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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2일 20시 52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삶에 있어서도 저술에 있어서도 20세기에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삶의 부분에서는 ‘계약결혼’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저술활동에서는 ‘제2의 성’이라는 대표작으로 명성을 더한다.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사르트르라는 특출한 철학자를 만나면서 잉태되었다. 물론 자신도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가두기 아까운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에 계약결혼이 가능했다.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소르본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하던 중 만났다. 교수자격을 얻었을 때 사르트르가 수석, 보부아르는 차석이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그들은 계약결혼에 들어간다. 동거는 하지 않고 20년 동안 각자의 독립적인 생활을 존중한 계약결혼은 당시는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도 파격적인 사랑의 방식이다.
둘만의 여행을 즐기기도 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파트너와도 자유로운 사랑을 즐겼다. 사랑의 방법으로도 그렇지만, 역사적 법적 윤리적으로 자리를 잡은 제도적 형태의 가정을 뛰어넘는 형식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사랑과 결혼에 관한 새로운 감성을 만들어냈다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의 수용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계약결혼이 다시 화제에 오른 것은 보부아르가 죽은 뒤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공개되면서 이다. 계약결혼 기간 동안 사르트르가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즐긴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부아르도 다른 남자와 사랑을 주고받은 것이 공개된 것이다. 보부아르가 미성년자인 동성 제자들과 한 연애사건이 있었고, 미국의 소설가 넬슨 알그렌과의 관계도 유명세를 탔다. 44세때는 열일곱살이나 어린 클로드 란즈만과 8년이나 동거를 하기도 했다. 계약결혼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만들어내 그들이지만, 자유를 누리는 대가로 그들이 서로 받았던 상처도 가볍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표적 저작인 ‘제2의 성’은 보부아르가 41세였던 1949년에 쓴 여성에 관한 총괄서이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는 함축적 문장으로 유명하다. ‘제2의 성’ 이 주목을 받은 것은 시대적 배경의 영향도 크다. 프랑스는 당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직후의 아주 힘든 시기였다. 여자들은 결혼과 육아라는 명제에 역할이 한정되어 있었고, 사회전체가 여자의 자유를 용인하지 않는 시기였다. 또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보부아르가 내놓은 ‘제2의 성’은 여성을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역사적 유물론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보부아르의 주장은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모성의 굴레와 경제적인 의존은 여자들이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길들이는 사회적 조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조건을 깊이있게 묘사한 이 책은 사회에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여자의 성에 대해 과감하게 묘사된 내용은 충격을 던져주었다.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켰지만 세계적으로 찬반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카뮈는 프랑스 남성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했으며, 모리악은 포르노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보부아르는 1908년 1월 파리에서 부유한 집안이 큰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였지만 보부아르가 청소년기에 집안이 몰락하는 시련을 겪는다. 가정적 분위기에 사춘기 시절부터 심한 저항감을 느끼며 자랐고, 이런 경험들은 그녀의 작품에서 재현된다. 가톨릭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쳤으며,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라랑드, 브랑쉬비크, 심리학자인 뒤마에게 지도를 받았고 후일에 계약결혼을 한 사르트르와 소설가가 된 폴 니장도 만나게 된다. 21세때 교수 자격을 얻어 프랑스에서 가장 나이어린 철학교수가 되었다. 1931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교편을 잡았지만 1943년 첫 책이었던 ‘초대받은 여자’가 성공을 거두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한다. 1986년 세상을 떠났다.
소설로는 ‘타인의 피’ 공쿠르상을 받은 ‘레 망다랭’ 등이 유명하다. 자전적 작품인 ‘처녀시대’ ‘여자의 한창때’ ‘어떤 전후(戰後)’는 프랑스문학에서 문제가 많던 시기의 귀중한 기록으로서 소설작품 이상의 재미를 지니고 있다. ‘대장정 : 중국에 관한 에세이’ ‘미국에서의 나날’ 등 에세이와·기행문도 많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른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 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11]

이제 속임수는 그만두자.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14]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혜를 받는 자들은 그 장기적인 이익을 분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경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15]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 [16]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20]

인간에게 진보란 무엇이고 퇴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어떤 목표에 의거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절대로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는 사회나 각자 고유의 목표를 창출해낸다. 따라서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만 쇠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이상의 검토는 내가 지금까지 말한 바를 확인시켜준다. 즉 노년은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23]

그의 효심은 사회가 그에게 제시하는 틀 안에서만 발휘된다. 궁핍이 이런 풍습을 강요했기 때문이며, 오링을 산꼭대기로 운반함으로써 그는 충실한 아들로 보여지는 것이다. [76]

한 아이가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는 것이 장차 그의 인격 발달에 얼마나 큰 중요성을 지니는지 우리는 안다. 음식, 보호, 애정이 충분하지 않은 아이는 원한과 공포, 그리고 심지어 증오속에서 자란다. 이런 아이가 성인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격적이 된다. 그는 부모가 늙어 무능해지고 자활할 수 없게 되면 부모를 소홀히 대할 것이다. 반대로 부모들이 잘 먹이고 애지중지 기른 자식들은 행복하고 개방적이며 친절한 사람이 되고, 또한 애타심도 발달한다. [109]

모든 사회에서 그렇듯이 이러한 태도들은 이상하고도 우연한 방식으로 체험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대부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위, 부에 달려 있다. 특권자들의 운명은 하층민의 운명과 다르다. 집단과 가족에 따라 그들이 받는 대우도 다양하다. 이론과 실제는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노인들은 놀림을 받으면서 겉으로는 존경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반대 경우도 흔히 있다. 그들은 말로는 존경을 받지만, 동시에 육체적 무관심 속에 쇠퇴하도록 방치되기도 한다. [116]

노인은 생물학적 운명을 겪게 되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경제적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비생산적인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쇠퇴 곡선은 집단의 재원에 따라 빨리 혹은 더디게 내려가기도 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쇠퇴가 40세에 시작되는가 하면 다른 사회에서는 80세에 시작된다. [117]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18]

인간의 모험속에서 여성은 한 번도 주체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구실이고 원동력이었다. 여성의 조건은 변덕스러운, 그러나 의미있는 곡선을 그리며 발저해왔다. 사회적 범주로서 노인은 한 번도 이 세상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았다. 노인은 활동 능력이 있는 한 그 집단에 통합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가 집단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이 든 남자 성인일 뿐이다.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때서야 딴사람으로 보이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여자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으로 순수한 물체가 되는 것이다. 여자는 사회에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노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이다. [120]

