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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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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9일 10시 54분 등록
* 읽은책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현암사)

I. 저자에 대하여

품격이 느껴지는 태몽

일연의 어머니는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 배를 비추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태몽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내가 들어본 태몽 중 가장 멋진 꿈이다.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서 배를 비추는 장면을 상상하자니, 그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 탄생할 것 같은 느낌이다. 변화경영연구소의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나의 태몽은 어머니가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지게에 주워 담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복숭아가 무척이나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하긴 했지만, 일연의 태몽에 비하니 나의 태몽은 너무나 소박하고 서민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땐 전혀 못 느꼈지만, 일연의 태몽을 알고 나니 왠지 아쉽다. 태몽의 스케일에 따라 인생의 성공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어머니와 일연

일연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란다. 아홉 살 나던 해 공부를 위해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無量寺)로 보내지는데, 당시의 교육 문화가 어떠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공부를 위해 그 어린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어찌보면 이사를 세 번한 맹자의 어머니보다도 더 독하게 자식의 교육을 생각한 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버지 없이 키우느라 먹고 살기 힘들어 보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몇 십 년 후의 결과로 볼 때 국사을 탄생시킨 최고의 선택이었음은 확실하다. 일연과 그의 어머니의 관계는 '삼국유사'의 효선 편에 나오는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한명인 진정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들이 수련에 들어 도를 이르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구걸을 해 먹고 살아도 좋다는 각오를 했던 진정의 어머니와 일연의 어머니는 어딘지 모르게 닮은 듯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곁을 떠나 평생을 떨어져 살았던 일연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깊었을 것이다. 훗날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국사의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일에서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자존심 있는 고려시대의 신화학자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그리고 향가를 집대성한 일연은 신화에 평생을 바친 조셉 캠벨에는 못 미치겠지만 분명 고려시대의 신화학자이다. 아니, 시대 순으로 놓고 본다면 조셉 캠벨의 크나큰 대선배라 할 수도 있다. 일연은 왜 어찌 보면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가득한 역사서를 만든 것일까? 일연이 살았던 13세기는 고려의 극심한 혼란기였다. 내외적으로 불어닥쳤던 커다란 변화의 바람 속에서, 일연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는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쓰여진 '삼국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눈치 안보고 우리들만의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삼국유사'를 지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하며 당당히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크나큰 자존감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내 귀에는 "중국, 니들은 우리한테 신경꺼!" 라고 외치는 일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당당함,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정도(正道)가 왕도(王道)이다.

일연은 승려로서 그야말로 승승장구 했다. 22살에 승과에 합격하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의 직급에 오름으로서 서서히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승려로서의 자기 생활에 충실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은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의 천복을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공부를 하기 위해 들어간 절에서 이미 그의 인생은 결정되었던 것일지 모른다. 승려로서의 삶의 시작이 그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평생토록 그 신분에 벗어나지 않는 인생을 살다감으로써 지금까지도 이렇게 수 많은 종류의 책과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토록 존재하는 인물로 남아 있다. 일연은 1289년 7월 칠석날 밤 84세로 생을 마감한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 일연은 세상을 떠나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나는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해 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요리를 하기에는 방부제 친 통조림보다 싱싱한 과일과 야채가 더 좋은 재료 아닌가?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11)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12)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는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는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12)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시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18)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21)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21) 단순히 현재 살고 있는 인류만을 기준으로 창세를 말하기가 조금은 우습지 않는가? 지금 세상과 사람들이 지구의 처음은 아닌데 말이다.

29)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보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고구려와 북방계
52) 끝으로 일연은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데,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온조왕으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 세력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는 북방계의 이주 집단이다.

