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08년 3월 24일 09시 22분 등록
l. 저자 소개

시몬 드 보부아르 (1908 – 1986)

파리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 서 태어났다. 변호사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맏딸로 보수적 교육을 받고 자랐다. 보부아르는 한 학년을 월반해 17살에 대학에 들어갔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독립적 삶에 눈을 떴고 자신을 키워낸 부르조아사회의 위선적이고 획일적인 도덕과 가치관에 강한 회의를 품게 된다.

21살 때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난 3살 연상의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나보다 완전 하고 나와 닮은 사람’을 찾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이상형을 발견한다. 그 해 교수자격 시험에서 사르트르가 1등, 보부아르가 2등을 차지 하면서 눈길을 끈 두 사람은 이어 파격적인 '계약결혼'으로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2년 단기 계약으로 시작된 이들의 계약결혼은 평생 계약으로 발전했다. 결혼식도 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으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는 그들의 계약 결혼은 보부아르의 문학적 영감과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데뷔작 '초대받은 여인'(1943)은 두 사 람 사이에 끼어든 제3의 여자 문제를 둘러싼 체험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45년 사르트르가 창간한 '레 땅 모데른'(현대)지 편집을 맡으면서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문학운동의 선봉에 서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사회참여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절대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실존주의 사상을 늘 생활에 접목시키려 애썼다. 1949년 써낸 '제2의 성'은 보부아르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1,000 페이지에 달하는 '제2의 성'은 지금도 여성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룬 최고의 저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책은 발간 1주일 만에 2만부 이상 팔려나가는 등 반향이 컸다.

보부아르는 50대까지 왕성한 저술 활동을 전개했지만, 나이 60 이후엔 책상 앞에 앉아 있기보다 여성 운동의 실천가로 활동했다. 여성의 출산과 피임, 낙태의 자유를 위한 시위 대열에 참가했고, 전세계 여권 운동 모임에 자주 얼굴을 보였다. 19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성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헌신했다.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

“나는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30년이 넘게 단 하루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고 잠든 적이 없다.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낸 것이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갖게 되는 관심을 결코 줄어들게 하지는 않았다."

이 세기의 문학가 커플은 유럽 전체에 엄청난 빛을 발산했다. 두 사람 다 철학서와 소설로 성공을 거두었고, 지성인의 정직성과 정치적 참여 문제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깊고 침착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생을 걸쳐 상대를 후원했다.

이들이 사망했을 때, 여론은 조화를 이루었던 이 모범적 커플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기 위해 뒤에 남겨진 편지와 사적인 기록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여러 번의 위기, 제3자로 인한 관계의 불안정,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일탈에 대한 생각, 분노 등이 그들 사이에도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모든 혼란들은 일시적인 작은 진동에 불과했다. 20세기의 가장 지성적인 이 커플은 과연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로 건재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성공적인 관계의 비밀은 그들이 성취했던 사랑과 자유, 결속과 독립, 상대방에 대한 성실과 정직, 이런 것들의 독특한 결합에 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1929년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녀는 스물 한 살이었고, 그는 스물네 살이었다) 2년간 계약 결혼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기간이 지나기 전에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고백한다. ‘당신과의 관계가 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다른 관계들은 그저 우연일 뿐이오’. 하지만 그는 이 '우연한' 관계들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도 똑같은 자유를 허용했고, 그녀도 그 자유를 누렸다. 그럼에도 평생 제 3자들이 그들의 관계를 파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그 관계의 깊이와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둘의 관계에도 갈등과 위기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이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철학자였고, 토론과 대화가 그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성적인 성실성을 토대로 하지 않고, 공동의 가정 및 자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 후 자신들의 자유를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항상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의 감정, 생활, 사상, 작업에서 중요한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했고 조언과 행동으로 변함없이 서로를 후원했다.

그렇지만 사르트르의 명성이 더 크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큰 압박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 때문에 반했지만, 그녀의 자존감은 탁월한 남자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지내기 위해 그에 필적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그 이상으로 이루었다.

두 사람은 교사로서 시작했으나, 작가로서 그 가치를 인정 받고자 했다. 사르트르는 ‘파리떼’라는 희곡으로, 보부아르는 ‘그녀가 와서 머물렀다’라는 소설로 각각 연극과 출판계에서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에, 교사 직을 그만두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식민지 해방, 특히 알제리 전쟁은 개인의 문제를 그들 사상의 중심으로부터 밀어내게 된다. 그들은 정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좌파 활동에 참여한다. 보부아르는 이 때부터 전체로서의 여성을 생각하고 여성 모두를 보게 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과, 남성과 여성, 즉 개별적인 개인들에 의한 힘의 차이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인식한다. 그런 인식은 ‘제 2의 성’의 집필로 이어졌다. ‘제2의 성’은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와 더불어 새로운 여성 해방 운동의 바이블이 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

한국에 번역된 보부아르의 저작들

실존주의 인간론 (1959) / 제2의 성 (1964) / 나의 계약결혼: 싸르뜨르와 지성을 채굴하던 젊은 나날들 (1967) / 레 망다렝 (1969) / 아름다운 영상 (1973) / 여자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1973) / 여자의 신화 (1973) / 타인의 피 (1973) / 위기의 여자 (1975 )/ 실존주의와 카토리시즘 (1976) / 부드러운 죽음 (1977)/ 초대받은 여자 (1978) / 인간은 모두 죽는다 (1979 ) / 처녀시절 (1979) / 모든 사람은 혼자다 (1980) / 어느 정숙한 처녀의 고백:시몬느 드 보브와르 자서전 (1981) / 이별의 의식 (1982) / 고독과 함께 오는 것 (1984) / 꽃잎 질 때 꿈꾸는 영원 (1986) / 환희와 고뇌의 나날들 (1986) / 사랑과 영혼의 긴 초대 (1987) / 겨울, 그리고 이별의 변주곡 (1990) / 나이의 힘:시몬느 드 보봐르 제2의 자서전 (1991) / 여성과 지적창조 (1991) / 노년 (1992) / 인간연습 (1993) / 때로는 사랑이 함께 있어준 연민 (1997) / 연애편지 (1999) / 미국여행기 (2000)


