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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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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9일 21시 5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한 심정은 부끄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고, 조금은 알고 있다는 자만심이 있었는데, 실상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중, 고등학교 때 시험을 위한 암기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사대주의적 시각에 쓰였으며, 삼국유사는 자주적인 입장에서 쓰인 책이라는 얄팍한 지식 정도.

저자 고운기 교수는 지금은 작고하신 최철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한문공부 하러 다니던 민족문화주친회의에서 <삼국유사>를 만났고, 시 창작 교수직까지 버리면서 일본 게이오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가서 한•일 고시가 비교 연구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삼국유사>에 매달려 20여년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는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 3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지만 여전히 고전시가 연구에 매달려 있는 그는 앞으로는 경전 공부도 할 계획이라고 했다.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길 위의 삼국유사>, <일연을 묻는다> 책들을 잇달아 출간했다. 이러한 재구성들을 통해 <삼국유사>가 갖는 현재적 ‘의미’들을 끊임없이 묻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삼국유사연구회'조차 결성돼 있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며 엄청나게 많은 연구 논문과 자료들을 한데 모아 접근이 쉽도록 D/B화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사진작가 양진씨는 금속공학과 출신이라는 사진과는 익숙한 조우가 되지 않는 관계이지만, 대학 때부터 사람과 자연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주로 찍어 왔다고 한다. 책의 내용과 사진들을 읽어 나가다 보면, 흡사 고운기와 양진이라는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각 지방마다 숨겨져 있는 삼국 시대 이야기라는 보물을 찾아 떠나는 호기심 가득한 소년들의 장난끼 어린 모습 말이다.

“숭유억불책을 썼던 탓도 있지만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삼국유사>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민족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최남선 등을 중심으로 재조명과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나는 누구며 우리 민족은 누구이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삼국유사>는 훌륭한 지침서가 됩니다.”

최근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저자 고운기 교수의 삼국유사에 대한 생각의 일부다. 또한 삼국유사의 현재적 의미를 ‘민족의 자존에 염려’라고 밝히고 있다. 최근 한국어를 배우기 전에 먼저 영어를 접하는 교육환경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의견들이 부지불식간에 동의를 얻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저자의 민족 자존에 대한 염려는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 것 같다.

“마치 이미지즘의 시를 보는 것 같았어요. 범상한 봄 풍경을, 시인 쪽의 아무런 설명이나 개입 없이 그냥 그리면서도 그 안에 역사의 여명을 알리는 상징을 담은 솜씨가 놀라웠죠. 또한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쓰는 방식이 바로 현장을 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에 현장 답사는 필수적입니다.”

저자의 삼국유사를 읽는 것은 한 편의 아름다운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내가 한 명의 순례자가 되어 각 지방의 계절별 풍광들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그 지방에 얽힌 삼국시대의 설화와 신화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스라한 따뜻함과 정겨움이 있다. 실제 저자는 일연이 태어났던 경북 경산군 압량면부터 일연이 숨을 거두었던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까지 일연의 모든 발자취를 밟아가며 그를 되살려 냈다. 저자는 박제화될 수 밖에 없었던 일연이라는 인물에 현장 답사를 통해 깊은 호흡으로 숨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394p

과거 삼국시대 우리네 민족의 삶과 애환에 기록과 발견이라는 소명감을 가진 이들이 고운기와 양진라는 두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길 속에서 그들은 순례자와 같은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

고운기 교수가 1980년대 초 산 영인본 <삼국유사> 맨 앞장에 직접 적어 넣은 글귀다. 고운기 교수에게 <삼국유사>는 학문적 노력을 경주할 대상이었으며, 당신의 삶을 던질 모든 것이었다. 고운기 교수를 통해 우리나라의 ‘신화’가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그동안 서양 친구들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주눅들어 있었던 우리에게 민족적 자존심과 자부심을 마음껏 불어넣은 역작이 바로 <삼국유사>인 것이다. 그 거대한 민족적 뿌리를 찾는 작업에 일연과 고운기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삼국유사>는 그저 그런 사(事)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들어가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3p

이 땅의 첫 나라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 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유려한 한문으로 집필된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세월은 150년을 흘러야 했다. 12p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12p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인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16p

100일이 요즈음과 같은 숫자가 아니라 ‘온 날’로 보았을 때 서로 통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과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17p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21p

