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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4일 03시 39분 등록
노년 – 나이 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홍상희, 박혜영 옮김



I.저자에 대하여

보부아르는 1908년 1월 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처한 시기는 격동하는 20세기의, 전대 미문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때였다. 그녀는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의 장녀로 태어나 카톨릭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세계의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을 바로 곁에서 겪어야 했다. 따라서 그녀가 나아가는 길 앞에 사회적. 정치적인 투쟁과 거부반응은 불가피 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세살 연하로서 그와 많이 비교되곤 한다.
사르트르와는 고등사범학교 교수 자격 준비 중에 만났다. 자격 시험에서 사르트르가 수석이고 보부아르가 차석이었다. 사르트르와 2년간의 계약결혼 하였고 넬슨 엘그렌, 클로드 랑즈만, 까뮈 등과도 동거나 교재를 하였으나 그 뒤 두 사람과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사르트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발전했을까?” 또한 “내가 그를 만났다는 것은 나의 실존에 중대한 사건이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사르트르가 잡지 <현대>를 창간하는 것을 계기로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문학운동에 본격적을 참여하여 뛰어난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후 피델 카스트로의 초청으로 사르트르와 함께 쿠바를 방문하고, 중국, 모스크바, 체코, 일본 등을 정부의 초청이나 대학 등의 초청으로 사르트르와 함께 방문하였다. 72세때 사르트르가 사망하자 에세이<작별의 의식>을 출간하였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게 ‘실존주의자’라는 명칭을 사람들이 붙였으나 본인들은 이를 부인하였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세계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근본사실을 바탕으로 기존 철학의 궁극 목적에 입각한 결정론적 세계관을 버리고 실존주의 모럴의 핵심인 ‘자유’ 속에 인간의 위험과 행동의 근거를 구하여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과 한 몸을 바치는 행동을 제창한다.

구속을 원치 않고 언제나 자유로웠던 그녀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창조적 삶’ 바로 그것이었다. 남이 가던 길에서 돌아섰고, 남의 삶을 뛰어넘어 자기의 길, 자기의 삶을 살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 길동무와 헤어져 홀로 가고,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고독하게 살아야 했다.

그녀는 자기가 갈 길을 먼 데서 찾지 않았다. 자기 주위 가까이, 바로 자기자신에게서 찾았다. 그녀는 여자이다. 우주의 삼라만상 모두가 해방을 바라듯이 여자도 해방을 원하고 있다.
자신이 여자라는 숙명에서 해방되는 것, 나아가서 세계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 바로 그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그녀의 사생활은 그녀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었고, 그녀의 창작활동은 세계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사생활이나 작가 활동 내지 사회 활동은 모두 ‘여권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녀의 대표적 저서이고 여성해방운동을 일으키는 이론적 초석인 된 <제 2의 성>을 비롯해서 소설. 평론. 희곡. 기행문 등 많은 저서가 모두 여권 신장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부아르는 또한 대단한 여행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전 학교에 근무할 당시 휴가를 이용해 이탈리아, 그리스, 모로코, 중부유럽을 여행했으며, 1944년에서 1947년까지 3년에 걸쳐 포르투갈, 튀니지, 스위스, 이탈리라 등지를 돌아보았다. 1947년에는 미국에 4개월 정도 머무르면서 <아메리카의 일상>이라는 수준 높은 르포를 발표했고, 1948년 다시 신대륙을 방문하여 멕시코, 과테말라로 여행하였다. 이 풍부한 여행경험은 <초대받은 여자>를 비롯하여 많은 저작에 도움이 되었으며 보부아르의 시야를 한층 폭넓게 만들어 주었다.

에세이든, 사회적 연구시론이든, 소설이든, 희곡이든 혹은 자서전적 이야기든, 보부아르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삶의 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는 ‘일을 통하여 독자성을 쟁취’하고자 함이요, 둘째는 ‘관습과 정신 구조의 분석을 통하여 변화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려’ 함이다. 첫 번째가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한 방향이라면, 두 번째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개인을 초월하여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녀는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첫소설 <초대받은 여자>(1943)를 발표한 후 1954년 콩쿠르 상을 받은 <레 망다랭>을 위시하여 <타인의 피>(1945), <모든 인간은 죽는다>(1946), <아름다운 영상들>(1966), <위기의 여자>(1970) 같은 소설들, <제2의 성>(1949), <노년>(1970) 등 방대한 사회학적 연구시론들, 그리고 <얌전한 처녀의 회상>(1958), <나이의 힘>(1960), <아주 달콤한 죽음>(1964), <사물의 힘>(1967), <결국>(1972), <작별의 의식>(1981) 등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삶의 체험을 담은 6편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써냈다. 그 외에도 많은 여행을 하면서 사회적, 정치적 에세이인 <미국에서의 나날>(1948), 중국에 관한 <대장정>(1957)을 썼으며, <파뤼스와 시네아스>(1944), <정신적인 것이 월등할 때>(1979)와 같은 철학적 에세이도 썼다. 희곡을 포함해 20권이 넘는 방대하고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장 폴 사르트르가 1980년 4월 15일,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6년 뒤, 1986년 4월 14일, 78세의 일기로 보부아르 여사는 다사 다난했던 일생을 마쳤다.



II.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9) 그러나 노년기가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가 있다. 또한 이 새로운 지위의 확립을 기리는 ‘통과의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11) “청춘기는 꽤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인생은 바로 이런 청년들을 노인들로 만든다” 라고 프루스트는 지적했다.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르는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 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16)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부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리말
(18) 노년에 관한 연구가 여러 면에서 완벽하게 철저하게 시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본질적인 목표는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연로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20)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정의 내렸듯이 느릿느릿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결론 지어야 할까? 분명 그렇지 않다. 그러한 역설은 삶의 본질적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매 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의, 그것은 부동(不動)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23) 인간에게 진보란 무엇이고 퇴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어떤 목표에 의거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절대로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각자 고유의 목표를 창출해낸다. 따라서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만 쇠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즉 노년은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33) 상투적이며 별 흥미를 끌지 못하는 위생학 이론들도 그 당시 많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예방 의학은 치료 의학에 뒤졌다. 이제 사람들은 노인들을 치료하는 데 신경을 썼다.

