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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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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3일 10시 32분 등록
신화를 매개체로한 자기 계발서의 총서 ‘신화의 힘’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윤기 선생의 프로필을 옮긴다.
번역자 이윤기 :소설가·번역자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었다. 1998년 중편소설〈숨은 그림 찾기 1〉로 제29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2000년 소설집 두물머리〉로 대산문학상을 수상. 번역 활동에도 힘을 기울여〈장미의 이름〉〈푸코의 진자〉변신 이야기〉를 비롯, 200여 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2000년 9월 한국번역가상을 수상했다.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종교사) 및 동 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객원교수. 신화집〈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2〉, 뿌리와 날개〉〈나무가 기도하는 집〉〈그리운 혼적〉, 소설집〈나비넥타이〉〈두물머리〉, 산문집 〈이윤기가 건너는 강〉〈어른의 학교〉〈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등이 있다.

1. 신화의 힘.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 빌 모이어스 대담 /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의 요약 이력
1904년 3월 26일 뉴욕에서 출생했으며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세계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서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전설의 공통점에 주목. 컬럼비아 대학, 파리와 뭔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의 신화를 공부했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 켄터베리 스쿨에 재직했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가르쳤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편집자,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냈다. 1987년 10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저자에 대한 생각 -
(신화 [神話, myth]어떤 신격(神格)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전승적(傳承的) 설화)
신화의 사전적 정의이다. 덧붙이자면 ‘신화를 뜻하는 myth는 그리스어의 mythos에서 유래하는데, 논리적인 사고 내지 그 결과의 언어적 표현인 로고스(logos)의 상대어로서, 사실 그 자체에 관계하면서 그 뒤에 숨은 깊은 뜻을 포함하는 ‘신성한 서술(敍述)’이라 할 수 있다.’

신화에 대해 일천하기 그지없던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고백하건데 잘못된 신화적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화적 상식이란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인간의 한계를 오직 상상력에 기대어 신의 이름을 차용해 극복하는 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해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신’을 등장시켜 포장한 로망.
하지만 조셉 켐벨은 그 같은 나의 소견, 신화는 종족의 탄생을 과장하기 위한 허구적 영웅이 등장하거나 닫혀 버린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무지한 추측을 간단없이 명쾌하게 부수어 버렸다.

이 책의 강점: 놀라웠던 것은 저자의 지적 배짱과 여유로움이었다.
마치 햇살 좋은 봄날, 다정한 벗이 조근조근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뱃놀이를 하는 것처럼, 신화를 매개체로 철학, 신학, 등의 그 방대한 세계로, 현학적 치장 없이 물이 흐르듯 순연하는 ‘앎’으로 독자를 초대한다는 것이다.
저서에서 캠벨은 선지자, 랍비였으며, 시인, 역사학자였고, 심리학자였으며, 신화학자였다. 그러나 이 책을 덮은 지금, 나는 조셉 캠벨은 끊임없이 지금, 현존하는 시대에서 ‘개인에게 영웅이 되어라’ 고 주술을 거는‘자기 계발가’라고 생각한다.
‘신화의 힘’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끊임없이 독자의 정체성을 묻게 하며, ‘개인의 삶 또한 신화속의 영웅의 도정과 다르지 않아 각자 자신의 삶을 영웅화 시킬 수 있다’고 마지막까지 계몽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도 유수한 자기 개발서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이윤기 (옮긴이)의 말 중에서--
(P.8) “잡초 없는 정원은 없다” 라는 잠언이 있기는 합니다만, 오역에 면죄부를 주는 말로 이용하지는 않겠습니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에서---
(P.8) 그는 자신이 만난 신화의 이미지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이 시각에도 현대판 오이디프스의 화신(化身)과 미녀의 야수의 속편(續編)은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교통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


