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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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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3일 21시 32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나는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30년이 넘게 단 하루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고 잠든 적이 없다.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낸 것이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갖게 되는 관심을 결코 줄어들게 하지는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샤르트르는 자신의 삶에 있어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보부아르만의 모자이크를 채워나가는 데 있어 너무나 큰 영향을 준 존재인 것 같다. 올해로 시몬 드 보부아르 탄생 100주년을 맞이 한다고 한다.
1908년 1월9일생인 보부아르는 철학가, 소설가로 특히 실존주의 철학가 사르트르의 평생 동반자로 더 유명하다. 1930년대,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맺어 시대를 앞서갔던 여인.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운명을 생각해볼 수 없는 시대에 결혼과 출산, 여성에게 주어진 가사를 과감히 거부했던 여인. 각자 호텔의 다른 방에서 독립적으로 살면서 자유로운 연애활동을 벌였지만 항상 서로에게 되돌아왔던 전설적인 커플이었다. 단순한 성적 파트너가 아닌,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적 가치들 – 자유, 사랑, 독립, 실존 – 을 함께 고민하고 숙성시켰던 지적 친구라는 지적이 합당할 것이다. 항상 곁에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의 감정, 생활, 사상, 작업에서 중요한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 했고, 조언과 행동으로써 변함없이 서로를 후원해 주었다. 그들은 공동의 가사 및 자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지냈으며, 자신들의 독립적 지적 영역에 대한 자유를 철저히 추구했다. 상대방을 존칭으로 부르는 일을 단 한번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신뢰와 친밀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두터워 졌고, 결국 그들은 곳곳에서 단숨에 자신들만의 학문적 가치와 인정 그리고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노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보부아르에 대한 느낌은 그가 철저한 좌파적 개혁가, 혁명가(?)의 삶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구 유럽에서 좌파 학문의 거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실천력이 거세된 채 강단에 영향력이 머물러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보부아르의 책에 대한 느낌만 말한다면 다분히 격정적이며, 현실 참여적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폐물’ 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15p

정확한 분석이다. 굳이 정치경제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 숨쉬는 곳은 자본주의(資本主義)이다. 자본주의에서 있어서 모든 것의 가치 척도는 ‘이윤’(利潤)이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존재는 어떠한 사회적 윤리와 관습이 있다 하더라도, 폐물(廢物) 취급을 당하기 일쑤이다. 물론 보부아르는 ‘노인’들의 삶에 대해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행하지는 않았다. 다만 각 시기별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노년’이 규정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학작품과 문학가들의 실제 사례 속에서 ‘노년’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어왔는지를 아주 꼼꼼하게 예증하고 있다.

저자의 다른 서적을 살펴 보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보부아르의 삶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노인, 여성, 노동자……)을 대변하고, 그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현실참여의 의지를 알 수 있다. 물론 그녀의 대부분 학문적 노력과 실천들이 여성문제 해결에 편중된 면이 없지 않지만, <노년>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서 그녀가 단순히 여성문제만이 아닌 다른 현실 문제와 해결에 대해 깊이 관심과 애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년은 우리 문명의 모든 실패를 고발한다.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온통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말년을 빈 손으로 외롭게 맞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760p

그녀는 노인들의 억압된 조건과 비인간적인 관계를 폭로하면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다시 재창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새롭게 고민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와 같은 서구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존재하는 억압과 부자유 그리고 소외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함에도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해결방법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마찬가지로 <노년>이라는 책도 방대한 저술과 인용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의 삶’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에 대한 ‘빈약함’은 무척이나 아쉽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 자각과 현실에의 참여를 자유의지에 호소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이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노년

서론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7p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마르쿠제는, 소비 사회는 불행의 의식을 행복의 의식으로 대체시켰고, 모든 죄의식의 감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 사회의 행복 의식, 그 태평함을 뒤흔들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태평함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 계급으로 취급한다. -9p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은 노인들을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결정할 때 보면, 사람들은 노인들을 이질적인 종류에 속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인간들과 똑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 안 되는 보잘것없는 적선을 하고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느낀다. 편리한 환상이다. -10p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르는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 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그들 자신의 승화된 이미지, 그것은 백발의 후광에 싸인 경험이 풍부하고 존경할 만한 인간, 인간 조건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현자이다. 그런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되면 노인들은 형편없이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11p

이제 속임수는 그만두자.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 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과 같다. -14p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혜를 받은 자들은 그 장기적인 이익을 분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경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폐물’ 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퇴직 생활이란 자유와 여가의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시인들은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을 떠벌려 예찬한다. 그러나 이것은 염치 없는 거짓말들이다.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 수준은 너무나도 비참해서 ‘늙고 가난한’ 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하다. -15p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 우리가 노인들을 거리에 돌아다니는 시체로 볼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온 과거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면 이런 자명한 사실은 우리의 목을 메게 할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절단해버리는 우리의 사회 체제를 비난하는 자들은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 사회를 뒤흔들어 동요시키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자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데에 노력을 집중시켜야만 성공한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부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침묵을 깨는 것을 도와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16p

머리말

노년에 관한 연구가 여러 면에서 완벽하고 철저하게 시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본질적인 목표는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연로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18p

늙는다는 개념은 변화의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태아, 신생아, 어린아이의 삶도 연속적인 변화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정의 내렸듯이 느릿느릿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결론 지어야 할까? 분명 그렇지 않다. 그러한 역설은 삶의 본질적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매 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의 노인학 의사인 랜싱Lansing 씨는 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노화란 보통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깊으며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죽음에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20p

인간에게 진보란 무엇이고 퇴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어떤 목표에 의거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절대로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각자 고유의 목표를 창출해낸다. 따라서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만 쇠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23p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민족학적 자료들

흔히 한 집단이 만들어낸 신화들과 실제 그들의 풍습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원시 사회 속에서의 노인들의 역할에 관한 한 이러한 차이는 놀랄 만하다. 가장으로서 상속권이 없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지위를 전설적으로 끌어올린다. 에스키모인들의 경우, 많은 전설들 속에서 노인들은 기적적으로 인명을 구한다. 그리고 노인을 몰아낼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벌이 내려진다.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나이 든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가진 자, 발명가,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원시인들은 흔히 신들을 원기와 지혜가 가득 찬 키 큰 노인으로 표현한다. 에스키모인들에게 네르비크Merwik 여신은 바다 속에서 사자(死者)들의 영혼들과 함께 살고 있는 아주 늙은 노파이다. 이따금 그녀는 샤먼이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러 올 때까지는 바다표범 사냥꾼들을 지켜주지 않으려 한다.
다른 곳에서 노파는 바람을 조절한다. 호피족에게 수공업을 창안해준 것은 거미 노파이다. 이런 예들은 풍부하다. 그러나 이러한 우화들이 실제 생활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63p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된다’ 는 것이다.
-116p

