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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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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4일 03시 08분 등록
1. 노년의 저자 소개. 시몬느 드 보브아르

그녀를 소개해 보자면 1908년 1월 9일, 파리에서 태어나 1986년 4월 14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로서 소설 뿐 아니라 철학, 정치, 사회 이슈 등에 대한 논문과 에세이, 전기, 자서전을 썼다. 《초대받은 여자(L'Invitée)》와 《레 망다랭(Les Mandarins)》 등의 형이상학적인 소설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49년에 여성의 억압에 대한 분석과 현대 페미니즘의 초석이 된 글 《제2의 성(Le Deuxième Sexe)》을 썼다.
생애 초기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한때 법조인이었던 아마추어 배우인 조르주 드 보부아르(Georges de Beauvoir)와 베르됭(Verdun) 출신의 프랑수아즈 브라쇠르(Françoise Brasseur)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아버지는 두 딸 대신 아들을 얻고 싶어 했으나 (여동생인 헬렌 드 보부아르는 화가가 되었다.) 시몬에게 "넌 남자의 두뇌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고, 보바르는 그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조르주의 영향으로 문학에 조예를 갖게 되었고, 조르주는 학문적인 성공만이 딸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5세 때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작가가 될 결심을 한다. 그녀는 철학에 끌려, 결국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장 폴 사르트르 외에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생애 중기
수학과 철학에서 바칼로레아 시험을 통과한 뒤, 보부아르는 수학과 문학과 언어학을 공부했으며 소르본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29년 소르본에서 라이프니츠에 대해 발표, 그 뒤에 장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에콜 노르말에서 수학했다는 오해가 있으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철학 서클의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학 교육과정에서 뛰어난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29년 보부아르는 최연소로 철학 agrégation(교수자격시험)을 통과했다. 최종 시험에서 사르트르는 1등을 차지했고, 그녀는 2등을 하였다.
사후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사르트르의 묘 옆에 그녀의 시신이 묻혔다. 1968년 이후 여성주의의 어머니로서 뿐만 아니라 실존주의 철학과 기타 등등의 학문적 업적으로 그녀를 프랑스의 주요한 사상가로 보는 시각이 대두하면서 사망 이후 그녀에 대한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서로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관계없는 철학 저술도 여럿 남겼지만, 사르트르의 걸작인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보부아르가 초기에 쓴 철학 논고와 논문이 나중에 사르트르의 사상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학자들도 있다. 마가렛 A. 시몬스(Margaret A. Simons)와 샐리 숄츠(Sally Scholtz) 등의 철학계 안팎의 많은 학자들이 보부아르의 사상을 연구했다. 보부아르의 생애는 또한 여러 전기로 쓰여졌다.
2006년 건축가 디트마르 파이히팅거(Dietmar Feichtinger)는 보부아르의 이름을 딴 Passerelle Simone-de-Beauvoir라는 이름의 센 강을 가로지르는 인도교를 설계했다. 이 다리는 여성적 곡선이 특징이며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으로 가는 길로 연결된다. 《노년》은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통렬하게 비판한 방대한 사회 철학서로 1970년 파리에서 첫 출간되었고, 1977년 미국에서 번역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원본 주소 - 인용글 -
‘http://ko.wikipedia.org/wiki/%EC%8B%9C%EB%AA%AC_%EB%93%9C_%EB%B3%B4%EB%B6%80%EC%95%84%EB%A5%B4’
역 자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파리8대학 불문학 석사.
파리 소르본느대학 불문학 박사.
현재 부산 경성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역서에 《사막》(르 클레지오), 《편도나무들》(알베르 카뮈)이 있음.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1978년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발레리 연구〉로 불문학 석사학위를, 1983년 동 대학에서 네르발 연구 〈문학을 통한 아이덴티티 추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빨간 난쟁이》(미셸 투르니에), 《착하지 않은 녀석들을 위한 동화》(자크)

♣ 저자에 대한 생각
폭풍 같던 이십대에 만났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내가 동경하던 하나의 성(成)이었다. 계약결혼, 제 2의 성(性)을 통해서 바라본 그녀의 세상은 너무나도 놀라워서 내게 미친 영향이 컸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의 삶을 바라만 보며 내쳐 달려 왔다. 계약 결혼을 읽었을 때, 사르트르와 보브아르 두 사람이 지적 교류를 넘어서 모든 일상을 함께 소화해내는 파트너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가운데도 서로를 떠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두 사람. 여러 아이러니가 남기도 했지만 죽을 때 까지 유지된 그 관계는 세상의 어떤 만남보다도 희소가치가 있는 두 철학자의 만남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두 사람 관계의 산물(産物)을 이런 형태로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취재하고 집필 한 것일까? 나는 일단 그 방대함에 기가 질렸다. 그리고 사상가로서의 그녀, 작가로서의 그녀가 인류에 끼친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내 나이 불혹을 넘긴지 몇 해인데, 내가 남기고 갈 이승에서의 삶의 자취는 무엇으로 요약할 수 있는지 생각 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각성의 시간이 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론
P.7 ."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P.8. 미국 사람들은 ‘사망한 이라는 단어를 말소해 버렸다. 대신 ’가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 노년에 관계되는 모든 말을 회피한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도 ‘늙음’은 역시 금지된 주제이다. -중략- 내가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P.11.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른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 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P.13. 우리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옆에서 거울에 비친 그녀의 미래의 얼굴과도 같은 그 여인의 얼굴을 볼 때 가슴이 멘다. 레비스트로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비크와라 인디언은 ‘젊고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단 한 단어로 표현하며, 또 ‘늙고 추하다’는 뜻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P.14.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P. 15.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혜를 받는 자들은 그 장기적인 이익을 분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경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중략- ‘폐물’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수준은 너무도 비참해서‘늙고 가난한’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하다.

