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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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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0일 11시 30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글 / 양진 사진, 현암사(2002)

1. 저자에 대한 기록

1 .원전자 -일연스님
우연한 기회에 고운기가 마치 사당에 제를 올리는 것처럼 겸손히 두 손을 모으고 나직한 목소리로 삼국유사를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모습은 자신 또한 작가로서, 시대적 소임을 다한 일연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나 또한 글쓰기를 꿈꾸고 있기에 글쓰기의 선각자인 일연, 그를 지나칠 수 없다. 그 소개란 것이 여러 저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중복된 것일지라도 말이다.

일연은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에서 김언정의 아들로 출생. 지금의 광주 지방인 해양의 무량사에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에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의 제자가 되어 계를 받았다. 승과의 선불장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한 뒤, 비파산 보당암 등으로 옮겨 참선 수행에 몰두하였다.
1246년에는 삼중대사의 승계에 덧붙여 선사로 불리고, 몽고의 침입이 끝날 무렵인 1259년에는 대선사의 승계를 제수 받았다.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일연은 광명사에 머무르면서 충렬왕을 비롯한 왕실 상하의 귀의를 받았으며, 1283년에는 마침내 국존에 책봉되어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일연은 선사이면서도 교학에 밝아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점송사원』 30권 등 1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2. 삼국유사 저술 배경 및 시대상황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277년부터이며, 1281년경에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삼국유사』가 쓰여 지던 때는 고려 사회가 안팎으로 어려웠던 시기로서 100년간에 걸친 무신 정권의 횡포와 대외적으로는 30여 년에 이르는 몽고의 침입이 끝난 다음이었다. 고려 조정이 몽고와의 강화에 이어 1270년에 단행한 개경 환도는 왕정의 복고와 동시에 원나라의 간섭 하에 놓인 시기다.
이 같은 움직임에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사회전반적으로 확산되어 간다. 이 같은 부응에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찬하게 된다.
김부식의『삼국사기(三國史記)』가 공식적인 사료를 수집한 쓴 정사(正史)라면 유사(遺事)는 ‘잃어버렸거나 남겨진 사실’이라는 뜻이다.『삼국사기』의 틀에 맞지 않아 수용되지 못한 이야기에 주목한 일연은 삼국 이전의 이야기, 단군신화나 동명왕을 신화 형식으로 기록했다. 삭발했던 진전사를 비롯해 승과에 급제한 뒤 참선했던 비슬산, 오어사, 인흥사, 입적한 인각사 등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공간으로서 그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일연이 즐겨 찾던 사찰의 문헌전승과 구비전승들이 등장한다. 일연이 아니면 소실되었을 귀한 자료로 일연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재해석 되는 이유이다.
삼국유사의 편제를 살펴보면, 인용한 서목은 한국서 102종, 중국서 33종, 일본서 1종, 도합 136종에 이다. 이 집필을 위해 한평생 유사를 수집했던 일연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삼국유사의 집필을 마친다.

이 책을 읽으며 일연의 눈길과 그의 쓰기의 희노애락이 머물렀을 그 공간을 함께 순례했다. 일연의 잘 벼려진 문장을 다시 정성들여 가다듬는 고운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일연을 새겨 보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기록- 고운기

1961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초에 산 원본의 영인본 『삼국유사』 제일 앞 장에 “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라고 썼다. 직접 쓴 암시의 글처럼 그동안 일연과 삼국유사를 주제로 책을 여러 권 내놓았다. 우리말로 쉽게 번역한 『삼국유사』, 박사학위 논문을 중심으로 엮은 논문집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해설서의 전범(典範)을 제시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현장을 기행하며 쓴 『길 위의 삼국유사』 등이다. 이번에 출간하는 『일연을 묻는다』로 일연과 삼국유사 연구의 한 매듭을 지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후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등 세 권의 시집을 선보인 시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이상이 현암사에 나와 있는 고운기의 프로필이다. 그의 시집을 접한 적이 있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는데 동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자가 그토록 매료되어 여러 버전으로 개정판을 내는 동안 나는 한권의 삼국유사도 읽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 이십 년 전에 그 책을 만나서“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라고 쓰고 묵묵히 일연의 뒤를 밟아 온 고운기의 초심과 시종여일이 태산처럼 커 보였다. 역사를 거치며 생성된 통시성(通時性)과 공시성(共時性)을 초월한 두 사람의 교감은 곧 감동이었다.


왜 삼국유사인가?
- 여러 저자에 의해 다뤄져 온 삼국유사를 비교 분석한 후에야 고운기의 삼국유사를 논하는 것이 옳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 삼국유사를 주목하게 되었는지 고운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삼국유사를 민족의 고전으로, 민족을 알게 하는 교과서로 여기지만, 이 책이 지닌 전승의 역사를 조금만 돌이켜 보면 그다지 오랫동안 사랑 받은 책이 아니었음을 금방 알게 된 다. 아니 거의 잊힐 뻔하다 겨우 살아난 책이다. 20세기 들어서서야 주목을 받았고, 학자들 또한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삼국유사를 극적인 재발견(再發見)의 책이라 말한다.
무엇이 삼국유사를 이렇듯 주목하게 했을까? 그 까닭을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책으로 간행되고 600여 년을 침잠했던 이 책은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제 역할을 할 어떤 기회를 잡았다. 민족이 각성하고 민족의 문제를 가장 내세워야 할 20세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20세기의 민족주의를 이 책은 이미 13세기에 소박하게나마 말하고 있다. 그런 13세기는 한마디로 20세기 한국의 선험적인 시대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의 지식인이요 국사(國師)였던 일연은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는 요체가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것을 정리하여 책 한 권으로 남겼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의 시기가 없었던 바 아니나, 콧대 센 조선의 유학자들은 승려가 남긴 이 책을 애써 외면했는데, 조금 시야를 넓힌 20세기의 지식인들은 여기서 어떤 답을 얻고자 했다.”