인간은 자기 삶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 – 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 – 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18p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노인의 지위는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러므로 노인 자신은 결코 자신의 지위 문제에서 아무런 진전도 가져오지 못한다. 흑인의 문제는 백인들의 문제이며, 여성의 문제는 남성들의 문제라고 사람들은 말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는 평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흑인들은 억압에 대항해 싸운다. 한데 노인들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노인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의 문제이다.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이익과 이데올로기적인 이익에 따라, 그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퇴역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결정해버린다. -121p

기나긴 원정 끝에
이젠 재정 능력도 없이 남겨진 우리는
낡은 육신,
어린애 같은 기력의
지팡이를 길잡이 삼아 우리는 살아가네.
가슴 가득히 젊은 수액이 들끓으나
샘솟자마자 그 수액은 늙어버리는 듯하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자리는 여기에 없네. 늙은이란 무엇인가?
그의 나뭇잎들은 바싹 말라가고
고되고 긴 길을 세 발로 걸어가네.
대낮의 꿈처럼, 이리저리 헤매네.
-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141p

그럼 형제가 수집하여 옮겨 적은 한 동화는 인생의 여러 연령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신께서는 인간과 모든 동물들에게 30년간의 삶을 정해놓았다. 당나귀나 개, 원숭이는 30년이라는 오랜 삶이 너무 고통스럽게 여겨져 각각 자신의 삶에서 당나귀는 18년, 개는 12년, 원숭이는 10년을 빼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동물들보다 현명하지 못했다.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은 전래 동화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장수의 대가로 노쇠라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30년보다 더 연장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당나귀가 포기한 18년, 개가 포기한 12년, 원숭이가 포기한 10년을 얻어내어 자기 삶에 보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70년의 인생을 갖게 되었다. 처음 30년은 애초부터 정해진 인간의 삶이요, 또 그 30년은 빨리 흘러간다…… 그 후에는 당나귀의 18년이 오니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무거운 짐에 또 짐을 어깨에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먹을 밀을 방앗간에 가져다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다…… 그 다음에는 개의 12년이 온다. 이 기간 내내 인간은 이 구석 저 구석 기어 다니며 으르렁거린다. 왜냐하면 물려고 해도 이젠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절이 지나면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이라고는 마지막 원숭이의 10년밖에 없다. 이제 그는 정신이 없고 약간 우스꽝스러워져, 아이들이 보면 웃고 조롱하는 이상한 짓을 한다.” 이렇게 인간의 노년이 동물들의 노년보다 더 길고 더 고통스러운 것은 모두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경솔한 탐욕 탓에 그런 선고를 받은 것이다. -190p

시든 잎새들이 몇 개 달린 나뭇가지들이
힘없이 합창을 하며 벌거벗은 채 떨고 있는
한 해의 그 시간을 그대는 내게서 보네.
예전에는 거기서 새들이 노래를 불렀지.
이제 그대는 내게서 황혼의 빛을 보네.
낙조를 따라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노을 빛은
얼마 안 가 곧 가혹한 밤에 휩싸여버리겠지.
파괴하고, 수액은 차갑게 얼어붙을 테니까.
무성했던 잎들은 사라져버리고, 아름다움은 백설에 덮여버렸네.
도처에 불모가 휩쓸고 가네.
그러니 여름을 방울방울 증류시키기 전에 겨울이 그 앙상한 손으로
그대 여름을 휩쓸어 가지 않도록 하게나…… -232p

나 같은 사람에게 사랑이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
조금만 자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곧 스스로를 경멸하고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는 것을. 그러나 드러낼 수 없는 사랑의 병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보다 숨기는 편이 더욱더 힘든 법.
……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질투에 사로잡히기는 마찬가지.
…… 조금만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불편한 마음에 씁쓸함만이 번진다!
…… 기억은 사랑을 죽인다. 오로지 일종의 분노로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말해야 하리.
…… 슬그머니 불길에 사로잡힌 내 영혼이
사랑을 알아챈 것은 오로지 질투에 의해서였던 것을.
…… 사랑스러운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연적들 중에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지 못함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형벌인가. -249p

사실 박애의 실천은 개인적 행복을 보장받는 방법이었다.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이것은 한없이 강조되는 주제였다. 자신의 행복을 확고히 하는 것, 그것은 부르주아 계층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들은 덕을 통해, 행복한 평범성을 통해, 그리고 가족과 우정의 유대를 돈독히 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평안한 휴식으로 생각되었다. 과도한 것을 버리고 온화한 열정만을 가져야 했다.
이것은 바로 노년이 행복한 시절, 심지어는 모범적인 시절로 간주되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격렬한 열정에서 해방된 노인은 평온하고 현명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부재가 재산의 향유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균형 잡힌 삶은 평정과 행복감 속에서 끝을 맞는다.
뷔퐁은 이렇게 주장한다. “내가 잠자리에서 건강하게 일어나는 매일매일, 나는 당신만큼이나 충만하고 생생하게 현존하는 그날의 기쁨을 향유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나의 움직임과 나의 욕망과 나의 식욕을 현명한 자연의 충동에 맞춥니다. 그래서 나도 당신만큼이나 현명하고, 당신보다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늙은 미치광이에게라면 회한을 야기시킬 과거의 정경은 오히려 나에게 당신의 기쁨의 대상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는 기억의 기쁨, 유쾌한 그림, 귀중한 모습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요?” -260p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지배를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노년에 가치가 부여된다. 철학자들과 수필가들은 노인의 개념을 도덕의 개념과 연결시켰고, 노년이 이루어온 경험을 찬양했다. 노년은 이중적 의미에서 삶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노년은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노년은 인생 최고의 성취이다. 연륜을 쌓아온 자는 누구나 살아 있는 자들 중 최상의 인간이다. 어떻게 보면 노년은 존재의 농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품위나 지위에 오르려면 나이는 일종의 자격이 된다. 특히 독일에서는 빈번하게 음악가나 철학자의 70주년, 80주년 기념일에 화려한 축제가 벌어진다. 그 축제의 의미는 바로 노인에 대한 경의이다. -301p

