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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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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7일 22시 1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한 달 동안 신화, 그것도 조셉 캠벨, 한 작가의 저서를 읽게 된다고 생각하자 저자가 몹시 궁금해졌다. 과학세대에 올라 있는 이글은 비교적 캠벨의 이력을 소상히 다루고 있어 옮겨본다. 외국 작가이고, 이미 현존해 있지 않기에 더 많이 알 수 없는 한계가 유감스럽다.

조셉 캠벨은 1904년 3월 26일에 미국 뉴욕 시에서 전형적인 중산계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캠벨이라는 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다. 캠벨이 열다섯 살에 입학해서 3년 뒤에 우등으로 졸업한 코네티컷 주의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일생동안 계속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캠벨의 관심은 여섯 살 때 부친에게 이끌려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를 보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버팔로빌이 분장한 위풍당당한 연방기병대장을 동경했지만, 캠벨은 오히려 추방되는 인디언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품었다.
그때부터 그는 뉴욕자연사 박물관을 통해서 인디언 문화나 제의를 공부하고 인디언에 대한 책을 방대하게 읽었다. 캠벨은 1921년에 명문 다트리머 칼리지에 진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메디치가에 관한 책을 읽고 인문학에 흥미를 품게 되어,1922년에 콜롬비아 대학으로 편입했다.

그는 그곳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배우는 한편, 육상선수로서 활약했다. 특히 0.5마일 레이스에서는 콜롬비아 대학뿐 만아니라 뉴욕시의 기록을 깼는데 그것은 당시의 세계기록에 불과0.5초 뒤진 것이었다. 또 재즈 밴드에도 들어가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1924년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선상에서 인도의 저명한 종교지도자 지두 크리스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한 캠벨은 아서 왕 전설을 연구하여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위논문으로 특별 장학금을 받아 1927년부터 파리9대학 소르본대학에 2년간 유학하는 기회를 얻었다.

파리 대학에서는 아서왕 전설의 권위자 밑에서 로망스어,중세프랑스어,프로방스어,라틴어 등을 전공하는 한편, 제임스 조이스의 <유리시스(Ulysses)>와 같은 새로운 문학이나 피카소, 브라크 등의 그림에도 깊은 흥미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유학은 1년으로 끝내고, 1928년에는 뮌헨 대학으로 가서, 산스크리스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괴테와 토마스만의 문학과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에 심취했다.

뮌헨 시절에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영향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 무렵부터 캠벨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으며 귀국 후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공언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미국 사회이지만,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가 "나는 이미 기독교도가 아니다"라고 성직자에게 고해하는 것은 배교로 간주되었고 친척이나 사회에 대한 오만불손한 도전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그의 행동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캠벨은 기독교가 설교하는 자연정복 사상과 배타성(선민사상이나 교파간의 교의 대립 등)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화적인 상징을 사실처럼 다루는 것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품었고, 그것에 대신 되어야 할 것을 인디언 신화나 불교 사상에서 발견했다.
그는 "로마 복음서"에 큰 공감을 느껴 단테 등 많은 마음의 여행자를 찬양하고 일부 가톨릭 수도사들의 생활방식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년에 이르러서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에서 그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만년에는 자택 서재에 달마대사 초상을 걸어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신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며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통하여 내면을 향한 끝없는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설사 자신의 신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 켐벨은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경제 사정 때문에 1년 뒤에 귀국했다. 미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가의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이었다.

캠벨은 수십 통의 이력서를 썼지만, 그를 불러주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은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조각가 지망생인 누이 앨리스와 우드스톡의 숲속에 있는 값싼 작은 집을 빌려 극빈 속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식비를 조달했다. 그는 우드스톡에서 살기 전에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때 존 스타인벡 부부를 알게 되었는데 스타인벡 부인에게 "순수하게 플라토닉한" 애정을 품기도 했다. 그는 [전쟁과 평화(Voyna i Mir)]를 원문으로 읽기 위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kandes)]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1933년에야 겨우 모교인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의 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어학을 가르치면서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제임스 프레이저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다음 해에 그는 새러 로렌스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으며 그 후 38년 동안 그곳에서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1938년에는 새러 로렌스 대학의 3학년생이었던 하와이 출신의 진 애드먼과 열애에 빠져 결혼했다. 근대 무용의 선구자인 마서 그레이엄의 제자였던 진 애드먼은 뒤에 일류 무용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캠벨은 1940년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알게 되어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42년에 침머의 소개로 융 학파가 주관하는 종교, 신화, 정신분석학 논문집인 [불링겐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기도 했다.

1983년에 자신이 존경하던 캠벨을 부인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농장에 초대한 일이 있기도 한 조지 루카스의 영화 "별들의 전쟁(Star Wars)"은 캠벨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만든 영화라고 한다. 이와 같이 캠벨의 언어와 상상력은 우주적 공간까지 확대되는 영감을 보여주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1987년 10월 30일에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학식뿐만 아니라 인품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의 80회 생일에는 무려 1,000여 명의 지인과 제자들이 생일 파티에 참가했다고 한다.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던 "과학세대"가 자연과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신화학 학자 캠벨의 저서를 번역하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리고 캠벨의 언어가 이성적인 한에서 "과학적인"것임을 확인하면서 이 작업을 마치게 되었다.

2. 저자에 대한 인상.
『신화의 세계』에서 조셉 캠벨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보면 불편할 수 있는 자유로운 관점으로 ‘동양철학’ 부분을 논하고 있다. 그는 신화를 깊이 사랑한 작가였고, 신화속의 신들을 사랑한 작가였다. 앞으로 읽을 그의 열애사가 자못 기대된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론: 인간과 신화의 기원
p.5. 신화는 우리의 삶, 우리의 육체 그리고 우리의 환경을 소재로 한다. 누구나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 어머니의 몸이다.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은 정도로 자신과 우주의 관계가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우주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얻게 된다.

p.6.아주 최근까지, 인간 사회에서 여성의 조건은 인간 생명의 탄생과 그 유지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여성 - 자연의 중심이며, 자연의 계승자이기도 한 여성- 의 역할의 전부였다. 그러나 남자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아무래도 작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남성은 다른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제인 구달의 수컷 침팬지들은 지름 50킬로미터 정도의 영역을 장악하고 있으며, 어디에 바나나가 있는지 알고 있다.

p.12.여기에는 캘리포니아의 시인 로빈슨 제니퍼가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divinely superfluous beauty)”이라고 부른 것이 나타나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는 매우 실제적인 동물적인 인간이고, 다른 한 종류는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의 유혹에 민감한 인간적인 인간이다. 이것은 큰 차이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인 관심과 욕구의 최초의 작은 싹이며 다른 동물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중략-
주검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모체의 자궁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잉여로서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신비의 첫 체험이다.

