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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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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3일 09시 21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책 : 신화의 힘
저자 :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역자 : 이윤기
출판사:이끌리오

2008년 2월, 나는 구본형 선생님의 소개로 죠셉 할아버지와 빌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사실, 신화에 문외한이 나로서는 죠셉 할아버지와 독대를 해서 신화학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행이 8년 이상이나 죠셉 할아버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셨던 빌 아저씨와 함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어서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조셉 할아버지를 뵙기 이전에 이 분이 신화에 대가라는 이야기만을 들어 본 적이 있었는데 무언가에 대가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막연히 완고하고 고집 센 학자가 아닐까 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막상 만나 뵈니 조셉 할아버지는 완고하고 고집 센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서 매우 부드러운 분이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런 인간에 대한 사랑이 할아버지를 겁도 없이 신화라는 거대한 바다에 뛰어들게 했으며 그 누구도 건질 수 없는 인류사의 보물들을 건져 올리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10살 무렵 아메리칸 인디언 문화에 관심이 가지시기 시작했고 그 때가 할아버지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천복을 깨닫게 된 때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자신의 천복을 인지하신 분이시긴 했지만 할아버지에게도 방황과 좌절의 시기가 없지는 않으셨던 것 같았다. 애초에 수학과 생물학을 공부를 하기로 하고 다트머스 대학에 입학을 하셨던 것도 그렇고 유럽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시는 동안에 학교에서 장학금 지원이 끊기기도 했다고하니까.
할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따뜻한 분이시긴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한 행동으로 일관한 분이셨다는 것을 나는 이번 만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일단 신화가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할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매우 혹독하게 훈육을 하신 분이셨다. 신화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읽고 또 읽으셨고 심지어 자신의 재정적인 지원자였던 컬럼비아 대학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끊었을 때는 제도권 교육을 이탈해서 순전히 독학으로 신화학을 마스터 하셨다고 한다. 이 시절에 하루에 9시간을
절대적으로 독서에만 투자를 하셨다니 자신에게 매우 혹독한 분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거다.
자신에게는 매우 철저한 학자이셨지만 할아버지는 천성적으로 생각이 자유롭고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셨다. 말씀을 하시는 내내 동양이건 서양이건 가리지 않고 신화에 관련된 사상과 종교를 모두 끌어다 이야기를 해 주셨으며 그 두 문화간의 차이가 나는 면에 대해서도 그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까지 제대로 파악을 하고 있는 분이셨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성경에 대한 할아버지만의 독특한 해석에 있었다. 카톨릭 가정에서 자랐다고 하셔서 성경을 해석을 하실 때는 일종의 벗어나지 않는 틀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짐작을 했었는데 창세기 편에 아담과 이브의 설화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나는 할아버지의 생각의 자유로움에 놀라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인간이 선악을 알지 못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이브가 우리를 낙원에서 몰아낸 것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삶으로 우리는 인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도그마 – 예를 들어 자신이 남자라던가, 카톨릭 종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던가 하는 것들-들를 훌쩍 뛰어 넘어서 더 큰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시는 진정한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 내내 할아버지로부터는 신나고 즐거운 기운이 전염이 되었는데 나는 이것이 할아버지가 자신의 천복인 ‘신화’를 통해서 도(道)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모쪼록 할아버지를 다시 한 번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 한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서문

[P11]“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은 아니라오.”

1. 신화와 현대 세계

[P29]사람들이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P31 ~32]신화는 결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신화가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결론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하는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P46]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서 살다 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의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P61]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P80](미합중국 정부가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의 서한 중에서)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짓이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P85](신화들의 유사성에 대해서)폴리네시아 신화를 읽건, 이로쿼이즈 인디언 신화를 읽건, 이집트 신화를 읽건 그 이미지는 동일해요. 어떤 신화에 든 여기에 관련된 똑같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중략)
흡사 한 연극 대본이 각기 다른 곳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과 같지요. 말하자면 지방에 따라 그 지방 연기자가 그 지방 옷을 입고 나와서 똑 같은 옛날의 연극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P97](여자를 죄인이라고 보는 관점은 다른 신화 체계에도 있느냐는 질문에)내가 아는 한은 없어요. 가장 가까운 것이 아마 판도라의 상자와 관련된 판도라쯤 되겠습니다만, 이로써 생긴 것은 죄악이 아니라 말썽일 뿐이지요. 성서적 전승에 나오는 인류의 타락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자연은 썩은 것, 섹스도 썩은 것, 섹스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여자는 더욱 썩은 것입니다. 선악을 하는 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왜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의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에덴 동상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상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

[P 103]그래요, 모이어스 씨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 혹은 창조자가 모신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모두 모신의 몸입니다. 몸 아닌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모신의 몸이라고 해서 남성신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어딘가에 있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은 한 원리의 두 측면에 불과합니다. 생명에 성별을 두는 것은 훨씬 뒤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략)
하느님을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게 참 우스꽝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신의 권능은 성별에 우선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P113]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인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P115]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P116]
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 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P118]재림과 대응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정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지 못한 채로 죽어 지복직관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즉 약점이 말끔히 씻기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약점이라는 것이 곧 죄악입니다. 죄악은 의식을 한정시키고, 의식으로 하여금 온당하지 못한 조건에 얽매이게 하는 약점인 것입니다.

[P120]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p135]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p138]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p166]의례를 소중하게 재현시킴으로써 그 가르침이 살아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례 중 대부분은 죽고 말았어요.

[p168]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4. 희생과 천복

[p17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지요.

