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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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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0일 01시 08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 글 고운기, 사진 양진, 현암사, 2006



ㅣ. 저자 소개


이 책의 저자 고운기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손문

벌써 20년의 세월을 ‘삼국유사’와 보냈다. 손문이 던진 ‘혁명가’의 화두를 들고 고민한 세월이었다. 손문이 나그네로 떠돌 때 광동성 궁벽진 곳의 한 후원자 집에 며칠 머물며 남긴 글 한 편, 그것은 안위(安危)와 감고(甘苦)를 친구처럼 맞이하고 보내는 혁명가의 초탈함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어 헤집고 들어온 삼국유사라는 광활한 대지 안에는 무수한 말들이 쏟아졌다. 거기에 다시 말 하나를 보태는 일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그는 여전히 고민한다. 하면서도 칼과 도마를 챙겨 요리 준비를 한다. 백성의 피와 살이 되는 음식을 뒷 사람들에게 남겨주려는 진정한 쉐프의 심정으로.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면 ‘삼국유사’는 방금 따낸 갖가지 신선한 과일과 채소다. 필요한 건 훌륭한 요리사다. 여전히 막막하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20년 한 우물만 판 그의 성실함은 잰 손놀림에 숨김없이 녹아난다. 안위와 감고의 세월을 거쳐 넉넉해진 그의 가슴은 손님들의 마음까지 품어 안을 만큼 훈훈하다. 그의 요리의 진가는 다른 요리사가 요리한 같은 메뉴를 먹어본 후에야 더 드러난다. 그는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먹고 난 이후 입안에 남는 음식의 잔향(殘香)마저 ‘기획’할 수 있는 뛰어난 요리사인 것이다.

그런 요리사 때문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음식들이 우리 입안의 진미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메뉴에는 뻐젓이 있지만, 선뜻 선택할 수 없는 요리를 일부러 먹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 온다면 그것은 단연코 주방장의 색다른 시도와, 비교할 수 없는 솜씨 때문이리라.


고운기의 특별 메뉴 ‘삼국유사’, 쿠킹 팁스(Cooking Tips)

1.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낯선 재료들의 상관 관계에 주목한다. 상관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그가 동원하는 수단은 상상력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은 철저한 탐색과 연구 후에 동원되는 근거 있는 상상력이다. 당연히 음식의 탁월한 맛은 이 상상력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2. 원 재료의 조목 수는 약 140여 개, 고운기는 이들을 요리 순서에 따라 다시 40개로 통합하고 한 코스 안에 두 메인으로 나누어 요리한다. 20개는 전반 메뉴 ‘기이’의 재료가 되고 나머지 20개는 후반 메뉴 ‘흥법-효선’의 재료가 된다.

3. 더 맛있는 요리를 위해 다른 요리들의 레시피를 참고한다. 그가 참고하는 요리는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일연보다 150년을 앞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간 당대의 요리사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 승려 요리사 연합회’가 간행한 ‘고승전, 속고승전, 송고승전’ 같은 요리책 시리즈다. 이 탁월한 레시피들을 통해 고운기는 많은 영감을 얻었고 그 영감을 자신의 요리에 반영했다. 다른 하나는 그 동안 동일한 요리를 시도했던 현 시대 앞서 간 요리사들의 레시피다. 이 요리사들은 중국, 일본, 국내의 내놓으라 하는(그러나 2% 부족한) 여러 요리사들을 포괄한다.

4. 본(本) 재료를 제공한 당대의 탁월한 요리사 일연을 분해한다. 일연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삼국유사’라는 음식에 일가를 이룰 수 없다. 10세기까지 이 땅의 백성들의 피와 살이 되어준 각종 먹거리들을 13세기 자신의 시대에 새로이 재구성하여 요리사로서 자신 만의 영역을 구축한 일연, 그에 대한 이해와 그가 한 작업에 대한 이해는 곧 그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당대 사회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요리사로서 고운기 정체성의 핵심이다.

위의 네 가지를 어우르는 고운기의 통시적, 미시적 탐구 덕분에, 창고 먼지 속에 그대로 방기 되었을 한국 고유의 레시피 ‘삼국유사’는 만인이 보다 쉽게 즐기는 멋진 음식으로, 또 한국의 위대한 문화 유산으로 거듭났다(born again).


삼국유사 원저자 일연스님

일연이란 이름은 그의 만년에 쓰인 것이다. 그 는 두 번 개명하여 일생 세 가지의 이름을 가졌다. 처음 이름은 견명(見明)이었고 승려가 된 이후 처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밝음(見)을 어둠(晦)에 대비시킨 것이다. 이런 대비는 이름 다음에 자(字)를 지을 때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만년에는 이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본다는 의미로 일(一)자를 이름에 넣어 일연이라 하였다. 밝음은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그의 개명에 숨어 있다. 그것은 곧 구도자로서의 그의 삶의 궤적이었다.

승려란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다.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사회는 그런 그의 떠돌이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 저기 옮겨다니는 중에 남다른 일을 하나 했다. 머물던 곳마다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은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불교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늘날 민속학자들 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었다. 그의 붓은 막힘 없이 달려 삼국시대 밑바닥 인생들과 구불구불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 인생을 낱낱이 핥고 보듬었다.

그는 큰 강이다.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는 법이다.


사진작가 양진

고운기의 대학 후배. 대학 시절, 인생공부를 한다며 강의실보다 더 자주 들르던 술집에서 고운기를 만났다. 돈 벌이가 되지 않을 신통찮은 애물단지(삼국유사)를 인생의 동반자로 끌어안겠다는 선배의 선택을 앞에 두고 함께 고민했고, 누구보다 학자로서 진지하게 정체성에 의문을 달던 고운기 가까이에 있었다. 결국 양진은 사진작가로 고운기의 꿈에 동선한다.

십 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둘다 아이 둘의 아버지가 되었고, 비슷하게 맞닥들인 힘든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삼국유사를 손에서 놓치 않았다. 이제 삼국유사는 고운기에게뿐 아니라 양진에게도 ‘깊은 밤 외딴 산 속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 같은 존재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가 가장 감사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사진들이다. 그 사진들은 홀로도 아름답지만, 고운기의 이야기 속에서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그 사진들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사진을 찍은 작가의 마음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양진은 누구보다 삼국유사 속에 깊이 들어가 있으며, 그런 애정은 그의 사진에 그대로 녹아있다. 이 책의 사진은 이야기의 보조 수단이 아니다. 고운기의 이야기와 사진은 등가의 가치로 서로를 빛낸다. 사진 밑에 달려있는 멋진 해설은 양진의 것이다.