p.23. 우리는 언제나 신을 일종의 사실로서 생각한다. 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조지 캐들린(19세기 미국 화가/역주)은 미주리 강의 북쪽에서 만단 인디언들(Mandan Indians)과 같이 살면서 동물인간(animal man)인 만단의 샤먼을 그렸다. 프랑스의 한 동굴에도 그것과 똑같이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p.27.신화에 따르면 펠레우스가 테티스를 아내로 맞으려고 찾아왔을 때 테티스가 뱀으로, 사자로, 불로 그리고 물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는 테티스를 정복했다. 이 그림에서는 그 이야기가 전부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테티스가 뱀과 사자로 상징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두 상징이 상징하는 기본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마치 달이 그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써 재생한다.-중략-
태양은 그 안에 그림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태양은 언제나 시간과 탄생과 죽음과 무관하며, 따라서 완전한 생명이다. 한쪽은 타자와의 관련을 초월하고, 다른 한쪽은 타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p.35. 그런데 일본에서는 사물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를 각각 지훗카이와 리훗카이 라고 부른다. 지훗카이는 하나하나의 사물에 차별이 있는 영역이며, 리훗카이는 하나하나의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전체이다. 그리고 지리무게 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하나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 같은 것이다.-중략- 그런데 이렇게 높은 곳에서 여러분의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자문해본다. 여러분의 머리가 나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의 머리는 의식을 나르는 수레이다. 여러분의 머리는 얼마나 많은 의식을 비추고 있으며 그중 어느 것이 당신인가? 당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식 자체인가?
만일 당신이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을 옮겨준 수레에는 감사의 마음으로 작별을 고할 수 있다. 오 죽음이여, 너의 가시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참으로 영원한 것과 동일시한다. 의식은 형상을 내던졌다가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의식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만물과 하나가 되고, 따라서 지지무게라고, 곧 개별 존재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자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궁극적인 신비체험이다.

p.36. 19세기 스위스 화가 볼킨이 그린 한 아름다운 그림에서는 죽음의 신이 화가를 마주보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이는 눈을 뜨게 하려고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깨무는 뱀과 같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의 신이 아니라 뮤즈의 음성을 전하는 도구이다.
다음의 연설은 옛날 사람들의 자연관을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 유명한 연설은 시애틀 추장이 1855년에 한 것인데, 시애틀 시의 이름은 그로부터 유래했다.
“워싱턴의 대통령은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늘이나 땅을 사고팔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은 우리들에게는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기와 반짝이는 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대지의 어떤 부분도 나의 동족에게는 신성한 것입니다.”

p.41. 모든 생명은 신비로운 생명에 의해서 유지된다.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다 인간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되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생명이다.

p.45. 이 그림들이 힘을 옮기는 것이다. 그림을 지우는 것, 그림을 제거하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들은 그 모래를 움켜쥔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은 성체를 손에 쥔 로마 카톨릭 사제이다. 여기에는 성스러운 힘이 있다. 따라서 그냥 쓸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그릇에 담아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어딘가로 가져간다.
p.51.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거쳐 왔다. 주술적인 도움은 요정의 여신이라는 형태로 찾아온다. 여행로는 미리 알려지고, 도중의 장애는 극복된다. 두 소년은 마침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대양(大洋)을 본다.

p.58-59.「24인의 철학자들의 책(Book of the Twenty-four Philosophers)」이라는 12세기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신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이다.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의나 신화의 기능은, 아주 먼 옛날의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중략-
그러나 신화는 먼저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기능하는 신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 : 신석기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p.67. 기원전 4500년 무렵, 인간의 머리와 수소의 몸통을 가진 초기의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난다. 때때로 그것은 거꾸로 인간의 몸과 수소의 머리를 가지기도 한다. 어쨌든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난다. 주요한 신격을 가진 소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들소와 꼭 닮았다. 동물과 인간의 모습이 뒤섞여 있는 것은 레 트루아 프레르에서 보았던 주술사와 같다. -중략-
여신 신앙은 크레타 섬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여신은 양날도끼를 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양날도끼는 크레타 섬의 주요한 상징이다. 여신은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 칼날에 새겨진 초승달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달의 고유한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p.69. 여성이 뚜렷한 역할을 하는 종교적인 제의에서는 대체로 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면보다는 종교적인 체험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p.71. 최초의 도시는 근동에서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있었다. 작은 공동체나 유목민의 문화생활은 대체로 그 공동체에 속해있는 구성원 전부가 공유할 수 있다. 평등한 성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세대간의 차이, 남녀의 차이 정도였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샤먼 기질의 몽상가의 차이 정도였다. 그러나 농업의 정착과 가축의 사육에 이어 나타난 공동체의 확대와 함께 직업의 차별이 생기기 시작한다. 비전문가 또는 아마추어 문화 대신, 가족이 대를 이어가면서 평생 동안 관리, 사제, 상업, 농업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간의 차별과 함께 새로운 문화가 생긴다. 그것은 생활양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단일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러한 자각이 붕괴되고 있다.
노동자가 경영자와 대립하고, 이쪽과 저쪽이 적대하는 식으로 문화조직의 해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중략-
세계 최초의 도시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나타났다. 이 지방에 많은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것은 기원전 4000년 무렵이다.

p.74. 이 소들은 오늘날 캘커타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소들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동물들이다. 여기에서는 어머니 우주(mother universe)로서의 소라는 관념이 이어지고 있다. 소의 네 다리는 나침반의 네 방향이다. 똑같은 이미지들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p.75. 수메르 지방에서 이 사자새는 태양 에너지를 표상하는데 끊임없이 수소를 먹는다. 생명은 왔다가는 돌아간다. 한쪽 발은 우주산 꼭대기에 있는 초승달을 밟고 있다. 우주산이란 대지의 여신이다. 여기에는 수소의 생식력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에너지와 힘을 상징하는 나바호족의 부싯돌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소의 관절이 나타내는 것과 같은 종류의 모티프를 나타내고 있다.

p.77.이것(그림 3-13)은 우주나무, 곧 우주의 중심축에 해당하는 나무이다. 이것은 나무의 여신이며, 또 이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허물을 벗는 뱀이다. 여신, 뱀, 나무의 결합은 에덴동산, 하와, 뱀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원기를 회복하려고 남성 달(male moon)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기운을 돋우는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얻으려고 찾아온다. 이것은 타락이 아니다. 이런 전통에는 타락의 관념이 없다. 인도에서는 신이 자진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이이다. 그것이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한 것이다.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구약성서의 신화만큼 음울한 것은 없다.

p.78-80. 여러분은 명상에 잠긴, 정신생활에 영감을 불어넣는 구석기시대의 작은 여인상을 기억하는가? 이 상(그림 3-14)은 조각의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갖춘 작품이다. 눈은 원래 청금석(靑金石)으로 만들어져있고, 머리에는 가발을 쓴 것으로 보인다. 모성 신앙을 생각할 때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번식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여신의 중요한 힘은 아니다. 그것은 육체적 차원의 것일 뿐이다. 이것은 명상에 잠긴 여성이다. 정신적 차원에서 그녀는 우리의 정신적 탄생의 어머니요, 처녀 수태하는 어머니요, 우리의 정신생활을 낳는 어머니이다.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같은 모양의 여신이나 신을 본뜬 특징들은 어느 정도는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눈의 여신(eye goddess)이라고 부른다. 그 가장 큰 특징은 정신적인 면의 강조에 있다. 푸른 눈은 하늘의 눈이다. 이런 전통 속에서 태어난 남신상이 발견되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 얼굴은 셈족의 특징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중략-
사르곤은 티그리스강 상류 지역에서 신분이 낮은 여성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역청을 발라 방수 처리한 골풀 바구니에 갓난아기를 실어 티그리스 강에 떠내려 보냈다. 바구니는 강을 따라 흘러갔는데, 왕실 정원사가 그 바구니를 건져 올렸다. 여신이 사르곤을 몹시 사랑했기에 그는 지위가 점점 올라가 마침내 통치자가 되었다.

p.80. 우르의 지구라트(ziggurat :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신전/역주)에서는 하층민을 위한 낮은 수준의 제의가 행해졌다. 그러나 더 높은 곳, 곧 하늘과 땅이 혼인한 곳에서는 사제들의 밀교적인 제의가 행해졌다.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우르의 발굴을 맡았던 레너드 울리 경은 가장 놀라운 매장지를 발견했다. 궁정의 모든 사람이 생매장 되어 있었던 것이다.

