠벨만큼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 라고 생각한다.
그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나도 듣고 싶다.

그는 미국 뉴욕의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고 카톨릭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어린 시절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해마다 열린 공연을 보고 인디언에 빠지면서 인디언과 관련된 책들을 읽게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하면서 곧 그는 자신이 학교에서 수녀님으로부터 배운 것들과 인디언의 신화에 동일한 모티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조셉 캠벨이 비교신화학자로서 입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그가 인디언에 대해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너그러운 부모님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부모님이 갖고 있던 별장은 델라웨어 인디언들의 거주 지역 숲속에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그 숲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는 그가 신화학자로서의 삶을 사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뉴욕에서 자란 그는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을 통해 자신이 책에서 읽어 온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을 만나게 된다.
인디언 거주 지역의 숲속, 그리고 자연사 박물관에서 만난 인디언 토템 기둥과 가면.... 이런 것들은 그의 일생을 통해 신화에 대한 깊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조셉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박사학위를 받지는 않았다. 학교의 커리큘럼으로 자신을 가두려는 학교의 이사진들에게 그는 “그게 뭐 그리 중요하오?”라고 맞서며 박사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을 마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파리와 뮌헨 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스트어를 공부했고, 문학, 생물학, 철학, 역사, 종교 책들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 스승은 누구였을까? 그의 스승은 신화였고, 책이었고, 자기 자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1934년부터 시작해서 조셉 캠벨은 사라 로렌스대학의 문학부에서 38년간 강의를 했는데 “가르치는 일” “스승의 일”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신화가 유사한 모티브를 가진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는 신화의 본(원형)을 찾는 것에 집중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에게는 천복을 따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연구의 성과로 4부작으로 된 [신의 가면]을 펴냈다.
그는 이밖에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이미지]등의 책을 펴냈다.
1987년 세상을 떠난 그의 영결식은 어린 시절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뉴욕자연사박물관에서 열렸다.


대담자 빌 모이어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그는 CBS뉴스와 PBS(사회교육방송)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텔레비전 화면에다 시대의 정신을 생생하게 재생하겠다는 염원으로 8년동안이나 조셉벨의 곁에 있었다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2.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내가 인용한 글귀가 모두 내 마음에까지 무찔러 들어 온 것은 아니고, 그 가운데 몇몇은 심장까지 무찔러 들어왔으며 어떤 것은 그저 가벼운 울림만 준 것도 있었다.
5장 영웅의 모험 편에서 나는 가장 많은 밑줄을 그었다. 그 가운데 조금 진하게 밑줄 그은 부분을 앞머리에 먼저 올려두었다.)

