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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9일 22시 29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불광불급不狂不及. 고운기와 삼국유사를 말하고자 할 때 이만큼 적절한 말도 찾기 어렵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은 한자의 음운으로도 한글의 음운으로도 절묘한 맛을 선사한다. 조용히 그 말을 입속에서 되뇌어 보면 입안에 글의 맛이 살아서 번지는 듯하다. 그 번지는 맛의 느낌처럼 고운기와 삼국유사의 인연은 깊은 여운을 준다.

조셉 캠벨은 평생 신화를 천복으로 삼고 좇았다. 고운기는 신화같은 설화를 담은 삼국유사를 그의 천복으로 삼은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십년이나 삼국유사라는 주제에 천착할 리가 없지 않은가. 1980년대초 영인본 삼국유사를 본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다. ‘내 학문은 이 책에서 시작해 이 책으로 끝날 것이다.’
그를 삼국유사로 끌어들인 것은 삼국유사 책속에 있던 한편의 시詩라고 한다.
鴨錄春深渚草鮮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白沙鷗鷺等閑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忽驚柔櫓一聲遠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何處漁舟客到烟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시는 372년 전진의 승려 순도가, 374년 진의 승려 아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이야기를 적고나서 일연이 쓴 찬讚이다. 시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려 어느 철에 어디를 통해서 왔는지를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운기는 이 시 한편으로 단박에 삼국유사에 매료되었다. 한시에 대한 지식과 감성이 부족한 탓에 고운기가 왜 이 시에 흠뻑 취했는지 알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 학문은 이 책에서 시작해 이 책으로 끝날 것이다’는 그의 생각은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삼국유사를 주제로 저술한 5권의 책을 보면 그가 젊은 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를 가슴에 품어 온 이십여년이라는 시간은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들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삼국유사를 쉽게 풀어낸 ‘삼국유사’.
일연의 생애와 삼국유사를 연계시킨 ‘일연’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삼국유사 해제의 대표적 저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삼국유사’.
삼국유사의 현장을 직접 발로 밟으면 쓴 ‘길 위의 삼국유사’가 그것이다.
저서의 면면을 보면 삼국유사 연구의 한 매듭을 지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고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 세권의 시집이 있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1961년 전남 보성生. 고운기는 보성의 차 맛처럼 깊이 우러나는 저작들로 향 깊은 길을 걸어왔다. 비슷한 시기를 살아 온 그의 길을 훑어보면 부러움이 앞선다. 그가 삼국유사를 보고 ‘내 학문은 이 책에서 시작해 이 책으로 끝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 나는 그러한 책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1983년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을 시절, 나도 문학에 빠져 있었지만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그가 학문의 길을 갔을 때 나는 나름대로 선택한 길을 걸었지만 형태는 달랐다. 그가 끊임없이 시어를 다듬고 삼국유사에 천착하며 하나의 획을 만들어낼 때 나는 현상에 급급했다. 같은 시대를 걸어 뚜렷한 흔적을 남긴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일연에 대하여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1206년(희종 2년)에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지방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일연一然.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 1214년 전라도 무량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1219년 출가했다.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었고 圓徑冲照의 호를 받았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79세 되던 해,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인각사로 내려가 그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한다. 1289년 입적. 제자에게 북을 치게 하고 의자에 앉아 다른 승려와 태연하게 선문답을 하다 입적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어록語錄 2권, 偈頌雜著 3권, 조도祖圖 2권 등 180권이 넘는다고 한다.

일연은 국사에까지 봉해졌던 고승이었지만 선승으로서보다 삼국유사를 지은 사가史家로 더 많이 기억된다. 삼국유사는 그가 젊은 시절부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책이다. 책의 저술시기는 만년인 1281년으로 추정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기는 무신정변 이후 고려사회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던 때였다.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 그리고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삼국유사보다 150년 앞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토대로 하는 정치사관 이었다. 유교적 정치사관은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사회모순에 대해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려시대의 사서에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는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건국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있었다. 고려사회는 송나라의 멸망을 보면서 기존 관념의 붕괴와 함께 역사관의 변혁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과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정신사관적 역사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연은 이러한 역사의식 속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 마음에 들어온 글귀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에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이야기가 책의 어는 한 구석에 밀려 있다면 첫머리에 실린 것과 의미가 다르다. 물론 단군 신화의 경우, 내용으로 보아 마땅히 처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 기준’으 누구의 생각인가? 그것이 맨 처음이 되어야 한다고 본 그 관점과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던가? 설령 처음 이야기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실로는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 다른 부분부터 시작했다가 뒤 어디쯤에서 슬며시 끼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연은 그런 편법을 쓰지 않았다. [11]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다마 거기에도 무한정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으로 하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클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12]