(P.9) 캠벨은 존 F. 케네디 암살 25주년이 되는 날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몇 해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켐벨이 신화학적 용어를 써가면서 나에게 들려주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장성한 우리집 아이들을 앞에 앉히고 켐벨과 관련된 추억을 들려주고 있자니 문득 저 우중충한 암살 사건이 다시 느낌에 와 닿는다. 켐벨이 ‘인간의 모듬살이를 향하여 베푸는 대규모 의례 행위의 전형’ 이라고 표현한 장엄한 국장(國葬)은 인간의 소구(訴求)에 그 뿌리를 둔 신화적 주제를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국장은 대규모의 사회적인 소구가 의례화(儀禮化)한 모습이랍니다. 우리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구성되어 있는 살아 있는 사회구조가 아닌가요. 이런 사회의 대표자인 대통령을 백주에 암살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게서 살아 있는 삶의 순간을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지요. 결국 사회는 대동단결의 감각을 되찾기 위한 보상적인 의례를 요구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나라가 만장일치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이벤트에 동시에 참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평화시에 있게 되는 최초의 의례이자 유일한 의례인 그러니까 나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이 의례를 바라봄으로써 이 사회의 구성원임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P.10)켐벨은 재판관의 위치를 사회학적 용어가 아닌 신화학적 용어로 설명해낸다. 재판관이라는 위치가 단순한 직업적 역할만을 상징한다면 그 사람들은 굳이 검은 법복을 입을 필요 없이 회색 양복을 입고도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 하는 것이다. 캠벨은 종교와 전쟁에서 사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삶의 양태는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P.11)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2)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P.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P.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켐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자,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 투사된 것 · 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그가, 신화를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 신화의 당대적 역할을 지나치게 이념적, 치료적 기능에 국한시키는 듯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1. 신화와 현대세계

(P.26)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 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모이어스-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켐벨-…… 위대한 악마적 미학의 길을 모험하고, ‘인류’를 경멸하며 냉엄하고도 긍지에 차 있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선망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P.28) 이어서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 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P.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모이어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셨는데요. ”

(P.30)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P.31) 신화가 가르쳐 주는 바에 의하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중략-----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에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 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P.33)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 시켜서는 안됩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4)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기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P.31)모이어스- (고린도전서)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P.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P.38) 그래서 잡학가(학자들을 이렇게 부르면 큰일 납니다만)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 의 영역으로 뛰어 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그렇다면 저널리스트와 비슷한 셈이군요? 저널리스트에게는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면허증이 있다니까요.
켐벨- 그건 면허증이라기보다는 의무 같은 것이겠지요. 저널리스트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계발시키는 의무가 지니까요.

(P.38)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核)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 놓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P.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 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2) 나는 왕이나 여왕에 대하여 반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 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P.43) 저는 동경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젊은 시절의 저에게는 제가 지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붙박이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붙박이별의 영원성은 저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붙박이별은 저에게 삶의 지평선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중략----
저는 바로 이 믿음 덕분에 오늘날의 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붙박이별, 삶의 지평(이게 바로 신화이겠습니다만), 이런 것을 잃은 아이들은 장차 어떻게 될까요?

(P.44) 그래요. 엉뚱하게도 기계적인 방법으로 신비체험에 뛰어들려고 해요. 나는 진짜 신비체험과 정신질환의 일종의 심리적 해리 (懈籬)의 차이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심리학회 같은 데 참석해 본 경험이 여러 번 있어요. 심리적 해리를 통하여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진짜 체험이 아니에요. 해리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기계적인 방법을 통하여 신비 체험에 빠져 드는 것은 신비가 헤엄치고 있는 물에 빠져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신비체험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P.47)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P.48)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 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P.54) 그러니까 새로운 신화가 옛이야기의 자리를 대신 한다는 것이군요. 영화 (스타워즈)를 보면서 자기는 권품천사(權品天使), 능품천사(能品天使) 와도 싸운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2 천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초기 석기시대 사냥꾼들의 동굴에 이미 권품천사, 능품천사와 싸우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현대의 테크놀로지 신화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P.58)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받고 합니다. 왜?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 회로인 것이지요.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아일랜드를 보세요. 17세기에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한 무리의 프로테스탄트가 아일랜드로 들어갔습니다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수인 카톨릭의 문을 열지 못합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서로 완전하게 다른 사회구조, 서로 다른 관념을 대표합니다.
각기 새로운 신화가 필요하지요. 원수를 사랑하라, 열어라, 남을 폄론하지 마라! 이거 모두 불교에 있는 겁니다. 신화에 있는 겁니다. 옛날부터 있어 왔어요.
모이어스- 언젠가 어느 밀림의 토인들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 토인들이 선교사에게 “당신네 신은 문을 꽁꽁 처닫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늙어서 병이라도 든 것처럼. 그러나 우리신은 밀림에도 있고 벌판에도 있고 산꼭대기에도 있다, 비가 올 때도 있다.” 이렇게 말했다지요? 사실인 것 같습니다만.