단군신화를 놓고 건국 신화인가 창세신화인가 따지는 일이 다소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굳이 창세 신화가 없어서 서운하기 때문은 아니다. 건국이냐 창세냐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관념의 소산이고, 그것은 특히 서양식 사고방식 아래서 그렇다. 21p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조차 몰랐던 것 같다. 23p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른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23p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는다. 24p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중국 쪽 역사서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그것을 일연 나름대로 정리해 크게 두 개의 제목을 써서 정리한 것인데, 일관성과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4p

고구려와 북방계

역시 <삼국사기>에서 인용되는 두 가지 삽화다. 앞선 삽화가 주몽의 뛰어난 지혜를 말하고 있다면, 뒤는 하늘의 도움까지 함께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한마디로 완벽히 갖춰진 조건이다.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자품들이 대체로 이 같은 유형으로 지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 44~45p

신라와 남방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앞서 환웅과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가 직접 왕이 된다든지 왕이 될 아들을 낳는 것으로 북방계 민족과 나라의 출발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55~56p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이를 무조신화라 한다. 66p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모ㄱ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78p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프로레슬링 선수를 무슨 민족적 영웅으로 만들었던 사실 자체가 이미 난센스였다. 완벽한 각본으로 설정된 보고 즐기는 오락거리로서 접근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김일 선수를 마치 안중근의사 같이 만들어 놓았다. 89p

이렇게 혼란스럽고 빈약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료가 미비한 탓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신라 초기의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어 있지 못함을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시기의 기록을 여기저기서 따와 한 줄로 꿰기란 위험한 일이다. 95p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100p

문득 그 정령은 먼 다른 나라로 갔다. 그런데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은 우리의 아리따운 정려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 년을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 102p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네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
“저는 신라의 신하요 왜나라의 신하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했을 따름이오. 어찌 감히 그대에게 말을 하리오.”
“이제 네가 나의 신하가 되었다고 했으면서 신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받아야 하리라. 만약 왜나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높은 벼슬을 상으로 내리리라.”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이냐?”
“신라의 신하이다.”
“어느 나라의 신하이냐?”
“신라의 신하이다.”114~115p

밤에 찾아오는 손님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쪽을 가리킨다. 120p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134p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137p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140p

진흥왕의 뜻은 순수했으나 이 제도가 자리를 잡는 데에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를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점이 눈에 띠지만, 기본적인 취지나 수련 방법은 원화와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불교가 스며들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연이 보이고자 했던 대목이 이것이다. 145p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럿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150~152p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 불교다. 152p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60~161p

김유신은 가야출신이다.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일제시대 때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그것은 곧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 169p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쪼개지기도 하고 오므라지기고 하니, 어쩐 일입니까?“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놀라 기뻐하며, 다섯 가지 색깔이 칠해진 비단이며 금과 옥으로 제사를 드렸다.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잘라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189p

권력의 끝

그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이,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196p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204~205p

<화랑세기>
신라 통일 후의 화랑들이 걸어갔던 비참한 말로인데, 세간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경우는 차라리 점잖은 은거이기에 무상한 세상의 인정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거니와, 한편에서는 그들이 지닌 재주를 파는 광대에 버금갈 예인이나, 급기야 귀족 부인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 남창이 되었다는 데에서, 우리들의 눈은 실상 당혹을 넘어 경악에 어지럽다. 205p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205p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했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212~213p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자주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꺽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6p


첫 성전환증 환자

<도솔가>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불러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미륵좌주 모셔 서 있어라 238p

월명사의 <제망매가>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울릴 일이 아니겠는가. 241~242p

충담사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충담사는 왕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어린 자식에 비유한다. 고대 왕권 국가였기에 나올 법한 비유였으나, 왕과 신하 곧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백성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부모처럼 자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미덥기만 하다.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빋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246~247p

왕이 되는 자

경문왕은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결코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67p

나라가 망하는 징조

무릇 세치 혀를 함부로 놀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인 이가 여기 무당 하나뿐일까? 딴에는 정직하고자 애쓴 보람 없이 비명횡사하고 말았지만, 어련히 그렇게 진행될 일에 토를 단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270p

<처용가>
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280p

지는 해 뜨는 해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287p

그러나 돌이켜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288p

이야기의 끝은 늘 풍성한 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품속의 꽃가지를 꺼내 아내로 맞는 마지막 줄은 기막하게 아름답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 주려는 일연의 붓 끝이 보이는 듯하다. 294p

