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오현정
  • 조회 수 1790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8년 3월 10일 05시 14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저자 고운기. 1961년 생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도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겪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눈부신 경제적인 발전과 개발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독재, 서구화, 이념의 분쟁, 급격한 사회 변화, 개방. 그 안에서 그는 세계 속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심하게 겪어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겪었을 정체성의 혼란은 13세기 고려 말 ‘일연’이 겪어내야 했을 ‘정체성의 혼란’과도 비슷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당시, 사회 전반에 지배적이었으며 특히 승려로서 자신에게 주춧돌과 같은 사상으로 작용을 하던 불교의 혼란, 새롭게 다가오는 유교 사상,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사상의 고향 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중국의 혼란. 이러한 복잡다단한 상황에서의 그 또한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동질감이 저자 고운기를 ‘삼국유사’로 이끌었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개념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중국인과의 차별적인 ‘한국인’의 개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등등의 의문들과 함께.
그리고 그는 20년 간 이상이나 흔들림 없이 자신의 그 화두와 긴 씨름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를 얻게 된다. 저자는 20년 간의 그 자신과의 긴 화두 싸움에서 ‘삼국유사’라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저자는 ‘삼국유사’를 사랑하되 그 사랑에 묻혀서 객관적인 눈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정직하게 올바른 비판을 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을 수용한다.
마침내 그의 손에서 ‘삼국유사’는 ‘한국인’의 근원 내지는 본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책으로서 거듭난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이 땅의 첫 나라

[p18]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P23]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나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조’이었다.

신라와 남방계
[P53]진한의 노인들은 자신을 진 나라의 망명인이라고 말한다. 한 나라고 숨어들었는데, 마한이 동쪽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고 서로 동무를 삼자 하였다.

[P68]대체적으로 남쪽 지방의 사신 신앙의 구조가 이와 비슷하다고 할진대, 신라 왕조의 출발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명확해진다.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를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산 정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왕실 또한 제정일치적인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약하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P78](탈해가 신라에 와서 민간인의 집을 차지한 내용을 두고) 정말로 간사스러운 꾀다. 실제 자기 것을 꾀를 내어 다시 찾았다면 지혜스럽다 하겠으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니, 이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탈해의 인간성을 그다지 탐탁하지 볼 수 없다. 주몽이 동부여 왕실의 좋은 말을 차지하려 썼던 꾀보다도 더 심하다.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연오랑과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P92]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한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P92]역사가 프로레슬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역사는 그런 쇼나 각본으로 비유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은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 된다.

[P96]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이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P102]정렬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령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 년을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P111](박제상의 죽음에 대해 일연이 기술한 방식을 두고)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P119]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
[P120]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를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 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P120](도화녀와 비형랑 조를 기술한 내용에 대해서)점잖은 승려의 신분으로 입에 담기에는 어딘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것을 스스럼없이 해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일연의 그릇을 헤아려 보는 것이지만 말이다.

[P134](‘처용랑’에 대해서)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P140]’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P147](진자의 불교 수용 노력을 실패를 두고)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에 씌운 아상(我相)D은 그토록 완고한 법이다.

[P149]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어떤 점에서 진지왕은 영민한 사람이다. 비록 행실이 나빠 왕위에서 쫓겨났다고 하나, 비형랑을 낳는 일에서도 보듯이, 타고난 바 영성이 특이한 사람이다. “청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 했다면서? 성인이 빈말을 하겠느냐, 성안을 찾아보면 되지 않겠는가?”하는 한마디는 심사한 듯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P150] 다만 한 자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P153]한반도의 한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쳤는지도 모르겠다.

[P184](문무왕의 조서)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국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거시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P185](문무왕과 지의 법사와의 평소 대화) “짐은 죽은 뒤에 나라는 지키는 큰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
“용은 짐승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나는 세상이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P189]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結晶)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권력의 끝
[P196]얼마 전,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 사이에서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사마천이 ‘사기’에 ‘교조사주구팽’ 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을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다에 쓸쓸한 제 인생을 갚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p205]최근 학계에서’화랑세기’라는 책의 진위 여부와 그 역사적 가치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 책이 전해주는 화랑의 모습이 부분적으로나마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라 통일 후의 화랑들이 걸어갔던 비참한 말로인데, 세간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경우는 차라리 점잖은 은거이기에 무상한 세상의 인정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거니와, 한편에서는 그들이 지닌 재주를 파는 광에게 버금갈 예인이나, 급기야 귀족 부인들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한 남창(男娼)이 되었다는 데에서, 우리들의 눈은 실상 당혹을 넘어 경악에 어지럽다.