(51) 대개의 경우 모든 인간은 어는 순간부터 힘이 약해진다. ‘아름다운 노년’이나 ‘정정한 노년’이라고 우리가 말해도, 그건 나이 든 사람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균형을 이루었다는 뜻이지, 그의 신체 조직이나 기억력, 운동 작용과 정신 작용의 적응 능력들이 젊은이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인간은 노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쇠란 불가항력의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제2장 민속학적 자료들
(56) 그렇지만 상황이 어떻든 간에 생물학적 여건들은 남아 있다. 각 개인에게 노쇠는 그가 두려워하는 파멸을 부른다. 노쇠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채택한 남성적 혹은 여성적인 이상과 상치된다. 신체적인 부자유 때문에 노쇠는 추함과 병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노쇠를 거부하는 것은 본능적인 태도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노쇠는 직접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기초적 반응은 도덕성으로 억제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다. 바로 여기서 모순이 생기고 우리는 수많은 모순의 실례를 만나게 될 것이다.
…… .
어떤 사회든지 사람들은 삶을 지향하며 오래 살려고 한다. 그 사회는 젊음과 연관되는 원기와 생식력을 찬양한다. 또한 노년이 주는 쇠약과 생식 능력의 고갈을 두려워한다.

(62) 나는 사회 인류학 연구소가 친절하게 내게 전달해준 ‘인간 관계 영역 문서’들을 주로 사용했다. 수집된 정보들은 때로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충분하지 않거나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신중하게 연구해야 한다.

(64) 야쿠트인들과 20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트로스찬스키에 따르면 노인들은 집에서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되거나, 아들들의 노예가 되어 두들겨 맞고 힘든 일을 했다. 또 다른 연구가인 시에로셰비키는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을 한다. “살림이 넉넉한 가정에서조차 산 해골들이 있었다. 주름투성이에 옷을 반쯤 걸쳤거나, 혹은 맨몸이 완전히 드러난 채 구석에 숨어 있다가 손님들이 없을 때만 나와 불가로 다가와서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아이들과 다투는 것이었다.” 먼 친척들에 관해서는 더욱 심하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 같이 취급 받는다. 냉기 도는 구석에서 천천히 굶어 죽게 내버려진다.”

(69) 그들은 부모와 별 유대가 없으며 그들을 소홀하게 키운 부모 세대에게 원한을 품는다. 성인인 된 후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거칠게 대한다. 조부모와 억지로 같이 살아야 하는 아이들은 노인들을 싫어한다. 아이들은 노인들을 놀리고 노인들 몫을 먹어버리기도 한다. 통가인들에게 문화적. 사회적 전통 같은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인들의 기억이란 아무 소용이 없다. 종교는 극히 초보적이다.

(82) 그들은 몸은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그들의 생활 조건은 극히 불안정하다. 거의 언제나 굶주려 있어 먹을 것을 찾느라 모든 시간을 보낸다. 활동하지 않은 기간에는 부부 중심의 가족 단위로 나누어졌다가 캠프로 다시 집결한다. 그러나 최고 권위자는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재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 그것의 그들이 사는 이유이다. 그들은 자식들을 사랑한다. 할아버지 역시 손자들을 귀여워한다. 아들, 딸 모두 보살핌을 잘 받으며 그들도 부모를 극진히 사랑하여 캠프에서도 부모와 같은 오두막에서 살고 싶어한다.

(85) 게다가 만약 노인들이 신성한 전통들을 –노래, 신화, 의식, 부족 생활의 관습들- 알고 있다면 그들의 권위는 막강해진다. 원시인들의 지식은 마법과 분리할 수 없다.

(91) 그러나 대부분의 노인들은 아무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이야기, 신화, 관습, 의식, 춤, 신앙형식 등 전통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또 전수할 능력이 있는 가수들을 존경한다. 사람들은 이런 가수들을 마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신성한 존재인 것처럼 여긴다. 그들의 기억 덕분에 그 집단의 영속성이 연력을 넘어서 다져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노래들’은 주술적 가치도 갖는다.

(109) 가장 효과적인 보호 방법은 노인들에게 아이들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로하임Roheim은 유년의 행복과 말년의 행복 사이의 일치를 강조했다. 한 아이가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는 것이 장차 그의 인격 발달에 얼마나 큰 중요성을 지니는지 우리는 안다. 음식, 보호, 애정이 충분하지 않은 아이는 원한과 공포, 그리고 심지어 증오 속에서 자란다. 이런 아이가 성인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격적이 된다. 그는 부모가 늙어 무능해지고 자활할 수 없게 되면 부모를 소홀히 대할 것이다. 반대로 부모들이 잘 먹이고 애지중지 기른 자식들은 행복하고 개방적이며 친절한 사람이 되고, 또한 애타심도 발달한다. 특히 그들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애착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자손들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고 그것을 모두 이행한다. 내가 조사한 모든 경우에서 –인용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행복하게 자란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늙은 부모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경우는 단 한 것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116) 원시시대 노인은 ‘타자’라는 단어가 야기하는 양면성을 지닌 진정한 타자였다. 또한 남성적 신화 속에서 우상인 동시에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는 여성 역시 이러한 타자였다. 이와 같이 이유도 다르고 방법도 다르지만 사회 안에서 노인은 열등한 인간이며 동시에 초인인 것이다. 그는 노쇠하고 쓸모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중개인이고 마법사이며 제사장이기도 하다. 인간 조건 이하이기도 하고 그 이상이기도 하며, 흔히 양쪽에 다 속한다.

(118)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 –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 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제3장 역사사회에서의 노년
(136) 그러니까 많은 고대 도시들에서 노년은 하나의 자격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변모로서 노년은 사랑 받지 못했다. 시인들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138)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서 노인의 조건은 재산제도와 관련이 있다. 재산이 더 이상 무력에 기초하지 않고 법에 의해 확고하게 보장받고 제도화될 때, 소유주의 인격은 비본질적인 되어 더 이상 관심을 끌지 않게 된다. 소유주는 그의 재산과 동일시되고 그 사람 대신에 그의 재산이 존중 받는다. 문제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가 누리는 권리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늙었건, 허약하건, 심지어 신체가 불구이건 그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부는 보통 해가 갈수록 불어가므로 최고 등급을 차지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151) 플라톤은 노년의 가치를 확립해놓은 다음,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명령하고, 젊은 사람들은 그 말에 복종해야 한다” 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그는 나이라는 기준에 가치라는 기준을 덧붙인다. <국가>에서 모든 행정관들을 통제하는 교정자들은 50세에서 75세이다.

