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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4일 22시 18분 등록
13장 독립된 마음으로 사는 삶

사랑을 받거나 욕을 먹거나
모두 놀란 듯이 하라.
높은 지위는 사람을 상하게 한다.
어째서 사랑을 받거나 욕을 먹거나
모두 놀란 듯이 하라는 것인가?
사랑을 구하는 것은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얻어도 놀란 듯이 하고,
그것을 잃어도 놀란 듯이 한다.
어째서 높은 지위는 사람을 상하게 하는가?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자아가 없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사람의 참 자아는 영원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육신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곧 죽게 될 것이라 믿는다.
만약 우리에게 육신이 없다면
무슨 재앙이 일어날 수 있을까?
만물을 보듯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천하의 수호자가 될 수 있다.
만인을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하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유난히 본문의 내용이 원문과 달라서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마 저자의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이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이번 도덕경 13장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타인의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의견들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독자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들이 우리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우리 자신의 생각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우리는 몹시 괴로워지게 될 것이다.

남들의 지지와 찬성에 영합하는 것은 도의 길(방식)이 아니다. 사회적인 지위를 추구하게 되면 여러분의 독립적인 마음으로 향하는 신성한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그만 멈추게 된다. 여러분은 누구나 독특한 자신만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본성을 통해서 도의 본질(Tao nature)을 믿고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근본적인 존재, 즉 독립적인 마음을 강하게 만드는 "타고난 자신(natural you)"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 그렇지 않고 자존심을 위해 남들이 선호하는 지위나 고상한 직책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외부의 신호에 의존하는 마음에 따르는 삶일 뿐이다.

도는 어떤 일에 대해 강요하거나 간섭하는 법이 없다. 그저 그 일 고유의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여러분이 하려는 일에 어떠한 동의(찬성 혹은 승낙, approval)라도 필요하다면 완벽한 조화에 따라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떠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더라도 그것 역시 조화의 일부일뿐이다. 노자는 칭찬과 동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두려운 일이라고 (비꼬듯이) 지적한다. 만약 칭찬을 받게 되면 여러분은 칭찬이 주는 외부적 메시지의 노예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여러분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또 반대를 받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더욱 강하게 시도할 것이고 이 경우에도 역시 여러분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힘에 따르게 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독립적인 마음이 자유롭게 흐르는 도의 길과는 반대로 의존적인 마음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번 13장에서는 자아(ego)와 욕망(the need for importance)이야말로 세속적인 개성(self)이 불러일으킨 사고뭉치들이라고 주장한다. 도의 길은 여러분 자신의 영원한 본성을 깨닫고 여러분의 자아와 육체로부터 한 걸음 걸어나오는 것이다.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문제도 함께 사라진다. (다시 말해 자아가 커지면 문제도 덩달아 커지기 마련이다.) 도덕경은 수사적으로 이렇게 묻는다. "만약 우리에게 육체가 없다면 무슨 재앙이 일어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면 이 세상에 가득한 모든 고통받는 수색자(the afflicted)들의 의견에 좌우되지 않는 신성하고 보이지 않는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의 정신 속에서 여러분의 진정한 본성이 외부의 칭찬을 추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따위는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노자의 메시지에 담긴 다음의 원칙을 실천하면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우주의 자연 법칙과 조화를 이루고 도의 정신 속에서 독립적인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여러분 내면의 본성을 믿어라.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해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열정적인 생각들은 여러분이 고유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이다. (여러분의 뜨거운 믿음이야말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전부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여러분과 달라서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사랑을 구하는 것은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노자를 떠올려라. 그러면 그가 여러분의 참 자아로 가는 길을 알려줄 것이다.

여러분이 그저 육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라.(혹은 그냥 기억하라.)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은 여러분의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본질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 다른 사람들 역시 육체가 전부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칭찬과 동의를 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전부라는 환상을 부채질할 뿐이다.

세속적인 자아는 결코 여러분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진정한 자아를 믿어라. 이는 여러분 내면의 본성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려면 독립된 마음으로 내면의 본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러분의 비전을 존중하고 도의 애정있는 정수와 보조를 맞춘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생각을 믿어라.