4.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p.89. 부버 박사는 “아무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추방자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추방자 상태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이 그들의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종교학의 입장에서 종교들에 대해서 비교 문화적으로 말할 때, 그런 차이점을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 비교? 그렇다. 나는 비교를 한다. 그것이 나의 직업이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이념들이다.
인도에는 통합주의의 경향이 있다. 강조점을 보편적인 신들에 둔다. 지역의 수호신인 부족의 신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보다 큰 하나의 종교체계에 속해있다. 다른 곳에 다른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큰 체계가 있고, 그 아래에 지역적인 조상의 수호신이 있는 것이다.

p.98-99. 죽은 오시리스는 이집트를 풍요롭게 해주는 나일 강의 범람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토막 난 오시리스의 체액은 나일의 강물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이집트를 살찌우는 힘이 바로 오시리스이다.
아누비스는 오시리스의 시체 열네 토막을 한군데에 모아, 훗날 사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라를 만든다. 끝내 못 찾은 나머지 한 토막인 성기는 물고기가 먹어버렸다. 금요일에 물고기를 먹는 습관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살을 먹는 일종의 제의다.

p.100.
호루스의 네 자식은 우주의 네 방위를 대표한다. 사람이 죽게 되면 모두 오시리스와 동일시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사자는 오시리스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오시리스 존스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사자는 오시리스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저승까지 여행한다. 오시리스가 오시리스에게 가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한몸이라는 그 모티프이다. 가는 도중에 사자인 오시리스는 모든 신들을 먹고 자신으로 돌아간다. 여기에는 신들이 우리 인간 에너지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우리가 신들을 먹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실제로 식인풍습(cannibalism)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단지 “내 머리는 아누비스의 머리요, 내 어깨는 세트의 어깨이니라.” 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 몸의 모든 기관은 신들의 기관이며, 누구도 저승에서 내 심장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누구나 저승을 두렵고 위험한 곳으로 생각한다. “돌아가라, 그대 북쪽의 악어여. 돌아가라, 그대 남쪽의 악어여.” 그리고 사자는 저승의 입구에 다다른다.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나는 어제요 오늘이요, 내일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들이 솟아나오는 원천이다.” 이것은 위대한 자각이다. 당신이 죽기 전에, 그것이 어렵다면 저승에 닿기 전이라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p.103-105. 나는 이집트의 상징과 인도의 신비철학 사이에는 아주 큰 유사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 세 개의 상자와 석관 안에 있는 두 개의 장식관은 인도에서 다섯 개의 칼집이라고 부르는 것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중략-
석관이 다음의 칼집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의 칼집은 자나마야코샤(janamayakosha), 곧 지혜이다. 이것은 몸의 지혜이다. 곧 어머니 자궁 속에서 당신을 만든 지혜, 당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젖을 먹는 방법을 알고 있는 지혜, 풀을 기르는 지혜, 나무와 산과 우주에 가득한 지혜이다. 몸의 지혜는 정신이 의지하는 자발행동이라는 것, 정신이 알아야 하는 자발행동적인 것이다. 우리는 아침을 먹는다. 우리 몸은 먹을 밥을 소화시킨다. 아침밥의 소화과정을 정신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몸은 아침밥을 소화시킨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당신의 지혜의 몸(Wisdom Body)이다.-중략-
그것들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방향성이다. 정신의 칼집은 윤리, 곧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고통에 관계한다. 지혜의 칼집은 그런 분별 이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안다. 그것은 환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본디 모습이다. 당신은 환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나큰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참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환희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이 현실이야말로 인생의 환희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영웅적인 신화에는 이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중략-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이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노라고 말하자, 그 장교는 큰 충격을 표한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말한다. “이 친구가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구려. 이 친구는 브리타니아인이라오. 그러니 자기 종족의 법률이 전세계의 법률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p.106. 이 환상적인 무덤은 작은 손도끼로 산을 깎아서 만든 것이다. 그 시기는 람세스 2세가 죽은 해와 같은 기원전 1236년 또는 기원전 1234년이다. 이 얼마나 웅대한 예술인가! 떨어져서 보면 모양은 완벽하다. 이 람세스의 조각(그림 4-12)에서 그는 양을 사육할 때 사용하는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와 도리깨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정복하는 파라오를 그린 이집트 미술에서는 표준적인 모티프이다. 파라오는 무릎을 꿇고 있는 적의 머리채를 붙잡고 지금 바야흐로 찍어 죽이려고 하고 있다. 이들은 정복민들이다.

p.109. 영웅은 모세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영웅은 민중이다. 민중은 하나의 단위로서 간주되며, 개인은 그 일원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강조되는 것은 집단, 집단, 집단이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동의 특징이다. 유럽에서는 다른 데에 강조점을 둔다. 유럽을 기독교에 동화시킬 때 생긴 문제 중의 하나는 둘도 없는 실체로서의 개인이 의식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유지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동의 집단주의 전통을 개인적인 자기실현의 전통 속에 어떻게 옮겨 심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13세기 유럽의 성배(聖杯. Grail) 전설의 문제이기도 하다. 13세기에 이 전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중략-

“레이첼, 무슨 소린가? 난 자네를 유태인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내게는 그저 레이첼일 뿐이야. 가령 내가 자네에게 ‘만일 내가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의식하지 않았다면, 내 정체성은 없었을 거야’ 하고 말한다면 이치에 닿겠어?”
민족에 대해서는 두 개의 전혀 다른 관점이 있다. 한쪽은 “그래, 그것이 본래의 나이고 나의 모든 특징은 그런 불운에서 생긴다.”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아니, 이것은 나만의 존재야” 라고 말한다. 유태인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는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 뿌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이념에 있는 것이다.

5. 성스러운 원천 :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p.114.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후 신화적인 사상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그 때문에 서양에서의 비평은 원소적 관념과는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서양사상의 밑바닥에도 한결같은 흐름이 있다. 그것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연금술 그리고 영구불변의 철학이란 아난다 K. 쿠마라스와미가 해설하고 올더스 헉슬리가 「영구불변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에서 다룬 철학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신화적 이미지가 가지는 의미를 말로 옮겨 설명한 것이다. 세계의 신비철학들에서 똑같은 관념이 되풀이해서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화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계속성은 철학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영구불변의 철학이다.

p.115. 영구불변의 철학과 이성적인 사고 체계 사이에는 그 방법과 원리에서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중략-
동양사상의 민족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원소적인 것을 끌어내는데 중점을 둘 참이다.

p.115-116. 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 따라서 상징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갠지스의 원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리드와(Haridwar)(그림 5-2)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속뜻을 잘못 읽은 것이다.
약속의 땅으로 가려면 이스라엘로 가야 한다는 것도 그것과 비슷한 오해이다. 우리 서양인이 상징을 다룰 때의 주요문제점들의 하나는 상징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원소적 관념이나 영구불변의 계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도 이런 상징의 구체화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신 관념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상징이다.