노인문제는 권력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단지 지배 계급들 내부에서만 제기된다. 19세기까지 늙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노인들도 많지 않았다. 장수란 특혜를 받은 계급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의 수는 엄격히 말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노인들을 근본적으로 불문에 붙인다. [121]

소유지가 안정된 제도들에 의해 안전하게 보장받지 못하고, 군대의 힘을 빌어 무력으로 지켜질때, 노인들은 어둠속으로 멀리 추방된다. 체제는 젊은이들을 기초로 삼아서 세워지고 권력의 현실을 쥐고 있는 것도 젊은이들이다. 한편 호메로스는 트로이의 데모제롱트를 비웃는다. 그리고 그는 “노년의 그 저주받은 문턱”을 상기시키다. 아프로디테는 어떤 찬가에서 ‘신들도 노년을 증오한다’라고 말한다 [135]

그 역시 나이 많은 남자가 성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노인보다 더 불쌍한 것은 없을 것이다. 노파를 사랑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제 그를 저버린 것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자-그 원인은 시간이다-어찌하여 그가 불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48]

사람들은 노인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가장 위대한 일들이 성취되는 것은 “충고와 권위와 현명한 성숙함에 의해서이다. 노년에는 이러한 자질들이 사라지기는 커녕, 반대로 가장 풍부하게 갖추어진다.” “국가는 언제나 젊은이들에 의해 패망했고, 노인들에 의해 구출되고 복원되었다.” 카통은 노인들이 노쇠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노인은 정신을 계속 사용하고,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기의 정신을 고스란히 보존하다.” [165]

남자의 눈에 여자의 운명은 단지 에로티즘의 대상이며, 그런 이유로 여자란 늙고 추해지면 사회가 여자에게 설정해준 자리를 잃게 된다. 여자는 늙고 추해지면 괴물이 되어 혐오감과 심지어는 두려움까지 불러 일으킨다. [171]

신께서는 인간과 모든 동물들에게 30년간의 삶을 정해 놓았다. 당나귀나 개 원송이느 30년이라는 오랜 삶이 너무 고통스럽게 여겨져 각각 자신의 삶에서 당나귀는 19년, 개는 12년, 원숭이는 10년을 빼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그건데 인간은 이 동물들보다 현명하지 못했다.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은 전래 동화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장수의 대가로 노쇠라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30년보다 더 연장해주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당나귀가 포기한 18년, 개가 포기한 12년, 원숭이가 포기한 10년을 얻어내어 자기 삶에 보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70년의 인생을 갖게 되었다. 처음 30년은 애초부터 정해진 인간의 삶이요, 또 그 30년은 빨리 흘러간다. 그후에는 당나귀의 18년이 오니 이 기간동안 인간은 무거운 짐에 또 짐을 어깨에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먹을 밀을 방앗간에 가져다주어야 할 사람은 바고 그다. 그 다음에는 개의 12년이 온다. 이 기간 내내 인간은 이 구석 저 구석 기어다니며 으르렁거린다. 왜냐하면 물려고 해도 이젠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절이 지나면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이라고는 마지막 원숭이의 10년밖에 없다. 이제 그는 정신이 없고 약간 우스꽝스러워져, 아이들이 보면 웃고 조롱하는 이상한 짓을 한다.” [190]

단테는 인간의 삶을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활 모양의 선에 비교하는데, 그 선은 하늘의 정점까지 올라가서는 거기서부터 다시 내려온다. 절정은 35세에 위치한다. 그 후 인간은 천천히 기울어 쇠한다. 45세부터 70세까지가 노년이 시기이다. 이후는 고령이다. 현명하기만 하다면 이 마지막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이다. 단테는 고령의 노인을 육지를 보고 가만히 돛을 내리며 항구에 서서히 다가가는 항해자에 비유한다. [199]

그러나 그 속에 하나의 새로운 주제가 있으니, 그것은 늙은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는 흉측한 존재이지만 그녀 자신은 삶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는 대조적인 면이다. [210]

나는 전통적이며 완화된 상투적 표현들을 과감히 버리고, 발전을 위한 그 어떤 진실의 훼손도 거부하며, 살아온 세월의 단순한 축적을 성장이라고 간주하기를 거부하는 점에서 몽테뉴르 존경한다. 그러나 몽테뉴의 경우는 흥미로운 역설이 존재한다. 그 자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독자의 눈에는 금방 눈에 띈다. 그것은 몽테뉴의 수상록이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더 풍요롭고 내밀하며 독창적이고 심오해졌다는 점이다. [226]

경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좀더 발전하여, 노상인이 사회 전체에 어떻게 봉사하였던가를 깨닫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 노상인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장점을 부여한 것은 청교도들이 먼저 주장한 실리주의 였다. 그후 노상인은 특히 나이가 많이 들고 나서 존경받았다. 경제적인 번영이 지혜와 미덕을 보장해주었던 것이다. [266]

이오니아의 시인 밈네르모스가 한탄했던 것은 죽지 않는 노인 티토누스의 슬픈 운명이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결코 불멸의 삶이 아니었다. 죽지 않는 삶 대신 사람들은 이미 말한 바 있는 청춘의 샘을 꿈꾸었다. [269]

‘아베이롱과 타른의 농부들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 루벨라 드 쿠삭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노년에 이른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 의무를 망각해버리는 아들 딸들보다 더 흔한 것은 없다. 만약 문서화된 유보사항 없이, 혹은 취소 가능한 유언 없이 재산을 증여하는 부모들은 스스로 경멸받고, 종종 생활 필수품조차 부족한 상황에 부딪친다.” [273]

가족의 변화는 손자와 조부모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그들 사이에는 적대관계 대신 동맹관계가 이루어졌다. 이제 가족의 우두머리가 아닌 할아버지는 부모의 어깨 너머로 손자들과 공모자가 되었다. 반대로 손자들은 할아버지를 재미있고 너그러운 친구로 여겼다. [282]

40세부터 사람들은 열정과 야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환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우울증에 빠진다. 이전에는 죽음을 알지 못했건만, 이제 그는 인생 여정 막바지에 기다리고 있는 죽음을 보게 된다. 최소한 건강이 양호하고, 신체적으로 부족한 힘을 보충해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면, 노쇠하기 전 몇 해들은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283]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문명은 착취하는 계층과 착취당하는 계층간의 대립으로 특징 지어진다. 착취 계층을 보는가, 피착취 계층을 보는가에 따라서 노년이라는 단어는 매우 다른 두 가지 현실을 말한다. 전망을 왜곡시키는 것은 노년에 관계되는 사색들, 작품들과 증언들이 항상 상류층의 조건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299]