시몬 드 보부아르의 대표작

그녀의 소설은 우선 ‘존재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발언권을 얻기 위한, 이어 타인의 자유에 호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작가는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 만큼이나 타인들, ‘살고자 하는 기도’ 속에 뛰어든 자기와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한다. 보부아르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제안된 자유를 단련하기 위한 이론적 연습과 같다. 이유를 따지기 전에 모든 가치들이 부재하는 텅 빈 하늘 아래 복잡한 세상 속에서 모호한 상황들과 싸우는 주인공, 그의 도덕성, 그의 존재는 끊임없이 문제시되고 재검토된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어떤 결정적인 해석도 주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손에 쥘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학사전, 보마르세(M.A. de Beaumarchais)

* 초대받은 여자

이 작품은 보부아르의 처녀작. 철학적 테마를 훌륭하게 용해시킨 실존주의 문학의 최고봉 중의 하나.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 체험을 그리고 있다. 작중 그자비엘은 보부아르의 여제자 올가 도미니크가 모델이다. 실제로 올가는 사르트르의 한 때 연인이었다.

프랑스와즈와 신인 연극배우 피엘은 일반적인 연인 사이도 단순한 동거관계도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신뢰와 존경으로 맺어진 좋은 협력자인 동시에, 결코 상대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원초적인 감수성을 지닌, 일체의 노력이나 약속 등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그자비엘이 나타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파란이 일기 시작한다. 이윽고 피엘은 셋이서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조화로운 삼각 관계를 제안하지만, 그자비엘의 독점욕은 만족할 줄 모르며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피엘에게 자기 한 사람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피엘이 결코 프랑스와즈와 헤어질 마음을 갖지 않자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깨진다.형식상으로는 끝내 살인까지 저지르면서 굳이 '자기 자신'을 펼치려 했던 프랑스와즈가 주인공이 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의 원천은 '초대받은 여자'인 그자비엘일 것이다. 모든 사회적인 것을 거부한 자유의 화신같은 시골출신의 처녀 그자비엘은 근대문화의 최 첨단을 걸어가는 파리 지식인들 사이에 난입한 어린 무녀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악마가 되기도 하는데 ,그녀는 전후 젊은이들의 한 그룹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 위기의 여자

안정된 중류 가정의 한 행복한 여성이 어느 날 뜻하지 않던 암초에 부딪친다. 인생을 사랑과 결혼에 걸고 그 결혼에 성공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니크, 그녀는 어느 날 밤 남편 모리스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남편의 고백을 통해 알게 된다. 자타가 공인해온 모범부부 사이의 균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놀라운 분노, 초조,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에겐 처음으로 자기성찰이 시작된다. 결국 오랜 회의와 절망의 수렁 속에서 그녀는 다시 어두운 현실로 돌아온다. 누구에게도 요청할 수 없다. 문은 자기 스스로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그 문을 열리라는 것을 자각한다.


* 제2의 성과 보부아르의 페미니즘

'여자? 아주 단순한 거지. 여자란 자궁이며 난소다. 여자란 암컷이다. 이 암컷이라는 말은 여자를 정의하기에 충분하다. 남자의 입에서 암컷이란 형용사는 경멸하는 말처럼 발음된다. 하지만 남자는 자기의 동물성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반대로 그를 가리켜 저건 수컷이야 하면 더욱 득의만만해진다. 왜 그럴까. 여자를 자연 속에 놓아두지 않고 그녀의 섹스 속에 감금시키기 때문이다’.

‘제2의 성’이 출판되었을 때 보부아르는 42세였다. 당대 제일가는 실존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로 명성을 독차지하고 있던 사라트르와의 계약 결혼을 한 지 20년이 지나고, 그녀 자신 ‘초대받은 여자’로 유행 작가의 위치를 획득한 지 6년이 지나고 있었다. 명성의 절정에 있는 여류 작가 보부아르의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 라고 주장하고 나선 이 책의 주장은 여간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카뮈는 ‘프랑스의 남성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면서 분노했다. 여성의 평등한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던 때에 여성이 교육, 직업 선택, 배우자 선택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워야 하며 출산의 자유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전후 세계 페미니즘 운동의 새 출발점에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오늘날 여성학자들은 ‘제2의 성’ 출간을 페미니즘 이론과 연구의 시발점으로 잡기도 한다. 고대 신화 분석은 물론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생리학, 철학, 문학에 대한 해박하면서도 깊이있는 지식을 두루 동원하여 여성이란 무엇인가, 여성 억압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1,000 페이지에 걸쳐 규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제2의 성’은 60년대 미국에서 여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ll. 마음에 무찔러 들어 오는 글귀

서론

9. 나는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14.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20.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19. 모든 인간의 상황은 보는 관점에 따라 외면성과 내면성,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외면성이란 그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며, 내면성이란 주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여 초월해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타인의 노년은 앎의 대상이다. 반면 자기 자신의 노년은 자기의 상태에 대한 산 경험과 관련 있는 법이다.

23. 노년은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38. 릴케의 말처럼 ‘마치 과일이 그 씨를 품고 있듯이 우리들 각자가 우리 내면에 품고 있는’ 죽음과 같이, 모든 신체 조직은 애초부터 그 완성의 피할 수 없는 경과로서 노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2. 질병은 사고이다. 그러나 노화는 생명의 법칙 그 자체이다.

47. 나이가 가져다 주는 정신의 힘과 또한 나이의 결과인 육체의 쇠약 사이의 이 기이한 불협화음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 들라클루아

51.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인간은 노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쇠란 불가항력의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노화는 어김없이 죽음에 이른다.

53. 인간의 노쇠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노쇠는 그 사회의 성격과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밀접한 종속관계에 있다. 경제적인 요인 자체를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정치적․사상적 상부 구조들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59. 많은 신화들은 인류에게 영속적인 힘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순간 젊음을 다시 되돌려 받기 때문이다. 즉 예사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70. 유목민뿐 아니라 18개의 정착 부족에서도 노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유기가 일반적이었다고 지적한다.

118.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16.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된다’는 것이다. <제2의 성>에서 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마술적인 힘으로 큰 위세를 누리는 경우 실제로 그 위세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준 것임을 증명한 바 있다.