p.116-118. 독일의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이런 훌륭한 말을 했다.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있는 원초적인 말(Urwort)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세상만물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실체는 공(空, sunya)이다. 공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어떤 사고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은 본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투명해질 필요가 있으며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민족적인 것은 원소적인 것에 대해서 열려 있다. 위 서양인이 이런 것을 해석할 때 생기는 문제점에는 두 가지 큰 원인이 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성적 사고에 치우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 상징에 나타나는 민족적 요소를 성서의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상징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갠지스 강은 죽은 자가 가야 할 완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꾸는 것이다.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p.120.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에 아주 흥미로운 기고문이 실린 적이 있다. 그것은 성지를 떠나 있다고 해서 흩어진 유태인(Diaspora : 이스라엘 이외의 땅에 사는 유태인을 가리키는 말/역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한 유태계 젊은이가 이의를 제기한 편지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조국, 나의 국토는 이곳 미국이다. 나는 이곳에서 살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이 나라를 나의 성지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자발적인 의사일뿐더러, 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자신의 “전통적인 유산”으로부터 벗어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훌륭한 답이다. 그 “전통적인 유산”은 자칫 그 자체의 상징체계를 구체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성지에 대한 모든 관념을 발견했다. 그리고 조이스 역시 강과 도시에 관해서 같은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우리의 성지가 허드슨 강을 끼고 있는 뉴욕인 것처럼, 그의 성지는 더블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념이 너무나 세속화되어버렸기 때문에, 허드슨 강을 신성한 은총의 선물이라고 말한다면 실소를 금치 못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p.122. 따라서 가장 이른 시대의 신화는 인간계와 동물계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다. 문제는 동물을 존경하면서도 잡아먹는 데에 있다. 동물계와 인간계 사이의 계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생명체는 생명을 죽이고 그것을 먹음으로써 살아간다는 생명의 기적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이다. 끊임없이 동물을 잡아먹고, 그 모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그 가죽으로 만든 천막 속에서 산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이 한 가지 모습이다.

p.124. 당신은 글을 쓸 때면 의도해서 쓰기도 하지만 영감에 사로잡혀 쓰기도 한다. 영감이 샘솟으며 말이 터져 나오는 일이 있다. 신들의 리듬과 찬가와 말씀을 깊이 새겨들은 사람들은 그 찬가를 신들도 매혹될 정도로 훌륭하게 낭송할 수 있다.

p.126.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희생은 신들보다 강하다. 그렇지만 그 희생을 주재하는 것은 누구인가? 브라만(Brahman)이다. 따라서 브라만은 신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은 어떤 신보다도 강하다. 이것이 우주의 위대한 점이며, 브라만은 그런 위대한 존재이다. 이것이 한 가지 핵심이다.

p.129.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 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 내부의 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구별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육체적이고 가변적인 면과 영속적인 불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은 그 불꽃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p.130. 조로아스터는 희생의 관념에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인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심리학의 조류에도, 자기를 우주와 조화시키는 초기의 신화에도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조로아스터에 관한 신화에 따르면, 그는 두 신과 만난다. 그중 한 신은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인데, 훗날 마즈다 상표의 전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아후라는 “일반영혼”을, 마즈다는 특정한 빛의 영혼을 뜻한다. 아후라 마즈다는 모든 빛이요, 모든 자비요, 모든 힘이요, 모든 지식이다. 다른 한 신은 아후라 마즈다에 적대하는 신인 앙그라 마이뉴인데, 이것은 암흑, 위선, 기만을 뜻한다. 조로아스터는 이 두 개의 대립물을 구체화 시켰다. 그래서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각각 신들로서 의인화되었다.

p.132. 당신은 중심으로 들어가며, 기쁨이 흘러넘치게 된다. 당신이 중심에 들어가면 이미 무엇을 얻는다든지 잃는다든지 하는 일이 없게 된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열반이다.-중략-
살아있는 개체, 곧 “지바(jiva)”라는 영혼은 “카르마(karma)”라는 행위에 의해서 더렵혀진다. 카르마는 본디 빛났던 지바를 검게 하고 무겁게 만든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렇다고 말할 뿐이다.

p.133. 부처는 자이나 교도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자이나 교도가 만사를 물리적으로만 해석한다고 말했다. 죽여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때 비로소,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

6.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 : 불교
p.136-138. 이 부처(그림 6-2)는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이것은 부처의 내적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훌륭한 불상의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악마를 항복 시키는 인상[印相]/역주)이다. 연꽃은, 갠지스 강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상징한다. 그것은 중세의 기독교 전통에서 장미가 상징하는 것과 같다. 삼위일체의 이미지는 천국의 장미로 상징된다. 부처의 이미지는 천상계의 연꽃으로 상징된다. 연꽃이나 장미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그 꽃이 나타내는 에너지를 의인화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자신을 상징으로 나타내는 데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p.140. 스즈키는 마침내 이야기의 요점에 도달했다. “아기는 태어날 때 반드시 웁니다. 뭐라고 하면서 울까요? 아기는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도 나와 같은 자는 하나도 없다!’ 하고 선언하는 겁니다. 모든 아기는 아기 부처니까요.”
갓난아기는 모두 아기부처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설명해온 불가사의한 에너지의 천진난만한 표현이다. 그러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아기와 마야 왕비의 아기는 어디가 달랐던가? 마야 왕비의 아기는 자신이 아기 부처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불성의 핵심은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주된 이유는 사회가 집요하게 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자, 곧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부동지(不動地)라고 부르는 “세계의 중심축(axis mundi)", 곧 우주의 중심에 있는 나무에 다다르게 되면 그곳에서 좌선에 들어간다. 우주의 중심에 앉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조건이다. 부동지를 발견하려고 부다가야(Budda-Gaya :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성지. 인도 동북부 비할 주[州]에 있다/역주)로 갈 필요는 없다. 만일 부동지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 이곳에 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욕망과 불안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곳이다.

p.141-142.부처를 시험하려고 욕계(欲界)의 왕인 마왕(魔王)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욕망과 불안이었다. 욕망으로서의 그를 가리켜 카마라고 부르는데 이는 애욕, 정욕, 환희, 열락이라는 뜻이다. -중략-
절망 끝에 이번에는 사회적 의무의 왕인 다르마로 변신한다. -중략-
“젊은 왕자여, 당신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되어야 할 터인데 조간신문도 읽지 않는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사방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요청을 받았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젊은 왕자부처는 단지 손을 내려서 땅에 댔다. 그것은 “그런 신문잡지식 호소로 나를 움직이려고 애쓰지 말라. 나의 관심은 영원한 것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처는 어머니 우주(Mother Universe) 여신에게 자신이 그 곳에 있을 권리를 증언해줄 것을 요청한다. 여신은 지평선 저쪽까지 울리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는 무수한 생애에 걸쳐서 자신을 남에게 주었으니 이미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때 다르마가 타고온 코끼리가 땅에 넙죽 엎드려 경배했고, 군대는 물러났으며, 부처는 정각(正覺)을 얻었다.
이것은 부동지(Akshobhya, 不動地)를 상징한다. 그것이 첫 번째 태도이다. 이 경지를 발견하고 그곳에 앉아 있다. 부동지에 있으므로 시간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신문잡지식 호소에 의해서 흔들리는 일이 없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부동지를 발견한 뒤에 시간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불교가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초기의 소승불교와 나중에 생긴 불교(대승불교/역주)이다. 나중에 생긴 불교는 우리는 불성의 표현이며 부동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시간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고계(苦界)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 이다. 당신도 그 “존재(sattva)”가 “깨달음의 길(bodhi)”인 사람, 즉 보살(菩薩, bodhisattva)이 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이다. 부동지를 발견하게 되면, 움직이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p.143. 건너편에서 나룻배가 와서 우리의 발치에 정박한다. 배에는 한 명의 남자가 타고 있는데 “가든 스테이트의 저지로 가실 분 없나요?” 하고 묻는다. 당신은 재빨리 “제발 저지로 데려다주세요” 하고 말한다. 그러자 나룻배 사공이 말한다. “잘 들어보세요.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답니다. 이 배는 편도만 운항합니다. 당신의 가족, 당신의 이상, 당신의 돈, 당신의 미래, 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요?” 당신은 말한다. “이곳 생활에는 이미 넌더리가 난 상태입니다.” 그러자 사공이 말한다. “그럼 타세요.”
이것이 작은 나룻배[小乘]인데,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실제로 기꺼이 버리는 사람만 탈 수 있다. 어떤 경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열반을 구하지 않으려거든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여기에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금욕과 현세 부정의 사상이 있다. 그래서 작은 나룻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배에 탄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에 당신은 “어머니!” 하고 불러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배가 움직인다. 결국 당신은 철썩철썩 뱃전을 치는 물소리를 좋아하게 된다. 새로운 말도 깨치게 된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라는 말 대신 좌현(左舷) 이나 우현(右舷)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이물이나 고물 이라는 말 대신에 선수(船首)나 선미(船尾)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지금도 건너기 전과 마찬가지로 저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만해튼의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 배 위에서 하는 일은 매우 적다.-중략-
여기까지가 소승이다. 맨해튼을 떠나 저지로 간다. 비참한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세상(samsara)을 떠나 열반이라는 해방의 세계로 간다. 뉴저지에 도착하여 맨해튼을 뒤돌아본다. 당신은 지금 비(非)이원성의 세계, 모든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 있다. 그러나 건너편에 맨해튼은 없다. 중간에 허드슨 강도 없다. 나룻배도 없다. 사공도 없다. 그렇다. 모든 것이 그렇다. 당신은 이원성을 초월하며, 그래서 깨닫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견해가 바뀐 것이다. -중략-