노년은 이중적 의미에서 삶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노년은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노년은 인생 최고의 성취이다. 연륜을 쌓아 온 자는 누구나 살아있는 자들 중 최상의 인간이다. 어떻게 보면 노년은 존재의 농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300]

사회는 노인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고아들, 미행 청소년들, 신체 장애자들의 운명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무관심은 언뜻 보기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각 집단 구성원들은 노인의 운명은 곧 자신의 미래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몇몇 노인들과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지배 계급이다. 그러나 활동력이 있는 인구 전체가 그 공모자이다. 사적인 생활에서도 자신들과 손자들은 노인들의 운명을 좀 더 즐겁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303]

고대부터 수명은 끊임없이 늘어왔다. 로마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18세였고, 17세기에는 25세였다. 당시 ‘아들의 평균연령’은 아버지가 죽을 당시 14세였다-앞으로는 55세 내지 60세가 될 것이다. 100명의 아이들 중 25명은 1세전에 죽었고, 나머지 25명은 20세 전에, 그리고 25명은 20세에서 45세 사이에 죽었으며, 10여명 정도만 60세까지 살았다. 80세-전설은 이것을 100살로 가공했다-는 매우 예외적 이었다. [310]

인구의 노화는 자본주의 민주 국가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현대 사회의 문제들 중 에베레스트 산’ 이라고 영국 보건성장관인 이안 맥 레오드는 말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더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사회에 통합되지도 않는다. 사회는 그들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정은 행정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노쇠는 정치적인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312]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나라들은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수익, 즉 개인의 수익이 아니라 자본의 수익을 참작하다. 노동 시장에서 일찍 탈락된 퇴직자들은 이익을 기초로 하는 사회가 인색하게 떠맡는 짐일 뿐이다.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만큼 오래 현역으로 남아있게 하고 그 다음 그들에게 괜찮은 생활을 보장하는 것, 이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그들에게 만족스러운 생활 수준을 보장하면서 일찍 퇴직 시키는 것, 이것 역시 타당한 선택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 국가들이 개인으로부터 노동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은 대부분 그들에게 빈곤을 언도하는 것이 된다. [316]

영국 뉴필드 사에서 실시한 매우 중요한 연구에 의하면 노년의 결함은 대부분 보충되었으며 나이가 더 들어서까지 극복되었다. 이 좋은 예를 요크셔의 직물공장에서 볼 수 있다. 날실의 접기와 틀 걸기는 정밀함을 요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많은 고령의 여자들이 눈이 잘 안보이는데도 완벽하게 그 일을 해내는 것이다. 즉 그녀들은 손가락에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이다. [321]

즉 노인들에게 강요된 무위 상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기술의 진보는 고령 노동자의 자격을 박탈한다. 왜냐하면 직업 교육은 40년 전에 받은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장에서 적절한 재교육을 시킨다면 그를 개선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질병과 과로 때문에 휴식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노쇠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자신의 체력에 유의해온 65세의 남자는, 혹사당한 늙은 노동자에게 너무나도 막중한 일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60세나 65세에 쉽게 폐품으로 처리되지 않도록 노년 동안에 최소한의 노력과 적은 양의 작업 시간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다. [325]

자식들이 부모를 돕는 일은 극히 드물다. 노인들 중 3분의 2는 자식들로부터 아무 원조도 받지 못한다. 때때로 그들은 부양료를 받기 위해 자식들을 법정에 고소한다. 그러나 소송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부양료가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자손들이 그들을 부양할 수 있다고 간주되면 공적인 원조가 보류되므로 노부모는 이 거절로 인해 훨씬 더 고통을 받는다. 또한 다음과 같은 문제도 있다. 즉 자식들이 실제로 부모에게 주고 있는 비용을 참작하는 것이 아니라, 줄수 있는 것을 참작하는 것이다. [333]

“우리 시민들 중 고령자들의 감정적인 문제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로는 노인들을 기피하는 사회적 배척 현상, 친구들 범위의 축소, 극심한 고독, 인간에 대한 존경심의 감소와 상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들 수 있다.” 풍족한 사회에서만이 노인들의 숫자가 많아질 수 있다고 해링턴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러한 풍족한 사회조차 노인들에게는 그 풍부함을 거절한다. 풍족한 사회도 노인들에게는 단지 ‘동물적인 생존’만 허용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344]

그러나 이 숫자들이 가족 관계나 우정의 실제적인 중요성을 밝혀줄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들은 상당히 모순적이고 논의의 여지가 많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밀라노에서 조사에 응한 노인들 중 남자의 10%와 여자의 13%가 “매우 외롭다”라고 말했다. 남자의 20%와 여자자의 22%는 “가끔 외롭다”고 말했다. 고독에 대한 감정은 연령이 올라 갈수록 심해졌다. 캘리포니아에서 배우자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 중 57%가, “매우 고독하다”고 대답했고, 그리고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16%가 “아주 외롭다”라고 대답했다. [347]

사람들은 자신이 외롭다거나 혹은 자식들로부터 소홀한 대접을 받는다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력이 빈약한 노인들에게 있어서 가족간의 관계가 사기를 높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넉넉한 사람들의 집에서는 친구들이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 매우 가까운 곳에 형제, 자매, 사촌 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노인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인에게 중요한 사람은 오로지 배우자와 아이들이다. 그리고 또한 배우자와 함께라면 둘이서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다. [349]

오늘날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는 노인들끼리만 함께 사는 것이 그들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관한 것이다. 빅토리아 플라자의 성공은 그 위치가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래서 가족들과 단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노인들만 살고 있는 ‘태양의 도시’ 들이 여럿 있다. 부동산 개발업자, 행정당국들은 노인들이 이렇게 자기들끼리 사는 것에 매우 만족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익성이 큰 사업이며 그들로서는 자기들 상품을 칭찬하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352]

다시 말해서 노인들의 절반 이상이 입원한 지 1년 이내에 죽는 것이다. 양로원의 생활 조건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노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이주든 이주는 죽음을 초래한다. 슬퍼해야 할 것은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많은 경우 남은 사람들의 운명은 포기, 차별, 쇠락, 정식착란, 죽음이라는 몇 개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358]

