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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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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7일 20시 2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그의 끝은 어디인가?

이번 <신화의 세계>를 읽으면서 내 머리 속을 채운 저자에 대한 느낌이다.
그의 학문적 영역은 단순히 신화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입장이 아닌 인류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이념적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는 겸손하다.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진리(眞理)이니 ‘모두 이 깃발을 따르라!’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문득 신화(神話)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사전적 의미에서 신화는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 우주의 기원, 신이나 영웅의 이야기, 민족의 태고 때의 역사나 설화라고 정의되어지고 있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신화라는 단어는 정확히 이러한 사전적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신화와 비슷하게 생각해왔던 전설(傳說)은 무엇인가? 전설의 사전적 의미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주로 구전되며 어떤 공동체의 내력이나 자연물의 유래, 동물들의 체험이라고 한다.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는 있지만, 신화는 보다 근본적이며, 전체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통찰’(insight)를 함축하고 있다. 조셉 캠벨은 이러한 사전적 감옥에 갇혀 있었던 신화(神話)를 감옥 속에서 끄집어내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애벌레의 상태에 머물러있던 신화를 나비와 같은 존재로 탈바꿈한 사람이 바로 ‘그’인 것이다.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그가 다양한 민족과 지방의 신화를 연구 분석한 이유도 있지만, 그는 신화를 단순히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가 함축하고 있는 근본사상과 탄생배경 그리고 철학적 함의를 근본적으로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인류의 대안적 사상에 대해 여러 번 영구불변의 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영구불변의 철학은 보통 ‘신비주의’, ‘초월주의’라고 명칭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인류가 추구하고 지향해야할 새로운 대안사상으로 관심 받고 있다. 예를들어, 기독교에서도 금기시되었던 ‘도마복음서’에 대해서도, 이슬람에서도 금기시되었던 수피즘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인용하며 종교적 터부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고 조망하는 것은 내게 무리다. 이번 연구원이 밟아나가야 할 과정 속에서 한발 한발 그가 만들어놓은 신화의 숲에 대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


2.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글귀

신화의 세계

서론 : 인간과 신화의 기원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은 정도로 자신과 우주의 관계가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우주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얻게 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 -5p

남자들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둘러앉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발명했다. 남자란 뭔가 진지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동물인 것이다. 남자의 몸은 전투와 방어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7p

인체의 모든 근육은 활동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 근육은 충분한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남성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계급이고 서열이며, 제인 구달이 “알파 수컷(Alpha Male)”이라고 부른 것이다. 누가 알파 수컷인가? 누가 최고의 수컷인가? -8p

여성은 육체적으로 약점이 있다. 게다가 여성은 전쟁의 승자가 획득하는 전리품이다. 따라서 남성의 과제 중의 하나는 공동체에 속한 여성을 유괴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10p

수렵문화의 기본적인 신화적 주제는 동물은 자발적인 희생자라는 것이다. 동물은 자진해서 살해되려고 찾아온다. 우리는 세계 곳곳의 신화에서 이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은 다음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죽일 것. 내년이 또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어머니라는 원천으로 되돌려 보내어 소생시키는 제의를 행할 것. -15p

자연의 신비란 생명을 죽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다. 달리 살아갈 방법은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잡아먹음으로써 살아가는 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잡아먹는 쪽도, 잡아 먹히는 쪽도 실은 하나의 생명이다.
동굴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이 자신을 바친 데에 대해서 감사했다. 오늘날 우리는 양식을 주신 성스러운 존재를 떠올리고 그에게 감사한다. 이것은 전혀 다른 심리이며, 전혀 다른 신화이다. -16p

신전 동굴들(temple caves) 이런 동굴들에서 살고 싶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곳들은 차고, 위험하고, 캄캄하고, 무시무시하다. 이 동굴들은 남성의 제의에 이용되는 성역이며 소년이 성인이 되는 장소라는 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소년이 배워야 할 것은 용기였다. 그들은 죽음과 부활의 제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의존적인 유년기를 마감하고, 자기 책임을 다하고 적극적이며 약자를 보호하는 남자로서의 성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렵의 기술만이 아니라 수렵의 제의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22p