나룻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불교의 훌륭한 역설이다. 핵심이 되는 말은 “무아(無我, anatman)"이다. 삼라만상에는 자아(自我)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런 초월성의 표현이다. 우리를 타인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관념이다. 그것을 없애라. 두려워하지 말고 상대에게 양보하라. 타자의 먹이가 되라. 그럴 때 당신은 완성자가 된다. 그때의 경지를 극락(極樂, mahasukha)이라고 부른다.

p.146-148. 이것(그림 6-4)은 부다가야이다. 부처가 그 아래에 앉았다는 나무가 실제로 살아 있다. 따라서 성지 부다가야를 방문하면 모든 것을 현실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곳의 큰 사원에는 천상계의 각 단계가 그려져 있다. 그것을 보면 동양의 환생은 서양의 연옥에 해당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죽어서도 자신의 자아, 자아의 의도나 욕망에 강하게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아의식을 소멸시키는, 자복의 직관(beatific vision: 천사나 성도가 천국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역주)의 초월적인 계시에 눈을 뜰 수 없다. 따라서 죽은 사람은 자아를 정화하는(연옥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훌륭한 전통에서 인생이라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대학원 과정이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또 다른 기회를 얻으려고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자아가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몇 번이나 환생한다. 그러나 환생과 환생 사이에는 천상계로 가거나 지옥으로 가는데, 그것은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달려 있다. 주어진 생활의 계율에 최선으로 대응한 사람은 그에게 가장 적합한 천상계로 간다. 계율을 어긴 사람은 지옥에 내던져져서 참으로 냉혹한 신들로부터 지독한 일들을 겪게 된다.

p.149.낡은 의미에서의 희생이나 제의와는 관계없이 사회질서에 참여한다. 그러나 사회가 광란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때는 사람들이 우주와의 합일, 우주의 “도”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도교에 기울게 된다. 전형적인 도교의 현자는 산 속에서 산다. 문에서 오두막까지 찔레나무가 우거지도록 내버려둔 채, 그는 우주와 하나가 되어 있다.(그렇지 않으면 사회와 하나가 될 수도 있다.)-중략-
인도 대승불교의 “보가가 곧 요가이다”라는 말에서조차 “아무튼 가능하면 빠져나오고 싶다”는 기분이 느껴진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처럼 훌륭한 참여의 정신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p.151. 5세기의 그리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요소, 곧 합리적인 철학 그리고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는 휴머니즘의 전통 - 그것은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 이 추가되었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을 신들에게 예속되지 않은, 만물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관이다. 신들은 메아리로서만 존재할 뿐, 인간의 다양한 힘의 표현에 불과하다.-중략-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 중의 한명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그는 기원전 332년에 유명한 아르벨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한다. 걸출한 무인(武人)을 아버지로 둔 젊고 늠름한 군인 알렉산드로스는 그때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법과 전술을 발명하고, 15년 만에 근동의 구체제를 모두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7.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p.155. 우리 서양인의 신 관념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사실이며 그 사실로부터 에너지가 방출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에 따르면, 두뇌가 의식의 원천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생각에 따르면, 두뇌는 의식의 한 가지 기능이다. 의식이 앞선다. 두뇌는 의식을 포함하고, 그것을 어떤 방향, 곧 이차적 지식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초월적인 의식의 표현이다. 초월적인 의식은 사물을 생각하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우리의 모든 능력들을 훨씬 넘어선다. 이런 생각이 모든 생명의 밑바탕에 있는 기본 이념이다.

p.156. 칸트가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밝힌 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 우리의 모든 경험은 지식의 기관, 경험의 기관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경험보다도 앞서는 선험적인(priori) 것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이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형이상학의 기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라는 훌륭한 책에서 칸트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공간에서 사물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으며, 같은 관계가 다른 공간에서도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p.157.이런 우주선이 아무리 멀리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그 우주공간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내려섰을 때, 그의 발이 달의 먼지더미 속에서 얼마나 깊이 빠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경험적인(posteriori) 지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경험이 나오는 지식의 기본 틀을 이미 알고 있다.

p.158. 당신은 “신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와 여럿은 개념이다. 그것들은 사고의 범주들이다. 그리고 신이라는 말은 본래 하나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을 넘어서는 것, 실제로 사고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적인 상징은 초월성에의 길을 열어준다.
융은 상징(symbol)이라는 말과 기호(sign)라는 말을 구별했다. 이것은 융이 임의로 사용한 정의이다. 상징이란 본디 신화적인 상징인데, 그 한쪽 발은 이곳에 놓여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무한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초월성을 향하고 있다. 기호는 이곳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서양에서의 통상적인 해석에 따르면, 신은 상징이 아니라 기호이다. 신이라는 말은 하나의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여기서 영지주의 시대로부터 인용하고자 한다. -중략-
알기 쉽게 말하면, 이미지를 구체화하거나 상징을 구상화하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종교 전체가 우상숭배체계이다.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우상숭배를 찾아내어 파괴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p.160.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보통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이상학적인 자각이 갑자기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보편적인 의식의 구현이라는 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과 타인은 하나이다.

p.161.수트라는 기원전 200년 무렵에서 기원후 200년 무렵 사이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400년 동안에 쓰인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가는 4-5세기에 개발된, 나중 시대의 특정한 요가이다. 그것은 쿤달리니 요가라고 부르는데, 동양의 모든 종교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에서 이것이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 따라서 나는 불교와 힌두교, 양쪽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쿤달리니(Kundalini)”는 “서리다(똬리를 틀다)”라는 뜻의 “쿤달린(Kundalin)”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척추의 아랫부분, 육체의 밑바탕에 서려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가리킨다.