일연이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800년 전에 삼국유사를 남긴 것과 같은 이유로 고운기 또한 21세기, 민족주의의 답을 삼국유사에서 얻고자 주목했다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고운기의 그 같은 의견에 깊이 동의했다. 일연이 한권의 책, 평생을 바쳐 채록하고 집필한 삼국유사가 이룬 그 집대성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고 경외심이 일었다. 또한 시대와 시대를 초월해 난세의 여전한 지침서로 삼국유사를 선택한 고운기의 높은 혜안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작가 양진은 700여년 전의 공간을 담지 못하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P.483) “『삼국유사』이야기는 그 무대가 되는 절이나 절터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곳들도 많다. 더듬거리며 근처까지는 가지만 사진에 담을 것도 별로 없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그저 백월산 아래 지천에 깔린 감나무만 찍었다. ”
간단복차림으로 그의 렌즈를 따라 나서고 싶어진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들어가며

(P.3)나는 앞서 두 가지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했다. 어쨌거나 이 두 가지 사실은『삼국유사』를 이해해 들어가는 중요한 단서이다.『삼국유사』는『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P.4)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司馬遷)의『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년(1145년)의 일이다.

(P.5)이 같은 역사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때 일연이『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같은 시기의 지식인 이승휴 (李承休)가 그의 책 『제왕운기』에 비슷한 내용을 실었고, 이보다 조금 앞서 이규보(李奎報)가 동명왕(東明王)의 사적을 발굴하여 서사시로 그렸던 점과 맥을 같이한다.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연이『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책을 들자면『삼국사기』를 젖혀놓기 힘들다. 그가『삼국사기』를 의식하고 있음은 특히「기이」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의 고대사를 보여 주는 데에『삼국사기』가 지닌 강점과 맹점을 누구보다 일연 자신이 깊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칠 수 없는 것이 13세기 지식인으로서 일연의 입장이었다.

(P.8)근세에 들어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1904년, 도쿄대학의 배인본 (排印本) 『삼국유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간다본과 도쿠가와본을 저본으로 한 것인데, 이 두 책이 일본에서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일본군 장수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책을 가지고 갔는데, 거기 이 두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정덕본 중의 하나인 이 두 책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불충분한 『삼국유사』였다.

(P.9)첫째,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삼국유사』를 읽으려 해도 앞뒤 배경을 모르니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그 배경을 설명해 주되,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 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P.10)『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여기 기술된 내용들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검중되지 않았거나, 내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가미한 부분들이 있다. 사실 그것들은 앞으로 획기적인 발굴이나 자료의 출현 없이는 학문적으로 어떻게 더 나갈 수 없는 난처(難處)들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다. 그런 사실을 명백히 해 두고, 『삼국유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

기이/이 땅의 첫 나라

단군 신화(檀君神話)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 왔다. 애써 이 시기를 눈감아버린 『삼국사기』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다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그렇다면 ‘처음 기준’ 은 누구의 생각인가? 그것이 맨 처음이 되어야 한다고 본 그 관점과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던가? 설령 처음 이야기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실로는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 다른 부분부터 시작했다가 뒤 어디쯤에서 슬며시 끼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연은 그런 편법을 쓰지 않았다.

(P.12)누구나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자못 중요하게 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 등재(登載), 그것도 첫머리에 자리 잡은 일이다. -중략-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재일을 재 방식으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 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P.14)설명을 모두 하자면 많이 에둘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단군 신화는『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P.17)혹시 그100일 동안 3과7이 돌아오는 날짜를 꺼리라는 말은 아닐까? 아니면3과7 그리고 그 반복은 완전 숫자로, 곧 ‘온 날’을 의미하고, 그것은 100일이 요즈음과 같은 숫자가 아니라 ‘온 날’로 보았을 때 서로 통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과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P.21)우리는 먼저 단군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신화 중에서도 단군 신화는 창세 신화(創世神話)인가 아니면 건국 신화(建國神話)인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일연이 ‘고조선’조를 시작하기 전에 서문을 붙였는데, 거기서 중국의 이러저러한 나라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음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아니라 ‘나라’다. 기독교『성서』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비롯한 세상의 온갖 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다르다.

(P.22) 고려 왕조에 들어 이전 시대를 정리하는 처음 역사서는 『삼국사기』가 차지했다. 12세기 중반의 일이다. 사실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살았던 지식인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P.23)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나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일연은 그 바이러스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극서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제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생략- 여기서 일연은 『고기(古記)』의 기록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고기』는 그런 이름을 가진 책이 실재 했는지, 여러 가지 옛 기록의 총칭인지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도 더러 이 이름이 보이고,『삼국유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여러 차례 실명처럼 쓰이고 있지만, 역시 그 실체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어쨌든『삼국사기』가 외면한 이 책의 단군조선 부분을 일연이 관심 가진 것은 오직 여기서만 조선이 온전히 보였기 때문이다.