(153) 선험적인 명제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통찰력 있는 폭 넓은 관찰에 의한 것인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 속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경험이 진보의 요인이 아니라 쇠퇴의 요인이라는 생각이다. 노인이란 길고 긴 인생 내내 잘못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아직 그가 저지른 만큼 많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젊은 사람들보다 우월하지 못하다.

(157)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본질적으로 시골 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의거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새로운 것을 경계했으며, 로마인들의 본질적인 덕은 영구성이었다. 영구성은 의무감에 의해 보장되었다. 로마는 모든 시민에게 조국과 행정관들, 또 특히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의무를 강제했다.

(163) 소수지배 체제의 쇠퇴와 함께 노인들의 특권은 감소되고, 그러다가 아주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라쿠스 형제 시대부터 안정된 다수 통치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단지 동맹 관계를 맺은 다수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176) 기독교는 또한 노예제도를 금지시키지 않았다. 기독교가 여러 다른 민족들에게 새로운 종교로 채택된 것은 오로지 그들 민족들의 관습에 순응함으로 서였다. 게르만족의 관습은 특히 기독교를 오염시켰다.
기독교는 사실 자신이 개종시킨 민족들에 풍습에 의해 타락했고, 사상적으로는 고대의 사상을 물려받았다.

(178) 로마제국 시대 말기와 중세 시대 초기의 노인들은 공적인 생활에서 거의 제외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세계를 이끌어 갔다. 분열되고, 혼란스러우며, 위협적이고, 호전적인 사회는 안정된 제도보다는 전쟁의 운수에 훨씬 저 지배를 받았다. 그런 사회에서 경험 많은 사람의 자리는 거의 없었다.

(196) 13세기에 위그 생 빅토르는 “세계의 종말이 다가와, 사건들의 흐름은 이미 우주의 끄뜨머리에 이르렀다”라고 썼다. 이 세계는 노쇠해가면서 쪼그라들고 있었고 사람들조차 왜소해졌다.

(198) 이제 사람들은 물건이나 화폐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부유층에서 노인의 조건이 변한다. 부의 축적에 의해 노인들은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노인들에게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두 개의 사상적 조류가 공존한다. 하나는 종교적이며 유심론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염세적이며 유물론적인 전통이다.

(203) 더 흥미로운 문제는 이 전설이 거둔 승리이다. 중세는 모든 어두운 시각들을 자진해서 기꺼이 받아들이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전설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벨리사리우스는 고령의 불행 –신체적인 불구와 종속적인 삶, 수동성, 특히 사람들의 가혹함과 배은망덕함으로 선고 받게 되는 불명예- 의 본보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인 시각에서 이런 비극적 이야기는 교훈적인 것이다. 명예의 절정에까지 올랐다가 타락한 한 인간은 성경의 “헛되고도 헛되도다”를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207) 노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들 대부분이 노인들을 관찰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비용이 그린 초상화는 정확도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축 늘어진 데다가 이끼 긴 두 귀,
죽은 듯 창백하고 혈색 없는 얼굴,
찌푸린 턱과 닳아빠진 입술,
이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의 결말.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정확한 초상화이자, 우리들 모두와 관련 있는 초상화이다. 아름다움을 상실한 이 노파의 모습 속에서는 인간 조건이 모두 문제시되고 있다.

(209) 이전 세기들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대에도 문학은 노년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중세는 노년을 인간 누더기로 경멸하고, 나이든 사람들의 노쇠현상을 특히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육신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특히 여성의 육체는 격찬된다. 그렇기에 노인들의 추함은 더욱더 가증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220) 사람들은 기존이 사회계급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 원한을 자극하는 자는 신흥부자, 개인적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부르주아이다. 사업이 번창하면, 말년에 가서 그들은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 성인들의 눈에, 때로는 돈에 궁한 젊은이들의 눈에 이러한 부의 독점은 부당하게 보이며 증오에 찬 시샘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인색해서 성공했다고 말한다. 노인이 돈을 이용해 젊은 여자들을 매수하려 하면 더욱 더 참을 수 없는 빈축을 사게 된다. 이 경우 젊은이들은 성적으로 욕구 불만을 느껴 복수를 하게 된다. 그들을 잔인하게 풍자함으로써, 혹은 그들의 풍자화를 보고 웃음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악덕’에 혐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221)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노인들을 인간 조건에 통합시키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슬픔과 질투는
희끗희끗한 털을 사랑하네
감미로운 열광에
그토록 거친 감옥은 없네.

아, 꾸물거리며 기다리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젊음이여
시간은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그리고 열정은 제가 되고
재 속에서는 회한이 싹튼다네….. .

(242) 여인들의 노쇠를 변호하는 단 한 명의 시인이 있었으니 바로 메나르이다.
어린 시절부터 당신을 따라다닌 아름다움은
인생의 황혼녘에도 당신을 떠나지 않네

(272) 이러한 변모는 노인들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19세기 후반만큼 노인들의 조건이 비참한 적은 없었다. 노동은 보호받지 못했다. 남자, 여자, 아이들은 가차없이 착취당했다. 나이가 들면서 노동자들은 일의 속도를 맞추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산업혁명은 인적 자원의 터무니 없는 낭비의 대가로 이루어졌다.

(295)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경험이라는 개념이 실추됨에 따라 노인의 위세가 많이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술주의 사회는 해가 거듭되면서 지식이 축적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지식은 쓸모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나이는 자격 상실을 야기시킨다. 또 젊음과 연관된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302) 쓸모 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이 시대의 노인들의 운명은 원시 사회의 노인의 운명과 흡사했다. 노인의 운명은 본질적으로 그들 가족에게 달려 있었다. 애정 때문에, 혹은 이목이 두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을 염려하거나, 적어도 올바르게 그들을 대우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노인들을 소홀하게 대했고, 양로원에 버리거나 집에서 내쫓아버렸으며, 심지어는 남몰래 죽이기도 했다.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
(306) 성인들이 노인을 대하는 실제 태도에는 이중적인 특성이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공식적인 윤리에 순응한다. 공식 윤리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몇 세기간에 강화되어왔으며, 성인에게 노인들에 대한 존경을 강요한다. 그러나 노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또 노인들에게 그들이 쇠약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 성인들에게 유리했다. 성인인 아들은 아버지가 정신적, 육체적 결핍과 서투름을 느끼도록 악착같이 설득한다. 그러면 노인은 그에게 모든 일에 대한 지시권을 물려주고, 잔소리도 덜 하게 되며, 자신의 소극적인 역할을 참고 따르게 된다.