우리는 언제나 신을 일종의 사실로서 생각한다. 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이란 단지 초월과 신비를 상징하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신비이며, 그것은 인간이나 동물로 나타난다. 아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로 인정되는 것이다. -23p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땅이란 신성한 곳이다. 딴 곳의 땅이 아니라 당신이 살고 있는 바로 이 땅 말이다. 태고의 신화에서는 인간의 육체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특정한 땅의 풍경도 신성시했다. 여러분은 성지(聖地)를 찾아서 어느 먼 곳으로 갈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이다. 나는 이런 토지의 신성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신성시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로서 나바호족(Navaho:북아메리카 남서부에 사는 인디언의 한 종족/역주)의 세계, 나바호족의 신화와 모래 그림(sand painting)을 예로 들려고 한다. -38p

신이 자기를 연다면 그곳에서는 성스러운 것과 하나가 되는 종교가 생긴다.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의 복음서” 10:30. 이 말을 들은 유태인이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라며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자, 예수는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라고 반박했다/역주)라고 말한 의미는 그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 형을 받았던 것이다. -40p

모든 생명은 신비로운 생명에 의해서 유지된다.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당신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되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생명이다. -41p

신화는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신화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확대했다면 신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먼저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기능하는 신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사회적 신화의 보호와 복구(Care and Repair of Public Myths)”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의 요지는 사회는 그것을 떠받치고 그것에 통일성을 주는 신화를 필요로 하며, 그런 신화를 가지지 못한 사회는 붕괴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화란 우주와 그 각 부분들 그리고 국가와 그 밖의 인간 집단과 관련을 맺는, 수용 가능한 이념의 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화는 그런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신비적인 차원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신화는 또한 개인의 교육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개인을 이끌어가는 길을 제시한다.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신화도 그것을 제시한다. 신화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이미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59p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셈족의 경우에는 “당신들이 에즈라라고 부르는 신을 우리는 야훼라고 부른다”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여기에는 배타주의와 부족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태인들에게서 이어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며, 다른 신들은 악마이다. 이 세상에는 이스라엘에만 신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서양의 전통 속에서 계승해온 종교이다. -88p

이것 또한 우리들(유태-기독교/역주) 전통의 특징이다. 모세는 영웅이 아니다. 그가 이끌었던 부족이 영웅이다. 우리의 신화는 부족의 신화이며, 우주의 유일한 신은 우리의 신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110p

성스러운 원천 :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상징의 주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상징에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갠지스 강이 흘러나오는 근원으로 가야 한다. 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 따라서 상징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갠지스의 원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리드와(Haridwar)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속 뜻을 잘못 읽은 것이다. -115p

약속의 땅으로 가려면 이스라엘로 가야 한다는 것도 그것과 비슷한 오해이다. 우리 서양인이 상징을 다룰 때의 주요 문제점들의 하나는 상징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신 관념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상징이다. -116p

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꾸는 것이다.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118p

우리는 자연계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위대한 우주질서가 발견되었을 때 고도의 종교체계는 그것과 조화를 이룬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에는 그것이 반영되어 있다. 하늘의 표상은 위대한 영적 세계의 질서를 드러내는 표상이 되었다. 물론 현재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우주에 로켓을 쏘아 보내고 있고, 인간은 이미 최초의 영적인 빛이었던 달의 표면을 걸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은 영혼과 대지의 분리는 극복되어왔으며, 어떤 점에서 영혼과 대지는 우리가 계승해온 이원론 철학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하나라는 사실이다. -123p

베다는 그런 아리안족의 전통으로부터 생겼다. 베다는 여러 세기 동안 문서화되지 않고 입으로 알려지고 입으로 전해졌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이룬 것은 기원전 1000년 무렵이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 곧 신화와 제의의 단계이다.
그 뒤에 브라만의 책, 곧 브라마나(Brahmana)라고 부르는 일련의 책들이 만들어진다(이것이 큰 전환점을 이룬다). 브라만(Brahman)의 첫 번째 a는 장음 a로서 “어떤 것과 관계가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브라만(Brahman)은 사제이며, 장음 a가 없는 브라만(Brahman)과 관계가 있다. 브라만(Brahman)은 중성 명사로서 “브르르르(brrrr)”, 곧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신성한 에너지이다. 브라만(Brahman)은 신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신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브라만의 의인화이다. 당신도 그러하고, 이 세계도 그러하다. 브라만(Brahman)은 브라만(Brahman)의 에너지와 접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사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브라마나는 몹시 지루한 책들이다. 제사는 어떻게 지내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따위의 희생에 관한 매우 현학적인 논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것은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희생은 신들보다 강하다. 그렇지만 그 희생을 주재하는 것은 누구인가? 브라만(Brahman)이다. 따라서 브라만은 신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은 어떤 신보다도 강하다. 이것이 우주의 위대한 점이며, 브라만은 그런 위대한 존재이다. 이것이 한 가지 핵심이다. -126p