(P.24)천자의 나라며 그러기에 모든 변방은 중국에 복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인에게 아니 우리나라 같은 옆 민족에게까지 강고하기만 한 것이었다.

(P.29)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P.30)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이었다.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위만조선의 왕 우거(右渠)를 설득하였으나 끝내 조서를 받들려 하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가다가 국경에 이르러 패수를 마주한 곳에서 자기를 전송하러 온 조선의 비왕장(裨王長)을 찔러 죽였다. 곧 강을 건너 변방으로 들어가 드디어 돌아와서 천자에게 보고 하였다. 천자는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하였다.

(P.33)'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가 중국의 사료를 내세웠다는 점이 같다. 그러나 고조선에 관한 중국 쪽의 사료는, 아직 찾지 못한 『위서』의 단군 관련 기록과, 고조선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배구전」이 전부일 만큼 옹색하다. 그에 비해 위만조선에 관한 『전한서』의 기록은 지금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런데 두 조를 잇대어 놓으니 단군조선 부분이 보완되면서, 조선이라는 국화의 공통성 아래 어떤 끈이 분명해 보인다. -중략-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중국 쪽 역사서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그것을 일연 나름대로 정리해 크게 두 개의 제목을 써서 정리한 것인데. 일관성과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35)우리가 한민족이라 하지만 사실 여러 경로를 통해 여러 부족들이 한반도로 흘러들어 왔음을 보여 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에 자리 잡은 다음 한 가지 문화와 생활습성으로 하나 되어 나가지만 말이다.

(P.36)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이 말을 어떤 역사의 흐름으로 공식화해 달라는 생각도 없다. 『삼국유사』를 보면서 고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이 두 나라와 삼국의 정립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들의 기멸(起滅), 그것을 문득 떠오른 생각대로 ‘한반도판 전국시대’라고 이름붙였을 따름이다.

(P.37)동명왕이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卒本夫餘)라 하였으니, 곧 고구려의 시초이다.
역시 『고기』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용한 『고기』가 다시 『전한서』에서도 앞서 고조선의『위서』처럼 이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연대만 원용한다는 것이 본문까지 이어져, 마치 본문을 인용한 것처럼 된 것일까? 『고기』가 어떤 신빙성을 중국 쪽 역사서에 기대려 한 데서 나온 해프닝일까? -중략- ‘동부여(東扶餘)’조를 읽어 보아야 분명해진다. 일연은 이 부분을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P.38)“내 자손을 시켜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너는 이곳을 피하여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伽葉原)이라 이름 붙인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니 왕도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유하여 도읍을 그 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P.41)열쇠는『고기』에 달려 있는 듯하다, 앞서 쓴 바, 일연은 ‘북부여’조 곧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사실을 『고기』에서 인용하였다.『고기』는『전한서』를 인용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이는 고증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전승되는 이야기에『전한서』를 가져다 붙였을 수 있다. 결국『고기』를 인용한 일연으로서는 해무수와 해부루의 부자 관계를 인정한 셈이고,그러자니 ‘동부여’ 조부터 ‘고구려’ 조까지『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도, 부루가 옮겨 간 빈 땅에 해모수가 나타나 나라를 세운 장면을 삭제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P.43)그것을 받아들인 일연의『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휙득했다.『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P.44)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을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경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P.45)주몽을 없애려 했던 동부여의 대소왕은 지황(地皇) 3년 임오년(22년)에 이르러 주몽의 손자 무횰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P.46)백제를 세운 사람들은 고구려의 유민이었다. 이 사실은 무덤의 생긴 모양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식으로 층층 쌓는 백제 사람의 무덤(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 자리 옆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지금부터 또 2,000년이 흐른 후에는 이 자리를 무엇이 지키고 있을까.(서울 석촌동 백제고분)

(P.49)그런데 마지막에 일연은『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수정하고 있다. 곧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고 했다.『삼국사기』에서는 ‘부루’라 한 부분이다. 일연의 끈질긴 고집을 읽을 만하다.

(P.52) 끝으로 일연은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데,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온조왕으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 세력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말을 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는 북방계의 이주 집단이다. 백제가 북방계의 흐름을 타고 건국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의 구성원이 전부 북방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 원주민이 있었고, 여러 역사서에 그 이름이 나타나듯이, 그들의 나라 곧 변한 등은 사실 원주민들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부족간의 이동은 끊이지 않았고, 좀더 우세한 세력과 하다. 일연이 백제를 북방계에 속한 쪽으로 기술한 것도 그 같은 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P.62~63)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다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사소는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아주자, 이산에 나라와 멈추었다. 그대로 따라와 집을 짓고, 이 땅의 신선이 되었기에,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했다. -중략- 신모가 처음에 진한(辰韓)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그렇게 나왔다. 그러으로 계롱·계림·백마 등으로 불렸으니, 닭은 곧 서쪽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일찍이 여러 하늘 의 선녀들을 시켜 비단을 짜고 붉은 색깔을 입혀 조정에서 입을 옷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신선임임을 알았다.