환웅이 먹는 것, 생활하는 것 등에서 어떤 의식을 정해 놓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했는데, 곰은 묵묵히 이행한 데 반해 호랑이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刻苦勉勵)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17]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단군조선(일연은 고조선이라 썼지만), 위만조선 그리고 이씨조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까지, 이렇듯 다양하므로 조선의 앞이나 뒤에 관형어를 붙여야 구분이 가능하다. [19]

중국의 사고방식을 따르자니 삼국사기는 한반도 역사를 한나라가 세어진 한참 후인 기원전 57년에 와서야 떨렁 시작한다. 신라의 건국이다. 그 이전의 일들은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삼국사기는 바로 그 첫 부분에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울 무렵,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눠져 살고 있었다”고 적었다. 일연을 아쉽게 한 대목은 바로 거기였다. 김부식조차 언급한 그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23]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24]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29]

본격저인 신라 이야기에 앞서 이런 내용을 붙인 것은 무슨 의도에서였을까? 아무래도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북방계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보이고자 해서인 것 같다. 비록 중국계 사람들이 진한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신라의 지배계층이 아니었다. 그저 한가한 동네 노인들로나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말자는 것이다. [54]

우리는 앞서 환웅과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가 직접 왕이 된다든지 왕이 될 아들을 낳는 것으로 북방계 민족과 나라의 출발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56]

대체적으로 남쪽 지방의 산신 신앙의 구조가 이와 비슷하다고 할진대, 신라 왕조의 출발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명확해진다.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불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68]

일연은 신라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 “서라벌 또 서벌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사라 또 사로라고도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서벌이 나중에 서울로 바뀌어 나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9]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78]

머나 먼 이역, 아니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올라 와 입신양명한 탈해. 우리느 여기서 탈해가 비록 왕위에 오르고 그 후손들이 석(昔)씨 성으로 몇 차례 더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기존의 세력에 둘러싸여 늘 불안해 했던 것 같은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권력의 자리란 차지하기도 이어 나가기도 어려운 것인가. 탈해의 고민이 깊었음은 분명하다. [86]

프로레슬링은 재미로 본다. 그렇지 않으면 저 1970년대 우리 나라처럼 어느 날 프로레슬링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역사가 프로레슬링 이라는 말은 아니다. 역사는 그런 쇼나 각본으로 비유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은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된다. [92]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가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100]

문득 그 정령은 먼 다른 나라로 갔다. 그런데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령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서롸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 년을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 [102]

물론 박제상의 장렬한 죽음에다 양쪽 모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에 큰 차이는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은 신라와 일본의 오랜 갈등 속엣 빚어진 가장 비극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이다.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받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110]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116]

왕이면서도 세간의 여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정도로 마무리될 수 없다. 남모르게 밤에 찾아든 귀신이 사람과 관계를 가져 아들을 낳았다. 위의威儀로 친다면 분명 나라를 건설한 영웅들의 탄생담에서 한 발 물러선 느낌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인간적인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랜 역사를 두고 이런저런 기구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던 크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점을 삼는 것 같다. [126]

여기까지 읽어보면, 정치에 무능하고 음란에 빠져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진지왕의 초상이 조금은 색다르게 그려진다. 마치 진지왕이라는, 현실에서는 실패한 왕을 다른 역할로 복권시켜주고 있는 느낌이 든다. 불명예스럽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진지왕을 데려다 그 혼의 힘으로 특이한 아들을 낳게 하고, 이렇게 해서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못다 이룬 일을 보상하게 했던 것일까?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134]

삼국시대 선진 문명을 상징할 불교 관계의 이런 기사에서 우리는 신라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게 된다. 신라는 6세기가 끝나갈 때쯤에야 제대로 된 유학승 한 명을 겨우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진국이 어떻게 삼국을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로 자리할 수 있었을까. 이제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통해 이 의문을 해결하기로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140]

그러나 그 같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진자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에 씌운 아상我相은 그토록 완고한 법이다. 진자가 식은 땀을 흘리며 돌아왔다는 심정을 이해할 만 하다. [147]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들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풀 베고 소 먹인 s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것이 아니다. [184]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을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189]

그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삼국유사에서 토사구팽의 첫 비극적 주인공은 뜻밖에도 김유신이다. [196]