그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별빛과 노란 가로등 불빛에 처연히 빛나던 분황사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있는, 온갖 번뇌에도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지켜내는 의상의 순결한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노의 손 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낭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긴 지귀의 사랑…
이쯤 되면 사진을 찍는 이와 찍히는 대상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의상의 몇 편 안 되는 글을 평한 일연의 말에 그는 이 책에서의 자신의 사진에 대한 염원을 담는다. ‘솥 안의 국 맛을 책임지는 고기 한 점’ 같기를!

하나 더: 이 책 619 쪽에는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한 사진 한 점이 실려 있다. 다람쥐 사진이다. 그 사진에 달아둔 글에서 ‘그’가 느껴진다.

“(경주)원원사 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람쥐 한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를) 따라왔다. 이 책에 실리고 싶었나 보다. 삼국유사 어디에도 다람쥐 얘기는 나오지 않지만 내가 다시 그리는 ‘삼국유사’이니 다람쥐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삼국유사의 탄생

고려 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 편찬에 관심을 가졌다. 이 당시 문자생활의 변화가 일어났고 지식인들에게 한자는 더 이상 낯선 문자가 아니었다. 문자에 대한 자신감은 저술의 촉진제다. 첫 번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중국에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고 한문이라는 문자유입과 함께 그 문화도 유입되었다.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사마천의 ‘사기’에 기대어 이름마저 그대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태어났다. 그리고 100여 년이 흐르고, 고려사회는 문신 귀족들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무신 세력들의 반란으로 무인 집권시대로 들어선다. 통치의 커다란 세계관 변화가 수반되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당을 거쳐 번성하던 한족의 송나라가 멸망하고 변방의 오랑캐 원나라가 중국을 장악하자 고려정권의 사대주의도 크게 흔들렸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도 함께 힘을 잃었다.

삼국유사는 이 두 가지의 세계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禪宗)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먼저 이루고 사회로 퍼져나갔다.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있었다. 이 같은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 때 일연이 ‘삼국유사’ 첫 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삼국사기는 단군조선부터 여러 부족 국가를 무시하고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만의 역사를 충실히 썼다. 김부식과 관찬 사학자들의 관심은 고대왕권국가로서의 틀을 분명히 갖춘 세 나라에 있었고, 왕권국가의 기준은 율령반포에 있었다. 그들의 시각 안에는 ‘본질’이 빠져 있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있게 세워두긴 했지만 역사 기술의 중요한 관점이어야 할 ‘나, 우리’는 실종되었다. 그것이 삼국사기와 유사의 가장 큰 차이다. 삼국사기의 사는 史이고 삼국유사의 사는 事라는 것도 그런 차이를 유의미하게 담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왕력(王暦),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隠), 효선(孝善),이렇게 9편으로 되어있다. 이는 연대기로서의 ‘왕력’, 준역사서로서의 ‘기이’,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로 세 편으로 나뉜다.


ll. 무찔러오는 글귀


들어가며

2. 우리가 이 책을 실제대로 올바로 알고 있는지, 그 세계에 한번쯤은 깊이 빠져 본 경험이 있는지, 문제는 거기 있다.

3.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史와 事에 있다는 점.

5.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기이(紀異)

35. 한반도에 건설된 나라들의 구성원이 딱히 어느 한 곳 출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한민족이라 하지만 사실 여러 경로를 통해 여러 부족들이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음을 보여 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49. 비류와 온조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렀다. 지금의 서울이다.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기대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에 큰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만큼 하늘이 내린 요새와 땅이 주는 이득이 큰 곳을 얻기 어렵지요.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52. (주몽의 셋째 아들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둔) 백제가 북방계의 흐름을 타고 건국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66. 무당의 탄생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서 유래한다.

68. 신라불교가 토착적인 신앙과 만나는 장면이 많다. 그것은 왕실과 국가의 안정에 기여하는 호국불교로 발전한다.

78. (신라 4대왕 탈해가 호공의 집을 꾀로 차지하는 이야기, 고운기는 해석하기를) 달리 생각하면 이 만큼 인간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 문물의 발달이 신화시대를 거둬내고, 실질적인 힘으로 정복과 지배를 영위해나가는 시기가 한반도에 도래한 셈이다.

92. (군사정부의 유치한 계산:민족의 영웅 김일의 박치기, 일종의 쇼인 프로레슬링 이야기에 붙여)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이런 주장들이 대체로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는다는 그럴듯하면서 거창한 명제 아래 시작된다….민족 감정으로 흥분을 유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있는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역사는 쇼나 각본으로 비교될 수 없다. 우리가 아득한 역사를 말하면서 민족적 감정으로 어깨에 힘을 주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역사는 그래선 안된다.

107.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은 각 지역마다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111.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내물왕의 아들 미해(미사흔)를 구하러 일본에 스파이로 가기를간청하는 박제상의 말)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

116.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나라 신라가 일본의 적대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117-118 삼국유사 ‘기이’ 편은 왕의 재위 순대로 엮였다. 그러면서 왕대에 일어나 일이나 특이한 사람을 하나 소개하고, 그것이 제목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왕대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일연의 특이한 기술의 방법이다.

134.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 현실에서는 실패한 왕을 다른 역할로 복권시켜 주는 느낌이 든다. 불명예스럽게 왕의 자리를 쫒겨난 진지왕을 데려다 그 혼으로 아들을 낳아,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신이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일을 보상하게 한 것일까.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134. 대체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조화(造化)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귀신을 마음대로 부린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쥔 듯한 이 이야기(도화녀와 비형랑)가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띄고 나타나 이 땅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139. (오래도록 중국 유학을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한 원광법사에게 산신이 나타나)
“자리(自利)만 행하고 이타(利他)의 공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요,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오. 어찌 중국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얻어 이 나라의 미혹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는거요?’

141. 신라의 후진성을 인정하고 그 극복을 처음으로 꾀한 왕은 아무래도 법흥황(514-539)일 것이다.

144.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로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49. 힌트는 어딘가 주어지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있다.

150.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으로 나갈 수 있었다…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되어 정착하였으므로 생경한 외래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151. (원광이 세운 화랑의 세속오계)
1.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2.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3.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4.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5.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것을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184. (죽음을 앞두고 화장을 명하며 쓴 문무왕의 조서)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배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만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189.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면 어쩌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며,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보배’인지도 모른다.

196. (토사구팽(兎死狗烹), 그 비정한 원칙) 토사구팽은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끗이다.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부상한 세월로 돌려 보냈다.

205.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신라통일의 8할은 이 화랑들의 몫이다.

270.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읽기도 아니다.

277.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권력다툼의 희생양으로 죽은 장보고) 인재들이 죽어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286. 삼국사기가 지키려는 합리적 사고방식의 한 단면을 읽게 되는데, 기이한 사건을 한층 극적으로 전하려는 일연이 태도에 더 매력을 느낀다. 살아있는 것 같은 실감 말이다.