(P.68)게다가 선도산 신모는 불사를 도운 일로 자연스럽게 불교와 습합되고 있다. 진평왕 때의 비구니 지혜는 꿈에 선도산 신모를 만난 다음 잠에서 깨어 그 사당으로 갔다. 이미 그 때 사당이 있었다는 증거다. 지금 사당은 근래에 만들어졌지만, 사당 옆에 마애삼존불상은 7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지혜가 신모를 만난 다음의 일이다. 신라 불교가 토착적인 신앙과 만나는 장면은 앞으로 자주 소개되겠지만, 그것이 곧 왕실과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호국 불교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눈여겨볼 만하다. 경주의 선도산은 지금도 민간에서 성스러운 진산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마애삼존불이 바라보는 산 아래로는 태종무열왕릉 등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P.69)일연은 신라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 “서라벌 (徐羅伐) 또 서벌(徐伐)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사라 또 사로라고도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서벌이 나중에 서울로 바뀌어 나가씀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다음 이어서,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어떤 이는 계림국이라고도 하는데, 계룡이 나타나는 것을 상서롭게 여긴 까닭이다, 일설에는 탈해와 때 김알지가 태어나던 밤, 닭이 숲 속에서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뒷날 마침내 신라라는 이름을 정하였다”고 정리하였다.


(P.73)박노례 닛금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P.74)그런데 노례왕은 왕위에 올라 34년을 살았다. 탈해로서는 다음 차례를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P.81)"내가 술법으로 다투는 마당에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목숨을 보전한 것은 죽이기를 싫어하는 성인의 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렵겠습니다."

(P.86)머나 먼 이역, 아니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올라 와 입신양면 한 탈해. 우리는 여기서 탈해가 비록 왕위에 오르고 그 후 손들이 석씨 성을 몇 차례 더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기존의 세력에 둘러싸여 늘 불안해했던 것 같은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권력의 자리란 차지하기도 이어 나가기도 어려운 것인가? 탈해의 고민이 깊었음은 분명하다.

(P.87)일연은 석탈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경위를 성과 이름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먼 저 성에 대해서는 “‘석 곧 옛날 이 곳이 내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제 것으로 만들었기에 성을 석씨로 하였다”고 말한다. 성과 이름에 대한 또 다른 견해로는 “작 곧 까치가 울어 궤짝을 해 곧 열어 알을 탈 곧 꺼내어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말한다.

(P.101)이런 이야기의 기본적인 틀은 연오랑 세오녀의 그것과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가 이제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역사시대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는 설화라는 점, 게다가 훨씬 자연스럽게 의인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면 다르다. 정령의 의인화야 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P.103)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일본에 와 있는 서양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사람은 생긴 모습만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을 들어 보면 중국 사람은 구분된다, 말소리까지 들어도 잘 구분되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과 일본인이다. 그의 이야기는 대충 이런 요지였다.

(P.106)그렇게 비슷하게 들리는 두 나라 말 가운데서도 우리의 경상도 방언과 일본어는 더 닮았다. 발음이나 억양 그리고 특징적인 어미 처리 등이 그렇다. 사실 경상도에서는 해류만 타고도 일본 서쪽 해안에 쉽게 닿는다. 옛날로 올라 갈수록 육로보다 해로를 통한 교통이 더 활발했다. 고대 사회에 이룩된 일본의 문물 대부분이 백제를 통해서 들어와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시회의 밑바닥을 흐르는 교류는 역시 좀 더 가까운 경상도 쪽 곧 실라와 더 빈번했으니라 보인다. 그것이 탈이었을까. 너무 가깝고 너무 쉽게 갈 수 있으니, 좋은 사이로 지내기도 하려니와 싸움도 잦았다.

(P.111)‘내물왕과 김제상’조에서, 눌지왕이 볼모로 간 동생들을 그리워하자 박제상이 나나서 그 일을 이뤄 내는 다음 과정은『삼국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제상의 충청스런 마음씨와 영리한 꾀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다르다. 예를 들어, 제상은 왕명을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마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 이런 대목이 『삼국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렇듯 비장하고 정연한 결의에다 무슨 해설을 더 붙이겠는가? 그대로 읽어 마음에 간직 할 밖에 아무런 췌사가 필요치 않다.

(P.120)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무릇 큰 강을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 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일들이 도움을 받는다.

(P.134)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P.137)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P.139)신라는 나라를 세운 시기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섰지만, 문명의 개화는 가장 뒤쳐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한반도에서 신라가 위치한 지리상의 여건, 즉 문명의 고장이라 할 중국과의 통로가 쉽지 않은 구석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P.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P.144)아육왕은 아쇼카왕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인도에 최고의 불교 국가를 세운 왕이다. 그런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신라 사람들이 단번에 마치고 황룡사에 모셨다.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P.150~152)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P.153~156)한반도의 한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꾾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 쳤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린 것이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보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넘보겠소.” 이 말은 이내 고구려 쪽에 전해졌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백제는 이를 원망하였다. 백제의 침공에는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P.158)처음에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된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을 세 되 보내 주었다. 왕이 꽃을 그린 그림을 보더니, “이 꽃은 분명 향기가 없을 것이오”하고, 뜰에 씨앗을 심어라 하였다. 꽃이 피고 열매 맺기 까지 기다려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P.161)삼국시대를 정리한 두 권의 책에서, 김유신은 그렇게 당당히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명한 왕들이 많았고, 충성스런 신하가 끊이지 않았건만, 그에게 맞춰지는 역사의 서치라이트는 밝기만 하다. 일연은 ‘김유신’조 또한 자신의 특유한 필법으로 써 내려갔다. 간단한 출신 배경만 남기고 번거로운 이야기는 『삼국사기』쪽으로 돌리면서, 거기에 없는, 그 자신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한 출전을 밝히지 않았지만,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이야기에 거의 전면을 할애했다. 바로 백석이라는 고구려 첩자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P.169)여기서 최재서의 친일을 따질 겨를은 없다. 주목할 것은, 본업이 평론가인 그가『국민문학』에 네 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세 편이 신라를 무대로 했고, 다시 그 가운데 두편이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 소설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어로 쓴 소설이다. 본업에서 떠나 소설을 써야 했던 저간에 사정도 여기서 장황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왜 김유신에 그다지 집착했던가가 의문으로 남는다.