김춘추와 김유신 두 사람을 축으로 하는 이 기간은 역시 신라의 전성시대였다. 이웃한 당나라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과, 일본이 나라시대라고 하는 그들의 첫 문화시대를 열었던 것과 시대를 같이 한다. 신라는 안정된 구도 속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 전해주었다.그래서였을까. 일본의 한 사학자는 이 시기를 신라의 중대中代라고 명명했다. [204]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205]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배경설화로도 유명한 이야기다. 득오가 새로운 자리에 전출되어 임지에 가서 일하는데, 옛 상관으로서 죽지랑이 면회를 갔던 일 정도. 거기서 좀더 나간다면 비뚤어진 관리가 사람 속을 썩인 일 정도로 보면 그만일 수 있는 일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하 노년이 숨어 있다. [210]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신라의 진골은 대체로 진흥왕부터 시작된다고도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출발은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에 오르면서부터다. 삼국 통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진골은 양과 질에서 많은 발전을 한다. 전쟁을 수행하다 보면 거기 공로자가 나오게 마련이고, 승리한 다음에 전리품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219]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6]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양의 동화를 들으면서 컸다. 거기에 따르는 구구한 해석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니 여기서 거들일은 아니고, 설화가 지닌 우연한 일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고자 하는 자리도 아니어서, 다만 우리 이야기가 해석의 여지에서 더 넓은데 어지 그다지 철저히 외면당했는가 그 아쉬움만 표명해 두기로 하자. [267]

그럴 징조를 수없이 보여 주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권력자가 애꿎은 목숨만 앗아갈때,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271]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287]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 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 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었다. 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도 일본열도라는 말도 모를 것이다. [315]

‘신당서;의 제220권에 나오는 ’동이전‘ 일본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이 내용을 ’신라본기‘ 문무왕조 10년에 전재해 놓고 있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최초 사용을 보여 주는 의미있는 대목이다.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 [325]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讖謠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놓기 십상이었다. [327]

이런 종류의 노래를, 어린 아이들이 불렀다는 데에서 동요,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목적한 생황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상정하고 있다는 데에서 참요 또는 예언요라고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먼저 등장하는 동요로 참요라고 할 수 있다. [331]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곳은 완충지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가야의 역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일연의 손에 의해 거둬들여진 이 짧은 기록 하나가 전부이다. [369]

그러면 이 땅에 가장 먼저 온 승려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이다. 이어서 아도가 오는데, 일연은 흥법편의 ‘순도가 고구려에 오다’조에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를 인용해 순도와 아도를 소개하고 있다. [386]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왜 그랬는지 그 기준은 삼국사기와 비슷할 터이나, 한 가지 추가한다면 불교역사주의적 의식이 작용했다는 점도 앞서 지적했다.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느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2]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417]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444]

불성은 대체로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선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때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 무엇이 값어치 있는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469]

나는 이 대목이 놀라웠다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없을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 장면들이다. [470]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471]

간밤 계를 더럽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부득의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473]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530]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533]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537]

지난 밤 잘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551]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것만 일까 싶었다.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하보다 저 세상의 부귀를 더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지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그렇지만 거기라고 사람 사는 세상인 바에야 왜 호사를 바라지 않고 타툼이 없겠는가 의문스러워 해본 것이다. [569]

나는 거기서 참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우리가 모진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벼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571]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574]

혜통은 다름 아닌 밀교 승려다. 우리는 밀교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과 경외로움을 가지고 있지만, 법통을 달리할 뿐 불승에서 다르지 않고, 어떤 면에서 그들이 민간의 생활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이다. 운명적으로 인생의 신고辛苦를 겪었거나, 일부러라도 겪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무상의 경지를 추구해 가자는 데 더 철저하다면 철저한 것이 밀교다. [604]

그런 사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저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한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 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회의 고갱이였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623]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 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627]

그러기에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장이다. 그리고 그는 엄벙덩벙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광덕은 치밀하고 정성스레 예불하여 목적한 바를 이룬 점에서 의상을 닮았다면, 엄장은 실수 투성이의 원효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 더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629]

그러나 역시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는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찬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 모습이다. [633]

아마도 이 조의 본문과 찬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절의 재산은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636]

절이 산에 만들어진 것은 이 나라 불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있었던 일이다. 특히 조선왕조 이후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사람이 사는 마을의 절들은 자꾸 없어지고 산에만 남게되어, 이제는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처럼 보인다. 산에 절을 두니 그 산을 지키는 산령도 모신다. 그런 까닭으로 절과 호랑이는 한 살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637]