지배 계층은 이러한 비극들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난한 노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항상 보잘 것 없었다. 19세기부터 노인들의 수가 증가했다. 지배 계층은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절대적인 무관심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지배 계층은 노인들을 과소 평가해야 했다. 게다가 노년이라는 개념에 반대 감정의 양립을 가져온 것은 세대간의 갈등보다도 계층간의 투쟁이었다. -302p

현대사회에서의 노년
인구의 노화는 자본주의 민주 국가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현대 사회의 문제들 중 에베레스트 산’ 이라고 영국 보건성 장관인 이안 맥 레오드Ian Mac Leod는 말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더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자연스럽게 사회에 통합되지도 않는다. 사회는 그들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정은 행정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노쇠는 이제 정치적인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312p

자식들이 부모를 돕는 일은 극히 드물다. 노인들 중 3분의 2는 자식들로부터 아무 원조도 받지 못한다. 때때로 그들은 부양료를 받기 위해 자식들을 법정에 고소한다. 그러나 소송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부양료가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자손들이 그들을 부양할 수 있다고 간주되면 공적인 원조가 보류되므로 노부모는 이 거절로 인해 훨씬 더 고통을 받는다. -333p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꼭 죽지 않을 만큼의 도움밖에는 주지 않는다. “죽기에는 너무 많고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금액이지요” 라고 한 퇴직 연금자는 서글프게 말했다. 그리고 다른 퇴직 연금자는 “더 이상 일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겨우 시체를 만들기에나 딱 적당할 뿐이죠” 라고 말했다. -338p

1890년에 노인들의 70%는 보수를 받는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단 300만 명만이, 다시 말해서 노인 인구의 20%만이 임금을 받는다. 그들 중에 200만 명은 남자들이고 100만 명은 여자들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임금은 줄어들었다. 45세에서 65세 사이에는 이미 직장을 새로 구하는 것이 힘들다. 그들은 매우 빈약하나마 퇴직 연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340p

<또 다른 미국The other America>이라는 저서에서 해링턴M. Harrington은 빈곤 속에 사는 수백만의 노인들이 ‘바닥으로 향한 하강의 소용돌이’의 희생자임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아프다. 왜냐하면 비위생적인 누추한 집에 살고, 잘 먹지 못하고, 간신히 따뜻하게 지낼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돌볼 수단이 없으며, 병이 점점 심해져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빈곤은 더욱 악화된다. 가난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그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모든 사회적 접촉을 피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웃이 알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이웃이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질구레한 봉사와 최소한의 보살핌조차 거부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병상에 누워 지내는 환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노년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열린 상원 위원회 앞에서 한 증인은 사회의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은 ‘좋지 않은 건강 상태, 빈곤, 고독’ 이라는 연쇄적인 삼중 원인의 희생자라고 진술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정확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다가 ‘가난에 빠진 사람’이 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능력이 떨어져 그들은 더 이상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술적으로 낙후되기 때문이다. 기계화는 농촌에서조차 노인들의 추방을 초래한다. 정년 퇴직은 재원의 갑작스러운 감소를 동반한다. 그러나 극빈자들 중 대부분은 항상 가난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젊었을 당시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했으며 도시에서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사회보장제도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책임 지지 않는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 – 불충분한 퇴직 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 혹은 퇴직 연금이 없는 노동자들 – 은 모두 불가피하게 구제 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여러 주들 가운데는 매우 가난하고 원조금을 주는 경우에도 금액이 극히 적은 곳들이 있다. 특히 미시시피 주가 그러하다. 어디서든 관리들은 신청자들에게 적대적이다.
그리하여 요구의 절반은 거절당한다. 그들은 자료 제출을 요구 받는다. 그러나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343p

흔히 그들은 절반은 문맹이고, 영어도 겨우 말할 정도이다. 그들은 구제 사무실의 체제와 형식을 무서워한다. 비인격적이고 무력한 관료 정치 체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원조해주지도 않으면서 그들에게 모욕감만 준다. 복지국가라는 것은 대부분 이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보호, 보장, 원조들은 약자에게가 아니라 강자와 조직화된 자들에게 배당된다. 의학의 치료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 혜택을 가장 적게 받는다. 고독은 그들의 상황을 더 심하게 만든다. 슬럼가의 젊은 거주자들은 거리로 나와 무리를 형성하고, 노인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산다. 그래서 생활의 리듬이나 거리상의 차이 때문에 젊은이와 노인들 사이의 접촉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주로 전화를 통해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이런 곳에서 500만의 노인들은 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필라델피아의 공중 위생에 대하여 린든Linden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시민들 중 고령자들의 감정적인 문제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로는 노인들을 기피하는 사회적 배척 현상, 친구들 범위의 축소, 극심한 고독, 인간에 대한 존경심의 감소와 상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들 수 있다.”
풍족한 사회에서만 노인들의 수가 많아질 수 있다고 해링턴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러한 풍족한 사회조차 노인들에게는 그 풍부함을 거절한다. 풍족한 사회도 노인들에게는 단지 ‘동물적인 생존’만 허용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344p

페키뇨 박사는 구제원에 수용된 건강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통계표를 작성했다. 나는 이 통계표의 자료들이 사실임을 많은 증거들을 통해 확인했다. 다음은 통계표의 내용이다. 8%는 입원한 지 일주일 이내에 죽는다. 28.7%는 1개월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45%는 6개월 이내에 죽는다. 54.4%는 1년 이내에 죽는다. 65.4%는 2년 이내에 죽는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의 절반 이상이 입원한 지 1년 이내에 죽는 것이다. 양로원의 생활 조건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노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이주든 이주는 죽음을 초래한다. 슬퍼해야 할 것은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많은 경우 남은 사람들의 운명은 포기, 차별, 쇠락, 정신 착란, 죽음이라는 몇 개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358p

남자의 인생에서 퇴직은 뿌리 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는 퇴직으로 인한 휴식이나 여가 시간 같은 어떤 이점과, 궁핍과 자격 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의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재의 그로 만들어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이란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든, 혹은 운명적으로 강요당해서이든 퇴직한다는 것, 우리는 현재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366p

우리는 헤밍웨이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의 자살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일이 자기 자신의 성취일 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 일이 일종의 제약이었을 경우,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해방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에는 거의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일이란 예속이며 피곤인 동시에 관심의 원천이며 균형의 요인이고, 우리를 사회에 통합시켜주는 요인이다. 일의 이러한 모호성은 퇴직에도 반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퇴직을 긴 휴가로 혹은 폐품 처리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367p

