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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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7일 21시 09분 등록
안녕하세요.
2006년 3월 즈음 이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본형 어르신의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라는 책을 보고 알게 되었지요.
너무 재미있는 곳입니다.

누군가, 이곳을 놀이터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글을 읽으며 저는, 방그레 웃곤 고개를 끄덕입니다. 학창시절, 저의 집은 오래 된 아파트였습니다. 집 앞에는 작은 공터와 시소, 그네, 철봉 따위의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꼬마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흙장난을 하고, 좀더 큰 아이들은 돈-까스나 오징어, 망까기, 12345를 하는 그런 곳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그곳으로 전학을 갔는데, 한동안은 제 방 창문에 기대어 구경만 했습니다. 구경만으로도 재미있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저도 개구쟁이들 중의 하나가 되어 뛰어다니고 있었지요. 모든 것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창가에 기댄 모습보다는 소리치며 뛰어다니던 모습이 더욱 신이 납니다.

벌써 2년. 그 동안, 구경만 했습니다. 어떤 때는 매일 들어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몇 주씩 안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늘 상 잊혀지지 않고 찾아지는 신비로운 곳입니다. 이곳은.

오늘은 저도 한 번 놀아보려구요. 애들처럼 소심하게 끼워달란 말 못하고 창가에만 기대었었는데, 이젠 안되겠네요. 오늘은 용기를 내서 놀이터로 나왔습니다. 게다가 이젠 소리까지 지릅니다.

“야! 나도 시켜줘!”




연구원이 아니어도 연구원 과제 하면서 놀아도 되지요? 한 달에 한 두 번씩이라도 꼭 놀러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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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세계

조지프 캠벨 / 과학세대 옮김




1. 작가에 대하여
세계 최고 권위의 신화 학자!
대학 교수
십 수권의 책을 쓰고 편집한 작가
재즈 밴드 색스폰 연주자!
0.5마일 레이스에서 뉴욕시 기록을 깬 육상 선수!!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감명 깊은 연사!
방송인(?)
뛰어난 무용수이자 안무가의 남편!

그를 소개하는 문구들이다. 싱거운 인물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를 읽으며 고리타분한 현학의 학자를 그려두었었는데, 찍찍 긋고 새로 해 넣어야 할 판이다. 젊은 날의 그는 매우 잘생겼다. 내 고정관념은 그의 사진 어디에서도 학자스러움을 찾을 수 없었다.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눈을 치켜 뜨고 살짝 입 꼬리를 올리는 것이, 50년대 헐리우드 배우들의 로망까지 묻어난다. 40줄에 접어든 그의 모습은 제법 학자의 향이 난다마는, 노년의 사진 역시 재미있지 않은가? 거기서 그는, 영락없이 유쾌한 코미디 배우다.





그는 대략 이런 인생을 살았다. 전형적인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지극히 평범한 유년기를 보내고, 대학에 진학한다. 그의 첫 전공이 생물학과 수학이었던 것으로 봐서, 그가 10살 때부터 인디언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분야의 책들을 섭렵했었다는 이야기는, 조금은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이후 그는 전공을 문학과 비교문학으로 바꾸었는데, 바로 이 시기에 밴드활동과 육상을 병행했다. 0.5마일 레이스에서 뉴욕시의 기록을 깬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젊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콜롬비아 대학, 소르본 대학, 뮌헨 대학에서 영문학, 비교문학, 로망스어, 중세 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산스크리스트어 및 인도•유럽 어족의 언어들을 전공했고, 석사 학위 주제는 아서 왕 전설이었다. 괴테, 토마스 만, 프로이트, 융, 슈펭글러, 조이스, 제임스 프레이져 등에 심취했으며, 1934년부터는, 새러 로랜스 Sarah Lawrence 대학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38년간 가르쳤다. 신화학 분야의 방대한 원고와 책을 남겼으며, 강단에서는 문학, 독일철학, 비교 신화학을 가르쳤다.

1938년, 새러 로랜스의 3학년 생이던 진 애드먼 Jean Edman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후에 유명한 근대 무용수(modern dancer)이자, 영향력 있는 안무가가 된다. 은퇴 한 1972년부터는 매년 2개월 간의 강연여행으로 세계를 다녔고, 1985년에는 National Arts Club Gold Medal of Honor in Literature를 받았다. (번역하면, ‘국제 예술회 문학부문 명예훈장’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2년 뒤, 1987년 10월 30일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가 읽은 ‘책’과 그가 만난 ‘사람’이라 했던가? (책은 굳이 사양하더라도) 여기 그가 만났던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조셉 캠벨이란 (특히 동양의 종교사상에 능했던) 신화학자를 소개하는데 있어 도움을 줄 법하여 보탠다.

