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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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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3일 17시 39분 등록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이끌리오/2007


I. 저자에 대하여


빌 모이어스

이 책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그 지적소유권은 캠벨이 가져가야 옳다. 그런데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한 손길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모이어스의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 모이어스도 저자로 소개한다.

그를 생각하면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캠벨과 마찬가지로 신화의 세계에 무한히 빠져든 한 소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고향의 조그만 공립도서관에서 책 더미를 뒤지다 만난 한 권의 책이 그를 신화의 세계로 인도했다. 괴룡을 죽이고 금양모피를 찾은 영웅 이아손 이야기, 성배를 찾아다니는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 매료되던 그의 감성은, 비록 저널리스트라는 직함을 가지고 만났지만 캠벨을 통해 원색적으로 살아났다. 캠벨에게 끌린 이 사나이는 캠벨을 분위기 좋은 카페로 초대해 마티니를 함께 마시거나, 집으로 초대해 페치카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함께 서부극을 시청하거나 하는 일을 좋아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캠벨의 이갸기를 들으며 그는 그들이 시청한 서부극이 고대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라는 것과, 주일학교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사실은 고도로 영적인 모험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던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나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궁극적 실체를 깨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신화의 이야기들과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캠벨의 이야기를 통해 동서양을 아우르는 수많은 신화의 단편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이해하게 된 모이어스는 마침내 인간의 믿음 기저에 깔린 인류공통의 원리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그것은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 해방이야말로 타인의 종교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역사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길이란 걸 확신한 모이어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책임을 강하게 느끼고, 캠벨의 지혜를 사회와 나눌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이 그에게는 캠벨의 사상 전반을 통시적으로 조감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귀결되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정신 캠벨을 텔레비전 화면에 생생하게 재생하겠다는 계획은 한 저널리스트의 성스런 사회적 부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결과 PBS 대담 프로그램과 오늘, 이 책이 캠벨의 유산으로 우리 손에 남겨지게 되었다.

캠벨은 생전에 20여종의 책을 쓰거나 편집했다. 세계의 민담, 설화, 이미저리(신화로 통칭)뿐 아니라 종교, 철학, 문학, 예술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방대하고 심오한 사상을 분출하였다. 그런 캠벨이지만, 이미 그의 나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모이어스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였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대담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꼬박 8년이라는 세월을 캠벨 곁에 있었다.

1987년 10월 30일, 캠벨이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같은 해 12월, 2년 동안 제작한 대망의 본대담 프로그램은 미 전역에 방영되었고,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모이어스는 캠벨과 함께 걸었던 뉴욕의 광장이나 거리를 걸을 때마다, 혹은 부딪혀오는 군중의 열기 속에서 어떤 신화의 그림자를 감지할 때마다 아직도 캠벨이 몹시 그립다. 그가 전해주던 수천가지의 이야기들은 따뜻한 대지의 미풍을 따라 그의 마음 속을 관류하며 오늘도 먼 여행길에 오른다.


조셉 캠벨 소개, 빌 모이어스에게 온 편지

한국에 구본형이라는 멋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재료로 시험하고 그 시험의 결과로 사람들에게 발언한다지요. 여기 그런 멋진 전형이 또 있습니다. 그가 캠벨입니다. 그는 ‘신화’ 하면 떠오르는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그의 위대함은 그의 삶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천복을 따라 아름답게 살았고, 아름답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가 말했던 대로 끝이 아닙니다. 그가 죽음으로 그의 생각들은 우리들 마음 속에 생명의 씨앗으로 자랍니다. 그의 삶은 공희제로 드려진 거룩한 제물입니다. 이제 그는 우주의 기운 속에 자신을 흩어 순환하는 자연 속에 영원히 머뭅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을 발견하고 천복을 좇아 일생을 살아 우리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고,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직하던 대학의 이사진이 조그만 학교의 커리큘럼으로 자기를 가둬두려 했을 때 그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오’ 그 한 마디를 내뱉고 스스로 대학을 나와 책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박사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였습니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문학, 역사, 종교 책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 마다에 나와있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는 ‘지적 가능성을 강타하는 에너지의 폭풍’을 일으키며 자신의 책으로 독자들에게 말을 걸었고, 책 갈피 사이를 넘나드는 구도의 행진을 계속하였습니다.
그의 모험은 열 살 때 시작되었습니다.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인디언 토템기둥과 가면이 그 소년을 상념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그 상념은 그를 거부할 수 없는 아리아드네의 ‘운명의 실’을 따라 거대한 신화의 바다에 빠져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75년 후 그가 운명의 손을 잡았던 바로 그 자리,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그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그의 영결식은 참으로 그다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영결식은 그와 함께 이 현세의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의례요, 축제였습니다. 모두 그를 보냈지만 또한 아무도 그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생전에 그와 타악기를 통해 황홀한 세계를 경험하던 록 그룹 ‘위대한 죽음(Great Dead)’의 미키 하트는 그를 위해 멋진 연주를 바쳤습니다. 로버트 블라이는 덜시머(dulcimer:타현악기) 연주와 자작시를 낭송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송별사도 있었고, 무희(진 어드먼)였던 아내와 함께, 하와이에 머물며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의 고별사도 있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죽었으되 죽지 않은 그의 떠남을 기렸고,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의 행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평소 그는 곡물은 죽어 땅에 묻히고 그 씨앗들은 곧 곡물로 재생한다는 겨자씨 비유를 좋아했습니다. 모든 위대한 종교는 모두 이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 영원한 진리를 드러낸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 기꺼이 한 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빛나는 가르침은 그 자신입니다. 아니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입니다. 그 진정성이 그에게 날마다 살아있음의 황홀을 선사하였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그토록 끌리는 것도 그의 박식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살아낸 그의 천복,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몸으로 실증한 철학은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 우리 인류 전체의 철학입니다. 광대한 신화의 파노라마 속에서 건져 올린 청징한 그의 지혜가 우리를 그 철학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고, 인간은 헤어질 수 없습니다. 모두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할 사람은 나와 너가 아니고 ‘우리’입니다. 우리는 결국 한 형제인 것입니다.