최근, 퇴직을 두 달 앞둔 센 지방의 초등학교 교사 95명에게 퇴직 이후에는 좀더 빨리 늙어가리라고 느끼는 거이 두려운가라는 질문을 했다. 5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어찌나 퉁명스럽고 거친지 그들 또한 퇴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퇴직을 하게 되면, 그때는 내 나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그들은 자기 직업을 좋아했다. 그리고 아이들과의 접촉이 그들을 젊게 했다. 그들은 퇴직 후의 생활이 권태로울까 봐, 머리가 우둔해질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폐기 처리’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무용지물이 된 그들에게는 사는 것 자체가 쓸모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들은 퇴직 후의 고립에 위협을 느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노화에 대한 감정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369p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남편의 퇴직을 두려워한다. 생활 수준이 떨어질 것이고, 돈 걱정도 하게 될 것이고, 남편이 항상 짐이 될 것이며, 그 때문에 집안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퇴직 후 남편을 더 오래 보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기뻐하는 부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살림이 매우 넉넉한 환경에서이다. 일반적으로 남편은 자신이 귀찮은 존재라고 느낀다. 남편은 아내 앞에서 모욕을 당한다. -375p

현대적인 삶에 더 잘 적응하며, 사회적 지위 또한 더 우위에 있는 아들들 앞에서도 종종 모욕을 당한다. 집안의 폭군이 하루 사이에 너무나 소심해져서 빵 한 쪽도 허락을 얻지 않고는 못 먹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울증에 빠진다. -376p

노년의 비극은 삶을 절단하는 모든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규율과 같다. 제도는 거기 소속되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삶의 이유도 되지 못한다. 일과 피로가 삶의 부재를 가리고 있다. 그러다가 은퇴와 동시에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권태보다 더욱 심각하다. 노동자는 나이가 들면 이 지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실제로 그에게 자리를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그것을 알아차릴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는 아연한 절망에 빠지게 된다. -384p

노인이 처하게 되는 상황에서 가장 절망적인 측면 중 하나는 그가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무력하다는 것이다. 250만의 가난한 프랑스 노인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연대 관계나 압력 수단도 없이 산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387p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노년의 진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와 그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자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이다. 나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은 타자, 즉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나이다. 그 타자가 바로 나인 것이다. -393p

부쿠레슈티의 노인병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추사 교수는 노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이유는 노인들은 자기 몸이 병적인 상태가 되는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하며, 심각한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나이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노인들을 지나치게 건강을 염려하기 보다는 이젠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포기와 단념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395p

세비녜Sevigne 부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의 섭리는 어질게도 우리가 살면서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인생의 모든 다른 시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인생의 흐름, 그 경사는 매우 완만하여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시계 바늘과도 같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가 스무 살 때에, 예순 살에 갖게 될 가정에서의 우월성을 주고, 거울에 얼굴을 비추면서 비교해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놀라자빠질 것이며, 그 얼굴에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이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은 오늘과 거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 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한 기적 중 하나이다.” -398p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노년의 ‘예기치 못했던 충격’, 자신의 현실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 나이를 말해주는 표시가 노인에게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보게 된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실현 불가능한 일들 가운데 가장 급박하게 우리에게 그 실현을 자극하는 것,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가장 꺼려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 나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우리는 노인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는 태도들을 이해할 수 있다. -406p

나이든 인간으로서 가장 잔인하게 자기 모습을 묘사했던 사람은 미켈란젤로이다.
“장시간의 작업으로 나는 지치고 푹 꺼지고 축 늘어졌다. 내가 걸어가는 곳, 공동으로 먹고 살기 위해 가는 숙소, 그것은 죽음이다. 뼈와 신경이 가득 든 가죽 주머니 안에서는 한 마리 말벌이 윙윙거리고, 혈관에는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세 개 있다. 내 얼굴도 흡사 밭에서 까마귀 떼에게 충분히 겁을 줄 수도 있을, 건조한 날 널어놓은 넝마 조각과도 같다. 내 한쪽 귀에서는 거미 한 마리가 기어 다니며, 또 한쪽 귀에서는 귀뚜라미가 밤새도록 노래를 한다. 독감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서 잠을 이룰 수도, 코를 골 수도 없다.” -417p

톨스토이의 정력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큼 대단했다. 원기를 유지하려는 그의 세심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67세에 자전거를 배웠고, 그 후 몇 년 동안 자전거나 말, 또는 긴 도보 산책을 계속했다. 그는 테니스를 즐겼고 강에서 냉수욕을 했다. 여름에는 3시간 동안 연이어 풀을 베었다. 그는 <부활>을 집필했고, 일기와 많은 편지들을 썼으며, 방문객들을 접대하고 책을 읽고 세계의 흐름을 주시했다. 1895년 러시아 황제가 오래된 종교 분파인 두코보르에 대항하여 카자크 기병을 파견했을 때, 그는 이 탄압을 반대하는 격렬한 기사를 런던에서 발표했다. 그는 박해를 고발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그것을 유포했다. 그는 외국에 알리기 위한 조직적 홍보 활동에 앞장 섰으며, 대중의 동정심에 호소했고 ‘구조 위원회’ 에 돈을 대주기 위해 저작권 수익금을 받을 것에 동의했다. 그는 70세 생일을 즐겁게 자축했다. 러시아 교회 성무원에 의해 파문 당한 그는 엄청난 항의 시위를 했다. -434p

헤밍웨이의 소설≪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늙은 어부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낚으러 혼자서 바다로 나간다. 고기를 잡는 일은 그를 완전히 지치게 만든다. 그는 물고기를 육지로 끌고 오는 데는 성공하지만 상어들에 대항하여 그 고기를 지켜내는 데는 실패한다. 그리하여 바닷가 모래사장에 나타난 것은 살 없는 뼈대뿐인 물고기였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다. 그의 목적은 모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노인으로서 대부분의 동료 어부들처럼 목숨만 부지하는 생활을 거부하고 끝까지 용기와 인내라는 남성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라고 늙은 어부는 말한다.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헤밍웨이는 소설을 통해 그를 괴롭히던 강박 관념들을 쫓아버리고자 했다. -438p

한 개인이 성행위로부터 이끌어내는 만족감은 대단히 다양하고 풍부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그 행위에서 쾌락을, 혹은 욕망으로 인한 세계의 변모를, 혹은 일종의 자아의 표상을 얻고자 한다. 또는 이 모든 목적을 동시에 얻고자 한다. 어쨌든 우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것을 포기하기는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모럴리스트들은, 노인은 정숙하다고 규정하면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지 않기에 쾌락을 열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관점이다. 사실 정상적으로 욕망은 단지 욕망으로서만, 욕망 그 자체로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쾌락에 대한 욕망, 특정한 육체에 대한 욕망이다. 어쨌든 그 욕망이 더 이상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욕망의 사라짐에 대해 아주 애석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노인에게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싶은 욕망이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445p

