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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0일 04시 52분 등록
삼국유사
고운기 글/ 양 진 사진


I. 저자에 대하여
일연(1206~1289)
1206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로 취학하고, 열네 살이 되던 해 설악산의 진전사로 가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으며, 일생 동안 서른세 해를 비슬산을 중심으로 보내고 서른 한 살 때 무주암에서 득도하였다.

일연은 1281년 그의 나이 78세로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연을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 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佛國土) 사상으로 이었으며, 만년에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인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100여권 이상의 저술을 남기고 인각사에서 입적하였다.

고운기(글)
1980년대 초에 산 원본의 영인본 <삼국유사> 제일 앞 장에 “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라고 썼다. 직접 쓴 암시의 글처럼 그 동안 일연과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내놓았다. <일연>,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등이다.
1999년부터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비교 연구하였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한. 중. 일 3국 문헌을 샅샅이 뒤져 700여 년의 긴 세월을 넘어 <삼국유사>를 우리들의 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양진(사진)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 ‘연영회’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고, 우리 문화를 소재로 한 작업을 주로 해왔다. 1991년부터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적지를 찾아 다니며 기록한 사진으로 <일연>(공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공저), <아름다운 삼국유사>(엽서)를 출판했고, 2006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사진에 담긴 그곳, 거기 묻어둔 그리움’이라는 주제로 삼국유사 사진을 엮어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은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담아내는 일에 빠져있다.

의상의 몇 편 되지 않는 저술을 평한 일연의 글처럼, ‘솥 안의 국 맛’을 책임지는 특별한 ‘한 점 고기’ 같은 사진 만들기가 희망사항이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기이(記異)
(12) 다만 거기에는 무한정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큰 나라야 제일을 제 방식으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14) 설명을 모두 하자면 많이 에둘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15) 무슨 이유로 사람 사는 세상에 내려오고 싶어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추구한 궁극의 이상은 한마디로 잘 나타나 있다.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인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21) 이 사실을 말하기 앞서 잠시 말머리를 돌리자.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신화는 그런 상징이다.

(46) ‘변한과 백제(卞韓百濟)’조에서 이런 정도로 백제를 소개하고 만 일연은 신라사를 모두 정리한 다음, <기이>편의 끝 부분에 가서야 다시 백제사를 쓰고 있다. <삼국유사>가 신라중심의 기술을 했다는 주장은 이런 점을 보아서도 분명하다. 그나마 그 정도조차 배려해 주지 않은 고구려 쪽에 비하면 후한 편이지만 말이다.

(49) 얼마 후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위례성의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 깊이 뉘우치다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하여, 나라 이름을 고쳐 백제(百濟)라 했다. 이것이 곧 백제의 탄생이다.

(52)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56) 그러나 일연은 앞서 본 바 ‘진한’ 조를 실어 그 같은 가능성을 일단 차단해 놓고 있었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다른 관점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을까?

(78)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93)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다. 연오는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켜서 된 일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왕비가 짠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 지낸다면 될 것이다.”
그러고서 그 비단을 내려 주었다. 사신은 돌아와 아뢰었다.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일본에 가서 자리잡은 세오녀는 히미코가 되어, 금의환향하듯 자랑스레 본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추정할 만하다.

(119) 그러나 일연의 이 같은 기술(記述)을, 단순히 일본을 적으로 만들자는 협소한 목적에 마감시켜서는 곤란하다. 문무왕이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 고 한 데서도 굳이 적을 따지자면 일본만이 아니었고,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절 감은사(感恩寺)에 대해서 일연은, “문무왕이 왜적을 막기 위해 이 절을 짓다 돌아가시자 아들 신문왕이 공사를 마쳤다”는 절의 기록을 본문이 아닌 주석에다 인용해 놓는 데 그쳤다. 더 나아가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대해서는, 이 신령스런 피리가 단순히 외적(外敵)을 막는 데만 쓰이지 않고,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진다”고 하였다.
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데로 향하여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걸리게 했다는 점만 유의하기로 하자.

(120) 이제 우리가 읽을 <기이>편의 ‘도화녀와 비형랑(桃花女와 鼻荊郞)’조는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경우다. 점잖은 승려의 신분으로 입에 담기에는 어딘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것을 스스럼없이 해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일연의 그릇을 헤아려 보는 것이지만 말이다.