(P.59) 피그미족의 전설이 생각납니다. 한 소년이 숲 속에서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는 그 새를 사로잡아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자고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따위에게는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버리고요. 이 전설은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신화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禪師)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P.60)신화의 뼈대가 되는 모티브는 같아요. 옛날부터 그래왔어요.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그런 신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혼효(混淆)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신화학이 됩니다.

(P.61) 내가 아는 형제애는 모두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어요.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되지요.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신화가 무엇인지요? 사전적인 의미를 좇으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응당 신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서 나와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어 주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힘을 북돋우어 주기도 하지요.

모이어스-은유가 무엇입니까?
캠벨-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는 도토리이다"라고 할 경우,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정말 글자 그대로 도토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도토리'는 '얼간이'의 은유인 것이지요.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만일에 은유을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 먹는 것이나 같지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죠. 예수는 승천했습니다. 이 말은 명시적(明示的)으로는, 예수라는 분이 정말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의 진의를 좇으려고 할 경우에는 언어라는 껍질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머리 위에는 예수가 갈 만한 데가 없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가 정말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물리적인 존재를 수요할 만한 물리적인 하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광속(光速)으로 승천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은하계 안을 맴돌겠지요. 천문학과 물리학은 하늘을 문자상(文字上)의, 단순한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모이어스-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한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혹시 고전적인 기독교 신앙 체계의 전통적 교리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닐는지요?
캠벨-상징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독법(讀法)은 산문의 독법이지 운문의 독법은 아닙니다.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모이어스-그래서 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이군요?
캠벨-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그 신비는 바로 우리 자체입니다만)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줍니다.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2.내면으로의 여행

(P.87)그냥 신화라기보다는 하강하고 하강하고 또 하강하는 신화라고 하는 편이 좋겠어요. 아시다시피 신화에서 낚시질을 하다 보면 별별 잡동사니가 다 낚이는가 하면 별별 일이 다 일어 납니다. 폴리네시아 속담처럼, 때로는 “고래 잔등 위에서 송사리를 낚는” 수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고래 등에 서 있습니다. 만물의 바탕자리는 바로 우리 존재의 바탕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여기저기에 널린 온갖 잡사를 다 보고는 하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P.88)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 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른 것을 기록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우리 삶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P.89)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100)낙원의 동산이라는 신화작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超時間帶)인 이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 낙원에서는 하느님과 인간도 실제로는 같습니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이 사과를 먹습니다. 이 사과가 바로 대극(兩極)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이 두 사람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중략-
그래서 저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식하게 되어 황급히 부끄러운 곳을 가립니다. 여기에서 대극은 남녀뿐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3의 대극입니다. -중략-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단지 이원성(二元性)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을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P.96)
뱀은 새 삶을 살도록 하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 중략-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입니다. 

(P.98)
수메르의 봉인에는 뱀과 나무와 여신女神과 남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나그네인 남자에게 생명의 과실을 주고 있지요. 태곳적의 여신 신화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P.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P.120)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P.121) 성당은 성사의 중심이고, 성은 성당을 보호하는 세력의 중심입니다. 이 양지에서 두 지배권이 형성되는데, 하나는 정신에 대한 지배권이고, 하나는 육체적인 삶에 대한 지배권입니다. 이 양자는 하나의 바탕, 즉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바탕과 조화를 이룹니다.