286.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되고 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일연의) 간절한 충정이 보인다.

287.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가장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288. 돌이켜보아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했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도 못했고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히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294. 이야기의 끝은 늘 풍성한 법이다...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주려는 일연의 붓끝이 보이는 듯 하다.

301. (어려서 들은 송춘희의 마의태자란 노래 때문에) 지금도 승려들을 볼 때면 먼저 떠오르는 아련한 감정의 저변에는 이 노래가 심어준 선입견이 작용한다.

320-321. 6세기에 들어서서 즉위한 일본의 왕들은 줄줄이 백제 왕실과 한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여러 문헌과 자료를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되면 우리들의 마음은 놀라움과 착잡함이 겹친다. 그토록 가까웠나, 그런데 그토록 남이 되었나?

325-26.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일본이라는 국호로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이후 일본 왕실의 백제 지우기는 근질기게 계속되었다…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 그들의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369. 가야는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곳은 완충지대였다. 신라와 백제가 가야의 존재로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흥법(興法)

386.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392-393.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을 찬미하는 일연의 시 한 수)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나르네 /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394. 순례자의 길은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398. (불발탄으로 끝난 아도의 신라 전도, 그것은 완고한 신라에 뿌린 첫 불교의 씨앗이었다. 이에 대한 일연의 시)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神) 재주도 많아 /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402. 신라의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404-405 (‘촉향분예불결사문”에서 인용한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는데, 어찌 죄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지.”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411.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일연의 시)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탑상(塔像)

417. 황룡사는 예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신라의 한 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이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의 상상하는 세계 한 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황룡사 터에 한 번쯤 서서 그 분지에 지상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417. (황룡사 여행에서 돌아온 고운기 후배의 편지에서)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434. 황룡사 장륙존상과 구층탑,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옥대, 그것은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다.

444.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454.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닐까.

456-457.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化身),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에게 절은 그랬다.

475.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하는 말에서)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497.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다.

504.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邯鄲之夢),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끊는 솥단지 앞에서 따듯한 불을 쬐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사는 온갖 영고성쇠(榮枯盛衰)가 한솥밥 끊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507. (조신의 꿈에서, 연을 맺고 40년을 산 아내의 마지막 말)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芝蘭)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근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508. (인각사 앞 일연의 시비)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 그심을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의해(義解)

512. 원효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518.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의 꿈에 나타나 신이 하는 말)
자리(自利)만 행하고 이타(利他)의 공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요.

527. (운무사의 이름을 두고)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雲水)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535. (원효의 노래)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궁궐의 관리가 원효를 찾아 나섰다. 이미 원효는 남산에서 내려오다 문천교를 지나는데, 관리를 만나자 거짓으로 물 속에 떨어졌다. 위아래 옷이 몽땅 젖었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 입히고 빨아 말리게 하였는데, 그러자니 자고 가게 되었고, 이어 공주는 태기가 있었으며, 설총(薛聰)을 낳게 되었다.

537.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지 길(道)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겼다.

538. 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매이지 않ㅇ느 인간 원효였다.

548. …시인의 심상은 비관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숙명으로 수놓아진다.

551. (의상과 당나라에 가던 길을 돌아서며 원효가 하는 말)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라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574. (‘의해’편 ‘인도로 간 여러 스님들’ 조를 읽고 부르는 순례자의 노래)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井口)에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 끝에 올라 노래부르리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 가리오 573p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진정 돌아갈 곳이 아니겠는가.

신주(神呪)

604. 평범한 속에서도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깨달은 무상의 존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감통(感通)

633. (원앙생가를 지은 광덕보다)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는우리와 닮아 있다. 실수와 무지 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644. (김현과 처녀 호랑이와의 사랑에 대한 일연의 시)

꽃다운 잎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656.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663. (계빈의 일화를 소개하며 일연이 지은 시)

향불 태우고 부처님 세우며 새로 그린 탱화도 보며
공양 받는 스님네들 옛 친구 부리고 떠들썩하네
이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비치기 더디었다네

진신은 달빛처럼 이 땅에 찾아왔다. 그러나 정토에의 참된 희구는 없고, 형식과 의례에만 치우친 무리들 뿐이니 그들은 밝은 달빛을 가리우는 구름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

피은(避隠)

672. 세상과의 절연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아웅다웅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에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겐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686. (‘피은’편 ‘연회가 이름을 감추다’에 붙인 일연의 찬)

장바닥에서는 어진 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지 속의 송곳도 한 번 드러나면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그르친 것이지
구름과 산이 깊지 않아서 아니라네.

숨되 숨는 것이 아니요, 드러나되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변증법적 피은의 논리란 그런 것이다.

효선(孝善)

690.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그 자체이다.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704.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없이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이 오직 삼국유사 밖에 없기 때문이다…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일연, 혼미 속의 출구

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인 승려였다. 그가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이다.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lll. 내가 저자라면


국사를 공부했지만 사건 연대와 왕계(王系)만 줄줄 외던 암기식 공부가 어디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 있으랴. 책의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다, 등장하는 인물과 국가들의 연대표가 없이는 통시적인 조망이 절대 불가능하다. 급기야 딸 아이의 고등학교 역사 부도를 앞에 놓고 책과 함께 읽어나가니 답답함이 조금씩 해갈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왜 우리가 이 시대에 삼국유사를 읽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고운기는 그 답을 이렇게 정리해두었다.
1. 삼국유사에서 한민족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단군을 우리 조상으로 받아들이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멀리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까지 바로 우리 민족의 경계이며,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한민족이라 말한 첫 번째 책이 ‘삼국유사’다. . 실로 한민족의 정체는 여기서 잡혀졌다.

2. 잘나고 못나고 할 것 없이 골고루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두루두루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저 이름없는 민중이라고 우리는 크게 외치기만 하는데, 일연 노스님은 그것을 가만히 보여준다. 누구를 깎아 내림 없이.

일연의 그만한 마음 씀과 넓은 눈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그는 역사 속에서 피었다 사라진 수많은 목숨들을 보았을 것이고, 그들을 건사하여 생령(生靈)의 길로 인도하고픈 구도자의 마음을 책에 담았을 것이다.

나 역시 고운기의 따뜻한 시선을 여기 저기 발견한다. 노승의 마음 씀은 이 책에 담긴 고운기의 마음 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마음이 된다. ‘읽는 동안 나는, 동굴 속의 곰이 되어 보기도 하고, 매에게 쫓겨 피를 흘리며 제 새끼를 품고서 두려운 눈을 휘둥대는 꿩이거나 그것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한 지방의 관리가 되어 보기도 하고, 있는 식량을 다 털어 주먹밥 여섯 덩이 채워주고 구도의 밤길로 내 쫓는 비원의 어머니이거나 그 아들이 되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 그리운 우리 조상의 얼굴들이다.