(312) 인구의 노화는 자본주의 민주 국가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현대 사회의 문제들 중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영국 보건성 장관인 이안 맥 레오드는 말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더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자연스럽게 사회에 통합되지도 않는다. 사회는 그들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정은 행정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노쇠는 이제 정치적인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344) 풍족한 사회에서만 노인들의 수가 많아질 수 있다고 해링턴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러한 풍족한 사회조차 노인들에게는 그 풍부함을 거절한다. 풍족한 사회도 노인들에게는 단지 ‘동물적인 생존’만 허용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353)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이상 자족할 수 없을 때 노인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노인 구제원이다. 대부분 나라에서 구제원이란 완전히 비인간적인 곳이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에 대한 최근의 방송이 부여주었듯이 그곳은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 ‘사망대기실’일 뿐이다.

(366) 남자의 인생에서 퇴직은 뿌리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그는 퇴직으로 인한 휴식이나 여가 시간 같은 어떤 이점과, 궁핍과 자격 박탈이라는 심각한 단점을 초래하는 그의 새로운 신분에 적응해야 한다.

(386) 노인의 자살을 설명해주는 것은 신체적.정신적 쇠약.고독.무위.적응불능.치료불능의 질병 등 사회적, 심리적 요소들이다. 그에 따르면 자살은 하나의 우울한 사건보다는 평생 동안의 삶의 내력에 의해 발생한다.


제2부 세계속의 존재
제2부에서는 말년에 접어든 한 인간이 가지는 자기 신체와의 관계, 자기 모습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개인과 시간과의 관계, 역사와의 관계, 행위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차례로 검토해 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구분은 자의적인 것이며, 독자들은 각각의 장들을 종합적인 관점의 조망 속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육체의 산 경험
(392) 노년은 운명이다. 노년은 우리 자신의 삶을 휘어잡고 때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삶, 그리고 나는 늙었다’라고 아라공은 쓰고 있다. 우주의 시간 흐름이 개인에게 변화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당혹시킨다. 나는 이미 40대 이후부터 늙어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거울 앞에 꼼짝 않고 서서 “나는 마흔 살이다”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393)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이 젊다고 느끼는 한 당신은 젊은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노년의 복잡한 진실을 몰랐을 때 하는 말이다. 노년의 진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와 그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에 대개 갖는 자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이다. 나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은 타자, 즉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나이다. 그 타자가 바로 나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존재는 타인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우리에 관한 모든 발언은 다른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거부될 수 있다. 그러나 노년의 경우에 있어서는 어떠한 논쟁도 허용되지 않는다.

(397) 만일 사람들이 우리가 스무 살 때에, 예순 살에 갖게 될 가정에서의 우월성을 주고, 거울에 얼굴을 비추면서 비교해보라고 하다면, 우리는 놀라 자빠질 것이며, 그 얼굴에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이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은 오늘과 거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한 기적 중 하나이다.”

(405) 정신과 의사들은 이 두 경우를 ‘자기 동일성의 위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청소년들은 자신이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어 자기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거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노인은 심각한 변화를 겪지 않고 남들을 통해서 자신이 늙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노인은 심각한 변화를 겪지 않고 남들을 통해서 자신이 늙었음을 느낀다. 내면적으로 그는 자신에게 붙어 다니는 그 꼬리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406)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노년의 ‘예기치 못했던 충격’, 자신의 현실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 나이를 말해주는 표시가 노인에게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보게 된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실현 불가능한 일들 가운데 가장 급박하게 우리에게 그 실현을 자극하는 것,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가장 꺼려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 나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우리는 노인들이 자신에 상황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는 태도들을 이해할 수 있다.

(409) 남들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모습을 나 자신으로 인정하도록 내면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때문에 말이나 행동으로 그 모습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거부 자체는 일종이 승인의 형태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여자다운 아름다움에 걸었던 여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선택이다. 이런 경우 나이란 완전한 자격 박탈의 요인이 된다. 이런 여자들은 옷차림, 화장, 몸짓으로 남을 속이려고 하고, 특히 히스테릭하게 자신은 일반적인 나이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라고 믿는다. 그리고 ‘늙는다는 것은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며,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413) 나는 문학작품 속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자기 노년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여자들을 단 한 명도 본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아름다운 늙은 여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매력적인 노부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잘생긴 늙은 남자’에게는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남성은 희생물이 아니다. 남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선함도 부드러움도 기품도 아니다. 단지 자신만만한 주체의 지성과 힘이다. 흰 머리카락이나 주름살이 이상적인 남성상과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429) 휘트먼은 시 작품들 속에 활력론적 낙천주의를 그렸다. 그는 온갖 형태로 삶을 노래한다. 한창 나이에 그는 노년을 서정적으로 찬양했다. 그의 시집<풀잎 Leaves of Grass>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대양으로 흘러가며 점점 더 웅장해지고 넓어지는 강어귀를
나는 네게서 본다.
- <노년에게> -

60대 말에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허옇게 바래고, 황폐해지고, 불구자가 되어 돛대가 부러진
이제 끝장나버린 낡은 배 한 척.
지구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항해한 후,
마침내 해안으로 끌려온 그 배는 이제 밧줄로 단단히 묶여,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녹슬고, 곰팡이 피어간다.

(448) 성적 대상인 여성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신체의 전체적인 모습과 자기를 동일화하는 반면,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성기에서 자기의 분신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남자는 일생 내내 자신의 성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위기감을 느끼는 것 또한 성기를 통해서다. 그가 두려워하는 병적인 자기 도취상태, 그것은 바로 성욕감퇴, 즉 발기불능이거나 발기를 유지하여 상대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상태다.

(468) 에드몽 드 콩쿠르느 그의 나이 70세인 1892년 7월8일에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여인의 목덜미, 반짝이는 피부, 곱슬곱슬한 머리를 느슨하게 땋은 머리카락, 저 둥글고 가냘픈 목덜미는 나에게 최음의 효과를 가져온다. 어떤 사람들이 늘씬한 다리를 좇듯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어느 여인의 목덜미를 좇고 있는 나 자신을 문득 깨닫는다.”

