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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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으로 만들어질 뿐이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정체성을 의심하던 여성들에게 ‘깨어나라!’는 시몬 드 보브와르의 외침이다. 이 경구를 담고 있는 그의 대표작 ‘제2의 성’이 발간되었을 때 바티칸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알베르 카뮈, 프랑스와 모리악 등 지식인 들을 비롯한 남성중심 사회 전반에서는 거센 비난과 혹평이 일었다. 그러나 여성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깨운 이 책은 당시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이후 여성해방운동의 대표적인 지침서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그녀는 ‘98년 ‘타임’지에서 선정한 20세기 인간의 삶과 정신을 바꿔 놓은 10대 논픽션 저자 중 하나로 선정된다.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학자 미셀페로는 그녀의 영향력을 이렇게 요약한다. ‘보브와르의 사상은 무기가 되고 현실이 되어, 여성들은 사회적 역할을 열망하며 대학에 등록하고, 모든 직종의 직업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결혼으로 인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르트르의 청혼을 거절하고 1년 단위의 계약 결혼을 한 여인. 그녀는 계약결혼, 피임․낙태 합법화 운동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치열하게 몸으로 표현하며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인간의 삶의 의미는 결코 확정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정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190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28년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한다. 몇 년의 교수 생활 후 교수직을 사퇴하고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하면서 평론, 소설, 자서전, 철학서, 여행기 등 20여권에 달하는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45년 사르트르가 잡지 <현대>를 창간하자 그 일에 협력하며 실존주의 문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녀는 사르트르, 카뮈와 함께 대표적인 실존주의 문학가로 분류된다. 1940년대 프랑스의 많은 작가들은 합리적인 인간관에 대한 의심, 삶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새롭게 추구하려는 공통된 경향을 띄게 되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사르트르이며 보브와르는 그의 영향을 받아 사르트르와 흡사한 사상을 그녀의 작품에 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사르트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감성과 여성의 존재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나는 ‘노년’을 통해 그녀의 책을 처음 접한다. 7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제2의 성’은 1,000페이지에 달한다고 한다.) 이 책은 엄청난 양의 사례를 담고 있다. 끈임 없이 나타나는 다양한 사례는 고대에서 현대를 아우른다. 또한 민족학, 역사 관련 사례, 예술가․과학자․철학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례를 포함하고, 그 사이사이에 수시로 나타나는 철학적 사고들로 그득하다. 그녀의 책에서 보여 지는 이런 엄청난 분량과 다양한 사례, 끈질긴 서술은 그녀의 지적 충만함, 저술에 대한 애착과 치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더구나 사회에서 많이 주목받지 못해왔던 노인문제를 과감하게 드러내서 사회적 변화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작가의 모습에서 당찬 용기와 사회 개혁가로서의 열정을 본다.
그녀의 작품으로는 1960년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 된 《제2의 성》을 비롯하여, 소설 《초대받은 여자》와 공쿠르상을 수상한 《레 망다랭》, 《대장정 : 중국에 관한 에세이》 《미국에서의 나날》 등의 여행기와 여러 권의 철학서도 있다. 《얌전한 처녀의 회상》 《나이의 힘》 《사물의 힘》 《결국》 등의 자서전은 개인적인 흥미를 넘어 193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 세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고 힘차게 묘사했다. 《노년》은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통렬하게 비판한 책으로 1970년 파리에서 첫 출간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싯다르타 왕자>[7]
우리 사회는 노년을 마치 일종의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여성이나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분야에는 풍부한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 반면 전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노년에 관련된 것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8]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다. 마르쿠제는, 소비사회는 불행의 의식을 행복의 의식으로 대체시켰고, 모든 죄의식의 감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사회의 행복 의식, 그 태평함을 뒤흔들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태평함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8]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가는가를 묘사하고자 한다. 나는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가를 말하고자 한다.[9]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11]
인간은 그 말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는, 현 상황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전복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몇몇 제한적인 개혁을 통해 그러한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부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침묵을 깨는 것을 도와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16]
머리말
나의 본질적인 목표는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연로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이다.[18]
한 사회 안에서 노년이 지니는 의미나 무의미는 그 사회 전체를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노년을 통해서 이전의 전 생애의 의미 혹은 무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18]
모든 인간의 상황은 보는 관점에 따라 외면성과 내면성,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외면성이란 그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며, 내면성이란 주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여 초월해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타인의 노년은 앎의 대상이다. 반면 자기 자신의 노년은 자기의 상태에 대한 산 경험과 관련 있는 법이다.[19]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不動)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의 노인학 의사인 랜싱Lansing 씨는 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노화란 보통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깊으며,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죽음에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 과정이다.”[20]
