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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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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3일 22시 05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2006년 1월, 프랑스 파리에는 세느강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다리가 하나 탄생한다. 12구의 Bercy 공원과 13구의 미테랑 도서관 사이를 잇는 이 다리는 '예술의 다리'로 유명한 Pont des Arts 와 Passerelle Solférino, Passerelle Debilly를 포함해 파리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인도전용다리이다. Dietmar Feichtinger라는 건축가에 의해서 설계된 이 다리는 물고기 형태의 구름다리 모양을 하고 있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미적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며, 13구 주민들에게는 Bercy 공원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12구 주민들에게는 미테랑 도서관과 13구의 영화관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야말로 양쪽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하나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리에 붙여진 이름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이름을 딴 La Passerelle Simone-de-Beauvoir 이다. 다양한 형식의 색깔있는 작품을 쓰며 열정적으로 한 생애를 살다간 보부아르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여성과 남성, 노인과 성인,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의미 때문이었을까? 보부아르는 죽은 이후에도 자신이 태어난 그 곳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0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엔 줄곧 카톨릭 사립학교를 다니며 엄격한 카톨릭 전통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 어린 시절 보부아르는 아버지에 대한 심한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 헬렌 드 보부아르, 두 딸을 두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들을 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남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던 보부아르가 지낸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문적인 성공만이 그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루어 남성과 같은 역할을 하길 원했었다. 아마도 보부아르는 이러한 아버지의 생각에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이 같은 아버지에 대한 저항감은 후에 사르트르와의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사랑이나, 일련의 작품 활동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어릴 적 그녀는 이미 15세 때에 평범한 작가가 아닌, 그야말로 유명한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에 자신이 가야될 길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일까? 어릴 적 마음먹은 대로 그녀는 후에 유명한 작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죽어서까지도 그 명성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소르본 고등사범학교에서 그녀는 인생의 반려자인 장 폴 사르트르를 만나게 된다.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만나게 된 사르트르와는 졸업 후에 유명한 2년간의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 21세였으며, 사르트는 24세였다. 그 후 둘 사이의 2년간의 계약결혼은 별 다른 계약조건의 변경 없이 평생에 걸쳐 자동 연장 되었다. 둘 사이의 인연을 만들어준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대한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자격시험의 결과는 사르트르가 수석, 보부아르가 차석이었다. 하지만, 자격시험에서 수석의 자리를 놓고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국 사르트르는 남자였으며, 두 번째 도전이라는 이유로 결국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교사로 시작했지만, 자신의 어릴 때 꿈과 같이 작가로서의 성공을 더 원했다. 이 점은 사르트르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1944년 집필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교사를 그만둔 것만 봐도 그녀의 작가로서의 열정을 알 수 있다. 1943년에 발표한 <초대받은 여자>가 출판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 후에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세계대전, 식민지해방, 알제리 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상적 중심이 자신에게서 전체로서의 여성에 대해 옮겨가게 된다. 이 같은 결과로 탄생한 것이 여성해방 운동의 이론적 초석을 쌓은 <제2의성>이다. 평생에 걸쳐 그녀는 소설, 철학에세이, 사회적․정치적에세이, 자서전, 희곡, 기행문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기며 20세기 최고의 지성적인 여성으로서의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는 1986년 4월 14일 7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한다. 이로써 페미니스트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뛰어난 작가였던 그녀의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자신의 짝이었던 사르트르의 옆에 묻혔다. 그녀는 현재 파리의 Montparnasse Cemetery에 살고 있다.

20세기의 가장 지성적인 커플로 인정되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보부아르의 삶에서 사르트르의 존재는 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둘의 삶과 사랑은 유럽사회에 많은 화제 거리를 만들어내며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결코 위대한 한 남자의 여자로서가 아닌 그야말로 자신만의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철학자이며 작가로서 기억될 뿐이다. 그 둘이 모두 사망했을 때 여론은 이들의 전설적인 관계를 깰 만한 단서를 얻기 위해 많은 편지와 사적인 기록들을 찾고자 노력했다. 물론 그러한 노력 끝에 얻는 결과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사람 사이에 일시적으로 발생했다 사라지는 순간적인 갈등의 조각들 뿐 이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서로를 강하게 사랑하는 진실한 연인이었으며, 서로의 사상을 존중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학문적 동지로서 평생을 살았다. 계약결혼이라는 파격적 형식 안에서 서로에게 한없는 자유를 부여했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이들이 평생토록 상대방을 존칭으로 부른 사실만으로도 서로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감정, 생활, 일, 사랑 등 모든 것들을 서로 논의하고 조언하는 아낌없는 후원자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녀는 사르트르의 정신적 우월함에 반했지만, 그의 그늘에 가려지길 원치도 않았다. 그녀는 평생 자신만의 양식과 목표를 끊임없이 발견하고자 노력했으며 결국 훌륭히 이루어냈다.

올 2008년은 보부아르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신년 초 욕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보부아르의 누드 사진을 표지에 게재하여 때아닌 '보부아르의 엉덩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진은 1952년 보부아르가 미국의 사진 작가 아트 샤이의 아파트에서 샤워를 하는 도중, 열린 문틈 사이로 샤이가 찍은 사진으로 2000년 그의 작품집을 통해 처음 공개되었고, 올 4월에는 파리에서 전시될 예정이라 한다. 이에 프랑스 여성계는 "보부아르의 사상과는 무관하게 그녀의 몸을 도구화한 사진으로 한 호객행위"라고 비난하는 한편, 잡지사 측은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순응주의에 반대했던 보부아르에 대한 완벽한 오마주"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보부아르, 그녀가 이 상황을 봤다면 뭐라 했을지 궁금하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서론

7) "오, 볼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지.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싯다르타)

8) 많은 사람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친절하게 혹은 몹시 화를 내면서 내게 똑같은 소리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노년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보다 젊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에요"라고.