음식을 집어서 입에 넣는 것은 제물을 불 속에 던지는 것이다. 힌두 교도가 말하는 것처럼, 체열이 음식을 요리해준다. 소화기관이 음식을 요리해서 온 몸으로 보내준다. 우리가 제물을 불 속에 던질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세계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며, 그 속으로 무진장한 제물이 던져진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우리는 모두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제물이다. 부처가 최초로 한 설교, 곧 베나레스의 정원에서 한 설교는 불의 가르침(Fire Sermon)이라고 부른다.
감각의 욕망은 타오르는 불이다. 귀로 듣는 것은 타오르는 불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타오르는 불이다. 그 불을 꺼야 한다. 그런데 다른 전통의 관념은 그 불을 더욱더 지피라고 말한다. 생명이라는 신비에 대해서는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있다. 생명은 생명에 의존한다. 새들을 보라. 풀을 뜯는 동물들을 보라. 그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먹는 일뿐이다. 온갖 것들을 죽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스를 섭취한다. 그렇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방도가 없다. 생명이란 끊임없이 타고 있는 불이다. 그 불을 더욱더 지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희생에 대한 일종의 열망이 생긴다. -127p

왜 브라만(Brahman)에게 가는가? 당신은 자기 안에 그것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안으로 향하라. 당신이 공공 장소에서 희생을 바치고 절하기를 바라는 신들은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불이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찬도기아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훌륭한 구절이 있다.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 차례차례로. 그것은 이 법에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는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 이것은 이미 이집트에도 있었던 생각이다 그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기본적인 관념이다.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129p

모든 서양적 전통은 부처가 아니라, 조로아스터에게서 나온다. -130p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 : 불교

스즈키 다이세츠가 쓴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제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스승이 “없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스승께서는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 나무, 나비, 벌, 새, 짐승,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말입니다.” 스승이 말했다. “네 말이 옳다.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 돌, 나무, 나비, 벌, 새, 짐승, 모든 것들에. 하지만 네게는 없다.” “제겐 없다구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네가 그런 걸 묻기 때문이다.” 이런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기 발견을 이루고자 하는 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부처란 합리적인 방식을 털어내고, 그 뜻을 파악한 다음, 그 뜻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136p

부처가 되려면 사람은 부동지(不動地)라고 부르는 “세계의 중심축(axis mundi)”, 곧 우주의 중심에 있는 나무에 다다르게 되면 그 곳에서 좌선에 들어간다. 우주의 중심에 앉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조건이다. 부동지를 발견하려고 부다가야(Buddha-Gaya: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성지. 인도 북동부 비할 주(州)에 있다/역주)로 갈 필요는 없다. 만일 부동지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 이곳에 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욕망과 불안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곳이다. -140p

이것이 불교의 훌륭한 역설이다. 핵심이 되는 말은 “무아(無我, anatman)”이다. 삼라만상에는 자아(自我)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런 초월성의 표현이다. 우리를 타인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관념이다. 그것을 없애라. 두려워하지 말고 상대에게 양보하라. 타자의 먹이가 되라. 그럴 때 당신은 완성자가 된다. 그때의 경지를 극락(極樂, mahasukha)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최선의 교훈, 최고의 규칙일까? 최고의 규칙은 벗들과 즐겁게 지내고,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다. 당신의 놀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그 놀이, 이생의 놀이에 참여하라. 이것이 바로 극락, 곧 마하수카이다. 파티를 열지 않으시렵니까? 파티는 존재를 자각하기 위한 제의이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위대한 불교이다.
보살이란 초월성을 자각한 사람이 현실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기에 하늘에서 내려와 십자가형을 받는, 스스로 나서서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의 사상이다. 그리스도의 호소는 무엇일까? -145p