사찰의 경우, 그것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나눠 보지만, 고려시대까지 두 가지 사찰은 비슷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조선조 이후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이 확립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도회지에 산재한 절들이 차례로 문을 닫는가하면, 전란을 겪으면서 불탄다든지 그 피해가 산지가람보다 더 심한데다,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라도 중건에 손을 대지 못했다. 산지가람과 평지가람의 공존에서 산지가람 일변도로, 이것은 불교가 사회의 전면에 있느냐 배경으로 밀리느냐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671]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慕情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672]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회연이라 지어 밝음과 어둠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字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고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과정에는 숨어있다. [728]


● 내가 저자라면

책에 대하여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책들을 보면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원문에 충실한 책이 그 첫 번째이고, 원문을 풀어서 옮기되 해제 없이 내용만 쉽게 풀어서 쓴 책이 두 번째이며, 시대적 배경 등을 곁들여 해설서로 쓴 책이 세 번째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책이다. 단군신화에 대한 저자의 의미 부여로 시작하는 책은 단순히 설화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그 의지를 입증하듯 저자는 삼국유사의 구성 형태에 담긴 의미부터 역사적 배경, 개인적 소회까지 실타래처럼 풀어나가며 삼국유사가 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인가를 설명한다.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의 두 배를 삼국유사에 매달린 저자의 내공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특히 흥법 부분부터 시작되는 한국 불교에 대한 저자의 해박함과 사료의 충실함은 감탄을 자아낸다. 문장마다 빈틈없이 박혀있는 세세한 역사적 사실들은 저자의 노고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책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원전과 저자의 설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구성되어 있다. 사건이나 설화에 관한 사건의 배경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이해가 쉽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유적을 예로 들며 역사의 흐름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저자는 또 일연이 살던 고려시대로 날아가 그 당시의 심정을 상상력으로 짐작해보기도 한다. 마치 삼국유사에 대한 입체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책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크나 큰 미덕은 사진이다. 400장에 달하는 사진들은 어느 사진이라 할 것 없이 글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다. 글로 느끼기 어려운 감흥과 여운까지 선사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는 사진작가 양진의 말은 현실이 되어 독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쉬운 점

* 750페이지에 걸쳐 삼국유사를 말하고 있는 책에서 삼국유사에 실린 원문의 맛을 느끼기 어렵다. 책의 다른 부분을 일부 줄이거나 서너권으로 내더라도 원문을 실어주었으면 삼국유사를 맛본다는 느낌이 더 강렬했을 것 같다. 원문은 한문 그대로의 문장을 실어주고 해설을 곁들이면 한문을 짚어가며 한구절씩 읽는 맛이 좋았을 듯 하다.

* 삼국유사 원전의 순서를 따라 책을 이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읽는 사람으로서는 시대적 순서에 혼란을 겪었다. 대부분 편년체의 역사적 지식을 명료하게 갖고 있지 못하므로 단순히 어느 왕 어느 시대라는 표현은 혼란을 가져온다. 책의 시작이나 중간에 연대기순으로 왕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기 한눈에 볼 수 있는 순서를 게재했으면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흥법 으로 넘어가면 그런 현상은 더 심해진다. 불교의 역사를 인물이나 사건에 따라 대별할수 있는 시기별 분류표가 필요하다.

* 설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있는 책이다 보니 설화와 역사가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만일 다른 방식의 삼국유사를 다시 집필한다면 설화나 역사 중 하나에 집중해 풀어가는 방식이 필요해 보인다. 삼국유사의 설화를 보여주고 그 내용을 완전한 이야기 중심으로만 풀어가거나, 설화를 중심으로 볼 때 현실은 어떻게 연결되어 왔는지를 역사 중심으로만 파헤치는 방식을 제안해 본다.

* 저자가 서문에서 미리 상상력을 가미 했다고 밝혔고, 그 최종적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했지만 상상의 표현이 지나쳐 보인다. 120p에 밝힌 일연의 ‘그릇’에 대한 생각은 남들과 다른 저자의 깊은 사랑 때문으로 보인다. 또 177p에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에 생에 대한 소회의 표현은 지나친 상상력이 불편해 보인다. 355p의 ‘기고만장’이란 표현이나, 363p의 견훤에 대한 표현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견훤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들게 한다. 조금씩 묻어나 보이는 감정을 감출 필요가 있다.

IP *.212.22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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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10 00:28:11 *.70.72.121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는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찬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 모습이다. [633]>

담백한 리뷰가 눈길을 끄네요. 정갈하게 앉아 덖음 차를 우려 마시는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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