노자가 이 13장에서 묘사한 사람이 되도록 연습하라.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다짐하라. "나는 이 세상의 수호자이며, 이 세상의 스승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왜냐구?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사랑을 그 근본으로 하는 독립적인 마음을 통해 다른 사람 그리고 사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자아를 따라 살게 되면 여러분은 정신적인 스승이자 수호자(guardian)가 될 것이다. 여러분의 세속적인 자아가 찾아 헤매던 지지와 찬성은 더 이상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외부의 찬성이 있어야만 삶이 유지될 수 있다는 의존적인 마음은 발버둥치기를 멈출 것이다.


지금 도를 행하라.(Do the Tao Now)

지금 당장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외부의 압력이 없다고 가정할 때 나만의 고유한 본성은 무엇일까? 그런 후에 다른 무엇이 되라는 압력에서 벗어나 여러분만의 본성과 완벽한 조화 속에서 하루를 살아라.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의 본성이 평화, 사랑 또는 음악 천재가 지닌 것과 같은 조화 중에 하나라면 바로 그것에 따라 오늘 하루를 살아보라.





14장 외형 너머의 삶(Living Beyond Form)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만지려 해도 만질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말로 정의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이 세가지는 각각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그리고 만질 수 없는 것은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로 존재한다.

이 '하나'라는 것은 그 위는 밝지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가 않다.
이것은 계속 이어지고, 이름을 지을 수가 없으며
다시 아무 것도 없음으로 돌아간다.

앞에서 맞이하면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면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그것이 될 수는 있다.

만물이 항상 어지 해왔는지를 알게 되면
사람은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영원'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자. 시작도, 끝도 없으며 결코 변하지도 않는 '영원'을 말이다. 이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혹은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이 과거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Think of that which even now, in this very moment as you read these words, is the very understanding that’s within you) (여러분과 주변의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그럼에도 움켜쥐려하면 교묘히 빠져나가는 그 정수)

이 근본적인 원칙은 모든 존재(이 원칙이 펼쳐진 결과인 모든 것들)를 지배해왔고 현재에도 그러하다. 노자는 여러분이 (이 하나됨을 경험하기 위해)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이 형태가 없는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장의 앞 부분은 여러분에게 눈없이 보고, 귀없이 들으며, 만지지 않고 끌어안으라고 재촉한다. 형태 너머의 삶의 이러한 세 가지 방식은 여러분의 깨달음의 일 부분이 될 필요가 있다. 일정한 형태가 없는 이러한 영역들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정신(도)의 세계로 녹아든다. 여러분은 이 포괄적인 원칙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과 더불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일부 철학자들은 이 14장을 도덕경 전체 81개 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으로 꼽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장이 모든 존재의 토대가 되는 하나의 원칙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볼 수도, 만질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에너지와 친해지면 여러분은 그 하나됨(the oneness)과 연결될 때 느끼게 되는 조화로움을 얻게 된다. 그리고 조화로움은 '영혼이 있는(in-spirited)' 삶을 사는데 있어 여러분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물질, 소유 그리고 성취의 세상으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자아를 폐기하는 법을 배워서, 여러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비롯된 그곳(placeless place)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존재의 영원한 근원(eternal Source, 도道?)에서 비롯된 신비로운, 거의 마법에 가까운 힘을 다시 얻을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형태 속(in-form)에서만 살게 되면, 여러분은 정보(in-form-ation)을 축적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도덕경의 14장은 여러분에게 (언제나 그래왔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to become at one with that which has always been) 정보가 아니라 창조적 자극에 자신을 빠뜨리라고 이른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지혜로운 결론을 내린다. "만물이 항상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면 사람은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도는 그 안에 서로 충돌하는 것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거기에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이 뒤섞인 하나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자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고 말한 것과 같이 충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언제나 존재해왔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근원은 여러분이 바라는 평화와 조화를 선사한다. 그러므로 이 무한한 하나됨을 인식하고 그것을 여러분의 깨달음 안에 담아라. 모든 일들이 왜 그렇게 되어왔는지 묻기를 멈출 때 여러분은 비로소 도는 그저 도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외형의 세상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여러분은 스스로의 무한한 본성을 껴안을 수 있다.(Free of the fears that attend sole identification with this world of form, you can embrace your infinite nature.) 즉,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삶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영원성을 사랑할 수 있다.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몸 그리고 모든 생명은 이 영원성이 펼쳐진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 노자가 2,500년 전의 시선으로 도덕경의 14장을 통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한 걷기 명상 기술을 이용하자.