그러나 정녕 아쉬움은 있다. 태자의 이 간절한 한마디, ‘천 년 사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실리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어떤 다른 논리 아닌 논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302p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307p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327p

<서동요>
선화공주님은
남 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밤에 알을 품고 간다.330p

신비의 왕조, 가야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3’를 꼽으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신화 – 향가 - 가락국기 이 세 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364p

그런데 왜 ‘가락국기’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364p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한국 쪽의 사료는 <삼국사기>에서처럼 빈약하기만 하다. 그러기에 일본의 학자들은 자기네 기록을 가지고 입맛에 맞게 해석한 것이다. P384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384p

불교로 보는 역사

흥법은 곧 흥국(興國)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물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흥법>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이것을 인연이 지닌 ‘불교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P386

다만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옮겨다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삼국유사>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 392p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394p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神)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398p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信佛)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러운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399p

순교의 흰 꽃 이차돈

그렇게 물꼬를 튼 처음 사건, 이차돈의 순고는 그래서 일연의 관심을 사기에 족했다. 순교는 어떤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순교 자체로 성스럽다. 거기에 신라 불교의 공인 그리고 한국불교의 본격적인 출발이라는 의미를 보탠다면 더 이상의 군더기 말이 필요하지 않다. 402p

일연이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찬에서 우리는 일연의 속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411p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게 아닐까? 454p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절>

내 마음 오늘
절에 가서 절을 한다
잎 한 장 한 장 만들어지는 동안
온기가 없어 차가운
오랜 그 옛 마룻바닥에 엎드려

일어난다 다시 쳐다본다
즐겁고 깨끗하고 늘 있는 나는
지난 봄이 사라진 숲 속에 가을의 마지막 시간 속에
덧없음만 항상하고 아름다워라

나 이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새싹의 아픔으로 돌아가라고
잎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동안에도
모든 것 향해 절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오늘
절하며 간다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化身),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56~458p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69p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무척 남는다 해도, 옷과 밥이 생각하는 대로 저절로 배부르고 따스함만 같지 못할 것이요.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하나,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千聖)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미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다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475p

날 저문 산길에
가는 곳마다 사방이 막혀 있네
소나무 대나무 숲은 그늘이 짙어 가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는 낯설기만 한데
자고 가기를 바라는 것은 길을 잃어서만 아니요
스님께 계율을 일러 주려 함이네
내 청을 들어만 주실 뿐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마오 478p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끊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현신인지도 모른다. 481p

일연의 찬 – 달달박박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렵히지 마오. 484p

일연의 찬 – 노힐부득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485p

일연이 쓴 찬시 속에서 이런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다.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486p

낙산사의 힘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끊는 솥단지 앞에서 따듯한 불을 쬐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끊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504p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근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 당신이나 나나 어찌 이다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뭇 새가 함께 주리기보다 차라리 외짝 난새가 마주볼 거울을 가지는 게 낫겠지요.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은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507p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그심을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508p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보이더라도 부분만 보인다. 그가 그린 한 부분만 보이고, 그가 한 말의 어느 한 부분만 들린다. 그래서 원효에 대해서는 가지가지 이야기가 난무한다.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530p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533p

하루는 스님이 거리에서 소리질러 노래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이것은 스님이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겠다는 말일 게야.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있을라구.”
때마침 요석궁에는 과부로 지내는 공주가 있었다. 임금은 궁궐 관리에게 원효를 찾아 데려오라 명하였다.
궁궐의 관리가 원효를 찾아 나섰다. 이미 원효는 남산에서 내려오다 문천교를 지나는데, 관리를 만나자 거짓으로 물 속에 떨어졌다. 위아래 옷이 몽땅 젖었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 입히고 빨아 말리게 하였는데, 그러자니 자고 가게 되었고, 이어 공주는 태기가 있었으며, 설총을 낳게 되었다. 534~535p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이런 원효였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잘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 아니었을까? 538p

한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었다. 545p

각승을 지어 처음 삼매의 요점을 열었고
뒤옹박 들고 춤추니 온 거리에 유행하였다네
달 밝은 요석궁 봄 잠은 옛일이니
문 닫힌 분황사 고영 자리만 비었구나 546p

의상, 화엄의 마루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라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551p

의상은“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 나지 않았다.”<송고승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552p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인류가 가장 아름다운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571p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572p