118.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118].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119. 첫째, 노년이란 어떤 사회적 범주를 가리키며, 그 범주는 상황에 따라 다소 가치가 인정된다. 둘째, 노년은 각 개인의 특이한 운명, 즉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가리킨다.

120.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다시 그 결과에 의래 수정된다.

120-121 흑인의 문제는 백인들의 문제이며, 여성의 문제는 남성들의 문제라고 사람들은 말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는 평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흑인들은 억압에 대항해 싸운다. 한데 노인들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179. 봉건 사회는 세 계급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도하는 자들과 싸우는 자들과 일하는 자들이다. 그 사회는 일보다 검을, 심지어 기도보다 우선시했다. 그러므로 무대의 앞쪽을 차지하는 것은 행동적인 투사, 한창 나이의 성인이었다.

209. 이전 세기들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대에도 문학은 노년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중세는 노년을 인간 누더기로 경멸하고, 나이 든 사람들의 노쇠 현상을 특히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육신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특히 여성의 육체는 격찬된다. 그렇기에 노인들의 추함은 더욱더 가증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늙은 여인의 추함이 이 시대보다 더 잔인하게 고발된 적은 없었다.

225. 오래 전부터 나는 서서히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조금도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지금의 나와 이후의 나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어느 때의 내가 더 나을까? 나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발전해나가기만 한다면 늙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231. 고대 이집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노년이라는 주제는 거의 언제나 상투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똑같은 비교, 똑같은 형용사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역사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며, 아무도 노년의 진실을 연구해보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17세기 초반에 놀라운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셰익스피어이다. 그는 <리어왕>을 쓰면서 노인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다. 왜, 그리고 어떻게?

249. 늙은 사람이 아직도 사랑한다는 사실에 당신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은 아니지요. 바보같이 감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니까요….노인에게 남아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그들에게 삶을 확신시켜주는 것은 없습니다.....‘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는 아주 생생한 결과입니다. 이것을 통해 젊은 시절의 욕망을 회상하고 때로는 아직도 젊다는 상상에 빠지기까지 하지요

270. 문제는 다시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젊어질 수 있다는 것, 즉 한계에서 벗어나서 결코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지 않는 모험처럼 삶을 다시 산다는 것이다.

283. 젊은이는 이 세상에서 무언지 모를 경이로운 것들을 자신이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단지 어디서 그것들을 찾을 수 있을지 만 안다면 말이다. 노인은 ‘모든 것은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의 격언에 감동받는다. 노인은 호두가 아무리 황금색으로 잘 익었다 하더라도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환상은 없다. 노인은 완전히 환상에서 벗어난다.”

295. 오늘날의 기술주의 사회는 해가 거듭되면서 지식이 축적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지식은 쓸모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나이는 자격 상실을 야기시킨다. 또 젊음과 연관된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302.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이 시대의 노인들의 운명은 원시사회의 노인의 운명과 흡사했다. 노인의 운명은 본질적으로 그들 가족에 달려 있었다. 애정 때문에, 혹은 이목이 두려워서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을 염려하거나, 적어도 올바르게 그들을 대우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노인들을 소홀하게 대했고, 양로원에 버리거나 집에서 내쫓아버렸으며, 심지어는 남몰래 죽이기도 했다.

302. 노년이라는 개념에 반대 감정의 양립을 가져온 것은 세대간 갈등보다도 계층간의 투쟁이었다.

제4장 현대사회에서의 노년

366.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재의 그로 만들어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 헤밍웨이

367. 우리는 헤밍웨이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의 자살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일이 자기 자신의 성취일 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 일이 일종의 제약이었을 경우,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해방이다.

382. 노인들에게 그들이 살아 있는 이유를 주어야만 한다. ‘동물적인 생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하다.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393. 노년은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나이이다…. 나는 여전히 나인데, 내가 다른 사람이되었단 말인가…노년의 진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와 그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자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이다.

394. 당신은 모든 악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오? 그것은 쉰다섯 이상 나이를 먹는 것이오 - 투르게네프

397. 노년이라는 이 정상적이면서도 비정상적인 상태

398.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이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내일은 오늘과 거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의한 기적 중 하나이다. – 셰비네 부인

398. 우리는 늙어가는 자를 우리 존재 속에 있는 타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나이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08. 자각의 순간에 그녀가 자신을 너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녀가 말을 건네는 사람은 그녀 안에 존재하는 타자이다. 타인들의 눈에 비치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녀가 직접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녀 자신에 다름 아닌 이 타자에게 그녀는 말을 하는 것이다.

420. 자신에 대해 다소 만족스러운, 혹은 다소 타당성 있는 모습을 발견했든 아니든 우리는 우리가 실감할 수’ 없는 노년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435. 톨스토이의 정력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큼 대단했다. 원기를 유지하려는 그의 세심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67세에 자전거를 배웠고, 그 후 몇 년 동안 자전거나 말 또는 긴 도보 산책을 계속했다. 그는 테니스를 즐겼고, 강에서 냉수욕을 했다.

438. 인간이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 – ‘노인과 바다’

439. 정신과 육체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변경된 신체 조직을 세계에 재적응시키는 작업을 수행하려는 사람은 삶에 대한 취향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건강은 지적, 감정적 흥미가 오래도록 살아 있게 도와준다.

447. 즉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 스스로를 사랑스럽게 느끼고 주저 없이 사랑에 몸을 맡긴다.

467. 위고의 눈에 늙음이라는 것은 결함이라기보다는 명예였다. 늙음이란 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 숭고한 것, 그리고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결합되는 것이었다.

490. 특히 성욕과 창의력과의 관계는 놀라울 만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 관계는 위고, 피카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 명백히 드러난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플로베르가 ‘일종의 열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공격적 성격이 필요하며,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리비도에 근거를 둔다. 또한 창조하기 위해서 애정의 열기로 스스로가 이 세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야 한다. 이 애정의 열기는 육체적 욕망과 함께 사그러진다.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506. ‘과거가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이다’ 라고 사르트르는 지적한다. 진보하고자 계획하는 사람은 과거에서 벗어난다. 그는 자신의 옛 자아는 자신의 자아가 아니라고 정의하고, 분리하여 생각한다.