(484) 오늘날 과학은 이러한 보고들의 타당성을 입증해준다. 킨제이에 따르면 평생 동안 남성보다 여성이 성적 안정성이 크다고 한다. 60세 여자의 욕망과 쾌락의 가능성들은 30세 때와 똑같다. 마스터스와 존슨에 의하면 성적 반응의 강도는 나이가 들수록 감소한다. 그렇지만 여자는 여전히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다. 특히 효과적이고 규칙적인 성적 자극일 때 그렇다. 내가 덧붙이고 싶은 바는 여자는 오르가즘에 오르지 않더라도 성관계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자에게 있어서는 ‘쾌락의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통 여자는 남자보다 상대방의 외모에 덜 민감하며 따라서 상대가 늙었다 해도 쾌락의 정도에 방해 요인이 되지 않는다. 성관계에서 여자의 역할은 사람들이 종종 주장했던 것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 두려워할 만한 분명한 감퇴 현상이 없다. 여성이 말년까지 성관계를 계속 보존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491) 성적 무관심이 필연적으로 모든 영역에 무기력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많은 사례들이 그 반대적인 면을 증명한다. 다만 세상과의 육체적인 접촉이 결여될 때 삶의 한 차원이 사라져버린다고 말해두자. 나이가 많이 들어서까지도 육체적 건강과 성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 .
발리에 박사와 세비요트 씨는 파리 13구에서 앙케트를 실시했을 때 부부들이 혼자 남은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늙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유는 부부의 애정 관계가 언제나 좋은 상태가 아니라 악화되고 손상되어가기 때문이다. 퇴직과 자녀들의 출가 후에 일어나는 고립이나 건강 쇠퇴로 인해 노부부들은 거의 완전히 별개의 삶을 살게 된다. 노부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방에게 사랑과 보호를 요구하지만, 이러한 요구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 계속적인 불만족은 변함없는 육체적 존재의 요구, 질투심, 학대를 초래한다. 글자 그대로 상대방 없이 지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별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그러나 그들의 동거는 행복보다는 더 많은 고통을 가져다 준다.

(505) “과거가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이다”라고 사르트르는 지적한다. 진보하고자 계획하는 사람은 과거에서 벗어난다. 그는 자신의 옛 자아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자아가 아니라고 정의하고, 분리하여 생각한다. 반대로 어떤 대자의 계획은 시간의 거부와 과거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목표로 하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옛 자아가 현재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규정한다.

(512) 과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 같은 이유로 과거는 그토록 자주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풍부한 현재로서 과거를 체험했었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은 그 뼈대뿐이다. 인생 행로를 허망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애를 써도 우리의 발걸음을 어디로 내디뎌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공간은 시간의 배반을 계승한다.

(513)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은 과거와의 갑작스러운 결별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노인은 자신의 등뒤로 많은 죽은 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너무나 긴 나의 인생은 죽음의 기념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로마의 길들과 비슷하다”고 샤토브리앙은 썼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친구의 죽음은 우리에게 현재만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보냈던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을 통째로 앗아간다.

(515) 비니느 아름다운 인생이란 장년기에 실현된 청년기의 이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열망하는 꿈과 실현된 꿈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이것을 말라르메르는 다음과 같은 암시에서 너무나도 잘 묘사하고 있다.

…….. 후회도 환멸도 없이
꿈을 따던 가슴에 꿈의 수확이 남겨놓은.

(521) 나이 든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이미지, 환상, 감정적인 태도 등과 같은 형태로 내면화시킨다. 또한 노인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과거에 종속되어 있다. 나의 현 상황과 미래로의 열림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는 주어진 여건이다. 나는 그로부터 나 자신을 투사하고, 존재하기 위해 이 과거라는 여건을 초월해야만 한다. 이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연령에서 그러하다.

(523)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어느 시기부터 나이 든 사람은 자신의 생리적 운명을 의식하게 된다. 그에게 남아 있는 생은 한정되어 있다. 만일 65세의 노인에게 일 년이 어렸을 때와 똑 같은 길이로 느껴진다면 그가 이성적으로 셀 수 있는 시간의 길이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그렇지 않다. 노인에게 일 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비참할 정도로 짧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늙어갈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

(524) 시간의 길이를 그 안에 담긴 풍부한 내용으로 평가한다면 어린 시절의 시간은 –익숙함에 우리를 메마르게 만든 시기들보다- 더욱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어린 시절에는 사물과 사건들에 새로움이 있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새겨진다. 또한 하루하루가 까마득히 길게 느껴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어른인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바로 여행을 할 때이다. 여행을 하면서 보내는 한 달은 집에서 지내는 넉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 .
게다가 젊은이들에게 기억은 지나간 한 해를 많은 세부 사항들과 함께 광대한 공간에 펼쳐 되살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다음 해에도 똑 같은 시간의 길이를 부여한다. 반대로 나이가 들면 사물들은 우리에게 거의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지 않는다. 순간들도 별다른 새로움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 속에 지체하지 않는 것이다.

(527) 이오네스코 역시 어린 시절의 느낌으로 시간의 지속을 회복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매일 나는 무언가 안정된 것에 몰두해 절망적으로 현재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그 현재를 정착시켜 확대하려고 애썼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은 세계, 손상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되찾으려고 나는 여행을 한다. 사실 여행으로 이틀을 보내며 새로운 마을을 알게 되는 것은 사건들의 빠른 흐름을 늦추어 준다. 낯선 지방에서 보내는 이틀이라는 시간은 일상적인 장소에서 보내는 시간, 소모되어 닳고닳은 시간, 습관으로 왜곡된 시간의 30일의 가치를 지닌다.”
습관은 시간을 광채 나게 닦아준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치게 왁스를 발라 윤이 나는 마룻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시간 속으로 미끄러진다. 새로운 세계, 언제나 새로운 세계, 영원한 세계, 영원히 젊은 세계, 그것이 바로 낙원이다. 빠른 속도는 지옥과 같을 뿐 아니라, 지옥 그 자체이다. 그것은 추락의 가속화이다. 현재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현재도 시간도 없이, 추락의 기하학적인 진행이 우리를 무(無)속으로 집어 던진다.”

(529) 따라서 장년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미래는 질적으로 변한다. 65세의 우리는 45세 때보다 단지 스무 살만 더 먹은 것이 아니다. 무제한의 미래 –무한한 것으로 보이던 미래- 를 제한된 미래와 바꾼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지평선에서 어떤 경계 표지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의 지평선이 보일 뿐이었다. 샤토브리앙은 자기의 먼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썼다. “예전에 꿈 꿀 때에는 젊음이 앞서 있었기에 내가 추구하던 미지의 것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경계 표지를 더듬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다.”