P.18.나의 본질적인 목표는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연로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많은 지면을 원시적 공동체라 불리는 공동체 속에서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조건과, 인류사의 여러 다른 시기에 노인들에게 주어졌던 조건에 할애하는 것을 보고 독자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중략- 노년을 통해서 이전의 전 생애의 의미 혹은 무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선택한 해결책들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른 집단들이 채택한 해결책들과 대조해볼 필요가 있다.

P.19.외면성이란 그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며, 내면성이란 주체가 어떻게 받아들여 초월해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타인의 노년은 앎의 대상이다. 반면 자기 자신의 노년은 자기의 생태에 대한 산 경험과 관련 있는 법이다. -중략- 당장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노년은 정태적(情態的)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의 결말이며 연장이다.

P.23.인간에게 진보란 무엇이고 퇴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어떤 목표에 의거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절대로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각자 고유의 목표를 창출해낸다. 따라서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만 쇠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이상의 검토는 내가 지금까지 말한 바를 확인시켜준다. 즉 노년은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P.42.질병은 사고이다. 그러나 노화는 생명의 법칙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고 병들어’라는 표현은 이제 거의 같은 말이 반복되는 중복어법이 되었다 페기는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불구의 축도이다.”라고 쓴 바 있다.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썼다. “내 병은 천식, 수종(水腫)이다. 75세에 이런 병은 치유 가능성이 적다.” 어떤 의사가 안경을 쓴 한 노파에게 물었다. “시력에 뭐 문제가 있으십니까, 할머니? 노안이십니까 아니면 근시이십니까?” “난 말이오, 늙었다는 게 병이라우, 의사양반.”

P.45.연대기적인 나이와 생물학적인 나이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외양은 생리적인 검사보다 살아온 햇수를 더 잘 알려준다. 나이가 모든 사람의 어깨 위에서 똑같은 중압감으로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노인병 학자 학월(howell)은 노쇠는 “사양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속도로 내려가지 않는다. 우리는 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인 보행으로 사양길을 내려가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굴러 떨어진다”라고 말했다.

P.46.반대로 이런 종류의 충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경우, 건강이 계속 좋은 경우, 사람은 아주 고령에도 상실된 능력들을 잘 보충하기도 한다.

P.47.어쨌든 지적 능력은 신체적인 변모들로 인해 손상된다. 받아들이는 수신기들의 질이 저하되므로 전언들은 신속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또 변형되어 전달된다. 뇌 기능의 유연성도 적다. 이미 보았듯이 뇌의 산소 소비가 줄어드는데, 혈액의 산소 함유량은 단기 기억력과 장기 기억력의 감퇴, 사고 작용의 속도 완화, 정신 작용상의 불규칙성, 행복감이나 의기소침 같은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가져온다. 우리는 노쇠를, 골드스타인이 외상을 입은 후에 일어나는 뇌 사고들에 관해 말하면서 언급한 ‘확산 절단’의 한 예로 간주할 수 있다.

P.49. 다시 말해서 태도와 정신적인 방향설정─을 얻는 일은 그들에게 막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노인은 예전에 얻은 습관들의 노예인 것이다.

P.50. 관찰 능력, 추상 능력, 종합 능력, 통합 능력, 구조화 능력과 같이 적응을 전제로 하는 모든 능력은 35세부터 약해진다.

P.51. 그렇게 장수할 수 있도록 애초부터 예외적인 잠재적 건강이 반드시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대개의 겨우 모든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힘이 약해진다. ‘아름다운 노년’이나 ‘정정한 노년’이라고 우리가 말해도, 그건 나이 든 사람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균형을 이루었다는 뜻이지, 그의 신체 조직이나 기억력, 운동 작용과 정신 작용의 적응 능력들이 젊은이와 같다는 뜻은 아니다.

P.52. 사고사와 대조적으로 ‘자연사’라고 부르는 죽음은 사실 신체 조직의 파손에 의해 일어난다.

P.53 .그러므로 노쇠는 그 사회의 성격과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밀접한 종속 관계에 있다. 경제적인 요인 자체를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정치적·사상적 상부 구조들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절대적인 의미의 생활수준 또한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P.54. 수많은 종 가운데 -―진화한 종일수록 더욱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동물들이 큰 위세를 누리는 것들이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이 체험에서 얻은 지식을 다른 동물들에게 전수한다.

P.55. 그들은 원칙에 따라 계급이 높은 침팬지만을 모방하는 것이다.