신라와 남방계
54)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 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되도록 이성적 판단에 맞아 들어가는 것을 추구했던 '삼국사기'의 세계와 일연 사이에 놓이는 차이점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56) 이제 남쪽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68)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73)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는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92) 역사가 프로레슬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역사는 그런 쇼나 각본으로 비유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98)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100)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111) (박)제상은 왕명을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 "

115) 왜나라 왕은 정말 화가 났다. 제상의 발바닥 거죽을 벗겨낸 뒤 갈대를 잘라놓고 그 위를 걷게 했다. 그러면서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이냐?"
"신라의 신하이다. "
또 뜨거운 철판 위에 세워 놓고 물었다.
"어는 나라의 신하이냐?"
"신라의 신하이다. "

119) 고려는 개국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해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
133)
귀하신 왕의 혼으로 아들을 낳으니
비형랑 그 사람의 방이 여기네
날고 뛰는 가지가지 귀신들아
이 곳에 머물지는 말아라
(중략)

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를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144)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50) 다만 한 가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153) 백제는 신라와 함께 연합군을 만들어 고구려를 치고자 했다. 진흥황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린 것이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넘보겠소. " 이 말은 이내 고구려 쪽에 전해졌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백제는 이를 원망하였다. 백제의 침공에는 이란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170) 유신의 생각은 달랐다. 춘추의 왕위를 포기하자는 것도 문희의 결혼을 말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었다.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있었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낸 사람이다.

184)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185) (문무)왕이 평소 지의 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죽은 뒤에 나라는 지키는 큰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는 지키겠소. "
"용은 짐승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 "

권력의 끝
212)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득오의 '모죽지랑가')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226)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친 노래)

226)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첫 성전환증 환자
241) 일연은 이 이야기(월명사의 도솔가) 끝에 '산화가'가 따로 있다고 밝힌다. 아마도 그것은 좀더 불교적인 의례에 맞는 노래였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향가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그것이 효과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라 불교의 주체적 면모를 엿볼 수 잇다.

246)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충담사의 '안민가')

왕이 되는 자
261) 사실 원성왕은 기울어 가는 신라를 되살리고자 애쓴 마지막 왕이 아닌가 한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왕족간의 싸움 끝에 등극하였다고 하나, 그것이 곧 야심찬 젊은 왕족의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왕 즉위 4년에 실시된 독서삼품과는 그 대표적인 업적으로 볼 수 있다.

261)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262) "낭이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어떠 재미있는 일을 보았느냐?"
"좋은 일 세 가지를 보았나이다. "
"그 이야기를 들어 보자. "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 (<기이>편의 '48대 경문대왕'조 중에서)

나라가 망하는 징조
270)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284)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는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처용의 이야기)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현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이것이 '삼국유사'다.

지는 해 뜨는 해
288)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연할 수 있을 뿐이다.

300) 몇 십 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며 하는 말이,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완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307) 정녕 충분한 자료가 갖추어졌다면, 고구려에 관련해서는 대륙 중국과의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백제에 관련해서는 이웃 일본과의 교류를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313) 또 사비수 언덕에 열댓 명이 앉을 만한 바위 하나가 서 있다. 백제 왕이 예불하러 왕흥사에 거둥할 때에 먼저 이 바위 위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하였다. 그러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 그래서 이 바위를 돌석이라 했다.

323) 고구려가 중국 본토와의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여야 하고, 신라는 일찍 북방 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해 가는 쪽의 방향을 잡았을 때, 고구려와 신라로부터 협공을 당해야 했던 백제가 갈 길은 자명했다. 일본이다. 그러므로 바로 코앞의 한반도 국가 가운데 왕실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을 개척한 백제야말로 일본열도에서 우위를 잡는 데 적임자였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327)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 놓기 십상이다.

견훤, 비운은 영웅
347) 실상 견훤은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이다. 신라가 경순왕을 끝으로 왕의 역사를 마감했다고는 하나, 그의 외손자들이 고려조의 왕위에 올랐고, 경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상당수 고려 왕실의 요직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된다.