(134) 옛날 광주(光州)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은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149) 기대했던 대로 미시는 국선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화랑 제도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 같은 모범을 보인 국선이 있었다는 것은 곧 그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신라로서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이런 경과를 거쳐 굳게 뿌리내린 화랑이 신라의 삼국 통일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150) “저희들은 꽉 막혀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한 말씀 주셔서 죽기까지 계를 삼기를 바랍니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일을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171) 동궁에 있을 때였다.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군사력을 빌리려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가 그 풍채를 칭찬하면서 신성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굳이 머물러 곁에서 지내라 하였으나 애써 청하여 돌아왔다.

김춘추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법민, 인문 등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나라에 보내 그 곳의 주요 인사들과 안면을 익히게 하였다.

(189)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일연은 마지막에 이렇게 첨가한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213)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 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 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226)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 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241) 이 노래는 서정 시가로서 신라 향가 최고의 명편이다.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 시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성성에 가까운 법이다.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276)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 완도. 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가져온 해상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에는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280) 노래는 이렇다.
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앞에 나와 무릎 꿇고 말했다.
“내가 그대의 처를 탐내서 지금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복하고 탄복할 일입니다. 맹서컨데, 지금부터 이후로는 그대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안의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한 것을 몰아내고 좋은 일을 맞아들였다.

(304)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이 같은 현상은 사실 일연이 살았던 고려 말과 무척 닮았다.

(325)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차츰 중국의 말을 익히더니, 왜(왜)라는 명칭을 싫어해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신당서>의 제220권에 나오는 <동이전> ‘일본’조의 기록이다.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
아마도 더 이상 도움 받을 수도, 받는다고 자처해 이로울 것도 없는 백제계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의 멸망은 백제 왕실 하나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실 그 이후 일본의 왕실에서 백제의 흔적 지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353) 처음에 견훤이 아직 강보에 싸여 있을 때였다. 그의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고 있어서 어머니가 밥을 나르러 갔다. 그 동안 아기를 수풀 밑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더니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해지고 특이했으며, 기개가 호방하고 범상치 않았다.

(369)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가야의 역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일연의 손에 의해 거둬들여진 이 짧은 기록 하나가 전부다.
그러기에 읽어 볼수록 중요성이 새겨지는 조가 ‘가락국기’다. 3등 안에 들 만하다. 일연이 수고한 김에 조금 더 넉넉히 마음을 써서, 간략히 줄이지 말고 모두 실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에는 그런 생각까지 든다.


흥법(興法)
(385) <삼국유사>의 본령이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일각에서 <삼국유사>를 불교문화사라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것을 다루는 일연의 태도는 뭔가 자신감에 차 있다. 보고 들은 것과 몸소 체험한 것이 일체를 이루는 부분이기에 그랬으리라.

(386) 흥법은 곧 흥국(興國)이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물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흥법>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 ‘불교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392) 다만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옮겨다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機制)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는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고깃배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나타나는데, 시초는 그처럼 신비롭고 엄숙했다는 시적 표현이면서, 놀라서 나는 갈매기와 왜가리는 거기서부터 터져 나오는 돈오(頓悟)와도 같다. 동(動)과 정(靜), 상승과 하강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398) 그 대목 다음에 일연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이것이 불교의 처음이다’라고 썼던 자리에, ‘불교도 없어져 버렸다’고 비통히 마감하고 있다.
신라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405)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도다.”


탑상(塔像)
(421) 왜 그랬을까? 절의 구조라든가, 전체적인 규모라든가, 오늘날 황룡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터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부분이 이것인데, 좀더 자세한 소개가 없는 점 무엇보다도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435) 어쨌거나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442) 도리천의 신이 하루 세 번에 걸쳐 설법을 들었고, 정거천의 무리들이 차를 끓여 바쳤으며, 40명의 성인들은 10척쯤 공중에서 떠서 언제나 지켜 주었다.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세 번씩 방을 둘러싸고 돌아, 이것을 종과 경쇠로 삼고 때를 따라 수련했다. 어떤 때는 문수보살이 물을 길어 보천의 이마에 붓고, <성도기별(成道記䇷)>을 주었다.
는 대목에 이르러, 일연의 붓끝은 아예 종이 위를 나는 듯하다.

(452) 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化身),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68) 천사가 그렇다 하고, 그 사람을 시험해 보려 문서를 거꾸로 주었는데, 점숭은 펼쳐서 유창하게 읽는 것이었다. 천사는 탄복하며 방안에 돌아와 앉았다가 다시 한번 읽어 보라고 하였다. 점숭은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못하였다.
“이 사람은 진실로 대성이 지키고 있구나.”
천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 빼앗지 않았다.