P.58. 시간의 흐름은 파멸과 쇠퇴를 가져온다. 부활의 신화와 제식들 속에서 나타나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부활의 신화와 의식은 고대인, 원시인,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앞선 농경 사회들 등 반 복되는 모든 사회 속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의 특징은 기술이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시간의 경과는 미래의 예고로 생각되지 않고 젊음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식물의 신인 오시리스는 해마다 수확과 함께 죽고, 씨앗의 싹이 틀 때 무한히 소생하는 모든 젊음의 싱싱한 기운 속에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많은 제식들의 목적은 특정 주기 동안 흘러간 시간을 지우는 것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흘러간 수년간의 무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P.61. 그러나 나는 어떤 사회에서는 성인이 노인의 운명을 결정하면서 그 자신의 미래를 선택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중략- 한편 나이 든 남자가 해를 거듭할수록 여러 자격들을 획득하여 자기 자신을 매우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P.63. 극단적인 빈곤은 인간 생활을 예측 불가능으로 인도한다. 현재의 필요성이 가장 지배적이어서 사람들은 현재에 미래를 희생시킨다.

P.75.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희생과 신앙심의 모범이며 아들 타페이가 극진히 사랑하는 오링이라는 70세가량의 한 노파가 길에서 ‘나라야마’라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3년 이 지나면 3년 더 늙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노인들에게 ‘순례’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사자(死者)들의 축제 전날 ‘산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 부모들을 그 산에 갖다놓고 온 마을 사람들을 소집한다.

P.77. 노인들이 자주 자신들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놀랄 만한 자료가 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오세트인들이 만들어 체르케스인에게 구전한 나르트족의 서사시이다. 몇몇 구절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사형집행 앞에서 느끼는 노인들의 고뇌를 묘사하고 있다.

P.80 .노인들을 존경하는 현대의 오세트인들은 이 서사시의 몇몇 이야기들을 수정했다. 그들은 노인 살해를 조상 전래의 풍습이 아닌 범죄적 음모였던 것처럼 보여준다. 향연 도중 젊은 영웅이 나타나 노인을 구출하기도 한다.

P.87. 기술, 주술, 종교는 원시 사회·문화의 본질을 이룬다. 이 세 분야는 서로 관계가 깊으며, 주술은 기술 그리고 동시에 종교와 아주 밀착되어 있다. 기술과 종교는 집단에게 이로운 것이며 주술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아란다족에게서는 ‘반백의 사람’이 이 세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P.113. 사제나 제식 집행자로서 노인에 대해서는 반대 감정이 양립하지 않는다. 이 경우 노인의 역할은 긍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이때도 노인이 자격을 얻는 것은 바로 기억력 덕분이다.

P.183. 상인들은 그 당시 ‘먼지투성이 발’이었으며,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대 상들은 ‘안장 위에 검’을 가지고 다녔다. 많은 중산층 사람들은 ‘무기 다루는 실력이 대단했다.’ 그러므로 나이 많은 남자들은 육체적인 쇠락 탓에 뒷전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P.303..사회는 노인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고아들, 미행 청소년들, 신체장애자들의 운명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무관심은 언뜻 보기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각 집단 구성원들은 노인의 운명은 곧 자신의 미래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몇몇 노인들과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지배 계급이다. 그러나 활동력이 있는 인구 전체가 그 공모자이다.

P.304. "이해의 토대는 모든 시도와 함께하는 근본적인 공모성이다. 하나의 목표는 그것이 표명되자마자 가능한 모든 인간적인 목표가 갖고 있는 유기적인 통일성으로부터 멀어진다. " 상호성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한다고 사르트르는 말하고 있다. 첫째, 타자는 초월적인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다. 둘째 나는 그 타자를 그 나름대로의 활동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그를 나의 전체적인 계획에 객체로 통합한다. -중략-
본질적으로 상호성은 내가 나의 목적론적 차원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의 차원을 포착하기를 요구한다. 자아 상실이라는 병리학의 경우, 환자는 자신의 목표들과의 관계를 상실한 자이다.

P.362.사회가 자기들을 책임지니까 그들은 자기 몸을 스스로 완전히 포기하고 사회에 맡겨버려 극단적인 수동성에 이르는 것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나는 노인들이 원한에 싸여 그들의 상황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복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P.366~367.남자의 인생에서 퇴직은 뿌리 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는 퇴직으로 인한 휴식이나 여가 시간 같은 어떤 이점과, 궁핍과 자격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의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대의 그로 만들어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이란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든, 혹은 운명적으로 강요당해서이든 퇴직한다는 것,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P. 침몰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 늙는다는 것은 곧 노년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그것이 노년의 새로운 냉혹한 면이다. 이제 산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다.

P. 426. "퐁트넽은 “나는 오로지 존재하는 데만도 어려움을 느낀다” 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P. 429.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그림자 일뿐이다.

P. 432. 그러나 삶이 저물어 가고 거칠었던 모든 정열들이 가라앉을 때……
그때 마침내 가장 고요하고,
모든 날들 중 가장 풍요로운 날들이 온다. -휘트먼의 시-

P.433. " 흰소리수리의 울음소리 같은 나의 울부짖음과 더불어, 금간 듯 쉰 목소리로 과거를 되씹으며, 침울해 하고 푸념을 늘어놓는 늙은이.”
괴테의 균형은 수 많은 사소한 감퇴 현상들 위에서 쟁취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p.437. " 내게 필요한 것은 읽고 다시 읽는 일, 새로운 두 눈,잠이 오지 않는 날들, 그리고 남은 반세기의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현재 나는 거의 눈이 멀었으며 빈사 상태에 빠져 있다.”

