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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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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0일 04시 05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2002) ★★★☆
고운기•양진(사진), 2006(개정 초판), ㈜현암사

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저자와 관련해서 오해하기가 아주 쉬운 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의 저자로 당연히 일연(一然)을 생각할 것이며, 이 책의 실제 저자인 고운기를 번역 또는 평설 정도의 역할로 생각할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돈을 가라앉히고 책의 표지를 보면 명확히 쓰여있다. ‘고운기 글•양진 사진’ – 조금은 속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나는 ≪삼국유사≫의 원저자인 일연에 대해 먼저 말해 보고자 한다.

일연(一然)은 승려이면서, 시인이요, 역사학자이며, 저술가다. 단군신화와 신라의 향가 14수를 기록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삼국유사≫의 저자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과 비교해 본다면, 공통점은 고려 국적의 ‘신라 정통주의자’라는 점이라 하겠고, 차이점은 김부식이 실증주의 또는 사대주의 역사가로 평가될 수 있다면, 일연을 관념주의 또는 진보주의 문학가로 평가하고 싶다.
따지고 보면, 서로 비슷한 고려의 지배계층에 속하나, 단지 각자의 성격과 각자가 처했던 시대환경의 차이로 인해 서로가 그들의 저작과 함께 대척점에 있는 사람처럼 극단적으로 비춰지고 있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누군 잘 났고 누군 못났다고 간단히 평가할 것은 아니라 본다. 또한, 유교주의자인 김부식과 달리 승려인 일연이 형식적인 데 구애 없이 민중의 설화를 기록하거나, 자유로운 해석이나 빼어난 찬을 실었다거나, 단군신화를 비롯한 자주적인 내용을 많이 소개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의 일생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206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김견명(金見明)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의 밑에서 컸다. 아홉 살 때 절에 가서 공부를 시작하여 열 네 살 때 스님이 되었다.
승려로서 첫 번째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스물 두 살에 승과 합격 후, 몽고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삼중대사•선사•대선사 등을 거쳐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그의 호인 일연은 밝음[明]을 뜻하는 어렸을 때의 이름과 어둠[晦]을 뜻하는 불교의 이름 즉,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었다 한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이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호에 숨어 있는 것이다.
저서로는 그의 제자가 간행한 ≪삼국유사≫외에 ≪중편조동오위≫가 있다.

이 책의 진짜 저자인 고운기는 1961년 태어나, 한양대학교 국문과에서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박사를 받았고, 약 20년을 ≪삼국유사≫연구에 매진했다. 또한,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 세 권의 시집을 선보인 시인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삼국유사≫의 원저자인 인연과는 같은 시인이기도 하고,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해석에 능통하다던가 또는, 진보적인 성향 등에서 일연과는 ‘코드가 상당히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일연≫,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등이 있다.

이 책의 많은 사진을 찍은 양진은 1966년 태어나, 1991년부터 저자인 고운기와 함께 ≪삼국유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사진을 찍어 왔다. 이 책의 사진 해설은 그가 쓴 것이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0.들어가며
p.3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p.9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 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분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1.기이(紀異)
p.12 그러기에 유려한 한문으로 집필된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세월은 150여 년을 흘러야 했다. 그 사이 사회가 변했다. 정권 담당자도 바뀌고, 크나큰 나라 몽고와 20여 년에 걸친 전쟁도 겪었다. 곤고한 세월이었다.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개인의 인생과도 비교해 보고 싶어 진다.)

p.16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인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p.17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刻苦勉勵)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p.23 (≪삼국유사≫가)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p.24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
단군의 발견과 그 기록은 일연이 지닌 선각적 혜안만으로 이루어질 성질의 일은 아니었다.
(영웅도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p.44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신화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 ≪신화의 힘≫을 읽은 사람으로서 한 마디)

p.52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데, 몸이 크소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타고 활 쏘기를 좋아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온조왕으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 세력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대목이다. 말을 잘 타고 활 쏘기를 좋아하는 북방계의 이주집단이다.