이는 그가 여전히 자신의 청년기와 장년기에 경험했던 에로틱한 사계에 대해 집착하고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그 경험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욕망을 통해서 빛 바랜 에로틱한 세계의 색깔들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리고 싶어한다. 또한 그는 욕망을 통해 자신의 완전성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기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 청년기는 리비도의 존속을 암시한다. 어떤 이들은 약물 요법으로 생식기의 쇠퇴를 막아보려 하기도 한다. 체념한 다른 이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자신이 성이 있는 개체임을 확인하려고 애쓴다. -446p

늙은 여자들의 성욕에 관한 근거 있는 자료는 역사에도 문학에도 없다. 문제는 연로한 나이에서 여자의 성욕은 남자의 성욕보다 금기시된다는 것이다. -489p

성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하나의 감정이 있는데 그것은 질투심이다. 라가슈Lagache는 질투심이 흔히 애정과의 자리바꿈의 결과임을 증명한 바 있다. 사업이 잘 안 되는 이발사는 아내가 자기를 속인다고 확신하여 말다툼으로 아내를 괴롭힌다. 노년은 전반적으로 욕구 불만의 시기이다. 그래서 노년은 막연한 원한들을 질투라는 형식으로 구체화하게 한다. 한편 성욕의 감퇴는 많은 노년의 부부들에 있어서 일방적인 또는 상호적인 원한들을 불러일으키며, 그 원한은 질투로 표현될 수 있다. -491p

시간, 활동, 역사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것이다. 현재 속에서 과거를 넘어서는 계획들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겨냥한다. 우리의 활동들은 무기력한 요구들로 가득 찬 채 응고되어 과거로 되돌아간다. 나이는 우리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바꾸어놓는다.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과거는 점점 더 육중해지고, 반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노인이란 “살아온 긴 생을 뒤에 갖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희망이 매우 한정된 인간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505p

“그들은 희망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추억으로 살아간다.”
“늙은 남자는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비밀스레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러보는 기쁨을 즐긴다.” -506p

그들은 시간을 거부한다. 쇠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옛 자아가 현재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규정한다. 그들은 자기 청춘과의 연대성을 주장한다. 설사 그들이 자기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의 새로운 모습 – 할머니, 퇴직자, 노작가 – 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각자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변함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는 확신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추억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확신을 정당화한다. 노쇠에 따른 여러 가지 지위 하락에 맞서 그들은 변함없는 본질을 내세운다. 그들은 지치지 않고 자신들 안에 계속 살아 남아 있는 과거의 자기 존재를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때로 그들은 과거의 자신 중에서 가장 자존심을 만족시켜주는 인물을 택해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한다. 그들은 영원히 옛 전사이며,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인이며 존경할 만한 어머니인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청춘기 최초의 신선함을 머릿속에 되살린다. 특히 그들은 모리악처럼 그들에게 있어 세계가 결정적으로 형성된 시기, 즉 어린 시절을 되돌아본다. 그래서 그들은 - 30세에건 50세에건 –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면서도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어린애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과거의 자기 모습을 되찾아 그때 모습과 하나가 되는 순간, 그들은 80세이면서 동시에 30세 혹은 50세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나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507p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래는 결코 만나지지 않은 채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때 미래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 매번 미래의 출구에서 대자를 기다리는 데서 오는 존재론적 실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령 나의 현재가 존재를 넘어서 내가 스스로를 투사했던 미래와 내용상으로 동일할지라도, 내가 스스로를 투사하던 것은 지금의 이 현재가 아니다. 그 까닭은 나는 미래로서의 미래를 향해, 다시 말해서 내 존재를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미래를 향해 나 스스로를 투사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516p

78세의 톨스토이 일기장 - “하루 종일 슬프고도 어리석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녁쯤, 이 마음 상태는 애무와 애정의 열망으로 변했다. 나는 어릴 때처럼 사랑을 베풀어주는 관대한 존재에게 바싹 다가가 온순하게 울며 위로 받고 싶다…… 아주 어린아이가 되어 내가 마음속에 그리는 모습 그대로의 어머니 곁에 가까이 가고 싶다…… 어머니, 나를 안아주세요. 귀여워해주세요…… 이 모두 다 미친 짓이다. 그러나 모두 진실이다.” -519p

왜 노인들이 그렇게 쉽사리 어린 시절로 향하게 되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노인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무시하고 싶을 때조차도 그 시간이 노인들의 뇌리를 결코 떠나지 않기에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존재는 스스로를 초월하면서 확립되어간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나이가 아주 많아지면 초월은 죽음에 부딪치게 된다. 노인은 자신의 출생, 또는 적어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존재의 기반을 다지려고 시도한다.
우리가 사회학적 측면에서 확인한 바 있는 유아기와 노년기의 결합이 개인에 의해 내면화되는 것이다. 삶을 떠나야 할 노인은 이제 막 혼돈 상태에서 빠져 나온 어린 아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521p

고르즈Gorz는 ‘노년’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이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는 청춘을 “활동함에 있어 무기력이 보다 덜한 상태” 라고 정의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또 하나의 타인이 되는 것이다. 즉 직업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자유롭게 선택했던 미래는 이제 그를 기다리는 필연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서 자기가 소외됨을 느낀다. -522p

그의 삶은 표피적인 것을 좇게 되고 외면적인 나의 존재, 즉 내가 잃어버린 나의 존재 같은 사물들 속을 돌아다니게 된다. 인생 설계는 멈추어버린다. 이러한 묘사는 노인에게 적합하다. 무기력한 실제의 무게는 장년기보다 노년기에 더욱더 무거워진다. 노년기에는 기나긴 삶이 우리 뒤에서 응고된 채 우리를 포로로 붙잡아둔다. 요구 사항들은 늘어나지만 그것들을 성취하기란 불가능하다. 소유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간직한다. 소유를 포기하고 미래를 앞에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 어느 정도로 꼼짝 없이 묶인 듯한 상태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미래가 어떻게 제시되는가를 고찰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 이중적으로 유한한 것으로 나타나는지, 즉 미래가 짧고 닫힌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고찰하려고 한다. 미래는 짧기 때문에 더욱더 닫혀 있다. 그리고 갇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짧게 느껴진다.
노인에게 일 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비참할 정도로 짧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늙어갈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어린아이는 시간 속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은 강조된 시간, 어른의 시간이다. 어린아이는 시간을 측정하지도 예측할 줄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되는 사건 가운데서 헤맨다. 내가 계획을 짜서 시간에 활기를 불어넣고, 나의 학업 일정에 따라 시간을 배분했을 때 나는 시간을 제어할 수 있었다.
-523p