노년은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23]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노인학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이 모든 분야에서 노인학은 한결같이 실증주의의 기정 방침에 충실하다. 노인학에서 문제는 노화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나타나는 바를 종합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다.[37]
미국의 노인병 학자 하월Howell은 노쇠는 “사양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속도로 내려가지 않는다. 우리는 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인 보행으로 사양길을 내려가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굴러 떨어진다.”라고 말했다.[45]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어휘력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때로는 더욱 풍부해지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 것으로 잘 받아들인 지식이나, 어휘력, 단어와 숫자들에 대한 단기 기억력이나 장기 기억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는다. 요컨대 개인에게는 유동적이고 적응성이 강한 잠재 능력과 이미 습득된 매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결정화(結晶化)된 부분이 있는데 전자는 노후하며, 후자는 노후하지 않는다.[50]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인간은 노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쇠란 불가항력의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노화는 어김없이 죽음에 이른다.[51]
인간의 노쇠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노쇠는 그 사회의 성격과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밀접한 종속관계에 있다. 경제적인 요인 자체를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정치적․사상적 상부 구조들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다.[53]
노화의 현실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인들에게 지정되는 자리는 어떤 것이며, 사람들이 어떤 노인상(상)을 품고 있는가를 여러 다른 시대와 장소를 통해 조사해 보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런 시간적․공간적인 비교를 통해 우리는 노인의 조건 가운데 불가피한 것은 어떤 것인다, 사회는 노인 조건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게 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대답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53]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노쇠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채택한 남성적 혹은 여성적인 이상과 상치된다. 신체적인 부자유 때문에 노쇠는 추함과 병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노쇠를 거부하는 것은 본능적인 태도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노쇠는 직접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기초적 반응은 도덕성으로 억제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다. 바로 여기서 모순이 생기고 우리는 수많은 모순의 실례를 만나게 될 것이다.[57]
북시베리아의 코랴크인들이 이러한 경우다.... 겨울은 혹독하다 오랫동안 걷는 일은 노인들의 기력을 쇠진시킨다. 기력이 소진한 후에도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노인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마치 불치병 환자들을 죽이듯 힘없는 노인들을 죽였다. 이것이 어찌나 당연한 일이었는지 코랴크인들은 그들이 이 일을 얼마나 잘 처리하는지를 자랑할 정도였다. 그들은 창이나 단도로 몸을 찌를 때 어느 부분이 치명적인지 가르쳐준다. 이러한 살인은 길고 복잡한 의식이 끝난 후 집단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행해진다.[71]
호피족, 크리크와 크로 인디언들, 남아프리카의 부시먼들은 마을에서 먼 외딴 곳에 지은 오두막으로 노인들을 데리고 가서 약간의 물과 먹을 것을 넣어준 다음 버리고 오는 풍습이 있었다. 식량 자원이 매우 불안정한 에스키모인들은 노인이 눈 속에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리도록 부추긴다. 고기를 잡으러 원정을 나갈 때 그들은 노인들을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빙산 위에 놔두고 가거나 혹은 얼음집 속에 가둬놓고 가서 노인들을 굶어 죽게 한다.[71]
그래서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아들은 능력을 상실한 늙은 아버지를 없앨 권리를 요구했다. 요구는 항상 허락되었다. 아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노인과 작별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사람들은 노인을 소에 태워 외따로 떨어진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다가 약간의 양식과 함께 그를 버리고 오는 것이다. 그는 굶어 죽거나 맹수에 의해 죽기도 했다.[73]
최근까지도 일본의 벽지에는, 너무 가난하여 살기 위해 노인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마을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인들을 ‘죽음의 산’이라는 산에 데려가 버리곤 했다.<일본소설 나라야마>[75]
아주 가난하지만 노인들은 제거하지 않는 미개인들도 있다. 앞서 나온 예문들과 이것을 비교하면서 이런 차이점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안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연안 지방 사람들과는 반대로 내륙의 추크치족은 노인들은 존경한다. 가족 간에는 아주 친밀한 유대 관계가 있다. 가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버지이며 그가 순록 떼를 소유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소유권을 가진다..... 어쨌든 노인이 재산의 소유자로 있는 한 재산이 그에게 커다란 위엄을 부여해준다.[81]
알류투인들 역시 그들의 생존 조건이 불안정하지만 노인들의 처지는 행복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노인들의 경험에 대해 인정하는 가치와 자식과 부모를 이어주는 상호간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경제력과 효성 사이에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부모들이 그들의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있고 또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여가를 가질 만큼 자연은 충분한 자원을 제공한다. 그래서 자식들은 늙은 부모가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한다.[83]
어린아이들을 잘 보살피지 않는 야쿠트족, 아니누족은 노인들을 거칠고 소홀히 다루는 반면, 거의 같은 생활 조건을 갖고 있지만 자식을 왕처럼 키우며 살고 있는 야마나족, 알류트인들은 노인을 존경한다. 그러나 노인들은 흔히 악순환의 희생양이 된다. 즉 너무나 궁핍해지면 어른들은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없게 되고 노인들을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효심은 관습과 종교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들은 부모를 죽이는 죽음의 의식을 가능한 한 가장 빈틈없이 세심하게 실행하면서 자신의 존경과 애정을 부모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110]
농경민이건 유목민이건 간에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가장 흔히 관습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노인들을 희생시키는 방법임을 추론할 수 있다.[110]