p.167.따라서 시간은 폭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눈은 폭력의 뒤에 놓여 있는 평화를, 어린 양과 함께 잠자는 사자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자가 어린 양을 잡아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사자는 어린 양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사자가 어린 양을 잡아먹었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시간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 행위의 뒤에 놓여 있는 평화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무 아래에 부처가 있다. 그는 다른 부처들의 영향을 받은 덕분에 눈을 뜬 것이다. 이들이 바로 명상 부처(Dhyani Buddhas : 선정불 [禪定佛]. 참선하여 삼매경[三昧境]에 이른 부처/역주)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부처들이 아니라 영묘체이다. 이 부처들의 영향 덕분에 부처는 올바른 지식을 얻는다. 무지는 돼지로 상징되며, 창에 의해서 꿰뚫린다. 눈이 열리면 무지가 사라진다.

p.169.죽음의 영역 안에 있는 의식이 죽음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그것이 재생이며 세대의 연속이다. 언제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현세대는 죽음으로 던져진다. 생명은 그렇게 이어져온 것이다.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얻는 것은 생명 에너지를 상징한다.

p.170. 이 세상에는 상징의 정신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징을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엉뚱한 속물적인 행동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꿔 말하면 이런 것이다. 정신적인 상징을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는 현실의 육체에 관련을 가지는 현실의 행위에 열중하게 되고 정신적인 내용을 잃어버리게 된다.

p.172.낙원의 문을 지키는 거룹들, 불멸의 생명나무로부터 인간을 떼어놓기 위해서 신이 문 앞에 배치한 두 마리의 거룹이 지금 그 문을 열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면 생명나무가 있다. 부처가 그 밑에 앉았던 나무이다. 그 나무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 나무는 바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다. 따라서 당신은 부다가야에 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부다가야로 가게 될 것이다.

p.178.당신에게 혹은 당신의 벗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일은 브라만의 본질에서 나온다. 희생의(즉 개아[個我]를 버리는/역주) 길에서 브라만을 보게 되면, 신비롭게도 당신은 시간과 공간의 가치들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것(우주아[宇宙我]로서의 브라만 그 자체/역주)과 연결된다. 원래의 당신 자신은 단지 하나의 거품, 연못의 잔물결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8.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

여신은 시간의 주기이다. 여신은 시간이며 자궁이다.
링감은 신의 남성적 에너지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에너지에는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의 두 종류가 있는데, 둘 다 시간의 영역 속에서 분리되어 있으며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시간의 영역에 밀어 넣는 것은 여성의 힘이다.

p.185. 초승달 안에 갠지스 강을 상징하는 동물인 마카라(makara)가 보인다. 여신 강가이다. 갠지스 강물의 흐름은 이 에너지, 생명과 흥분과 세계 내 존재의 성애(性愛)의 원천이다. 그러나 갠지스 강만이 원천인 것은 아니다. 베다의 신들 중에는 바루나가 넘실거리는 하늘의 리듬을 대표한다. 밤하늘을 보노라면 하늘이 움직인다. 그 리듬이 우주의 리듬이며, 바루나의 리듬이다. 이 차크라를 주관하는 힌두의 신이 비슈누인데, 그는 성애와 관계가 있다.

p.188. 사랑에는 다섯 가지 형태가 있다. 처음의, 가장 낮은, 가장 단순한 사랑은 주로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사랑이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 간의 사랑, 특히 주인에 대한 노예의 사랑이다. “주인님, 저는 당신을 섬기는 노예입니다. 아무쪼록 살아가기 위한 율법을 제게 주십시오. 저는 그것에 따라서 살겠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뜻에 따르렵니다.” 이 사랑은 종교적인 사색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고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이다. 그들은 자신이 숭배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신명기”등이 실려 있는 구약 성서에는 이런 율법의 수여라는 원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율법, 오로지 율법에 의해서 신은 당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p.194. 부처가 만난 최초의 유혹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것은 차크라 2의 색욕의 유혹, 차크라3의 공포의 유혹 그리고 “다르마”, 곧 의무의 유혹이었다. 부처는 그것들에 눈을 빼앗기지 않고 정진했다. 우리는 차크라 4에 도달할 때까지는 참된 종교생활, 즉 정신적 탄생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차크라 4는 심장의 단계, 예수의 성스러운 심장(Sacred Heart of Jesus)의 단계이다. 이 예수는, 「율리시스(Ulussess)」에서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이 말하는 것처럼, “그의 뜻에 따르는 심장을 가진” 예수이다.
차크라 4는 아나하타(anagata)이다. 아나(ana)는 “없다.”, “하타(hata)”는 “부딪치다”라는 뜻이다. 곧 아나하타란 두 개의 사물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서 나는 소리를 의미한다. 나의 목소리, 당신이 듣는 어떤 소리도 두 개의 사물이 서로 부딪혀서 나는 소리이다. 목소리는 공기가 성대에 부딪힐 때 난다. 두 개의 사물이 충돌하지 않고 나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것이 옴(om)이다. 삼라만상으로 나타나는 우주의 에너지의 소리이다. E=MC², 곧 에너지는 모든 형상의 바탕에 있는데 그 에너지의 소리를 옴이라고 부른다.

p.195. 주체와 객체는 두 개로 보이지만 실은 같은 것이다. 당신과 나는 같다. 이것이 분리되어 나타나는 두 개가 실은 하나라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돌파구이다. 이것이 관계를 동일성으로서 인식하는 것, 곧 초월로 향하는 중간점이다. 꿈속의 객체는 스스로 빛나고, 꿈, 환상, 신 등으로 재빨리 변신하는 영묘한 객체이다. 신들과 천국과 지옥은 꿈의 우주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꿈은 신화의 개인적인 모습이다. 꿈과 신화는 같은 종류의 것이다.

p.201.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차크라 2가 아니라 차크라 6의 상태에서 보았다. 그는 그녀를 애욕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신의 은총과 사랑의 아름다움이 드러난 것으로서 보았다. 그런 방식으로 그녀를 봄으로써 단테는 최종적인 정각(正覺)의 자리로 인도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얻는 것도 그것이다.

p.204.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차례로 그곳까지 올라가게 되면, 육체는 탈락하고 우리는 인생으로부터 해방된다. 인생에 깊은 관심을 품고있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상적인 것은 둘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인 심장, 곧 차크라 4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차크라 3의 에너지가 차크라 4에서, 차크라 2의 에너지가 차크라 6에서, 차크라 1의 에너지가 차크라 7에서 움직이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영적인 활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된다. 차크라 3 - 우리가 정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과 그 집착이며, 그것과의 싸움에 나서야 한다. 차크라 2 - 우리는 인간다운 사랑을 통해서 영원한 광명을 경험해야 한다.
부처는 심장의 중심에서 기능한다. 에너지는 심장의 중심에서 나온다. 부처가 유혹자에게 “아니다” 하고 말할 때, 그의 손은 땅에 닿아 있다. 그러나 경험해야 할 것을 다 경험한 뒤, 부처의 손은 한 바퀴를 돌아서 은혜를 베푼다. 따라서 부처는 은혜를 베풀려고 되돌아온다. 고행에서 돌아와서 중생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주의 지배자가 자기를 낮추어 우주로서의 자신, 여신으로서의 자신을 포옹한다(실재로 부처가 어린 부처를 안고 이는 상이 있다/역주). 그것이 쿤달리니의 교훈이다.