[p231]가 버린 봄을 돌이키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p228](수로부인 설화에서 해가에 대해)그가 알려 준 방법은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 표현되어 있다.

[p229]’구지가’로부터 ‘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항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神歌)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면서도 700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주목할 만한 변화다.

[p232]꽃을 사랑하는 여자 수로부인, 그리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천연덕스럽게 요구하던 여자 수로부인, 그가 잡혀 들어간 바다 속은 바닷가에 남아 잇던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발을 굴려야 할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였다. 용이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부인이 자원해 살겠다고도 했을 법하다.

[p233]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왕이 되는 자
[p261]원성왕이 취하는 다음 행동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직접 그들의 뒤를 쫓아가 잔치를 베풀어 회유하면서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극형까지 내릴 수 있다는 단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p261]기울어 가는 나라는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p267](왕에 대해서)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도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과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나라가 말하는 징조
[p269]한 집안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이, 나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절대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언정, 한번 일어나면 한번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대체로 흥망성쇠를 유전하기 마련이다. 과학적 증명이나 운수소관을 따지기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p277](장보고의 죽음에 대해)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78]그러기에 일연도 ‘처용랑과 망해사’ 조를 시작하면서,”서울에서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다. 연주와 노래 소리 끊이지 않고, 사실사철 맑은 바람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 주었다”고 태평스런 시대의 배경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한 번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다.이 구절은 실로 역설적으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이 전해올 것이다. 일연은 ‘처용’이라는 특이한 사내의 이야기를 통해 그 역설을 증명해 가고 있다.

[p287]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공과 진공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했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읽고 둔해지지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치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p289]결국 감옥에서 이런 시를 지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고 하니, 왕거인이 진범은 아닌 듯 한데, 정작 노가바를 부가 지었는가 알려 하기보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이라고 단박에 지목하여 철장에 집어넣은 그 사회의 꽉 막힌 위정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p293]사미승으로 변한 늙은 여우는 거타지의 화살을 맞고 죽는다. 거타지가 쏜 화살은 곧 이 세상의 부조리를 향하여 날아가 박히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가? 그의 도움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서해의 신이다. 그 신이 자기 딸을 꽃송이로 만들어 거타지의 품에 넣어 주는 데에서 이야기는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를 열게 될 성군을 탄생시킬 씨앗이다. 여기서 바로 왕건의 아버지 용건이 태어나는 것아다.

[p294]이야기의 끝은 늘 풍성한 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품속의 꽃가지를 꺼내 아내로 맞는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 주려는 일연의 붓끝이 보이는 듯하다.

[p301]”위태롭기가 이 같으니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내 차마 할 수 없구나.”

[p303]김부식의 사론으로 넘어가 보자. 조선조에 들어 김부식은 사대주의에서도 민족적 주체성에서도 모두 공격을 받았다. 완벽한 중국 중심에 빠져든 한편의 유학자들은 m를 얼치기 사대주의자 정도로 보았고, 실학의 바탕에서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보려 했던 다른 한 편이 유학자들은 민족의 주체성을 모르는 지식인 정도로 보았다. 살아있다면 김부식의 처지는 참 난처하겠다. 특히 이런 사론에서 밝힌 자신의 견해가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니 차라리 쓰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 그 근의 거리
[p307]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을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다만 시조 왕의 사적을 잠깐 언급한 다음, 나머지는 신하에 비해 옹색하기 그지없다.

[p307]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p309]수학 여행의 제목이 그랬기에 ‘백제의 고도(古都)는 부여다’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사온 조잡한 기념품들에도 빠짐 없이 ‘백제고도 부여 관광기념’이라 새겨져, 마치 바뀔 수 없는 정설 마냥 그 후로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그러나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일까?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 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 보면 사실 이 기간을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p315]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가지고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 문제로 비화해서는 곤란하다.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 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었다. 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고 일본열도라는 말고 모를 것이다.