9) 인간으로서의 지위 향상에는 거의 언제나 '통과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노년기가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가 있다. 또한 이 새로운 지위의 확립을 기리는 '통과 의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11)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14) 늙는다는 것은 그것이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기 전에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15)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 수준은 너무나도 비참해서 '늙고 가난한' 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하다. (중략) 한 개인이 마침내 여러 가지 구속에서 해방되는 순간, 그는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을 빼앗긴다.

16) 인간은 그 말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는, 현 상황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전복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몇몇 제한적인 개혁을 통해 그러한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머리말

17) 늙는다는 것은 개인이 시간과 맺는 관계를 변경시킨다. 고로 늙는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그 자신의 역사와 맺는 관계도 변경시킨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은 절대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여느 연령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년기에도 한 개인의 지위는 그가 속한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19) 우리는 노년이 환원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20)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不動)의 상태이다. 변화야 말로 삶의 법칙이다.

20) "노화란 보통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깊으며,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죽음에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
(랜싱Lansing)

23) 인간에게 진보란 무엇이고 퇴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어떤 목표에 의거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절대로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각자 고유의 목표를 창출해낸다. 따라서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만 쇠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38) 릴케의 말처럼 "마치 과일이 그 씨를 품고 있듯이 우리들 각자가 우리 내면에 품고 있는" 죽음과 같이, 모든 신체 조직은 애초부터 그 완성의 피할 수 없는 경과로서 노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7) "나이가 가져다는 주는 정신의 힘과 또한 나이의 결과인 육체의 쇠약 사이의 이 기이한 불협화음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내게 자연의 법령들 중 하나의 모순으로 여겨진다. "
(들라크루아의 일기 중)

49) 노인은 예전에 얻는 습관들의 노예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유연성이 부족하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단 세트를 채택하고 나면 그것을 버리기가 매우 힘들다. 더 이상 그 세트가 적합하지 않은 문제들에 부딪쳐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계속 매달린다. 그러므로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것을 얻을 가능성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63) 극단적인 빈곤은 인간 생활을 예측 불가능으로 인도한다. 현재의 필요성이 가장 지배적이어서 사람들은 현재에 미래를 희생시킨다. 기후가 거칠면 사정도 곤란해지고, 자원도 부족하여 인간들의 노후도 흔히 동물의 노예와 비슷해진다.

105) 옛날에 발리의 산속 외딴 마을에서는 늙은 사람들을 죽여서 잡아먹었다고 한다. 어느 시기에 이르자 노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전통이 모두 사라져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회용으로 큰 홀을 지으려고 했으나 홀을 짓기 위해 쓰러뜨린 나무들이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무 줄기의 상하를 거꾸로 알았다가는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이었다. 이 때 한 젊은이가 더 이상 노인들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약속했다. 그는 숨겨놓았던 자기 할아버지를 데리고 왔으며, 그 노인은 집단에게 나무 줄기의 위아래를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108) 경제적 상황이 전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보통 그 사회가 만들어주는 특권이다. 이 특권은 다른 상황들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109) 내가 조사한 모든 경우에서-인용한 것보다 훨씬 많다-행복하게 자란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늙은 부모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겨우는 단 한 건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110) 효심은 관습과 종교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들은 부모를 죽이는 죽음의 의식을 가능한 한 가장 빈틈없이 세심하게 실행하면서 자신의 존경과 애정을 부모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113) 노인은 전통의 보유자, 초자연적 힘에 대한 중개자와 보호자로서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 집단의 결속을 보장한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아이들을 그 집단 속에 통합시키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도 흔히 노인이다.

114) 노인들의 권위는 그들의 확실한 문화적 기여에 근거하고 있다. 기술이 마술과 분리된 사회에서 노인들의 권위는 상당히 상실된다. 문자를 알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116)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된다’는 것이다.

117) 노인들의 위신이 계속해서 확고하게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집단 전체가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능성과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은 노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118) 인간의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18) 노인들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관해 원시인들이 채택한 실제적인 해결책들은 아주 다양하다. 즉 그들을 죽이거나,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거나, 최소한의 생명만을 유지하도록 하거나, 안락한 종말을 맞도록 해주거나, 혹은 그들을 존경하거나 혹은 극진하게 대접한다. 우리는 소위 문명화된 국민들도 이와 똑같은 방식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공공연한 살해만이 금지되어 있을 뿐이다.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119)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볼 때 노년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아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 노년이란 어떤 사회적 범주를 가리키며, 그 범주는 상황에 따라 다소 가치가 인정된다. 둘째, 노년은 각 개인의 특이한 운명, 즉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가리킨다.

120) 사회적 범주로서 노인은 한 번도 이 세상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았다. 노인은 활동 능력이 있는 한 그 집단에 통합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가 집단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이 든 남자 성인일 뿐이다.

121)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이익과 이데올로기적인 이익에 따라, 그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퇴역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결정해버린다.

122) 청년은 성인, 시민이 되고, 또 성인은 노인이 된다. 남자들은 연령 계층을 형성한다. 그 연령 계층의 자연적인 경계선은 모호하다. 그러나 사회가 정확한 한계선을 지정할 수도 있다. 퇴직 연령을 정해놓는 오늘날의 사회가 그러하다. 한 연령 계층에서 다른 연령 계층으로 옮아감은 승격일 수도 있고 전락일 수도 있다.