(534) 그렇지만 나이가 자격을 줄 수 있는 것은 단지 변화가 없는 사회나 적어도 안정된 사회에서뿐이다. 변화 없는 세상에서 진보하려고 노력하는 노인은, 그 자신보다 뒤에서 출발했던 사람들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오늘날의 세계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개인의 발전과 ‘생성’은 사회의 발전에 포함되며 일치되지 않는다. 여기서 생겨나는 편차는 불가피하게 시대에 뒤져 있는 노인에게 손해로 돌아간다. 노인이 앞으로 나아가지 위해서는, 점점 더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러기에 노인의 행보는 느리다.

(551)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일지라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시대에 발맞춰 나아가기가 어렵다. 아인슈타인은 1934년 55세의 나이에 자살한 물리학자 친구 에렌페스트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이유를 50세가 지난 성실한 학자라면 모두 겪게 되는 내적 갈등으로 돌렸다. 에렌페스트는 자신이 건설적인 방법으로 풀 수 없었던 문제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그의 말년에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이론 물리학이 겪었던 유달리 많은 진보로 더 악화되었다.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들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새로운 사상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커져만 갔다. 그것은 50세를 넘은 사람이 언제나 대면해야 하는 어려움이었다.”

(555) 그러나 플라톤이 가장 심오하고 가장 독자적인 작품들을 저술한 것은 62세경부터이다. 스크라테스와 그의 선배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한 자기자신의 개념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62세에 그의 발전에는 하나의 위기가 일어났다. 그는 자기 작품에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데아 이론이 어떤 이의를 불러일으켰는지 발견했던 것이다.

(584) 우리는 사회 역사를 연구하면서 노인들은 어떤 당, 어떤 체제에 소속돼 있든 보수주의자 쪽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로서는 그들을 형성시켜준 과거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통해 현실을 본다. 그래서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새로움에 적응하기에는 그들에게 수단과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적응하려는 시도조차 억제된다. 그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 애쓴다. 혁명은 젊은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다만 그 혁명이 제도화되었을 때만 그들은 늙어서도 계속적으로 그 혁명을 이끌어갈 수 있다. 그 때 그들의 역할은 종종 능동적인 것이기보다는 대표자적인 것이다.

(586) 처칠은 전쟁을 예측하고 전쟁에 대비할 것을 요구했기에 전쟁을 하기 위해 선택된 정치인이었다. 다시 평화 속에 살게 된 후, 그는 영국인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시대와 더불어 변화하지 않았고, 새롭게 대두되는 문제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년을 슬프게 한 것은 바로 피할 수 없는 생리적인 쇠퇴였다. 그 격분해서 신체적 노쇠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노쇠는 조금씩 조금씩 그를 완전히 파멸시켰다.
죽을 때까지 놀라운 건강을 유지했던 간디는 필생의 과업인 인도의 독립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들 중에서도 특히 종교적 감정의 고양은 그가 평생을 지켜온 원칙들을 부인하게 된 결과들을 초래하여 그는 절망 속에서 인도의 독립을 완수하게 된다.

(605) 예로 든 세 사람의 노정치가가 모두 실패한 말로를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치인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역사에 의해 죽기 위해 활동한다. 정치인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빠져나올 수 없는 역사의 어떤 순간을 살아낸다. 사태의 새로운 흐름에 적응했다 할지라도 대중의 눈에 그는 어떤 전술과 어떤 방법, 어떤 시행령의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6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철하고 평온하게 죽은 자들도 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살려는 모든 의욕이 사라졌을 때 노인은 투쟁이나 일상의 권태보다는 영원한 잠을 더 좋아한다. 노인에게서 죽음이 최악의 불행이 아니라는 증거는 ‘삶을 끝장내기’로 결심하는 노인들의 수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삶의 여러 조건들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헛된 시련이다. 그리하여 많은 노인들이 삶의 단축을 선택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625) 노년은 젊은 시절보다 훨씬 더 카프페 디엠의 시기이다. “씨 뿌린 것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이라고 퐁트넬은 말한다. “더 이상 수고의 계절이 아니라 습관의 계절이다”라고 도비녜는 말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본 바대로 현대 사회는 노인들에게서 여가를 즐길 물질적인 수단을 빼앗음과 동시에 여가를 제공한다. 노인들은 빈곤과 옹색함을 면한다 해도 연약하고 쉬 피로해지며 때때로 통증 때문에 말을 듣지 않거나 굳어진 육체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627)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과거 속에 현재가 삼켜져 버리는 것을 주앙도 역시 체험했다. “늙어감에 따라서 모든 것은 추억의 형태를 취한다. 심지어 현재조차 그러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조차 이미 지나버린 과거로 간주한다.”

(629) 젊었을 때의 세계는 의미와 약속으로 무한히 풍요롭다. 예들 들어 하찮은 사건이 무한한 하모니를 일깨운다. 후일, 우리의 미래가 짧아지면 세계는 점점 줄어들고 그 세계 속에서 메아리의 진동도 점점 꺼져간다.
우리가 우리들 밖에서 만나는 가치들, 목표들은 우리 투자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공허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정력의 부재이며, 우리의 무기력이다.

(644) 더 이상 목표에 헌신하지 않는 것, 더 이상 절박한 욕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노인들을 어쩔 수 없이 권태롭게 한다. 거기엔 일종의 보상이 있는데,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히 중시한다. 즉 그들은 더 이상 일을 해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며, 게으름이 그들에게 허용된다. 우리는 퐁트넬과 에머슨이 노년에 대해 노년은 자기 자신의 수준 이하로 하강하게 된다.

(661) 노인들의 정서적 안정은 특히 자녀들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노인과 자식과의 관계는 흔히 힘든 관계이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자기의 사춘기적 반감을 자제하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 이르면 아들은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죽인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자유로와지거나 혹은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기까지 한다. 아들이 성인임을 갑자기 느끼게 될 때, 아버지는 ‘역전된 오이디푸스 감정’의 단계를 거친다. 그는 아들과의 관계를 재구축해야 한다. 화해를 통해 새로운 부자관계를 재구축하는 데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이것은 아들과 그 자신에 달려있다- 아버지가 노년기에 이르러 아들에 대해 품는 감정들은 애정이 넘치기도 하고 양면적이기도 하며, 혹은 적대적이기도 하다.
노인이 권리를 주장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특히 자기 아들에 대해서다. 노인은 아들들이 자기가 가진 아버지로서의 위엄이나 짐스러운 자기 존재를 초조하게 감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게 딸은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딸은 자기 성취를 위하여 아버지의 존재를 무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향한 딸의 애정은 여전히 순수하며, 아버지는 딸에게 그러한 애정을 회복시켜준다.