[p321]소문으로만 듣던 백제와 일본 왕실의 관계를, 여러 문헌과 유물 자료로 밝힌 구체적인 결과 앞에 서면서, 우리들의 마음에는 놀라운과 착잡함이 겹친다. 그토록 가까웠나, 그런데 남이 되어 있나?

[p323]그러나 이는 다시 말하거니와 왕실과 호족에 한정한다. 그로 인해 다수의 인구가 백제인으로 채워졌다 한들 그것으로 한일동족을 말하자면 고구려와 신라 출신이 섭섭하고, 이미 선주민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는 마련해선, 어느 한 민족만으로 특정하여 결국 그들의 출신지와 동족이 되게 했다는 설명도 곤란하지 않을까? 여기서 왕실의 근친으로 한정해 두면 이런 섭섭함과 곤란함을 면할 수 있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p327]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서동은 우리 고대사에서 만나는 맹랑한 삶 가운데 하나다. 서여를 캐서 내다 팔아 홀어머니를 모시는 처지에, 더욱이 백제 사람으로, 신하의 공주 선화가 어여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꾀어 내러 가는 출발부터가 맹랑하다. 마라고 부르는 서여는 요즈음으로 치면 군것질거리 음식이었다.
그러나 서동은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실현 가능성 없다는 이 일을 돌파할 꾀가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 곡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 놓기 십상이었다.

[p332]이야기는 이 세 번째 부분에 와서 본격적인 성공담으로 이어진다.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p342](‘불설미륵하생경’의 한 구절) 대소 인민에 차등이 없고, 남녀간에 대소변을 보고자 하면 저절로 열렸다가, 보고 나면 문득 도로 합쳐지며, 껍질 없는 찹쌀이 저절로 달리는데, 지극히 향기롭고 아름다워 먹으면 병이 없다. 금은 진보와 차거∙마뇌∙진주∙호박 등 각종 보배가 땅에 흩어져 있으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가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집어 들도 서로 이렇게 말한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물건 때문에 서로해치고, 옥에 갇혀 무수한 고뇌를 받았다 하는데, 지금은 기왓장이나 돌과 같아서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다.”

[p343]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간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가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견훤, 비운의 영웅
[p348]사실 일연이 쓰는 견훤의 생애란 ‘삼국사기’안의 전기가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책은 한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고려 쪽에서 만든 역사서가 아닌가? 그런 마련해선 전모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다, 더 나아가 긍정적인 쪽의 자료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가 포악한 인물로 알려진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한다면, 견훤에 대한 평가는 전해오는 자료를 일단 접고 들어가는 유연성이 필요한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견훤에 대한 인상이 정반대로 잡히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포악하다고 말하는 것과, 투쟁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p353]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p355](견훤이 왕건에게 보내는 편지)그러나 아직 나이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고, 나의 쇠털 하나 뽑지 못했소. 초겨울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 싸움에서 손이 묶였고, 이 달에는 좌장군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햇볕에 쬐었소. 죽이고 얻은 것이 많으며, 쫓아가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음을 보아, 강약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승패도 알 수가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오.

[p356]”토끼와 사냥개가 둘 다 지치면 마침내 놀림을 받게 되고, 조개가 황새가 서로 버티다 보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p357](위 견훤의 편지에 대한 왕건의 답)만약 족하가 오월왕의 뜻을 받들어 흉악한 병기를 모두 놓으면, 그것은 위 나라의 어진 은혜에 부합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동방의 끊어진 실마리를 이을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허물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 때 가서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오.”

[p358](왕건과 견훤의 편지 싸움에 대해서)그것은 마치 초 항우와 한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하다. 역발산의 기개세라 한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자 꼬리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p360](견훤의 말년에 대해)
가엾은 완산 아이가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중략)
짤막한 노래 하나 등장시켜, 견훤이 말년을 실감나게 그린 일연다운 솜씨를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신비의 왕조, 가야
[p376](왕후가 들어선 후)이 때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 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거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딸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공로는 마치 도산이 하나라를 돕고 당원이 교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p381] 길 가던 나그네는 길을 사양하고
농사꾼은 밭 갈기를 양보해
사방이 모두 편안해지고
모든 백성이 태평성대를 맞았네

불교로 보는 역사
[p389]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큰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중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도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고,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다양성을 형성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을망정, 멸망의 빌미가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일연은 불교적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p392]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p393]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고깃배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나타나는데, 시초는 그처럼 신비롭고 엄숙했다는 시적 표현이면서 놀라서 나는 갈매기와 왜가리는 거기로부터 터져 나오는 돈오와도 같다. 동과 정, 상승과 하강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p394]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쥠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 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의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p394] 신라는 앞선 두 나라에 비해 불교를 만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우람한 줄기에 무성한 가지를 뻗는 나무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는지 모른다.