507 그들이 과거의 자기 모습을 되찾아 그때 모습과 하나가 되는 순간, 그들은 80세이면서 동시에 30세 혹은 50세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나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511. 나의 과거는 나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한쪽 끝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른 쪽 끝을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내 손에 남은 것은 끝이 풀린 썩은 천뿐이다. 모든 것이 환상 혹은 거짓이 되어버렸다.

513.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친구의 죽음은 우리에게 현재만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보냈던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을 통째로 앗아간다.

515. 출세한’ 사람은 타인에게 풍요로운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존재와 그 사람이 스스로 갖고 있는 체험 사이에는 커다란 오해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515. 비니는 아름다운 인생이란 장년기에 실현된 청년기의 이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열망하는 꿈과 실현된 꿈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516. 설령 나의 현재가 존재를 넘어서 내가 스스로를 투사했던 미래와 내용상으로 동일할지라도, 내가 스스로를 투사하던 것은 지금의 이 현재가 아니다. 그 까닭은 나는 미래로서의 미래를 향해, 다시 말해서 내 존재를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미래를 향해, 다시 말해서 내 존재를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미래를 향해 나 스스로를 투사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516. 나의 기대에 부합하는 현재조차도 내가 기대했던 것, 생에서 헛되이 지향했던 존재의 충만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526. 우리가 스무 살이었을 때 자기 자신이란 자기 자신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사르트르

527. ‘그 후 매일 나는 무언가 안정된 것에 몰두해 절망적으로 현재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그 현재를 정착시켜 확대하려고 애썼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 손상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되찾으려고 나는 여행을 한다. 사실 여행으로 이틀을 보내며 새로운 마을을 알게 되는 것은 사건들의 빠른 흐름을 늦추어 준다. 낯선 지방에서 보내는 이틀이라는 시간은 일상적인 장소에서 보내는 시간, 소모되어 닳고닳은 시간, 습관으로 왜곡된 시간의 30일의 가치를 지닌다. 습관은 시간을 광채나게 닦아준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치게 왁스를 발라 윤이 나는 마룻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시간 속으로 미끄러진다. 새로운 세계, 언제나 새로운 세계, 영원한 세계, 영원히 젊은 세계, 그것이 바로 낙원이다. 빠른 속도는 지옥과 같을 뿐 아니라, 지옥 그 자체이다. 그것은 추락의 가속화이다. 현재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현재도 시간도 없이, 추락의 기하학적인 진행이 우리를 무 속으로 집어 던진다.’ – 이오네스크

528. 그날 그날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그 시간의 내용에 달려 있다.

529. ..자유의 행위 자체는 창조적이며 내 유한성의 수락이다. 내가 나를 만든다면 나는 나를 유한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은 유일한 것이다. –사르트르 <존재와 무>

529. 누가 나에게 100년 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면, 나는 새로운 계획들 속에 뛰어들 것이고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러 떠날 것이다.

533. 노인에게 삶에서 얻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많은 해를 살면서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들 중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이렇게 보잘것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건들은 잊혀지거나 뒤범벅이 된다. 그러나 사상에 대해서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 50년간의 독서에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 모리악

572. 그들의 상황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들의 독창적인 계획의 폭이며, 또 하나는 그들을 마비시키는 과거의 중압감이다.

576. 나는 젊은이 안에서 우리 인류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그가 좀더 나은 시대를 맞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희망이 없다면 내가 향해 가고 있는 늙음은 나에게 완전히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605. 비폭력 사상을 고집했던 간디에게는 두 공동체 사이에 어떤 폭력이 불씨로 살아 있는지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현실보다 원칙을 선호했고, 목표보다는 방법을 선호했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활동이 완성되는 시기에 그것이 철저하게 부패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은 없다.

607.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의 모든 친구들이 죽은 뒤 살아남는 것이다. –카사노바

615. 죽음은 사르트르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라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죽음은 내 가능성의 외적 한계다. 나는 다른 것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이지 나 자신으로 인해 죽게 되는 건 아니다.

616. ‘오 죽음이여 잔인한 죽음이여, 죽음은 무한하게 흥미로운 어떤 작품이 끝나기도 전에 열심히 보고 있는 관객을 극장에서 몰라내는 괴물이다.’ - 70세의 카사노바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624. 그렇지만 오늘이라는 말의 절대적이며 부인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찬란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년에 도달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어떤 이들은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을 느낀다

625. 나는 내가 살아 있고,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노년은 젊은 시절보다도 훨씬 더 카르페 디엠의 시기이다. ‘씨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는’ 순간이다(-퐁트넬). ‘더 이상 수고의 계절이 아니라 습관의 계절’ 이라고 말한다(-도빈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본 바로는 현대 사회는 노인들에게서 그 여가를 즐길 물질적인 수단을 빼앗음과 동시에 여가를 제공한다.

632. 노년을 가장 활동적으로 보낸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변화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644. 더 이상 목표에 헌신하지 않는 것, 더 이상 절박한 욕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노인들을 어쩔 수 없이 권태롭게 한다.

651. 객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맞서 노인은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쓴다. 노인의 대부분의 태도들은-어쨌든 대부분- 방어로 해석해야 한다. 거의 모든 노인에게 공통된 태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습관을 피난처로 삼아 안주한다는 것이다.

655. 노인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변화에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노인은 변화에서 어떤 출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단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678. 우리는 노년이 평온함을 가져다준다는 편견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부터, 성인이 된 인간은 인간 조건을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 지니지 못한 미덕들을 나이에 전가시켰다. 즉 아이들에게는 순수함을, 노인에게는 평온함을 전가시켰다. 인간은 말년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시기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편리한 환상이다.

679-680. 건강, 기억, 물질적 재산, 위엄, 권위 등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난 후에도 한 인간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벌써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인간으로 남기 위해 노인이 이끌어가는 투쟁은 비참하고 덧없는 것이다.이 투쟁은 인간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벌레나 무기력한 사물로 축소시켜버리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최소한의 위엄을 지니고 싶어한다는 것에는 무언가 영웅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683.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 말년은 하나의 해방이다.

684. 자유는 겁나는 것이다. 때문에 노인은 자유를 거부한다.