원시시대에 노인은 ‘타자’라는 단어가 야기하는 양면성을 지닌 진정한 타자였다. 또한 남성적 신화 속에서 우상인 동시에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는 여성 역시 이러한 타자였다. 이와 같이 이유도 다르고 방법도 다르지만 사회 안에서 오인은 열등한 인간이며 동시에 초인인 것이다. 그는 노쇠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중개인이고 마법사이며 제사장이기도 하다. 인간 조건이하이기도 하고 그 이상이기도 하며, 흔히 양쪽에 다 속한다.[116]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된다’는 것이다. <<제2의 성>>에서 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마술적인 힘으로 큰 위세를 누리는 경우 실제로 그 위세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준 것임을 증명한 바 있다.[116]
단지 그럭저럭 살아가려고만 하는 집단에서 쓸모없는 입이 된다는 것, 그것은 곧 쇠퇴를 의미한다. 반대로 선조들과 신비적으로 맺어진 정신적 생존을 바라는 집단이라면, 과거와 동시에 내세에 속해 있는 노인은 그 집단의 화신이 된다. 그리하여 육체적으로 가장 노쇠한 상태 역시 생의 절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정점은 흔히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에 위치한다. 그리고 노쇠는 하락으로 간주되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118]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118]
노인들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관해 원시인들이 채택한 실제적인 해결책들은 아주 다양하다. 즉 그들을 죽이거나,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거나, 최소한 생명만을 유지하도록 하거나, 안락한 종말을 맞도록 해주거나, 혹은 그들을 존경하거나 혹은 극진하게 대접한다. 우리는 소위 문명화된 국민들도 이와 똑같은 방식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공공연한 살해만이 금지되어 있을 뿐이다.[118]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흑인의 문제는 백인들의 문제이며, 여성의 문제는 남성들의 문제라고 사람들은 말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는 평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흑인들은 억압에 대항하여 싸운다. 한데 노인들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노인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의 문제이다.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이익과 이데올로기적인 이익에 따라, 그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퇴역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결정해버린다.[121]
“너무 오래 사는 사람은 염증을 느끼고 죽는다. 그의 노년은 고통스러우며 돈도 궁하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적들뿐이다. 모두들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민다. 제때에 가버리지 못하면 아름다운 죽음을 맞지 못하는 것이다.”<메난드로스>[148]
한편 노인들의 투표권은 다른 시민들의 투표권보다 더 비중이 높았다. 로마에서는 100인조(組)로 투표를 했다. 연장자들의 100인 조는 동등한 선거 가치로 볼 때 연소자들의 100인 조보다 훨씬 적은 인원을 포함했다. 그러므로 법적인 다수는 수적인 다수와 일치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유리했다.[157]
농업 개혁의 실패와 이탈리아 개혁의 실패는 공화 체제의 생명을 앗아가기에 이른다. 로마의 정복 정치는 결국은 정치적․사회적 해체를 야기한다. 이러한 동요기에 원로원은 조금씩 권력을 상실하고, 권력은 군인들의 손으로, 다시 말해서 젊은 남자들에게 넘어간다. 행정관들은 자문의 권위에서 해방된다. 일단 개인의 권력이 구축되자 원로원의 영향력은 계속 줄어든다. 젊은 황제는 실제적으로 원로원 없이 통치한다. 그리고 원로원은 정치․행정적 제 기능을 박탈당한다. 271년경, 갈리에누스와 더불어 원로원은 재정․통화상의 특권들마저 상실한다.[164]
키케로는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들을 ‘편견’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노인을 증오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희극작가들과 그 관객들의 눈에 우스꽝스러운 존재인 노인은, 시인들에게는 해가 미치지 않을까 두려운 파괴적인 힘을 나타낸다. 도덕가들은 노인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다. 노인들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인들을 어둡게 그려놓았다.[173]
봉건 사회는 세 계급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도하는 자들과 싸우는 자들과 일하는 자들이다. 그 사회는 일보다 검을, 심지어 기도보다 우선시했다. 그러므로 무대의 앞쪽을 차지하는 것은 행동적인 투사, 한창 나이의 성인이었다.[179]
그러나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특히 영국에서, 아버지는 집안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 아들에게 밀려났다. 이 아들 또한 어느 정도 나이에 이르러 농사일이 너무 힘에 부치게 되면 장남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한 권한을 상속받으면 장남은 결혼했다.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대치했고, 늙은 부부는 전통적으로 그들에게 정해진 방으로 옮겨갔다. 아일랜드에서는 그런 방을 ‘서쪽방’ 이라고 부른다. 권력을 박탈당한 아버지는 권력을 상속받은 아들에게 흔히 아주 나쁜 대접을 받았다.[183]
이전 세기들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대에도 문학은 노년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중세는 노년을 인간 누더기로 경멸하고, 나이 든 사람들의 노쇠 현상을 특히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육신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특히 여성의 육체는 격찬된다. 그렇기에 노인들의 추함은 더욱더 가증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늙은 여인의 추함이 이 시대보다 더 잔인하게 고발된 적은 없었다.[209]
왜 16세기에는 그렇게 악착같이 노인들은 공격했을까? 아버지들은 로마 시대의 가장과 같은 권위를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이 우롱당한 것이다. 젊은이들의 경쟁상대로 나타나는 것은 부유한 노인이다. 이 시대나 그전 시대나 하층 계급의 노인들은 문학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게다가 귀족들과 로마 세습 귀족들 또한 공격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 계급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 원한을 자극하는 자는 신흥 부자, 개인적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부르주아이다. 사업이 번창하면, 말년에 가서 그들은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 성인들의 눈에, 때로는 돈에 궁한 젊은이들의 눈에 이러한 부의 독점은 부당하게 보이며 증오에 찬 시샘을 불러일으킨다..... 노인이 돈을 이용해 젊은 여자를 매수하려 하면 더욱더 참을 수 없는 빈축을 사게 된다. 이 경우 젊은이들은 성적으로 욕구 불만을 느껴 복수를 하게 된다. 그들을 잔인하게 풍자함으로써, 혹은 그들의 풍자화를 보고 웃음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악덕’에 혐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220]
고대 이집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노년이라는 주제는 거의 언제나 상투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똑같은 비교, 똑같은 형용사들이 사용되었다. 노년은 인생의 겨울이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수염은 흰 눈과 얼음을 환기시킨다.....그러나 노인은 역사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며, 아무도 노년의 진실을 연구해보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17세기 초반에 놀라운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셰익스피어이다. 그는 <리어왕>을 쓰면서 노인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다. 왜, 그리고 어떻게?[231]