[p399] 그러나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 그것은 3행 ‘봄의 신’의 상징하는 바이니, 언젠가 오고야 말 그분은 어여쁘시고 재주도 많으시다. 추운 겨울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자연의 이치에 따라 봄이 오듯이, 신라 땅에서도 봄은 찾아오리라. 4행은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례의 집 매화나무에 먼저 도착한 봄이 있다는 것이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p402]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 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져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물꼬를 튼 처음 사건, 이차돈의 순교는 그래서 일연이 관심을 사기에 족했다. 순교는 어떤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순교 자체로 성스럽다. 거기에 신라 불교의 공인 그리고 한국 불교의 본격적인 출발이라는 의미를 보탠다면 더 이상의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지 않다.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p417]그렇다.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p417]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w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도 천 년을 기다렸단다.

[p425~428]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친 것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한 신하를 만나면서다. 신하는 부처님의 예언서라 불리는 ‘잡아함경’의 한 대목을 들려준다. 부처님이 왕사성으로 들어가려는데, 길가에 두 어린 아이가 놀고 있었다. 부처님의 훤한 모습에 반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소꿉장난하면서 보릿가루라고 가지고 놀던 모래를 공양하였다. 부처님은 아이들이 귀여운 행동에 방긋이 미소지었다. 거기서 부처님은 “내가 죽은 100년 후, 이 나라에 성은 마우리아요 이름은 아쇼카라는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는 왕이 될 것이며, 온 세계에 8만 4,000개의 탑을 세워 내 이름을 알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신하는 이 예언의 당사자가 바로 아쇼카왕 당신이라고 말해 주었다. 아쇼카왕은 참회하고 불교를 전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 가운데 한 가지나 사자나 황소 또는 코끼리의 모습을 새긴 기둥을 세우는 일이었다. ‘아쇼카의 기념주’라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 기둥은 불교 미술의 출발이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p456~458]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p471]20세기가 저물어 가는 2000년 가을, 중동의 예루살렘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다시 벌어졌었다. 그 현장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이 머물렀던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에 두려워 떨고 있는 한 소년과 소년을 지키려고 온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 그러나 사격을 중지해 달라는 아버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결국 배에 총을 맞고 아버지의 품에서 숨져가는 소년을 보았을 것이다.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손 자들은 이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심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p473] 간밤 계를 더렵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알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낙산사의 힘
[p487] 어줍잖게 관광 산업을 일으킨다고 버린 것은 절이다. 이름 좀 났다는 절마다 어디를 막론하고 그 앞에는 여관과 음식점, 정체불명의 노래방이며 디스코장이 어우러져 있다. 절 구경은 그거 형식일 뿐, 대낮부터 술 한 잔 걸친 관광객들의 고성방가는 그칠 줄 모르고,삽시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이어진다.

[p497]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p499](범일의 잉태에 대하여)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p502] 10대 후반, 아직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던 일연은 어느 날 이웃 절 낙산사에 전해오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직접 익령의 덕기방과 시냇가도 한 번쯤 찾아보았을지 모를 일이다. 이 때 일연은 지난날의 한 수님이 성인을 어떻게 만났는가를 곱씹는 데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뇌리에 불현듯 고향이 다가오고, 아홉 살에 떠난 고향 땅의 산천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드디러 어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다가오며 사무치는 그리움에 떨었던 것 같다. 이국 땅 먼 하늘 아래서 고국의 승려를 만나 간절한 부탁을 하던, 그리하여 무심한 스님의 꿈속으로 찾아오던 한 쪽 귀가 잘린 소년 사미승과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인생의 모진 인연의 실체이고 숙명이다. 거기에다 소년 일연은 자신과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 보았을 터이다.