141)
오이디푸스의 이 가련한 유령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늙은 육신은 더 이상 그가 아니므로.
내 육신은 이제 누군가가 이 육신을 이끌지 않고서는
혼자 걸을 기력도 없소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중)

142) “노인들은 언제나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지요. 나이가 그들을 짓누른다고, 너무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그건 말뿐이지요! 죽음이 가까워지는 때가 오면 기꺼이 인생을 떠나려 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이의 무게가 문득 무겁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가 봅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중 아드메토스의 말)

143)
노년의 모든 것이 다 멸시할 만한 것은 아니란다.
내 아들 에테오클레스, 경험이란 분명한 자기 의견을 갖고 있으니
그 말은 젊은이들의 말보다 훨씬 더 현명하단다.
(에우리피데스의 <페니키아인들>중 이오카스테의 말)

144) 우리 노망한 늙은이들은 정의의 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이 돌 탁자 앞에 망연히 서있을 뿐이오.
(아리스토파네스의 <아카르나이 사람들>중)

148) 그(아리스토파네스)가 노인을 증오하는 것은 노인에게서 그 자신의 미래 상황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자신의 장래 상황을 비웃음으로써 거부한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인물, 자기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기는 쉬운 일이다.

164)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는, 심지어 현자라 할지라도 노년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라고 키케로는 인정한다.

17
5) 늙어가면서 사람의 가치가 격하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확한 사실이 하나 있다. 자유인을 살해한 경우 그에 대해 요구되는 금전적인 보상이 그것이다. 6세기에 서고트의 법전은 그 조항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세 어린이는 금화 60전
15~20세 소년은 금화 150전
20~50세 남자는 금화 300전
50~65세 남자는 금화 200전
65세 이상 남자는 금화 100전
15~40세 여자는 금화 250전
40~60세 여자는 금화 200전

199) 단테는 인간의 삶을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할 모양의 선에 비교하는데, 그 선은 하늘의 정점까지 올라가서는 거기서부터 다시 내려온다. 절정은 35세에 위치한다. 그 후 인간은 천천히 기울어 쇠한다. 45세부터 70세까지가 노년의 시기이다. 이후는 고령이다. 현명하기만 하다면 이 마지막 시기는 평화로운 시기이다. 단테는 고령의 노인을 육지로 보고 가만히 돛을 내리며 항구에 서서히 다가가는 항해자에 비유한다. 인간의 진실은 내세에 있으므로, 인간은 단지 짦은 여행에 불과했던 이 지상의 삶의 종말을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204) 고대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는 노년과 실명 사이에 신화적인 연관성이 존재했다. 실명은 나이 든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산 벌로 언도받는 유배생활을 상징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절연되 채로 사는 것이다. 이러한 고독은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고, 정신적인 통찰력을 갖게 만든다.

207)
축 늘어진 데다가 이끼 낀 두 귀,
죽은 듯 창백하고 혈색 없는 얼굴,
찌푸린 턱과 닳아빠진 입술,
이것이 인간의 아름다운 결말.
(비용의 시)

207) 노년은 다른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용에 의해 예언된 한탄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노리고 있듯이 우리들 모두를 노리고 있다.

221)
슬픔과 질투는
희끗희끗한 털을 사랑하네
감미로운 열광에
그토록 거친 감옥은 없네

아, 꾸물거리며 기다리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젊음이여
시간은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그리고 열정은 재가 되고
재 속에서는 회한이 싹튼다네....
(파아스노의 <여름>)

226) 우리는 충동의 곤란함,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혐오를 지혜라 부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의 악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단지 악덕을 다른 형태로 바꿀 뿐이다. 게다가 나로서는 더 나쁘게 바뀌는 것처럼 느껴진다.
(몽테뉴)

226) 몽테뉴의 위대함은 그가 능력이 감소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순간 최고에 달한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없었더라면 이런 위대함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자기 만족은 능력을 감퇴시킨다. 몽테뉴는 늙어가면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가 발전을 했다면 그것은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그의 태도가 점점 비판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231) 노인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로 여겨진다. 노인은 인간 조건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노인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어떤 관찰자도 노인들에게서 자기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

233) 우리는 천재성으로 불멸의 삶을 획득해야만 노년에 대항할 수 있다.

234) 이 작품(리어왕)에서 노년은 인간 조건의 한계가 아닌 그 자체의 진실로 그려진다. 즉 인간과 지상에서의 인간의 모험을 이해하기 이해서는 노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36) 고대, 중세는 미친 사람들에게 신성한 성격과 일종의 선견지명을 부여했었다. 광기와 가까이 있는 노년에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품고 있는 존경할 만한 현자와 미친 노인, 이 두 개의 모순적인 이미지가 결합되기도 했다.

242)
어린 시절부터 당신을 따라다닌 아름다움은
인생의 황혼녘에도 당신을 떠나지 않네.
(바로메나르의 <아름다운 노파에게 바치는 서정시>)

246)
나는 늙었소, 아름다운 이시스 여신이여, 이것은 치유할 길 없는 병.
이 병은 날마다 깊어만 가고, 시간은 나를 짓눌러만 가오.
죽음만이 날 치유할 수 있는 것을.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 병으로 인해 내가 당신의 정원을 살찌우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내 노쇠의 열매를 따버리겠소
그러면 당신은 걱정 없이 편안해지리다.