“내 나이에 가장 서글픈 것은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희망은 가장 달콤한 열정이며 우리가 유쾌하게 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열정이다.”[249]
노인에게 남아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그들에게 삶을 확신시켜주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는 아주 생생한 결과입니다. 이것을 통해 젊은 시절의 욕망을 회상하고 때로는 아직도 젊다는 상상에 빠지기까지 하지요“[249]
1606년 영국 국교는 보댕Bodin이라는 프랑스인의 사상을 채택했다. 그의 책이 번역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 책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식들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군주는 백성들의 아버지여야 한다고 청교도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가장은 가족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져야 한다. 노인들이 집안을 다스리고 그의 권위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설교가 많았다. 적어도 그들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노인들은 정열을 상실했기에 청교도들이 원했던 금욕주의를 자연스럽게 실행했다. 노인들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모든 성공은 하느님의 축복의 표시였으므로 장수도 덕의 징표로 간주되었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청교도들은 노인들을 존경했다. 청교도들은 권좌에 오르자 자신들의 도덕을 온 영국에 강조하고자 했다.[253]
돈 많은 늙은 상인이라는 인물이 초서 이후로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살펴보았다. 그 다음 몇 세기 동안 노상인의 재산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당하게 특혜를 받았다고 평가하여, 그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복수했다. 경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발전하여, 노상인이 사회 전체에 어떻게 봉사하였던가를 깨닫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 노상인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장점을 부여한 것은 청교도들이 가장 먼저 주장한 실리주의였다. 그 후 노상인은 특히 나이가 많이 들고 나서 존경받았다. 경제적인 번영이 지혜와 미덕을 보증해주었던 것이다.[267]
문제는 다시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젊어질 수 있다는 것, 즉 한계에서 벗어나서 결코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지 않는 모험처럼 삶을 다시 산다는 것이다.[270]
19세기 들어 유럽은 변모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변화는 노인들의 조건과 사회가 노인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모든 나라에서 터무니없이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이다.[271]
법은 노인들을 자식들의 무관심과 푸대접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어떤 상황에서 법은 권리의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서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종신연금을 받았다. 종신 연금의 총액수는 공증인 앞에서 정해졌다. 만일 자식들이 부모에게 종신 연금 지급을 거절하면 부모는 자식을 법정에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노인은 더 이상 가족의 독단에 종속되지 않았다. 법정이 노인에게 보장한 이러한 보호 때문에 불행하게도 종종 노인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275]
그들은 부모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동기를 갖게 된 셈이다. 그것은 법적인 구속의 준엄함을 피해보려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었다. 비율로 따져볼 때 폭력이나 궁핍을 통한 노부모 살해가 어느 시대에 가장 많이 자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노인 살해는 시골의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이러한 노인 살해가 풍문으로 여론에 알려졌는데, 여론이 염려할 정도로 자주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275]
티에르는 공직에서 사임했을 때 76세였다. 1917년 클래망소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처칠은 81세, 아이젠하워는 87세에 권력을 넘겼다. 혁명이 성공을 거둔 나라에서는 스탈린, 모택동, 호치민 등이 늙도록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294]
오늘날의 기술주의 사회는 해가 거듭되면서 지식이 축적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지식은 쓸모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나이는 자격 상실을 야기시킨다. 또 젊음과 연관된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295]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이 시대의 노인들의 운명은 원시사회의 노인의 운명과 흡사했다. 노인의 운명은 본질적으로 그들 가족에 달려 있었다. 애정 때문에, 혹은 이목이 두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을 염려하거나, 적어도 올바르게 그들을 대우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노인들을 소홀하게 대했고, 양로원에 버리거나 집에서 내쫓아버렸으며, 심지어는 남몰래 죽이기도 했다.[302]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인
인구의 노화는 자본주의 민주 국가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현대 사회의 문제들 중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영국 보건성 장관인 이안 맥 레오드Ian Mac Leod는 말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더 많아졌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자연스럽게 사회에 통합되지도 않는다. 사회는 그들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정은 행정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노쇠는 이제 정치적인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312]
필라델피아의 공중 위생에 대하여 린든Linden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시민들 중 고령자들의 감정적인 문제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로는 노인들을 기피하는 사회적 배척 현상, 친구들 범위의 축소, 극심한 고독, 인간에 대한 존경심의 감소와 상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들 수 있다.”[344]
1962년 빈에서 실시된 1,000명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는 노인들이 공동생활이나 고립보다는 ‘거리를 두는 밀접한 관계’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346]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내가 늙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나는 피곤하고 미칠 듯 화가 난다.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 못한 것이 없다. 오히려 더 낫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떤 적이 나를 꽁꽁 묶어놓고 심한 고통을 가한다. 그래서 나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사고를 하고 계획들을 세울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을 더 이상 실천할 수가 없다.”<예이츠>[415]