하나는 인도의 종교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1924년, 유럽여행을 떠나는 선상에서 캠밸은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난다. 당시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 협회(Theosophical Society)의 젊은 구세주로 추앙 받고 있었는데, 그와 친구가 되면서 캠벨 역시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의 동양학 편력(遍歷)은 이때부터이다.

하나는 그(캠벨)의 책에서 이따금 ‘존경하는 나의 친구’로 소개되고 있는 하인리히 짐머 Heinrich Zimmer. 1940년, 캠벨은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 교수였던 짐머를 소개받는다. 짐머는 캠벨의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캠벨이 평생 몸담았던, 볼링겐 시리즈 Bollingen Series를 소개한 것도 짐머였다. (볼링겐 시리즈는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문화적인 시도를 하기 위한 재단이다) 이들의 우정은 1943년 짐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캠벨이 짐머에게 가장 크게 고무되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가 아닌가 한다. 짐머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학 저작 4편을 미완성인 채로 남겼는데, 바로 캠벨이 그들을 완성했던 것이다. 캠벨이 마무리한 짐머의 유작 4편은 다음과 같다.

Myths and Symbols in Indian Art and Civilization (Bollingen Series 6: 1946)
The King and the Corpse (Bollingen Series 11: 1948)
Philosophies of India (Bollingen Series 26: 1951)
The Art of Indian Asia (Bollingen Seires 39: 1955)

그를 선전하는 문구들 중에 유독 눈에 띄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소년시대부터 83세에 죽을 때까지 세계의 종교와 신화를 연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음”

그는 과연 삶의 실마리를 찾았을까?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론: 인간과 신화의 기원
천둥소리는 인간의 힘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이다. [9]
자연의 신비란 생명을 죽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다. 달리 살아갈 방법은 없다. [16]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로부터 태어나고,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우리가 써야 하는 가면은 사회가 씌워준 것이다. 예이츠는 이것을 원초적 가면(primary mask)이라고 부른다. [33]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나는 의식인가, 아니면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나는 빛, 태양의 빛을 나르는 육체인가, 아니면 빛 그 자체인가? [34]
모든 생명은 신비로운 생명에 의해서 유지된다.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당신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되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생명이다. [41]
신화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실제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그 그림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만일 당신이 “저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화가가 대답해준다면, 그것은 당신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신화는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신화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확대했다면 신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먼저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59]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 신석기 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실제로 신들도 두 종류가 있었다. 우주와 우리 자신들 속에 작용하고 있는 다양한 자연의 힘을 대표하는 신들과, 부족의 특정한 수호자로서의 신들이다. [67]
생활양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단일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 (…)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러한 자각이 붕괴 (…) 초기 문화가 안고 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회조직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72]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구약성서의 신화만큼 음울한 것은 없다. [77]

4) 파라오의 지배: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배타주의와 부족주의 (…)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며, 다른 신들은 악마들이다. 이 세상에는 이스라엘에만 신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서양의 전통 속에서 계승해온 종교이다. [88]
야훼 신앙의 일신교는 “이 세상에는 야훼 이외의 신은 없다. 다른 신들은 모두 악마이다”라고 말한다. [101]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를 건넜다는 흥미로운 문제에 부딪힌다. 이것을 어떤 종류의 정신적 상징, 신화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사실로 보아야 할까? (…) 물 속을 지나는 것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신화적인 주제이다. [108]
“15분 전에 선생님은 페니키아인들이 그들의 장남을 죽였다고 해서 그들을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장남에게 같은 짓을 했는데도 그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답을 듣고 싶습니다.” 부버 박사는 말했다. “그 답은 ‘우리(We)’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내가 들은 답은 그것뿐이었다. [110]

5) 성스러운 원천: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세계의 신화와 종교체계를 조사한 바스티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것을 ‘원소적 관념(Elementary Ideas)’이라고 불렀다. [113]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 (…)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희생은 신들보다 강하다. [126]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 차례차례로. 그것은 이 법에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는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 [129]
죽여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때 비로소,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 [133]