248) “나는 악덕의 근원이 되는 모든 감정들을 상실했다. 이런 변화가 육체적인 쇠약에 기인한 것인지, 예전보다 더 현명해진 정신의 절제에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나이에는 더 이상 열정을 느낄 수 없다. 그 열정들이 꺼져버린 것인지 자제된 것인지 알 수 없다. ”
(생테브르몽)

249) “늙은 사람이 아직도 사랑한다는 사실에 당신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은 아니지요. 바보같이 감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니까요....노인에게 남아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그들에게 삶을 확신시켜주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아주 생생한 결과입니다. 이것을 통해 젊은 시절의 욕망을 회상하고 때로는 아직도 젊다는 상상에 빠지기까지 하지요”
(니농 드 랑클로가 라 페린 후작 부인에게 쓴 편지)

268) “불멸의 삶이라는 구상은 당치도 않으며 부조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젊음, 건강, 활력의 영원한 지속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문제는 언제나 청춘인 삶, 언제나 행복과 건강으로 가득한 삶을 조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노화라는 불행의 표적이 되고 있는 삶을 어떻게 견디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걸리버 여행기>중 러그네지언의 말)

270) 노년의 경험은 부족했지만 그(괴테)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항상 뱀처럼 허물을 벗기를 갈망했던 것은 때때로 자신의 모습에서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고, 자기 모습이 낡아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시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젊어질 수 있다는 것, 즉 한계에서 벗어나서 결코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지 않는 모험처럼 삶을 다시 하는 것이다.

284) 최소한 건강이 양호하고, 신체적으로 부족한 힘을 보충해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면, 노쇠하기 전 몇 해들은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노년에 있어 가난은 큰 불행이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되면 노년은 “인생의 견딜만한 시기가 될 수 있다.”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기 때문에 더 이상 권태를 느끼지 못한다. 정열은 잠잠해지고, 뜨거운 피는 식는다. 성적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이 나이의 인간은 이성을 되찾는다. 이때 “우리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의 허무에 대해 다소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진리의 발견은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이며 본질인 지적 평온을 준다.

287) 노년은 단순히 남성다운 활력의 쇠락이 아니라, 노년 고유의 법과 조건에 따라 피어오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전에는 없었던 평화와 고요의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상응하는 특별한 효과가 있음에 틀림없다.
(야코프 그림)

288) 위고가 매혹되었던 반대 명제들 중 하나는 노쇠한 육체와 숭고한 영혼 사이의 대비이다. 노년은 이 반대 명제를 구현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약해진 육체와 억제할 수 없는 감정 사이에 낭만적인 대조가 이루어진다.

300) 그들(노인들)은 몇몇 계산법에서 사용되는 허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 허수는 작업 도중에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일단 결과를 얻고 나면 제거되는 것이다.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

303) 일반적으로 사회는 사회의 균형을 뒤흔들지 않을 정도의 악습과 추문, 참극 같은 것에는 눈을 감아준다. 사회는 노인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고아들, 비행 청소년들, 신체 장애자들의 운명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은 언뜻 보기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각 집단 구성원들은 노인의 운명은 곧 자신의 미래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304) 한 사회는 분산화된 총체이다. 각자는 분리되어 있지만 상호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306) 성인들이 노인을 대하는 실제 태도에는 이중적인 특성이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공식적인 윤리에 순응한다. 공식 윤리란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지난 몇 세기간에 강화되어왔으며, 성인에게 노인들에 대한 존경을 강요한다. 그러나 노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또 노인들에게 그들이 쇠약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 성인들에게는 유리했다.

307) 사람들은 노인들이 사회가 노인들에게 품고 있는 이미지에 복종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노인은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고, 단정하게 예의를 갖추며, 외모에 주의하도록 강요받는다. 특히 성적인 면에서는 더욱 억압이 가해진다.

310) "현대의 모든 현상들 중 그 과정에 있어서 가장 이론의 여지 없이 확실하며, 오래전부터 사전 예측이 가장 용이하고, 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인구의 노화이다"라고 소비Sauvy가 쓴 바 있다.

315) 국가는 노동자가 퇴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연령을 정한다. 이 연령은 또한 공공 기업이나 사기업의 고용주들이 직원들을 해고하기 위해 택하는 연령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개인이 현역의 범주에서 퇴역의 범주로 가는 연령이다. 이러한 교체는 어떤 순간에 찾아올까? 불입한 수입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 사회는 두 가지 요인을 참작해야 한다. 즉 사회 자체의 이익과 연금 수령자의 이익이다.

316) 노동 시장에서 일찍 탈락된 퇴직자들은 이익을 기초로 하는 사회가 인색하게 떠맡는 짐일 뿐이다.

316) 부르주아 민주 국가들이 개인으로부터 노동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은 대부분 그들에게 빈곤을 언도하는 것이 된다.

322) 1947년에 65세 이상의 11,154명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영국의 한 보고서는-광부 같은 매우 힘든 직업을 제외하고-50세의 노동자들과 59세의 노동자들, 그리고 60세와 69세의 노동자들의 작업 능률에 거의 차이가 없음을 확증했다. 작업능률은 매우 높았다.

323) 일반적으로 고령자들에게 어렵다고 인정되는 것은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이다. 1950년에 실시된 영국의 한 설문 조사는 그들이 이미 습관화된 것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잘 해내지만 변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44) 비인격적이고 무력한 관료 정치 체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원조해주지도 않으면서 그들에게 모욕감만 준다. 복지 국가라른 것은 대부분 이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보호, 보장, 원조들은 약자에게가 아니라 강자와 조직화된 자들에게 배당된다.

344) "우리 시민들 중 고령자들의 감정적인 문제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로는 노인들을 기피하는 사회적 배척 현상, 친구들 범위의 축소, 극심한 고독, 인간에 대한 존경심의 감소와 상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들 수 있다. "
(린든Linden)

358) 노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이주든 이주는 죽음을 초래한다. 슬퍼해야 할 것은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365) 활동하는 개인의 범주에서 갑자기 비활동적인 개인의 범주로 떨어져 늙은이로 분류되는 것, 재원의 놀랄 만한 감소와 생활 수준의 격하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대다수의 경우 심리적,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하나의 비극이다.