그리스도는 만일 세상이 비참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기꺼이 참여하라고 호소한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부처와 똑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는 훌륭한 대화가 생긴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한 원소적 관념이 두 개의 민속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부처가 당신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렇다. “네가 그것이다.”(우주의 근본 원리인 범(梵)과 개인의 중심인 아(俄)의 본체가 궁극적으로 동일하다는 우파니샤드의 중심적 사상을 요약한 말. “그것”은 “불성을 자각하여 보살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역주) 그리스도의 호소는 무엇일까? 기쁨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 불안해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환희이다. 그것이 거기에 담긴 뜻이다. -146p

당신의 미래의 모습은 단지 지금 이 세상의 당신의 성격과 존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148p

불교는 어디로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는 곳마다 참으로 간단하게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건한 불교의 특징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신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드러내는 데에 참여했다. -154p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요가(yoga)는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과 “묶다, 결합하다(yoke)”라는 뜻을 가진 유즈(yuji)라는 어근(語根)에서 유래한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양사상에 적합한 말로 표현한다면, 신들은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 모든 생명, 당신의 생명, 세계의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의 의인화이다. 의인화가 어떤 특징을 가지는 가는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결정된다. 의인화는 민속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에너지는 인간적인 것이다. 신들은 에너지로부터 태어난다. 신들은 말하자면 다양한 에너지로부터 태어난다. 신들은 말하자면 다양한 에너지의 심부름꾼이자 매개물이다. -115p

당신이 “신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와 여럿은 개념이다. 그것들은 사고의 범주들이다. 그리고 신이라는 말은 본래 하나의 인격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을 넘어서는 것, 실제로 사고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적인 상징은 초월성에의 길을 열어준다.
융은 상징(symbol)이라는 말과 기호(sign)라는 말을 구별했다. 이것은 융이 임의로 사용한 정의이다. 상징이란 본디 신화적인 상징인데, 그 한쪽 발은 이곳에 놓여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무한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초월성을 향하고 있다. 기호는 이곳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서양에서의 통상적인 해석에 따르면, 신은 상징이 아니라 기호이다. 신이라는 말은 하나의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여기서 영지주의 시대로부터 인용하고자 한다. “야훼의 문제는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야훼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이다! 나는 상징이 아니다.” 물론 야훼가 유일한 신이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신은 신이 아니게 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이미지를 구체화하거나 상징을 구상화하는 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종교 전체가 우상숭배 체계이다.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우상숭배를 찾아내어 파괴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저 즉흥적으로 해본 말이다. -158p

요가의 목표는 정신을 정지시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할까?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영구불변의 철학의 기본 이념, 곧 모든 것을 정신적을 통해서 경험된다는 이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마야이다. 정신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바람에 잔물결이 일렁이는 연못을 연상시킨다. 잔물결이 일렁이는 연못은 일그러진 상을 비춘다. 상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바람, 숨, 기운이 수면 위에 휘돌았다. 그것이 세계의 창조이다. 이제 흥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요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자신을 그런 일그러진 상들의 하나, 곧 연못의 수면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친 상의 하나와 동일시 한다. 나는 나타난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것이 우리를 시간의 흐름, 시간과 공간 – 마야 – 에 결합시킨다. 연못을 정지시키고, 상을 하나로 만들라. 일그러져 비쳤던 것이 이제 완전한 정지 상태에서 보인다. 그것이 당신의 참된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모든 사람의 실재이기도 하다.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한 의식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요가의 목표이다. -160p

이 세상에는 상징의 정신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징을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엉뚱한 속물적인 행동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꿔 말하면 이런 것이다. 정신적인 상징을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는 현실의 육체와 관련을 가지는 현실의 행위에 열중하게 되고 정신적인 내용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들이 하나의 의식이 가진 두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당신은 쿤달리니를 중심에까지 끌어올릴 수 없다. 달빛은 햇빛이 반사된 것이다. 당신의 육체의 빛, 당신의 육체의 의식은 당신의 내면에 있는 불멸의 의식의 반영이다. 의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당신이 있다. 당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활동하는 의식의 표현이다. 당신은 개인적 생명이라는 특정한 것을 통해서 불멸의 것을 끌어낸다. 유한한 자기 존재의 변천 속에서 자기의 영원성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목적의 전부이다. -170p