(P.122)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길(path)'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P.126) ‘초월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과 관련된 기술적·철학적 술어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적인 존재’ 라는 말은, 자연계너머, 혹은 자연계밖에 있는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뜻합니다. -중략-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35) 헤이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P.138~139)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2)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모이어스- 그러다가 결국 죽는 거지요?
그러다가 결국 죽는 거지요.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죽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여들고 (여기에서 바로 종족 특유의 관념이 기능합니다),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

(P.143)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 문제의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빛을 내는 전구(電球)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 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다음에는 타이어…….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씩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측이 가능해요.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복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P.145)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라는 관념은 보이지 않는 사회(즉 저승)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그 사회는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승을 떠나면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회의 일원이 됩니다. 우리 자신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신화, 다시 말해서 부족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현실의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의 한 기관에서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습니다. 현실 사회는 그 부족의 목적지에 있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지요.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임을 통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계 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내가 죽인 짐승도 죽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것으로 됩니다.

(P.151) 이들에게 짐승은 적어도 동등한 존재, 때로는 우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힘이 있지요. 가령 샤먼은 자주, 짐승의 영을 수호령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샤먼이 특정 짐승의 혼령을 자기의 보호자, 혹은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P.155)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P.189)
정신이란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략-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P.190)
방에 앉아서 읽고 또 읽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 .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 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194) 이것은 상징체계와 깊은 관계가 있어요. 바로 이 상징체계를 통하여 어떤 시대의 정상적인 인간 조건이 상징되고, 조직되고, 나타나는 것이지요.

4. 희생과 천복(天福)
(P.178) 큰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한 사람이 키케로였지요. 성림(聖林)은 도처에 있습니다.

(P.179) 이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神性)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캠벨-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204)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 이것은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그룹’이 있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 난겁니다. -중략-
삶이 모든 사람에게 환희의 연속인 때도 있지요. 일상의 삶과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 사는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P.205) 농경문화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표면적인 이원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일성 관념입니다. 이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光原)이 있어요.
예술의 기능은 창조 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P.213) 자살 역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 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하지만 융 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P.215)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P.221)“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天福)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P.222~P.223)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모이어스- 이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캠벨- 천복에 이르는 거지요.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에도,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중략---...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모이어스: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캠벨-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캠벨-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 취트, 아난다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5)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 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P.227)
모이어스-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순간에, 혹시 보이지 앟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에게는 그럴 때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캠벨: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당연한 불쌍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모이어스-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캠벨-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5. 영웅의 모험.
(P.229) 우리는 이제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것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여야 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 심지어는 대중 소설에서도 남자든 여자든, 주인공은 보통 사람의 성취와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거나 이루어낸 영웅입니다.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P.230)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31) 전장에서 전사한 병사와 출산 때 죽은 어머니는 똑같이 최고천(最高天)을 배정받지요. 말하자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이니까요.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니까요.

(P.233)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전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P.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P.242) “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마라.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네 날개의 밀랍이 녹을 터이니, 필경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낮게 만들지도 말아라.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네 날개를 적실 것이야”

(P.248)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놓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肉化)'의 길일 겁니다.

(P.259)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P.254)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 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P.254) 모이어스- 토마스 베리 -중략-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삶과 우주에,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假定)과 근본적인 믿음에 부여하는 줄거리라는 것입니다.

(P.263)-모이어스- ‘자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자기’와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자기’ 즉 진짜 ‘자기’가 있을 수 있겠는데요.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켐벨-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중략-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다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P.269)어둠(저승)으로 내려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래는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래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즉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의식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P.272)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모이어스- 우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P.273)-켐벨-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 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중략-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중략-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모이어스-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켐벨-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6)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이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P.278)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중략-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84)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는, 낙타를 순치(馴致)하는 수많은 ‘강제〔must〕’인 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예술가를 지망하는 진지한 학생들은 바로 이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술을 공부하고 예술의 기법을 배우러 가서 스승이 강요하는 것만 열심히 좇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기법을 쓰기는 쓰되 스승이 시키는 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한번 자기 식으로 써보고 싶을 때가 오지요. 이게 바로 사자의 행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이때가 되면 학생은 스승에게서 배운 모든 기법을 버립니다. 자기에게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바로 이때부터 예술가로서의 홀로서기가 시작됩니다. 이때 이 신출내기 예술가가 지니는 순수는 바로 예술가의 순수입니다. 변용된 순수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이의 순수와는 다른 것이지요. 이때부터 신출내기 예술가가 하는 행동은 예술의 기법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는 다릅니다.