사회가 자기들을 책임지니까 그들은 자기 몸을 스스로 완전히 포기하고 사회에 맡겨버려 극단적인 수동성에 이르는 것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나는 노인들이 원한에 싸여 그들의 상황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복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362]

남자의 인생에서 퇴직은 뿌리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는 퇴직으로 인한 휴식이나 여가 시간 같은 어떤 이점과, 궁핍과 자격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이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대의 그로 만들어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이란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든, 혹은 운명적으로 강요당해서이든 퇴직한다는 것,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366]

무위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불만의 근본적인 원인, 그것은 가난이다. 특히 육체 노동자들이, 일한 당시에는 사무직 노동자들보다 일에 대한 애착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더 섭섭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373]

퇴직자들은 이제 살림을 꾸려나가기에 충분한 돈이 없다. 그는 아내에게 의존하고, 자식들에게 의존한다. 그는 자식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고, 왜소해졌다고 느낀다. 그는 낙오된다. 집안에서 잔일이라도 하려고 애쓰지만, 그럴 경우 흔히 아내는 그를 귀찮게 생각하고, 차라리 산책이나 나가라고 내보낸다. [375]

그런데 우리 시대의 역설, 그것은 바로 노인들이 옛날보다 더 건강이 좋다는 것이다. 그들은 좀더 오래 젊음을 유지한다. 그래서 무위는 노인들을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를 뿐이다. 좋은 건강상태로 마지막 20년을 산다는 것, 그러나 아무 쓸모 없는 행위로 산다는 것, 그것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모든 노인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381]

노인의 자살을 설명해 주는 것은 신체적, 심리적 요소들이다. 그에 따르면 자살은 하나의 우울증에 따른 사건보다는 평생 동안의 삶의 내력에 의해 발생한다. [386]

신의 섭리는 어질게도 우리가 살면서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인생의 모든 다른 시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인생의 흐름, 그 경사는 매우 완만하여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시계 바늘과도 같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가 스무 살 때에, 예순 살에 갖게 될 가정에서의 우월성을 주고, 거울에 얼굴을 비추면서 비교해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놀라자빠질 것이며, 그 얼굴에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할하루이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은 오늘과 거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느기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한 기적 중 하나이다. [397]

우리는 늙어가는 자를 우리 속에 있는 타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나이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나이에 기꺼이 동의하지 못한다. [399]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노년의 예기치 못했던 놀람, 자신의 현실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 나이르 말해주는 표시가 노인에게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어떻게 설명되는 가를 보게 된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실현 불가능한 일들 가운데 가장 급박하게 우리에게 그 실현을 자극하는 것, 그것은 자기 나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406]

자신에 대해 다소 만족스러운, 혹은 다소 타당성 있는 모습을 발견했든 아니든 우리는 우리가 실감할 수 없는 이 노년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우리는 몸으로 누년을 겪어야 한다. 우리에게 노년을 일깨워주는 것은 몸이 아니다. 노쇠가 우리의 육체를 점거하고 있다는 것을 일단 알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건강에 대한 노인들의 무관심은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표면적인 것이다. [419]

노인의 비극, 그것은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상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몸이 먼저 슬금슬금 뒷걸음질쳐 가버리는 것이다. 피로가 정신적 충동의 도약을 깨버린다. 노인은 뿌연 안개 저 너머의 추억을 더듬는다. [410]

독신자들이나 홀아비들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성교의 빈도수가 훨씬 더 많다. 부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성적 유혹이 생겨나는 것이다. 또 습관이나 묵계가 성적 만족을 촉진시킨다. 신체적 장애들을 극복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 또 불륜의 사랑보다는 합법적인 사랑이 세론으로부터 더 호의적이므로 늙은 남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448]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하나의 해결책은 자위 행위이다. ‘성과학’지의 질문에 답한 응답자 중 4분의 1이 오래전부터 또는 60세 이후부터 그 방법만을 사용했다고 답한다 그러므로 60세 이후부터 자위에 의존해 온 노인들의 경우는 노화로 인해 다시 자위 행위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50]

노인들은 에로틱한 독서, 외설적인 예술작품, 음담패설에서 쾌락을 찾거나, 젊은 여자들을 사귐으로써 또는 비밀스런 만남을 갖는데서 만족을 느낀다. 또는 페티시즘이나 사디마조히즘 등 다양한 성도착에 빠진다. 특히 여든 이후의 노인은 남의 정사를 몰래 훔쳐보는 변태 성욕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452]

모든 앙케트 조사들은 여자들의 성관계는 빈도수에 있어 남자들보다 적다는 것을 보여준다 킨제이에 의하면 50세의 남자들 중에 여전히 성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은 97%인데 비해 여자들은 93%이다. 60세 남자는 94% 그리고 여자의 경우는 80%뿐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어느 연령이고 간에 남자는 주체이고 여자는 하나의 대상,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자의 운명은 남편의 운명에 따라 변한다. [485]

나이는 우리들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과거는 점점 더 육중해지고, 반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노인이란 ‘살아온 긴 생을 뒤로 갖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희망이 매우 한정된 인간이다’라고 정의 할 수 있다. [505]

어느 누구도 “나는 아름다운 인생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생은 소유할 수 도 지배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명예가 ‘행복을 위한 찬란한 슬픔’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사실 명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남의 눈에 보이는 헛된 신기루일 뿐이다. [516]

노인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어린 시절이다. 프로이트 이후 우리는 개인과 그의 세계 형성에 있어서 유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몽테뉴도 유년기의 중요성을 예감했었다. 유년기때 받은 인상들은 깊이 아로새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성인은 그것들을 상기해 볼 여유가 없다. 당장 현실적인 안정을 찾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이 완화될 때 비로소 유년기의 인상들이 다시 나타나다. [518]

따라서 장년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미래는 질적으로 변한다. 65세의 우리는 45세 때보다 단지 수무 살만 더 먹은 것이 아니다. 무제한의 미래-무한한 것으로 보이던 미래-를 제한된 미래와 바꾼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지평선에서 어떤 경계표지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의 지평선이 보일 뿐이었다. 샤토브리앙은 자기의 먼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썼다. “예전에 꿈 꿀 때에는 젊음이 앞에 있었기에 내가 추구하던 미지의 것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경계 표지를 더듬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다.” [529]