상상으로의 초대, 멋진 여행 가이드 고운기

개천절 노래 첫 구절(정인보 작시)에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가사가 나온다. 일연은 단군조선을 책 머리에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이런 행위는 새로운 질서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 싹트던 당대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지만 여전히 일연의 선각적 혜안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주체적 역사관을 드러냄에 있어 ‘상징’을 사용했다. 상징으로 포장된 단군조선의 이야기는 당시의 규범과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상징은 그의 저작 전체를 걸쳐 나타난다. 여기에 일연의 탁월함이 있다. 그러나 그가 상징으로 그려낸 역사를 올바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독자다. 그런데 문제는 상당한 사전지식 없이는 ‘삼국유사’라는 바다의 심연 속을 헤엄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운기의 역할이 있다. 이미 그는 그 바다 속을 고독하고 정직하게 20년 세월 동안 멈추지 않고 헤엄쳐 왔다. 삼국유사로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로 그 보다 훌륭한 가이드는 없다. 그의 상상력과 해설에 기대어 우리는 심연의 바다를 시행착오 없이 건널 수 있다. 이제 상상은 책을 읽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메타포다

고운기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1983년 일찍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인이다. 시인 학자라고 할 수 있는 그는 단순한 신화로 치부되어온 우리 역사 속의 설화나 민담, 이야기들이 일종의 메타포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은유를 풀어내는 그의 해박한 상상력을 따라 가다 보면 700 페이지가 주는 위압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여행은 즐거워진다. 우리의 고대사 안에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와 신화들이 역사를 은유하는 상징들로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그렇다, 이건 재 발견이다) 하고 놀라는 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일례로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된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17p)


이 책의 저자는 일연이 아니다

이 책은 일연의 ‘삼국유사’를 단순히 해제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삼국유사에서 재료를 가져다 완전히 새로 요리한 고운기의 책이다. 그렇기에 그는 일연이라는 이름을 저자 란에 두지 않고, ‘고운기 지음’ 라고 당당히 내세웠다. 읽으면서 가장 감탄하는 것은 그의 한우물 파기 정신이 가져다 준 작업의 결과였다. 이 책에서 우리들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삼국유사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일연의 ‘삼국유사’를 자신의 통찰 안에서 완전히 재구성한 고운기라는 작가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설화를 하나의 흥미로운 주제(예: 첫 성전환증 환자/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밤에 찾아오는 손님..)로 묶어 한 편의 드라마를 엮듯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역량 때문에 이 두꺼운 책은 비교적 잘 읽힌다. 그가 이야기의 얼개를 짜나가는 건 이런 식이다.

먼저 타이틀은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그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보러 간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으로 시작한다. 그 여주인공은 문희라는 여배우다. 문희는 어린 그에게 ‘아름다운 여자’의 첫 이미지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이름은 삼국유사 속에서 만난 동명의 여인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영화배우 문희가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인 문희와 자꾸만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야흐로 삼국통일의 숨막히는 결전이 벌어지는 현장을 가며, 나는 뜻밖의 이 질문에 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신라 통일의 두 축인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그 둘을 묶어주는 제 3의 인물 문희, 급기야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시대적 함의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해 나간다.


학문에서 균형이라는 것

고운기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 고증의 과정 속에서 편협된 해석을 보이는 어떤학자들의 불미한 의도를 잡아낼 때 조차도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가 존경한 노스님 일연이 자기 책 안의 수많은 민초들에게 보낸 시선이 그러하듯 그 역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한결 같다.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않으며 언제나 한 걸음 물러나 종합적으로 조망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가능한 자료들은 다 수집하고 분석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되, 여전히 확증할 수 없는 사례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자기의 생각을 내어 놓는다. 이 때 인용문과 자기 기술(記述)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해가는 고운기의 솜씨는 참으로 돋보인다. 인생을 바라보고 포용하는 그의 마음도 널찍하고 푸근하다. 굳이 역사학자라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그는 그 어느 학자보다 학자답다. 그의 마음이 넉넉한 건 시(詩) 덕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시심(詩心)은 그와 일연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시심이 있는 한 그는 언제나 학자로서의 ‘초심’을 이어갈 것이다.


욕심이 생기는 독자라면

고운기가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하고 묶어 낸 덕분에, 작은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요리의 전체적인 맛을 즐기고픈 독자라면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이다. 그러나 음식에 쓰인 재료들의 특성을 일일이 알고, 분석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얻은 영감들을 가지고 조금 더 길을 가보는 것이 좋겠다. 워낙 다루는 내용이 방대해서 고운기 식의 외로운 공부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언제나 ‘문면과 행간을 넘나드는 상상력’은 필수니 꼭 챙겨가도록.


일연 원저의 미흡한 점-아쉬운 백제, 고구려 역사

일연은 삼국의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대해 인색하다. 삼국사기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지식인들은 삼국의 적자로 신라만 인정했을 뿐, 두 나라를 부속품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연고로 역사학자들은 사금을 모으듯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여기저기 모아 윤곽을 그려보려 하지만 당시를 재현하기엔 역부족이다.
일연이 좀더 충분한 기술을 해주었더라면 고구려와 관련해서는 대륙 중국과의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백제에 관련해서는 이웃 일본과의 교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고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더 커진다.


이 글을 마치며

이 글을 마치며 나는 한 작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분명 학자이지만 학자라는 이름에 가두기엔 뭔가 부족함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작가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는 이 책의 저자 고운기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고운기란 작가를 몰랐다. 마지막 페이지를 내려 놓는 순간, 내 가슴을 묵직히 누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작가에 대한 존경이다.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것, 그것은 인간승리이다.

그는 누구보다 연구를 성실히 한 학자이다. 책을 읽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가 이 책에서 풀어놓는 방대한 지식은 일 이년 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양으로만 봐도 그는 대단한 학자지만, 그것 만이 아니다. 그는 참으로 올곧은 역사정신을 가진 사람이고, 그것은 사람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가슴에 담긴 것이 사랑이기에 그는 시인처럼 이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책을 내려놓으며 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감동은 고운기라는 한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저자라면’ 꼭지에 이 책의 어떤 것을 재단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나는 이 책을 재단할 식견이 없을 뿐 더러, 이 책을 읽는 내내 그에게 감동한 것이 전부였으니까. 말로만 수없이 듣던 삼국유사라는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그 덕분이다.