불성은 대체로 이미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472)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 가장 뜻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484)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다.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노힐부득을 두고 쓴 시다.

(488) 무슨 힘일까? 비밀의 열쇠는 다름 아닌 담에 있다고 본다. 본격적인 낙산사의 경내라고 할 사천왕문부터 금당까지 담이 둘러쳐 있다. 특이한 공법으로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담은,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금당 뒷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다른 큰 절에 비해 그다지 넓지 않은 경내가 이 담으로 인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가 싶다.

(507) 희미한 등불만 빛을 토하는데 밤은 완연 깊어 있었다. 아침이 되어 수염이며 귀밑머리가 하얗게 샌 것을 알게 되었다. 망망히 세상사는 뜻이 없어지고, 이미 수고로운 인생에 지쳐 마치 백년 고생을 다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마음이 얼음 녹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잠잠히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회하는 마음 끝이 없었다.


의해(義解)
(509) 지금부터는 <의해>편의 이야기들을 다섯 제목으로 나누어 소개하려고 한다. 이 편에서는 원광을 비롯하여 고명한 승려들의 전기를 담고 있는데, 우선 그 성격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그러므로 의역하건 데 ‘고승의 삶’ 정도일까?

(511) (사진) 운문사를 처음 찾은 것은 <삼국유사> 답사를 시작하던 1991년 봄이었다. 답사의 첫번째 목적지였는데, 이른 아침 길게 늘어진 소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걷던 운문사 입구 숲속길에서 시작된 <삼국유사> 답사가 어느덧 10년을 넘겼다. (청도 운문사)

(518) “그러나 자리(자리)만 행하고 이타(이타)의 공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오.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오. 어찌 중국에 들어가 불법을 얻어 이 나라의 미혹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으시오?”
“중국에 들어가 도를 배우는 일은 본지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바다와 육지가 가로막고 있어 제 힘으로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은 자세히 중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526) 재미있는 것은, 법사가 배나무를 가리키며 이목이라 했다는 것인데, 한자어로 같은 발음이 나는 두 단어 사이의 언어유희다. 그것은 전설이 만들어지는 하나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마지막에 빗장 뭉치를 만들었다느니 자루에 글씨를 새겨 놓았다느니 운운은, 한겨울 밤 누가 더 흥미진진한가 내기하듯 옛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는 저 전설 같은 고향의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531)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534) 하루는 스님이 거리에서 소리질러 노래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사람들은 뜻을 알지 못했다. 그 때 태종 임금이 듣고는 말했다.

(540)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 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오어사(吾魚寺)라 이름 지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원효의 이야기 라기에는 외람되다고 하기도 한다.

(541) 원효더러 보살수계를 해달라고 했다. 시신 앞에서 축원하였다.

태어나지 말 것을, 죽음이 괴롭구나.
죽지 말 것을, 태어남이 괴롭구나.

사복이 “글이 번거롭군요” 하더니, 고쳐서 말했다. “죽고 남이 괴롭구나.”

(565) 의상은 이에 열 군데 사찰에 가르침을 전했다.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등이 그 곳이다. 또 <법계도서인(法系圖書印)>과 <약소(略疏)>를 지어, 만물이 모두 성불(成佛)하는 요체를 묶어 냈다. 이 책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귀감이 되었으며, 다들 다투어 소중하게 여겼다. 나머지 찬술한 것들은 없지만, 솥 안의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한 것이다.

(572) 그 길이 얼마나 험했던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본다.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585) 진표는 스승의 말을 듣고 이름난 산들을 두루 돌아 다녔다. 선계산의 불사의암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과 뜻을 모아 닦고, 제 몸은 돌보지 않은 채 뉘우치며 계를 얻어냈다.
처음에 7일을 기약하고, 온 몸을 돌에 두들겨 무릎과 팔뚝이 부서지니, 피가 비오듯 바위에 뿌려졌으나 성인은 감응이 없었다. 뜻을 굳건히 하여 몸을 버릴 각오로 다시 7일을 기약하였다. 그래서 14일이 지나자, 마침내 지장보살이 나타나 정계를 받았다. 그의 나이는 스물 셋 정도.


신주(神呪)
(603) 출가의 동기를 밝히는 가운데서도 가장 내 마음을 치는 이야기가 다음의 경우다. 주인공은 신라의 승려 혜통(惠通).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불교의 출가자들 속에 연면히 내려오는 출가의 동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 동기 하나로 깨달음은 단박에 몰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감통(感通)
(623) 바로 <감통> 편은 이 같은 이야기로 누벼진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삼국유사> 9개 편 가운데 여기를 가장 즐겨 읽는다. 이름 없이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불교를 매개로 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628) 계집종의 성불에 자극을 받은 귀진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신라 사회의 힘이다.