(678) 우리는 노년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는 편견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부터, 성인이 된 인간은 인간 조건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지니지 못한 미덕들을 나이에 전가시켰다. 인간은 말년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이 환상은, 노인을 괴롭힌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들을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689) 자유와 명석함도 만약 어떠한 목표가 더 이상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다면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계획들이 아직도 우리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면, 자유와 명석성은 큰 가치를 지닌다. 노인의 가장 중대한 행운은 역시 양호한 건강상태보다도 그에게 있어 세계가 아직도 목표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활동적이고 유용한 노인은 권태와 노쇠에서 벗어난다. 그가 살아가는 시간은 여전히 그의 시간이고, 일상적으로 말년을 특징 짓는 방어적이거나 혹은 공격적인 행동들이 그에게는 필요치 않다. 그의 노년은 말하자면 불문에 부쳐지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성인의 나이에 이미 그가 시간에 도전하는 시도들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착취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거절당하는 가능성이다.

제8장 노년의 실례들
(706) 노인은 경제적. 생리적 조건들로 인해 인간 이하의 상태로 떨어지지 않는 경우라도 노쇠 때문에 외모가 변한다. 그러나 외모가 변한다 해도 역시 예전의 그 사람이다. 한 사람의 말년은 대부분 그의 장년기에 달려있다. 샤토브리앙이 음울한 최후를 준비했던 반면에 볼테르의 개방적인 태도는,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노년을 가져다 주었다. 스위프트와 휘트먼은 둘 다 노년에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인간 혐오자였던 스위프트와 삶을 사랑했던 휘트먼은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스위프트의 분노는 그의 불행을 악화시켰으며, 휘트먼의 낙천주의는 그로 하여금 시련을 극복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내재적인 정의란 없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질병이나 사회적 상황이 활동적이고 관대한 존재의 말년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 과거의 선택들, 그리고 현재의 사건들은 서로 간접효과를 일으키면서 개개인의 노년에 그 나름의 얼굴을 빚어놓는다.

(707) 노년이 존재의 완성으로 간주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있기는 하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코르나로, 퐁트넬이 그런 경우였다. (개인적으로 플라톤도 추가하고 싶다). 그들은 평생을 신중하고 절제 있게 보내면서 노년을 준비했다. 빅토르 위고는 더 눈에 띄는 경우이다. 빅토르 위고는 아직 젊었을 때에도 그의 작품 속에서 노인들에게 영예로운 위치를 주었다. 위고의 예는,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인생의 초기부터 어떤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우연들, 특히 생물학적인 사고가 노년을 변질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에 한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따라 스스로 노년을 결정한다. 스위프트의 인간혐오증은 그에게 스트럴드브러그르 불길하게 상기하도록 했으며, 그러한 인간에 대한 증오는 그 스스로가 말년에 일종의 스트럴드브러그가 되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위고는 보아스, 에비라드뉘스, 장 발장의 모습 속에서 자기가 되고자 꿈꾸는 노인상을 그렸다. 그리고 그런 노인이 되었다.

(725) 중단됨이 없이 성인 생활을 연장시키는 노년이 불문에 붙여질 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이한 상황들 속에서 노년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이한 상황들 속에서 노년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전의 생활이 노인에게 나이의 무게게 저항하는 지적, 정서적 관심의 총체를 제공해야 한다. 한 좋은 예가 있는데, 그것은 루 안드레아스살로메이다. 이 탁월한 여인은 니체, 릴케,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50세에는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그녀는 독립을 쟁취했다. 그녀는 평범한 소설을 쓰면서 일했다. 그녀 스스로도 이 소설들을 과대평가하지 않았지만, 그것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호기심 많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그녀는 정열적으로 삶을 사랑했고, 35세에야 발견한 성(性)은 그녀의 실존과 세계관의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저서<성애Die Erotik>에서 그녀는 성과 예술의 관계를 연구했다.

결론
(756)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는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757) 윤리는 과학과 기술이 제거할 수 없는 고통이나 질병, 노년과 같은 악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라고 설교한다. 우리 자신을 축소시키는 이런 상태 자체를 용감하게 견디어나간다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윤리는 주장한다. 다른 계획이 없기에 나이 든 사람은 이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계획이란 단지 우리의 활동에만 관계될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계획에 들지 않는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늙고, 죽는다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숙명일 뿐이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살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해야 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노년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을 저축하고, 은퇴 생활을 할 곳을 정하고, 취미를 만드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날이 와도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고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

(761)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정책’, 노인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III.내가 저자라면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그리고 역사와 시대의 변화를 나이 듦이라는 틀 속에서 정연하게 엮어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과 도움을 전해줍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입니다.

예술작품이나 문학작품들을 적절히 사용하고 저명한 인사나 명사들을 끌어들이고 역사적인 사료와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생리학적 사례들을 풍부하게 인용하여 우리들이 나이 듦에서 만나게 될 상황이나 문제들을 거의 모두 나타내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잘 제시합니다. 노년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존재에게 자각하고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저자의 오랜 경험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다양하고 넓은 사료들과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통하여 논의가 전개됩니다.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하여 전체내용과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나이 듦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내재한 과정이고 개인적으로는 마흔을 맞이하면서 약간의 진통을 겪고 있는 상황과 겹쳐 좋은 탐구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노인학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세 차원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검토되고 묘사되고 있다.
노인의 심리는 신체조직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불안정하고 무너지기 쉽다. 정신 질환 발병의 경우 젊은이보다 노인에게서 더욱 빈번하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노인 병리학의 발전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생물학적인 변화와 운동신경, 지적능력 등의 감퇴 등을 통하여 진행되는 노화는 불가항력의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전달한다.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노인학의 성과들은 단지 추상적인 한 계기를 나타낼 뿐이다. 인간의 노화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나며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상부 구조들과 종합하여 이해해야 한다.
어떤 사회든지 사람들은 삶을 지향하며 오래 살려고 한다. 그 사회는 젊음과 연관되는 원기와 생식력을 찬양한다. 또한 노년이 주는 쇠약과 생식 능력의 고갈을 두려워한다.
민족의 특수한 자연환경 그리고 문화적인 여건과 경제적인 환경에 따라서 노인이 열등한 인간인 동시에 초인인 경우가 있으며, 쓸모 없는 인간인 동시에 중개인이고 마법사이며 제사장이기도 한 것을 다양한 역사적 사료들을 통하여 충격적인 내용들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제3장 역사사회에서의 노년
시대적인 고찰과 더불어 다양한 문학작품과 그림, 신화나 이야기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노인의 지위와 변천의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 돋보이는 장이다.
서양을 대상으로 하며 예외로 중국이 포함되어 논의가 전개된다. 고대 아테네와 로마 사회에서는 경제력과 철학 그리고 안정된 문화를 바탕으로 노인의 위치가 상당히 높았으며, 중세시대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미미하게 나마 노인의 위치는 유지된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 육신의 아름다움이 찬양되고 상대적으로 노년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17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여성을 혐오하는 전통이 남아 있어 노년에 대한 저주는 계속된다.
18세기와 19세기를 지나면서 영국 등 경제적인 여건이 향상되면서 노년이 위엄 있고 고귀한 것을 묘사되기도 한다. 19세기를 지나면서 노인인구의 증가로 노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였으나, 착취를 우선하는 자본주의 발달로 이 때만큼 노인과 아이들의 조건이 비참한 적은 없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술이 우선되고 경험은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노인의 위치는 가족에게 맡겨지고 있다.
부와 경제력이 노년에 있어서 권위와 위엄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 되는 것을 사회적인 통찰로 잘 해석해주고 있다.