즉 나는 한 주일은 강의를 하러 가는 오후를 중심으로 조직돼 있었다. 그래서 하루하루는 하나의 미래를 갖고 있었다. 날짜가 정해진 일관성 있는 나의 추억들은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우리는 긴장과 권태 속에서 살아갈 때 시간은 질질 끌며 흐른다.
쇼펜하우어 지적했다.
어린 시절에는 쇼펜하우어는 지적했다. ‘어린 시절에는 사물과 사건들에 새로움이 있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새겨진다. 또한 하루하루가 까마득히 길게 느껴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어른인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행을 할 때이다. 여행을 하면서 보내는 한 달은 집에서 지내는 넉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524p

이오네스코 역시 어린 시절의 느낌으로 시간의 지속을 회복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매일 나는 무언가 안정된 것에 몰두해 절망적으로 현재를 회복하고 했으며 그 현재를 정착시켜 확대하려고 애썼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 손상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되찾으려고 나는 여행을 한다. 사실 여행으로 이틀을 보내며 새로운 마을을 알게 되는 것은 사건들의 빠른 흐름을 늦추어준다. -527p

“위대한 과학자들은 생의 전반부에서는 학문에 유용하나, 후반부에서는 학문에 해롭다” – 바슐라르 -548p

철학은 개념으로서의 인간을 고찰한다. 철학은 인간과 우주와의 전체적인 관계를 알아내고자 한다. 작가 역시 보편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의 개별성에서부터 출발한다.그는 지식의 입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앎이라고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겪는 자기 존재의 산 체험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는 그것을 개별적인 보편성을 통해 즉 그의 작품을 통해 전달한다. 보편적인 것은 개별화되지 않는다. 작품은 오로지 문체를 통해서, 어조를 통해서, 그의 특성을 지닌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작품 속에 드러낼 때만 문학적인 차원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기록일 뿐이다. -558p

작가가 먼저 전달하기를 선택하고 그 후 상상력을 이용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글쓰기라는 천직을 결정하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의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언제나 문학 작품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문학작품이란 종이 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통해 주체가 유희와 몽상에 의해 창조해낸 비현실적 세계의 물질화이다. 비현실적 세계가 안정성을 갖고 경험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현실 세계의 다른 차원으로서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559p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거부와 인간들에 대한 눈물의 호소 사이의 긴장을 내포한다. 작가는 인간들에게 저항하는 동시에 그들과 더불어 있다. 이것은 지탱하기 어려운 태도이며 강렬한 열정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것을 오랫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힘이 요구된다. -560p

노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운명이 아니다. 죽음은 이제 임박한 것, 개인적인 사건이다. “그렇다, 영원히 삶을 불하 받았다는 생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환상을 품고 살아간다. 나 또한 이런 환상 속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이제 나에게는 그런 환상이 없다” 라고 에드몽 드 공쿠르는 1889년 8월 17일자 일기에 쓰고 있다. -614p

세상이 변화하거나 혹은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때, 젊은 사람은 변화의 희망을 간직한다. 노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아나톨 프랑스, 웰스,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죽음만을 원한다. 다시 말하면 노인은 자기 자신의 상황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그 상황을 초월하고자 하는 희망을 감히 품을 수 없는 것이다. -618p

내가 수집한 증거 자료에 의하면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의 이면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르트르는 유년 시절을 말하며 “죽음은 나의 현기증이다. 왜냐하면 나는 삶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불안해하는 부모나 마찬가지로 항상 불안해하는 배우자들은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감정 속에서 어떤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가장 심하게 끊임없이 죽음을 되새기는 사람들은 자기 삶 속에서 편안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라마르틴과 같이 요란하게 죽음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죽음을 원하고 있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들은 단지 죽음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620p

노년과 일상생활

나이는 우리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앗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순간 속에서 배우기 위해 배우길 원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즉 우리는 어떤 전망에 따라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보를 알아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계획의 부재는 알고자 하는 욕망을 죽여버린다. -631p

노인들의 지적, 정서적 무관심은 노인들을 완전한 무기력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노년의 스위프트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 “세계에서 그리고 나의 좁은 원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한 상태 속에 나는 잠을 깬다. 그 무관심이 너무나도 강하여…… 아마도 품위, 질병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하루 온종일이라도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632p

만약 노인이 자신의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해줄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설사 노인이 자기 주위의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목표의 부재는 그의 삶을 어둡게 만든다. -642p

“삶이 아직도 내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더 이상 큰 호기심이 없다…… 하루하루에 진절머리가 난다. 이 지상에서 내게 남아 있는 이 시간들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이젠 잘 알 수 없다. 지독하게 무표정한 권태의 얼굴.” -지드 <아멘> -643p

습관, 그것은 과거이다. 그것은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태도와 행동의 형태로 우리가 경험한 과거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몽타주와 기계적인 동작의 총체로서, 이것에 의해 우리는 걷고 말하고 글을 쓰고 기타 등등의 행동을 한다. 정상적인 노년기에 있어 이것은 약화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역할이 커지기까지 하는데, 그것이 인습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하는 행동이 어제의 행동을 모델로 취하고, 어제의 행동은 그저께의 행동을 본보기로 삼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곳에 인습이 있다. 걷기 위해 나는 옛 몽타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여정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 습관, 그것은 매일매일 똑 같은 산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습관의 몫이 일반적으로 나이와 더불어 커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습관에는 절약의 원칙이 작용한다. 모든 연령에서 일에 매인 사람들은 습관에 자신의 몫을 나누어준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651p