용문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에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 끝에 올라 노래부르리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 가리오 573p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576p

천축 길 하늘 너머 만첩 산인데
가련타 순례자들 힘써 오르네
외로운 배 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겄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 돌아옴을 보지 못했네. 580p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눈앞을 가리던 바위는 멀리 물러나
숯돌처럼 평평해지네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은 밝아지네
부처의 뼈로 만든 간자를 찾아내
정결한 곳에 모시고
정성을 다하려 하네 599p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원왕생가>

달아 이제
서방까지 가시거든
무량수 부처님 앞에
일러 주게 아뢰어 주시게
다짐 깊으신 세존 우러러
두 손 모두어 비옵나니
“원왕생, 왕생을 바랍니다”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 아뢰어 주시게
아, 이 몸 버려 두시고
마흔 여덟 가지
큰 소원 이루실까. 630p

일연의 찬
부러워라 우리 스님 좋은 인연 따라
혼이 되살아 옛 고향으로 돌아가는구나
저의 부모님 소저 안부 물으시거든
빨리 이 몸 위해 밭 한 무 돌려 주라 하소서. 635p

호랑이 처녀와 사랑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잎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644p

벼슬길에 나서는 일 매복에게 부끄럽더니
세 해를 살아 맹광을 부끄럽게 하였구나
도타운 정은 어디에 비길까
시냇가에 노니는 원앙새로다 648p

부부의 정 깊으나
산중에 둔 뜻 깊어만 가고
세월이 변하거든 백년가약 그 마음
두려웠네, 저버릴까봐. 649p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656p

향불 태우고 부처님 세우며 새로 그린 탱화도 보며
공양 받는 스님네들 옛 친구 부리고 떠들썩하네
이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비치기 더디었다네 663p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 670p

숨어 사는 이의 멋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慕情)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672p

장바닥에서는 어진 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지 속의 송곳도 한 번 드러나면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그르친 것이지
구름과 산이 깊지 않아서 아니라네. 686p

불교가 보는 효도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아니다. 나를 위한다고 출가를 못한다니. 그건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드리는 일이야.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으로 나를 모신들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 앞에서 옷과 밥을 빌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정말 내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701p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열어제치자
벗아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711p

깨달음의 더할 데 없는 경지, 영재의 「우적가」

제 마음의
모습이 볼 수 없는 것인데
일원조일 달이 난 것을 알고
지금은 수풀을 가고 있습니다.
다만 잘못 된 것은 강호님,
머물게 하신들 놀라겠습니까
병기를 마다하고
즐길 법일랑 듣고 있는데
아아, 조그마한 선업은
아직 턱도 없습니다. 720p

일연, 혼미 속의 출구

‘평소 꿈꾸어 오던 일’729p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에 맞는다든지 도록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 736p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는 국가의 변괴를 물리칠 연승으로 부름을 받을 만큼 도와 덕이 높은 승려였는데, 범어는 모르고 다만 향가를 지을 뿐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승려가 범어로 주문을 외우지 못함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경덕왕도 흔쾌히 받아들였으니, 두 사람이 취하는 이런 태도의 근저에는 신라 불교가 가진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다름 아닌 향가의 대표적인 시인에게서 보이는 이런 태도가 곧 향가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다.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있게 보았던 것이다.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인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물론 승려이기에 그가 보여 준 행적은 일반적인 경우의 충격적인 것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승려의 신분 안에서는 분명 예외적이었다. 그러기에 누카리야와 같은 학자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을 법한데, 이는 한마디로 사회사적 배경을 무시한 결론이다.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741p


3. 내가 저자라면

신화(神話)의 부활, 삼국유사

그리스 로마 신화,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이야기.
수많은 외국 판타지를 통해 우리들은 상상의 나래를 피면서 자신들의 꿈을 키워 왔다.
그렇다면, 우리들만의 신화는 없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삼국유사>이다.

"지난 20세기에 우리는 <삼국유사>가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최근 2006년 오마이뉴스에 실린 고운기 교수의 인터뷰 기사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삼국유사>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화나 설화가 가득하다.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왕검 이야기를 비롯하여 알에서 나온 삼국 시조의 탄생설화와 햇빛과 달빛을 살린 연오랑 세오녀, 선화공주에게 장가든 무왕, 몸을 바쳐 불교를 일으킨 이차돈, 신문왕이 받은 마법 같은 피리 등 끝이 없다. 더 나아가 고운기 교수는 민족적 자존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더 삼국유사에 힘을 싣고 있다.