687. 인생은 결코 오지 않는 그 무언가에 대한 오랜 준비이다. – 예이츠

690. 사람이 신경쇠약 환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동일화 속에서 타인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만족스러운 내적 안정감을 찾을 수 없을 때이다..

693. 우울이란 ‘정신적 고통, 감정과 더불어 체험되는 그리고 심리적인 정신 운동의 기능 약화와 억제로 특징지어지는 격심한 의기소침 상태’이다

696. 모든 우울증 환자들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완전히 사라져버리기를 원한다. 미래가 그들에게 제안하는 유일한 전망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죽음이 가능한 한 가장 빨리 그들에게 다가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자살의 유혹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도 많다.

제8장 노년의 실례들

708. ‘오! 내가 늙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영혼의 증거인가! 나의 육신은 쇠약해지고,나의 사고는 성장한다. 나의 노년에 일종의 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위고

결론

755. 인간의 신체 조직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쇠퇴한다. 그것이 경험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과정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노쇠는 개인의 활동의 축소를 가져온다. 흔히 정신적 능력의 감퇴와 세계에 대한 개인의 태도의 변화를 수반한다.

756.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756. 루소의 말대로 모든 것이 헛된 수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이미 얻은 결과들에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게 되면, 과거에 그토록 열심히 일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757.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Faguet) 의 이 말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

757.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758. 착취당한 사람들은 늙으면 비참해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빈곤과 불편한 거처와 고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실추의 감정과 전반적인 불안감이 뒤따른다…그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는 정신질환들은 대부분 체제의 산물이다.

760. 어떤 처방책도 사람들을 일생 동안 희생물로 만들어온 체계적인 파괴를 씻어줄 수는 없다…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은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

761.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

761-762.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 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lll.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일단 두껍다. 775페이지에 달한다(쓸데없는 예시들 좀 줄이면 안되나). 편집도 촘촘하다(장들을 여러 꼭지로 구분해서 소제목 좀 달아주면 어디가 덧나나). 장 간, 공간에 대한 배려도 없다(간간히 공간을 둬서 숨좀 쉬게 해주면 안되나). 사진과 그림, 전혀 없다(인용문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얼굴을 보면서 읽으면 재미가 배가될텐데). 그야말로 글씨로만 가득 찬 오아시스 없는 사막 같은 책이다(다 읽기도 전에 일사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헥헥).

노인문제를 총체적으로 통찰하고 있는 이 책은 보부아르가 62세이던 1970년 파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제2의 성, 위기의 여자, 페미니스트, 계약 결혼 등의 이미지와 함께 떠오르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이 책은 얼핏 연관을 시키기가 힘들다. 그러나 62세 보부아르가 ‘노년’을 쓴 것은 그녀가 41세에 ‘제2의 성’을 쓴 것 만큼이나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늙는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기 전에는 단지 다른 사람의 일’ 이라고 쓴 그녀의 고백처럼 이 책은 자신에게 서서히 시작된 노년에 대한 그녀의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보부아르 개인에게서 시작해 동시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모든 노년들의 메시지로 확대된다. 일종의 ‘노년 총결산’인 셈이다.

이미 40여년 전에, 노인문제가 아직 사회문제로 부각되지 않던 시절에 그녀가 노인문제를 총체적으로 접근한 책을 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요즘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노인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나타내는 보도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국경제 보고서는 2022년에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비중이 14%를 넘어 한국 사회가 고령사회로 접어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최근 노인문제를 다룬 책이 부쩍 출간되고 있다는 점은 노인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말해준다. 사실 인간에게는 죽음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 '늙음'이다. 죽음은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그리고 분명하게 우리는 늙어간다는 현실을 비껴갈 수 없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의 지위'는 노인 자신이 정복하고 취득해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노인들의 운명은 그 사회 집단의 필요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보부아르는 이것이야말로 노인의 인간 조건 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면이라고 지적한다. 노인은 하나의 인간존재로서 그 가치를 인정 받아야하며, 이를 토대로 개인적 사회적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노년>은 총 2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보부아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서 노인의 위치와 가치, 건강, 사회제도, 노인의 성생활, 정신병리학적 문제 등을 고대 문헌과 실증 자료를 토대로 펼쳐낸다. 1부는 '외부에서 본 노년', 2부는 '세계 속의 존재'라는 제목을 단 '내부에서 본 노년’을 다루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책의 구조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1부의 제1장 '노화와 생물학'은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사람이 노인이 되었을 때 신체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여러 생리적•의학적 현상을 역사 순에 의해 명쾌하게 정리하고 분석한다.

제2장 '인종학적 자료들'에서는 인류 역사 이래로 인간 사회에서 노인이 차지해온 위치를 여러 기록을 통해 훑어본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원시 사회와 원주민들의 노인에 대한 대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2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인간 역사와 잔혹성에 몸을 떨게 된다.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에서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잘 아는 여러 철학자들과 문학가들이 노년과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정의했는지, 또 문학 속에서 노인의 모습은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피고 있다.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은 현대 사회에서의 노인의 현실을 다룬다. 노인에게 닥치는 실업 문제, 경제 문제, 노인 복지 문제 등이 구체적인 수치, 실례와 함께 소개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진보한 현대 사회가 어떤 식으로 노인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2부의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에서는 괴테, 톨스토이, 마담 드 세비녜 등 유명한 문인들의 글을 통해 그들이 겪었던 노년에 대한 육체적 체험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제6장 '시간, 활동, 역사'에서는 문학가들 뿐 아니라 음악가, 화가, 조각가, 정치가 들의 내적 체험을 바탕으로 노인이 느끼는 시간과의 관계, 활동, 역사와의 관계를 조명한다.

제7장 '노년의 일상생활'에서는 때로는 불합리하게 보이는 노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노인들의 심리적 특성과 그 원인을 분석하고,

제8장 '노년의 실례들'에서는 빅토르 위고, 미켈란젤로나 베르디 등 죽을 때까지 자기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들이 노년의 자기 인생을 어떻게 느꼈는가를 소개한다.