9. 천상계로의 하강 : 「티베트 사자의 서」
p.205. 그런데 죽음과 삶의 신화는 곧 환생의 신화이다. 동양의 환생은 서양의 연옥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재생의 기회, 당신이 광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기회이다. 내가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연옥은 대학원 과정이다. 만일 당신이 광명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면, 아직 어둠속에 있는 당신의 모든 것을 분쇄하는 지복의 직관을 볼 준비가 안 된 채로 죽는다면, 연옥에서 죄를 씻게 된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당신은 또 다른 생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죽음의 순간부터 두 번째 수태까지는 7의 일곱 배인 49일이 걸린다. 그 사이에 당신은 앞 장에서 소개한 차크라의 모든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방향은 거꾸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죽음의 순간에 당신은 눈부신 빛을 체험한다. 당신은 그것을 견딜 수 있는가? 자신을 해체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곧장 끌어당김이 있게 되며 그것에 의해서 하강이 시작된다.
임종을 맞는 사람의 가족은 라마승 또는 일반 승려, 대개는 가족이 평소에 영적인 가르침을 받던 구루나 스승을 불러온다. 그는 죽음을 앞둔 이에게 파리니르바나(parinirvana), 곧 부처가 열반에 들었을 때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사자(獅子)가 누워있는 자세이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이의 경정맥(頸靜脈)에 손을 얹어서, 즉 맥을 짚어 정확한 사망 시각을 알아낸다. 그런 다음에 가르침을 시작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죽은 사람에게 영혼이 더듬어가는 여행을 가르쳐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사람은 한순간에 완전히 죽는가? 신경이 죽어가는 시간이 있지 않은가? 분명히 육체는 한순간에 죽지 않는다. 그래서 생전에 스승이었던 분의 냉정한 목소리가 꺼져가는 정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은 정신을 가다듬어 사후의 여행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겼다.
둘째,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생활에서 겪게 되는 중요한 경험들 가운데 하나인 직접적이고 강렬한 경험에 직면하여 죽음의 경험과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서 라마승은 단지 곁에 앉아서 “ 그는 생전에 이런 분이셨다”는 둥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가 가족을 위한 명상의 순간이 되게 한다.
당신의 임종 때 라마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이제 근원의 빛을 체험하고 있다. 그대의 의식과 우주의 의식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없다. 그 상태에 머물려고 노력하라……” 그러나 이미 그 소리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다.

p.210.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한 사람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 고장의 라마승이 그의 맥을 짚어보고 임종의 순간에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지금 근원의 빛(mother light)을 보고 있다.”
이것이 절대의 브라마, 차별이 없는 의식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제껏 찾아온 것인데 그것을 공(空)이라고 불러도 좋고, 심연이라고 불러도 좋고, 근원의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것은 모든 사고를 초월한 경지이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라마승은 그곳에 머물라고 말한다. 만일 그것에 머물지 못하면 당신은 차크라 7에서 차크라 6으로 미끄러져버린다. 그래서 라마승은 당신이 일생 동안 명상을 통해서 선택한 신의 이미지를 떠올리라고 요구한다.

p.213. “자신의 악마를 추방할 때는 자기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추방하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배를 째고 내장과 뼈를 발라낸 생선처럼 된다. 그들의 특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만일 당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면 굳게 지키라. 다만 그 에너지, 곧 샤크티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p.225. 우리는 이제 마지막 세 개의 차크라에 머물고 있다. 차크라 3에서는 서로 껴안고 있는 짝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당신 곁에 있는 라마승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 사이에 들어가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프로이트의 단계에까지 찾아왔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이미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남자 또는 여자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남자로서 다시 태어나면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를 사랑한다. 여자로서 다시 태어나면 그 반대가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이다.

p.226.그토록 무섭게 느껴졌던 세계가 불성(佛性)의 세계, 어디에나 부처가 있는 세계로 바뀐다.-중략- 이것은 고도로 세련된 관념이다. 그런 신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심상이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신관념을 심어준다. 당신이 그것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한, 그것은 생명을 가진다. 그때 그 신은 당신 인생의 길잡이가 된다.
나는 독서와 경전의 신인 판카크사라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것이 나의 이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독서에서 얻었다.-중략-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신, 곧 이스타데바타를 가지고 있다.-중략-
자신이 선택한 신을 자신의 길라잡이로 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세련된 관념이다.

10.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p.240. 그는 디오니소스란 만물을 꿰뚫는 시간의 힘이며, 낡은 형식을 파괴하고 자신이 “차이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부른 것에 의해서 새로운 형식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것이 대조적인 것이 아폴론의 빛의 세계이며 형식의 섬세한 차이에 대한 관심이다. 이것을 니체는 “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의 힘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격정을 물고 온다.

p.246. 예술이란 계시(啓示)의 옷이다. 꼭대기에는 아폴론의 왕좌가 있는데 그곳에서 예술이 지향하는 계시가 달성된다. 그 곁에는 세 명의 미의 여신이 벌거벗은 채로 서있다. 따라서 아홉 명의 뮤즈, 9의 제곱근은 3이다.

p.248.
최초의 뮤즈인 탈리아(Thalia)는 지하에 있다. 그녀의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지 않기 때문에 “침묵의 탈리아”라고 부른다. 우리가 자아와 공포와 욕망에 집착하는 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주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죽음의 신이 예술가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그림이 생각난다. 죽음의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아의 교만에서 빠져나오라. 그렇게 하려면 당신의 머리를 사자의 입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오늘의 진실한 경험을 직시하라. 과거의 경험으로 그것을 해석하지 않도록 하라.
p.249. 우리가 찾는 것은 경험을 쌓는 것,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의 모든 경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해석하고, 분류하느라 경험에서 멀어져 버린다. 당신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그것은 결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불륜 또는 이런저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분류하느라 경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머리를 사자 입 속에 집어넣고 이렇게 말하라. “에이, 될 대로 돼라.” 그러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머리를 사자 입 속에 집어넣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린다. 우리는 케르베루스의 몸을 따라, 사현금(四弦琴, tetrachord)의 음표들 - 지금이라면 가단조 음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 - 을 밟으면서 위로 올라가는 예술적 고양을 경험하게 된다. 오른쪽에는 각 뮤즈에 대응하는 그리스 선법(旋法, mode)의 이름이 적혀 있고, 왼쪽에는 고전적인 형태의 계명이 적혀 있다.

11. 길[道]은 없었다 :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p.255. 신화의 보편적인 주제로부터, 우리가 이어받은 특수한 유럽적 의식을 구성하고 이는 소재를 끌어내기에 적합한 이야깃거리는 성배(聖杯, Grail)이다.

p.261. 사정을 눈치 챈 브랑게네는 깜짝 놀라 트리스탄에게 말한다. “트리스탄, 당신은 죽음을 삼키고 말았군요.” 고트프리트 판에서 그 다음에 멋진 대사가 나온다. 트리스탄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말은 이해할 수 없군요.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이졸데를 사랑하는 나의 아픔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내 생명이라고 말 하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세상에서 내리는 벌을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지옥의 영원한 저주를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여기에 모든 가치체계를 부정하는 개인들의 경험이 있다. 그들이 상징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꽤 중요하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좇아서 트리스탄 문제를 다루어보자. 트리스탄 문제는 사회적인 질서 - 수입되고, 주입되고, 들씌워진 질서 - 와 개인생활의 긴장관계를 가져온다. 둘은 양립할 수 없다. 사랑을 뜻하는 amor - 프로방스어로는 amour -를 거꾸로 쓰면 roma(로마)가 된다. 따라서 roma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 신성함을 뜻하며, amor는 개인의 경험을 뜻한다. 마술을 부려서 우리 마음속에 신이 깃들게 할 수 있을까? 그런 마술은 없다. 신은 우리 마음속에 있거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벗어나서 우리 마음속에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신의 존재는 그것에 대한 느낌이다. 따라서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성배 이야기는 그 양자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

p.270. “너희가 케르눈노스라고 부르는 신을, 우리는 플루톤이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7년에 인도에 갔을 때, 크리슈나는 헤라클레스에 해당하고 인드라는 제우스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p.274.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7세기에 이슬람의 융성이라는 전혀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기독교도들은 성자와 성부의 관계, 성령과 성부와 성자의 관계 같은 것들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무함마드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신 이외의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 신의 예언자이다.” 이 얼마나 안도의 소리인가. “신 이외의 신은 없다”라는 한마디로 철학과 신학의 논쟁들을 폐기시켜버린 이슬람교도는 원래의 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무어인들은 한 세기 동안 스페인과 인도 국경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2.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p.281.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따라서 눈이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만일 그 마음이[이 대목이 중요한데] 상냥한 마음[정욕을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라 애정을 일으키는 마음을 뜻하며, 정욕과 애정은 전적으로 다르다]이라면, 그때 사랑이 생긴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다.