365) 전체적으로 고령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주어진 삶의 조건에 더 잘 적응한다. 살림을 잘하는 가정 주부의 상황은 옛날의 농부와 예술가의 상황과 같다. 그녀에게 있어서 일과 생활은 하나로 혼동되어 있다.

366) 일하지 않는 젊은 여자들의 숫자를 볼 때, 여자들은 퇴직을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어떤 연령층으로 떨어져버리지는 않는다. 여자들은 집안에서, 가족 내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이 역할 덕택에 여자들은 자기 정체성에 몰두하고,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67) 우리는 헤밍웨이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의 자살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일이 자기 자신을 성취했을 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 일이 일종의 제약이었을 경우,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해방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에는 거의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372) "퇴직자들 중, 이제 그만둔 일을 다른 기능으로 대치할 줄 모르거나, 대치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변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낚시에 몰두한다. 낚시라는 오락의 공허함이 사무실 내에서는 그들의 일과 가깝기 때문이다. "
(발자크의 <소시민>중)

380) 노년의 우울한 수동성을 물리치는 것은 오로지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383) 현재의 상황에 따라 사회는 수백만의 젊은이를 희생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의 늙은이를 비참하게 살아가게 내버려둘 것인지, 기괴한 선택을 강요한다. 첫 번째 해결책이 옳지 못하다는 것에는 모든 사람들의 동의한다. 자연히 두 번째 해결책이 남게 된다. 그것은 단지 노인에게 '사망 대기실' 역할을 하는 병원이나 양로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문제이다.

384) 노인들에게 계속해서 일하기를 원하느냐, 은퇴하기를 원하느냐 물었을 때 그들이 내놓는 답변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들이 언제나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경우, 그 이유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일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경우, 그것은 건강 관리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삶의 양식 중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긍정적인 해결책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 속에서도, 여가 속에서도 성취감을 찾지 못한다. 왜나햐면 그 어느 것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387) 노인이 처하게 되는 상황에서 가장 절망적인 측면 중 하나는 그가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무력하다는 것이다.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육체의 산 경험

392) 노년은 운명이다. 노년은 우리 자신의 삶을 휘어잡고 때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삶, 그리고 나는 늙었다."라고 아라공은 쓰고 있다.

393) 성인들은 자신의 나이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성인들은 나이라는 개념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듯 여긴다. 나이라는 개념은 과거를 뒤돌아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또 생을 중단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미래를 향하여 돌진하는 우리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조금씩, 하루 또 하루, 일 년 또 일 년 미끄러져간다. 노년은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나이이다.

393) 노년의 진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와 그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자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이다. 나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은 타자, 즉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나이다. 그 타자가 바로 나인 것이다.

393) 노화는 당사자에게보다 남에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394) 사람들은 회복이 가능한 병과 회복이 불가능한 노화를 은근히 혼동하고 싶어한다.

394) 우리의 몸은 나이에 따른 변화를 언제나 내면적으로 인식시켜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류머티즘이나 관절염은 노화로 인한 퇴행성 질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새로운 상태를 발견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예전 그대로이고 거기에 류머티즘만이 덧붙여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97) 노년이라는 이 정상적이면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노인들은 건강이라는 차원에서는 무관심과 불편이 뒤섞인 채로 겪는 듯하다. 노인들은 나이를 내세우며 병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병을 내세우며 나이를 잊어버리고자 한다. 이런 식의 회피로써 그들은 결국 이것도 저것도 믿지 않는 데 성공하게 된다.

397) 인생의 흐름, 그 경사는 매우 완만하여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시계 바늘과도 같다.

399) 우리는 늙어가는 자를 우리 존재 속에 있는 타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나이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03)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노쇠라는 우리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현실은 바깥에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에게는 여전히 포착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 우리 자신의 영구 불변성을 보장하는 내적 명백성과, 변모의 객관적 확실성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이 둘을 한꺼번에 거머쥐지 못하고, 그 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뿐이다.

404) 노년의 그것에 대해 어떤 충만한 경험을 쌓을 수 없는, 나의 삶 밖에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나의 에고란 초월적인 대상이다.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서만 겨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대상으로서의 나의 에고는 이미지를 통해 겨냥된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머릿속에 떠올려보려 한다.

405) 정신분석학자 마르탱 그로티앙이 강조하듯, 우리의 무의식은 노년을 모르며, 젊음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잇다. 그 환상이 깨질 때 당사자들에게는 병적인 나르시시즘 증세가 생기고, 이것은 또다시 우울증적 정신 이상을 낳는다.

408) 자기 동년배들과 대면하게 될 때, 사람들은 대개 자기는 그들과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외적으로만 판단하고, 그들도 우리 각자가 대자로서 갖는 유일한 존재라는 감정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고는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411) 젊다는 내적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 나이라는 객관적인 진실은 외양처럼 느껴지며, 이상한 가면을 빌려 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412) 사람들 각자는 우리를 자기 나름대로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우리의 모습과 남들이 보는 우리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모두의 의견에서 한결같이 일치되는 검, 그것은 그들이 우리 모습에서 나이든 늙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다.

417)
예전에 우리 두 눈은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
완벽하게 빛났었지.
그러나 지금은 텅 비고, 혼탁하고, 침침한 두 눈.
시간이 가져다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어느 소네트)

420) 먼저 우리는 몸으로 노년을 겪어야 한다. 우리에게 노년을 일깨워주는 것은 몸이 아니다. 노쇠가 우리의 육체를 점거하고 있다는 것을 일단 알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건강에 대한 노인들의 무관심은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표면적인 것이다. 주의 깊게 노인들을 관찰하면 그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36) 르누아르는 60세 때부터 반신 불수였다. 걸을 수 없었고 손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78세에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계속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팔레트에 물감을 짜주었고 손목에 붓을 붙잡아 매주었다. 그러면 그는 그 붓을 골무로 지탱하고 팔로 붓을 움직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손만 필요한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곤 했다.