이 책의 장점은

풍부한 자료와 탁월한 통찰력으로 노년에 관해 폭넓게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를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해명한다. 이 책이 각별하게 읽히는 까닭은 노인을 둘러싼 모든 문제가 방대한 기획 아래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서구의 양상이긴 하지만 노인의 위치와 가치, 건강, 사회 제도, 노인의 성생활, 정신병리학적 문제 등이 고대 문헌과 실증 자료를 토대로 매우 긴밀하게 논의되어 있다. ‘노년’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의 훌륭한 참고 문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보부아르의 문학적 능력에 빚을 많이 지고 있다. 그녀의 명문장으로 만나는 세계적인 문인이나 화가들의 이야기들(‘그 이야기들이 다 필요했나’는 논외로 하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들의 일기와 작품에서 뽑아낸, 노년과 관련된 방대한 인용문들에서 우리는 노년의 문제를 우리 개인이 아닌, 인류 보편의 문제로 공감하게 된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보부아르가 행했을 조사와 연구는 결코 만만치 않은 양이다. 그녀는 인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조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109p). 이런 자료적 가치 때문에 이 책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노년’에 대한 훌륭한 텍스트로 만인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보부아르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나가는가를 묘사하여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목표라면 그녀는 목표를 훌륭히 달성했다. 그녀는 다양한 앵글로 노년의 현상을 아주 잘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다른 목표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현상을 고발하는 것은 그 현상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노인들의 불행한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현 상황을 근본적이고도 철저하게 전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인간화된 노년기’에 대한 처방은 몇몇 제한적인 개혁이나 정책으로 그 결과를 얻기가 불가능하고, 그것이 바로 노년의 문제를 현대 사회가 불문에 부친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 침묵을 깨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또 하나의 목적이라고 그녀는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노년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에 대한 이렇다 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결론은 그녀가 들이대는 논의들에 비하면 허술하기 그지 없다. 원론 차원에서의 ‘당위’를 강조하며, 끝내는 아래와 같은 개인적인 해결로 마무리한다. 돌고 돌아 겨우 원점에 다시 선 것 같은 허전함이 없지 않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반복과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해야 한다’.


보부아르가 한국 가족제도를 연구했더라면

아무리 제도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제반 사회정책들이 노인의 삶을 개선해주는 쪽으로 발달한다고 해도 노인들은 여전히 사랑 속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인간인 이상 정신적, 정서적 케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보부아르가, 자식을 위해 일생을 희생한 부모의 노년을 자식이 책임지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와 효 문화에 대해 연구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역사에서의 노년’ 부분에 그녀는 동양권의 사례를 중국으로 한정하고 짧지만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123-125pp), ‘민속학적 자료들’과 ‘노년의 사례들’에서 일본의 경우와 일본 문학 작품도 조금 인용하긴 하지만 그녀 자신 못을 박았듯이(122p) 아쉽게도 그녀의 연구는 서양 사회에 국한된 연구였다. 혹여라도 그녀가 ‘자료적 가치’에 이 책의 의미를 많이 두었다면 동양권에 대한 고찰도 충분히 욕심을 내 볼 만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들과 내 생각

책의 효율을 떠나서,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방대한 사례와 문학 인용문들 중에는 공감가는 것들이 많았다. 일일이 정리하고 분류할 시간이 없어 아쉽지만, 시간이 허용하는 한에서 몇 가지만 여기에 정리해 보려 한다.


* 보부아르의 능력과 전략적 글쓰기

칼럼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내 경우엔 적합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받쳐줄 논거를 찾아내는 일이다. 주제를 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정한 주제를 적합한 논거를 토대로 끌고 가는 것은 더 어렵다. 책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주제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그것을 한 편의 칼럼으로 완성해내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그 논점을 일정 분량 끌고 갈 논거가 자신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많이 써왔다. 그러나 대부분 매우 일상적인 글들이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벗어나 논점을 객관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내가 객관적 글쓰기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내 뇌 안에 저장된 자료가 부족하거나, 혹은 저장한 자료를 꺼내 쓰는 명료한 방법이 내게 부족하다는 두 가지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실은 두 가지가 내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 역시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 ‘노년’이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에 대한 감탄을 넘어, 절망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 절망은 이 희대의 작가가 가진, 글을 풀어가는 능력 때문이다. 웬만해야 따라잡고자 하는 의욕이 생길텐데, 그녀는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저 만치에 서있다. 자기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녀가 늘어놓는 예시들의 절대적 양에 일단 놀라고, 이어 그 방대한 자료들을 700여 페이지 곳곳에 배치하는 그녀의 분류 능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거침없이 풀어 써가는 그녀의 내공 역시 장난이 아니다. 글 한 편 쓰면서도 오랜 시간 끙끙거려야 하는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물론 이 책은 사회 과학적 논문이 아니기에 그녀의 글이 매우 조직적이라는 느낌은 없지만, 명료하게 자료들을 분석하고 예시를 들어 정리한 1부와 화가, 문학가들을 위시한 유명 인사들의 엄청난 사례들을 소개해나가는 2부에서의 그녀의 거침없는 붓놀림은 충분히 사람 기를 죽인다.

이 책의 결론은 책의 압도적인 분량에 비해 소박(?)하기 그지 없다. 그런 소박한 결론을 위해 그토록 많은 예문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제2의성’의 경우 여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진단하기 위해 1,000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처럼 ‘노년’ 역시 같은 목적으로 길게 쓰여졌지만, 자신의 논점을 지지하기 위해 그 많은 인용문들이 다 필요한 건 아니다. 그것은 보부아르의 지적 과시욕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이왕 쓰는 김에 노년에 관한 완벽한 자료정리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는 요즘 뜨고 있는 ‘전략적 글쓰기’를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 잃어버린 시간

‘아르장쿠르 씨의 경우는 평상시 내게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세월의 실체를 놀랍도록 드러내 주었다…우리 역시 그렇게 몰라볼 만큼 모습이 변한 사람들과 똑 같은 법칙을 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일어난 변모, 그것에 의해 비로소 나는 처음으로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그 만한 시간이 내게도 흘렀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본문 402p