p.68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왕실 또한 제정일치적인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약하다. …
신라 불교가 토착적인 신앙과 만나는 장면은 앞으로 자주 소개되겠지만, 그것이 곧 왕실과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호국불교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눈여겨볼 만하다.

p.96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을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일연의 천복이랄까)

p.113 (박제상) 문제는 왜나라 쪽이었다. 왕이 보해를 보고 미해를 생각하는 마음 더한 것을 보자 제상은 그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바로 가서 율포 해변가에 이르렀다. 부인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올라타 있었다. 부인이 부르는 소리 간절하건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 뿐 머물지 않았다” …
(영웅은 그리도 매정할 수 밖에 없단 말인가)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
우리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p.135 (비형랑)밤에 찾아오는 손님으로서 기이한 남자, 그와의 통교 그리고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큰 줄거리는 닮아 있다. 전형적인 야래자(夜來者) 설화인 것이다. (cf. 무왕과 견훤)

p.150 신라의 경우, 비록 (불교의)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나는 앞서 불국토 사상•본지수적 등의 용어로 신라 불교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성격은 자연스럽게 호국 불교 쪽으로 흘러간다.

p.157 신라의 외교는 본격화 된다. 사신으로 가는 먼 길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이어 나갔다. …
신라와 당나라의 밀월관계는 여러모로 분위기를 잡아 나가는 모습니다. 거디에 외교의 달인 김춘추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p.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 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 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 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 땅을 지켜 낸 사라이다.
(신라로선 소탐대실할 뻔한 것은 아니었을지 – 그래서, ‘승자의 역사’라고 하던가)

p.189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 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 인지 모른다.

p.200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삼국시대를 신라 중심으로 기술했다고 하지만,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신라의 김씨 왕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부식과 일연이 다같이 경주 출신의 김씨여서 였을까?

p.205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려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p.226 (수로부인) “옛 사람의 말에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 바다의 방자한 놈이라도 어찌 뭇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p.233 경주에서 출발한 순정공과 수로부인 일행은 분명 이 길을 따라 강릉으로 가로 있었을 것이다. 거기 철쭉꽃 핀 병풍 같은 벼랑은 어디였을까? 용에게 잡혀 갔다 태연히 나와 용궁자랑을 늘어 놓는 데는 어디였을까? 정동진에서 강릉으로 들어오는 바닷가 마을 어디쯤일까? 수로부인은 한번 산 쪽으로 눈을 돌려 꽃을 보았고, 한 번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려 용궁을 보았다.
(지은이의 지나친 주관이라는 느낌이)

p.254 같은 꿈을 놓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나왔다.

p.267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p.293 (거타지) 배를 타고 가던 일행이 풍랑을 만나자, 일종의 제비뽑기로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요나 이야기와 닮았다. 물론 배를 타는 계기는 다르지만, 배를 탄 본디 목적과 다른 행로를 밟게 된 이 사람이 결국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비슷하다.

p.304 김부식이 제시한 불교비판 부분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p.320 수수께끼는 1971년에 와서 풀렸다.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었다.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청동거울이 나온 지 거의 60여 년 만에 사마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고, 그로써 계체왕이 무녕왕과 형제간임을 밝히는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p.323 (일본 사학자 사카구치 안고의 글) “그런 가운데 그들 소에서 유력한 호족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 정권을 이루기 위한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 앞에 있는 한극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주용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p.325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아마도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도, 받는다고 자처해 이로울 것도 없는 백제계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의 멸망은 백제 왕실 하나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삼국통일이 고구려나 백제에 의해 이루어졌어야 한다는 말이 많은가 보다 – 이 부분은 이 책의 지은이의 평가(p.179)와 조금은 모순되는 건 아닌가)

p.337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나 전파되기 마련이고, 자생적으로 생긴 이야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마저 있지도 하다.