철학, 이념, 정치 등과 같은 몇몇 분야에서 노인은 젊은이들에게는 없는 종합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사례가 중요한 사건인가 혹은 사소한 사건인가를 평가하고, 예외를 규칙에 귀속시키거나 혹은 그 예외에 마땅한 자리를 지정해주고, 세부사항을 전체에 종속시키고, 일화를 무시하고, 사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유사하고 상이한 사건들을 많이 관찰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경험이 있다. 그것은 노년 자체의 경험이다. [534]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뒤처진다. 나는 나 자신의 예를 통해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20세 이후부터 많은 공부를 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나는 상대적으로 점점 더 무지해졌다 새로운 발견들이 늘어나고 학문은 풍부해져서 적어도 몇몇 분야에서만은 그 흐름을 따라잡기 위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게 낯선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는 것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만 갔다. [535]

그 자신의 존재의 객관화로서의 실체 그것이 바로 그의 상점이었다 상점이 몰락하자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며, 죽음이 유예된 사람일 뿐이었다. 세상의 나머지를 보지 못하고 그는 분노에 찬 거부와 과거의 추억들을 고집할 것이다. 작은 상점들을 파멸시키는 대형백화점들이 작은 도시에 자리잡는 경우 현재에도 유사한 비극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업의 집중이 이와 같은 현상을 증대시킨다. [539]

물론 작가가 먼저 전달하기를 선택하고 그 후 상상력을 이용한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글쓰기라는 천직을 결정하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의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언제나 문학 작품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문학작품이란 종이 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통해 주체가 유희와 몽상에 의해 창조해낸 비현실적 세게의 물질화이다. 비현실적 세계가 안정성을 갖고 경험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기 그것이 현실 세계의 다른 차원으로서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559]

물론 인간의 작품은 잠재적인 씨앗에서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며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작품은 풍요해지고 우회하기도, 퇴행하기도 하면서 존재의 움직임과 합치된다. 그러나 작품은 말하자면 우리의 어린 시절에 이미 계획된 것이다. 한 개인이 근본적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적 존재로 형성되는 것은 바로 이 어린 시절이다. [562]

클레망소의 개인적인 역사 속에서 이 순간은 그가,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과거의 태도를 고집하는 노인은 현실에 의해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클레망소의 사회주의는 어떤 반동적인 정치로 변질될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589]

정치인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역사에 의해 죽기 위해 활동한다. 정치인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빠져나올 수 없는 역사의 어떤 순간을 살아낸다. 사태의 새로운 흐름에 적응했다 할지라도 대중의 눈에 그는 어떤 전술과, 어떤 방법, 어떤 시행령의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605]

“얘야, 나의 운명도 나의 늙음도 무러워하지 말아라. 어린시절 친구들 중 마지막 친구를 잃고, 나의 고향에서 그리고 가족 품에서 이방인으로 있게 된 것이 벌써 40년이 되었단다. 나는 나와 유사한 사람, 내가 친구 동료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긴 인생은 재앙이란다.” [607]

그러므로 노년은 젊은시절보다도 훨씬 더 카르페 디엠의 시기이다. “씨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는”순간이라고 퐁트넬은 말한다. “더 이상 수고의 계절이 아니라 습관의 계절이다”라고 도빈녜는 말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본 바로는 현대 사회는 노인들에게서 그 여가를 즐길 물질적인 수단을 빼앗음과 동시에 여가를 제공한다. [625]

노년을 가장 활동적으로 보낸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변화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권좌에서 물러나 클레망소는 글을 썼다. 그는 정치에 말려들긴 했어도 활동이 줄어들었을 때 학자로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자기 관심의 핵심이었던 것을 포기하기란 함든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서는 악순환이 생겨난다.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호기심과 정열은 저하되며, 무관심하므로 세계가 공허해진다. 그 공허한 세계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활동할 이유를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죽음이 우리 내면에, 그리고 사물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632]

노인은 새로운 것을 걱정스럽게 받아들인다. 선택한다는 것은 노인을 두렵게 한다. 그의 열등감은 망설임, 의심으로 나타난다. 노인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명령에 의지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652]

우리는 노년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는 편견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부터, 성인이 된 인간은 인간 조건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지니지 못한 미덕들을 나이에 전가시켰다. 즉 아이들에게는 순순함을, 노인에게는 평온함을 전가시켰다. 인간은 말년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갈들이 해소되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보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을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678]

노인의 괴벽, 인색함, 음험함은 우리의 역정을 돋우기도 하고, 미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은 실로 비장한 것이다. 이 투쟁은 인간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벌레나 무기력한 사물로 축소시켜버리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도의 비참함속에서 최소한의 위엄을 지니고 싶어 한다는 것에는 무언가 영웅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680]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서 말년은 하나의 해방이다. 평생 동안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식들에게 헌신한 여자들은 마침내 자신을 염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엄격하게 정돈된 일본의 부르주아들은 때때로 원기 왕성한 노년을 보낸다. 사람들은 말년을 유용하게 보내기 위해 70세에 이혼하고, 그 후에도 이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노인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그때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구속과 금지에 대한 한 노파의 반항, 그것은 영화화된 바 있는 브레히트의 ‘비열한 노파’의 주제이다. [683]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758]

살아오면서 겪은 손상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은퇴한 자는 현재 자기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한다. 그는 항상 삶의 의미를 도둑질 당했었기 때문이다. 강철법과 같이 가차없는 법이라도 법은 단지 삶의 모방만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삶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가능성의 고안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직업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제 주위에는 사막만이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을 목표들, 가치들, 존재 이유들로 가득 채울만한 계획들에 착수할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759]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정책, 노인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계 문제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761]


● 내가 저자라면

책에 대하여

이제 내게 남은 건 오직 뼈뿐
죽음의 화살이 가차없이 꽂힌
신경도 근육도 없는, 바람 빠진, 문어 같은 앙상한 해골
떨릴까 무서워 감히 팔도 쳐다보지 못하네
---롱사드의 소네트 중 한구절

보부아르가 61세였던 1969년 출간된 ‘노년’은 읽기에 그리 기분 좋은 책은 아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언젠가 다가올 노년의 내 모습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노년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로 보기 흉해서 눈을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다. 저자 보부아르는 8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노년의 모습을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 그 일관된 모습은 적나라한 노년 바로 그것이다.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간의 노화가 어떻게 진행되며, 노년이 되면 사회적으로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보부아르는 마치 한 점의 온정도 없는 양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필치로 담담하고 건조하게 있는 그대로의 노년을 그려낸다.