한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은 그 우물에서 길어 올린 생수로 많은 사람의 영혼을 시원하게 하고자 함이다. 혼미의 13세기 속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승려 일연과 고운기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서 자꾸 오버랩되었다. 고운기는 글 면면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조국 사랑에 감읍한다. 나는 오늘, 이 책 갈피마다 새겨진 고운기의 조국사랑에 감읍한다. 책을 읽다 보니 고운기와 일연은 하나다. 그것이 이 책의 정점이다. 작가의 존재가 참으로 귀하다.


정리해두고 싶은 것들

내가 좋아하는 삼국유사의 이야기 세 편

‘감통’편 착한 사마리아인 정수 스님

‘감통’이란 용어는 중국의 고승전에서 따왔다. 그러나 승려들이나 불교신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데서 기본적으로는 ‘의해’ 편과 비슷하다. 감통 편의 이야기들은 신라 사회에 불교가 전래된 후 그것이 민간 대중들에게 얼마나 체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름 없이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불교를 매개로 감동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특히 정수 스님의 이야기는 신라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이다.
40대 애장왕 때다. 눈이 많이 온 어느 겨울 저물 녘에 절로 돌아오는 중이던 황룡사 승려 정수는 아이를 낳고 언 채 죽어가는 거지 여자를 만난다.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있다가 숨이 돌아오자 제 옷을 벗어 덮어주고 저는 벌거벗은 채 절로 돌아와 거적대기로 몸을 덮고 밤을 지샌다.
이 대목에서 캠벨의 영웅이 생각나는 건 매우 자연스럽다. 켐벨 종교의 종착지는 신과 나의 일원성, 이것이 나아가 세계와 나의 일원성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나와 타자가 하나인 것을 깨닫는 것, 즉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이다. 그에게 예수나 부처는 영생의 진리를 깨닫고 기꺼이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참여한 영웅들이다. 장수 스님은 캠벨 속의 한 영웅이다. 신라의 불교가 이론과 철학을 넘어 실천적으로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잘 보여준다. 여분의 옷 한 벌도 없고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도 없으면서 입은 옷을 몽땅 벗어주는 이런 사람들이 신라를 지탱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효선’ 편 진정스님의 일화

일연의 평생의 화두는 19살 아직 꽃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어머니였다. 이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向念)이 삼국유사에는 여기저기 묻혀있다. 여기 진정스님은 일연의 초상화다. 이 일화를 읽을 때 고운기는 저자인 일연을 겹쳐 떠올렸다고 한다.
진정은 장가들 형편도 못 되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지만 출가해 높은 도의 경지에 오르고픈 소망이 있다. 어느 날, 한 승려가 쇠붙이를 구하러 왔다. 어머니는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부러진 솥 하나를 기꺼이 시주하였다.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근심하며 어머니는 이 일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진정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옹기로 밥을 지어먹으면 된다고 위로하였다. 어머니의 불심이 깊음을 알게 된 진정은 조심스럽게 ‘효도가 끝나면 출가하고픈’ 그의 뜻을 밝힌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응은 뜻밖에도 ‘내 걱정은 말고 당장 출가를 하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식량을 탈탈 털어 주먹밥 일곱덩이를 싸주며, 아들의 출가를 거듭 재촉한다. 진정은 이를 어기지 못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열심히 수행하여 의상대사 10대 제자가 된다.
일연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서울에서의 국사(國師)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평생을 외롭게 해 드린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곁에 두고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일연의 이런 마음은 이 외에도 장춘과 그의 어머니 보개의 이야기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탑상’ 편 노힐부득와 달달박박

부득과 박박이 미타불과 미륵불을 구하며 함께 왕생하는 이야기다. 이 둘은 친구로 본래 아내를 두고 있었다가 속세의 인연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간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밤 아리따운 한 낭자가 산중의 박박 처소를 찾는다. 박박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낭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득의 처소를 찾는다. 부득은 머뭇거리며 여자를 처소로 들인다. 밤이 깊어 여자에게 산기가 있자, 이 난처한 경우에도 정성스레 시중을 든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지극해서’ 이 모든 일을 행한다. 낭자는 스스로 현현하여 자신이 관음보살임을 밝히고 부득의 대보리를 돕는다. 간밤에 계를 더렵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주려 부득의 처소에 들른 박박은 득도한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다.
‘나는 가린 것이 있어’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 사이의 간극이 보인다. 그것은 실로 미미하지만 건너기 힘든 것이다.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된다.

이 둘을 대비해 쓴 일연의 시가 절묘해 여기 소개해 본다.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노힐부득을 두고 쓴 시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운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밥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 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인지,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일연의 고민은 그가 첨가한 이런 찬양의 글이나 인용문, 시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삼국유사는 이렇듯 일연의 시들로 인해 완성되는 책은 아닐런지.


신화의 세계적 보편성

삼국유사에 소개되는 신화 중에는 캠벨 책에 소개된 신화나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서양 신화와 유사한 것이 많다. 그 예의 일부를 소개하면,

오줌싸기와 짝 찾기

1.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_갑자기 산 개울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 넘쳤다. 천왕봉 꼭대기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짝이 될 인연을 만나려 오줌을 눈 것이었다.

2. 김유신의 동생으로 문희는 언니 보희의 꿈을 산다. 그 꿈은 서쪽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서울 성안을 가득 채웠다는 내용이다. 그 꿈을 산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다.

3. 고려의 국조(國祖)인 보육의 둘째 딸 진의도 언니에게서 오줌 꿈을 비단 치마를 주고 산다. 산꼭대기에서 오줌을 눴는데 온 세상이 넘쳤다는 꿈이다. 그 꿈 덕에 진의는 천하를 돌아다니던 당나라 황제와 연이 닿고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신라 경문왕 이야기. 경문왕은 왕 위에 오른 후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같았다. 황후와 궁인들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두건 만드는 기술자만 알았다. 그는 죽을 무렵 도림사 대나무 숲에 들어가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그 후로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리자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러자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 하고 들렸다.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우리가 아는 서양의 동화와 전체적인 구조가 똑같다. 서양 동화의 이발사가 두건 만드는 기술자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거타지 이야기(성경의 요나 이야기)

문성왕 때 막내 양원이 50명의 병사를 뽑아 당나라 사신으로 가는 길에 뱃길을 막는 백제의 해적과 맞닥뜨린다. 섬 안의 신의 연못에 제를 지내고 활 잘 쏘는 자 한 사람을 두고 가면 무사히 순풍에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 일관은 말한다. 제비뽑기(나무 간자에 병사 50인의 이름을 쓰고 물속에 던져 가라앉는 자를 뽑기)로 거타지(왕건의 할아버지)를 뽑아 놓고, 이들은 무사히 항해한다. 배를 타고 가던 일행이 풍랑을 만나자 일종의 제비뽑기로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구약의 요나 이야기와 흡사하다.