작년 초, 거의 20년 만에 대학교 친구들 동창회에 갔다. 과에서 친하게 지냈던 몇몇 친구들은 가끔 서로 얼굴을 보았지만 과 총동창회에 나간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처음 보는 친구들의 모습은 매우 충격이었다. 충격의 내용은 정작 너무도 변해버린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그 세월의 갭을 나를 처음 보는 친구들 역시 나에게서 실감할 것이라는 데 있었다.
‘한숙아, 넌 정말 그대로다.’
일단 고맙다고 인사는 하지만 남자애들의 그런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다가는 큰 코 다친다.
나 역시 ‘너, 어쩜 그렇게 달라졌냐’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너도 여전하다’고 응수하는 까닭이다.
일년에 한 번이라도 보는 사이였더라면, 그토록 세월의 흔적을 한꺼번에 느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친구들은 더 이상 내 기억 속의 20대 청년들이 아니었다. 20년이란 시간은 변화를 한 순간에 포착하기엔 너무나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이와 직면하고 싶지 않아 멀리 도망가있던 내 내면의 심리는 숨을 곳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남은 다 늙어도 나는 늙지 않을 것이라는 어이없는 신념과, 나이에 따라 정직하게 늙어가는 현실의 나 사이에는 언제나 뛰어 넘을 수 없는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


* 위고의 비밀 메모, 기록에 대한 강박

아내 쥘리에트를 피해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를 자기 만의 암호로 반드시 기록해 두는 빅토르 위고의 메모수첩에 관한 글을 읽으며(462-465pp) 한참을 웃었다. 그가 비밀 메모를 남기기 위해 머리를 쓰고 있는 장면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나는 위고의 그런 짓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 역시 위험한 줄 알면서도 반드시 기록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유난한 메모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고 정도면 기록은 강박이다. 그날 일어난 일을 다 적어놓지 않으면 맘이 불편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위고의 고민이 바로 내 고민이었던 것이다. 특히 알려지면 안되는 일들을 기록하고 싶을 때, 그럴 때는 자신 만의 암호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 시절에 살았기 망정이지 위고가 이 시대에 살았더라면 신정아 사건 같은 스캔들에 여러 번 휘말렸을 것이다. 메모광인 그는 그럴 가능성이 더욱 크다. 발전된 테크놀로지 덕에 비밀은 맘먹으면 어떤 경로로든 파헤쳐지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판에 딴에는 정교한 암호를 쓴다고는 하지만(잘 보면 알 수 있는 애교수준이다) 메모를 남기고 있는 위고를 생각해보라. 그건 위험천만한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위고의 메모가 후대에 출판까지 되어서 그의 변태적인 성향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 버린 것도 바로 그 기록 강박 때문이 아닌가.


* 그리부이즘(422p)

사람들은 한 술 더 떠 과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노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얻기 위해 뜨는 과장은 애교일 경우가 많지만 만성이 되면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다리를 약간 전다고 중풍에라도 걸린 듯한 시늉을 하고, 귀가 약간 들리지 않는다고 아예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능은 더 제구실을 못하게 되고 병은 더 악화된다.
이런 것을 그리부이즘이라고 한다.

그리부이즘 하면 내게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시할머니시다. 그분은 94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말 건강하셨다. 몸의 모든 감각이 잘 살아 있어서, 누구보다 잘 걸으셨고, 잘 드셨다. 그런 할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할머니 참 건강해 보이세요’ 하는 말이었다. 그걸 알 턱이 없던 나는 시댁에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그 말을 했다가 할머니에게 얼마나 역정을 들었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혼자 계실 때는 씩씩하다가도 사람만 나타나면 갑자기 ‘아이고, 죽겄네’ 모드로 몸의 자세를 완전히 바꾸시는 분이다. 밖에 나가실 때는 지팡이를 늘 갖고 다니셨는데 혼자 있을 때 그 지팡이는 빙빙 돌릴 수 있는 할머니의 장난감이었지만 아는 누구라도 만나면 꼬부랑 할머니를 지탱하는 본연의 지팡이로 급 변신을 하곤 했다. 할머니는 계단을 오르실 때도 치마를 걷어 부치고 잽싸게 오르시지만, 사람이 있으면 부축이 없이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표정을 지으시며 도움을 요청하신다.

가끔 영양제를 사다 드리면 ‘늙은이가 이런 건 먹어서 뭐해, 빨리 죽어야할텐데.’ 하시면서도 하루 한 알만 드셔야 하는 약을 몰래 한 알씩 더 드셨다. 거기다 성격은 대쪽 같이 갈라지고 찬 바람이 쌩쌩 불어 모두들 할머니를 무서워했지만, 나는 그런 할머니를 내심 좋아했다. 어려워서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할머니는 사랑 받지 못하셔서 마음이 강팍해지신 것이다. 그런 할머니를 무서워하지 않고 나는 할머니 주변에 늘 있었다. 그런 덕분에 할머니와 나는 꽤 친해졌다. 내가 차려드린 생일상을 앞에 놓고 노래를 부르시던 할머니가 지금도 생각난다. 할머니의 9남매와 그 가족들을 모두 우리 집으로 초청해 할머니 생일상을 제대로 차려드린 적이 있다. 그날 할머니는 무척 행복해하시며 노래 한 곡조를 뽑으셨다. 평생 처음으로 부르신 노래라고 한다. 늘 화만 냈지, 노래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던 9남매 형제분들이 더욱 놀라셨다. 나는 지금도 가끔 심술궂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리부이즘은 외로운 할머니가 우리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만들어내는 눈물겨운 제스쳐인 것을 다행히 나는 일찍 알아챈 것이다.


* 지드 일기 : ‘내가 자각하는 나, 타인에 의해 인지되는 나 간의 불일치


1954년 미국의 터크먼과 로지 연구팀이 '자신이 젊다고 여기는 나이'와 '늙었다고 여기는 나이'에 대해 조사한 결과가 본문에 소개되어 있다(407p). 놀랍게도 60 에 자신이 늙었다고 대답한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80 이후에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53%에 지나지 않는다. 80 에도 자신이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1%나 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나이가 들어도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이 자기 동년배들과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믿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40 은 인생을 거의 다 산 사람들이나 도달하는 나이로 보였다. 나는 영영 40 이 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40 이 되고 보니 내가 맞이한 40 은 어렸을 때 내가 생각하던 그 40 이 아니다. 이 책에 소개된 지드의 생각은 나이가 들어 내가 70, 80 이 되어도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걸 미리 보여준다. 아무래도 모든 이에게 나이란 자신에게 가장 납득시키기 어려운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공감이 가는 지드 일기의 단편들만 모아봤다.