기독교는 환명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생겼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에 걸쳐서 모든 유태 민족은 세계의 종말이 온다며 흥분했다. “사해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구약성서 본문의 오래된 사본을 포함하는 중요한 자료. 1947년 사해 부근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역주)는 그것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종말이 온다. 기독교는 그런 생각에서 생겼다. 그때부터 기독교도는 1,000년마다 세계가 또다시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000년에 프랑스에서는 세계의 종말 직전에 점수를 따려고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자손 중의 일부는 오늘날 그 토지의 반환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제 2000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다시 땅을 헌납할 때가 온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원자폭탄과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 명상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에서 환멸의 명상에 잠기는 것은 1,000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현상이다. -179p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

인생의 활동 속에서 신성한 것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힌두교, 탄트라교, 불교의 훌륭한 점이다.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종교생활은 지금, 이곳에 있다. 이것이 바로 T.S. 엘리엇이 『칵테일 파티』에서 구체화하려고 했던 사상, 곧 제의(祭儀)요 관계이다. 도(道)는 관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서 실현된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이기도 하다. -189p

우리의 최고의 신은 우리의 가장 큰 장애이다. 그것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사상과 감정의 완성을 상징한다. 당신은 그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인 헤어짐은 신(곧 원소적 관념)을 위해서 신(곧 민족적인 형태의 신)과 헤어지는 것이다.” 이 초월은 매우 어렵다. 그녀(칼리 여신/역주)의 손에는 세계의 창조자인 브라마의 머리가 쥐어져 있다. 우리는 창조된 세계와 그것의 모든 가치들을 초월한다. -200p

부처는 심장의 중심에서 기능한다. 에너지는 심장의 중심에서 나온다. 부처가 유혹자에게 “아니다” 하고 말할 때, 그의 손은 땅에 닿아 있다. 그러나 경험해야 할 것은 다 경험한 뒤, 부처의 손은 한 바퀴를 돌아서 은혜를 베푼다. 따라서 부처는 은혜를 베풀려고 되돌아온다. 고행에서 돌아와서 중생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주의 지배자가 자기를 낮추어 우주로서의 자신, 여신으로서의 자신을 포옹한다(실제로 부처가 어린 부처를 안고 있는 상이 있다/역주). 그것이 쿤달리니의 교훈이다. -204p

천상계로의 하강 : 『티베트 사자의 서』

가장 세련된 밀교 형태의 불교가 보존되었다.
그런데 죽음과 삶의 신화는 곧 환생의 신화이다. 동양의 환생은 서양의 연옥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재생의 기회, 당신이 광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기회이다. 내가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연옥은 대학원 과정이다. 만일 당신이 광명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면, 아직 어둠 속에 있는 당신의 모든 것을 분쇄하는 지복의 직관을 볼 준비가 안 된 채로 죽는다면, 연옥에서 죄를 씻게 된다. -205p

그런데 동양에서는 당신은 또 다른 생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죽음의 순간부터 두 번째 수태까지는 7일의 일곱 배인 49일이 걸린다. 그 사이에 당신은 앞 장에서 소개한 차크라의 모든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방향은 거꾸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죽음의 순간에 당신은 눈부신 빛을 체험한다. 당신은 그것을 견딜 수 있는가? 자신을 해체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곧장 끌어당김이 있게 되며, 그것에 의해서 하강이 시작된다.
임종을 맞는 사람의 가족은 라마승 또는 일반 승려, 대개는 가족이 평소에 영적인 가르침을 받던 구루나 스승을 불러온다. 그는 죽음을 앞둔 이에게 파리니르바나(parinirvana), 곧 부처가 열반에 들었을 때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사자(獅子)가 누워 있는 자세이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이의 경정맥(頸靜脈)에 손을 얹어서, 즉 맥을 짚어 정확한 사망 시각을 알아낸다. 그런 다음에 가르침을 시작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죽은 사람에게 영혼이 더듬어가는 여행을 가르쳐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사람은 한 순간에 완전히 죽는가? 신경이 죽어가는 시간이 있지 앟은가? 분명히 육체는 한 순간에 죽지 않는다. 그래서 생전에 스승이었던 분의 냉정한 목소리가 꺼져가는 정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은 정신을 가다듬어 사후의 여행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겼다.
둘째,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생활에서 겪게 되는 중요한 경험들 가운데 하나인 직접적이고 강렬한 경험에 직면하여 죽음의 경험과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서 라마승은 단지 곁에 앉아서 “그는 생전에 이런 분이셨다”는 둥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가 가족을 위한 명상의 순간이 되게 한다. -206p