p.343 미륵 만큼은 장차 석가의 교화가 끝난 다음 이 사바세계에 다시 나타나 부처가 될 인연이 있으므로 일생보처불로 남게 된다. 일생보처불이란 중생을 모두 이끌고 대각을 이루기 위해 한 생만 더 후보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부타 곧 보살이다.

p.358 (견훤과 왕건) 마치 초(楚) 항우와 한(漢)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하다. 역발산 기개세라 한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나 꼬리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p.360 “가엾은 완산아이가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짤막한 노래 하나 등장시켜, 견훤의 말년을 실감나게 그린 일연 다운 솜씨를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p.382 김춘추와 문희의 ‘민족의 결혼’이 낳은 아들 문무왕. 삼국통일을 완성한 그는 신라와 가야 두 민족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민족간의 결합에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민족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백제-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p.384 (임나일본부설)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한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기록의 힘과 의미를 생각하게 됨)

2.흥법(興法)
p.385 ≪삼국유사≫의 본령이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일각에서 ≪삼국유사≫ 를 불교문화사라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p.386 흥법은 곧 흥국(興國)이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 ‘불교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p.398 모례는 모곡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이야기에는 단지 승려만이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신라의 이 이야기에는 평신도인 여자의 존재는 이채롭다. 일연은 찬에서 바로 이 모례에게 주목하고 있다. 앞의 고구려와 백제에서 불교를 전한 당사자가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점이다.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 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이 먼저 피었네.

p.399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p.411 일연은 아도가 자진했다는 <아도본비>의 기록을 채택하였는데, 거기에는 이차돈의 순교와 연결시키려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다.
≪삼국사기≫는 이와는 반대로 <아도본비>의 기록은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러기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록하면서도 김대문을 인용했었다. 이렇듯 한 가지 일을 두고 바라보는 차이는 뜻밖에 크다.
일연이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찬에서 우리는 일연의 속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3.탑상(塔像)
p.444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을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행복을 만나는 경우도 이와 같지 않을까?)

p.455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이면서도 낯 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겨우,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p.470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없을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 장면 들이다.

p.478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p.486 ≪삼국유사≫ 야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4.의해(義解)
p.513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p.521 막 나가는 비구 같은 이와 달리 원광은 중국에 까지 유학하고 수행에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생경한 외국 이론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말로 떠들지 않고 이 땅의 토착 신앙과 만나고 있다. 일연은 그런 원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p.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
본문을 시작하는 첫머리에 원효를 관형하기를 ‘성사(聖師)’라 한 것이다.

p.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p.551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리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가 생각난다)

p.565 원효가 (긍정적인 의미의)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긍정적인 의미의) 교조주의다.

p.571 다큐멘터리 사진의 그 투박함으로 가급적 현장을 현장 그대로 잡아낸 한 장 안 장이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나에게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준 과감한 해석 성향과는 다소 상충됨을 느끼게 됨)

p.602 도솔천은 욕계(欲界)의 여섯 하늘 가운데 제4천(天)인데, 세상에 내려올 보살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다. … 때때로 미륵보살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한다는 신앙이 하생(下生) 신앙이고, 근실히 수행하여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으로 올라간다는 신앙이 상생(上生) 신앙이다. …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미륵불입네 자처하고 나사는 사람들은 이 하생 신앙을 잘 이용한 것이다.

5.신주(神呪)
p.604 운명적으로 인생의 신고를 겪었거나, 일부러라도 겪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무상의 경지를 추구해 가자는 데 더 철저하다면 철저한 것이 밀교(密敎)다.