275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실밖에 없었다”
그 실을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83 낙타는 무릎을 꿇고 “내게 짐을 실으라”고 말합니다. 책임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이 있는 법입니다.
낙타는 여기에서 사자로 변모합니다.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룩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입니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26 예전에는 그리스 문학 라틴 문학 그리고 성서와 관련된 문학이 교육과정의 일부를 이루었어요. 하지만 교육과정에서 이런 게 다 떨어져 나간 지금은 신화에 관한 정보를 얻을 길이 깜깜해지고 말았어요. 앞에서 말한 고전 이야기를 마음에다 담아 놓으면 그 이야기가 나날이 일어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텐데 말입니다. 이게 없어진 것을 보니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걸 잃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 우리에게는 앞서 말한 문학을 대신 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혀 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의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길을 가는데 도로표지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도로표지에 상응하는 걸 만들어서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ㄴ이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 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8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29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30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셨는데요.
삶의 경험이라고 하기로 합시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삶의 경험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에게는 자기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1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32 그건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감히 말합니다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33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 두가지 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중국에서 도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작용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속으로 들어갑니다. 길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f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비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이때의 “자기”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의 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야 말로 신화적 이미지입니다.
34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35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습니다.
36 오늘날 우리는 비신화화한 세계에 살고 있어요. 내가 만난 많은 학생이 신화에 관심을 기올이더군요. 왜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느냐고 했더니, 거기에는 메시지가 있다는 겁니다.
37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38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안닌 잡학가는 여기에서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 볼 줄 알지요.
41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아니라 ,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47 삶의 에너지를 찾아 볼 수 있는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시절 숲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속에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관계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나는 뉴욕의 51번가와 5번가를 지나 성패트릭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나는 대단히 번잡한 도시,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이 가장 첨7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 성등으로 들어갑니다. 이때부터 내 주위의 모든 것은 영적인 신비의 차원에서 내게 말을 겁니다. 십자가의 신비... 바로 이겁니다. 채색유리는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꿈입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57 태초에는 하느님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이 센 하느님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의 하느님은 어떤 동네의 종족신이었답니다. 그런데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 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합니다.
59 신화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63 일본에는 “파도와 함께 흔들려라”라는 말이 있어요. 겉을 보면 그렇지 않지만 일단 빌딩의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일본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64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71 인류는 기원전 5백년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74 개인은 자기 삶과 관련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76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77 어쨌든 하느님은 자연에서 분리되었고, 자연은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창세기”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이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가 쉬울 겁니다. 이것이 곧 이땅의 눈이요 이것이 곧 이 땅의 음성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85 흡사 한 연극 대본이 각기 다른 곳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과 같지요.
86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브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나는 신화와 같이 삽니다.
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92 식물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 다시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신화의 기본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6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97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이런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100 타락의 책임을 왜 여자가 지게 된 것입니까?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서만 삶의 장으로 나올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7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115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조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116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데 있는 표현입니다.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의 문멕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120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123 오늘날에는 누가 은유로 말합니까? 시인들이지요.
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136 결국, 생명은 생명을 먹고서 산다는 이야깁니다.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터이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라고 이름하리라.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2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래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가령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말이지요. 우리가 삶의 한 단7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 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143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145 내가 죽인 짐승도 죽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것으로 됩니다.
147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는 서로 숭배하는 관계,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 짐승의 죽음은 자기네들로 인한 것이고, 또 그 짐승의 고기가 자기네들의 음식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례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다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의례는, 나는 개일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다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148 초기 신화는, 삶에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 줍니다.
155 바로 그 의례를 통해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돌어간 곳을 통해 나올 수도 있게 됩니다.
“그대”이던 들소가 졸지에..... “그것”이 되고 말았지요.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세상 만물을 “그대”라고 부를수 있어요.
156 고대의 암벽화가 있는 동굴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요. 이러한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저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갔을까? 무엇으로 암벽을 비추면서 그렀을까?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라고는 일렁거리는 횃불밖에 없었을 텐데...
161 원시 입문의례에서 아이는 소년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162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삶속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마흔 다섯이 되었는데도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분고분한 남자가 있다고 칩시다. 이사람은 정신 분석의를 찾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64 여자에게는 저절로 일어나는 거죠. 말하자면 자연이 여자에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166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를 일상성의 마당에서 “몰아낸다”는 뚯을 지닙니다. 그래서 사제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곳, 그곳이 제단입니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제와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외계를 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제들이 성소를 돌려놓아 버렸어요. 세상과 오순도순 지내보자는 거겠지요.
168 “다스 폴크 디히테트”라는 건데, 이건 전통문화의 관념과 시는 모두 민중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전통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작용을 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난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4] 희생과 천복

