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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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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3일 00시 1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조셉 켐벨(JOSEPH CAMPBELL)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져들어 인디언 신화를 읽게 된다. 인디언 신화의 내용 중에 어릴 때 수녀님에게 들었던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 수태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화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 이후 힌두교에도, 중세 아더왕 이야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생을 신화학 연구에 바치게 된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1934 년부터 38년간 사라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학생들에게 신화를 가르쳤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천의 얼굴올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고 생각된다. 저자 이전에 신화학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가로 불리워 지는 것으로 보거나, 신화 관련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TV 대담프로를 통해 신화가 일반 대중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 갈수 있도록 만든 것 등으로 신화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찬인가?

그는 신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잡학가(雜學家)라고 얘기 한다. 요즘은 학문 간의 통합 연구가 보편적인 트랜드가 되었지만 저자가 활동한 30-70년대에는 그런 경향이 일반적이지 않았을 듯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화 연구를 위해 혼자서 뭔가를 이룩해야 한다면, 한 우물을 깊이 파고들어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할지, 아니면 여러 분야에 걸친 다방면의 공부를 해야 할 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저자는 박사학위 취득도 마다하고 문화인류학, 철학, 역사, 예술, 종교 등 스스로 칭하는 ‘잡학’을 두루 공부하여 일반인들에게 신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그는 변화(경영) 컨설턴트이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신화를 통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이다.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신화를 알아가야 할지, 결국 이를 통해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를 그는 이야기 한다.

개인적으로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열 살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평생 그 분야를 공부하며 살았다는 점, 그의 표현대로 천복을 좇으며 한 평생을 살았으니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나? 더구나 그의 책에서 보여 지는 신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80 고령이라고 보기에 참으로 놀랍다. 그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자기의 인생을 고집스럽게 자기식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를 사랑하면서 끈기와 집념으로 살아간 그의 인생에서 시대를 앞서서 살아간 영웅의 면모를 힐끗 엿 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대단히 현대적인 견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10]

그는 박사 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12]

그는 뉴욕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13]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로마 속담>>[14]

그는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 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15]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15]

이렇게 해서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16]

캠벨이 요약하는 바에 따르면, 이로써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이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週期) 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이들의 예술(이들이 그린 암벽화)과 구비문학(口碑文學)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충동에 모습을 부여하게 된다. 이 원초적인 사회의 생업이 사냥에서 곡물의 경작으로 바뀜에 따라 삶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는 그들의 이야기 꼴도 바뀌게 된다. 즉 곡물의 씨앗이 영원한 주기를 표상하는 고귀한 상징이 된다. 곡물은 죽고 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씨앗이 그 곡물을 재생시킨다.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당하고 만다.[16]

그의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한다.[18]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18]

그가, 신화를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 신화의 당대적(當代的) 역할을 지나치게 이념적, 치료적 기능에 국한시키는 듯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20]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 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21]

1. 신화와 현대 세계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5]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29]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29]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30]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30]

롤로 메이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범죄가 이토록 많이 일어나는 것은 젊은 남녀에게 위대한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 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36]

오늘날 우리는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를 살고 있어요. 참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내가 만난 많은 학생이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왜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느냐고 했더니, 거기에는 메시지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신화가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 분명합니다.[37]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41]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48]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53]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시대가 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나는 얼마전에 놀라운 기계를 한 대 샀어요. 컴퓨터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신들을 섬기듯 섬기고 있어요. 신들과 동일시하는 것이지요.[55]

그것을 일러 종교의 발전이라고 하지요. 그것은 성경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는 하느님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이 센 하느님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의 하느님은 어떤 동네의 종족신(種族神)이었답니다. 그런데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救主)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합니다.[57]

신화가 무엇이지요? 사전적인 의미를 좇으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응당, 신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서 나와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61]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유파가 있습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62]

< 우리에게는 어떤 신화가 필요 할는지요? >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64]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73]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 그럼 신화 없이 살아가야 합니까? >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되는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74]