P.438. 주먹을 두드리는 횟수마다 하나의 알파벳이 정해졌다. 이렇게 하여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는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 그의 지성이 완전히 침몰하기 전까지 그는 자기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도록 했다. 르누아르와 파피니의 고집은 그들을 온통 삼켜버린 열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처럼 자신의 계획에 몰두하지 못하는 다른 사마들은 자존심 때문에 노쇠에 대항하여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하나의 도전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인간이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라고 늙은 어부는 말한다.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헤밍웨이는 소설을 통해 그를 괴롭히던 강박 관념들을 쫒아버리고자 했다. 글을 쓰는 작업이 어려워지고, 일생 동안 보여주고자 애썼던 생명의 풍요와 남성다운 이미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살을 생각했고, 끝내는 권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P.439. 정신과 육체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변경된 신체 조직을 세계에서 재적응시키는 작업을 수행하려는 사람은 삶에 대한 취향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P.440. "정신의 눈은 육신의 눈이 감퇴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비로소 뜨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정신은 한창 젊어, 더 이상 신체와 큰 관계를 갖지 않게 된 것을 기뻐한다는 세네카의 말을 우리는 이미 인용한 바 있다. 주베르 (JOUBERT)는 “긴 노년을 누리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정화된 사람들이다.”라고 썼다. -중략- “인류의 정신적인 진보는 노인들 덕분에 이루어졌다. 노인들은 보다 선량하고 보다 지혜롭다.”

P.441~442. 생테브르몽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내 정신은 육신으로 돌아와 한층 더 일체를 이루고 있다. 사실 이것은 다정한 결합의 기쁨을 위한 일치가 아니라, 정신과 육체가 서로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의 필요성, 상호 지탱을 위한 원조의 필요성에 근거한 것이다.”1943년 3월 19일, 지드는 노인을 보잘것없는 피조물로 만들어버리는 ‘노년의 자질구레한 모든 신체장애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나의 정신은 육신에 대한 관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육체의 존재를 망각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내 작업을 말할 수 없이 방해한다.”요컨대 수단인 육체가 장애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노년’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노년, 이것은 끊임없는 승리, 극복된 실패를 말해주는 것이다. -중략- 희극은 끊임없이 사랑에 빠진 노인을 주제로 채택한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모습으로 노년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이상주의자들의 교훈적인 담화보다 이런 외설스러운 전통이 진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P.443. 그 에너지는 증대되기도 하고 감소되기도 하며, 이동하기도 한다. -중략- 성욕에는 만족에 근거한 성적 양식과 불만족에 근거한 성적 양식이 있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그런데 만족에 근거한 성적 양식은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한다.

P.445. 그러나 대개는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묵계’를 전제로 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커플의 경우 이 사랑 속에 자아와 타인과의 거리는 없어지며 실패조차도 극복된다. -중략- 사실 정상적으로 욕망은 단지 욕망으로서만, 욕망 그 자체로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쾌락에 대한 욕망, 특정한 육체에 대한 욕망이다. 어쨌든 그 욕망이 더 이상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욕망의 사라짐에 대해 아주 애석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P.447. 또 다른 자벽은 세론(世論)의 압력이다. 노인들은 그에게 제시된 전통적인 이상적 노인상을 따른다. 그들은 추문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단순히 웃음거리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노인들은 남의 시선의 노예가 되어, 사회가 강요하는 정숙함과 점잔을 내면화 한다. 자신이 느끼는 욕망 그 자체를 수치스러워하여 그것을 부정한다. 자기 눈에 자기가 음란한 노인, 방탕한 노인으로 보이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노인들은 성적 충동을 무의식 속에서 억압할 정도로 그 충동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

P.448. 성적 대상인 여성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신체의 전체적인 모습과 자기를 동일화하는 반면,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성기에 자기의 분신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남자는 일생 내내 자신의 성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P.450. 즉 매춘부와 관계를 갖든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다. 금욕적 생활이든 또는 성생활이든 그들의 선택은, 격렬한 충동과 거기에 대한 저항력 사이에 세워지는 균형에 달려 있다.

P.466. 위고가 항상 품고 있던 노년에 대한 이미지가 그로 하여금 가장 늙은 나이에 이르러서까지도 자신의 성적욕망을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어떤 젊은 여자가 몸을 내 맡겼을 때 분명 그는 보아스를 생각했을 것이다.

P.467. 위고의 눈에 늙음이라는 것은 결함이라기보다는 명예였다. 늙음이란 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 숭고한 것, 그리고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결합되는 것이었다. 위고는 확실히 어떠한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P.469. 그것은 일종의 제2단계의 나르시시즘으로, 그로 하여금 자신을 풍자하도록 부추긴다. 그는 자신의 특이성에 대해 그토록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에 사랑에 빠진 노인들은 보편성을 즐겨 조롱할 수 있다.

P.471. 그는 그녀의 발가락을 핥는다. 그 후 그는 일부러 일을 꾸며 그녀를 취하게 만들고 그녀의 몸의 여러 부분들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 자신의 일기장에 붙여놓는다. 그의 행동에는 약간의 사디즘이 있다.