[p506~507]“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에는, 얼굴색이 곱고 나이도 어렸으며, 입은 옷도 예뻤습니다. 좋은 음식이 있거든 당신과 나누고, 얼마 안 되더라도 따뜻한 옷이면 당신과 함께 입었지요. 이렇게 살아온 지 50년, 정들어 가까워졌으며 사랑하기 그지없어 도타운 인연이라 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쇠약하고 병들기 해마다 심하고, 춥고 배고프기 때문에 날마다 팍팍하지만 합니다. 곁방에 장종지 하나 구걸하자 해도 사람들은 받아들여 주지 않고, 집집마다 돌며 부끄러움의 무게가 산과 언덕만큼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으니 살아나갈 겨를도 없는데, 부부간에 사랑이며 즐거운 마음이 들기나 하겠습니까?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승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근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 당신이나 나나 어찌 이다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뭇 새가 함께 주리기보다 차라리 외짝 난새가 마주볼 거울을 가지는 게 낫겠지요.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운문사 이야기
[p513]’의해’편에다 들인 일연이 이 같은 노심초사가 승려로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결과만은 아니다.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료도 의상도 없다. 다만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삼국시대를 특히 신라 중심으로 기술한다고 했을 때, 몇몇 승려들의 역할과 업적은 불교의 그것을 떠나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쉬움은 크다.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함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p513]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종교다. 무릇 2천 년을 바라보는 오랜 역사에다, 거기 누벼진 사연이 많기도 많아, 불교야말고 이성으로만 받아들이는 어떤 형식으로서가 아닌 우리들 심성 깊숙이 내린 튼튼한 뿌리다.

[p521] 막 나가는 비구 같은 이와 갈이 원광은 중국에까지 유학하고 수행이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생경한 외국 이론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말로 떠들지 않고 이 땅의 토착 신앙과 만나고 있다. 일연은 그런 원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p522]”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남의 신하가 된 몸’이란 곧 현시 정치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임을 가리킨다. 그들이 승려와 똑 같은 계를 지니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어렵다는 점을 원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속 깊은 배려다.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p533]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보이더라도 부분만 보인다. 그가 그린 어느 한 부분만 보이고, 그가 한 말의 어느 한 부분만 들린다. 그래서 원효에 대해서는 가지가지 이야기가 난무한다.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p531~532]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릎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료를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p535]그러나, 맨 먼저 그 뜻을 알아 챈 이는, 혼자되어 살고 있는 딸을 가진 태종 임금이었다. 원효가 노래한 두 줄을 그는 정확히 읽어 준다. 자루 빠진 도끼를 달라함은 다름 아닌 과부인 요석공주를 가리키지만, 그 주인공이 승려이기에 꺼림칙한 기분은 나라의 이익으로 명분을 세운다 그만한 여유와 융통성이 신라를 신라이게 했던 것은 아닐까?

[p537] 이미 의상과의 중국 행에서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어 돌아왔었다. 그 때 벌써 원효는 벌써 그 원효였다. 그러다 요석공주와의 만남, 불교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파계다. 하지만 원효에게 그것은 이미 원효인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 부정 다음에 원효는 원효아닌 원효로 거듭난다.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p538]일연이 발견한 원효는 이런 원효였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잘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 아니었을까?

[p548]문득, 거추장스런 교의의 탈을 벗어버리고, 하늘을 괼 아들 설총마저 아비 따라가 버린 분황사는 문만 굳게 닫았을 뿐 이젠 아무도 없다. 오직 그들을 추억하는 시인만이 서 있을 뿐이다.

의상, 화엄의 마루

[p551]”지난 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p564] 나머지 찬술한 것들은 없지만, 솥 안이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한 것이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p569]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것만 일까 싶었다.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화보다 저 세상이 부귀를 더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지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그렇지만 거기라고 사람 사는 세상인 바에야 왜 호사를 바라지 않고 다툼이 없겠는가 의문스러워 해본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목적으로 혹시 그렇게 길들여 놓지나 않았을까?

[p571]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버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p577]일연이 이 조에 부친 찬은 추도시에 가깝다.”자신을 잊고 불법에 따르는’ 이들의 위대했던 개척 정신을 추모해 마지 않고 있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p582]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시점이다. 호남 출신의 스승은 충청 출신의 제자를 다시 키우고, 다시 그는 영남 출신의 제자를 키우는 이 3대. 이 3대를 묶었던 것은 ‘점찰경’과 간자지만, 그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을까? 민족과 전쟁과 화합-이런 말들이 내 머리 속에는 오가고 있다.