책을 읽으며 감탄하는 것은 저자의 광대한 지적 스펙트럼이다. 저자는 역사에서 철학 인류학 생물학 사회학 민속학 그리고 의학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분야의 이론을 끌어왔다. 남태평양의 섬에 거주하는 종족에서 에스키모까지, 서양에서 일본까지, 종횡으로 엮어진 생생한 삶의 사례들은 책의 내용과 이론적 뒷받침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 변천해온 노년의 삶과 노인에 대한 사회적 고려 등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층 실감을 더해 주면서 역사의 또 다른 형태를 읽는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노년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더욱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은 역사적 명사들인 문필가 예술인 정치인들의 사례이다. 후대들에게 작품과 업적으로만 남아있는 그들이 노년의 고통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은 대부분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다. 노년의 고통이 바로 나의 것일수 있다는 느낌을 직접적으로 전해준다.
사회구조와 고용구조, 연금시스템에 이어 유럽과 미국의 사회복지시스템까지 구조적으로 분석한 내용들은 책 속이 아닌 현실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하고 양로원의 현장감있는 묘사는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진 책은 1부에서는 외부에서 본 노년을 다룬다. 생물학과 의학으로 인간이 노년을 맞이하면서 어떠한 몸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고, 사회적 역사적으로는 노년이 어떤 대우를 받아왔는가를 상세하게 파헤친다. 2부는 내면에서 본 노년을 그리고 있다. 노인이 된 사람이 스스로 어떻게 그 현상을 수용하고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례들이 생생하다는 게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알 수 있는 유명인들의 삶을 그대로 표현해, 한 개인이 겪는 자신과 육체와의 관계 등이 실감을 더한다. 시간적 역사적 사회적 관계와의 변화에 대한 고찰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 보부아르는 ‘결론’에서 노년이 우스꽝스러워지지 않는 방법, 수치스러운 노인정책 등에 대하여 통렬하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방대한 분량의 본문에서는 상세한 언급이 없는 게 아쉽다.

이런 의견도...

* 분야별 사례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의문이다. 책에 실려있는 사례들은 다양하고 현실적이다. 그러한 사례들이 책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사례에 할애하고 있다.

* 책에 인용된 사례들의 내용이 너무 길다. 톨스토이 부인, 위고, 클레망스 등의 사례는 내용이 너무 길어서 무엇을 얘기하려 끌어온 것인지 혼란스럽다.

* ‘역사사회에서의 노년’의 지나치게 긴 인용은 로마에 치우쳐 있다. 로마의 역사적 위치는 인정하지만 로마가 서양사회의 사회와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 저자가 밝혔듯이 연구는 서양사회에 국한되었다.(동양은 중국만 포함 한다고 했으나 일부 언급에 그침) 저자가 이 책을 저작할때의 시점을 보면 동양 사회를 고찰하기 어려운 시기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동양사회의 노년에 대한 인식을 아예 무시한 것은 지나치다.

* 선택과 집중이 보이지 않는다. 책의 내용은 깊고 넓으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초점을 찾기 어려웠다. 단지 노년에 대한 현상을 전달하려 했다면 성공적이다.

* 수많은 사례와 이론으로 방증해 보이는 노년의 형태가 돋보이지만 정작 저자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보인다. 노년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가 아쉬웠다.

* 노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책의 내용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을 이론과 머리로만 파헤친 내용이 부담스럽다. 가슴으로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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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3 00:18:43 *.36.210.80
* 리뷰 속의 리뷰/ 노년의 관심

^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 [16]

서양문화 특히 미국문화의 영향은 무엇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잘 키워야 잘 대접 받는 다는 give & take논리도 일부 수긍은 되지만 꼭 들어맞는 이치는 아니지요. 사람은 저마다의 온전한 자기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 노인문제는 권력의 문제이다.[121]
보통의 가정에서도 이 문제는 다르지 않다고 보여져요. 노인의 힘은 젊은 시절에 대한 대가 이기도 하지요.

^ 그 역시 나이 많은 남자가 성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노인보다 더 불쌍한 것은 없을 것이다. 노파를 사랑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제 그를 저버린 것을 향유하고 싶어하는 자-그 원인은 시간이다-어찌하여 그가 불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48]

^ 사람들은 노인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가장 위대한 일들이 성취되는 것은 “충고와 권위와 현명한 성숙함에 의해서이다. 노년에는 이러한 자질들이 사라지기는 커녕, 반대로 가장 풍부하게 갖추어진다.” “국가는 언제나 젊은이들에 의해 패망했고, 노인들에 의해 구출되고 복원되었다.” 카통은 노인들이 노쇠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노인은 정신을 계속 사용하고,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기의 정신을 고스란히 보존하다.” [165]

이 부분에 적극 동의. 노인들은 공원이나 배회하며 중요한 일은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하며 쉬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시간을 거슬러 경험을 사기는 쉽지 않다. 삶은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속의 구체적인 것이기에 체험의 진정성에 의해 우리는 방향과 길을 모색한다.

^ 남자의 눈에 여자의 운명은 단지 에로티즘의 대상이며, 그런 이유로 여자란 늙고 추해지면 사회가 여자에게 설정해준 자리를 잃게 된다. 여자는 늙고 추해지면 괴물이 되어 혐오감과 심지어는 두려움까지 불러 일으킨다. [171]

동양적 헌신과 서양적 이기적 개인주의의 극명한 차이가 아닐 런지. 자기 상징성의 의존도에 대한 종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나이들면 남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심하게는 강아지만도 못할 수가 있다. 한국 남성들이 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여성은 존재가치를 인정 받기 위해 희생할 줄 안다. 그래서 우리 가슴 속에 어머니는 영원하다.