제4장 현대사회에서의 노년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다.
전 세대에 대하여 성인들이나 젊은이들이 노인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여준다.
성인이 노인을 대하는 태도는 공식윤리와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려는 이중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구의 노화가 진행되면서 노년의 지위는 정치적이 대상이 된다.
복지제도 연금 또는 보험 등을 통하여 정책의 한계를 보여주고 핵가족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노인의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다. 양로원과 노인들을 위한 병원 그리고 퇴직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 등을 노인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대체로 노인이 느끼는 절망은 육체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요소들에서 더 많이 온다고 한다.
세상의 물질적 풍요가 노년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현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육체의 산 경험
노년은 젊음의 열정과 기대 등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부임을 성적인면 등을 통하여 보여준다. 노년을 맞이할 때 느끼는 당혹감과 좌절, 노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형태들을 사람들이나 문학작품 등을 통하여 보여준다.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노인들이 과거의 기억이나 회고를 통하여 자신이 과거를 이미지, 환상, 감정적인 태도 등과 같은 형태로 다양하게 내면화하는 모습이나 과정들을 다양한 문학작품이나 다양한 사람들의 예를 통하여 보여준다.
시간에 대한 느낌이 노년으로 갈수록 더욱 짧은 것으로 느끼게 하는 요인들을 철학과 사례들을 통하여 잘 드러내고, 여행이 주는 새로움 등을 통하여 시간을 초월하는 것도 소개한다.
지적 활동가,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 작가, 정치가 등 노년으로 갈수로 겪는 변화와 한계 그리고 초월과 좌절을 잘 그리고 있다.
노년에 맞이하는 주위사람들의 죽음을 통하여 느끼는 단절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괴로움과 죽음을 대하는 어려운 태도를 묘사한다.

제7장 노인과 일상생활
노인이 되어 현실이나 시대에서 추방당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루나 일상을 엮어가는 방법과 제약 그리고 어려움을 보여준다.
과거 속에 현재가 매몰되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목표와 욕망이 사라지면서 겪는 무기력과 권태 그리고 야망과 같은 보상심리를 잘 드러내고 노인들이 가지는 습관이 주는 고립성과 과거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정체성을 보게 된다.
나이를 들면서 자식들과 새로운 관계 특히 아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운명과 과정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비춰지고 심리적인 관점에서 잘 해석해 주고 있다.

“자유와 명석함도 만약 어떠한 목표가 더 이상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다면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계획들이 아직도 우리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면, 자유와 명석성은 큰 가치를 지닌다. 노인의 가장 중대한 행운은 역시 양호한 건강상태보다도 그에게 있어 세계가 아직도 목표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활동적이고 유용한 노인은 권태와 노쇠에서 벗어난다. 그가 살아가는 시간은 여전히 그의 시간이고, 일상적으로 말년을 특징 짓는 방어적이거나 혹은 공격적인 행동들이 그에게는 필요치 않다. 그의 노년은 말하자면 불문에 부쳐지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성인의 나이에 이미 그가 시간에 도전하는 시도들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착취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거절당하는 가능성이다.” (689p)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장이다.

제8장 노년의 실례들
개별적인 경우들을 통하여 노년에 대한 내재적인 영향과 질병이나 사회적인 정황이 만들어내는 노년의 빛깔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고, 미켈란젤로, 베르디, 살로메, 프로이트,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등을 통하여 노년을 선명하게 대비되는 색깔과 빛으로 묘사한다.
어쩌면 다양한 노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의 노년을 유추하고 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잡을 수도 있도록 해주는 장이다.

결론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정책’, 노인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762p)


보부아르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논지를 전개하여 읽는 독자를 편안하게 해줍니다.

제1장의 노화에 대한 생리적인 현상이나 사례들은 읽은 독자로 하여금 책 전체가 약간 시시하고 평이한 내용으로 비춰질 수 있어 장 전체를 줄이거나 다른 장 속에서 일부분으로 처리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방대한 역사적인 사료, 풍부하고 폭넓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 그리고 다양한 삶의 모습과 형태를 통하여 나이 듦이 가지는 과정과 사회적, 시대적, 생리적 고리들을 잘 엮어내어 나이 듦의 본질을 잘 들추어 냅니다.


보부아르 여사는
“시간에 도전하는 시도들을 할 것을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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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08.03.24 11:30:50 *.34.47.25
세상에는 존귀하고 값비싼 것들이 너무나 많다..절대로 살수 없으며 가질수 없을 만큼..가치 또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사람만큼 소중한게 있을까..것도..사랑하는 사람만큼....있을까....요?
바로보며 채우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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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4 21:58:27 *.36.210.80
꾸준한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응원도 많군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어나가시길 바랍니다. 애쓰셨어요. 좋은 소식 기원합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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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08.03.25 13:06:42 *.34.47.25
시간도 부족하고 여러가지 일이 겹친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좋은 모습보여준 당신...사랑해요...힘내세요..
오늘 집에서 소주한잔!!! 빨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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