439) 노인은 노회에 대항하여 투쟁함으로써 자신이 노쇠를 지연시킨다고 알고 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냉혹한 시선이 자기의 신체적 쇠약에서 노화의 증거를 찾아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은 다른 사라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여전히 남자임을 또는 여자임을 증명하려 애쓰는 것이다.

440) 노인은 뿌연 안개 저 너머의 추억을 더듬는다. 노인의 생각은 집중하던 대상에서 이탈한다. 그리하여 노인은 병리학적 사건이 없어도 일종의 정신병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극도의 불안을 몸소 겪게 되는 것이다.

440) "정신의 눈은 육신의 눈이 감퇴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비로소 뜨이기 시작한다."
(플라톤)

446) 그(노인)는 욕망을 통해서 빛 바랜 에로틱한 세계의 색깔들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리고 싶어한다. 또한 그는 욕망을 통해 자신의 완전성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기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 청년기는 리비도의 존속을 암시한다.

449) 상대와의 친숙함은 상대의 판단을 그리 두려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469) 일반적으로 개인의 생명은 출발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외부로부터의 사건들이 없는 한 생명력의 에너지는 수명과 마찬가지로 신체 기관에 새겨져 있다.

491) 성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하나의 감정이 있는데 그것은 질투심이다. (중략) 노년은 전반적으로 욕구 불만의 시기이다. 그래서 노년은 막연한 원한들을 질투라는 형식으로 구체화하게 한다.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505) 나이는 우리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바꾸어놓는다.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과거는 점점 더 육중해지고, 반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노인이란 "살아온 긴 생을 뒤에 갖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희망이 매우 한정된 인간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506) 추억에는 일종의 마력이 있다. 연령에 관계 없이 우리는 추억의 마술에 민감하다. 과거는 대자(對自)의 양상으로 체험된다. 그러나 추억을 통해 과거는 즉자가 된다.

506) "그들은 희망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추억으로 살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

507) 그들은 지치지 않고 자신들 안에 계속 살아 남아 있는 과거의 자기 존재를 스스로에게 이야기 한다. 때로 그들은 과거의 자신 중에서 가장 자존심을 만족시켜주는 인물을 택해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한다. 그들은 영원히 옛 전사이며,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인이며 존경할 만한 어머니인 것이다.

509) 이미지는 그 대상을 일반성에 내맡기고, 비현실적인 공간과 시간 속에 나타난다. 따라서 이미지는 현실 세계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현실 세계를 소생시킬 수는 없다.

513) 이 과거의 미래는 하나의 미래로 있기를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현실화되면서 우리의 희망을 저버린다.

513)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친구의 죽음은 우리에게 현재만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보냈던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을 통째로 앗아간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그들은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과거를 앗아간다.

514)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공통된 과거가 그들 속에 살아남아 있기에 추억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그 시간을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갔다.

516) "미래는 결코 만나지지 않은 채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때 미래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매번 미래의 출구에서 대자를 기다리는데서 오는 존재론적 실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설령 나의 현재가 존재를 넘어서 내가 스스로를 투사했던 미래와 내용상으로 동일할지라도, 내가 스스로를 투사하던 것은 지금의 이 현재가 아니다. 그 까닭은 나는 미래로서의 미래를 향해, 다시 말해서 내 존재를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미래를 행해 나 스스로를 투사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

521) 나의 현 상황과 미래로의 열림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는 주어진 여건이다. 나는 그로부터 나 자신을 투사하고, 존재하기 위해 이 과거라는 여건을 초월해야만 한다.

522)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또 하나의 타인이 되는 것이다. 즉 직업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자유롭게 선택했던 미래는 이제 그를 기다리는 필연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서 자기가 소외됨을 느낀다. 그의 삶은 표피적인 것을 좇게 되고 외면적인 나의 존재, 즉 내가 잃어버린 나의 존재 같은 사물들 속을 돌아다니게 된다.

523) 우리가 늙어갈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

524) "어린 시절에는 사물과 사건들에 새로움이 있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새겨진다. 또한 하루하루가 까마득히 길게 느껴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어른인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행을 할 때이다. 여행을 하면서 보내는 한 달은 집에서 지내는 넉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
(쇼펜하우어)

528) 그날 그날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그 시간의 내용에 달려 있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 미래의 시간의 흐름을 예측해볼 때, 나이든 사람에게 시간의 흐름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여겨진다.

528) 노인의 관점과 어린아이의 관점 혹은 젊은이의 관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노인은 생의 초기에는 몰랐던 자신의 유한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533) 삶의 진행은 무기력한 실제로 인하여 늘어지는 우리의 계획 때문에 끊임없이 꺾인다. 매순간 존재는 합산된다.

546) "나이가 들면서 더 자유롭기도 하고 덜 자유롭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놀란다거나 어떤 편견들을 무시한다거나 기존의 사상들을 반증한다거나 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
(어떤 수학자의 말)

549) "완전하게 개방된 정신이란 비어 있는 정신일 것이다. "
(클라크)

558) 작가는 자기의 개별성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지식의 입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앎이라고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겪는 자기 존재의 산 체험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559) 문학작품이란 종이 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통해 주체가 유희와 몽상에 의해 창조해낸 비현실적 세계의 물질화이다.