P.474. 이 두 소설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성욕과 죽음의 관계이다. 문학은 종종 이 두 문제를 결합시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의 반성을 야기 시킨다. 전통적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쾌락의 절정을 맛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를 다른 데서는 본적이 없다.

P.491. 성적 무관심이 필연적으로 모든 영역에 무기력과 무력함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많은 사례들이 그 반대적인 면을 증명한다. -중략-노년은 전반적으로 욕구 불만의 시기이다. 그래서 노년은 막연한 원한들을 질투라는 형식으로 구체화하게 한다. 한편 성욕의 감퇴는 많은 노년의 부부들에게 있어서 일방적인 또는 상호적인 원한들을 불러일으키며, 그 원한은 질투로 표현될 수 있다.

P.495. "당신의 새벽은 순수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황혼도 존경할 만한 신성한 것이어야 합니다. 내게 남아 있는 생명의 대가로 당신의 나이와 준엄한 천재성에 어울리지 않는 모종의 과오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P.504. 우리는 로버트 번스가 그리는 이상적인 부부와는 거리가 먼 경우들을 보았다. 행복하게 하나가 되어 살던 부부들에게도 늙는다는 것은 종종 불안정의 요소가 된다. 갈등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으로 그럭저럭 넘겨왔던 부부들에게서 나이는 대립을 더욱 악화시킨다.

P.505.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것이다. 현재 속에서 과거를 넘어서는 계획들을 통해 우리가 미래를 겨냥한다. 우리의 활동들은 무기력한 요구들로 가득 찬 채 응고되어 과거로 되돌아간다. 나이는 우리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과거는 점점 더 육중해지고, 반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노인이란 “살아온 긴 생을 뒤에 갖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을 희망이 매우 한정된 인간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들을 서로 반향되어 하나의 상황을 낳는다. 상황은 개인이 살아온 역사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이 불변 요소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P.505. 노년의 스위프트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 “세계에서 그리고 나의 좁은 원 속에서 일어 날 수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한 상태 속에 나는 잠을 깬다. 그 무관심이 너무나도 강하여 …… 아마도 품위, 질병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하루 온종일이라도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노년을 가장 활동적으로 보낸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변화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권좌에서 물러나 클레망소는 글을 썼다. 그는 정치에 말려들긴 했어도 활동이 줄어들었을 때 학자로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자기 관심의 핵심이었던 것을 포기하기란 힘든 일이다.

P.506. 과거는 대자(大字)의 양상으로 체험된다. 그러나 추억을 통해 과거는 즉자가 된다.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죽자와 대자의 종합을 열망하나 그것은 불가능한 헛된 바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속에서 즉자와 대자의 종합에 도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특히 노인들은 과거를 즐거운 마음으로 회상한다. “그들은 희망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추억으로 살아간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했다.

P.510. 논리적으로 재구성되고 위치가 설정된 이미지들은 대부분 보편적인 역사에 속하는 사건의 이미지들 만큼이나 우리들 밖에 머문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 왜곡된 의미만을 갖고 있다” -중략- 나는 자주 다른 시기들에 속하는 사실들을 단 하나의 추억 속에 혼합시켜버린다.

P.511. "나의 과거는 나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한쪽 끝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른 쪽 끝을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내 손에 남은 것은 끝이 풀린 썩은 천뿐이다. 모든 것이 환상 혹은 거짓이 되어버렸다."

P.513. “너무나 긴 나의 인생은 죽음의 기념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로마의 길들과 비슷하다”고 샤토브리앙은 썼다.

P.514. 나의 기억이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얼어붙은 유령뿐이다. 나의 역사에 이정표를 세우는 ‘죽음의 기념비들’에 매장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P. 515. '출세한 사람은 타인에게는 풍요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존재와 그 사람이 스스로 갖고 있는 체험 사이에는 커다란 오해의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아라공은 그의 가장 최근의 시들 중 한 편에서 자기 인생의 실패보고서라 할 수 있는 것을 썼다. 그때 어떤 비평가들은 겉으로만 그런 척 한다고 그를 비난했다. 그들은 “당신은 성공했고 당신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지 않소” 라고 단언했다.

P. 521. 나이든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이미지, 환상, 감정적인 태도등과 같은 형태로 내면화시킨다. 또한 노인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과거에 종속되어 있다. 나의 현 상황과 미래로의 열림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이다.

P. 523.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늙어 갈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

P.529~ 530. 사르트르는 이렇게 썼다.“인간의 현실은 설령 영원한 삶이라 할지라도 유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삶을 선택하면서 스스로를 유한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 자유의 행위 자체는 창조적이며 내 유한성의 수락이다. 내가 나를 만든다면 이때 나는 나를 유한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은 유일한 것이다. 내 역사의 시작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내가 초월해야만 하는 것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는
어떤 과거이다. 아무것도 나를 내 육체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인에게는 이러한 이중의 확신이 필요하다. 노인에게 남은 시간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고 노인은 자기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장년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미래는 질적으로 변한다. 65세의 우리는 45세 때보다 단지 수므 살만 더 먹은 것이 아니다. 무제한의 미래----- 무한한 것으로 보이던 미래----를 제한된 미래와 바꾼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지평선에서 어떤 경계표지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의 지평선이 보일 뿐이었다. 샤토브리앙은 자기의 먼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썼다.“예전에 꿈 꿀 때에는 젊음이 앞에 있었기에 내가 추구하던 미지의 것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경계 표지를 더듬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다.”