톨스토이의 정력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큼 대단했다. 원기를 유지하려는 그의 세심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67세에 자전거를 배웠고, 그 후 몇 년 동안 자전거나 말 또는 긴 도보 산책을 계속했다. 그는 테니스를 즐겼고, 강에서 냉수욕을 했다.[435]
“인간이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라고 늙은 어부는 말한다.<노인과 바다>[438]
노년의 왕성한 성욕으로 널리 알려진 예로 톨스토이를 들 수 있다. 그는 말년에 남자와 여자에게 완전한 순결을 권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69, 70세에도 말을 타고 긴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러고 나서는 쾌활한 기분으로 하루 종일 집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462]
특히 성욕과 창의력과의 관계는 놀라울 만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 관계는 위고, 피카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 명백히 드러난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플로베르가 ‘일종의 열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공격적 성격이 필요하며,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리비도에 근거를 둔다. 또한 창조하기 위해서 애정의 열기로 스스로가 이 세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야 한다. 이 애정의 열기는 육체적 욕망과 함께 사그러진다.[490]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출세한’ 사람은 타인에게 풍요로운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존재와 그 사람이 스스로 갖고 있는 체험 사이에는 커다란 오해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515]
그날 그날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그 시간의 내용에 달려 있다.[528]
80세에 모리악은 다음과 같이 썼다. “쇠약해지지도 않았으며, 실추되지도 않았고 부유해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똑같다. 늙은 사람은 자신을 바로 이렇게 본다. 노인에게 삶에서 얻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많은 해를 살면서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들 중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이렇게 보잘것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건들은 잊혀지거나 뒤범벅이 된다. 그러나 사상에 대해서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 50년간의 독서에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533]
예로 든 이 세 사람의 노정치가가 모두 실패한 말로를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치인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역사에 의해 죽기 위해 활동한다. 정치인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빠져나올 수 없는 역사의 어떤 순간을 살아낸다. 사태의 새로운 흐름에 적응했다 할지라도 대중의 눈에 그는 어떤 전술과 어떤 방법, 어떤 시행령의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클레망소는 전시의 인간이었다. 전후의 상황은 곧장 그를 버렸다.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처칠도 마찬가지로 승리를 얻은 후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여겨졌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립은 그가 세운 모든 원칙이 부정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또한 어떤 사건의 커다란 모순에 눈을 감는 노인들도 몇몇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로 나타날 뿐이다.[605]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노인은 외양이 왜소하고 빈곤해져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변함없이 인격체를 가진 하나의 인간이다. 어떻게 노인은 이러한 상황을 그날 그날 만족하며 살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남겨진 기회란 어떤 것일까? 그런 상황에서 노인은 어떤 방어 행동을 취하는 것일까? 노인은 그런 상황에 적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대가는 무엇일까?[624]
이러한 세계의 마모 현상과 그것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슬픔, 그것을 안데르센이 69세에 쓴 한 편지 속에서 표현한 것보다 더 잘 표현한 예는 없다. “정원에 가서 장미들 가운데 있다고 하자! 그 장미들, 그리고 장미 줄기 위에 있는 달팽이들까지도 이미 나에게 말했던 것 이외에 그 무엇을 말할게 있단 말인가? 넓은 수련 잎사귀들을 바라보면 토른벨린이 이미 여행을 끝마쳤다는 것이 기억난다. 바람소리를 들으면 바람은 이미 내게 발데마르 도에에 대해 말했으므로 내게 들려줄 좋은 얘기가 이제 더 이상 없다. 숲 속, 오래된 떡갈나무 아래에 있으면, 오래전 그 나무가 내게 자신의 최근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이처럼 나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인상을 받지 못한다. 슬픈 일이다.”[627]
노인들에게 있어서 호기심의 부재와 무관심은 생리적인 상태에 의해 더욱 강해진다.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것은 그를 피곤하게 만든다. 때때로 심지어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왔던 가치들조차 더 이상 인정할 힘이 없다.[632]
객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맞서 노인은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쓴다. 노인의 대부분의 태도들은-어쨌든 대부분- 방어로 해석해야 한다. 거의 모든 노인에게 공통된 태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습관을 피난처로 삼아 안주한다는 것이다.[651]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가 높았을수록, 즉 노인이 더욱 많은 권한이나 위엄을 보유하고 있었을수록 실추는 더더욱 고통을 준다. 노인이 된 그에게 가족 내에서 약간의 권위라도 남아 있게 되면 그는 그 권위를 남용하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보상이며 앙갚음이다.[668]
우리는 노년이 평온함을 가져다준다는 편견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부터, 성인이 된 인간은 인간 조건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지니지 못한 미덕들을 나이에 전가시켰다. 즉 아이들에게는 순수함을, 노인에게는 평온함을 전가시켰다. 인간은 말년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을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678]
수많은 노인들을 돌보았던 르베르지 박사는 야코바 반 벨데의 <<커다란 방>>이라는 저서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노년을 행복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훌륭하든 혹은 형편없든, 소설가들밖에 없다. 노년에는 단 한 가지 노년밖에 없다. 병원 침대에 누워 사는 노파의 운명과 안락의자 속에 파묻혀 사는 지체 높은 집안의 늙은 여자의 운명은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반쯤 석화된 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과거의 어른들과 아이들 시절의 그들과 닮았다. 그리고 흔히 그들은 예전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에게서 살고자 하는 욕망은 꺼지지 않았다. 욕망, 정열, 변덕은 남아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책 속에서 볼 수 있는, 경륜이 가져다주는 훌륭한 조부모의 지혜나 평온함을 볼 수 없었다.”[679]