355) 그러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했소. 초겨울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 싸움에서 손이 묶였고, 이 달에는 좌장군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햇볕에 쬐었소. 죽이고 얻는 것이 많으며, 쫓아가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음을 보아, 강약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승패도 알 수가 있을 것이오.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357) 만약 족하가 오월왕의 뜻을 받들어 흉악한 병기를 모두 놓으면, 그것은 위 나라의 어진 은혜에 부합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동방의 끊어진 실마리를 이을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허물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 때 가서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360)
가엽은 완산 아이가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완산요 중에서)

신비의 왕조, 가야
384)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시기에 가야 지방에는 왜의 식민지가 서 있었으며, 그 식민지의 이름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중략) 물론 왜인들이 들락날락했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다. 완충지의 치안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386)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402)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왜 그랬는지 그 기준은 '삼국사기'와 비슷할 터이나, 한 가지 추가한다면 불교역사주의적 의식이 작용했다는 점도 앞서 지적했다.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 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5) (이차돈)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
(법흥왕)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 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도다. "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고민하는 법흥왕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

409) 신라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곧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

411)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복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이차돈의 죽음에 대한 일연의 찬)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424)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라가 가진 불국토사상 또는 본지수적사상이라 부른다.

434)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434)
이에 올라 보라, 어찌 구한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평화로움을 깨닫겠네
(일연의 '황룡사 구층탑'에 대한 찬)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444)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다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452) 들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쐈다. 그 중 한 마리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리고 가 버렸다. 거사가 그 깃털을 집어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이 모두 짐승들로 보였다. 그런 까닭에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신효거사의 이야기)

45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458)
무릎이 헐도록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빌어 두노라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라
한 개사 적이 헐어 주시려는가
아, 나에게 끼치신다면
어디서 쓸 자비라고 큰고.
('분황사 천수대비, 맹인 아이가 눈을뜨다'조 중에서)

470) 굴정역의 동지 들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문든 한 사람이 매를 날려 꿩을 쫓게 하는 것을 보았다. 꿩은 금악향으로 날아 지나가더니 자취가 없었다. 매의 방울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 굴정현의 관청 북쪽에 있는 우물가에 이르자, 매가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는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원공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기면서 느낀 바 있어 이 땅을 살펴보라 하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관청 건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그 땅에 절을 지었다. 이름을 영취사라 하였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73) 간밤 계를 더럽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부득의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475)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478)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485)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노힐부득에 대한 일연의 시)

485)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수순중생(隨順衆生)'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부득의 행위는 이 같은 참 보살행의 소치임이 분명하다.

낙산사의 힘
496)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508)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조신의 꿈에 대한 일연의 시)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513) 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종교다. 무릇 2천 년을 바라보는 오랜 역사에다, 거기 누벼진 사연이 많기도 많다, 불교야말고 이성으로만 받아들이는 어떤 형식으로서가 아닌 우리들 심성 깊숙이 내린 튼튼한 뿌리다.

523) (원광) "육재일과 봄과 여름에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때를 가림이다. 기르는 동물 곧 말, 소, 닭, 개를 죽이지 않는 것과, 자잘한 동물 곧 한 번 저미지도 못할 것을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대상을 가림이다. 이 또한 오직 필요한 만큼만 하고, 너무 많이 죽이지 말아야 하리니, 이것이 세속에서 좋은 계이다. "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535)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537)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한 이후 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중략).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지 길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라 이름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모든 마을 모든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다녔는데, 노래로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를,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 짓는 옹기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

537)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의상, 화엄의 마루
551)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원효)

565) 두 번째 중국 행, 산동반도의 등주에 발을 디딘 의상은 생계를 꾸릴 탁발길에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난다. 선묘는 수려한 의상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 뜨거운 정을 품는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철석같다. 끝내 선묘는 의상의 불심으로 감동되고, 불법에 귀의하기로 한다.

568) 불도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이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법사란 말속에는 의상의 교조적 신앙태도가 함의된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577)
천축 길 하늘 너머 만첩 산인데
가련타 순례자들 힘써 오르네
외로운 배 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 돌아옴을 보지 못했네
(순례자를 위한 일연의 찬)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594) 그 때, 명주 근방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스님이 그들을 위해 계법을 설명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모시며 삼보에 정성을 다했다. 얼마 있다가 고성 해변에 셀 수 없이 많은 고기들이 죽은 채 떠올랐다. 백성들은 이것을 팔아다 먹을 것을 장만해 죽음을 면했다.