번역: 이윤기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를 논할 때 번역가 이윤기도 제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번역이었기에, 이 책이 담고 있는 혼란과 미망의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책을 읽다가 심장이나 허파에 달라붙는 구절을 만나 여러 곳에 사정없이 줄을 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파워가 그 어느 베스트 셀러 작가보다 막강할 수 있다면 그가 좋은 사례다. 더군다나 신화에 관한 한 그의 이름 석자의 명예는 대단하다. 그는 지금까지 ‘장미의 이름’ ‘그리스인 조르바’ ‘푸코의 진자’ 등 200여권이 넘는 책을 번역한 번역의 노장이다. 그는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부로 통한다. 그가 있었기에 서양 신화가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캠벨의 저서로서는 1985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번역했고, 2002년 이 책, ‘신화의 힘’에 이어 현재는 4부작 비교신화인 ‘신의 가면’을 번역 중이다.

그토록 탁월한 그의 손을 거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기 저기 서걱거리며 밟히는 부분이 많다. 그것은 자유로운 대담 형식을 취하고 있는(실제로 TV 대담을 그대로 옮긴) 이런 책들이 갖는 한계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원문 자체의 내용도 번역하기가 까다로웠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번역의 어려움을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번역하다 머리가 반백이 됐는데, 셰익스피어가 고전과 신화 지식을 갖고 어찌나 말장난을 해 놨는지 세 편 번역하고 완전히 흰머리가 됐다.”

이윤기 씨는 그동안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 20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딸 다희씨와 번역 드림팀을 구성해 4년 전부터는 함께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셰익스피어 사랑 3부작(한여름 밤의 꿈/겨울 이야기/로미오와 줄리엣)의 번역 작업을 마쳤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제 ‘4대 비극’을 비롯한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으로 목표를 옮겼고 올해 안에 ‘햄릿’을 출간할 예정이다. 부녀는 같이 머리가 세어 가더라도 호메로스에서 출발, 에피데스, 소포클레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거의 모든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들을 두루 거쳐 17세기 셰익스피어와 프랑스의 니콜라 푸생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언어를 직접 21세기의 한국어로 번역할 30년의 장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동행이다. 일본어 중역(重譯)의 제1세대, 영어 중역의 제2세대(자신)를 거쳐 이제 그리스어, 라틴어를 직접 옮기는 3세대(딸)에게 친히 길을 열어주고 있는 이 희대의 작업을 이윤기씨는 ‘30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직항로 개설’이라고 부른다.

그의 인용문 하나 더.
“골머리 썩는 것 중에 인터텍스튜얼리티(상호전거성•相互典據性)가 제일 중요합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단테를 인용했다면, 죽은 단테가 에코를 다시 인용한다 할 만큼 유럽 문화와 전통에서 상호 작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머지 작업은 하나마나입니다. 신화 없는 셰익스피어는 중국 고전 없는 춘향전과 같지요.”

한 가지 새로운 발견,

그의 이력을 찾다가 전문 번역가로만 알았던 그가 ’1998년 ‘숨은 그림 찾기’로 동인문학상을, 2000년 ‘두물머리’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꽤나 괜찮은 소설가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동안 ‘하늘의 문’, ‘뿌리와 날개’, ‘나비 넥타이’를 비롯해 여러 권의 소설집과 ‘어른의 학교’, ‘무지개와 프리즘’ 같은 산문집을 냈다. 그의 소설과 내 머릿속의 그의 이미지는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물론 편견이다. 스스로를 로고스적(이성적)이라기 보다는 뮈토스적(이야기 중심)이라고 평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소설은 꽤 재미있을 것 같다. 갑자기 구미가 당긴다. 한 권이라도 가까운 시일에 읽어봐야겠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8P)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9P)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합니다.(파우스트)(11P)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11P)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열정은 인류의 전염병입니다.(11P)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 합니다.(12P)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은 것이이야 합니다."(12P)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12P)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12P)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15P)