알에서 태어나는 아이

하백의 딸 유화가 해모수와 관계를 하여 낳은 알에서 태어난 주몽, 다스릴 왕을 세우자는 공론이 일 때 나정 곁에서 발견한 자주색 알에서 깨어난 혁거세, 계룡의 허리에서 난 알에서 태어나 혁거세의 아내가 된 알영부인, 완하국 함달와의 부인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탈해…이렇듯 알에서 태어나는 아이에 대한 설화는 그 수가 의외로 많다.
인간의 아이가 아닌 알에서 태어나는 것의 상징은, '신성'이다. 하늘의 힘을 빌어 이 세상에 온 아이, 그것은 국가의 기원을 신탁으로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표현이다.

손순의 효심, 아브라함의 이삭

흥덕왕 때, 모량의 손순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함께 가난한 살림에 어머니 공양에 정성을 다한다. 손순에게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매번 할머니 음식을 뺏어먹으니 곤란히 여겨 아이를 묻어 어머니 배를 부르게 하기로 결정한다. 아이를 업고 산으로 가서 묻으려 할 때, 판 땅에서 돌 종(鐘)이 나왔다. 그 종을 예사롭지 않게 여겨 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져온다. 신묘한 그 종소리는 대궐까지 들린다. 그의 효심이 임금에게 알려지고 손순의 효심을 기특히 여긴 임금은 손순에게 집 한 채와 매년 벼 50석의 상을 내린다. 이삭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예비된 양이 있었던 구약의 ‘아브라함의 이삭’ 이야기와 흡사하다.

그 외에도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이야기와 같이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신화들이 우리 역사 안에 많다는 건, '인간 믿음에 관한 한 인류는공통의 영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캠벨의 주장에 설득력을 제공한다.


흥미있는 설화들에 대하여

고주몽 신화: 영웅의 일생

하늘님 해모수는 다섯 마리의 용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고구려의 원조인 북부여를 세우고 왕이 된다. 그를 이어 동부여로 자릴 옮겨 부루가 왕에 오르고, 해모수가 관계한 유화라는 여인이 낳은 알에서 주몽이 태어난다. 부루를 이어 그의 아들 금와가 왕에 오른다. 금와의 일곱 아들 중 큰 아들 대소는 예사롭지 않은 주몽을 경계하여 해코지를 하려한다. 주몽의 영웅의 일생이 시작된다. 캠벨에서와 같이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며 성장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지만 타고난 능력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연오랑과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88p-)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
그를 태워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여겨 이내 왕으로 삼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히 여긴 세오는 바다에 나가 그를 찾았다.
그의 신발이 벗겨져 있는 것을 보고 바위에 오르니 그 바위 역시 그녀를 태우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다시 놀라워하며 왕에게 바치니,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왕은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이 때 신라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다.
사신에게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켜서 된 일이다. 그러니 왕비가 짠 이 가는 비단을 가지고 하늘에 제를 올리면 될 것이다.”
그 말에 따라 제를 지낸 다음에야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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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느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그대로 지켰을 그들에게는 고대인이 가졌던 사유방식이 있었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가 한반도가 본격적인 역사시대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위치한 설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사유방식이 이 설화에 어떻게 투사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해와 달이 빛을 잃은 것은 일식이나 월식 같은 자연현상이 아니다. 그들에게 해와 달은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소용없듯이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 없게 된다. 그러나 ‘눈 뜬 소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빛이 있다고 다 보는 건 아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들이 해와 달의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신화에서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金現)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연오랑과 세오녀에 이르러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연에게 원효 대사는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한다.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고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원효도 그런 사람이다.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 것은 ‘의해’ 편 원효전기의 제목이다. ‘원효불기(元曉不羈)’, 그 뜻이 바로 ‘원효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이다. 고승들의 삶을 다룬 ‘의해’ 편에는 14편이 실려있는데 모든 제목에 일연의 재치와 통찰이 번뜩인다.
일연은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세 스님에게 수식어를 하나씩 붙여준다. 의상은 법사(法師), 자장은 율사(律師), 원효는 성사(聖師)다. 법사는 화엄을 전한 분, 율사는 계율을 전한 분, 그렇다면 성사는? 얽매이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에 오른 분이라는 최고의 칭찬으로 들린다.
일연에게 원효는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다. 현실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에서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아니 그를 굳이 불교의 테두리에 가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원효는 요석 공주를 겨우 사흘 사랑했지만 그것은 천년 사랑으로 기억된다. 그들의 사랑은 업(업)이 되지 않고 도(도)가 된 사랑이다. 원효는 파계했으되 파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에 집착하여 거기에 자기만의 이기적인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크고 진실한 여자의 사랑을 경험하고 경전 밖, 세상 속으로 내려갈 힘을 얻은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불교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그러므로 그의 파계는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동시에 극복하는 초월의 단계다. 그 부정 다음에 원효는 원효 아닌 원효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무애, 일심의 원효였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세상으로 들어간 원효를 처음으로 가장 잘 바라본 이가 일연이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의 향가들과 일연의 자존심

향가란 향찰(鄕札)로 표기된 정형시가다.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전기까지 창작되었다. 중국시가에 대비하여 우리 나라 고유의 시가를 지칭하기도 하며, 신라가요 혹은 신라시가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현재 신라 향가의 전모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옥 같은 14수의 향가가 일연에 의해 살아남았다. 삼국유사의 14수 향가는 우리 고대 시가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그것이 갖는 문화, 역사적 가치는 대단하다. 당시 전해지는 더 많은 한시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외면하고 일연이 굳이 향찰, 곧 우리 표기법에 의한 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문이라는 고급언어를 택하지 않고 굳이 우리식 차자표기법으로 시를 지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표기수단은 외연적 현상이다. 그 안에 내포된 은밀한 논리가 있게 마련이다.

신라는 중국의 문물을 삼국 중에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했다. 외래 불교에 종속됨 없이 재래신앙과의 조화를 통해 신라만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향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발전해간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요, 14수를 소개하는 일연의 가슴 속에 깔려있는 건 다름아닌 당당한 자존심이다. 향가를 두고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표현한 일연에겐 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식견이 있었고 이런 애착이 뛰어난 향가들을 삼국유사에 수록한 연유이리라.

향가의 작가는 화랑이거나 화랑 출신의 승려, 또는 승려가 압도적이다. 서동가의 서동, 천수대비가의 희명, 헌화가의 노인 정도가 예외다. 신라시대 시를 지을 수 있는 대표적인 그룹이 바로 화랑과 승려였다. 시는 현세에 머물면서 현세에 머물지 않는 초월성을 지닌다. 신라시대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화랑이고, 승려(대표적인 작가가 충담과 월명사)였다. 신라 향가는 불교적인 사상이나 정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사실상 개인이 부르는 곡진한 노래이고, 그래서 신라인의 민족적 정서가 잘 담겨있다.