수피교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만수르 알- 할라즈는 고문을 받고 예수처럼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오 주여, 만일 당신이 제게 계시하셨던 것을 그들에게도 계시하셨더라면 그들이 제게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께서 하신 일을 제게 계시하지 않으셨더라면 이런 결과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 주여, 당신과 당신의 과업을 찬미하옵니다.” 이것은 굉장한 표현이다. 할라즈는 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통파 교단의 임무는 신비적인 욕구를 불어넣는 데에 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 영웅적인 – 사고방식이다. -223p

나는 독서와 경전의 신인 판카크사라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것이 나의 이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독서에서 얻었다. 나는 불교도나 요가 수행자를 만날 때면 나의 독서에 의해서 그들을 이해한다. 나는 부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할 때도 부처보다도 이 이담을 앞세운다. 그것이 나를 떠받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신, 곧 이스타데바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신에게 충실하라. 그것이 당신의 길이다. 당신의 신이 어떤 신이건 간에 그 신을 통해서 부처의 전세계가 당신의 지식이 될 것이다. -226p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내 생각으로는 사도 바울로가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도중에 얻은 위대한 통찰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세주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시비 종교의 이해를 빌려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순수하게 물질적으로 동물적인 한 존재가 죽고, 영적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기독교 용어에서 이것은 옛 아담이 새 아담으로 바뀌었다는 말로 상징된다.
그래서 ‘오, 행복한 잘못(O felix culpa :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말로 알려져 있다./역주)” – 원 죄 – 이라서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인간이 에덴 동산의 영원한 기쁨으로부터 시간의 영역으로 타락한 뒤에 승화 – 낙원이 나타내는 것보다 더 높은 인류의식의 표현 – 를 나타내는 구세주가 찾아왔다. 즉 타락이 없어졌다며 구세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생겼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실제로 그리스 신비주의자들이 신비적 언어로 말해봤던 것이다 – 230p

명상이란 우리는 신성한 실체를 먹고 있으며 우리를 길러주는 것은 그 신성한 실체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어떤 초월적인 힘이 주어지거나 산출됨으로써 유지된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어떤 제의를 행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미 제의를 행하고 있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을 뿐이다. 밥 먹는 일도 제의이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라. 벗들과 의논하는 일도 제의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자식을 낳는 일 –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235p
신비적으로 해석하라.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신비적으로 해석하라. 그러면 이 모든 전통들은 위대한, 참으로 위대한 진실, 즉 우리는 영원한 힘과 한 몸이지만 만일 자신을 속박하는 불안과 욕망의 세계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일체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250p

어릴 적에 당신에게 불어넣어진 종교적 전통은 지금도 그곳에 존재한다. 현대 과학으로 그것들을 해석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천국에 오르는 것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천국의 존재를 가정할 수도 없다. 천국 따위는 없는 것이다. 설령 주검이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아직 은하계를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가정과 상승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배웠다. 그런 해석은 상직이 참뜻을 놓치고 있다. 우리가 그런 상징들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세속적인 깨달음과 영적인 깨달음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251p

길(道)은 없다 :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동양의 구루(guru)를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길(道)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길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알고 있다. 어떤 도사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상황을 당신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따라서 당신은 직접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서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유럽과 동양의 다른 점이다. -259p

궁정연애의 온전한 의미는 사랑의 아픔에 있었다. 가슴속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을 품고 있지 않다면 궁정연애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이다. 부처는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살아 있음의 고통의 경험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인생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찾으라. -261p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

우리 안에 있는 신은 율법을 주지만 그것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신은 어디까지나 우리 안에 있는 신이다. -319p