(P.170)하지만 유신의 생각은 달랐다. 춘추의 왕위를 포기하자는 것도 문회의 결혼을 말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었다.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김유신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꾀를 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었다.

(P.171)처남 매제간으로 맺어진 김춘추와 김유신 콤비는 이후 거칠 것 없이 자신들의 뜻을 펼쳐 간다. 김춘추가 왕실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굳혀가는 동안 김유신은 군부를 장악한다. 특히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일연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짤막한 삽화 하나로 부각시켜 놓았다.

(P.173)사실 김유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누구에게도 견줄 바 아니다. 힘으로 안 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모자라면 신술(神術)을 써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그였다. 그런 만큼 태종 무열왕에서 문무왕에 이어지는 삼국 통일의 역사에서 김유신의 활약은 눈부시다.


(P.183) 뇌물은 그 옛날부터 필요악(必要惡)이었던 모양이다. 사천왕사를 끝내 보여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까지 했으나, 그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벌이고 있는 신경전이 얼마나 심했던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P.184) 한시도 편할 날 없는 왕의 자리에서의 20년은 그의 수명을 단축 시켰을 것이다.
한편 그의 조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눈에 띤다.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들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풀 베고 소 먹인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P.186)문무왕이 왜병을 무찌르고자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다 마치치 못하고 돌아가셔서 바다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 2년(682년)에 일을 마치고, 금당의 아래를 밀어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었거니와,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마련한 것이다. 유언대로 뼈를 묻은 곳에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이름 하였다.

(P.189)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일연은 마지막에 이렇게 첨가한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P.196) 그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삼국유사에서 토사구팽의 첫 비극적 주인공은 뜻밖에도 김유신이다.

(P.197) “제가 살아서는 신하로 일하며 어려움을 이겨 내고 통일을 이뤘으며, 죽어 혼백이 되어서는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치며 환난에서 구하려는 마음이되, 조금이라도 넘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술년(770년)에 제 자손들이 죄 없이 가혹한 벌을 받았습니다. 임금과 신화가 저의 공과 충성심을 생각하지 않으시니, 저는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수고로운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소서.”
김유신의 말이었다. 왕은 대답했다.
“오직 내가 그대와 더불어 이 나라를 지키지 아니하면 백성들은 어디로 가란 말이오? 그대는 다시 이전처럼 힘을 다해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했으나 왕은 세 번 모두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회오리바람이 잠잠해졌다.

(P. 204~205)김유신가의 몰락은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서서히 진행되지만 토사구팽의 비정함은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P.211)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배경설화로도 유명한 이야기다. 득오가 새로운 자리에 전출되어 임지에 가서 일하는데, 옛 상관으로서 죽지랑이 면회를 갔던 일 정도. 거기서 좀더 나간다면 비뚤어진 관리가 사람 속을 썩인 일 정도로 보면 그만일 수 있는 일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P.212~213)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P.213)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P.241~242)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 시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
제망매가 (祭亡妹歌)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울릴 일 아니겠는가.

(P.246)충담사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충담사는 왕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어린 자식에 비유한다. 고대 왕권 국가였기에 나올 법한 비유였으나, 왕과 신하 곧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백성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부모처럼 자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미덥기만 하다.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빋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P.267)우리는 어려서부터 서양의 동화를 들으면서 컸다. 거기에 따르는 구구한 해석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니 여기서 거들일은 아니고, 설화가 지닌 우연한 일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고자 하는 자리도 아니어서, 다만 우리 이야기가 해석의 여지에서 더 넓은데 어지 그다지 철저히 외면당했는가 그 아쉬움만 표명해 두기로 하자.

(P.270) 무릇 세치 혀를 함부로 놀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인 이가 여기 무당 하나뿐일까? 딴에는 정직하고자 애쓴 보람 없이 비명횡사하고 말았지만, 어련히 그렇게 진행될 일에 토를 단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P.287)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 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 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P.302)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휘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왕조 사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백성의 힘이다.

(P.305)이미 신라가 강토를 바치고 나라가 없어진 다음이었다. 아간 신회(神會)는 외직을 끝내고 돌아와 허물어진 도성을 바라보며, ‘서리리 (黍離離)’같은 탄식을 하다 노래를 지었다. 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

(P.307)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P.309)부여를 ‘여주’라고도 부른다는 일연의 기록은 매우 값진 것이다. 일연 자신이 직접 자복사라는 절에 가 보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서 본 글을 바탕으로 지명의 유래를 확실히 고증해 놓고 있는 이런 대목이『삼국유사』가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다. -중략-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 보면 사실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 보면 사실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P.311)일연은 한산을 지금의 경기도 광주, 북한성을 지금의 양주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곧 한강을 끼고 북으로는 양주에서부터 가운데는 위례성 그리고 남으로 광주까지가 500여 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다.