P.533. 80세에 모리악은 다음과 같이 썼다.“쇠약해지지도 않았으며, 실추되지도 않았고 부유해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똑같다. 늙은 사람은 자신을 바로 이렇게 본다. 노인에게 삶에서 얻은 것들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많은 해를 살면서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들 중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이렇게 보잘것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건들은 잊혀지거나 뒤범벅이 된다. 그러나 사상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 50년간의 독서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P. 535. 노인은 뒤처져 남아 있다. 그는 변화의 한복판에 변함없이 머물러 있어, 시대에 뒤져 있다는 선고를 받는다.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뒤처진다. 나는 나 자신의 예를 통해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20세 이후부터 많은 공부를 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나는 상대적으로 점점 더 무지해졌다 새로운 발견들이 늘어나고 학문은 풍부해져서 적어도 몇몇 분야에서만은 그 흐름을 따라잡기 위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게 낯선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는 것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만 갔다.

P.540. 많은 예술가들은 이제 자신들이 직접 예술행위를 할 수 없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것이었던 세계에 남아서 제자들의 성공을 통해 실망을 초월한다.

P.546. 수학의 진보는 조용한 전진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수정을 수반하는 일련의 논쟁이다. 기존의 지식들을 완전히 뒤집으려면 많은 열정과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점에 있어 서는 다른 이들보다 젊은이들이 더 적합하다. -중략- 늙은 학자에게 제동을 거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더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 먼저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언어 자료에 의해 지탱되는 무기력한 의미 작용의 총체” 인 것이다. 또 그는 이 작품에서 소외된다. 그의 작품은 세상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은 타인들, 자기 고유의 계획들에 비추어 그 작품을 능가하는 타인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P.555. 그러나 플라톤이 가장 심오하고 가장 독창적인 작품들을 저술한 것은 62세 경 부터이다.

P.556. 물론 철학자가 노년까지 자기의 철학 체계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경우 그 철학자가 그의 체계에서 빠져나와 근본적인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중략- 그 역시 정신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P.558. 보편적인 것은 개별화되지 않는다. 작품은 오로지 문체를 통해서, 어조를 통해서, 그의 특성을 지닌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작품 속에 드러낼 때만 문학적인 차원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기록일 뿐이다. 한 주체에 의해서 내면화된 현실이 아니라 외적인 지식의 차원에서 보편적인 객관성으로 현실을 드러내주는 문서일 뿐이다.

P.559. 물론 작가가 먼저 전달하기를 선택하고 그 후 상상력을 이용한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글쓰기라는 천직을 결정하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의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언제나 문학 작품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문학작품이란 종이 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통해 주체가 유희와 몽상에 의해 창조해낸 비현실적 세계의 물질화이다. 비현실적 세계가 안정성을 갖고 경험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것이 현실 세계의 다른 차원으로서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복합적인 활동이며 상상의 세계를 선호함과 동시에 의사 전달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P. 608. “얘야, 나의 운명도 나의 늙음도 부러워하지 말아라. 어린 시절 친구들 중 마지막 친구를 잃고, 나의 고향에서 그리고 가족 품에서 이방인으로 있게 된 것이 벌써 40년이 되었단다. 나는 나와 유사한 사람, 내가 친구 동료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긴 인생은 재앙이란다.” - 증략- 노인은 자기 세대의 사람들이 죽는 것만을 보지는 않는다. 흔히 그의 세계가 가고 그것과 교체되어 또 다른 세계가 오는 것을 보게 된다.

P. 615. 죽음은 사르트르가 ‘실현 불가능한 것들’ 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노년을 이 범주에 넣었었다. 대자는 거기에 도달할 수도, 그것을 향해 자신을 투사시킬 수도 없다. 죽음은 내 가능성들의 외적인 한계이다. 나 자신의 가능성이 아니다. 나는 다른 것들 때문에 죽는 것이지 나 자신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게 되면 그 죽음은 타인에게 죽음인 것이지 나 자신에게 죽음은 아니다. 내안에서 죽는 자는 타자이다.
-중략- 나는 결코 죽음을 실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P. 618. 세상이 변화 하거나 혹은 세상에 남는 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때, 젊은 사람은 변화의 희망을 간직한다. 노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아나톨 프랑스, 웰스,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죽음만을 원한다.

P. 622.“죽을 때를 알 필요는 없다”라는 답변은 의미심장하다. 만일 결말이 불명확함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확정되어 있고 촉박한 것이라면, 틀림없이 노인의 태도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P. 625~626. 그러므로 노년은 젊은 시절보다도 훨씬 더 카르페 디엠의 시기이다.“씨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는”순간이라고 퐁트넬은 말한다.“더 이상 수고의 계절이 아니라 습관의 계절이다”라고 도비녜는 말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본 바로는 현대 사회는 노인들에게서 그 여가를 즐길 물질적인 수단을 빼앗음과 동시에 여가를 제공한다. -중략 - 그러나 이런 특혜 받은 자들에게 있어서도 현재의 기쁨이 그들을 만족시키는가 의심해보아야 한다. 수많은 노년의 작가들은 그들이 보내는 불모성을 한탄한다.“시간이 내 손을 붙잡는다. 꽃이 이미 저버린 날들, 이제 더 이상 거두어들일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라고 샤토 브리앙은 말한다.