6)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 불교
불교 예술의 최초의 수세기 동안에는 결코 부처 자신이 그려진 적은 없었다. 부처는 이미 그 육체로부터 해탈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500년 뒤에 불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최초의 불교와는 다른 불교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135]
스즈키 다이세츠가 쓴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제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스승이
“없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스승께서는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 나무, 나비, 벌, 새, 짐승,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말입니다.”
스승이 말했다.
“네 말이 옳다.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 돌, 나무, 나비, 벌, 새, 짐승, 모든 것들에. 하지만 네게는 없다.”
“제겐 없다구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네가 그런걸 묻기 때문이다.”
이런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기 발견을 이루고자 하는 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부처란 합리적인 방식을 털어내고, 그 뜻을 파악한 다음, 그 뜻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136]
그때 떠오른 첫 생각은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에 관한 첫 번째 사실이다. (…) “내가 가르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 불교에 이르는 길이오” (…) [142]
침머가 말했다. “우리가 불교를, 곧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 작은 나룻배와 큰 나룻배 – 를 이해하고 싶다면 나룻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우리는 맨하튼에 있다. (…) 강 건너편에는 가든 세테이트라고 부르는 뉴저지 주가 있다. (…) 맨하튼 생활에는 이미 넌더리가 난 생태다. (…) 우리는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꼭 그곳(뉴저지)에 가보고 싶다고 동경한다. (…) 건너편에서 나룻배가 와서 우리의 발치에 정박한다. (…)
“가든 스테이트의 저지로 가실 분 없나요?” 하고 묻는다.
당신은 재빨리
“제발 저지로 데려다 주세요” 하고 말한다.
그러자 나룻배 사공이 말한다.
“잘 들어보세요.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답니다. 이 배는 편도만 운항합니다. 당신의 가족, 당신의 이상, 당신의 돈, 당신의 미래, 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요?”
당신은 말한다.
“이곳 생활에는 이미 넌더리가 난 상태입니다.”
그러자 사공이 말한다.
“그럼 타세요.”
이것이 작은 나룻배인데,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실제로 기꺼이 버리는 사람만이 탈 수 있다. (…) 여기에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금욕과 현세 부정의 사상이 있다. 그래서 작은 나룻배라고 하는 것이다. (…)
배가 움직인다. (…) 결국 당신은 철썩철썩 뱃전을 치는 물소리를 좋아하게 된다. 새로운 말도 깨치게 된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라는 말 대신에 ‘좌현’이나 ‘우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 지금도 건너기 전과 마찬가지로 저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맨하튼의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 배 위에서 (…) 생활은 청결하고 소박하다. (…) 두세 번 환생을 되풀이한 뒤 (당신은 참으로 짧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 매우 긴 여행이었다), 배는 마침내 저지에 도착한다. (…) 겨우 도달했다. 이것이 환희라는 것이다. 당신은 상륙한다. 그곳은 별세계이다. (…) 여기까지가 소승이다.
맨하튼을 떠나 저지로 간다. 비참한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떠나 열반이라는 해방의 세계로 간다. 뉴저지에 도착하여 맨하튼을 뒤돌아본다. 당신은 지금 비이원성의 세계, 모든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 있다. 그러나 건너편에 맨하튼은 없다. 중간에 허드슨 강도 없다. 나룻배도 없다. 사공도 없다. 그렇다. 모든 것이 그렇다. 당신은 이원성을 초월하며, 그래서 깨닫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견해가 바뀐 것이다. (…) 보라! 지금, 여기, 그대의 몸에 후광이 비친다! 그렇다. 다양성은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통일성에 불과하다. 그것이 대승이다. (…)
이것이 불교의 훌륭한 역설이다. 핵심이 되는 말은 “무아”이다. 삼라만상에는 자아가 없다. (…) 우리를 타인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관념이다. 그것을 없애라. 두려워하지 말고 상대에게 양보하라. 타자의 먹이가 되라. 그럴 때 당신은 완성자가 된다. 그때의 경지를 극락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최선의 교훈, 최고의 규칙일까? 최고의 규칙은 벗들과 즐겁게 지내고,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다. 당신의 놀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그 놀이, 인생의 놀이에 참여하라. 이것이 바로 극락, 곧 마하수카이다. [143 – 145]
BC 500년: 부처, 공자, 노자, 다리우스 1세, 피타고라스[150]
불교는 어디로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는 곳마다 참으로 간단하게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건한 불교의 특징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신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드러내는 데에 참여한다. [154]

7) 이드에서 자아로: 쿤달리니 요가(1)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힌 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 우리의 모든 경험은 지식의 기관, 경험의 기관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경험보다도 앞서는 선험적인(priori) 것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이다. <형이상학의 기초>라는 훌륭한 책에서 칸트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공간에서 사물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으며, 같은 관계가 다른 공간에서도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어서 그는 대답한다. “그것은 공간의 법칙들이 이미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157]
칸트는 이것을 “초월적인 미학”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모든 것들을 본 뒤에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사고의 법칙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 예를 들자면, 논리법칙과 범주가 있다. 그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얽매여 있다. 이것이 바로 마야(maya: 진정한 실재에 대립되는 허깨비)이다. (…)
당신이 “신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와 여럿은 개념이다. 그것들은 사고의 범주들이다. 그리고 신이라는 말은 본래 하나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을 넘어서는 것, 실제로 사고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적인 상징은 초월성에의 길을 열어준다. [157 – 158]
“요가란 정신의 자연발생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이다.” (…)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마음속에 가만히 정지시켜두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런데 4-5초도 못 되어 갖가지 연상이 떠오른다. 정신은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요가의 목표는 정신을 정지시키는 데에 있다. [159]
(…) 그것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그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경험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62]
정서, 감정 그리고 정신상태는 모두 호흡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 [162]