(P.318)밀레니엄의 열기가 가득했던 1999년 말, 일본문화사 전공의 홍윤기 교수는 한일동족설을 주장하는 재미있는 글을 발표했다.

(P.326)수도를 교토로 옮기면서 헤이안 문화를 열었던 환무왕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200여 년 뒤, 지금은 일본의 중심인 관동 지방으로 처음 진출하여, 첫 막부 카마쿠라를 만들고 쇼군이 돈 이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이제 모두 일본인이라고 말하지 백제인이라는 하지는 않는다.

(P.328)먼저 서동 이야기부터 들어 보자. 만약『삼국유사』이야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베스트10’ 을 뽑으라 한다면 당연히 들어갈 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므로 새삼스런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몇 토막으로 나누어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본다. 이야기는 매우 정연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먼저 서동의 출생이 가진 비밀이다.

(P.330)여기에「서동요」가 나온다. 물론 이 제목은 요즈음의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노래를, 어린 아이들이 불렀다는 데에서 동요,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목적한 상황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상정하고 있다는 데에서 참요 또는 예언요라고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가작 먼저 등장하는 동요요 참요하고 할 수 있다.

(P.337)두 이야기는 서로 말하고자 하는 주레를 가지고 있지만, 크게는 서동 이야기의 모티브와 비슷하고, 두 이야기 가운데 필요한 요소만 따오면 그대로 서동과 선화공주다. 단지 다르다면 선화공주가 억울하게 버림 받았으면서 끝내 어버이를 생각하는 착한 딸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은 바리공주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국인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잡은 한국인만의 특성을 반영한 점뿐이다.

(P.348)사실 일연이 쓰는 견훤의 생애란『삼국사기』안의 전기가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책은 한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고려 쪽에서 만든 역사서가 아닌가? 그런 마련해선 전모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다. 더 나아가 긍정적인 쪽의 자료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가 포악한 인물로 알려진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한다면, 견훤에 대한 평가는 전해오는 자료를 일단 한번 접고 들어가는 유연성이 필요할 듯하다.

(P.351)불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똑같은 되풀이를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하다 망한 견훤 집안3대다. 식민지 치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다 망해 버리는 집안을 그린 염상섭의 소설『삼대』는 이미 천여 년 전을 무대로 삼아도 통할 이야기다.

(P.361)“대왕께서 40년 동안 부지런히 애써 공업을 이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사람이 망치는 바람에 땅을 잃고 고려를 따르게 되었소. 대체로 깨끗한 여자는 두 지아비를 모시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가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엇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를 보겠소? 더구나 내가 듣기로 골의 왕공은 어질고 검소해서 민심을 얻었다고 하니, 이는 하늘이 열어준 것이라 반드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오. 그러니 내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왕을 위안하고, 아울러 왕공에게도 은근한 정을 보내, 뒷날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P.384)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한국 쪽의 사료는 <삼국사기>에서처럼 빈약하기만 하다. 그러기에 일본의 학자들은 자기네 기록을 가지고 입맛에 맞게 해석한 것이다.

(P.394)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 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시가 주는 상상력 이상의 사실은 백제의 마라난타에게도 이어진다.

(P.398)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神)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P.404~405)“신은 듣건대, 옛 사람들은 나무꾼에게도 대책을 물었다 합니다. 바라건대 외람되이 죄를 무릅쓰고라도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
“사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는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지.”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그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 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도 하도다.”

(P.411)
일연이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찬에서 우리는 일연의 속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P.417)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중략-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P.456)내가 존경하는 선배가 쓴 「절」이라는 시가 있다.
내 마음 오늘
절에 가서 절을 한다.
잎 한 장 한 장 만들어지는 동안
온기가 없어 차가운
오랜 그 옛 마룻바닥에 엎드려

일어난다 다시 쳐다본다
즐겁고 깨끗하고 늘 있는 나는
지난봄이 사라진 숲 속에
가을의 마지막 시간 속에
덧없음만 항상하고 아름다워라

나 이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새싹의 아픔으로 돌아가라고
잎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동안에도 모든 것 향해 절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오늘
절하며 간다.

(P.459)천 개의 눈에서 하나만이라도 내 주어 소원을 들어 주기 바라는 지극한 마음이 노래에 스며 있다. 그러면서 짐짓 희명은 엄포처럼 마지막 줄을 맺는다. ‘어디에 쓰실 자비이기에 여기서 들어 주지 않으시려는가’ 라고.

(P.471)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P.473)간밤 계를 더럽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부득의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P.475)“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무척 남는다 해도, 옷과 밥이 생각하는 대로 저절로 배부르고 따스함만 같지 못할 것이요.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하나,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千聖)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미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다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P.476)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 는 말은 평범 속의 비범이다.

(P.481)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면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현신인지도 모른다.
(P.483) 『삼국유사』이야기는 그 무대가 되는 절이나 절터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곳들도 많다. 더듬거리며 근처까지는 가지만 사진에 담을 것도 별로 없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그저 백월산 아래 지천에 깔린 밤나무만 찍었다.

(P.484)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그러나 역시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는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찬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 모습이다.