[p179]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와,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 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
려 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이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p220]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이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p222]천복과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6]뉴욕의 우드스톡에 아주 멋진 노인이 있었어요. 이 양반에게는 방이 아주 많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는 이 방을, 예술을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 1년에 20달러 정도의 임대료로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이 집에는 수도가 없었어요. 물은 우물물을 길어다 쓰거나 펌프로 자아올려 써야 했어요. 그런데 수도를 놓지 않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수도를 설비해 놓으면, 이 집이 수도가 있는 집에 살던 학생들의 관심을 끈다는 거예요.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p227]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p227]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
다.

5. 영웅의 모험

[p241]현대인 노릇을 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많은 사람의 삶은 대단히 고단합니다. 이건 정말 끝없는 소모전이지요.

[p243]과학기술상으로 약진을 이루는 일이든, 이웃의 도움 없이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삶의 문제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위험은 우리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언제든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지요.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을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55]내가 그 책(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쓴 40여 년 전에 경주면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적인 삶의 양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p260]사람의 힘은, 우리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일도 능히 해내고는 한답니다. 사실 우리도 인간이 지니는 가능성의 한계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p262]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막연할 때는 이웃의 충고나 영향력이 도움이 되지는 하겠지요.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 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p263]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가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p266]물론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생명이 있는 곳은 가슴이니까요.

[p270]이 세상에는 자기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1]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어요.

[p272]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p273]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p277]13세기판 <<성배를 찾아서>>를 읽을 당시 나에게 깊은 인상은 준 것은, 이것이 바로 서구인의 독특한 정신적 과녁이자 이상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구인들은 ‘나’ 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278]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축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p279]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86]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거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좋은 기준이 되지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차가 엄청납니다. 사람들 중에서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p287]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지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96]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p298]”천만해,(하느님이 아니라)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이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이 이런 일이 생기에 한 것이 당신이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p299]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p301]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6. 조화여신의 은혜

[p305]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07](영웅신화에서)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16]성서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로서,우리 서구인들이 여성 경시 풍조는 다분히 성서적 사고의 산물일 겁니다.

[p320]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한 거예요.

[p322]두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는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p333]선생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겉은 남성이지만, 실제로는 남성과 여성이 특징을 고루 지니고 있는 것이군요.

[p336]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3](개성적인 사랑의 경험)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람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p344]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p347]자기의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349]”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p359]”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

[p361]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삶은 그만큼 더 어렵워집니다.

[p363]기독교 교회가 생기면서 이스라엘이 고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개인적인 경험이 생기면서 이번에는 교회가 고물이 되는 것입니다.

[p370]사랑은 곧 신의 임재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8. 영원의 가면

[p376] 내게는 삶의 경이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내게는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나에게는 증오의 경험도 있고, 남이 턱주가리를 부셔놓고 싶다는 악의의 경험도 있어요.

[p378] 동양의 신들은 더욱 본질적이고 덜 인간적이에요. 동양의 신들은 서양의 신들보다 훨씬 자연력에 가깝지요.

[p378]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p380]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p383]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 할 수 없을 겁니다.

[p383]나는 20세기를 줄기차게 살고 있습니다만, 어릴 때부터 우리의 원수라는 것은 있지도 않고, 있었던 적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특정한 대상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공격을 정당화시키자면, 증오와 오해와 멸시의 공작이 있어야 합니다.

[p394]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p398]나는 이긴다고 확신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길 것 미리 알고 있었어요. 이게 나의 절정 경험입니다. 그날은 어떤 선수도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p412]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p413]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p413]나를 낳아주신 부모임에 관한 체험에서 나는, 그 체험에는 현세적인 관계의 체험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p413]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Ⅲ. 내가 저자라면

우선 이 책은 신화에 대해 일반인들에게 쉬운 언어로 알려주는 책이라는 면에서 많은 칭찬을 하고 싶다. 같은 맥락에서 빌 모이어스의 공헌에 대해서도 많은 칭찬을 하고 싶은데, 빌 모이어스가 8년 간이나 조셉 캠벨의 저서를 읽고 그와 인터뷰하며 얻은 개인적인 신화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이 책이 일반인들에게 전달되기 쉬운 언어나 형식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대학자의 깊이 있는 지식들이 빌 모이어스의 저널리스트적인 구체적이고 평이한 질문들을 통해서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이 방식이 참 좋은 아이디어 였다고 생각이 된다.

반면, 한 가지 단점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책 전체의 유기성의 부족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자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여러 개의 단편을 따로따로 읽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신화라는 거대한 산을 하나 탐험을 하는데 전체적인 조망을 설명해 주지 않고 자신을 따라만 오라는 지휘자의 발뒤꿈치만을 따라 가다가 신화를 다 둘러 보기는 했으나 신화라는 산의 전체를 모습은 전혀 모르고 각 계곡의 단편만을 기억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다.
내 생각에 이 점은 빌 모이어스가 각 장마다 1~2페이지 내외의 해당 장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추가를 함으로써 보완을 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가령, ‘1장 신화와 현대 사회’라는 장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개별적인 장이 되었으며 다른 나머지 장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조셉 캠벨의 주요 저서에서 캠벨 자신은 ‘신화와 현대 사회’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를 설명을 해 주었더라면 책 전체에 유기성을 부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각 장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은 죠셉 캠벨의 다른 저서들과 이 책과의 유기성도 부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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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웅
2008.03.03 23:26:12 *.125.205.55
저자를 설명하는 방식이 참 독특하네요.
마치 그곳에 함께 있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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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4 23:33:28 *.70.72.121
[p413]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이 여행을 마음껏 즐기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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