신화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74]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도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화도 있고, 단혼(單婚)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어요.[75, 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76]

어쨌든 하느님은 자연에서 분리되었고, 자연은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창세기’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지요.[77]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한 신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한 사회 역시 이 지구라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신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77]

시애틀 추장의 명문(名文) ☞ 길어서 인용은 못하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하는 멋진 문장! [78-81]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Upanishads,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86]

< 신화는 왜 꿈과 다릅니까? >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89]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96]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102]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102]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大倧敎)에서 이런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102]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은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109]

신화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가령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의 신화이지요. 인류는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끼리,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유로 알고 해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111]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113]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도덕경>>[114]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117]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그 신비는 바로 우리 자체입니다만)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줍니다.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117]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120]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先見者)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121]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123]

카톨릭 의례에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성찬식(聖餐式)입니다. 이 성찬식에서 신도들은, ‘이것은 구세주의 살이고 피’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면을 향합니다. 그 내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역사(役事)하는 거지요. 교회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상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체험하는 거지요. 성찬식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다릅니다. 내면을 향하고 있지요.[125]

비쉬누는 우주의 바다에서 잠을 잡니다. 연꽃은 그 비쉬누의 배꼽에서 자라지요. 이 연꽃 위에 창조신 브라마가 앉아 있소. 브라마가 눈을 뜨면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인드라인 것이오. 브라마가 눈을 감으면 세상의 존재는 그것으로 끝나지요. 브라마의 수명은 43만 2천 년이오. 그가 죽으면 연꽃은 지고, 연꽃이 지면 새 연꽃이 피고, 새 연꽃이 피면 새 브라마가 태어나오. 자, 이 무한한 공간의, 우주 너머에 있는 우주, 그 너머에 있는 우주를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브라마가 앉아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연꽃을 생각해보시오. 인드라도 생각해 보시오. 그대 궁전에는 저 세상 대양의 물방울을 셀 수 있고, 저 해변의 모래알을 셀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운 자가 있을지 모르오만,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오고가는 저 브라만의 수는 세지 못하오. 오고가는 인드라의 수는 세지 못하오.[129]

----뿐만 아니라 우주 너머에 우주, 그 너머에 또 우주가 있다.----[132]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135]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139]

3. 태초의 이야기꾼들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의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141]

가령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말이지요.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143]

우리 자신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신화, 다시 말해서 부족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현실의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습니다. 현실 사회는 그 부족의 목적지에 있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지요.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145]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146]

따라서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무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147]

초기 신화는, 삶에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지요.[148]

신화가 그 죄의식을 닦아줍니다. 그 짐승을 죽인 것은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었거든요. 자연의 일을 대신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148]

원수가 침을 뱉자 사무라이는 화가 났던 겁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그 원수를 죽이면, 죽이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위가 됩니다. 영주의 원수를 갚는 행위가 개인적인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자리를 떠버린 겁니다. 그는 개인적인 행위와는 전혀 다른, 비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다시 그 원수를 찾아내야 합니다.[151]

이 성당의 모든 이미저리는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의 형태를 취합니다. 하느님과 예수와 성자들이 모두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동굴에 그려진 이미지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같은 겁니다. 형상은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형상이 전하는 메시지이지요.[159]

영화가 우리 시대에서 신화 시대의 의례에 해당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입문의례를 연출하는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게 문젭니다.[162]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하는 것이지요.[163]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165]

한때 우리의 내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의례는 이제 껍데기만 남았어요. 사회의 의례도 그렇고 개인적인 결혼 의례도 그렇습니다. 의례를 소중하게 재현시킴으로써 그 가르침이 살아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례 중 대부분은 죽고 말았어요.[166]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神話化)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옛날에 신화를 쓴 사람들은 오늘날의 예술가들에 대응하는 사람들이었지요.[168]

샤먼은 남자든 여자든 소년기 후반, 혹은 청년기 초반에 심각한 심리적인 격동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해버린 사람입니다.[168]