(P.485)그러나 굴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자를 외딴 암자에 들인 부득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부동심만의 그것은 아니었으리라. 자꾸만 갈라지는 생각과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려 염불소리는 밤 깊을수록 높아갈 수밖에 없다. ‘심심전’이라는 표현은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문득, 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고 있을 가련한 여자를 생각하니, 염불도 한낱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염불로 공덕을 쌓는다고는 하나, 이럴 때의 염불은 손님의 관한 잠만 방해할 뿐인 것이다. 일연은 부득의 그런 마음을 읽어내고 있다.

(P.486)일연이 쓴 찬시 속에서 이런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또한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鄕歌)·한시(漢詩)·민요(民謠)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삼국유사』야 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P.502~504)거기에다 소년 일연은 자신과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 보았을 터이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 일연에게는 귀하나가 없는 사미승의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한귀가 잘랜 채 먼 이역에서 고국의 스님을 만나 고향에 돌아가거든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 달라고 말하는 소년은 정취보살이기에 앞서 일연 자신인지 모른다. 어머니를 떠나 머나 먼 강원도 산골에 와 있는 소년 일연의 마음에 그랬을 터이니 말이다. ‘아, 어머니. 저 먼 나라를 아십니까?’
익령현 덕기방은 낙산사에서 가까운 마을이었다. 그래서 범일은 한 쪽 귀가 잘린 정취보살상을 낙산사에 모셨다.

(P.504~505)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끊는 솥단지 앞에서 따듯한 불을 쬐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끊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P.506~507)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에는, 얼굴색 곱고 나이도 어렸으며, 입은 옷도 예뻤습니다. 좋은 음식이 있거든 당신과 나누고, 얼마 안 되더라도 따뜻한 옷이면 당신과 함께 입었지요. 이렇게 살아온 지 50년, 정들어 가까워 졌으며 사랑하게 그지없어 도타운 인연이라 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쇠약하고 병들기 해마다 심하고, 춥고 배고프기 날마다 팍팍하기만 합니다. 곁방에 장종지 하나 구걸하자 해도 사람들은 받아들여 주지 않고, 집집마다 돌며 부끄러움의 무게가 산과 언덕만큼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으니 살아나갈 겨를도 없는데, 부부간에 사이며 즐거운 마음이 들기나 하겠습니까?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걸림돌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쌓일 뿐, 지난날의 기쁨은 적이 금심과 고통으로 자리를 내주었군요. 당신이나 나나 어찌 이다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뭇 새가 함께 주리기보다 차라리 외짝 난새가 마주볼 거울을 가지는 게 낫겠지요.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다 못할 일, 그러나 가고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강하기는 여자가 더할까? 냉정히 현실을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여자가 더 빠를까? 구구 절절이 가슴을 친다. 조신은 조목조목 올바른 말을 하는 부인 앞에서 “기뻐했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속없기는 그저 남자다. 아이들을 둘씩 나누어 서로 다른 길을 향해 손을 놓고 가려다 조신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그것은 꿈의 끝이었다.

(P.508)불교적인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의 끝이기에 일연의 시가 붙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조와 달리 특별히 두 편을 썼는데, 그 가운데 한 편만 소개 한다. 일연이 임종을 한, 지금 경상북도 귄위군의 인각사 앞에 일연 시비를 세운 것은 지난 1985년, 거기 이 시가 새겨졌다.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P.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보이더라도 부분만 보인다. 그가 그린 한 부분만 보이고, 그가 한 말의 어느 한 부분만 들린다. 그래서 원효에 대해서는 가지가지 이야기가 난무한다.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P.531)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P.537)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원효 아닌 무애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P.545)한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었다. 그로 인해서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P.546)각승을 지어 처음 삼매의 요점을 열었고
뒤옹박 들고 춤추니 온 거리에 유행하였다네
달 밝은 요석궁 봄 잠은 옛일이니
문 닫힌 분황사 고영 자리만 비었구나

(P.551)지난 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P.568) 의상이 황복사에서 지낼 때였다. 제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는데, 매번 허공을 딛고 올라갈 뿐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 탑에는 돌 사다리를 놓지 않았다. 제자들도 계단에서 세 자쯤 떠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이에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면 괴이하다 할 게야.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만한 일이 아니지.

(P.569)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것만일까 싶었다.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하보다 저 세상의 부귀를 더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지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그렇지만 거기라고 사람 사는 세상인 바에야 왜 호사를 바라지 않고 다툼이 없겠는가 의문스러워 해본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목적으로 혹시 그렇게 길들여 놓지나 않았을까?

(P.569)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도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P.596) 무릇 미륵 신앙이란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동참하는 데서 이 신앙의 진수가 드러난다. 고성 해변의 고기가 그 전에 진표의 설법을 들었던 그 고기들일까? 다져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P.599)
눈앞을 가리던 바위는 멀리 물러나
숯돌처럼 평평해지네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은 밝아지네
부처의 뼈로 만든 간자를 찾아내
정결한 곳에 모시고
정성을 다하려 하네

(P.636)아마도 이 조의 본문과 찬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절의 재산은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P.656)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P.662)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째 그러시오?"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P.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은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경께 삼을 사표를 세울까?

(P.67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慕情)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P.701)“부처님이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이 못하고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P.704) (향가)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시가 장르.

(P.711)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P.736)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에 맞는다든지 도록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 서문의 첫 대목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 하는 데 직접적인 촉발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마련한 것이었다.


3.‘내가 저자라면’

♣아쉬운 점 1.

“문제는 이제부터다. 고난의 역사를 살았던 13세기의 저자와, 비슷한 상황에서 자력갱생의 논리를 찾으려 했던 20세기의 지식인을 넘어서는 21세기 삼국유사는 어떻게 될까.”