메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15P)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15P)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15P)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동물의 주님이 인간에게 동물의 삶과 죽음을 다스릴 권능을 넘겨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냥이라는 행위는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공희제, 供犧祭)가 되고, 사냥꾼은 그 동물이 희생하여 다시 한번 재물이 되어달라고 비는 마음으로, 죽은 동물의 영혼과 화합을 기도하는 일련의 몸짓을 보인다.(16P)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 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16P)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18P)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18P)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18P)

그는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머 존재하는 지혜의 해각(海角)을 믿는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린다. 이 지혜의 해각을 찾는 일은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의 중심과제'이다.(19P)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 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19P)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 사람이었다…그렇다 캠벨도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21P)


1. 신화와 현대 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제적인 차원에서의 우리의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29P)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25P)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26P)

만일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따사로움의 모든 것, 정겨움의 모든 것, 유머의 모든 것은 내 고향이 알고 있는 이 같은 사랑에서 유래합니다.(27P)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28P)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30P)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31P)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33P)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34P)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던지고 새 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41P)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43P)

삶이라고 것은 곧 명상입니다.(47P)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47P)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48P)

어쩌면 이 행성에서의 삶은 이로써 끝날지 몰라도 우주의 끝은 아니에요.(52P)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56P)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59P)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61P)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64P)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71P)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74P)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76P)

신(divinity)이라는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77P)

신화의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77P)

‘시애틀 추장’의 말에서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누리는 삶의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81P)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80P)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81P)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흙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온다는 겁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말을 건단 말야. 신화라고 하는 게 말이지, 내가 혼자 막연하게 알던 것, 그러면서도 내가 진실일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단 말이야.(83P)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86P)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Upanishads,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86P)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87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89P)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89-90P)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91P)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92P)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96P)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世界樹)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98P)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102P)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102P)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의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 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102P)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103P)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107P)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113P)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도덕경- (114P)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115P)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117P)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118P)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됩니다. 이 깊이밖에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119P)

창조적인 글을 써 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120P)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124P)

초월자는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하느님이라는 말은 모든 사유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가르킵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이라는 말 역시 사유를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127P)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135P)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139P)

3. 태초의 이야기꾼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능의 사절이던 동물은 이제, 원시 시대처럼 인류를 가르치고 인류를 인도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처녀림 세계의 신인이 아니다. 인간의 이웃은 이제 들짐승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바퀴 별을 도는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먹을 것과 살 데를 다투는 다른 인간이다…그러나 이 수렵민들의 동물 사절(使節)에 관한 기억은, 우리가 광야로 나갈 때마다 깨어나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우리 안에 잠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 기억은 우리가 천둥소리에 놀랄 때도 잠을 깬다. 우리가 암벽화 동굴로 들어설 때도 이 기억은, 그림을 알아보는 듯 잠을 깬다. 이 동굴의 샤먼이 탈혼망아(脫魂忘我) 상태에서 내려가던 우리 내면의 어둠을 우리의 내부에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조셉 캠벨 <금수의 권능을 찾아서 the Way of the Animal Power>

3. 태초의 이야기꾼들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141P)

인간의 발달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142P)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즉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꺼이 들고,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142P)

육신이 그 힘의 절정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143P)
매장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에 대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화의 기본 테마를 이루는 관념이지요.(145P)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145P) 바로 그 의례를 통해 삶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155P)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하는 것이지요.(162P)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165P)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神話化)하는 것입니다.(168P)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具體)이다.(175P)


4. 희생과 천복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227P)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드러나는 관념적인 성소(聖所)이다.…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 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여백은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179P)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肉)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空),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187P)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89P)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189-190P)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209P)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11P)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211P)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213P)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213P)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217P)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218P)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222P)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2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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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복을 쫓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227P)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할 곳에서는 신을 만나고 남을 죽여야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 조셉 캠벨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229P)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229P)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230P)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234P)

의식은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합니다.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234P)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239P)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幻)’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254P)

토마스 베리: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삶과 우주에,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假定)과 근본적인 믿음에 부여하는 줄거리다.’(254P)

우리의 본 모습은 우리 내면에 있는데 이 내면에 대한 탐색이 바로 내가 40년 전에 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주제랍니다. 신화가 지는 우주론 및 사회학과의 관계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에요. 이 관계는 여전히, 우리가 속한 이 개 세계에 적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255P)

민족영웅, 혹은 지역 영웅은 자기가 속한 민족이나 지역을 섬기지만 모하메드, 예수, 석가 같은 우주적 영웅은 이 세 강 너머에서 인류에게 유용한 메시지를 가져옵니다. 그들은 신의 신비를 가져오는 것이지 신의 청사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259P)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하느님은 글자 그대로 저기에 있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다. 저 위에 계신 하나님께 가까워지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지요.(259P)

(진짜 자기를 만나기 위한),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263P)

우리는 조만간 무엇이, 이승의 삶이라는 꽃을 잘 가꾸는가를 알아내어 그것에 헌신해야 합니다.(271P)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 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그것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272P)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273P)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273P)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273P)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276P)

선생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해야하는 일은 사람들이 아리아드네의 실(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신화: 테세우스가 미궁을 빠져나오게 한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275P)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278P)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278P)