6.감통(感通)
p.625 미타신앙에도 미륵신앙에도 여러 부면이 있거니와, 그 가운데 뚜렷이 보이는 특징을 하나로 정리하자면, 전자가 평안한 시기의 부유층에, 후자가 혼란한 시기의 고통 받는 층에 왕성히 퍼져나간다는 정도로 이해해 두자

7.피은(避隱)
p.682 ≪삼국유사≫는 일연이 곳곳에서 머물 때마다 써 둔 메모들의 집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8.효선(孝善)
p.688 ≪삼국유사≫가 단순한 승전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
다른 한편 불교의 사적을 재료로 한 당시 역사의 재구성이라 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삼국유사≫가 불교문화사적 역사와 설화의 모음이라고 한다면 모르되, 승전이라고 말하는 p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책이거나 거기에는 그 책 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이념이 불교일 뿐이다.

p.690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일연의 나이는 79세였다. 어머니는 열 일곱 어린 나이에 아들을 보았는데, 일연이 여덟 살 나던 해 산으로 공부하러 떠났으니, 어머니는 무려 스물 다섯 살부터 돌아가시기까지 70여 년을 홀로 사신 분이다.

p.703 어쩌면 참된 효도가 무엇이겠냐는 일연의 질문을 담고 있는 진정의 이야기는, 여덟 살에 어머니 곁을 떠나, 그 어머니가 70년을 홀로 사시도록 이 세상에서는 외롭게만 해 드렸던 자신의 삶에 대한 답변이지 않았을까?
(그건 그런데, 이것이 만약 나의 상황일 경우로 생각해 보면…, 나는 역시 범인인가 보다)

*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p.704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詩歌史)를 떠바치고 있는 셈이다.

p.707 일연의 개인적인 성향인 시취미(詩趣味)가 크게 작용한 결과다. 시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식견으로 향가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삼국유사≫ 속에 실은 것이다.

p.707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일연은 분명 그런 시인이었다.

* 일연, 혼미 속의 출구
p.723 “그러나 아깝게도 시대의 사조에 빠져서 사상과 신앙 두 가지가 모두 순수하지 못하였고, 가지산문의 현풍을 떨치기에 부족하였다.” (누카리야 카이덴의 ≪조선선교사≫ 중)

p.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p.728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전란기를 해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p.734 (몽고의 침략) 중국을 주인의 나라로 모시며 언감생심 큰소리 한 번 치지 못했던 작은 나라들로서는, 저마다 자신의 정체를 찾아갈 계기가 여기서 마련된 것이다. 거기 고려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p.736 ≪삼국사기≫는 그 체제나 기술 내용이 중국의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
과도한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이 벌써 13세기 사람들의 눈에도 무리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p.736 표면적 전범은 중국이 민중을 다스리거나 변방 민족에게 요구할 때 쓰던 형식적인 전범이었다면, 이면적 전범은 권력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데 유리한 내용적 전범이다. …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 고 반문한다. 자존심의 극치다.

p.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p.741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한 가지 차원 만으로 전체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 같아서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이었음)

*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p.742 칠백 쪽을 넘나드는 책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책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거나,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 일 게다. 그도 저도 아니면 책 뒤의 ISBN 코드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흔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고…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일었음)


 <내가 저자라면>

가.전체적인 뼈대
이 책은 ≪삼국유사≫의 9개 편 중 왕력(왕력)을 제외한 8개 편을 같은 순서대로 소개하고 있으며, 저자가 일연이 아니고 고운기인 관계로 실제 ≪삼국유사≫의 내용이 약 삼분의 일 가까이 차지하고, 저자인 고운기의 해설과 평설•주장 등이 삼분의 이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삼국유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장점을 지닌 반면에, 다 읽고 나서도 정말 ≪삼국유사≫를 읽는 것인지 확신이 안 서게 만드는 단점도 아울러 갖고 있다.