여기 일연이 삼국유사에 소개한 향가 14수(헌화가, 모죽지랑가, 도솔가, 안민가, 처용가, 서동요, 혜성가, 제망매가, 도천수대비가, 찬기파랑가, 풍요, 원왕생가, 원가, 우적가)를 차례대로 소개해 본다.

1. 모죽지랑가(212-213pp): 제32대 효소왕(692∼702) 때 낭도인 득오가 화랑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8구체 향가이다. 향찰로 된 가사의 원문이 ‘삼국유사’ 권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실려 전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 이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 눈 돌릴 사이 /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해설: 가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른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 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 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해 갈 뿐이다.

2. 헌화가(226p) :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에 실려 전한다.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그의 부인인 수로가 바닷가의 천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 피어 있는 철쭉꽃을 탐내었으나 꽃이 험한 바위 위에 있으므로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소를 몰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부인의 이 말을 듣고 기꺼이 올라가 꽃을 꺾어다 바치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하는데,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자줏빛 바위 가에 /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지만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따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얻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3. 도솔가(238p) :760년(경덕왕 19) 4월 초하루, 해가 둘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므로, 왕명에 따라 연승으로 뽑힌 월명사가 산화공양을 하면서 이 노래를 지어 부르자 괴변이 곧 사라졌다는 유래가 삼국유사 권5에 전한다. 도솔은 미륵을 지칭한 말로서, 미래불로서의 미륵불을 모시는 단을 모아놓고 이 노래를 불러 미륵불을 맞이하려고 한 것이다. 떨기 꽃을 통하여 미륵불을 모시겠다는 내용의 전형적인 찬불가이다.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불러 /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이 시키는대로 / 미륵좌주 모셔 서 있어라

해가 둘 나타났다 사라진 사건의 사실과 상징을 따지기 전, 이 도솔가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승려인 월명사가 인도식 염불을 외지 않고 향가로 제를 올렸다는 것은 신라 불교의 주체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호국 불교가 토착 신앙인 미륵신앙과 긴밀히 만나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

4. 제망매가(241p): 월명사가 죽은 여동생을 위하여 제를 지내면서 지어 바친 노래로 서정시가로서 신라 향가 최고의 명편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시인내면의 속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생사의 갈림길 /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 ‘나는 갑니다’ 말도 /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 도 닦아 기다리리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라 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이 아닌가. 마지막, 아, 감탄사를 길게 뺀 후 흩어진 감정을 추스리는 그 반전, 이는 향가라는 시 형식이 가진 특장(特長)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5. 안민가( 246-247pp) : 삼국유사 권2에 실려 전한다. 765년(경덕왕 23) 3월 3일 왕이 귀정문에 올라 신하들에게 거리에 나가 훌륭한 스님을 한 분 모셔오라 하였다. 왕은 그가 ‘찬기파랑가’를 지은 스님임을 알고 ‘안민가’를 지으라 하였다. 이에 충담사가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기꺼이 여겨 왕사에 봉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안민가는 유교 사상이 짙은 노래이다.

임금은 아버지요 /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 한다면 / 나라는 태평하리니

왕과 신하 곧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고 부모처럼 자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미덥기만 하다. 구불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한 나라의 안위를 위해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이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6. 처용가(280-281pp):879년(헌강왕 5) 처용이 지은 노래로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에 실려 전한다. 용의 아들인 처용이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벼슬을 하는데, 어느날 밤 자기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역신이 물러갔다고 한다.

서울의 밝은 달밤 / 밤늦도록 노닐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 둘은 누구인가 /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이 시에는 일연의 기술 의도가 보인다. 헌강왕 때는 사치가 극심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걸까, 에둘러 꾸짖은 걸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준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묘미다. 어쨌든 역신은 물러갔고, 처용의 힘을 믿는 민간에서는 처용부적으로 악귀를 물리쳤다. 한 사나이의 희생으로 그 뒤 사람들이 입은 덕이 크다.

7. 서동요(330p): 백제의 서동(백제 무왕)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민요 형식의 노래이다. 이두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가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실려 있다. 무왕이 어릴 때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머리를 깎고 중처럼 차려 신라 서울 경주에 와서 마(薯)로 만든 과자 서여를 가지고 성 안의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며 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인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공주를 귀양 보내게 된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선화 공주님은 / 남 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 밤에 알을 품고 간다

8. 천수대비가(458p): 삼국유사 권3 ‘분황사천수대비’에 이두문(吏讀文)으로 실려 있다.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살던 희명이란 여자의 아들이 난 지 5년 만에 눈이 멀었다. 희명은 분황사 천수관음 앞에서 아이와 이 노래를 간절히 불렀다. 부르자 아이가 눈을 떴다. 향가를 영험한 것으로 신성시하던 당시의 예를 볼 수 있다. 분황사는 원효가 생애를 마감한 절이다.

무릎이 헐도록 / 두 손바닥 모아 / 천수관음 앞에
빌고 빌어 두노라 / 일 천개 손 일 천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 둘 없는 내라 / 한 개사 적이 헐어 주시려는가
아, 나에게 끼치신다면 / 어디에 쓸 자비라고 큰고

9. 원왕생가(630p) : 작자 광덕의 깊은 미타 신앙을 읊은 축도의 노래로 경건과 엄숙미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 권5 ‘광덕과 엄장’에 원문과 유래가 실려 전한다.
광덕이 죽은 뒤에 친구인 중 엄장이 광덕의 아내에게 동침을 요구하였으나 그녀는 광덕을 나무랐다. 이 시는 첫 줄부터 달에게 의탁한 광덕의 간절한 소망과 수행하는 자신에 대한 한없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매력적인 것은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엄장이다. 실수의 순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회한과 눈물로 뉘우친 엄장은 원효 스님에게 달려가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가르침을 물었다고 한다.

달아 이제 / 서방까지 가시거든 / 무량수 부처님 앞에 / 일러 주게, 아뢰어 주시게
다짐 깊으신 세존 우러러 / 두 손 모두어 비옵나니/ ‘원왕생, 왕생을 바랍니다.’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 아뢰어 주시게
아, 이 몸 버려두시고 / 마흔 여덟가지 / 큰 소원 이루실까

10. 찬기파랑가(711p) : 경덕왕을 감동시켰던 향가. 이 시의 전편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것이 작품의 기품을 손상시키진 않는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윗 사람을 그리는 충담의 시 솜씨가 탁월하다. 하늘의 흰구름과 땅의 백사장, 달빛의 은은함에 대비한 기파랑의 부드러움과 높이 솟은 잣나무 가지에 비교한 기파랑의 강인함이 잘 조화된, 향가 최고의 작품이다.