”죽기에 좋은 날이다.”-삶의 집착을 갖지 않은 인디언들(279P)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279P)

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케하는 좋은 기준이 됩니다…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쫓으면 되는'겁니다.(287P)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296P)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299P)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301P)

진정한 예술가는, 조이스의 이른바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301P)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302P)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303P)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303P)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우주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307P)

영어에는 '아버지와 화해(atonement)'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이 화해는 곧 '하나 되기(at-one-ment)'랍니다.(307P)

인도의 성적 신비는 생명 창조의 신비인 거지요. 아기를 생성하는 행위는 우주적인 행위입니다. (311P)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320P)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322P)

이 '존재하는 만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를 인도어로는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이건 남성 명사도, 여성 명사도 아닌 중성 명사예요. 여자를 인도어로는 '마야-샤크티-데비'라고 합니다. 이건, '생명을 주신 여신이자 형상을 주신 어머니'라는 뜻입니다.(332P)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334P)

의례의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335P)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336P)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요.(337P)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사랑은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귀로 드 보르네이유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그것은) 타인을 향하여 열려야 할 우리의 기관이지요.(344P)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순수한 개인적 성격의 사랑)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345P)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하는 겁니다.(347)

단테는 지옥에서 벌을 받는 상태는 결국 지상에서 우리가 이루려 하던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했지요.(347-348P)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350P)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가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353P)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355P)

성배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황무지입니다.(356P)

성배는…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357-358P)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開花)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358P)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358P)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359P)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359P)

…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359P)

다른 인간을 위한 자연스런 가슴의 열림, 자비, 연민, 이것이 바로 성배인 것입니다.(360P)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360P)

결국 우리는…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61P)

청교도들은 결혼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결혼을 하면 날마다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랑과 용서의, 현재 진행형 성사(聖事)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365P)

음향의 상징인 태극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있고, 여기에는 ‘그’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있는 겁니다.(365P)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366P)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사랑은 곧 신의 임재(臨在)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370P)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믿어보면 지옥의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던 것’과 함께 할 수 없는데서 오는 고통입니다.(371P)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373P)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우파니샤드,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375P)

천사나 마귀의 존재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죠. 천사나 마귀란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충동을 의인화 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77P)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이지요…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다르게보지 않아요.(378P)

언어 밖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합니다.(379P)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칼 융(379P)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379P)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나’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380P)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381P)

종교적인 삶이라는 것은 이 특정 시간에 존재하는 이 특정 육신의 의도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대국적인 의식의 통찰 안에 사는 것입니다.(385P)

삶의 본원은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387P)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즉 ‘뒤로 연결됨’, 둘이서 나누어사는 하나의 삶, 즉 나의 삶이 한 삶과 렐리기오(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상호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388P)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393P)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394P)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394P)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건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395)

(영원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고 영속하는 곳입니다.(404-405P)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영원은 그 시간 너머에 있어요…시간이 있는 곳에는 슬픔이 있고,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405P)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411-412P)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412P)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 (413P)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414P)

'옴(AUM)‘은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우주는 존재의 ’옴‘송입니다. ’옴‘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 한 옴이 끝나고 또 한 음이 시작되기까지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414-415P)

내게는 그런 순간이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요, 계시의 순간이요, 광명의 순간입니다.(415P)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415P)


lll. 책에 대하여

글: 빌 모이어스 Bill Moyers

아무래도 이 책이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저의 힘이 컸으니 제가 이 책의 구성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출판을 목적으로 구상된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캠벨과의 PBS 대담 내용이 큰 반향을 일으킨 후, 외부의 요청에 의해 그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구술을 토대로 한 책들이 갖는 결함을 이 책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각 장 간의 유기적인 연관도 떨어집니다. 짧은 지면에, 상당한 사전 지식이 요구되는, 결코 이해가 쉽지 않은 캠벨의 신화학을 다 소화하려다 보니 설명이 미흡하거나, 같은 이야기가 중복되는 곳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담의 내용도 임의로 분류하고 비슷한 이야기들을 모아 하나의 주제로 묶어보니 8개의 장이 되었습니다. 대담을 구성하는 처음 시점부터 그 8장의 제목이 현재의 책 형태대로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각 장에 담긴 내용 중에는 그 장의 주제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또한 전체적인 구성에 있어서 책을 끌고 가는 일관된 흐름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대담이 갖는 한계라고는 해도, 저의 질문의 밀도가 떨어져서 혹은, 주제를 애초 의도한대로 다시 돌리기 위해 캠벨의 흐름을 끊어서 한 주제가 깊이있게 논의되지 못한 것이 여러분들의 전반적인 신화 이해에 어려움을 주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부족의 탓입니다.