역자 후기

그 무렵부터 캠벨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으며 귀국 후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공언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미국 사회이지만,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가 “나는 이미 기독교도가 아니다” 라고 성직자에게 고해하는 것은 배교로 간주되었고 친척이나 사회에 대한 오만불손한 도전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그의 행동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캠벨은 기독교가 설교하는 자연정복 사상과 배타성(선민사상이나 교파간의 교의 대립 등)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화적인 상징을 사실처럼 다루는 것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품었고, 그것에 대신되어야 할 것을 인디언 신화나 불교 사상에서 발견했다. 그는 “토마 복음서”에 큰 공감을 느껴 단테 등 많은 마음의 여행자를 찬양하고 일부 카톨릭 수도사들의 생활방식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년에 이르러서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에서 그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만년에는 자택 서재에 달마대사 초상을 걸어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신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며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통하여 내면을 향한 끝없는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설사 자신의 신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은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 -323p

그의 이러한 경고는 그의 엄격하고 철저한 연구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성적, 과학적 언어로써 반과학적인 종교적 교의를 거부하고 신화를 객관적인 사실과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언어이기도 하다. -324p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미국의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강연집으로서 미국의 공공방송(PBS)이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각지에서 행한 캠벨의 강연을 녹화해서 텔레비전으로 방영한 뒤, 1990년에 하파 & 로 출판에서 간행한 것이다.” <신화의 세계> 역자 후기 321p

역자 후기를 보면서 잠시 혼란스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전에 읽었던 <신화의 힘>의 경우 모비어스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책은 강연이나 대화의 느낌을 거의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 측면에서도 저자의 결론이 없다는 사실은 읽는 도중 자신을 당황케 하였고, 각 신화와 종교사상을 나열의 형태로 설명하고 전개했다는 점에서도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저자의 의도라기보다는 편집자의 의도가 더욱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신화의 세계>는 대담 형태로 이루어진 <신화의 힘>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는 것이다. 전작 <신화의 힘>이 흥미롭게 읽을 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 뒤엉켜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번 책은 나열식의 진행이었지만 그나마 단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전의 책이 어려운 사상에 대한 세밀한 설명과 이해가 없었다고 한다면, <신화의 세계>는 일정부분 각 신화와 그에 대한 종교적 사상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책은 서론을 필두로 하여 아메리카 인디언, 신석기의 여신들, 이집트,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불교, 힌두교, 티베트불교, 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 아서왕,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치팔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신화들이 왜 위와 같은 순서대로 배열하였는지에 대한 저자(편집자)의 의도를 찾아볼 수 없다. 아메리카 인디언 사상이 왜 책의 첫 화두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불교와 티베트 불교, 영구불변의 동양철학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공통분모가 많음에도 왜 각기 나열했는지 궁금했다. 그 밖에 불교사상과 아서 왕 전설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그 깊이와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대상임에도 대등한 위치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다.

만약 이러한 신화사상들을 일반적인 나열식이 아닌, 종교학적인 측면에서 분류해서 언급하였다면 더욱더 체계적이고 명쾌하게 이해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들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상은 종교학적 측면에서 범신론(汎神論)에 해당한다. 나아가서는 범재신론(汎在神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범재신론과 그 사상의 계를 함께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노장사상, 기독교의 도마복음서, 이슬람의 수피즘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상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이야기를 한묶음으로 함께 서술하였다면 각 신화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저자의 사상도 이 신비주의와 그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집필한 책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지적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사상은 접하면 접할수록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단순히 강단에서 머무는, 책 속에서만 회자되는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신화이야기를 통해 인류가 지향하고 걸어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종교적 신성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요란하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 뿐이지, 그만의 방식으로 그만의 언어로 기존의 모든 편견과 관념들을 버릴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신화(神話)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이 세상을 조금은 더 아름답게 만들기를 희망하고 있다.

"당신은 자기 안에 그것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안으로 향하라. 당신이 공공 장소에서 희생을 바치고 절하기를 바라는 신들은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불이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129p

신(神)에 대한 너무도 멋진 '정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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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4.08 11:19:41 *.122.143.151
신은 '거대한 바위(巨岩)'속에도 있고, 노래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스텝속에도있다. 또한 양푼비빔밥의 눌려진 상추 속에도 있고, 말통으로 남았던 누룩 술의 향내에도 있다. 이 글을 눈 비비며 쓰고 있었을 거암님의 눈동자 속에도 있었을 것이다.

빨리 신 찾아서 놀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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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08 11:45:04 *.244.220.254
수더분한 외모와 상반되게 표현은 멋떨어지게 하시네요. 감탄!!
(오해하지 마세요. 미남이십니다 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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