584) 자기 자신에 대한 반론의 거부는 거의 모든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그 이유들을 이해할 수 있다.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진리는 생성, 변화한다. 우리는 과거의 오류들이 필요불가결한 한 단계였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새로운 진리를 발굴하여 새로운 진리의 발전을 뒤쫓고, 그로 인해 스스로가 풍부해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을 때에라야 사람들은 과거의 오류를 수용할 수 있다. 미래가 차단되었을 때, 고집스럽게 과거에 매달려 품었던 이상을 바꾸지 않는 것은, 숙명적인 일은 아니나 정상적인 일이다.

608) 노인은 자기 시대를 잃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간다.

614) 노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운명이 아니다. 죽음은 이제 임박한 것, 개인적인 사건이다. "그렇다, 영원히 삶을 불하받았다는 생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환상을 품고 살아간다. 나 또한 이런 환상 속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이제 나에게는 그런 환상이 없다"라고 에드몽 드 공쿠르는 1889년 8월 17일자 일기에 쓰고 있다.

616) "오, 죽음이여! 잔인한 죽음이여! 죽음은 무한하게 흥미로운 어떤 작품이 끝나기도 전에 열심히 보고 있는 관객을 극장에서 몰아내는 괴물이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죽음은 가증할 만하다"
(카사노바)

617) 사실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죽음은 가까이도 멀리도 있지 않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외적인 운명이 모든 나이의 생존자를 짓누른다. 그 어디에도 운명이 완수되는 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618) 세상이 변화하거나 혹은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때, 젊은 사람은 변화의 희망을 간직한다. 노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아나톨 프랑스, 웰스,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죽음만을 원한다. 다시 말하면 노인은 자기 자신의 상황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그 상황을 초월하고자 하는 희망을 감히 품을 수 없는 것이다.

618)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하는 것이다. 생리적 쇠퇴는 초월의 가능성, 열중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계획들을 죽여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신체적 쇠퇴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619) "나의 신체적, 지적 욕구의 감퇴가 너무 심해져서 이제 나는 나를 살아 있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이 삶의 습관이 아니면 무엇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제 완전히 죽음을 체념하게 되었다. "
(지드)

622) "가난한 자든 부자든 모두 죽게 된다. "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는 하나, 나의 죽음을 생각하기에 이르지는 못한다.

622) 에우리피데스는 <알케스티스>에서 노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불평하며 차라리 죽고 싶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죽음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면 그들은 도망친다.

623) 시실 많은 노인들은 살아야 하는 모든 이유들을 상실한 이후에 삶에 집착한다.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624) "어제, 하고 어떤 이는 한숨을 쉰다. 또 어떤 이는 내일은, 하고 한숨을 쉰다. 그렇지만 오늘이라는 말의 절대적이며 부인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찬란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년에 도달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어떤 이들은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클로델)

625) "나는 그 무엇에서도, 그 누구로부터도 해방됐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에 충분히 전념할 수 있으리라.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내 손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이 피, 나의 피부에서 물결이 부딪히는 것을 느끼는 이 바다, 영원한 것이 아닌 이 밀물과 썰물, 종말을 너무도 가까이에 둔 이 세계는 모든 순간들, 최후의 순간에 대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노년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 있고,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모리악)

625) 노년은 젊은 시절보다도 훨씬 더 카르페 디엠의 시기이다.
(Carpe diem, 현재를 향유하라는 뜻)

627) "늙어감에 따라서 모든 것은 추억의 형태를 취한다. 심지어 현재조차 그러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조차 이미 지나버린 과거로 간주한다."(주앙도)

629) 젊었을 때 세계는 의미와 약속으로 무한히 풍요롭다. 예를 들어 하찮은 사건이 무한한 하모니를 일깨운다. 후일, 우리의 미래가 짧아지면 세계는 점점 줄어들고 그 세계 속에서 메아리의 진동도 점점 꺼져간다.

633) 자신의 이미지를 상실한 노인은 자기 밖에서 그것을 되찾으려 한다. 그는 훈장, 명예, 칭호, 아카데미 회원의 검(劍)을 갈망한다. 생명력이 꺼진 노인은 진정한 욕망, 살제 대상을 목표로 하는 정열을 충만함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겉치레를 추구한다.

633) 마음속에 더 이상 흥미, 호기심, 애정이 없을 때 그때서야 인간은 텅 빈 갈망과 그것과 상관 관계에 있는 허영심의 적령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641) "완전한 무위는 너무나도 빨리 결딜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끔찍한 권태를 낳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643) "새로운 무대 배경 속에서 똑같은 연극의 똑같은 동작들이 계속된다. 내가 존재하기를 중단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단지 나는 사람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
(지드)

652) 노인은 새로운 것을 걱정스럽게 받아들인다. 선택한다는 것은 노인을 두렵게 한다. 그의 열등감은 망설임, 의심으로 나타난다. 노인에게는 신뢰할 수 없는 명령에 의지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652) 역설적으로 습관은 활동적인 사람들보다 한가한 사람들에게 더욱 필수불가결하다. 만약 하루하루의 나태한 침체 상태로 빠져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침체 상태에 맞서 잘 규정된 엄격한 시간표를 대립시켜야 한다.

653) 어떤 습관이 완전히 생활 속에 흡수되었을 때 그것은 생활을 충실하게 한다. 삶에는 일종의 시(詩)와 같은 것이 있다. 만약 그러한 의식-예를 들어, 영국인들의 까다로운 차 예절-이 내가 전날 목격한 것과 내일 목격할 것을 어김없이 반복한다면 현재의 순간은 되살아난 과거이자 미리 행해진 미래이며, 나는 대자의 방식에 의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존재가 추구하는 이러한 실존의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678) 인간은 말년을,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실 불안은 노인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680) 아이들이 미완성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노인도 팔다리가 잘린 성인이 아니라, 완벽하고 독창적인 경험을 살아온 개인이다. 그러나 아마도 아이들의 세계는 종종 그 세계의 특이성에 따라 묘사되었던 반면에 노인들의 세계는 노인들의 자신들의 책 속에서 환기시키는 바와 같이 단지 결핌에 의해서만 성인의 세계와 구별될 뿐이다.