^ 단테는 인간의 삶을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활 모양의 선에 비교하는데, 그 선은 하늘의 정점까지 올라가서는 거기서부터 다시 내려온다. 절정은 35세에 위치한다. 그 후 인간은 천천히 기울어 쇠한다. 45세부터 70세까지가 노년이 시기이다. 이후는 고령이다. 현명하기만 하다면 이 마지막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이다. 단테는 고령의 노인을 육지를 보고 가만히 돛을 내리며 항구에 서서히 다가가는 항해자에 비유한다. [199]

우리가 노년에 대해 너무 무책임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구절이다. 이 숫자가 주는 의미가 오늘의 현실과 우리 시대에 심상치 않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학위 따는 데에 보낸다. 요즘 같은 경우 대학원까지 졸업하면 30살 이다.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돈벌어 5년 안에 결혼하기조차 쉽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절정의 시기에 우리는 본성보다 물질의 세계에 더 집착하여 우리의 성을 잃어버리고 산다. 파행적 왜곡의 문화에 먼저 도취되기도 쉽다. 35세의 절정 후 성장의 10년을 유지하지 못하면 청춘의 장년을 맞이하기가 힘들어진다. 먼저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다는 것이 가장 주의 깊게 살펴야할 일인 것이다. 이것을 자각해야 한다.

^ 노상인은 특히 나이가 많이 들고 나서 존경받았다. 경제적인 번영이 지혜와 미덕을 보장해주었던 것이다. [266]

노년은 배풀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경험이든 지혜든 금전이든 옛날이야기든 간에.

^ 청춘의 샘을 꿈꾸었다. [269]

책 제목이나 글감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

^ ‘아베이롱과 타른의 농부들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 루벨라 드 쿠삭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노년에 이른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 의무를 망각해버리는 아들 딸들보다 더 흔한 것은 없다. 만약 문서화된 유보사항 없이, 혹은 취소 가능한 유언 없이 재산을 증여하는 부모들은 스스로 경멸받고, 종종 생활 필수품조차 부족한 상황에 부딪친다.” [273]
젊음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야 가능한 일인지가 나타난다. 불신이 아니라 변화 양상이다. 고집부려서 될 일이 아닌 것은 앞 세대가 흔들리면 후세대가 휘청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 40세부터 사람들은 열정과 야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환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우울증에 빠진다. 이전에는 죽음을 알지 못했건만, 이제 그는 인생 여정 막바지에 기다리고 있는 죽음을 보게 된다. 최소한 건강이 양호하고, 신체적으로 부족한 힘을 보충해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면, 노쇠하기 전 몇 해들은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283]

적극 동의. 나는 개인적으로 50세 이후에는 "뽕맛"을 일과 병행하여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에서 자유로우면 더 없이 좋다.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 할 수 있다. 45세 전후의 숫자는 무지하게 의미있는 숫자이다. 철이 드는 숫자라고 해야 할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준비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없다. 무리 없이 번득임으로 가장 짱짱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한다. 이때의 귀로가 후반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된다.

^ 노년은 이중적 의미에서 삶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노년은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노년은 인생 최고의 성취이다. 연륜을 쌓아 온 자는 누구나 살아있는 자들 중 최상의 인간이다. 어떻게 보면 노년은 존재의 농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300]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구절. 내 인생도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 그녀들은 손가락에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이다. [321]

손맛 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오래 해온 솜씨에 의해 손에 익어서 기계보다 정확한. 나는 그렇기 때문에 노년에도 강력하게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함. 그것으로써 또 다른 발견이 이루어질 것임. 일테면 의욕, 성취, 보람, 기쁨, 행복, 존재감, 등 한가함도 생산적인 것과 어울릴 수 있어야 뿌듯할 수 있다고 여겨짐.

그리고 이 부분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오랜 단순 작업들이다. 꼭 부가가치 높은 일들만을 선택하여 머리로만 살면서 지시와 권위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노인의 경우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능동적 움직임을 택하여야 한다고 본다. 운동과 병행하거나. 다시 아이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도 점점 죽어간다.

노인들에게 강요된 무위 상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 우리는 그들이 60세나 65세에 쉽게 폐품으로 처리되지 않도록 노년 동안에 최소한의 노력과 적은 양의 작업 시간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다. [325]

학교가 정년을 70세로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요즘 70세도 너무 젊다. 건강을 증진시키고 90세 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개인의 자각은 물론 사회가 앞장 서 이끌어 가야한다. 우리는 우리의 수명을 힘껏 다 살아내어 후련히 살다가 홀연히 생을 마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 다른 한편으로 경제력이 빈약한 노인들에게 있어서 가족간의 관계가 사기를 높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넉넉한 사람들의 집에서는 친구들이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349]

^ 남자의 인생에서 퇴직은 뿌리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는 퇴직으로 인한 휴식이나 여가 시간 같은 어떤 이점과, 궁핍과 자격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이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대의 그로 만들어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이란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든, 혹은 운명적으로 강요당해서이든 퇴직한다는 것,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366]

시대의 요청을 예견하고 먼저 이것을 뒤집어 나가기 위해서 43에 이르러 부지깽이님은 그토록 울었나보다.

^ 무위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불만의 근본적인 원인, 그것은 가난이다. 특히 육체 노동자들이, 일한 당시에는 사무직 노동자들보다 일에 대한 애착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더 섭섭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373]

그리고 또 하나 있다.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 노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자체가 불안을 배가 시킨다.

^ 우리 시대의 역설, 그것은 바로 노인들이 옛날보다 더 건강이 좋다는 것이다. 그들은 좀더 오래 젊음을 유지한다. 그래서 무위는 노인들을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를 뿐이다. 좋은 건강상태로 마지막 20년을 산다는 것, 그러나 아무 쓸모 없는 행위로 산다는 것, 그것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모든 노인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381]

맞아요!

^ 우리는 늙어가는 자를 우리 속에 있는 타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나이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나이에 기꺼이 동의하지 못한다. [399]

^ 노쇠가 우리의 육체를 점거하고 있다는 것을 일단 알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건강에 대한 노인들의 무관심은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표면적인 것이다. [419]

^ 불륜의 사랑보다는 합법적인 사랑이 세론으로부터 더 호의적이므로 늙은 남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448]

이 대목에서 왜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 짓 저 짓 다 해보았지만 조강지처가 떳떳하더라는 계약 결혼자의 충언인가.

^ 결혼한 여자의 운명은 남편의 운명에 따라 변한다. [485]

서양식에도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

^ 나이는 우리들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과거는 점점 더 육중해지고, 반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노인이란 ‘살아온 긴 생을 뒤로 갖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희망이 매우 한정된 인간이다’라고 정의 할 수 있다. [505]

그래서 미래 풍광을 써야 하는 것이지. 길게 아주 길고 자세하게.