177 사는 곳을 성화 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178 큰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한 사람이 키케로였지요. 성림은 도처에 있습니다. 어린시절에 나는 자주 숲을 드나들었는데 그때 나는 “와, 살아도 많이 살았겠고 알아도 많이 알겠다”는 생각에서 숭배하는 느낌이 들어 나무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라는게 내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179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 은 여백같은 시간, 여백같은 날이 있어야 해요.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초원의 사냥꾼에게는 세계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ㅡ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를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3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85 중세도시에 가 보면 성당이 가장 놓은 건물행세를 합니다. 18세기에 조성된 도시에서는 정치가 벌어지던 장소가 가장 높은 건물행세를 합니다. 현대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은 누가 차지하고 있지요? 당연히 경제 생활의 중심인 업무용 건물이지요.
186 내가 자라난 세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적 상징적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되돌아 가는 것이지요. 굉장한 경험이었어요.
샤르트르 성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제단은 십자가의 중심에 있지요. 이 구조는 상징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많은 교회가 극장처럼 지어집니다. 보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당은 보이는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이지 “쇼”가 아닙니다.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줍니다.
189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런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195 인류의 생활 양태가 동물 사냥에서 식물 경작에서 바뀌면서 신화적 상상력에는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대단히 극적이고 전반적인 변화가 생기지요. 신화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도 변화가 있었다는게 내 생각입니다.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한 개체입니다. 우리가 동뭅을 죽이면 이 동물은 영영죽고맙니다. 그러나 생물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196 제물이 되어 땅속에 묻힌 신, 혹은 조상의 몸이나 상처에서 우리가 먹는 식물이 움튼다는 신화 모티브는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특히 태평양 문화권에서는 예외없이 보고 됩니다.
197 어느날 소년은 며리에 깃털을 꽂고 다니던 그 젊은이가 묻힌 (심어진) 곳에서 옥수수가 올라와 자라고 있는 것을 봅니다.
203 삶의 모습 자체는 ,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수렵문화권에서 공희제가 치러질 경우, 제물 자체는 거기에 임재한 신에게 바치는 선물, 혹은 뇌물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농경문화권에서 어떤 것이 제물로 희생될 경우는 다릅니다.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됨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지요. 바로 그의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204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 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208 “나는 너희가 두드리는 문이자...... 너희가 나그네 되어 지나다닐 길이로다!”
이 춤이 끝나고 뜰로 나가자 예수는 잡히는 몸이 되고, 곧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209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제몫의 살인을 해야합니다. 죽음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다음세대가 오게 하려면 앞 세대는 모두 죽어야 한다...... 이것이 의례의 의미입니다.
211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213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215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218 중세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이 “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20 우리가 순종하지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221 그러나 사고의 경우, 다수는 항상 그릅니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를 읽어보셨어요?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좆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223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 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225 자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225 부모는 자식에게 “너는 법과대학에 가야해. 법관이 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이런 말을 능히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부모가 시켜서 선택한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226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가지 있어요. “사트” “취트” “아난다”그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쫓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5] 영웅의 모험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더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30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게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보호와 감독아래 의존적인 상태로, 줄잡아 14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소년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 기간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은 없습니다만, 대신 벌이면 벌, 상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브입니다.
231 말하자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은 것입니다. 그럴수 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232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자면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
233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234그런 보상 성격의 성취가 없으면 영웅신화가 아니지요.
235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지요. 물론 반대입장에서 보면 영웅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옹호하려는 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일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이것은 반대편 입장에서 보아서 그럴 뿐입니다. 반대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237 “통찰의 탐색”이라고 불러도 좋은 특정한 신화 유형이 있어요.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더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한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이렇게 되면 영웅에게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238 영웅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여행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웅과 그렇지 않은 영웅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유형의 모험담에서 영웅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가 문득 자신이 변모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합니다.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 볼 필요가 있어요.
241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었어요.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지요.
나는 중년의 훨씬 넘긴 사람이라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아는 게 있어요. 우리 좌식 생활권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흥분이 다소 있거나 있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몸은 그렇지 못해요.
251 만약에 어떤 이야기가 이른바 원형적인 모험(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야기, 혹은 성인으로서 살게될 새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다룬 이야기)을 다룬 것이라면 그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도중에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본보기가 되어 줄 테니까요.
252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됩니다.“아버지를 찾으러 가라”는 신화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254 그러나 젊은이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262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적당한 신화교육을 베풀고 있지 못해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 사회안에서 행동 통일을 하는 데 그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지요. 나에게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보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263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또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265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272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달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276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 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277 13세기판 “성배를 찾아서”를 읽을 당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이것이 바로 서구인의 독특한 정신적 과녁이자 이상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적 진실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 사회를 보면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과자 같아요. 이런 사회 구성원의 의미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 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지요.
영적인 문제의 도움을 받으러 스승을 찾아갈 경우, 이 스승은 제자가 전통적인 길 어디쯤에 와 있는지,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거기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압니다. 그러면 스승은 이 제자에게 무엇을 주는고하니, 바로 자기가 구상한 바를 일러줍니다. 그러니 제자가 스승 비슷하게 될 수 밖에요. 서구의 교수 방법은 이와 판이하게 다릅니다.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278 죽음을 이해할 수 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있는 삶의 길이 얼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279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게 그들의 구호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284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는 낙타를 순치하는 수많은 “강제”인 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다보면 기법을 쓰기는 쓰되 스승이 시키는 대로 쓸것이 아니라, 한번 자기 식으로 써보고 싶을 때가 오지요. 이게 바로 사자의 행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때가 온다고 하시는데 아이들은 그때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나도 답을 마련 하고 있지 않아요. 아이에게 맡기는 수 밖에 없지요.
285 예술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 주어야 합니다.
286 부모들이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우리 부모님은 집안 일을 꾸리다가 어느시점에선가 당신네 의견을 포기하시더군요. 그때 나는 부모님이 참 고마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87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거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90 여자가 물손에 있었다는 것은 ,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 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291 모험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길아 아닌 우리의 길을 쫓고 있어요.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 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 여행을 상상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292 그런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어머니의 자궁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버려요.
297 아모르 파티라는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뜼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는 겁니다.
298 천만에 ,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301 나는 보통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ㄷ.
303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있음의 모험이지요.