블랙 엘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니다.” 그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성스러운 산이라고 한 것은 사우드 다코다에 있는 하아네이 봉우리입니다. 이어서 그가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 이것은 진짜 신화적인 깨달음입니다. 그는 국지적(局地的)인 숭배상(崇拜像)인 하이네이 산과, 세계의 산이라는 암시적 의미를 확연하게 갈라놓습니다.[173]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axis mundi, 세계의 축)’를 말합니다.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極點)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靜寂)이 함께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174]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175]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175]

4. 희생과 천복(天福)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179]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180]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줍니다.[187]

<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神性)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190]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父系的)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193]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 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195]

신화를 읽다 보면 가장 놀라운 게 바로 그 점이지요. 나는 평생 이 짓을 해왔습니다.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밖에요? 차이가 있다면 옥수수와 야자의 차이 정도라니까요.[199]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201]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204]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211]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산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217]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218]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222]

<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223]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225]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227]

<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227]

5.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229]

<<코란>>은 “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태 전승에 나오는 영웅은 무서운 시험을 겪어야 보상을 받지요.[233]

여기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234]

< 존레넌은 영웅이었습니까? > 신화학적 의미에서 그는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요.[246]

전설적인 영웅은 큰 일을 한 사람, 무엇을 세운 사람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새 종교를 세운 사람, 새 도시를 세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세운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251]

원시인들의 입문 의례는 신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소년이든 소녀든, 입문 의례는 유아기의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252]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모세, 석가, 그리스도, 모하메드)의 메시지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한 환상 여행은 동일합니다.[258]

전통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웅도 있어요. 이런 영웅은 전통을 재해석함으로써, 시대에 뒤떨어진 상투성에서부터 전통의 상징성을 해방시켜 당대의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만들지요. 이런 작업은 모든 문화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259]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259]

< 그런데 누군가가 제게, “그래, 조지 루카스의 상상력도 좋고, 조셉 캠벨의 신화학도 좋아, 하지만 그게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이런 말을 합니다. > 내가 장담하거니와, 상관이 있어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다스 베이더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解離)의 위험이 있어요. (중략)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270]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273]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어릴 때 읽은 인디언 이야기에서 참 인상적인 대목이 기억나는군요.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口號)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279]

< 행복에 대해서 신화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제가 만일에 젊은 사람이고 젊기 때문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신화는 이 경우 저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286]

< 모든 신화가, 고통은 삶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까? 고통에서 놓여날 방법은 없다고 합니까? >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를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296]

부처는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했고, 조이스는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298]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301]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인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303]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303]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식과 더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까닭이야 간단하지요. 우리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의 경험을 어머니와 함께 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따끔씩, 결국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305]

여신이라는 관념은,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생소할 지도 모른다. 혹은 아버지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관념과 관계가 있어요.[306]

여신 숭배는 주로 농경문화, 농경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즉 대지와 아주 밀접합니다. 대지가 식물을 낳듯 인류의 여성은 인간을 낳지요. 대지가 그 식물을 기르듯 인류의 여성도 인간을 기릅니다. 따라서 여성이 지니는 마력은 대지가 지니는 마력과 같은 것이지요. 따라서 그 둘은 상호 관계 아래에 있어요. 그래서 만물을 낳고 그리는 에너지의 화신은 당연히 여성의 모습을 지니지요.[308]

나는 신화가 돌아오고 있다고 믿어요. 요즘의 젊은 과학자들은 형상을 낳는 장(場)이라는 뜻으로 ‘형태 발생의 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이것이 바로 여신입니다. 바로 형상을 낳는 장입니다.[311]

공격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본능입니다. 이건 생물학적 사실이지요.[316]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예요.[319]

모이어스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320]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기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334]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335]

신화는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약도(略圖)까지 그려주고 있어요.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약도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이 약도라고 하는 게 다 같지는 않아요. 약도 중에는, 자기네 무리 안의 일만 관심을 두라고 하는 것도 있고, 자기네 종족신(種族神)만 섬기기를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계시가 담긴 약도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약도는,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335]