책의 구성을 간단히 살펴보면,
기이(紀異) 편에는 단군신화 등 20개의 내용이 있는데, 기이 편은 준 역사서로서,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의 기이한 이야기들에 대해 소개 및 평을 하였다. 나머지 흥법(興法) 이하의 탑상(塔像), 의해(義解) 등 7개 편에서는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내용의 소개 및 평을 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동일하게 각 편 이하 내용들에 대해 원전 ≪삼국유사≫의 주요 분분을 인용하고,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설과 느낌•감흥 등을 서술해 놓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아울러, 새로운 세대에 맞게 각 내용에 관련된 사진들이 배치되어 이해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흥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후반부에 향가에 대한 자료 및 일연의 삶에 대한 평가는 ≪삼국유사≫ 원저자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감동적이었던 부분
≪삼국유사≫ 자체가 민족의 전래되는 역사나 전설•설화를 다룬 것이어서 많은 감동과 흥미를 느꼈다. 그 중에서도 관심과 감동을 진하게 느꼈던 부분은 아무래도 가족과 관련된 애절한 사연들인 것 같다.
우선, 부부간의 사연을 다룬 박제상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 주제가 왕과 신하간의 충성을 다룬 것이나, 나에게는 부부간의 이별의 이야기로 기억되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대의(大義)보다는 사사로운 일에 신경을 쓰는 소인의 마음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까. 어쨌든,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간 눌지왕의 동생들을 구하려 그 가능성과 위험을 따지지도 않고 왕을 위해 행동에 나서는 박제상의 이야기는 영웅적인 사내의 의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또한, 고구려에서의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오면서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는 의연한 기상은 대한민국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까지 만든다. 하지만, 첫 번째 미션을 마치고 집에 잠시라도 들러 부인을 만난 후 제2의 미션을 수행해도 될텐데 하는 소박한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진정 영웅은 사사로운 일에 그리도 매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다른 하나는, 모자간의 사연을 다룬 의상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진정(眞定)의 이야기인데, 저자는 진정의 전기가 아니라 진정을 빌린 일연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도 한다. 즉, 효도를 마치고 출가를 하고자 하는 아들의 조심스러운 뜻을 들은 어머니가 하는 말이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아들 진정은 말도 안 된다고 세 번을 거듭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모두 권하여
그 뜻을 이기지 못해 길을 나서 쉬지 않고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애절한 사연인가. 진정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길은 이리 어렵기만 하단 말인가? 진정 인정사정 볼 것 없단 말인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인(일) 것 같다.

다.보완점
맨 처음의 ‘저자에 대해서’ 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의 저자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아니라 ≪삼국유사≫를 텍스트로 이에 대한 해설과 평 그리고 도움자료를 제공해주는 고운기 님이다. 여기에는 일장일단이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국문학자이기 보다는 우리나라 고대 및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또는 갖고자 하는 일반 독자임을 전제로 할 때, ≪삼국유사≫ 원전 보다는 이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 주를 이루는 책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아쉬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즉, ≪삼국유사≫ 원전의 소개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었으면 하는 점이다. 이런 바램 하에서는, 저자의 해설 또는 평가가 지나치게 주관적인 측면을 지닌다고 느끼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 같다.
또한, 여러 군데에서 약 10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스타일을 모델로 하지 않았나 하는 점도 느끼게 된다. 즉, 답사기 같은 감흥 등이 많이 개입되는데 이러다 보니, 700쪽 이상의 책을 읽은 후에도 내가 ≪삼국유사≫를 전체적으로 읽은 건지 아리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나중에 원전 중심의 책을 한 번 더 읽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물론, ≪삼국유사≫ 같은 책은 관련지식이 없는 사람이 쉽게 읽기에는 부적합하거나 난해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계속 이런 류의 아쉬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지적 허영(知的 虛榮)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옳은 주장을 하는 것인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약간은 궁금해진다…Ω
IP *.152.1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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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10 14:36:38 *.70.72.121
귀하의 비평이 나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한 권의 책에 20년을 걸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보면 그 만큼의 식견을 또 갖추어야 가능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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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빈
2008.03.10 18:38:05 *.6.100.161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단지, '오리지널'을 좋아하는 습성에 기인한 듯 합니다.
사실, 처음엔 '평역' 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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