사람들은 어떤 일정, 어떤 공간 배치, 어떤 단골가게, 어떤 레스토랑을 단번에 영원히 택한다. 그러나 우리가 젊을 때에는 규칙이 느슨하여 즉흥적인 변덕에 새로운 선택의 여지를 남겨둔다. 노인은 새로운 것을 걱정스럽게 받아들인다. 선택하는 것은 노인을 두렵게 한다.
그의 열등감은 망설임, 의심으로 나타난다. 노인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명령에 의지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몽타주, 기계적인 동작은 반복적 행동에 사용된다. 즉 걷기의 메커니즘은 똑 같은 산책을 빗나가지 않고 다시 하기 위해 사용된다. 습관들은 까다로운 적응을 면하게 해주고 질문을 하기 이전에 대답을 제공한다. 늙어가면서 사람들은 습관들을 예전보다 더욱 엄밀하게 지켜나간다. 칸트는 항상 엄격한 규율을 따랐다. 노년에 그는 그 규율을 의무로 만들었다. 노년의 톨스토이는 정확하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계획하곤 했다 역설적으로 습관은 활동적인 사람들보다 한가한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 불가결하다. 만약 하루하루의 나태한 침체상태로 빠져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침체 상태에 맞서 잘 규정된 엄격한 시간표를 대립 시켜야 한다. 이때 삶은 준필연성의 양상을 띠게 된다. 노인은 지나친 여가에서 오는 역겨움을 의무로 표현되는 임무, 요구들로 가득 채움으로써 피한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노인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불안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매 순간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규칙적으로 일을 했던가를 기억한다. 신문 읽기, 장미나무 손보기, 식사, 낮잠, 산책들이 움직일 수 없는 순서로 이어지곤 했다. -652p

습관은 노인에게 있어서 일종의 존재론적인 안정을 보장한다. 그것을 통해서 노인은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습관은 내일이 오늘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써 노인들을 산만한 근심에서 보호한다. -655p

우리는 노년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는 편견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부터, 성인이 된 인간은 인간 조건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지니지 못한 미덕들을 나이에 전가시켰다. 즉 아이들에게는 순수함을, 노인에게는 평온함을 전가시켰다. 인간은 말년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을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678p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 말년은 하나의 해방이다. 평생 동안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식들에게 헌신한 여자들은 마침내 자신을 염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엄격하게 정돈된 일본의 부르주아들은 때때로 원기 왕성한 노년을 보낸다. -683p

만약 모든 것이 허영과 속임수라면 사실 이제 남는 것이라곤 죽음에 이르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그 자체의 궁극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삶을 그 궁극적 목적에 바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이바지하는 활동이 있고, 그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진실에 이르게 되는 관계들이 있다. 일단 환상이 깨끗이 사라져도 소외되지 않은, 신화화되지 않은 이런 활동들, 관계들은 그대로 남는다.
-688p

신경증이 환자의 성격을 완전하게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환자의 성격이 완전히 변화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구조를 취하게 되었을 때 정신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인들에게서 가장 보편적인 정신병은 바로 ‘퇴행성 우울증’이다. -693p

노년의 실례들

한 사람의 말년은 대부분 그의 장년기에 달려 있다. 샤토브리앙이 음울한 최후를 준비했던 반면에 볼테르의 개방적인 태도는,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노년을 가져다 주었다. 스위프트와 휘트먼은 둘 다 노년에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다했다. 인간 혐오자였던 스위프트와 삶을 사랑했던 휘트먼은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스위프트의 분노는 그의 불행을 악화시켰으며, 휘트먼의 낙천주의는 그로 하여금 시련을 극복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내재적인 정의란 없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질병이나 사회적 상황이 활동적이고 관대한 존재의 말년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 과거의 선택들, 그리고 현재의 사건들은 서로 간섭 효과를 일으키면서 개개인의 노년에 그 나름의 얼굴을 빚어놓는다. -706p

프로이트는 존스에게 이렇게 썼다.
“그가 내게 심어준 절대적인 신뢰는 우리 모두에게 그랬듯이 내게 안정감을 주었지요. 우리는 계속 일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어야 합니다…… 이 작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 작업에 비교하면 우리 모두는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그는 정신분석이 부딪히는 저항을 염려하고 있었다. “세계는 나의 일에 대해 일종의 존경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신분석은 분석자들에게만 받아들여졌습니다.” -730p

결론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마침내 영원은 그를 그의 내면에서처럼 바꾸어놓는다.” 죽음은 시간을 소멸시킨다. 우리가 매장하는 이 사람, 그의 마지막 나날들에 다른 날들보다 더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의 삶은 그 부분 부분이 모두 죽음에 차압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고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756p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Faguet의 이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윤리는 과학과 기술이 제거할 수 없는 고통이나 질병, 노년과 같은 악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라고 설교한다. 우리 자신을 축소시키는 이런 상태 자체를 용감하게 견디어나간다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윤리는 주장한다. 다른 계획이 없기에 나이 든 사람은 이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계획이란 단지 우리의 활동에만 관계될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계획에 들지 않는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늙고, 죽는다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숙명일 뿐이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757p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758p

착취당한 사람들은 늙으면 비참해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빈곤과 불편한 거처와 고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실추의 감정과 전반적인 불안감이 뒤따른다. 그들은 멍청하게 얼빠진 상태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는 정신질환들은 대부분 체제의 산물이다.
살아오면서 겪은 손상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은퇴한 사람은 현재의 자기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한다. 그는 항상 삶의 의미를 도둑질 당했기 때문이다. 강철법과 같은 가차없는 법이라도 법은 단지 삶의 모방만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삶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가능성의 고안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직업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제 주위에는 사막만이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을 목표들, 가치들, 존재 이유들로 가득 채울 만한 계획들에 착수할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 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더욱더 수치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가 대부분의 청년기와 장년기의 인간에게 하는 대우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말년의 몫인 훼손된 비참한 조건을 미리부터 만들고 있다. 노쇠가 때이르게 시작되고, 빨리 진전되며,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끔직한 것은 사회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손으로 노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착취당한 사람들은 기력이 사라지면 숙명적으로 ‘폐품’과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759p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은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지배 계층은 무산 계급을 대놓고 야만, 무지와 동일시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들을 인류 속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노동자가 생산력이 있을 때에만 인류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늙으면, 사회는 마치 낯선 인간을 보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공모적인 침묵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노년은 우리 문명의 모든 실패를 고발한다.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온통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말년을 빈 손으로 외롭게 맞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760p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사회 생활에 접근하는 순간 느끼는 불안은 노인들이 사회에서 제외되는 순간 느끼는 고뇌와 대칭되는 것이다. 이 두 순간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일상의 반복되는 삶이 문제들을 은폐한다. 젊은이는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게 될 사회라는 기계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보도블록을 던지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761p

해설

“인간의 삶의 의미는 결코 확정 지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정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763p

에세이든, 사회적 연구시론이든, 소설이든, 희곡이든 혹은 자서전적 이야기든, 보부아르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두 가지의 중요한 삶의 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는 ‘일을 통하여 독자성을 쟁취’하고자 함이요, 둘째는 ‘관습과 정신 구조의 분석을 통하여 변화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려’ 함이다. 첫 번째가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한 방향이라면, 두 번째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개인을 초월하는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둘은 어떠한 확고한 초월적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 던져진 유한한 삶을 사랑하고, 또 그 삶을 무의미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그녀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764p