^ 노인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어린 시절이다. 프로이트 이후 우리는 개인과 그의 세계 형성에 있어서 유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몽테뉴도 유년기의 중요성을 예감했었다. 유년기때 받은 인상들은 깊이 아로새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성인은 그것들을 상기해 볼 여유가 없다. 당장 현실적인 안정을 찾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이 완화될 때 비로소 유년기의 인상들이 다시 나타나다. [518]

나는 유년의 기억이 너무도 촘촘하여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하고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다. "자서전? 정선이는 유명인이 아니야. 누가 네 자서전을 읽겠냐? 네 주 관심사가 뭐야? 필요는 뭐야? 돈? 그러면 돈을 써야지." ㅋㅋ 그럴 줄 알았다.

^ 따라서 장년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미래는 질적으로 변한다. 65세의 우리는 45세 때보다 단지 수무 살만 더 먹은 것이 아니다. 무제한의 미래-무한한 것으로 보이던 미래-를 제한된 미래와 바꾼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지평선에서 어떤 경계표지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의 지평선이 보일 뿐이었다. 샤토브리앙은 자기의 먼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썼다. “예전에 꿈 꿀 때에는 젊음이 앞에 있었기에 내가 추구하던 미지의 것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경계 표지를 더듬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다.” [529]

나, 지극히 정상인 맞잖아. 징징거림이 지나치긴 하지만.

^ 철학, 이념, 정치 등과 같은 몇몇 분야에서 노인은 젊은이들에게는 없는 종합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사례가 중요한 사건인가 혹은 사소한 사건인가를 평가하고, 예외를 규칙에 귀속시키거나 혹은 그 예외에 마땅한 자리를 지정해주고, 세부사항을 전체에 종속시키고, 일화를 무시하고, 사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유사하고 상이한 사건들을 많이 관찰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경험이 있다. 그것은 노년 자체의 경험이다. [534]

^ 그 자신의 존재의 객관화로서의 실체 그것이 바로 그의 상점이었다 상점이 몰락하자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며, 죽음이 유예된 사람일 뿐이었다. 세상의 나머지를 보지 못하고 그는 분노에 찬 거부와 과거의 추억들을 고집할 것이다. 작은 상점들을 파멸시키는 대형백화점들이 작은 도시에 자리잡는 경우 현재에도 유사한 비극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업의 집중이 이와 같은 현상을 증대시킨다. [539]

자크 아탈리가 주장하는 신유토피아, 인간적이 길이 생각난다.

^ 물론 작가가 먼저 전달하기를 선택하고 그 후 상상력을 이용한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글쓰기라는 천직을 결정하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의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언제나 문학 작품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문학작품이란 종이 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통해 주체가 유희와 몽상에 의해 창조해낸 비현실적 세계의 물질화이다. 비현실적 세계가 안정성을 갖고 경험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현실 세계의 다른 차원으로서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559]

글쓰기에 명심하고 생각해 볼 구절이다.

^ 물론 인간의 작품은 잠재적인 씨앗에서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며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작품은 풍요해지고 우회하기도, 퇴행하기도 하면서 존재의 움직임과 합치된다. 그러나 작품은 말하자면 우리의 어린 시절에 이미 계획된 것이다. 한 개인이 근본적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적 존재로 형성되는 것은 바로 이 어린 시절이다. [562]

섬뜩하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하다. 재능이란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 근본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 노년은 젊은시절보다도 훨씬 더 카르페 디엠의 시기이다. “씨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는”순간이라고 퐁트넬은 말한다. “더 이상 수고의 계절이 아니라 습관의 계절이다”라고 도빈녜는 말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본 바로는 현대 사회는 노인들에게서 그 여가를 즐길 물질적인 수단을 빼앗음과 동시에 여가를 제공한다. [625]

언뜻 앞의 말이 맞아 보인다. 이 흐름을 모르면 갇혀 살 수 밖에 없겠구나.

노년을 가장 활동적으로 보낸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변화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632]

^ 노인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명령에 의지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652]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아들에 대한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성씨를 따르는 딸보다 아들이 지배적인 신뢰를 갖는 이유이다. 그러나 요즘의 신세대 남자들을 지휘하는 것은 아내, 곧 여자들 이다.

^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을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678]

^ 노인의 괴벽, 인색함, 음험함은 우리의 역정을 돋우기도 하고, 미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은 실로 비장한 것이다. 이 투쟁은 인간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벌레나 무기력한 사물로 축소시켜버리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도의 비참함속에서 최소한의 위엄을 지니고 싶어 한다는 것에는 무언가 영웅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680]

이 말, 이 말이 나의 테마이다. 나는 어떻게 노인다워질 수 있을까?

^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서 말년은 하나의 해방이다. ...
그때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구속과 금지에 대한 한 노파의 반항, 그것은 영화화된 바 있는 브레히트의 ‘비열한 노파’의 주제이다. [683]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크게 다를까?

^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758]

내 삶에 숨통이 트이는 매우 감동적인 문구다. 이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연구원 되기 정말 잘했다. 내 시간과 노력과 그동안의 물질에 대한 포기가 힘을 얻게 된다. Wow!

^ 살아오면서 겪은 손상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은퇴한 자는 현재 자기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한다. 그는 항상 삶의 의미를 도둑질 당했었기 때문이다. 강철법과 같이 가차없는 법이라도 법은 단지 삶의 모방만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삶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가능성의 고안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직업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제 주위에는 사막만이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을 목표들, 가치들, 존재 이유들로 가득 채울만한 계획들에 착수할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759]

이 책을 읽게 하는 부지깽이님의 혁명적 사상이 느껴지는 문구다.

^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정책, 노인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계 문제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761]

위의 문제를 사회와 정치가 해야 하는 것이라면 아래의 해답은 변.경.연이 주창하는 시대적 사명이다.


리뷰 속의 리뷰를 시도해 보니 재미가 있다. 리뷰를 한 유인창님은 나보다 젊은 사람 같다. 그의 인용문으로 나는 오늘 소중한 글귀를 얻었다. 즐거운 일이다.


애쓴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레이스의 첫 완주자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대의 꿈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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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3.23 12:15:01 *.51.218.186
아휴 깜짝이야, 무슨 댓글이 본문보다 깁니까, 써니!! 열정이 넘치다 못해 할 일 되게 없는 사람으로 오해 받겠어요.ㅋㅋㅋ.

유인창님, 레이스를 마치신 걸 축하합니다.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루 더 유예된 스트레스를 일찌감치 물리치고 여유를 즐기시는 님은 인생이 명료하고 늘 정리가 잘된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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