직업과 함께 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개인은 고통스럽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긴다. 노인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또는 만약 그가 특권을 받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한다. 그는 직위, 역할, 직함, 명예를 탐욕스레 원한다. 그러나 헐벗게 된 그의 생활 속에서 진실로 능력을 끌어낼 수가 없다.[682]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 말년은 하나의 해방이다.[683]
우울이란 ‘정신적 고통, 감정과 더불어 체험되는 그리고 심리적인 정신 운동의 기능 약화와 억제로 특징지어지는 격심한 의기소침 상태’이다[693]
모든 우울증 환자들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완전히 사라져버리기를 원한다. 미래가 그들에게 제안하는 유일한 전망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죽음이 가능한 한 가장 빨리 그들에게 다가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자살의 유혹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도 많다.[696]
제8장 노년의 실례들
한 사람의 말년은 대부분 그의 장년기에 달려 있다. 샤토브리앙이 음울한 최후를 준비했던 반면에 볼테르의 개방적인 태도는,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노년을 가져다주었다. 스위프트와 휘트먼은 둘다 노년에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인간 혐오자였던 스위프트와 삶을 사랑했던 휘트먼은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스위프트의 분노는 그의 불행을 악화시켰으며, 휘트먼의 낙천주의는 그로 하여금 시련을 극복하는 것을 도왔다.[706]
노년이 존재의 완성으로 간주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있기는 하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코르나로, 퐁트넬이 그런 경우였다. 그들은 평생을 신중하고 절제 있게 보내면서 노년을 준비했다. 빅토르 위고는 더 눈에 띄는 경우이다. 빅토르 위고는 아직 젊었을 때에도 그의 작품 속에서 노인들에게 영예로운 위치를 주었다. 위고의 예는,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인생의 초기부터 어떤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707]
그러나 같은 해 1월 7일, 그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 내가 늙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영혼의 증거인가! 나의 육신은 쇠약해지고, 나의 사고는 성장한다. 나의 노년에 일종의 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708]
1935년 6월 그는 60세 생일을 맞은 토마스 만에게, 너무 늙어서 까지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볼 때, 자비로운 운명이 적당한 시기에 우리 삶의 길이를 제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936년 5월 18일 그는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이렇게 쓴다. “나는 가정생활에서만 예외적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노년의 불행과 비탄에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향수어린 마음으로 허무를 통과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733]
결론
인간의 신체 조직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쇠퇴한다. 그것이 경험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과정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노쇠는 개인의 활동의 축소를 가져온다. 흔히 정신적 능력의 감퇴와 세계에 대한 개인의 태도의 변화를 수반한다.[755]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노년을 슬프게 혹은 반항적으로 맞아들인다. 노년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756]
더욱 비참한 것은 그를 침범한 무관심이 그가 과거에 가졌던 열정, 확신들, 활동들에 이론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756]
루소의 말대로 모든 것이 헛된 수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이미 얻은 결과들에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게 되면, 과거에 그토록 열심히 일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756]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Faguet의 이 말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757]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757]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해야 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758]
사람들은 종종 노년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을 저축하고, 은퇴 생황을 할 곳을 정하고, 취미를 만드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날이 와도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게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758]
착취당한 사람들은 늙으면 비참해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빈곤과 불편한 거처와 고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실추의 감정과 전반적인 불안감이 뒤따른다. 그들은 멍청하게 얼빠진 상태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는 정신질환들은 대부분 체제의 산물이다.[758]
건강과 명석한 이성을 보존한다 해도 사람은 권태라는 끔찍한 재앙에 시달리게 된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박탈당한 은퇴자는 다른 어떤 영향력도 회복할 수 없다. 자기 일이 없는 여가란 자주성이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자는 시간을 죽일 소일거리조차 찾아내지 못한다. 음울한 나태는 결국 무감각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것은 남아 있는 신체적․정신적 균형마저 해치게 된다.[759]
이 세상의 목표들, 가치들, 존재 이유들로 가득 채울 만한 계획들에 착수할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 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노쇠가 때 이르게 시작되고, 빨리 진전되며,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끔찍한 것은 사회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손으로 노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소외당하고 착취당한 사람들은 기력이 사라지면 숙명적으로 ‘폐품’과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759]
어떤 처방책도 사람들을 일생 동안 희생물로 만들어온 체계적인 파괴를 씻어줄 수는 없다.[760]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760]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은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760]
만약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다른 수많은 미립자들 틈에 갇혀, 고립된 미립자처럼 무력화되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본질적인 집단적인 삶에 참여한다며, 인간은 결코 유배를 겪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조건들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보다 조금은 더 거기에 가까이 가고 있지만, 아직도 한참 멀었다.