688) "우리는 삶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 그 도취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이 속임수, 어리석은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톨스토이)

688) 노인이 작품을 완벽의 정점에까지 끌어올리는 때는 흔히 자기 작품을 의심스러워하는 순간이다.

제8장 노년의 실례들

706) 과거의 선택들, 그리고 현재의 사건들은 서로 간섭 효과를 일으키면서 개개인의 노년에 그 나름의 얼굴을 빚어놓는다.

707) 개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에 한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따라 스스로 노년을 결정한다.

715) 노인이 죽을 때까지 자신이 세운 계획들에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계획에 부여하는 가치도 적어져서 거기서 얻는 기쁨도 적다.

결론

755)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노쇠는 개인의 활동의 축소를 가져온다. 흔히 정신적 능력의 감퇴와 세계에 대한 개인의 태도의 변화를 수반한다.

756)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757)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

757)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758) 노쇠가 시작되는 나이는 언제나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오늘날, 광부는 50세에 벌써 끝난 인간이지만, 특혜자들 중에서는 많은 이들이 80세에도 경쾌하게 지낸다.

760)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떤 사회가 돠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을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을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노년’이라는 책을 처음 봤을 때 떠오른 생각은 일단 책의 두께가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분량이야 두 번째로 읽었던 삼국유사와 비슷했지만, 이 책에는 사진도 없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도 없을 듯 했다. 제목만으로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책인지 감이 잘 오지도 않았다. 당연히 노년에 대한 내용이기야 하겠지만, 어떤 종류의 글인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적지 않은 분량과 예측이 힘든 내용 때문에 고생 좀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4주내내 나를 따라 다녔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피하고 묻어두려고만 하는 시회적 금기, 즉 그녀가 말하는 ‘침묵의 공모’를 깨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던지 책을 읽는 내내 썩 즐겁지 않은 내용의 시사고발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보부아르의 맹렬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무엇보다도 자료의 방대함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다양한 자료를 어떻게 수집했으며, 보부아르 그녀는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섭렵하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원시시대부터 시작해 현대까지 시간의 장벽은 그녀를 막을 수 없었으며, 동서양 수많은 나라의 국경을 넘나드는 그녀를 공간의 장벽 또한 막지 못했다. 또한 생물학적, 의학적, 사회적, 역사적 사례들 뿐 아니라 많은 문인, 화가, 음악가, 정치인들의 삶의 에피소드들을 쉴 새 없이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노년에 대한 천일야화라고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과연 이렇게 까지 했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더 깊이 들었다. 사례와 증거자료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더욱 탄탄하게 내세울 수는 있었겠지만, 나의 경우 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나열되는 단편적인 이야기들과 그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속에서 맥을 놓치고 헤매기가 여러 번 이었다. 사실 전체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 상당한 정신집중이 필요했던 책이었다. 물론, 우리가 똑바로 쳐다보고 싶지 않고, 굳이 터놓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던 금기를 두 둔 똑바로 뜨고 지켜보라는 보부아르의 의도였을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애써 모른 척 침묵하고 있던 우리의 모습을 까발린 책이다. 우리 모두 알고는 있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끄집어내니 읽기에 편할 리가 없는 책이다. 이 책 속에서는 여유롭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우리가 상상하는 노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처절하고, 외롭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한 우리의 진정한 노년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62세, 즉 자신도 노년의 길로 접어들 무렵에 발표한 이 책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 까. 이제 여성과 동시에 노년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은 그녀의 당연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의 노년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했는지, 자신이 본 것을 우리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외부에서 본 노년'이라는 제목으로 노년이라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생물학, 의학, 인류학, 역사, 사회학적 측면에서는 노년을 어떠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지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2부의 '세계 속의 존재'에서는 노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노년을 내면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노년과 육체의 관계, 노년과 시간, 역사, 활동의 관계를 다루며, 일상생활 속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수많은 문인, 음악가, 화가, 정치가들의 삶을 예로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책의 구성은 모든 인간의 상황은 보는 관점에 따라 외면성과 내면성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보부아르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타인들의 의해 규정되어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스스로 규정하는 자기 자신 두 가지의 자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 둘 사이의 모습이 상당히 괴리된 시기가 노년임을 지적하고 있다. 책의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보부아르는 그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의 폭탄세례를 퍼붓고 있다.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는 아끼는 느낌이다. "자! 너희들 현실이 어떠한지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지켜봐"라고 한마디 던지고나서는 아무 말이 없는 듯하다.

"오, 볼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지.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 싯다르타 (7p)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는 노년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 보부아르가 이처럼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을 써서 일깨워야 할 만큼 우리 인간은 어리석은 것일까?

3월이다. 3월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갖는다. 봄이 시작되며, 새학기가 시작되는 새로움의 시간이다. 이러한 3월에 새로움이 아닌 오래됨, 노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편하면서도 값진 경험이었다. 노년,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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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3 23:47:26 *.36.210.80
보부아르가 자신의 엉덩이 사진을 봤으면 탐스럽다고 생각하며 웃었을 것 같아요. 지나간 시절이 그립지는 않을까요?

우리 안의 노년, 보기 쉽지 않지요. 노인도 노년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지요. 아, 그래요. 그것을 다 알았다면 할 말이 없겠네요.

마지막은 더욱 열심히 하셨네요. 기쁘신지요? 훌륭한 노년을 맞이 하시길 바랍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좋은 소식 기원합니다. W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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