실존주의 소설가로 칭해지는 그녀의 삶과 사상은 사르트르의 삶,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그녀의 모든 것은 사르트르의 반향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나, 보부아르가 실존주의 사상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실존주의에 끊임없이 부여하고자 했던 ‘윤리성’이다. -765p

<제2의 성>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그녀는 <노년>에서 “노인의 지위는 결코 자신이 정복해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인간의 말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라기 보다 활동 인구인 성인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766p

왜냐하면 노인들의 지위는 소외된 주체인 노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적인 노년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첫 단계, 그것은 성인 각자의 인간 조건에 대한 자각,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인생 여정이 내게도 다가온다는 자각이다.
아직 젊은 사람들은 누구나 늙으면 노인이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이런 개개인의 공통된 성향은 노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회피하는 사회적 ‘금기’를 만들어낸다. 보부아르는 <노년>이 이러한 ‘침묵의 공모’를 깨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침묵의 공모’는 더 이상 생산 능력이 없는 고령의 비활동 인구를 ‘폐품’ 취급하는 소비 사회의 비인간적인 면을 보지 못하게 가리기 때문이다. -767p

보부아르가 주장하는 노인의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의 지위는 결코 자신이 정복해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지는 것” 이라는 사실이다. 한 사회 집단은 자신의 가능성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또한 그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서 노인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769p

어쨌든 노인의 상황에서 가장 절망적인 것은, 노인들 자신이 능동적으로 그 상황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타인들에 의해 결정된 자신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있어 또 다른 불행은 내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불일치에서 온다. 물론 모든 인간에게 있어 즉자와 대자의 종합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불가능한 존재의 계획에 속한다. 그러나 노인에게 있어 즉자와 대자의 불일치는 내면과 외모의 불일치이기도 해서, 거울을 볼 때마다 혹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확인해야 하는 자아의 분열처럼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나이라는 것은 대자의 양상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나는 내면적으로 항상 30세 때와 같은 존재이나, 남들은 나에게 70세 노인을 보고 그 연령층의 행동거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적으로 느끼는 자기와 외모로 나타나는 자기 사이의 괴리는 또한 노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해내지 못할 때 그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신세가 된다. -770p


3. 내가 저자라면

그녀는 혁명을 꿈꾼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9p

그녀는 사회적인 억압 상황 속에서 이야기 되기를 거부하는 ‘침묵의 음모’를 세상 사람에게 환기시키고 폭로하고 싶어 한다. 침묵의 음모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 지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인지, 다른 억압적 국가적 장치인지와 상관없이 착취당하고, 소외 당하고 있는 계층의 모습을 커밍 아웃 시키고 싶어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노인’(老人)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저작에서 여성의 지위와 향상에 초점을 맞춰 ‘페미니즘’을 공론화했다면, 이번 저작은 다른 저작들과 내용은 달리하지만 문제의 초점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주류사회에서 불평등하게 소외된 비주류계층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때문이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부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침묵을 깨는 것을 도와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16p

그녀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자본과 임금노동자의 불평등한 관계, 지배계급에 모든 문화, 정치, 경제의 종속과 같은 거시적인 문제들이 종국적으로는 ‘비인간화된 노년’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모든 제반 문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이고, 체제적인 변혁의 관점에서 접근 해야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이 사회가 주장하는 ‘휴머니즘’이 내부의 모순과 불평등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가면’임을 말하고 있다. 비인간화된 노년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실패임을 지적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일환으로 마련된 노인연금의 인상, 양로원 시설의 확충 등의 변화로는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말하며, 그래서 보다 근본적인 체제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761p

종국적으로는 그녀는 62세의 노인 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체제적 변화와 각 개인의 근본적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사상적으로 그녀가 서구 유럽의 어느 학파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르트르가 일정 부분 맑스주의와 같은 구조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면, 보부와르도 일정 이상 그 영향력 아래 있지 않았나 싶다.

너무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문제에 대해 침묵의 금기를 깨는 일련의 작업은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금기를 깨고 새로운 정책과 방향에 대한 대안은 거의 언급되는 것이 없다. 다른 저작을 살펴보지 못한 상황에서 지적하는 것이 조급한 면이 없진 않지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기력할 정도로 찾아 볼 수 없다.

과거 사르트르의 저작을 몇 번 시도했던 경험에서도 책을 읽어나가는 자체도 어려웠고, 이해하는 것 자체도 심난했지만, 책을 덮은 후 ‘뭐 어쩌라는 거야?’라고 자조섞인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보부와르의 저작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문제제기에 비해 실천적 지침과 방향은 너무나도 아쉽다. 그녀는 이 사회의 근본적인 혁명을 꿈꾸고, 사회적 문제점들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지만,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한 이정표를 세우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강단에서 강연을 하고, 책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대안와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다. 왜냐하면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것이 그네들의 밥벌이의 수단이라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적 개혁가나 활동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몇 가지 아쉬운 점

너무나 많은 인용

이 책에서는 이름을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상가와 문학가의 사상과 글이 인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인용과 사례들이 분명 보브와르의 노력과 세심함에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자신이 주장하는 사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상가와 문학가의 인용이 필요한지 의문이다. 반대급부적으로 너무나 많은 인용과 사례들은 보브와르의 글을 신뢰성 있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지루하게 만들었다. 또한 인용한 저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또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인용한 사람들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고 주목할만한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계속된 의문이 들었다.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필요성

그녀는 서양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의 ‘노년’을 구체적으로 고찰하였다. 또한 문학작품 속에서 이미지화되고 있는 ‘노년’과 문학가와 사상가들이 그렸던 노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 방대한 지식과 연구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녀는 분명하게 현재 발생하고 처해있는 ‘노인의 현실’에 대해 ‘사회체제’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 ‘이윤’만을 추구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순들이 불평등하고, 비인간화된 노년의 모습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과 문제제기는 거의 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이미 좌파사상가들에게 행해졌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산성의 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소수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노인을 지적한다면 필요한 내용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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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3 22:58:42 *.36.210.80
문학가와 정치가의 역할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긴 레이스를 마쳤는데 소감이 어떠하신지 묻고 싶군요. 지나고 나니 또 새삼스럽기도 하지요?

점점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네요. 좋은 책에 대한 구상도 들어볼 수 있겠지요? 무슨 책을 쓰시려나요? 애 많이 쓰셨어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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