(P.287)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쫓으면 되는'겁니다. - 중략-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90) 여자가 물속에 있었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중략- 결국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것은 개인에 따라 통제가 가능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P.296) ‘고통과 더불어’ 라고 할 게 아니라 ‘특정한 고통과 더불어’ 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요. 이 세상 누가 고통을 끊어 보았답니까? 언제, 어디에서 그런 삶을 살아보았답니까? -중략-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P.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 중략-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경험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 라는 건데 ‘운명의 사랑’ 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겁니다.

(P.298)‘카르마〔業〕’라고 하는 인도의 개념풀이에 따르면 우리 삶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열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밖에는 탓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P.299)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P.301)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 중략-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P.301)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중략- 사랑을 선택하는 데도 그래야 하지요.

(P.350)"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자기 경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느낌의 경험에서 우러난 사랑이 그렇다는 뜻입니까?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P.353)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에 필수적인 조건이 있어요. 신사적이어야 한다는 것. 즉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망은 절대로 들어 설 자리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여성은 자기를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수용할 만한 가슴이 있는지, 사랑의 상대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끊임없이 시험 하는 거지요.
-중략-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공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P.356)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창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창에 상처를 입지요? 이 세상에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그 창을 상처에 문지르는 것뿐이다…….

(P.361)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텨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 만큼 어려워집니다.

(P.364~365)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약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었어요…….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중략-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예요.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P.366)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중략-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결혼은 진짜 결혼의 초보 같은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P.367)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P.368)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입니다.

(P.369)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P.370)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체험이지요. -중략- 신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곧 신이 아닙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사랑은 고통을 모른다고 했어요. 이 말은 트리스탄의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기꺼이 받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중략-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8. 영원의 가면

(P.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다.

(P.380)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비, 화합, 타자와의 동일성, 혹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된 바람직한 자아 초월적인 원리와의 동일성 체험은, 종교적인 삶과 체험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이라야 평생을 바쳐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완벽한 경험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 궁극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단계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이 허깨비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P.381~382)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랜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P.393~394)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P.398) 절정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는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P.405)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P.412) 어떤 일의 책임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보여도 그 사람을 비방할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 뒤에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의지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지요. 우리가 그 의지의 조장대로 움직이느냐 여부도 모르는 일이고요.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중략-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 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중략-

(P.414) 메타포를 위해 죽는 것, 이것은 사람이 늘 하고 있는 짓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있는 언어의 신비를 드러내는 소리에 ‘옴(AUM)' 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소리의 의미를 깨달으면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이 소리를 정관하고, 경험하고, 알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절정 경험일 테니까요.

(P.415) 모이어스-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캠벨-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모이어스- 그런데도 우리 하잘 것 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
캠벨-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발췌문 -끝-


3. ‘내가 저자라면’ ♣ 편집의 보완점.
신화는 지구상의 그 수많은 종족의 시조를 위해, 영웅을 더 영웅답게 하기위해 면면히 전해져온 신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때문에 첫 장을 펼치고 목차를 살펴볼 때까지도 나는 책의 내용 보다는 어떤 책이든 자신만의 언어로 문자화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이윤기 선생의 문장을 만나리라는 기대감에 더 기울어 있었다.

서문이 긴 것은 조셉 캠벨과 오랜 시간 대담을 나누고,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빌 모이어스의 저자에 대한 각별한 추모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서문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적확한 번역덕분이기도 했지만 이 책이 나를 매료시킨 이유는 신화가 지구 너머의 이야기가 아닌 지구안의 이야기라는 준거성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신화와 현실을 어떤 상관관계로 얼개를 짜는지 살펴보는 과정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편집 형태: 책읽기는 때로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1985~1986년까지 6시간짜리 시리즈물로 방영된 이들의 대담을 저서 역시 대담문 형식으로 시종 일관적, 편집을 했다는데 있었다.
책에도 공간감이 있어 구어체와 문어체, 자간이나, 행간의 형식에 따라서 글의 경중이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가 자연을 볼 때 나무가, 혹은 호수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서정성의 강도가 달라지듯 각 페이지의 문자 배열에 따라 문자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예컨대 ‘영웅의 모험’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민화를 들려주는 대목에서 몇 페이지에 걸쳐 캠벨 혼자의 들려주기가 계속되는데, 굳이 대담문의 형식(사실에 충실한 것이라 해도)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은 없었다고 본다.