8)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쿤달리니 요가(2)
사랑에는 다섯 가지 형태가 있다.
처음의, 가장 낮은, 가장 단순한 사랑은 주로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사랑이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간의 사랑, 특히 주인에 대한 노예의 사랑이다. (신을 향한 사랑)
사랑의 두 번째 형태는 친구들간의 사랑이다. (…) 서로 친밀하며, 무엇이든 물을 수 있으며,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다.
사랑의 세 번째 형태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다. 여기서 숭배의 대상은 아기이다.
사랑의 네 번째 형태는 배우자끼리의 만남, 결혼이다.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적극적인, 금지된, 세상의 관습을 무시한 사랑이며 초월계의 돌파구를 여는 사랑이다. 그것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돕는 경험과 비슷하다. 정열과 충동이 너무나 강렬하여 세계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188]
한 여성이 라마크리슈나(1834 – 1886. 인도의 신비주의 종교가, 힌두교의 개혁자)에게 찾아와서 말했다.
“저는 도저히 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신이라는 개념은 제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답니다.”
라마크리슈나가 물었다.
“이 세상에 당신이 사랑하는 게 아무것도 없나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있지요. 제 어린 조카를 사랑합니다.”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거기에 신이 계십니다.” [189]
민중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강, 부, 자식이다. 신의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따라서 그것이 하나뿐인 종교,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민중종교이며, 신의 이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승려와 사제의 직무,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사원에 맡겨진 과업은 그들의 신의 이름을 그것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미친 듯이 돈이 쏟아진다. [194]
노자나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203]

9) 천상계로의 하강: [티베트 사자의 서]
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을 섬기는 부처 (…) 아미타불의 특성은 자비, 자애이다. 그럼 그의 악덕은 무엇인가? 집착,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집착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집착의 마음을 가진 채로 죽는다면 아귀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 아귀(餓鬼)들은 탐욕스러운 위를 가지고 있으나 바늘 끝처럼 작은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결코 먹을 수 없다. [217]
불교로 개종한 뒤 다른 모든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한 여인이 있다. 개종자라면 누구나 그런 것처럼, 그녀도 약간의 불안을 느꼈고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을 개종시킴으로써 자신을 안심시키고자 했다. 설득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가죽을 벗겼다. 그녀의 이름은 라모이다. 그녀가 개종시키는 데에 실패해서 처음으로 가죽을 벗긴 인간은 자기 아들이었다. [221]
수피교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만수르 알-할라즈는 (…)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통파 교단의 임무는 신비적인 욕구를 불어넣는 데에 있다.” [223]

10) 어둠에서 광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327년에 로마 제국이 공인하는 종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 – 그러나 단지 이 비잔틴 황제가 실천한 특수한 형태의 기독교 – 를 로마 제국이 공인하는 유일한 종교라고 선언했다. 그때부터 폭력적인 박해와 신전 파괴가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다. 신성한 신전일수록 파괴는 더욱 심했다. 395년에 일어난 엘레우시스의 파괴가 그 좋은 예이다. [229]
뮤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문예, 미술, 과학을 맡은 여신 [248]

11) 길은 없었다: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서양문화의 대 단계
첫 번째: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더불어 시작된 그리스 로마 시대
두 번째: 1150년에서 1250년대 사이의 아서 왕과 성배 시기 [255]
“그들은 성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떼를 지어 가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동양적 전통을 상징하는 집단심리와 비교해보라. “그들은 떼를 지어 가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가장 어둡고 길이 나 있지 않은 지점을 골라 숲으로 들어갔다.” [259]
이교도의 신들은 악마이기 때문에 신의 이름으로 절멸시켜야 한다 ―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거부하는 태도는 3세기, 4세기, 5세기에 유럽에서 활동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보여준 잔인함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266]