열어제치자 / 벗아나는 달이 /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 일오천 자갈벌 /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11. 공덕가(712p): 노동요의 원조,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노동요다. 신라향가 중에 가장 짧고 간단하다. 그러나 시 속에 불교와 민중이 만나는 절묘한 현장이 보인다. 이 시의 작가 양지스님은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었다. 이 불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많은 양의 진흙을 위해 성안의 여러 사람들의 힘을 빌렸다. 이 노래는 그 때 흙을 나르던 이들의 노래다. 박자에 맞춰 입을 모아 부르다 보면 기운이 절로 난다. 그 속에 서방정토를 위해 이생의 사람들이 공덕 기를 바라는 양지의 마음이 담겨있다.

오다 오다 / 오다 오다 / 설움 많은가 / 설움 많네
도량 공덕 / 닦으러 온다
(來如來如 / 來如來如 / 哀反多羅 / 哀反多矣 / 徒良功德 / 修叱如良來如)

12. 혜성가(714p): 권5 ‘융천사의 혜성가’ 조에 나오는 시다. 세 화랑 제5거열랑, 제6실처랑,•제7보동랑이 풍악(금강산)으로 유람 차 떠나려고 하는데, 마침 혜성이 나타나 심대성을 범하는 성괴가 일어났다. 이런 괴변은 가끔 국토에 불길한 변란을 가져오므로, 세 화랑은 금강산 유람을 포기한다. 이때 융천사가 향가를 지어 부르니 천체의 괴변은 간 곳이 없고 국토를 침범한 왜병들이 모두 달아나 버려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해학적인 가풍과 교묘한 직유법으로 구성되어 있어 향가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다. 향가에 주술적 힘이 있다고 신성시하던 당시의 유풍을 엿볼 수 있다.

예전 동해 바닷가 / 건달바가 노 성을 바라보고 / ‘왜군이 왔다’/
봉화불 피운 변방이 있었네 / 세 분 화랑 산 구경 오신단 말 듣고
달도 부지런히 불을 켜는데 / 길 쓸 별을 바라보고
‘혜성이다’ 사뢴 사람이 있구나 / 아, 달은 떠서 가 버렸더라
이보게들 무슨 혜성이 있단겐가

13. 원가(718p): 삼국유사 권5 ‘신충이 벼슬을 놓다’조에 실려 있다. 제34대 효성왕이 즉위하기 전에 작자는 그와 함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었는데, 후일 임금이 되어도 신충을 잊지 않겠다고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였다. 후에 그가 임금이 되었으나 그 약속을 잊고 돌보지 않자, 작자가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는 시들어 버렸다. 이에 임금이 약속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신충을 불러들여 벼슬을 내리자 나무는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러니 이 나무는 향가의 주력(呪力)을 나타내는 대목이라 하겠다.

좋은 잣은 / 가을이 와도 쉬 지지 않는다네
너 어찌 잊겠느냐 / 우러르던 낯이 계셨는데
달 그림자는 옛 못에 / 흐르는 물결은 애처로워 하는구나
모습은 바라보지만 / 세상 모두 아쉽기만 할 뿐 (후구는 잃어버림)

14. 우적가(720p) : 깨진 글자가 세 군데나 있어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지어진 배경과 함께 소중한 시이다. 영재는 풍류에 뛰어난 화랑으로 향가에 능하였다. 90세에 뜻을 세워 승려가 되고자 남악(지리산)으로 가는 도중 대현령에 이르러 60여 명의 도둑떼를 만났다. 도둑들이 노래 잘하는 영재임을 알고 노래를 지으라고 하자 즉석에서 이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도둑들이 감동하여 그에게 비단 두 필을 내놓는다.
‘바야흐로 깊은 산중으로 피해 일생을 보내려 하는 참에 어떻게 이것을 받겠느냐?’
노래 한 곡에도 감동하는 도적들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한 구비 너머 두 구비를 내다보는 영재의 깨달음이 경지에 올라 있다. 이 시는 삼국유사 권5 ‘영재가 도적을 만나다’ 조에 나온다.

제 마음의 /모습이 볼 수 없는 것인데
일원조일(日遠鳥逸) 달이 난 것을 알고 / 지금은 수풀을 가고 있습니다.
다만 잘못 된 것은 강호(强豪)님, / 머물게 하신들 놀라겠습니까
병기(兵器)를 마다하고 / 즐길 법일랑 듣고 있는데
아아, 조그마한 선업(善業)은 /아직 턱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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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10 12:08:31 *.70.72.121
<오줌싸기와 짝 찾기>에서 요강바위가 생각나는 구료.ㅋㅋ

대한민국 아줌마 정신으로 책을 샅샅이 뒤졌구료. 어디에 무엇이 들어있나 남의 살림 살이를 한 눈에 파악하는 그대는 더 대단한 여장부.

참으로 즐거운 동지를 만난 사부님과 4기 연구원들이 신나는 풍악을 울려대겠구료. 우리도 행복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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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8.03.11 12:59:53 *.253.249.10
" 무서운 아줌마, 약한 중 늙은이"

소은(蘇隱)과 함께 문장대를 오른 때가 눈이 많이 온 후였다.
빌 빌 메는 그댈 보면서 얼굴은 예쁘도 영락없는 중 늙은이, 매력이 똥이 더니만!

이제 두번째 북리뷰를 읽으면서 무서운 아줌마로 변신한 그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떤 것이 진짜일까?
그런 정열을 가지고 여태 어찌 버티어 왔을까? 남편도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강렬한 여인을 누루고 살았으니 말이다.

멋진 글을 감상하고 나니 내 글이 안된다. 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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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3.12 01:39:33 *.51.218.156
속리산 올라갈 때 저 7일 단식 후 보식 이틀째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냥 있어도 기운이 없는 사람이 눈이 그렇게 쌓인 산을 올라가겠다고 맘 먹은 게 미친 짓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아이 넷 기르면서, 포기할 상황에도 포기하면 안되는 일을 많이 겪다 보니 일종의 내공이 생겼습니다. 마음으로 안된다 하는 순간 가능성의 문은 닫히고, 안될 거 같은 상황에서도 '된다'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정말로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 때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된다' 생각하고 올라간 겁니다. 역시나, 제 믿음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빌빌대서 매력이 '똥'이었다니, 해명이 좀 필요한 거 같아 글 올립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아 선생님께 매력이 똥인 사람 되고 싶지 않거든요 ㅎㅎㅎ
격려라고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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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3.12 01:47:21 *.51.218.156
책에 대한 리뷰라기 보다는 책에서 꼭 정리하고 싶었던 좋은 내용들(모두 '저자라면'안에 있었는데 읽는데 혼동을 주어서)은 뒤 쪽으로 따로 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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