밀교의 한 자락
[p607]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이렇게 버림받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이 눈 밝은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p621]제40대 애장왕 때였다.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에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거적대기로 몸을 덮고 밤을 지샜다.

[p623]애장왕 때라면 9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이다. 저물어 가는 나라의 분위기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정치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때였다.
그런 사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저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한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 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외의 고갱이였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기록에 나타난 ‘우리 나라 첫번째 스트리퍼’라고, 나는 이 대못을 농담처럼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그 농담 속의 진담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

[p624] 경덕왕이 통치한 시기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그 혜택이 가장 많이 누린 때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의 극점에 다다라 이제 내리막으로 꺾이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번성과 혼란의 기미가 함께 나타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소개했다.

[p627]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가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계집종의 성불에 자극을 받은 귀진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신라 사회의 힘이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p660]옛날 계빈에 큰스님이 한 분 있었다. 아란야법을 하며 일왕사에 이르렀다.
절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그의 옷차림이 초췌한 것을 보고, 문을 닫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 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째 그러시오?”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향가,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p704]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p712]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威儀)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p718] 좋은 잣은
가을이 와도 쉬 지지 않는다네
너 어찌 잊겠느냐
우러르던 낯이 계셨는데
달 그림자는 옛 못에
흐르는 물결을 애처로워 하는구나
모습은 바라보지만
세상 모두 아쉽기만 할 뿐

일연, 혼미 속의 출구
[p723]이제는 진정된 감이 있지만 한때 일연에 대한 평가는 너무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과장되기로는 그가 민족의 명운을 개척이라도 한 사람처럼 떠받들린 부분인데, 가뜩이나 존경할 만한 일물도 적은 판에 그것은 차라리 위로 삼아 해보는 일이라 해도, 뒤틀린 생각을 가지고 까닭 없이 폄하하는 일은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p725]그러나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야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p734]일연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은 ‘삼국유사’의 편찬이다. 내외적으로 불어 닥쳤던 거대한 변화의 조류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해체를 가져왔는데, ‘삼국유사’는 그같이 변화된 모습을 담는 그릇이었다.

[p736]’삼국유사’보다 한 세기 앞서 중국 중심의 고대 왕권 국가의 전형을 보여 주는 ‘삼국사기’는 그 체재나 기술 내용이 중국의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는 고대 우리 나라의 지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지만, 과도한 중국 중심의 사고 방식이 벌써 13세기 사람들의 눈에도 무리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예약과 인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괴이한 힘을 부리거나 이름 없는 잡신들을 들먹이지 않는다는 말은 ‘삼국사기’의 기술 태도를 요약한 것이다. 그것은 중국에서 마련된 전범이다.