12) 고상한 마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지로 드 보르네일이라는 트루바두르가 가장 그럴 듯한 공식을 내놓았다.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따라서 눈이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만일 그 마음이 상냥한 마음(정욕을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라 애정을 일으키는 마음)이라면, 그때 사랑이 생긴다.” [281]
무엇이 사랑을 위협하는가? 명예이다. 따라서 중세의 전통에서는 명예와 사랑 사이에 갈등이 나타난다. 고상한 마음을 얻기 위한 궁극적인 희생은 사랑을 위하여 명예를 희생하는 것이다. [281]
이 무렵에는 사랑의 법정이 있었다. 귀부인들이 재판관이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유명한 사례가 있었다. 한 신사가 한 숙녀에게 자기를 연인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곤란해요. 제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만일 제가 그를 버리거나 그가 죽는다면, 그땐 당신을 택하겠어요.”
그런데 남편이 죽자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자 앞의 남자가 찾아와서 말한다.
“이번에는 내 차례요.”
여자는 말한다.
“당치도 않아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거예요.”
남자가 말한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거요. 이 세상에 결혼한 사람들간의 사랑 따위는 있을 수 없소.”
그래서 그는 법정에 호소했다. 법정은 결혼한 사람들간의 사랑은 형용모순이며 그가 다음 후보였다고 판결했다. [282]
“여성의 기질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존재한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친구)하인리히 침머는 이렇게 말했다. “시련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인내하라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 오직 참고 견뎌라. 그러면 아름다운 여성의 자비가 모두 당신의 것이 되리라. [287]
렌슬롯, 그는 귀네비어의 큰 기쁨과 감사를 기대하고 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얼음같이 차갑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짐마차에 타기 전에 세 걸음을 걷는 동안 머뭇거렸기 때문이다. [288]
르 잘루(le jaloux), 곧 단순히 ‘질투하는 사내’ ― 흔해빠진 남편이다. [292]
죽어 마땅한 죄란 진지하게 고민하고 심사 숙고한 끝에 자발적으로 지은 죄의 경우에 해당한다. [294]
중세 유럽에서 결혼은 집안간에 결정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귀족사회는 이것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주제를 찬미했던 것이다. [298]

13) 성배를 찾아서: 파르치팔 전설
루시퍼는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이슬람 시아파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루시퍼는 신 이외의 어떤 자도 섬길 수 없었다. 따라서 지옥의 사탄이 신을 가장 깊이 경배하는 자이다. [302]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았다는 이유로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302]





3. 독후감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로부터 태어나고,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우리가 써야 하는 가면은 사회가 씌워준 것이다.” [33]

저자가 2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예이츠의 ‘원초적 가면(primary mask)’이란 개념이다. 그는 극복해야 할 사회의 구속에 대해 각인이라고 쓰고 있다. “개인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발견하게 되면, 이른바 원초적 가면의 억압(각인)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말이다.

이어지는 내용이 핵심이다. 개인이 사회의 각인을 인식하고 적대하는 지점, (본문에서는 달의 빛과 태양의 빛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비유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라는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 <신화의 세계>가 전하려는 바는 여기서부터다.

예이츠의 구절을 캠벨 식으로 바꾸어보자. 저자가 몇 번이고 신비롭게! 신비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화’가 바로, 위에서 말한 초월적 신비의 ‘근원’이다. 역자는 캠벨 식으로 신화를 바라보는 것의 어떠함에 대해 이렇게 거들고 있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어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이라는 대목에서 ‘사회’는 ‘문화’라고 바꾸어 쓸 수 있겠다. ‘문화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 이렇게 말이다. 캠벨은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생활양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단일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 (…) 초기 문화가 안고 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회조직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72]

여기까지 너무 관념적인가? 그렇다. 지금 여러분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진 말라. 군데군데 깃발이 꽂혀질 것이고, 이따금 비유•대조•분류 따위의 등불이 켜질 것이다. 나도 그대와 함께 간다. 조금만 집중해보자.

여기 첫 번째 깃발이다. 지금쯤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는 ‘신화’로, ‘사회의 각인’은 ‘문화’로 적당히 버무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캠벨을 읽고 있고, 그게 캠벨 식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제문장’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신화로부터 태어나고, 자라면서 문화라는 사회의 틀에 갇히게 된다. 그러다가 그 틀을 자각하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으로부터 성장이라는 신비로운 전환이 시작된다.”

훌륭하다. 저자의 논지가 간략하게 정리되었다.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 보자. 여기까지가 ‘현상에 대한 해석’이라면, 이어져야 할 내용은 그에 따른 ‘제언’ 정도가 되어야겠다. 캠벨의 제언은 대략 이런 것이다. “신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문화의 틀을 자각하는 지점을 앞당길 수 있다. 문화 역시 신화에서 파생된 아류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신화를 껴 안으라. 이데올로기(to have)의 진영에 삶(to be)의 깃발을 꼽을 수 있게 되리니.” (에리히 프롬의 책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의 대비와 같은 구도다)

센스 있는 독자라면, 이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집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까?”