P.629. 1925년 프로이트는 5월10일, 루 살로메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때때로 변화는 눈에 썩 잘 띄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예전처럼 여전히 흥미롭고, 품성 역시 큰 변화는 없지만 일종의 공명 현상 같은 것이 부족합니다.내가 음악가는 아니지만, 예를 들어 말하자면 페달을 밟았을 때와 밟지 않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음향의 차이와 같은 것을 느낍니다.”

P.632~633. 노년을 가장 활동적으로 보낸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변화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권좌에서 물러나 클레망소는 글을 썼다. 그는 정치에 말려들긴 했어도 활동이 줄어들었을 때 학자로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자기 관심의 핵심이었던 것을 포기하기란 함든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서는 악순환이 생겨난다.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호기심과 정열은 저하되며, 무관심하므로 세계가 공허해진다. 그 공허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활동할 이유를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죽음이 우리 내면에, 그리고 사물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P.635. 루스타노 라코는 어떤 날에는 페탱의 이마위에 “ 늙어서 폐쇄했음”이라고 써 붙여야 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P. 641. 야심은 소수의 특권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야심에 대한 허영심을 갖게 될 뿐이다.

P. 690. 한편 노년은 ‘정상적인 비정상’ 상태이므로 정상적으로 노화에 수반되는 생리적 장애와 병리학적 특성을 지닌 심리적 장애 사이에 경계선을 긋기란 대개 어려운 일이다.
-중략 - “ 사람이 신경성 쇠약 환자가 되는 것은 자신과의 동화 속에서 타인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만족스러운 내적 안정감을 찾을 수 없을 때” 이다 이러한 때 사람은 일련의 징후들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방어이다. 많은 정신병 의사들은 신경쇠약환자의 자아를 지배하는 이 ‘동일화의 결함’을 강조 한다.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주요 어려움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동일성에 대한 느낌을 간직 하는 것이다.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이 또 다른 자의 존재를 대자로 실현시키지 못한다. 한편 노인은 사회적인 자격과 역할을 상실한 존재다. 그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더 이상 자신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동일화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때 노인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편 정신분석학자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증 환자들은 성적인 갈등을 나타내는데, 그러한 성적 갈등은 환자의 유아기의 역사 혹은 그의 현실적인 난점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간주한다. 노인은 성인보다 더 자기 유년기의 희생물이 된다. 왜냐하면 성년의 자기 검열, 방어 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현재 노인은 지속해 나가기 어려운 성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성적 에너지가 남아 있긴 하지만, 리비도의 생식기에의 집중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함이 있는 신체를 통해 받아 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상황에의 이른바 ‘정상적인 적응’ 이라고 하는 것이 노인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너무나 흔히 생각한다.

P. 705. " 이른바 뇌기능 장애라고 하는 것에 기인하는 노망이라는 낡은 개념이 완전히 재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정신 질환들이 사회심리학적인 요인들의 결과는 아닌가. 또 설비도 부적당하고 적절하지 않게 운영되는 기구들에 배치되고, - 중략- 우리는 심지어 정신이상의 임상학적 묘사는 어쩌면 흔히 예방과 회복에 대한 조심과 노력의 부재에서 오는 하나의 가공품일지 모른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P. 715. 노인이 죽을 때까지 자신이 세운 계획들에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계획에 부여하는 가치도 적어져서 거기서 얻는 기쁨도 적다.
죽을 때까지 창조적인 힘을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환멸 속에 죽었던 두 사람의 예를 두 가지 인용하려 한다.

P. 756.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마침내 영원은 그를 그의 내면에서처럼 바꾸어놓는다.” 죽음은 시간을 소멸시킨다. 우리가 매장하는 이 사람, 그의 마지막 나날들에 다른 날들보다 더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의 삶은 그 부분 부분이 모두 죽음에 차압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고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빅토르 위고는 동시에 영원히 30세이며 80세인 것이다.