[p738]일연의 서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일어나 여러 괴이한 사건들을 장황하게 열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 처음 나라가 설 때부터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에게까지 신이한 일로 점철된 건국의 역사를 낱낱이 대는 것은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그러기에 결론적으로,”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자존의 극치다.
[p739~740]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 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 신랑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예컨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는 국가의 변괴를 물리칠 연승으로 부름을 받을 만큼 도와 덕이 높은 승려였는데, 범어는 모르고 다만 향가를 지을 뿐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이 말을 듣고 경덕왕도 흔쾌히 받아들였으니, 두 사람이 취하는 이런 태도의 근저에는 신라 불교가 가진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다름 아닌 향가의 대표적인 시인에게서 보이는 이런 태도가 곧 향가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다.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칭찬할 만한 것 투성이다.
가장 먼저, 방대한 자료를 이용해서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낳아준 저자의 성실함에 존경을 보낸다.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글에서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점을 일관성 있게 유지를 했을 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그 성실함을 유지하고 있다. 독자로서 나는 책의 어느 한 부분에서도 저자의 흐뜨러짐을 읽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러한 저자의 성실한 태도는 내게도 오롯이 전해져 왔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한 자도 빼 놓지 말아야겠다는 성실함이 고개를 들었으니 말이다.
저자가 군데군데 자주 쓰고 있는 의문형의 글쓰기도 매우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역사책을 자주 읽지 않는 나로서는 어쩌면 700 페이지 이상이 되는 이 책의 읽기는 매우 도전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상징이나 우회적인 표현에 대해서 저자가 던져주는 의문점들이 나의 호기심을 끌기에 적절했으며 그 의문점들에 스스로 답을 유추해 보면서 그리고 저자가 내린 결론과 내 개인적인 답들을 맞추어 봄으로써 글읽기를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중점을 두어 쓴 방식인, 본문 읽어 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에도 칭찬을 하고 싶다. 원문이 제시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책이 소설이나 옛 이야기 책을 읽는 정도의 수준에 그쳤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독자는 저자의 일방적인 생각이나 해석만을 받아들일 기회밖에 제공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실어 두었기 때문에 실제의 본문과 저자의 해석이 동시에 볼 수 있는 이점을 독자가 누리게 된다. 독자는 이 둘을 읽음으로써 본문과 저자의 해석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아울러 두 관점을 뛰어 넘어 독자 스스로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여유까지 얻게 된다.
독자에게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한 저자의 배려도 눈에 띈다. 저자는 한 가지 원문에 대해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해석한 여러 가지 문헌, 해석들을 한꺼번에 보여 준다. 가령, 한 가지 사건을 두고 삼국사기에서는 어떤 해석을 하고 있으며 중국의 다른 역사서나 그 이후 다른 역사서에서는 어떤 해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저자는 각각의 해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보여 준다. 일면, 이러한 형식이 독자들의 글 읽기를 쉽지 않게 만드는 점도 있지만, 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관점을 비교, 수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이점이 더 크다고 하겠다.
책의 내용과 함께, 책에 실린 사진에 대해서도 칭찬을 하고 싶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여느 역사서나 여느 교과서처럼 무미건조한 사진들이 아니다. 사진들은 가장 상상력을 자극해 줄만한 위치에서 역사적인 장소나 물건들, 때로는 자연물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사진 아래의 멋진 글귀들과 더해져서 독자들의 영감과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본문의 글과도 좋은 조합을 이루고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사진 찍은 이와 글쓴이가 영혼으로 하나가 되어서 이 책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책 읽는 내내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던 한자어를 줄였으면 어땠을까 한다. 물론 삼국유사의 원문을 해석한 부분에 있는 한자어들은 그것들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안다. 다만, 저자의 글에서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에 약간이라도 줄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이러한 아쉬움은 책의 뒷부분 불교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부분의 한자어를 줄일 수 없었다면 각주를 달아 독자를 약간만 더 배려했어도 좋았을 뻔 했다.
IP *.72.227.114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3.10 14:56:59 *.70.72.121
읽기에는 한자어가 어렵겠네요. 하지만 뜻 풀이에는 훨씬 도움이 되기도 하겠네요. 님의 글에는 자신감이 있고 힘이 느껴지네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32 코리아니티 - 구본형 [1] 이은미 2008.03.15 1709
1331 코리아니티 경영, 구본형 [3] 홍현웅 2008.03.15 1716
1330 [독서47]왕의투쟁/함규진 素田 최영훈 2008.03.14 2275
1329 [48] 10cm 예술 / 김점선 [4] 써니 2008.03.13 2341
1328 [46] 오른쪽 두뇌로 그림 그리기/베티 에드워즈 [2] 校瀞 한정화 2008.03.13 4838
1327 삼국유사 [2] 박안나 2008.03.10 2114
1326 삼국유사 순례기 [2] 서지희 2008.03.10 2097
1325 고운기 ,일연, 삼국유사 [1] 김나경 2008.03.10 2741
1324 삼국유사 - 일연/고운기 [1] 최현 2008.03.10 2211
» [02]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오현정 2008.03.10 1790
1322 [02] 삼국유사/고운기 [2] 강종출 2008.03.10 2262
1321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2] 김용빈 2008.03.10 2274
1320 [북리뷰002]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고운기 [2] 양재우 2008.03.10 2270
1319 삼국유사, 고운기 [4] 이한숙 2008.03.10 2700
1318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유인창 2008.03.09 2167
1317 고은기, 양진 <삼국유사> [1] 박중환 2008.03.09 2525
1316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 [2] 이승호 2008.03.09 2290
1315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이은미 2008.03.09 2293
1314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Review [1] 손지혜 2008.03.09 2454
1313 삼국유사 [2] 최지환 2008.03.09 2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