♣보완할 점

제안 1. 제목
원제에 충실한 것이니 ‘신화의 힘’이란 제목에 부제를 달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자기 계발서로 훌륭한 필독서라는 것을 알 수 없다. 부제를 구체적으로 첨언 한다면 우리 사회의 자기 계발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더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제안 2.대담문의 형식이 자칫 범하기 쉬운 글의 늘어짐을 압축하여 중복 되는 부분을 과감히 잘라 페이지수를 줄이는 것도 지루함을 줄이는 방법이다.

제안 3. 이미지와 여기저기 늘어놓은 ‘신화’ 를 포켓북 사이즈로 별도 구성해서 정리하는 아이템은 어떨지 아니면 책안의 부록도 좋을 듯하다.

편집 총평: 자칫 현학적으로 흐를 수 있는 내용을 대담문 형식으로 쉽게 아우르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편집의 틀은 평이하다.

♣저자에 대한 아쉬움
(P.87)“그냥 신화라기보다는 하강하고,하강하고 또 하강하는 신화라고 하는 편이 좋겠어요. 아시다시피 신화에서 낚시질을 하다 보면 별별 잡동사니가 다 낚이는가 하면 별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폴리네시아 속담처럼, 때로는 “고래 잔등 위에서 송사리를 낚는”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 대목은 조셉 캠벨의 저서 ‘신화의 힘’ 사람으로 말하면 캐릭터를 정의하는 대표적인 대목이다. 신화를 매개로 광범위한 인문학의 모든 것을 풀어 놓은 책. 때문에 고급 양과자점의 종합세트 과자를 풀어 보는듯한 즐거움이 있었다. 때로는 촘촘한 의미망으로 때로는 성긴 건너뛰기로 책을 덮은 순간, 엄청난 양의 지적 포만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성경을 읽는 것 같았고, 캠벨은 고승이나 선지자 같았다. 그렇게 말하기로 한다면 세상 어떤 이의 삶이 성경 같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으며 앞서간 선험자의 어떤 말씀도 경전 같지 않은 구절이 어디 있으랴. 책장을 덮으며 내내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문득, 신화나 설화를 모티브로 수백편의 시를 창작한 서정주 시인이 생각났다.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된 질문은 단지 자신의 ‘앎’ 지식을 전달하는 학자와 방향을 제시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간 선험자적 차이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객관성에 우선해야 하지만 많은 부분 역사는 승리한자의 것이고, 신화 또한 누가 어떤 안경을 쓰고 썼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이 달라진다.

♣ 저서에 대한 종합적 생각
이 책은 캠벨이 신화를 매개체로 현대인에게 '지금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라’고 채근하고 있는 자기 계발서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부분도 있었지만, 나는 순간순간 지적 각성 중이었다. 과제를 받아든 그 순간부터 늘 깨어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조셉캠벨이 걸어 놓은 신화적 주술에 걸려서 완전히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신화의 순환이었다. 미디어로. 개인의 지표로, 이야기로, 우리네 삶에 가까운 '정처'를 두고 있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라 순환하는 신화. 신화와 가까워 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연필로 삼분의 이 이상을 밑줄 그은 책을 정리 하면서 이 순간, 나는 잠시 풍요롭다.
이 책을 정독해 볼 것이다. 그리하여 캠벨의 주술에 걸려서 날마다 진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과제로 이 책을 지정한 변화경영연구소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P.33)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 시켜서는 안됩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413)
- 중략-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 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이외에도 발췌한 모든 글에 감동 받았다고 한다면 무지한 소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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