저자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원소적 관념’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구불변의 철학’이다. 차례로 살펴보자.

첫 번째 개념은 어렵지 않다. 세계의 신화와 종교를 연구하던 바스티안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세계 어느 신화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것’, 그는 이것을 ‘원소적 관념(Elementary Ideas)’이라고 불렀다. 켐벨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주된 관심은 신화에서 원소적인 것을 끌어내는 데에 있다.”

캠벨은 시종 원소적 관념에 집중한다. “이것은 신화의 표준적인 플롯이다”, “이것은 아메리카 인디언 이야기 가운데 즐겨 사용되는 모티프이다”, “곧, 순회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것은 정복하는 파라오를 그린 이집트 미술에서는 표준적인 모티프이다”, “생명은 심연 속의 어둠, 곧 지하세계로부터 나온다는 관념은 신화의 중요한 모티프이다”, “이것 또한 중세에 드물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런 식이다.

두 번째 개념이 문제다. ‘영구불변의 철학’. 나는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구름을 헤집고 있는데, 관심이 있는 독자는 본문을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113p부터 이다) 부디…… 그대의 구름이 걷히기를……

켐벨은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서양인이 신화를 해석할 때 저지를 수 있는 오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성적 사고에 치우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 상징에 나타나는 민족적 요소를 성서의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을 버리고 신화를 해석하라는 것이다. (성서(기독교 철학)는 서양인의 사고를 주름잡는 가장 큰 사고 틀이다) 그렇게 하고 신화를 바라보면, 신화 안에서 어떤 일관성과 계속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끊임없이 이어져나간다는 것. 캠벨은 이런 현상을 통틀어 ‘영구불변의 철학’이라 칭한다.

여기서 ‘틀을 버린다’는 말이 좀 모호하다. 어떻게 틀을 버린단 말인가? 다음은 캠벨의 설명이다. “신화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과 인식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칸트가 주장한 바, 선험적인 사고의 범주를 벗어난 채로 신화를 바라봐야 한다. 게다가 그것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그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경험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비적으로 해석하라. 신화는 꿈과 같은 것이다. 신화를 읽을 때에는, 이성적인 사고체계를 벗어나, ‘지혜의 몸’과 같은 영역으로 들어가라.” (어떠한가? 틀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게 나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는가…….)

“책이 나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 대략 너덧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이젠 신화가 두렵지 않다! 둘은, 신화를 몇 개 알게 되어 유식한 척 어깨를 으쓱. 셋은, 글을 쓸 때 사용할 좋은 비유 몇을 건지다. 넷은, 불교 문외한, 불교의 ‘불(佛)’자(字)를 알게 되다. 다섯은, 아하! 신화학자들의 꿍꿍이(?)란 이런 것이로군.

이중에서도 특별히 ‘셋’(3번)을 꼬집어보자. 그렇다. 이 책에는 써먹을만한 비유가 무지무지하게 많다. 세계의 여러 신화들을 들입다 쏟아내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게다가 (변경연의 표현대로)마음을 무찌르는 글귀들도 많이 있다. 하도 무찌르니, 마음 한 켠에는 잔잔한 울림이 남는다. 스티븐 킹은 좋은 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좋은 글이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동시에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옳게 쓴 것이라면, <신화의 세계>는 좋은 글의 범주다.