모든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는 영원한 원칙에 대한 깨달음의 지속적인 상태 안에 머물러라.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자아중심적인 세상에서 여러분을 나타내는 모든 것들(identification) 속에) 펼쳐진 신을 바라봄으로써 여러분은 좀더 그 분과 닮아갈 것이고, 여러분과 그 분 사이의 연결 고리를 녹슬게 하는 것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여러분에게 다시 균형을 가져다주고 자아가 사라진 진정한 본성인 조화를 되살려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봄으로써 비전을 향상시켜라.

무엇을 보게 되던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라. 내 눈이 나에게 보여주는 것의 진정한 근본은 무엇일까? 봄이 되면 나무를 깨워 불과 몇 주전에는 꽁꽁 얼어붙었던 가지에서 꽃망울을 피워내는 불가사의한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저 모기의 창조 뒤에(말이 나온 김에 모든 생각너머에) 숨어있는 에너지는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보는 것뿐 아니라 듣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보라. 그러한 소리들은 조용한 세상에서 나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고요한 소리를 주의 깊게 들음으로써 듣는 힘을 향상시켜라.)

여러분이 이 영원한 원칙을 끌어안을 때, 경외와 감사가 자라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신성한 훌륭함(your own Divine magnificence)과 같은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여러분의 마음은 덧없는 세상에 잘못 동화되는 대신 자유로워질 것이고, 여러분은 만물 안에서 영원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노자는 여러분이 영혼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킬 거라고 말한다. 여기에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http://en.wikipedia.org/wiki/Rumi)가 노자보다 1,500년쯤 늦게 시적으로 풀어놓은 글이 한 귀절 있다.

초원의 모든 나무와 풀들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 보였다.
평범한 눈으로라면 그저 한 자리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을 그것들이.

나는 여러분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현재 속에서 "만물이 항상 어지 해왔는지"의 춤사위를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금 도를 행하라(Do the Tao Now)

나무 한 그루, 저 하늘에 빛나는 별, 산, 구름 또는 자연 속의 다른 어떤 것을 볼 때마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들(invisibleness)을 가능한 많이 기록해보자.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렇게 존재하게 하게 하는 원칙과 포옹하라. 그리고 그것을 안으로 끌어들여 여러분 자신의 물리적인 존재에도 똑같이 적용해보라. 이는 바로 여러분의 허파를 늘어나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고, 또 손톱을 자라게 하는 그 원칙이다. 오늘 하루, 이 원칙 속에서 10분만 살아보자. 그리고 여러분 존재의 근원과 연결된 느낌이 어떤 것인지 기록해보자.
IP *.227.22.57

프로필 이미지
숲속의 향기
2008.04.04 23:18:51 *.109.105.241
이 글을 올리시고 퇴근하셨군요~^^
프로필 이미지
백산
2008.04.05 02:04:43 *.131.127.79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닿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보려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느끼려 하지 않으면

보이고 들리고 느낀다.

생각을 멈출 때
거기 참 마음이 있다.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이름지어 논 참마음인지...

그것은
원래 이름없이 거기있었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지고
그 생각까지도 사라지겠지만

생각을 일으킨 그 것들은
항상 거기에 있다.

현자는 그것을 일러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것 뿐이다. 이르고

삼라만상의 유일한 법이라 했다.


자다가 깨어...

왜 알려고 하는가?

그것은 근원으로 회귀하려는 본성때문인가?

죽지 않고 살아서 근원에 이르고 싶은 욕망때문인가?

생각으로 그 답을 찾을 수는 없는가?

그렇게 머리속을 스치고 가는 빛으로밖에 알 수 없는가?


...

...

...

에이... 잠이나 자자. 꿈도 꾸지 말고...

고맙네, 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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