"<삼국유사>는 중국에 없는 신화만 모았습니다. 일본만 하더라도 건국신화부터 중국 신화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서 이름만 바꿨지만 <삼국유사>는 중국 얘긴 안하겠다는 원칙을 만든 것 같습니다."(2006년 오마이뉴스 인터뷰)

맞다. 일연은 고려 무신정권의 혼란스러움과 몽고와의 전쟁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등하던 한반도에 ‘민족적 자존심’과 ‘민중적 자부심’을 다시금 곧추 세울 수 있었던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실험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이며, 이번 고운기 교수의 작업은 13세기와 다를바 없는 작금의 시기에 새로운 2차 작업의 복원이라 할 수 있다.

영웅의 부활, 원효(元曉)

내 인생의 좌우명 중에 하나가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원효에 배경신화나 설화를 전혀 알지 못했다. 또한 그가 철저하게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파계를 실천할 정도의 혁명적 구도자였던 사실도 몰랐다. 이번 <삼국유사>를 통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왔다.

이 책을 만든 일연에게 원효라는 인물이 신화 속 영웅 처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모든 설화와 신화의 모든 결론이 원효로 종결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삼국유사를 수많은 신화이야기의 엮음로 비유한다면, 이 신화이야기의 최고의 영웅은 바로 원효 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것을 반증한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이것은 스님이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겠다는 말일 게야.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있을라구.”때마침 요석궁에는 과부로 지내는 공주가 있었다. 임금은 궁궐 관리에게 원효를 찾아 데려오라 명하였다. 궁궐의 관리가 원효를 찾아 나섰다. 이미 원효는 남산에서 내려오다 문천교를 지나는데, 관리를 만나자 거짓으로 물 속에 떨어졌다. 위아래 옷이 몽땅 젖었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 입히고 빨아 말리게 하였는데, 그러자니 자고 가게 되었고, 이어 공주는 태기가 있었으며, 설총을 낳게 되었다. 534~535p

일연에게 원효가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었듯이, 이러한 일연의 생각을 저자 고운기 또한 동의하는 것 같다.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이런 원효였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잘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 아니었을까? 538p

화려한 영웅의 부활, 원효를 이야기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알기 쉬운 해설과 문체, 저자의 정성과 애정

먼저 이 책은 나에게 어렵게만 느껴졌던 역사의 발자취들을 잠시나마 더듬어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우리에게도 설익게만 알고 있었던 우리의 신화(神話)에 대한 지평을 넓혀 주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있고, 무엇을 관심 있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도와준 저자의 애정과 정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한 이 책의 최대한 장점과 업적은 최대한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원문들을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쉬운 단어와 해석을 통해 이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손자들을 위해 치마 속 옛날 이야기들을 도란 도란 꺼내주시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삼국유사 원문을 잠깐 보았는 데, 나와 같은 일반인에게 범접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라는 고대서를 친숙하게 느끼게 한 것 만으로도 고운기와 양진의 그 소명을 다했으리라.


아쉬웠던 점

책을 읽는 동안 고즈넉하게 여행을 한다는 기분이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느낌이었다. 반면에 일정 이상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400컷의 실제 사진 때문에 지루함은 덜했지만, 책의 방대한 분량 때문인지 많은 인내심을 요했다. 물론 이러한 지루함은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를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나 자신에 더 많은 문제가 있었겠지만.

둘째, 저자 고운기 교수도 언급하였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인색하리만치 언급이 적었다. 삼국유사 원문에 충실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별도의 면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이야기, 노래에 대해 다른 자료를 인용해서라도 소개 주었다면 더욱더 흥미롭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은 후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야기가 정말 꿈 속 같이 잔상에 남아있다. 보살이었던 여인네의 시(詩)도, 스님들의 화답 시도, 일연의 찬시도 참 멋떨어진다. 깨달음의 여정을 이렇게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풀어헤친 신화(神話)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IP *.111.3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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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9 23:02:15 *.70.72.121
<일연의 찬 &#8211; 노힐부득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485p>

취할 것과 버릴 것이 분명해 짐이 득불이 아이겠는지요. 하여 사회를 섬겨야 함보다 진정한 개인이 존중됨이 아름답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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