칭찬 일색이면 모양이 나지 않는다. 나가기 전에 쓴 소리 하나 하자. 그의 글은 나를 여러 번 불쾌하게 했다. 나는 기독교인인데, 그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시종, 성경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나는 책의 여백 한 켠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싫어지겠군. 오해하기 십상이야.” 그가 묘사한 대로라면, 기독교는 편협하고 옹색한, 그리고 겁 많은 이기주의자다. 서양사라는 순탄대로에서 그가 탄 마차는 전 유럽을 후 집고 다녔고, 마차가 지나간 자리는 애꿎은 우상의 피로 물들었다. 지난 세기, 그는 무례했고, 강했고, 군림했다. 이제는 문을 열어 수용하고, 때론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곤란하다. 그의 말이 아주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아주 틀린 것도 있다) 그 정도는 굳이(단단한 마음으로) 읽힐 수 있다. 허나, 모든 것은 태도의 문제라 하지 않는가? 허브 코헨의 말대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내용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내친 김에 하나만 더 거들자. 나는 적어도 책의 여백 10군데 이상, ‘꽝!’ 이라고 적어두었다. 그가 비록 평생을 신화학에 바친 인물이긴 하지만, 성경에 대해서라면 그보다는 나라고 자신한다. (나는 최소 30번 이상 성경을 읽었고, 그 중 5번 가량은 매우 진지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가 인용한 성경구절 가운데 적절히 인용되었다 할만한 구절은 단! 한! 개! 도! 없었다. 너무 허무맹랑하여 실소를 금치 못했던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또 여백에 이렇게 적는다. “아는 것을 쓰자! 아는 것을! 모르면 함구하자!” 기독교에 대한 그의 무지함은 책 전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열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절 옆에는 이런 메모가 남았다. “맞는 말일까? 그가 기독교에 대해 하는 말로 봐서는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4. 내가 저자라면
친절하게 쓰겠다.
신화 읽기에 서툴렀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적잖이 고생했다. 신화 독법(讀法)(?)이 따로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상징적으로 읽어라) “세계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며, 그 속으로 무진장한 제물이 던져진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본문에서 옮겨온 구절이다. 여러분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만약, 이런 구절들이 300페이지에 걸쳐 이어진다면? 내 경우는 앞이 깜깜했다. 나는 신화를 읽는 법을 몰랐을뿐더러, 캠벨은 유독 시적(詩的)이었다.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토마스 만의 말이다. 신화와 관련한 책을 한 권 정독하고 나니,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신화에 대한 기술(記述)은 시적일 수 밖에 없음을.

자, 이렇게 방어선을 두터이 쳐 두었으니, 이제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자. (더 이상 신화의 특성 운운하진 못하겠지) 좋다. 다 이해한다. 신화는 기질상, 모호 히 쓰여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비유’라는 훌륭한 무기가 있지 않은가? 캠벨은 소홀했다. 어쩌면, 히스 형제가 <스틱>에서 강조했던 ‘지식의 저주’에 빠졌을 수도 있다. (지식의 저주: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도를 측정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 아무리 모호한 표현이라도, ‘비유’의 도움을 받으면 먹힐 수 있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한다면, 과감히 모른다고 간주한다. (불교에 대해서라면, 그의 글은 먹혔다)

친절이라고 한다면, 한 가지가 더 있다. 이 책의 서술방식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주장에 대한 적절한 근거’이다. 주장을 해놓고는 근거를 제대로 대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오로지 주장으로만 한 페이지를 채우기도 했다. (이런 글은 제발 사라져라) 읽다가 잠이 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체계적이어야 하겠다. 그래야 친절해진다. 마구잡이로 이야기를 나열하면, 안 읽히는 것이 당연하다. 인과관계에 집중하면서, 부득불 지루해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안내방송을 해주자. “독자께서는 지금 어려운 개념에 맞닿아 계십니다. 이부분만 헤쳐가신다면, 이어지는 내용과 함께, 곧 큰 그림을 그리실 수 있을 거라 사료되옵니다.” 이렇게 말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쓰겠다.
그는 3일 동안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속독을 배웠더라면, 하루쯤 덜 혼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토테미즘이나 다신교 따위를 편애(?)한다. 통합주의가 마음에 든다나? 대놓고 예뻐하는 것이 눈꼴 시리다. 반면에 유대교나 기독교 따위의 유일신 사상은 조금만 잘못해도 마구 때린다. 흥분까지 하면서. 웃기는 짬뽕이다.

편애하지 말자. 작가라면 공인이 아닌가? 공인답게 쓰자.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숨길 줄도 알아야지. 처세의 기본이 아닌가? 독자의 마음을 잃지 말자. 글이 노닐 춤판은, 어차피 독자의 가슴이 아닌가…….

아는 내용을 쓰겠다. 굳이 추측을 하려면 조심스럽게.
많은 글쓰기 책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는 것, 좋아하는 것을 써라.” 이유는 간단하다. 모르는 것을 쓰면, 추측이 난무하게 되고, 논리도 꼬이고, 구조도 엉망이 된다. 이런 글에는 호소력이 없다. 행여, 그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를 만났담 봐라. 다윗 앞의 골리앗처럼, 모욕을 당하며 힘없이 쓰러트려지고 말 것이다.

단도직입하겠다. 캠벨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조심했어야 했다. 성(castle)이라고는 밖에서 구경만 해본 것이 다인 사람이, 성 안의 일을 알고 있는 양 떠들어댄다면, 그것처럼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것이 애꿎은 비방이라면? 그래서 성 밖 사람들이 웅성웅성 선동된다면? 성 안 사람들이 속상해하지 않을까?