여신은 다릅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336]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336]

우리는 광막한 우주에서 살고 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337]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異性)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341]

여기에 견주어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私的)인 경험인 겁니다.[343]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343]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345]

그래서 트리스탄은 이렇게 말하지요. “죽음이라니......, 이 사랑의 고통이 죽음이라면 그것도 팔자소관이지요. 죽음이라니......,이 사랑이 발각되었을 때 내가 받을 벌이 죽음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소. 그대가 말하는 죽음이 화염지옥에서 받게 될 영원한 벌이라고 해도 이 역시 나는 받겠소.”[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347]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349]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350]

여기에서 잠깐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요. 첫째는 절제, 둘째는 용기, 셋째는 사랑, 넷째는 충성, 그리고 다섯째는 예의 바름입니다. 예의바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를 이르는 겁니다.[351]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들어봤을 겁니다.[357]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358]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359]

낭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있게 상호 관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듬살이의 울타리에 살지 않겠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왜냐,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361]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린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365]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음양의 상징인 태극(太極)과 같습니다. 여기에 ‘내’가 있고, 여기에 ‘그’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있는 겁니다.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예요.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 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365]

이것은 말이지요,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367]

사랑은 곧 신의 임재(臨在)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이게 곧 음유시인들의 생각이기도 했고요. 신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곧 신이 아닙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사랑은 고통을 모른다”고 했어요. 이 말은 트리스탄의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기꺼이 받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370]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373]

8. 영원의 가면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375]

내게 믿음은 있을 필요가 없어요. 내겐 경험이 있으니까요.[376]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랍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가족을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를 명상하는 것도 중요한 명상이지요. 그러나 명상 자체를 위한 명상도 있습니다. 가령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이런 명상에 잠기고는 하지요.[378]

신비가 일련의 개념이나 관념으로 환원되어버린 지금, 이 개념이나 관념을 강조하다 보면 언어 밖에 있는 초월적인 체험에는 단락(短絡)이 생깁니다. 우리는 강렬한 신비의 체험을 궁극적인 종교적 체험으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379]

아시다시피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아와 탐욕 같은 기본적인 동물적 단계에서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380]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나’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380]

그리스도는, 자기와,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사실은 하나임을 깨달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381]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381]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非二元的) 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382]

“신부님, 증명이 되어버린다면 믿음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385]

토마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386]

온 세상은 원입니다. 세계에 있는 원골의 둥근 이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을 상징합니다.[388]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되는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389]

결혼 반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상징(sym-bol)'이라는 말은 ’둘을 서로 엮는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반쪽과 또 하나의 반쪽이 엮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반지를 보세요. 완벽한 원형이지요? 이 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는 게 두 반원이 엮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결혼입니다. 둘로 이루어진 더 큰 하나,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인 삶이 생겨납니다. 결혼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391]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서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394]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396]

절정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나는 절정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이게 어떤 경험인지 알았습니다만, 내 경우는 운동 경기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398]

진정한 미학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비평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399]

신이 왜 선해요? 신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지옥을 발명한 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아십니까? 구세군(救世軍)에서도 이런 신은 안 받아줄 겁니다.[402]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상적(地上的) 관계의 체험 속에서도 그 영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409]

부처가 어느 날,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어느 여인을 만났습니다. 부처는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마을을 다니면서 아들을, 혹은 지아비를, 혹은 친척이나 친구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세요.” 필멸(必滅)의 팔자와, 우리 안에 있는 초월적 영생불사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409]

그래서 시(詩)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含意)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精髓)를 통해야 드러납니다.[411]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412]

내 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413]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414]

시는, 언외(言外)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말했습니다. 무상(無常)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414]

<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죠.[415]



3. ‘내가 저자라면’

TV 프로를 제작할 당시,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해서 전체적인 구성을 만들었겠지만 TV 대담을 책으로 엮어서 인지, 일반적인 책의 구성으로는 짜임새가 부족한 것 같다.