595) 무릇 미륵 신앙이란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동참하는 데서 이 신앙의 진수가 드러난다. 고성 해변의 고기가 그 전에 진표의 설법을 들었던 그 고기들일까? 다져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도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621) 한마디로 말한다면 '감통'편의 이야기들은 신라 사회가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 민간 대중들에게 얼마만큼 체화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21) 제 40대 애장왕 때였다.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거적대리고 몸을 덮고 밤을 지샜다.

623)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

627)
하늘에서 내린 소리 부처를 이루게 했네
손바닥을 줄로 꿰어 육신을 잊었으니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652)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살펴보자. 절에서 탑돌이를 해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죄악을 징벌하려 하자 스스로 대신했으며, 신이로운 처방을 전하여 사람을 구했고, 절을 세워 부처님의 계율을 가르쳤다. 이는 한갓 짐승이 인자한 성품을 가져서가 아니다. 아마도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방법이고, 김현이 탑돌이에 할 수 있는 한 온 마음을 다하는데 감동하여 적이 도움을 주려 했던 것일 따름이다. 그 때에 큰 도움을 받은 것이 마땅하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653) 효소왕 6년 정유년(697년)에 낙성회가 열렸다. 그런 말석에 남산의 비파암에 산다는 초라한 차림의 승려 한 사람이 있었다. 왕은 한편으로 언짢았으나, 그에게 공양을 베푸는 것도 자비심을 과시할 기회라 여겨, 한 자리 마련해 주었다. 자리가 파할 무렵, 왕은 내심 거만하게 다짐해 두었다. 짐짓 놀리는 목소리였다고, 일연이 적고 잇다.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 "
그러자 그 초라한 스님에게서 나온 놀라운 한마디.
"임금께서도 진신석가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

656)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660)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째 그러시오?"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

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은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경께 삼을 사표를 세울까?

피은(避隱)

숨어 사는 이의 멋
686)
장바닥에서는 어진 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니 속의 송곳도 한 번 드러나면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그르친 것이지
구름과 산이 깊지 않아서 아니라네.
(일연)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695)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에서 스님이 염송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받는다는군요. 저를 생각해 보니, 분명 쌓아 놓은 선행이 없어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 것 같아요. 이제 또 시주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더욱 힘들어지겠지요? 작지만 저희가 가진 밭을 법회에 시중해서, 다음 세상에 갚아주시길 바라는 게 어떨까요?"
어머니는 '좋다'하고, 밭을 점개에게 시주했다.

701) "부처님이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이 못하고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 (출가를 고민하는 진정에게 어머니가 한 말)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707)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711)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난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일연, 혼미 속의 출구
736)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에 맞는다든지 도록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


III. 내가 저자라면

삼국유사'는 우리의 고대사를 정리한 역사서이며, 승려에 의해 편찬된 불교문화사인 동시에 신화와 설화, 향가를 집대성한 이야기의 모음집이다. 이에 앞서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비교해 볼 때, '삼국사기'는 왕명에 의해 편찬된 정식 역사서였던 반면에,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에 의해 편찬된 개인 편찬 역사서였다. 이러한 두 역사서의 차이는 전체적인 형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중국 역사서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데 반해, '삼국유사'는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일연에 의해 자유롭게 재구성되고 재창조되었다.