물론, 성 밖 사람들도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성의 모양이라든지, 크기, 분위기, 그곳 사람들의 성 밖 행동거지. 이런 것들이라면 얼마든지 대환영이다. 그러나 성 안의 저잣거리나 끊임없이 펼쳐진 방들, 샹들리에, 커다란 촛불, 성 안 사람들의 속 사정, 임금님의 성품과 신화들의 행동거지. 이런 것들이 어디 성 밖 사람들이 알 법한 이야기이겠는가?

무례한 캠벨은 왜 사람들을 선동하는가? 왜 성 밖에 서서, 성 안에 대해 떠드는가? 기독교를 흔히 체험의 종교라 한다. 이것은 병 고침 따위의 이적을 체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체험의 종교라 함은, 성경의 메시지를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는 묵상과 체험이라는 성벽으로 견고히 둘러쳐진 성이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성경의 구절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담아 둔다. 그것이 성 안을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오묘한 가르침들은 그저 읽히고 인용되는 ‘정보’가 아니라 묵상과 체험으로 둘러쳐진 빛나는 길이다.” 오, 나의 캠벨이여, 나의 소중한 캠벨이여, 그대는 진정 성 밖의 사람이 아닌가?

기독교에 대해서라면, 교인(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사람은 제외한다)과 일반인이 가지는 지식의 축적 정도는 다르다. 이것은 신화 학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캠벨은 ‘그의 범주 안에서’ 마음껏 기독교를 인용하라. 그것이 그럴싸하다. 그 범주를 넘는 순간, 그대는 호기 좋은 거짓말쟁이요, 우스꽝스런 광대다. 그대의 어리광에 누구는 실소하고 누구는 파안대소한다. 그러므로 아는 것을 쓰라. 자칫 글 전체가 흔들릴라. (캠벨이 내 따귀를 때렸다) (그래서 나는 그의 볼기를 살짝 친다) (중립적 글쓰기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잘난 체는 않겠다.
나는 179페이지 여백에 큰 글씨로 이렇게 적어두었다. “뜬금없이 이걸 왜 인용하는가? 그저 아는 체?” 이건 바로 ‘사해문서’ 인용을 두고 해 둔 메모이다. 행간의 의미는 대략 다음과 같다.

힌두교의 개념을 빌어와 ‘환멸에 대한 명상’을 이야기하다가 기독교의 ‘종말론’으로 넘어왔고, 이제부터는 그 ‘연결성’을 밝힐 참이다. 저자의 주장은 “기독교의 종말론 역시 힌두교의 환멸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다. 본문을 조금 옮겨보자.

“기독교는 환멸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생겼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에 걸쳐서 모든 유태 민족은 세계의 종말이 온다며 흥분했다. ‘사해문서’는 그것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종말이 온다. 기독교는 그런 생각에서 생겼다.” 기독교 종말론의 근거로 사해문서의 기록을 들고 있다.

분명히 해두건 데, ‘사해문서’의 의의는 ‘종말론’이 아니다. 그것은 따로 있다. 그것도 아주 분명한 것으로. ‘사해문서’는 쿰란 동굴에서 1947년에 발견된 구약성경의 사본이다. 이 오래된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인류가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 된 성경 사본은 AD925년에 쓰여진 알레포 사본, AD1008년에 쓰여진 레닌그라드 사본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새롭게 발견된 ‘사해문서’는 BC250년에서 AD68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 발견된 것이다.

‘사해문서’가 발견 됨으로써 성경 사본의 역사는 1,000년 이상 앞당겨졌다. 그러나 ‘사해문서’ 발견의 의의는 이게 다가 아니다. [새로이 발견된 성경 사본(사해문서)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 따라서 그 동안, 성경이 오랜 세월을 거쳐 변질 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식 됨.] 이것이 ‘사해사본’ 발견의 가장 큰 의의이다.

캠벨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이야기하며, 쓸데없이 사해문서를 인용하고 있다. 사해문서가 인용된 자리에 그저 구약성경이라고 바꾸어 써도 무방하다. 아니, 그게 자연스럽다. 종말론과 사해사본은 흰 양말에 검은 양복처럼 당황스럽다.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데, 어정쩡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 과민반응을 일으킨 걸까? 아님, 그가 되도 않는 잘난 체 하다가 제대로 발각(?) 된 걸까?
IP *.235.31.78

프로필 이미지
최지환
2008.04.08 19:37:21 *.34.17.31
새로오신 자임 연구원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

함께 열심히 레이스를 달려보시죠~
프로필 이미지
개구쟁이
2008.04.09 09:18:40 *.235.31.78
'자임'하니까 뉘앙스가 이상해요. ㅋ

환영해주신걸로 알겠습니다. 하핫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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