[6] 조화여신의 은혜

305 결국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한답니다.
314 그 조모신 자체가 우주였기 때문이지요.
319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게예요.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예요.
322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324 그러니까 오시리스는 자기의 시체를 썩힘으로써 그 땅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328 그러나 우리는 대개 이 날짜를 12월 25일로 잡고 있지요. 이날은 동지 전후 그러니까 자꾸만 길어지던 밤이 짧아지면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지요. 말하자면 빛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333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336 그러나 여신은 다릅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 이것이 신화입니다.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3 이것은 개성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나는 서구를 위대하게 한것, 다른 전통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답니다.
바로 그 용기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349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350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겁니다.
356 사람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359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모든 행동은 좋게도 결과하고 나쁘게도 결과하느니....”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
이게 바로 유럽의 시작입니다.
개인주의가 꽃피는 유럽, 성배 전설이 있는 유럽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360 질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입니다.
361 결국 우리는 모등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둠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65 더 정확하게는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366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8] 영원의 가면

375 “해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381 그리스도는 , 자기와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사실은 하나임을 깨달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삶을 살았어유.
387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하겠지요.
393 우리 정신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409 “마을을 다니면서 아들을, 혹은 지아비를, 혹은 친척이나 친구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세요”
411 그래서 시가 있는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효과오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412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413 우리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3 내가 저자라면

지난해 조셉 캠벨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사두었다. 그러니까 사두기만 하였으니 전혀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첫머리에 쓰인 저자의 머리말을 읽어보아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고 차 례를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책 “신화의 힘”을 읽고 나서 다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목차를 들여다보니 이젠 읽을 수 있겠다 싶다.
이 책은 아마도 나와 같이 신화의 세계에 첫 발을 떼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하다.
대담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 책이 이만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어떤 책이든 책머리의 목차를 아주 열심히 보는 편이다.
이 책은 대담자 빌 모이어스의 아주 긴 서문을 싣고 있다. 사실 나는 처음 책을 열고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서문 읽기가 몹시 어려웠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서문을 읽었는데 그때서야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그 긴 서문 뒤에 짧은 차례를 실은 페이지가 있다.
물론 대담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조금 더 상세한 목차가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약간이라도 소제목이 딸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장 신화와 현대세계는 꽤 많은 분량인데 지루하고 어려웠다.
만약 과제가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이 책을 다 읽어냈을 것인가.
이 책을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다 읽어 내는 일! 그 자체가 내게는 모험이었다.
4장 희생과 천복 5장 영웅의 모험에 이르자 모험은 절정에 달하는 듯했다.
마치 이 책 자체가 영웅의 모험처럼 출발하고 시련을 겪고 귀환하는 사이클을 갖고 있는 듯 느껴졌다. 나는 이 모험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책 2장 내면으로의 여행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참 사랑하는 동화작가 권정생선생님의 동화 가운데 “하느님의 눈물”이나 “강아지똥”이 생각났다.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어린 토끼는 자기가 풀을 뜯어 먹게되면 자신은 배가 부르지만 그 풀은 목숨을 잃는게 아니냐고 하느님께 묻는다. 하루종일 풀도 못 뜯어 먹고 있는 어린 토끼에게 하느님의 눈물이 떨어진다.
조셉캠벨은 토끼에게 말할 것이다. 풀은 죽음으로써 토끼를 통해서 새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이 책 여러곳에 나오는 신화속에 담겨있는 “죽음”의 의미는 내게 크게 무찔러 들어온 부분이다.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물론 이 죽음은 은유이다. 이 은유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올 것인가?