(632) (사진) 늦은 가을 경주의 석양은 늘 아름답다. 매일매일 석양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빛만큼이나 따뜻하다고 한다. 오늘 같은 날에 광덕은 그의 아내와 엄장을 남겨두고 먼저 서방정토로 떠난다. (경주 남천)

(633) 그러나 역시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는 순간, 또는 어는 조력잘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회한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엄장은 원효 스님에게 달려가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가르침을 물었다고 한다.

(644)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입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655) (사진) 1992년부터 한 해에 한두 번씩은 남산을 찾았으니 꽤 여러 번 다닌 셈이다. 그 곳에는 깨진 불상이며 무너진 탑이며 절터들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남산에 숨겨진 신라 사람들의 심성을 보물찾기하듯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에 남산을 자수 찾게 된다. 1999년 가을에는 해 떨어질 때까지 어정거리다가 더듬더듬 내려온 적도 있다. (경주 남산)

(656)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 고 말한다.

(658) 아마도 그 서민은, 남산에 널린 주인 없는 바위에다 자신의 불심을 새긴 마애불을 하나 남긴 것으로, 살아 보람 있는 일 하나 했다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662)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668)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


피은(避隱)
(684) 몇 리쯤 더 갔는데, 시냇가에서 할머니 한 사람을 만났다.
“스님, 어디 가시오?”
연회는 앞에서처럼 대답했다.
“앞서 사람을 만나셨나요?”
“한 노인이 나타나 저를 매우 욕보였지요. 화가 나서 오는 길이랍니다.”
“그 분이 문수대성이신데….. . 어찌 그 말을 듣지 않으셨소?”

한 방에 연회가 휘청한다.

연회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송구스러워, 곧 노인이 있던 곳으로 돌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뉘우치듯 말했다.
“성자의 말씀을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래서 돌아왔나이다. 시냇가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신가요?”
“변재천녀일세.”

이어지는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방이다. 연회 스님, 까불더니만 정통으로 맞았군. 그리고 미소 뒤에 다가오는 깨달음.


효선(孝善)
(690) 대학에서 교양 과목을 가르칠 때면 <삼국유사>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라는 숙제를 내곤 했다. 방대한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 택하는 곳이 바로 <효선>편이었다.

(702) 진정은 눈물을 삼키고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어려운데, 하물며 몇 일 먹을 식량마저 탈탈 털어 가다니요? 하늘이며 땅이 저를 뭐라 하겠습니까?”
세 번을 거듭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모두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거듭 어기지 못해 길을 나서, 쉬지 않고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렀다. 의상 문하에 들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제자가 되었다. 이름은 진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진정은 주먹밥 일곱 덩이 싸주며 호통치듯 자신을 떠나 보낸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였다. 세속의 인연을 가르기란 그렇게도 질긴 것이지만, 진정의 마음은 못내 아프기만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이 전해오자, 진정은 가부좌한 채 7일 동안 입정(入定)하더니 일어났다고, 일연은 쓰고 있다.
진정의 스승 의상은 제자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려 제자 3천 명을 데리고 소백산의 추동(椎洞)으로 갔다. 풀을 엮어 움막을 짓고, 3천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을 강의했다. 제자 지통(智通)이 강의에서 주요한 부분을 모아 두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이 책이 바로 <추동기>다.
진정의 어머니가 그의 꿈에 나타났다.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태어났구나.”


향가
(704) 아니 향가 하나에 머물지 않고 10세기 이전의 시가에 대해서 그렇다.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詩歌史)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711) 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일연, 혼미 속의 출구
(724) 우리 선종이 중국에서 전래된 사실은 분명하나 연장이니 직수입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눈에 거슬린다. 그는 신라 말 고려 초 선종의 여러 종파를 전래한 승려마다 수십 년 걸친 고행 끝에 스승으로부터 분명한 인정을 받아 돌아온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단순한 수입이 아닌 이미 자기화한 어떤 사상의 고갱이를 발견한다.

(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731) (사진) 일연이 속했던 가지산문의 종찰인 보림사를 처음 찾았을 때는 늦가을 새벽이었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 때문에 버스 내리는 곳을 지나쳐서, 거꾸로 돌아 나오느라 아침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 때까지도 안개의 여운은 남아 있어서, 태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었다. (장흥 보림사)

(733) 새로운 시대를 창출한다는 명제 앞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산문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그 업적을 널리 현창하여야 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연이 <중편조동오위>를 편찬하면서 ‘평소에 꿈꾸어 오던 일’ 이라고 한 말의 맥락을 잡을 수 있다.