조금 전 내가 환기시킨 이상적인 사회에서라면 노년이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꿈꾸어볼 수도 있다.[761]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761]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 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762]
3. ‘내가 저자라면’ -
저자는 이 책을 쓰는 이유가 ‘우리 사회의 노인문제가 심각한 상황임에도, 침묵하고만 있는 또는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가는가를 묘사함으로써,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가를 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외적 관점과 내적 관점이란 큰 틀에서 노년을 설명해 간다. 즉, 노년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관점(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과 노인들 스스로는 어떻게 노년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관점(제2부, 세계 속의 존재)으로 나누어 노년을 검토한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에서는 노화의 생물학적 의학적 관점을 조명하고(1장, 노화와 생물학), 인류학과 민족학 관점에서(2장, 민족학적 자료들), 역사 및 사회학적 관점에서(제3장, 역사사회에서의 노년 및 제4장, 현대사회에서의 노년) 노년을 검토한다.
저자는 수많은 민족학적 자료와 역사적 자료들 조사하고, 그 속에서 노인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 걸쳐 비교한다. 이런 시간적, 공간적 비교를 통해 노인의 조건 가운데 불가피한 것은 무엇인지, 사회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제2부 세계 속의 존재’에서는 인간이 나이를 먹게 되면 자기의 육체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가(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그리고 노인이 느끼는 시간과의 관계, 활동, 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6장, 시간, 활동, 역사), 또 노인들의 심리적 특성과 그 원인을 분석하고(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이 노년을 어떻게 느꼈는가(제8장, 노년의 실례들)를 기술하였다.
보완할 점(아쉬운점)
너무 많은 유사한 사례로 읽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 또 사례마다 이어지는 침울한 표현은 문제의 심각성을 독자에게 세뇌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까지 들게 한다. 사례를 읽다 보면 나도 침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울한 기분을 느끼면서 까지 책을 읽을 독자가 있을까?
1960년대 후반에 씌여진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몇 가지 보완 할 점을 살펴보면
우선, 노인의 어려움을 너무 과대 포장했다. 노인을 구분하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기능적 연령(Functional Age)은 노인을
1. 건강한 노인(well elderly : 활동적이고 건강한 노인),
2. 미약한 손상 노인(somewhat impaired elderly :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인),
3. 허약한 노인(frail elderly : 정신적 신체적으로 몹시 쇠약하여 모든 활동을 타인에게 의존하며 시설에 입소가 필요한 노인) 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을 78세로 보면, 은퇴 후 15년에서 20년 정도를 노년으로 보낸다고 볼 수 있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건강한 노인으로 사는 기간이 훨씬 길고, 허약한 노인으로 사는 기간은 비교적 짧다.(1-2년 내외) 우리는 노년을 보내면서 ‘건강한 노인’에서 ‘미약한 노인’, ‘허약한 노인’의 단계로 이동해 가는 것이 보통인데, 건강한 노인으로 사는 기간을 연장하고 허약한 노인으로 사는 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는 것이 노년을 잘 보내는 방법 중 하나다.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노년’에서 보여주는 사례는 거의가 허약한 노인(frail elderly)의 사례를 드는 것 같다. 누구든지 죽기 전 얼마간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몹시 쇠약한 상태를 거치게 된다.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작가의 논리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사례들을 선택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60년대 후반 프랑스의 상태를 잘 모르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든다)
에디슨(548p)이나 아인슈타인(552p) 사례도 보완되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에디슨은 ‘전기 교류 도입을 반대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반대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는데, 어떻든 에디슨은 그가 만든 전구로 인해 GE라는 20세기 최고기업이 탄생하는 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 반대를 했다는 단편적인 사실로 시대에 뒤떨어 진 사람으로 평하는 것은 좀 그렇다.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과학의 진보를 돕기보다 방해했다는 것은 사실이다’는 말은 수긍하기 어렵다. 과학자가 서로 다른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발전적인 것이고, 저자의 말처럼 이런 과정을 통해 과학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마치 나이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엮어서 단정적으로 얘기 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본다.