같은 주제가 이 장 저 장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으니 각 장에 구애받지 말고 전체적인 시각으로 책을 편안히 읽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본문을 읽기 전에 제가 쓴 서문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책 전체를 요약한 내용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캠벨 사상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는 될 것입니다. 그리고, TV란 매체의 특성상, 이 이상의 대담을 이끌어내는 것도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었음을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장점 또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한 자리에서 동서양과 세계 여러 부족들의 다양한 신화들을 대학자의 자유롭고 심오한 통찰과 함께 듣는다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닙니다. 이야기꾼 캠벨의 신화들은 모두 하나같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 품 안에서 듣는 동화 만큼이나 흥미진진합니다. 또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울림이 적지 않아 여러 번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오래도록 캠벨의 저작 뿐 아니라 다양한 신화 서적들을 연구해온 저는 나름대로의 지식을 토대로, 질문의 초점을 가급적 ‘먼나라 이야기 신화가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로 귀결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나의 질문은 곧 여러분들의 질문이고 그 점에서 이 책은 다른 신화 책들과 분명하게 차별된다고 하겠습니다. 다소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되묻기와 제 나름의 부연을 통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애를 썼습니다.

TV 대담이 방영된 후 시청자들의 반응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저희 제작팀들의 기대를 한껏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이야말로 이 책이 출간되게 한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신화를 다루는 한 권의 책이 사람들의 인생에 간여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을 바꿔 줄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제가 영상으로 캠벨을 이 세상에 영원히 잡아두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 인생 역시 캠벨에게 큰 빚을 졌으니까요.

이 책에 실린 신화 관련 도록들도 유심히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밑에 달아놓은 내용들은 대담에서 빼온 핵심 내용들입니다. 신화 이해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매우 유익한 자료들입니다. 물론 독서의 지루함도 덜어줍니다.

무엇보다도 대담의 대상이 캠벨이라는 사실이 이 책 최고의 자산입니다. 그는 대담을 통해 신화를 우리 삶의 마당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책을 읽다가 질문이 여러분 가슴에 다가가거든, 절대로 피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저의 수고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을 캠벨 사상의 입문(introduction) 정도로 받아들이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신화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사람은 <신의 가면>이나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같은 캠벨의 다른 저서들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번역판의 보완점:

1. 이미 이윤기 식의, 혹은 신화와 연관된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에게 어느정도 익숙할 단어들이겠지만 처음 읽는 독자들에겐 번역된 단어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천복(멋진 단어긴 하지만, 처음엔 감이 잘 안온다), 모듬살이, 공희제, 원형, 신인동형동성, 와사상척추동물, 혼효,통찰의 탐색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단어들을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가 힘들다면 영어를 달아주거나 설명이 좀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2. 번역의 단점이라기 보다는 원문의 단점이겠지만 잦은 질문의 이동과 비약 때문에 신화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에 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단편적으로 흩어진 주제들이 하나의 우산 속에 수렴되지 못하는 이 책의 전반적인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번역본에 장마다 별도의 ‘편집자 요약’을 달아주면 좋을 것이다.


관심 이슈

1. 왜 하필이면 신화냐?

이 책 첫 페이지는 ‘왜 하필이면 신화냐’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책 제목 ‘신화의 힘’이 담고 있는 것도 이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왜 신화에 관심을 가져야하는가.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 책 도처에는 ‘신화에 대한 정의가 무수히 발견된다. 그러나 그 개별적인 정의들은 이 첫 질문, ‘왜 하필이면 신화냐’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한다.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 5장 ‘영웅의 모험’ 맨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시원한 바람과 만난다. 머리가 탁 트이고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

그렇다. 신화는 시, 메타포일 뿐이다. 신화의 진리는 그 이야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용어로 말하면 전륜의 테 밖에 있는 것이다. 신화는 우리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신비를 알고, 그것이 은유하는 우리 삶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신화의 지혜가 내 삶에 일으켜놓은 기적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말한 캠벨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이 장에서 말하는 영웅은 그래서 우리 머리 속에 있는 대단한 인물들이 아니고 신화의 신비를 깨닫고 그 것에 동참하는 나와 너 보통사람들인 것이다. 영웅의 조건은 단 하나, 안 것을 삶으로 체험하기 위해 정해진 삶의 테두리를 넘어설 수 있느냐 하는 것 뿐이다. 기존의 질서와 법의 보호를 벗어난 땅으로 발을 내딛는 것, 바로 이 모험이 영웅의 시작이다. 모험에는 시련과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것도 걱정할 것은 없다. 발을 내딛기로 결정한 순간, 이미 내가 살아야 하는 ‘바로 그 삶’에 대한 확신이 함께 한다. 그 확신 속에는 이미 끝까지 갈 수 있는 에너지도 담고 있다.

영웅의 모험, 그것은 바로 살아있음의 모험이다.