(736)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禮樂)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仁義)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符命)에 맞는다든지 도록(圖錄)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

서문의 첫 대목이다.

(739) 신라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어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742) 대학교 때, 인생 공부를 한다며 강의실보다 자주 들르던 술집에서, 고운기 선배의 제안으로 시작된 <삼국유사> 사진 찍기는 어느덧 십 년을 넘겼다. 돌아보니 우린 아이를 둘씩 둔 아빠가 되어 있고, 비슷하게 맞닥뜨린 고난의 세월과 온몸으로 맞서면서도 <삼국유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누가 부탁한 일도 아니었고, 돈이 되는 일은 더욱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삼국유사>는 깊은 밤 외딴 산길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 같은 그러 존재였다.



III. 내가 저자라면
고려 말 어지러운 혼란기에 민족의 주체성을 바로잡고 민초들의 삶과 뿌리를 바로 세우고자 삼국유사를 집필하였을 것입니다. 그 안에는 왕조와 귀족의 부침이 들어있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나 깨달음 등이 녹아있어 우리 문화의 색깔이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좋은 역사서 겸 일상의 기록들입니다.

이야기나 설화 또는 신화를 현실적인 것처럼 상상을 불어넣고 시로 찬미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든 것은 일연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적인 접근이나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기 어려운 이야기나 사건들을 진지하고 때로는 가벼운 상상력을 불어넣어 우리 민족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시와 향가 그리고 민요 등을 곁들여 우리 것들을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품는 것은 삼국유사의 정수입니다.

일연의 생애가 보여주는 삶의 궤적 그 하나로서도 충분하지만, 일연은 이야기꾼입니다.
일흔 넘은 늘그막에 이야기와 삶이 겹쳐 그의 붓끝에서 나오는 글은 춤추듯 날아가는 글들이 많으며 이미 글을 넘어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 너머에 있는 경우가 많고 해석해주는 글을 따라가다 보면 겨우 잡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운기와 양진의 삼국유사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20년 이상의 긴 각별한 애정이 이 책의 힘입니다. 고운기와 양진에게 삼국유사는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 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오랜 세월의 부침과 단락을 넘어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책 속에 그들의 혼과 정신이 깊이 녹아 들었고 독자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맛과 향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말이 무색합니다.

고운기의 글도 글이지만 양진의 사진 한 장 한 장이 책의 맛과 향기를 더욱 풍성히 하기에 족합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엮는다면 감통편과 의해 등의 몇 편을 앞에 실어 독자로 하여금 역사서라기 보다는 좋은 문화사나 전기 같은 느낌을 주어 읽어나가는 것을 편하게 한 다음 기이편을 실어 전체적인 역사흐름을 보여주면 독자들이 쉽게 중반을 넘어 갈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나 다른 문헌을 참고하여 일연이 서술하였고, 이 책을 고운기님이 번역하고 해설하였습니다. 신화나 설화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 이렇게 시대의 간격을 두고 두 화자가 전하고 있어 일면 이해하기가 쉽고 숨겨진 의미 등을 잘 전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감정이나 고저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하고 수동적으로 따라가게 하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슴을 멍하게 했던 구절 중에 <효선>편에
그러나 진정은 주먹밥 일곱 덩이 싸주며 호통치듯 자신을 떠나 보낸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였다. 세속의 인연을 가르기란 그렇게도 질긴 것이지만, 진정의 마음은 못내 아프기만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이 전해오자, 진정은 가부좌한 채 7일 동안 입정(入定)하더니 일어났다고, 일연은 쓰고 있다.
진정의 스승 의상은 제자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려 제자 3천 명을 데리고 소백산의 추동(椎洞)으로 갔다. 풀을 엮어 움막을 짓고, 3천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을 강의했다. 제자 지통(智通)이 강의에서 주요한 부분을 모아 두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이 책이 바로 <추동기>다.
진정의 어머니가 그의 꿈에 나타났다.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태어났구나.”

슬픔을 넘어선 아름다운 인연들입니다.
IP *.34.47.25

프로필 이미지
나그네
2008.03.10 14:27:30 *.34.47.25
님의 세상을 위해 기도로 돕겠습니다..
필~승!!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3.10 14:46:06 *.70.72.121
아름다운 인연에 감동하셨군요. 이곳에서도 아름다운 인연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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