409) ‘젊었을 때 내게 그렇게도 늙어 보였던 사람들의 나이, 오늘 내가 그 나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나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1930,6.19

410) ‘만일 내가 끊임없이 내 나이를 되풀이해 나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는 나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암기해야 할 과목처럼 ‘나는 65세가 되었다’고 되뇌인다. 그래도 나는 내 나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나의 갈망과 기쁨, 미덕과 의지가 확대되기를 바랄 수 있는 공간이 좁다는 사실 뿐이다.’ 1935.5.

411) ‘나는 거의 내 나이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하루 종일 ‘가련한 늙은이, 넌 벌써 70이 넘었어’라고 되풀이해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 나이가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1943.1.17

411) “내가 줄곧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고, 말하자면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도달해있는 70이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내 영혼은 여전히 젊다. 나이를 상기시키는 신체적 결함들이나 쇠약함들은 내가 그 역할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을 때마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알려주는 프롬프터처럼 내게 찾아와 나로 하여금 그 역할을 기억하게 한다.”1941.3.6

416) 70세가 되어도 자신이 젊다고 생각한 지드는 그 이후에도 쉽사리 자신의 노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80세 그는 <아멘>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중요한 건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처진 눈, 움푹패인 볼, 빛을 잃은 시선, 내 모습이 내게 두려움을 준다. 잔인한 우울감을 준다.’



* ‘죽어도 좋아’ - 노년의 욕망에 대하여 (이 책의 5장의 이슈 중에서)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까지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나이든 사람들의 에로스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본 주제일 것이다. 노인들이 이전에 가졌던 자질과 결점뿐 아니라 ‘욕망까지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면? 이는 이 책 곳곳에 드러나는 관심이기도 하다.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육체가 서서히 노화됨에 따라 우리가 하지 못하게 될 것, 혹은 제약이 따르게 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 중에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히 인간의 욕망에 관한 것일 터이다.

여기 원초적인 욕망에 대한 영화 한 편이 있다. 세련된 영화적 장치들로 포장되지 않아 더욱 적나라한 영화, ‘죽어도 좋아’. 그 영화의 첫 장면을 기억하는가. 담배 판매대 앞에 노인이 앉아 있다. 수납구 밖으로 비죽이 나온 노인의 투박한 손. 거리엔 눈발이 흩날리고, 노인의 등 뒤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주전자는 조용히 더운 김을 내뿜는다. 늙은 육체 안에도 더운 열기가 남아 있음을 시위라도 하듯. 거친 호흡, 탄력을 잃은 두 육체의 삐걱거림, ‘죽어도 좋아’는 놀랍게도 늙음의 땅이 젊음의 땅과 다르지 않음을 웅변한다.

빠른 변화와 속도를 사랑하는 현대 사회의 찬양의 대상은 오로지 젊음 뿐이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 의식 속의 노년은 불꺼진 땅, 에로스의 열기가 식어버린 고요의 땅이다. 21세기 소비 사회가 부추키는 것은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팽팽한 육체와 젊음의 약동이지 원숙한 지혜가 아니다.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계급으로 취급한다’. 보부아르가 고발하고자 했던 것은 노인들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자신들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리란 걸 아직 의식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의 혐오, 자기중심적 시선이었다. 보부아르의 도움을 얻어 ‘죽어도 좋아’의 박치규, 이순예 두 노인은 노래도 모르며 노래하는 새처럼 21세기 식의 시선에 반기를 든다. 시종일관 자신들의 욕망에 풀무질을 하면서 주름진 육체에도 식지 않은 열기가 남아있음을 노인들은 웅변한다. 깊은 육체의 고랑으로 땀이 흐른다. 땀, 싱싱한 육체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열기. 밖에는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나이 먹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새삼 충격을 받는다. 혁명가 트로츠키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 중 가장 예상치 못했던 일’ 이라고 한탄했고, 보부아르는 ‘노년 만큼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것도 없지만 노년 만큼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없다’ 고 말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그림동화 작가인 존 버닝햄 역시 ‘경로우대증을 받을 나이가 된 것이 무척 충격적이었고, ‘갑자기 삶이 돌려줘야 할 무엇이 되어 버린 것처럼 생각됐다’ 고 적고 있다.

나이 드는 것은 분명히 건강 식품 광고를 더 자주 더 유심히 보는 것이며, 갈수록 크리스마스가 점점 더 싫어지는 것이며, 백화점 거울이 주름을 생생히 잡는 싸구려 거울이라고 불평하는 회수가 늘어나는 것이며, 손자들의 숫자가 친구 숫자를 추월하는 것이며, 젊은 애들에게 없는 존재 취급을 당하는 것이며, 점점 심술과 심통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면 프랑스 속담처럼 ‘많은 것이 변해 버렸지만, 더 많은 것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의 우스갯소리처럼 나이 들어 유일하게 줄어드는 것은 성 생활 뿐이다. 세월이 젊음을 빼앗아간다고 해서 내면의 충만한 기쁨까지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더 좋아지는 것도 있다. 일례로 젊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들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관대로 노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 책 8장에 소개된 훌륭한 예들, 혹은 절망적인 예들 중에 어떤 것을 교훈으로 삼을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빨라진다는 것이다. 영국 작가 헨리 돕슨 처럼 ‘시간은 머물러 있는 것, 흐르는 것은 우리인 것을’이라고 푸념할 수는 있어도, 셰익스피어가 희곡 ‘리처드 2세’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는 내가 시간을 함부로 썼는데, 이제 시간이 나를 함부로 대하네’ 라고 탄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탄도 슬퍼도 말라, 변하는 건 겉모습일 뿐 인생은 언제나 전성기임을!

IP *.51.218.186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3.24 22:59:05 *.36.210.80
저 열정을 가지고 어떻게 여태 살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무지하게 욕심이 많구나 하고 또 느꼈다. 알아봤었지 4명이라고 할 때부터.ㅋ
애쓰셨네요. 이제 좀 쉬시구랴. 잠도 푹 자고. 또 벌떡 일어나 무언가를 쓸테지만. 좋은 결과를 넘어서! 아우~~~~~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