21세기에 민족주의로 집결시켜 줄 수 있는 동량을 가진 삼국유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우리 곁에 오래 둘 수 있을 것인가를 저자는 깊이 고민하고 있다. 저자는 윗글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바를 반추했을 때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온 민족이다. 알에서 깨어나 왕이 된 남자이거나, 가난한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집안에 남은 쌀을 탈탈 털어 밤길로 내 쫓는 여자이거나, 누구든 불성(佛性)을 가진 자라는 평등관에 힘입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들의 삶은 지혜롭고 감동적 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고운기가 결이 고운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에게 삼국유사는 ‘지혜롭고 감동적’인 것이다. 그 같은 생각은 강성으로 주장하지 않는 들려주기, 잠깐 쉬어 갈 수 있는 시심(詩心)이 보이는 보여주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혹자는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나 또한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편, 바로 그 낮은 톤의 일관성이 이 책의 걸림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난 2주일간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조셉캠벨이 마치 연인인양 내내 밀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나는 자주 객관적이 되었고 종내는 책읽기가 힘겨워졌다. 그러면서‘신화의 힘’ 과 우리나라의 ‘삼국유사’가 무엇이 다른지를 찾고 있었다. 두 책의 주제인 신화, 사실, 종교, 민담. 두 책의 주재료가 다 같은데 왜 요리의 맛은 다른가 하고 말이다.

들어가는 글에서 고운기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P.9)첫째,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삼국유사』를 읽으려 해도 앞뒤 배경을 모르니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그 배경을 설명해 주되,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 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물론 원전이 있었고 원전에 충실한 것은 역자의 기본적인 예의일 것이다. 하지만 기왕에 “이런 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기분으로” 였다면, 해설서로서 21세기에 맞는 완역은 충분히 했는지 몰라도 고운기 자신의 목소리는 작았다. 우리나라의 이윤기가 조셉캠벨의 ‘신화의 힘’을 번역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연’을 고운기가 이 십여 년 간 취재하여 다시 쓴 것인데 왜 자신의 목소리를 넣지 못했는지 몹시 아쉽다.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를 읽는 동안은 다음페이지에 대한 기대, 밑줄을 긋고 자신의 지표로 삼아 실천하고픈 촉매제 역할을 하는 힘이 ‘신화의 힘’에는 있었다.
영웅들이 등장하나 무엇 때문에 그가 영웅이 되었는지를 궁금하게 하고 그들을 닮고 싶다는 발화 역할을 하는 중요한 그 무엇이 빠져 있다. 조셉캠벨은 신화를 이야기 하면서도 그 간극을 현대인의 동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책의 집필 의도, ‘민족주의를 다지기 위해 거시적 안목으로 썼다면 그가 주목했던 김춘추와 유신, 원효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었어야 한다. 그밖에도‘추동’의 원동력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위인들과 신화속의 인물들에게 사물놀이를 불러 흥을 돋우고 꽹과리를 쳐야 할 많은 부분을 놓친 것은 저자의 타고난 태생적인,
바르고 정적인 사람인 까닭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 본다.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왔다. 애써 이 시기를 눈감아 버린 ‘삼국사기’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본문 중에서》

고운기, 그는 유난을 떨었다고 하지만 한껏 더, 아니 삼국유사의 현장에서 난장을 쳤어도 좋았다.

♣아쉬운 점 2.
국사시간에 백제의 짧지 않은 역사에 비해 그 최후가 너무 비참해 사료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 그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후손이 부여 서 씨라는 것 을 배웠다. 나는 그 몇 명 안되는 부여 서씨 중 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의자왕과 삼천 궁녀등, 잘 못 알려진 백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기대했던 바가 컸지만 백제부분은 현재 나와 있는 자료보다도 축소되었다. (이 부분에 대한 고운기의 아쉬움이 본문에 실려 있기는 하다.) 일연이 신라를 우위에 놓고 저술한 것처럼 고운기도 역시 700페이지 넘는 전체 분량의 3/2 가량을 신라를 설명하는데 할애했다.

♣맺는 글.
구본형 선생님이 대통령에게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새 지도자는 ‘한국인의 특별한 무엇으로 세계인을 유혹할 것인가?’ 에 대한 우리 문화의 신화와 차별성을 담은 원천으로 이 책을 권했다고 한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경쟁력’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한다. 짧은 타국 생활동안 몸소 경험하며 절실하게 느낀 경험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편적으로 기억되던 삼국시대의 여러 이야기들이 한 줄로 꿰어져 선명해졌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을 많이 만났다.

사진작가 양진이 “이 책이 히트치기를 바란다”고 한 것처럼 이 책이 도저한 일연의 혼을 실고, 고운기의 좀 더 활기찬 추동의 목소리를 실어 세계에서 우리나라를 알리는 전도서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나 읽혀지지 않아서 소곡주를 세 잔이나 마셔야 했다. 이 책에는 일연 80평생의 생애와 고운기의 이 십 여년의 도정이 함께 실려 있다.
그 수고를 생각 하면 나의 소곡주는 너무 약소한 제물이다.
책을 덮는 지금, 가슴이 뜨거워지며 숙연해진다.
고운기와 일연, 두 사람의 공통점의 으뜸은 인간에 대한 각별한 애정(愛情)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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