저자는 1960년대 후반 프랑스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책을 썼다. 노인복지문제 해결에 사회적, 국가정책적인 면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개인의 역할’ 부분도 많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봐도‘생산적 복지’,‘참여복지’등의 용어를 쓰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부분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 같은 내용으로 다시 책을 쓴다면, 이 부분이 보강되어야 할 것 같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최근까지도 일본의 벽지에는, 너무 가난하여 살기 위해 노인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마을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인들을 ‘죽음의 산’이라는 산에 데려가 버리곤 했다.<일본소설 나라야마>[75]
☞ 언젠가 TV에서 영화로 보았다. 당시에는 신화이야기 인지도 몰랐는데,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사회가 당연히 치루어야 하는 의례. 의례로서 신화의 역할. 사랑하는 어머니를 죽음의 골짜기에 남겨두고 와야 하는 자식의 애틋함. 살기 위한 죽임.(살기 어려운 사회에서의 필요악) 죽음을 슬퍼하는 듯 흩날리는 눈발. 또한 죽음을 거부하는 노인. 그리고 의례를 거부하는 노인을 죽이는 아들. 죄의식의 면제..... 지금도 그 장면들이 떠오르는 멋진 영화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된다’는 것이다.[116]
☞ 노인이 사회의 ‘주도세력’(경제활동 성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현재의 노인들도 노인이 되기 전에는 ‘주도세력’으로서 그 이전 세대의 노인들과 함께 살았다. 역사의 순환법칙이다. 미래의 노인인 현 ‘주도세력’의 역할이 중요하다.
노인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의 문제이다.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이익과 이데올로기적인 이익에 따라, 그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퇴역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결정해버린다.[121]
☞ 노인문제가 심각하다고 주장하는 현재의 노인들은 자기가 주도세력으로 노인에게 지위를 부여할 당시에 어떤 방식으로 행동했는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저자가 ‘주도세력’이었을 나이(40-50대)에 이 책을 썼다면 더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왜‘주도세력’ 일 때에는 이런 생각을 못하는 걸까?
☞‘제 2장 민족학적 자료들’에서 사회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에서 노인이 어떤 대접을 받는 지가 구별된다고 했다. 결국은 주도세력을 포함한 사회 전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주도세력이 변해야 어린이도 노인도 변한다.
단지 그럭저럭 살아가려고만 하는 집단에서 쓸모없는 입이 된다는 것, 그것은 곧 쇠퇴를 의미한다. 반대로 선조들과 신비적으로 맺어진 정신적 생존을 바라는 집단이라면, 과거와 동시에 내세에 속해 있는 노인은 그 집단의 화신이 된다. 그리하여 육체적으로 가장 노쇠한 상태 역시 생의 절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118]
☞ ‘선조들과 신비적으로 맺어진 정신적 생존을 바라는 집단’이란 어떤 집단일까? 우리나라가 갖고 있던 유교문화 전통을 이런 유형으로 봐도 좋을지 모르겠다.
키케로는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들을 ‘편견’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노인을 증오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희극작가들과 그 관객들의 눈에 우스꽝스러운 존재인 노인은, 시인들에게는 해가 미치지 않을까 두려운 파괴적인 힘을 나타낸다. 도덕가들은 노인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다. 노인들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인들을 어둡게 그려놓았다.[173]
☞ 노년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부정적으로 보는가가 키케로와 저자의 차이다. 현대 사람들은 대개 긍정적인 견해를 갖는 키케로의 책을 많이 읽고, 그 내용을 인용 한다. 어차피 확정되지 않은 것이 미래라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게 훨씬 맘 편하고 발전적이지 않은가?
법은 노인들을 자식들의 무관심과 푸대접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어떤 상황에서 법은 권리의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서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종신연금을 받았다. 종신 연금의 총액수는 공증인 앞에서 정해졌다. 만일 자식들이 부모에게 종신 연금 지급을 거절하면 부모는 자식을 법정에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노인은 더 이상 가족의 독단에 종속되지 않았다. 법정이 노인에게 보장한 이러한 보호 때문에 불행하게도 종종 노인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275]
☞ 재산 상속을 하고나서 빈털터리가 된 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 자식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거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가 아닌지 모르겠다. 단, 이것 때문에 노인들에게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 질 수 있다면 말이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757]
☞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노후생활을 잘해나가기 위해 ‘일’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생산적인 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종종 노년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을 저축하고, 은퇴 생황을 할 곳을 정하고, 취미를 만드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날이 와도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게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758]
☞ 맞다. 노후준비 한다고 또는 못하고 있다고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뭔가. 무엇보다 현재를 어떻게 사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현재를 충실히 잘 사는 사람은 사실 노후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그렇다고 준비가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준비는 현재 자기 수준에서, 실행 가능한 범위에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중요한 점은 조금씩이라도 젊어서부터 준비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건강과 명석한 이성을 보존한다 해도 사람은 권태라는 끔찍한 재앙에 시달리게 된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박탈당한 은퇴자는 다른 어떤 영향력도 회복할 수 없다. 자기 일이 없는 여가란 자주성이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759]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 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노쇠가 때 이르게 시작되고, 빨리 진전되며,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끔찍한 것은 사회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손으로 노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소외당하고 착취당한 사람들은 기력이 사라지면 숙명적으로 ‘폐품’과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759]
☞ 근래에 와서는 개인의 역할도 점차 강조되고 있다.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760]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761]
☞ 꼭 그렇지는 않다. 근래에 와서는 많이 바뀌고 있다고 본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교육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가는 유한킴벌리의 ‘인간중심 경영’ 사례 참조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 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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