2. 캠벨의 종교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에 대하여

캠벨의 종교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유심히 살핀 것은 그 많은 세계의 신화들을 비교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 관찰한 이 대 학자가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궁극적으로 어떤 통찰에 도달했는가가 알고 싶어서였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방황하는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질곡처럼 느끼는 하나의 질문을 그를 통해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기독교인이었다. 종교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의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든 선택은 다 어떤 믿음에 기대고 있다. 어떤 종교를 갖느냐도 그렇고, 종교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원론적인 선택도 그것을 선택하는 자의 믿음(세계관)이 연결되어 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만 믿고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존재에 대한 물음(죽음/삶/고통..)에 진지하지 않으며 대부분 삶이 팍팍하고 쇠심줄 같이 질긴 사람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니체류의 외침에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번민이 느껴져 연민이 간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내가 가장 마음 속에 타협하지 못하고 불씨로 담고 있었던 이슈는 ‘구원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뒤늦게 크리스천이 된 나는 다행히 교회라는 조직과 율법에 갇힌 도그마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개인의 진정성을 담고 있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에 눈을 떴고 성경이 주는 지혜와 통찰, 위로들로 힘든 때를 신앙에 기대어 잘 넘어왔다. 그런데 한가지, 나는 타고난 성격이 나만 살아남는 것에 강하게 죄책감을 느끼는 이타적인 사람이라, 내가 속한 종교에만 구원이 있고, 내가 믿는 하나님 만이 유일신이라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늘 목의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 배타성에는 지옥과 천국이 걸려 있었다. 기독교를 통해서만 천국에 이를 수 있고, 나머지는 누구도 예외 없이(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착하고 선하게 산 기독교 밖의 많은 사람들, 기독교권 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 아직 종교에 대해 독자적인 선택이 불가능한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들, 누구보다 힘든 삶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 죄의 대가로 뜨거운 지옥불에 영원히 던져진다는 그들의 교리는 인간의 운명(예정이냐 자유의지냐, 어디까지 정해졌고, 어디까지 선택이냐)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까지 연결되어 나를 괴롭혔다.

그 괴로움은 기독교라는 테두리에 있는 한 반역의 용트림이었다. 역시 캠벨처럼 나는 이 문제를 교인들과의 토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책으로 풀 수 밖에 없었다. 신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고 통찰이 깊어졌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내가 고민한 문제를 여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와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 책에서 결정적인 문장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모이어스가 캠벨과의 작업을 통해 그가 가진 신앙에 손상을 입지 않고도, 그 때까지 갇혀있던 문화의 감옥에서 그의 믿음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p114)고 고백하는 대목이다. 캠벨은 ‘나의 믿음도 해방이 되었고, 신화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응수한다. 아하, 캠벨을 잡으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상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독단 때문에 기독교 밖에서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의 깊이 있고 영적인 깨달음들을 어떻게 수용해야할지, 고민이었는데 이 참에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가 몰려왔다.

먼저 신의 가면(영원의 가면)에서 단초를 찾는다. 신화는 캠벨에게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설명하는 메타포이다.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도 문화권마다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삶 자체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적으로 볼 때 중심은 시점이 있는 곳이다. 높은 곳에 이르면 지평선이 보인다. 달에 서면 지구가 떠오르는 광경이 온전히 보인다. 그렇게 온전히 보려면 우리 지각의 창이 먼저 깨끗해야 한다. 지각의 창을 닦고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본 캠벨은 힌두경전의 말을 빌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종교적인 삶이라는 것은 이 특정 시간에 존재하는, 이 특정 육신의 의도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대국적인 의식의 통찰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에 대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다. 벗어나지 못했을 때 세계의 종교는 여전히 배타적이고 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 밖에는 되지 못한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기독교가 표상하는 신 역시 그 중의 하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세계의 각각의 문화권에 다른 모양으로 등장하는 신들의 궁극적인 실체는 인간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는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한다. 종교가 가진 이야기들을 신화로 보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내함하는 원형들을 건져 보편으로 승화하는 것이 캠벨의 방법이다.

그에게 원래 종교(religion)는 렐리기오(religio), 즉 ‘뒤로 연결됨’, 둘이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 즉 나의 삶이 한 삶과 렐리기오(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종교의 상징으로 가장 강력한 것이 원이다. 원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측면으로 대변되는 전체성의 상징이다. 삶과 죽음은 대극이 아니고 하나의 두 측면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속세의 근원은 영원이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의 관념이 바로 영원이다. 신은 하나이지만 속세에서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 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캠벨에게 신은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칼 융을 빌어 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종교는 오히려 ‘하나님 체험으로부터 인간을 막는 수단’이 되어왔다. 신은 우리의 언어와 생각 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언어 밖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신에 대한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켐벨 종교의 종착지는 신과 나의 일원성, 이것이 나아가 세계와 나의 일원성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신’과 ‘나’라는 이원성이 초극되고 형상이 사라지는 상태.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고 그것은 바로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가 되는 것이다. 나와 타자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 즉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에 닿는 것이다. 그에게 그리스도나 부처는 영생의 진리를 깨닫고 기꺼이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참여한 영웅들이다. 그에게 개별 종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의 메타포가 상징하는 신의 존재를 내가 개별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내 식으로 바꾼다면 내 안에 구현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 그와 내가 일치를 이루는 것, 그것의 외적 표현은 나의 천복을 발견하고 타인을 향하여 희생을 기꺼이 무릅쓰는 것이다. 그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는 그저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캠벨을 읽고 나서 나는 내 안의 변명을 보았다. 나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벗어나고 싶었고 그것을 합리화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이는 캠벨의 입장은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불경이지만, 내 안에 역류하는 음험한 피와는 잘 섞였다. 나는 배타적인 기독교를 패기하고 ‘지시하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지시하는 달’, 그러니까 애초부터 진정한 영웅 그리스도를 나의 ‘본’으로 삼는데 있어 나를 지지해줄 지지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캠벨을 얻음으로써 모이어스가 말 한대로 나의 신앙에는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고, 고민했던 지옥의 문제는 교묘히 해결을 한 셈이다. 이제 나는 무수한 이미지의 가면 중에 기독교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던 신의 실재, 그 유일한 ‘영광의 얼굴’에 무릎을 조아려 그와의 일치를 소망하며 자비와 긍휼을 구할 뿐이다.