나는 요즈음 “스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이 책 서문에서 빌 모이어스가 조셉캠벨에 대해 “그는 가르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책 곳곳에는 조셉캠벨이 스승된 사람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신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라고 했고 스승은 자신이 저 너머에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알려주기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가진 것은 실밖에 없었다” 그 실을 찾도록 도와주는 일 이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일이라는 말이 내게 와서 꽂혔다.
나는 내 식대로 “스승은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이다”고 정의내렸다.
나는 이 세상에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누군가 먼저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등대가 되어 비춰주지 않았다면 조셉캠벨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백 권을 읽는다 해도 제대로 된 책 한 권을 만나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일임을 크게 느낀다.
나는 사실 “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359)라고 말한적이 있었고,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되었고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는 매혹적인 문장이 그저 매혹적으로 들리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낙타는 내게 짐을 실으라 고 말합니다. 책임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이 있는 법입니다. ....등짐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283)에 눈길이 갔다. 이 낙타이야기는 니체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조셉캠벨이 인용한 이야기이다. 나는 조셉캠벨을 통해서 니체를 만나게 될 것이다. 스승...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사람 - 을 통해서 나는 나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내가 처음 알게 되었고, 또 새롭게 보게 된 것은 서구의 개인주의적 관점에 대한 조셉캠벨의 해석이다. “아더왕 이야기”는 이 책에서 다루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특히 중요한 이야기이다. 빌 모이어스가 인용한 “그들은 무리를 지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각자 나뉜 채 자기가 선택한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갔다”를 캠벨은 “개체로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서구 특유의 발상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서구인들은 자신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서구의 진실이라고 믿어요(277)
이말에 이어지는 것은 그러한 서구에 반해 동양의 전통사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동양의 도제적 사제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말한다.
나는 이부분에서 한번 머리를 갸웃거린다.
처음 책을 읽었을때 캠벨은 불교, 힌두교 같은 오리엔탈 종교 뿐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신화와 문화에 대해 동양인들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과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책을 다시 읽고 정리를 하면서 생각이 약간 달라진다.
캠벨은 신화를 읽을 때 자기가 속한 문화와 종교와 관련된 것을 읽을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의 신화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죵교로부터 자유롭게 신화로부터 지혜를 구할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스스로도 유럽이 아닌 인디언이나 아시아권의 신화로부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캠벨이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고의 출발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읽으면서 결국 그는 서구인이며, 서구인인 자신의 출발을 찾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혹 보이는 서구에 대한 비판은 전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교”로서의 기독교에 한정된 것으로 보였다.
대신화학자 캠벨의 책에 대해 나도 “나”의 생각을 말하면,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고 속에 담긴 긍적적인 요소와 동양의 전통적 사회에서 개인보다 사회를 중시하면서 일어났던 부정적 요소를 단순히 비교하여 말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에 읽어야할 책이 “삼국유사”이다. 캠벨의 책에서 나는 인디언의 신화와 인도의 수많은 신의 이야기와 중국과 일본의 이야기를 그를 통해 읽었다. 그렇다면 캠벨이 한국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면 무엇을 읽었어야 했을까 생각해 본다.
그게 바로 이 글을 끝내자 마자 내가 뛰어들어야 할 새로운 모험, “삼국유사”이다.
아, 700 페이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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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3:14:51 *.125.205.55
김나경님의 내가 저자라면을 읽었습니다.
숨가쁘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읽어내려갔습니다.
많이 공감합니다. 책에 대한 김나경님의 남다른 애정을 느꼈습니다.

아, 700 페이지여..~~
저는 구하기도 힘든 두권짜리로 시작했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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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
2008.03.04 07:36:02 *.109.114.183
맨 첫번째로 리뷰랑 칼럼 올리셨지요?
저는 첫번째 과제도 겨우 허덕이며 마친터라
삼국유사 읽기 이제 시작합니다.
처음 기도는 꼭 연구원에 붙게 해주세요였는데
겨우 한권을 마치고 이젠
4주동안의 경주만이라도 꼭 완주하게 해달라는 걸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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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4 22:23:21 *.70.72.121
나름의 견해가 신선하네요. 읽고 쓰기 힘들죠? 한 해만 잘 버티면 누구보다도 일취월장하여 좋은 책으로 승화시킬 것 같아요. 그대 구호대로 끝까지 아자! 타리다 쿰!! 달리자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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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
2008.03.05 08:04:27 *.109.114.183
요즈음 저는 낮에는 "육체노동자" 저녁이 되면 완전히 지쳐 쓰러집니다. 잔인한 3월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신입생들이 새로 들어오자
2학년 언니야들이 어찌나 시샘을 하는지 정말 말 한마디도 조심조심해야하네요^^ 딸아이 하나밖에 없는 저는 아~ 둘째 낳아 키우는 엄마 심정을 쬐금 맛봅니다.
지난 겨울방학부터 석달째 계속 아이들 점심밥하기
흑 지금은 거의 한계에 도달.
이 3월만 버티면 되는데 !
4월부터는 1학년들도 학교서 점심 먹고 오거든요*^^*
무사히 이 강을 끝까지 건너 황금 사과를 훔쳐간 불새를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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