우선 전체적인 구성면에서 < 1.신화와 현대세계 > 를 제일 앞 절에 둔 것은 아주 좋은 착상인 것 같다. 신화와 같이 일반 사람들이 좀 따분해 할 수 있는 주제의 내용을 말하면서 처음에 관심을 끌지 못하면 다음에는 보지도 읽지도 않을 것이 뻔할 뻔자 아닌가. 제일 앞에 둠으로써 관심을 촉발 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다.

그런데 다음 절인 < 2.내면으로의 여행 > 은 그 내용이 너무 어려울뿐더러,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쉽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책의 앞부분에 더 많게 하고,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책 속에 빠질 수 있는 구성이 되었으면 좋을 듯하다. 읽기에 부담이 적은 < 3.태초의 이야기꾼 >, < 4.희생과 천복 >, < 5.영웅의 모험 > 이 순서대로 나오는 게 좋을 것 같고, < 2. 내면으로의 여행 > 은 내용면에서 < 8. 영원의 가면 > 과 유사하므로 8절 앞에 위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목차’가 달랑 한 페이지이고 챕터별 제목만 적혀있을 뿐, 전체적인 책의 구성이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부분이 없다. 10 페이지 이상 되는 빌 모이어스의 서문은 온통 켐벨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고... 켐벨이 직접 책을 집필했다면 당연히 그리 만들었을 것 같은데, 챕터별 요약과 읽는 방법 등을 설명해 주면 독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책을 읽던 중에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일부 있었다.(종교적, 철학적 내용의 어려움이 아니라, 문장구조나 어법이 맞지 않는 경우이다) 대담 내용(Script)을 그대로 책에 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번역과정 중에 생긴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은 보완이 필요 할 것 같다.


독서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즐기기 위해서는 우선 책의 주제가 관심을 끄는 내용이어야 하고, 이해하기에 부담이 없어 쉽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공부를 위한 독서보다는 즐기기 위한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인데, 정말 오랫만에 읽기에 만만치 않은 친구를 만났다.

대화식으로 구성되어 처음에는 술술 쉽게 읽혀지는 듯싶더니만, 곳곳에서 철학적, 종교적인 알듯 모를듯 한 이야기들이 복병처럼 튀어나와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뭔 말이래?... 신화관련 책은 물론, 인문학 서적을 많이 접해 보지 않아서 이해력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읽는 방법이 잘 못 된 건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너무 꼼꼼하게 따지면서 읽는 건 아닌지 답답하기도 했다.

일독(一讀)을 마치고 무언가를 찾아보겠다는 마음으로 2회독을 해 가면서 내가 어렵게 느끼는 이유를 책 속에서 찾게 되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74p)" 그랬다. 내가 ‘신비’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언제인가? 신비의 세계라는 것에 감탄하고 흥분해 본때가 언제였던가?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삶, 우주, 꿈, 영원, 존재와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해본 것이 언제적 일인지...‘존재의 이유’는 노래방에 가서나 들었던 멋들어진 노래 가락일 뿐,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주제와 용어들이었다.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도 역시 책에 있었다.“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됩니다(117p).”,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190p)” ‘독서백편의자현’이라 했던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을 머리 속에 되새기며 그 뜻을 음미하다 보니 마음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점점 늘어났다. 딱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 부분도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해 주었다. 연구원에 응시하지 않았다면 몇 시간 버티지 못했거나 대충 훑고 지나갔을 책인데, 쉽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잊고 살아가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책. 좋은 책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179]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227]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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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3:18:58 *.125.205.55
"쉽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잊고 살아가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책. 좋은 책이다"

최현님의 마지막 구절에 잠시 눈이 멈췄습니다.

한동안 잊고 살아가던 많은 생각....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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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4 23:08:57 *.70.72.121
똑같네요. 감동의 문구에요. <포란실> 어미 뱃속 같은 공간이란 생각 절로 들지요.

우리의 글들도 그렇게 태어나야 할텐데요. 그러면 우리 삶의 경험들이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을 일으킬 수 있을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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