“ 제 방에는 예수상과 관세음보살의 그림이 오순도순 살고 있고 십자가와 달마가 편안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책상에서 손닿는 거리에 성경이 있고 불경이 있습니다. 젊은 날 기독교가 절 키웠듯이 이제는 불교가 나를 단련합니다. 사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불쾌해 하거나 위협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종교권력일 뿐, 종교는 아닙니다. 세상 끝까지 열려있어 저 깊은 무의식까지 열어줄 수 있어야 종교일테니까요. 기독교가 내게 좋은 인연이었고 여전히 좋은 인연이듯, 불교도 내 인생의 좋은 인연이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 이주향 ‘치유의 책 읽기’ 4p -

(이 주제는 참 매력있다. 그러나 쓰다 보니 논리적 연결이 허술하다.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 복잡하게 잡아둔 개념들을 조직하고 분류해서 나의 논지를 잘 끌어주도록 연결해야 하는데 그럴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다. 아쉽다. 시간을 내서 한 번은 잘 정리하고 싶다.)

3. 그의 공부 방법, 모조리 읽는다

캠벨은 독일과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 전통적인 대학의 학위 공부와는 결별한다. 이후 사라 로렌스 대학에 교편을 잡기 전까지 5년 동안 강도 높은 독학을 통해 자기 만의 독서법을 개발하게 되는데 그 방법이 나의 눈길을 끈다. 꼭 모방하고 싶은 방법이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189-190P)”

책을 읽다 좋은 글을 보면 가슴이 뛴다. 좋은 글이란 벌써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벌써 들어와 있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미 낯익은 것이어서 그토록 반가운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내는 작가의 재주에 경탄하지만 우리를 정말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표현을 얻었기 때문이다.
-구본형 ‘일상의 황홀’(34p)

아, 나도 책이 주는 이런 통찰의 순간들과, 캠벨이 느낀 ‘세상이 열리는 기분’을 자주 마주하고 싶다.


계속 생각해보고 싶은 그외 주제:" 삶의 궁극적 배경은 우연이다"와 쇼펜하우어의 '개인의 의지'에 대하여, 삶의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하여.- 412p


이 책에서 언급되는 캠벨 외의 저작들

제임스 조이스 : ‘피네간의 경야’와 ‘율리시스’
괴테: ‘파우스트’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
노자: ‘도덕경’
토마스만:’토니오 크뢰거’
하인리히 침머/칼 융/괴테의 저작들
단테: 신곡
피카소:미노타우로마키 그림
아라비안나이트
싱클레어 루이스: ‘바비트’
오토 랑크:’영웅의 탄생 신화’
쇼펜하우어:’개인의 운명에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
오르테가 이 가세트: ‘돈키호테에 관한 명상’
TS엘리엇:’황무지’
성경/코란/인도경전 우파니샤드/리그베다/그리스로마신화 외 전세계의 다양한 신화들
‘아더왕 이야기’, ‘성배를 찾아서’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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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2008.03.03 17:45:54 *.187.232.249
뒤늦게 올라온 로이스의 글을 보고
작년 3기 지원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전 과제제출기한이 (막연히) 저녁 12시까지일 거라고 생각하고..
월요일 점심 때쯤 되었을 때 겨우 글 쓰기를 시작했었죠.
북리뷰도..컬럼도 그때 쓰기 시작했어요.
시작 전에..다른 분들이 글을 좀 올렸나 싶어
홈페이지를 들어와 보니 왠걸 한명도 빠짐없이 다 올라와 있어
얼마나 놀랐든지요.
뒤늦게 낮 12시가 마감인 걸 알고 어찌니 황망하든지 ^^;
평소라면 그 황망함에 포기했을 나지만 연구원에 대한 열망,
그리고 애써 책 읽은 것에 대한 아까움..그런 것들 때문인지
오기가 생겨서 끝까지 써서 제출했어요. 다 하고 보니
오후 5시쯤이더라구요.
로이스는 저보다 훨씬 잘하느라, 조금 늦으신 거겠지요.
애쓰셨어요. 기분 좋게 한숨 푹 쉬세요.
앞으로도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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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숙
2008.03.03 18:05:34 *.51.218.156
말하면 변명이 되니까 자세히 설명은 하지 못해요. 마지막 가다듬고 오늘 아침, 올리려고 준비해두었는데,좀 늦게 지금 올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어요.사부님께는 양해를 구했습니다. 사고가 나면 대처할 방법이 없는 당일날이 아닌, 적어도 하루 이전에는 숙제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뼈아프게 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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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3.03 18:11:42 *.38.102.243
아무리 헤아려도 16분인지라 내심 걱정하고 있었어요. 글 보고 반가워 단숨에 읽었습니다. 마치느라 애쓰셨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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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2008.03.03 18:26:26 *.84.240.105
역시 탁월하십니다. 기가 팍 죽는다는 말밖에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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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까마귀
2008.03.03 18:55:18 *.116.42.67
캠벨을 분자 단위로 분해해 재편한 리뷰군요!
선명해집니다.
제게도 오늘 이 책이 도착했습니다. 읽는데 큰 도움이 되겠어요.
감사드리고, 내내 즐거운 과정 만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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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나
2008.03.03 19:37:09 *.117.73.63
우와~ 정말 대단하네요. 저도 기가 팍 죽네요. 오늘 여럿 죽이시는데요^^ 갑자기 언니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싶어지는 것이.... 멋져요!! 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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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2:23:37 *.125.205.55
저는 과제를 너무 빨리 제출해서 조금은 후회를 했어요.
오늘 이한숙님의 과제를 보며 더욱더 그렇구요..ㅎㅎ
배우고 또 배워갑니다..