P. 757.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P.758~759. 다만 이런 가능성은 오로지 한 줌의 특혜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중략- 이러한 두 부류를 비교해봄으로써 우리는 이 책의 서두에서 우리가 제기한 개인의 쇠락에 있어서 불가항력은 무엇일까. 사회는 어느 정도까지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쇠가 시작되는 나이는 언제나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오늘날, 광부는 50세에 벌써 끝난 인간이지만, 특혜자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80세에도 경쾌하게 지낸다. 노동자들의 사양길은 더 일찍 시작되고,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된다. ‘생존’ 기간 동안에도 손상된 그의 몸은 질병과 불구에 시달리게 된다. 다행히도 자기 건강에 유의해온 노인은 죽을 때까지 거의 그대로 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착취당한 사람들은 늙으면 비참해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빈곤과 불편한 거처와 고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실추의 감정과 전반적인 불안감이 뒤따른다. 그들은 멍청하게 얼빠진 상태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는 정신질환들은 대부분 체제의 산물이다. -중략-
살아오면서 겪은 손상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은퇴한 자는 현재 자기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한다. 그는 항상 삶의 의미를 도둑질 당했었기 때문이다. 강철법과 같이 가차없는 법이라도 법은 단지 삶의 모방만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삶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가능성의 고안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직업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제 주위에는 사막만이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을 목표들, 가치들, 존재 이유들로 가득 채울만한 계획들에 착수할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P.760.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은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지배 계층은 무산 계급을 대놓고 야만, 무지와 동일시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들을 인류 속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노동자가 생산력이 있을 때에만 인류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늙으면, 사회는 마치 낯선 인간을 보듯 고개를 돌려버린다.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공모적인 침묵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노년은 우리 문명의 모든 실패를 고발한다.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온통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P. 761~762. 그러나 우리의 계산은 틀린 것이다.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사회 생활에 접근하는 순간 느끼는 불안은 노인들이 사회에서 제외되는 순간 느끼는 고뇌와 대칭되는 것이다. 이 두 순간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일상의 반복되는 삶이 문제들을 은폐한다. 젊은이는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게 될 사회라는 기계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보도블록을 던지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체계 문제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장점.
시몬느 드 보브아르가 61세, 당시로 말한다면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쓴 이작품은 개인의 문제에서 전 인류의 위기의식으로 확장시켜 간 작가세계가 단연 돋보였다.
이 책의 여러 예시들이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으로 다가 오는 것은 사회안의 노인의 가치, 건강, 사회 제도, 성생활, 정신분석학 등의 관점이 문헌과 실증 자료를 토대로 충실하게 취재, 기록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세기를 망라하는 명성의 주인공, 각계의 ‘별’들의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그들의 에피소드를 넘어서 노년기에 어떻게 그들이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때문에 그들이 이룬 지성, 창조성에 경외감을 느끼고 있던 나는 노화와 죽음을 지연시키려 끝까지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가슴이 아팠다.
작가 자신에게도 추측하건데 이 책이 훌륭한 추동역할을 해주었음은 물론 죽음을 예비할 수 있는 역서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 된다. 건조한 문체여서 더 설득력이 있는 책이었다.

♣보완점 - 형식적인 것.
1.번역서를 읽을때 조사나 부사등이 늘 걸리는데 예외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포기하고 읽었다.
2. 여러 에피들이 아주 산만하게 널려 있는 듯한, 어느 부분은 마치 헐리우드 배우의 스캔들을 전해 듣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이 책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하게 읽히는 까닭은 우리나라에도 실버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노인 범죄, 소외노인의 방치된 죽음, 노인 폭력 등, 우리사회에서 노인의 위치는 사려 깊고 인자한 것 등의 순기능 보다는 적색경보가 발령된 사회 문제화로 대두 되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된 프랑스의 삼 십여 년의 시점보다도 우리나라의 복지제도가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금의 형편에서 이 책에서 노인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보브아르가 지적한대로 노년의 문제점이 제도적 미비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 적지 않으므로 사회적 연대감으로 끊임없이 개선되고, 함께 나누어야 마땅한 것이겠지만 문제의 해법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우리나라 역시 복지 국가로 이제야 길을 내는 과정이고 제도적 틀이 정착 하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노년의 문제를 우리사회가 책임지는 것은 앞으로도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면 평화로운 노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과제로 남는다.

나는 작가가 제시한 결론 중에서 그 해답을 얻었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책,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책, 그것 만으로도 노년을 준비할 수 있는 해답서로서의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감동적인 장절.

P.556. 물론 철학자가 노년까지 자기의 철학 체계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경우 그 철학자가 그의 체계에서 빠져나와 근본적인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중략- 그 역시 정신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P.558. 보편적인 것은 개별화되지 않는다. 작품은 오로지 문체를 통해서, 어조를 통해서, 그의 특성을 지닌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작품 속에 드러낼 때만 문학적인 차원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기록일 뿐이다. 한 주체에 의해서 내면화된 현실이 아니라 외적인 지식의 차원에서 보편적인 객관성으로 현실을 드러내주는 문서일 뿐이다.

P.559. 물론 작가가 먼저 전달하기를 선택하고 그 후 상상력을 이용한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글쓰기라는 천직을 결정하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의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언제나 문학 작품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문학작품이란 종이 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통해 주체가 유희와 몽상에 의해 창조해낸 비현실적 세계의 물질화이다. 비현실적 세계가 안정성을 갖고 경험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현실 세계의 다른 차원으로서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복합적인 활동이며 상상의 세계를 선호함과 동시에 의사 전달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20년 전 내가 밤마다 품고 잠들던 그 오래된 책을 꺼내 그녀의 사진에 굿나잇 키스를 날리고 싶은 밤이다.
당신은 그곳에서 평화로운가. 묻고 싶은 밤이다.
고맙다, 시몬느 드 보바르. 부활절 인사를 나누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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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4 21:00:53 *.36.210.80
글쓰기를 점점 재미있게 하고 있군요. 이 과정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소곡주를 나눠마실 수 있도록 꼭 지참해 주시길 바래요.^^ 힘들었지요? 앞으로도 만만치 않으리란 거 아시죠. 지금같이 하면 될 거에요. 뜻한바를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W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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