'삼국유사'의 체계는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9편은 왕력(王曆),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왕력' 편은 삼국,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의 연대기이며, '기이' 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역사를 일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흥법' 이하의 나머지 편은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흥법(興法)' 이하의 편에서 중국의 승전(僧傳)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하여 삼국유사가 중국 승전의 체재를 따른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일연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재구성 된 부분이 더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역사서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왕력', '기이' 편이 책 전체에서 차지하는 분량 상으로 볼 때도 '삼국유사'가 중국 승전의 체재를 그대로 따랐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의 왕실의 역사, 불교의 역사, 민중의 역사 등을 가리지 않고 일연이 관심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수집하여 이를 성격에 따라 분류하고 형식 또한 그 나름대로 재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로서 왕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반면, 일연은 그 형식뿐만 아니라 각 편의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관점을 살려 자유롭고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유사'는 왕실 뿐 만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 민족 모두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만 아니라, 각 편마다 수록된 이야기의 종류 또한 신화와 설화, 심지어 향가까지도 아우르고 있다.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로서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맘껏 표현하고 있다.

일연은 사회에서 그동안 받아들여지던 역사서의 체재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체재를 다시 세웠다. 자신이 다루고 싶은 주제를 자신이 다루고 싶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분명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다. 그렇다면 분명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확실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역사를 끌어왔고, 신화를 끌어왔고, 설화를 끌어왔고, 향가를 끌어왔다. 이렇게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 생각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끌어다 쓰는 능력은 내가 본받고 싶은 점이기도 하다. 그것도 모자라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싶은 곳에는 곳곳에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표시했다. 나이 들어 한가한 여생을 보내며 소일거리로 쓴 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방대한 자료를 평생에 걸쳐 수집한 그의 정성과 노력만 생각해도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비교해 '삼국유사'가 가진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신화와 설화의 수록이다. 신화와 설화, 즉 대부분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안가는 이야기들의 수록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먼저 철저하게 유교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쓰여진 '삼국사기'와는 다른 역사서임을 강조한다. '삼국사기'와 다름은 곧 중국과 다름의 표현이요, 이는 곧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기이' 편의 첫 머리에 단군신화를 배치함으로써 시작부터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태생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순히 중국을 모시는 신하의 나라가 아니며, 하늘의 자식임을 내세운다. 3000명의 무리와 함께 태백산으로 내려온 환웅,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온 해모수 이들 모두 하늘의 자식이었다. 중국의 주변에서 숨죽이고 살던 나라들은 몽고에 자리를 뺏긴 중국을 보고서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고려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연은 '삼국유사'라는 책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안에 담아두었던 자기 자신과 민족의 존재감을 힘 있게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나에게 있어서는 '삼국유사'를 읽는 내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했던 부분이었다. 신화를 통해 일연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 우리에겐 우리 것이 있다." 였을 것이다. 사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리아니티(Coreanity)'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일연이 말하고 싶었던 '우리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셉 캠벨로부터 이미 신화에 대한 수업을 받았건만, 그것의 실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다소 아쉬웠던 부분이다. 중국과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우리가 그들과 다름을 당당히 드러냈음에도 우리의 무엇이 그들과 다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건 속내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은 일연의 탓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한 나의 탓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삼국유사는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불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역사서로서의 성격이 강한 '왕력', '기이' 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부분은 모두 불교문화사이다. 당시의 모든 역사와 문화를 불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였다. 승려의 신분인 일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엄연히 역사서라는 맥락에서 볼 때는 과연 이러한 구성이 적절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만의 역사와 민족적 자존감은 불교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일까?

책에 수록된 이야기 중 내가 꼽은 최고의 이야기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의 설화이다. 두 주인공의 이름이 무척이나 기괴하여 아직도 내 입에 붙진 않지만, 수행의 본질을 간파하고 현실적인 융통성을 발휘한 부득이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작게는 하루하루, 크게는 우리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을 잊고 살 때가 너무나 많은 듯하다.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 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 참고 : 온라인인문교육 사이트 http://www.artnstudy.com 에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의 저자 고운기님의 삼국유사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유료)

IP *.34.17.132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3.09 11:24:56 *.70.72.121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 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배타적 감정보다 이성적 수용이 느껴지는 글귀네요.
프로필 이미지
최지환
2008.03.09 12:08:19 *.34.17.132
변경연 지원자들의 훌륭한 서포터. 써니님.

감사합니다. ^^

직접 뵐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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