건투를 빕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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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8.03.04 08:46:05 *.208.192.88
휴... 다 읽고 나니 절로 숨이 터져 나옵니다.
대단합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을 울리네요.

"내 식으로 바꾼다면 내 안에 구현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 그와 내가 일치를 이루는 것, 그것의 외적 표현은 나의 천복을 발견하고 타인을 향하여 희생을 기꺼이 무릎쓰는 것이다."

가끔 교회를 나가고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문득 독단적인 편협성을 볼 때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때가 많아요. 기회가 되면 '신의 가면'을 읽어봐야겠네요. 훌륭합니다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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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촌
2008.03.04 11:31:24 *.235.8.34
두려운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고 선다.

심판관이 앉아있다.

아니....

우리 엄마다.

예수님이다.

어떤 사람도 죄인으로 심판한 적이 없는 분이다.

죽여야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예수님께 달려있다.

엄마에게 달려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상선벌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선물이다.

다른 사람은 선물을 받으면 안되는가...

타종교인,무신론자에게도

죽은 다음에도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연옥)

다른사람의 기도와 선행으로

무엇보다 신의 은총으로

천국문이 열리는 것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다.

등산로도 있지만

바람따라 비탈길을 걸어 닿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분께 달려있다.

개신교식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는

예수의 사랑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세상에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누가 되지 않았는지 걱정되는군요.

연구원 생활을 통해 깊은 성취 있으시기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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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5 01:03:49 *.70.72.121
1. 단어에 대하여 찾고 공부할 수 있도록 그리고 생성시키거나 언어의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 것도 저자가 해야할 일 중 하나는 아닐까?

2. 머리를 깎더니 드디어 중이 되었구료. 전륜의 테 밖이라..

3. 우리가 우리 아이를 죽이는가. 우리가 그렇지 않은데 전지전능한 신께서 당신 자식을 죽이려고 들까? 믿지 않고도 더 성실한 그리스도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머리가 숙여진다는 떼제의 신부님들의 말씀에 나는 공감한다. 교회 안에 있다하여 교회 밖을 차단하고 폐쇄시켜버리려 드는 이익을 누리는 것을 넘어 탐하려는 자들이 자신들만이 진실한 신앙인이라고 편을 가르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된다.(나 포함)

4. 한 놈만 물고 늘어저 패 죽이자. 뚫어 펑!ㅋ

5. 아줌마, 똥 배짱 부리지 말고 빨랑 빨랑 올리셔.ㅎㅎ



그리고요, 위에 덧글 왕창 다신 유촌님,


원수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예서 만났네요. 내 돈 떼먹은(?) 것 내놓으셔야 종. 십일조만 내면 뭘합니까?
인간사를 해결해야 천국이든 지옥이든 연옥이든 떨어질 게 아니에요.
당장 입금시켜 주세요. 변.경.연 강현 김영훈님 앞으로 재단에 10만원 기부하시구요, 마음이 짠할 테니 설렁탕 값은 깎아 드리리당. ㅋㄷㅋㄷ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 폰 번호 알려드립니당.

016-236-0556 강현 김영훈님께서 꿈 벗 펀드를 운영하고 있거덩요. 강현은 받으면 문자주시길. 으하하.

그럼 가내 화목하고 만수무강 하옵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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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1 10:39:08 *.36.210.80
덧글의 유촌님, 어제 강현 김영훈님으로부터 제가 유촌님께 책이 발간 될 시 (지난해 11월 말 경에 2008년 1월 3일까지 한 권의 책을 완성하겠다는 의지에)구입 선수금으로 보내드렸던 5만원이 도로 반환되어 왔더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책은 없이 원금만 돌려받고 펀드에 기부하게 되었네요.^^ 다음 기회에 좋은 책으로 저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시기를... 열심히 쓰고 계시지요? 이 봄의 환한 햇살처럼 늘 신의 가호 아래 좋은 글 집필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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