p.287. 여성의 기질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존재한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리고 침머는 이렇게 말했다. “시련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인내하라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 오직 참고 견뎌라. 그러면 아름다운 여성의 자비가 모두 당신의 것이 되리라.

p.290. 중세에는 여섯 명 또는 여덟 명의 트리스탄이 있었다.-중략-
중세 이야기의 특징은 한 사람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받아들여 그것을 해석하는 것, 곧 그 시대의 조건에 맞게 새로운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트리스탄 이야기는 양친을 일찍 여읜 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전형적인 서사시의 영웅은 고아 또는 미망인의 독자이다. 트리스탄의 어머니의 오빠가 콘월의 마크 왕이다. 트리스탄은 브르타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는 콘월과 브르타뉴, 곧 켈트 문화의 전 지역이 배경이 된다. 트리스탄은 콘월에 있는 외삼촌의 성으로 간다. 그가 도착한 바로 그때 더블린에 있는 아일랜드 성에서 모롤드(아일랜드 왕의 동생 /역주)가 사신으로 찾아온다. 아일랜드 왕은 콘월 왕을 지배해왔는데, 사신은 4-5년마다 젊은 남녀들을 파견해서 아일랜드 궁정에서 일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크레타 섬의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모롤드는 젊은 남녀를 뽑아가려고 온 것이다.

p.292. 여기에 궁정연애의 문제가 있다. 트리스탄은 사랑에 빠졌다. 그의 외삼촌은 이졸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크 왕과 이졸데의 결혼은 중세에 흔히 있었던 난폭한 결정의 전형이다.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따라서 궁정연애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크 왕은 실격자이다. 그는 기술적인 용어로는 르 잘루(le jaloux), 곧 단순히 “질투하는 사내” - 흔해빠진 남편이다.

p.293-294. 이졸데의 어머니는 사랑의 묘약을 준비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비밀이 있다. 독약(毒藥)과 미약(媚藥)은 사랑의 고통, 즉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약이다. 그래서 독으로써 트리스탄을 그곳으로 불러왔던 여자는 이번에는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한 미약을 준비한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졸데의 유모 브랑게네는 사랑의 묘약을 가지고 두 사람을 따라가서 마크 왕과 이졸데의 결혼식 날에 선물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콘월로 가는 배 위에서 그녀가 방심하는 사이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그 약을 마신다.

p.297. 그녀는 흰 손의 이졸데(Isolde of the White Hands)라고 부른다. 중세 이야기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중략-
그뒤 트리스탄은 전투에 참가해서 치명상을 입는다.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졸데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이졸데를 데려오도록 처남을 보낸다. 그들은 한 가지 약속을 한다 : 만일 이졸데가 오기로 승낙하면 배는 흰 돛을 올리고, 만일 그녀가 거절하면 검은 돛을 올린다. 그가 아내의 품 안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배가 나타난다. 그녀는 그에게 검은 돛 - 실제로는 흰 돛이지만 - 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숨을 거둔다. 이것이 트리스탄 이야기인데,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의 영향이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다.

p. 298. 나는 성배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성배 전설은 중세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이야말로 중세 최고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단테의「신곡」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단테는 천국에서 이야기를 끝냈지만, 고트프리트는 이 지상에서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이 지금, 여기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에 의해서, 참으로 멋지게 해결된다.

13.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
p.301. 성배 이야기를 완성한 사람은 바이에른의 기사였던 볼프람 폰 에셴바흐였다. 그는 코트프리트나 수도사들이 결코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기사도를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12세기 기사의 이상형으로서의 영웅 - 페르스발(perceval), 파르시발(parsival), 파르치팔(parzival) - 을 그려낸다.

p.312. 유럽에서 자연은 살해되었다. 자연의 에너지 - 이것이 볼프람의 교훈이며, 그는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 는 살해되었다. 이교도 기사의 죽음은 그것을 상징하며, 성배왕의 정신적인 불임은 그것의 결과이다.
성배왕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면서 말을 타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상처에서 창을 뽑아내자 거기에는 “성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의미는 이렇다. 자연은 본디 정신을 지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그 - 정신의 지도자 -는 자연을 거부했다. 그것이 황무지이다. 황무지를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은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고상한 마음은 자만이 아닌 사랑에서 나오며, 그것도 성적인 사랑이 아닌 동정심에 의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것이 성배가 던지는 문제이다.

4. 내가 저자라면

♣ 보완점 1.
외국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게 되었다.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서론의 인간과 신화의 기원부터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신석기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파라오의 지배-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 불교, 이드에서 자아로, 쿤달리니 요가,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쿤달리니 요가, 천상계로의 하강 :「티베트 사자의 서」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길[道]은 없었다,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순으로 주욱 펼쳐져 있다.
때문에 페이지 수에 비해 편집자의 욕심이 지나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동서양의 신화를 다 건드려는 놓았지만 전체는 아니었으며, 깊이 본 것 또한 일부분에 그쳤다. 목차 또한 납득할 수 없는 배열이었다.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나서 큰 공명이 없었다는 것이 이 책의 미흡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완점. 2
저자가 동양 신화에 주목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었다. 동양철학을 논하면서 훨씬 편해진 그의 어조를 보면 그가 얼마나 동양 철학에 대해 영향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동양철학을 깊이 본 것을 편집자가 한권의 단행본으로 엮었다면 어떤 저서가 되었을런 지 ‘신화’에서 일가를 이룬 석학자의 죽음이 몹시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왜 그 부분이 실렸는지도 이해는 되었지만 그 분배는 적절치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발견했던 여러 민족의 상징의 공통점들을 다시 보았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의 곰, 또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등. 우리 신화에 환인-환웅-단군의 유사함, 이집트 문명의 오시리스, 이시스 등등.

러시아의 '현자' 는 신화와 민담 200여개의 서사패턴을 발견해 31개 B-C-T-S, B-T-S-S 등의 형식으로 패턴화 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 결과는 신기하게도 어떤 이야기든지 그 패턴에 다 들어맞는 것이었다.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 그리고 앞으로 읽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을 읽다가 그 패턴에 한번 맞추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과학세대에 실린 조셉캡벨의 리뷰를 읽다가 공명되는 부분이 있어 발췌한다.
“캠벨이 여느 신화학 학자들과 다른 것은 그의 순수한 학문적 성과의 이면에서 인류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현재와 미래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자신과 함께 성장해온 신화의 상상력과 초월적 힘을 잃은 비문화적 인류 문명에 대한 경고이다. 또한 좁게는 자기 민족의 신화체계와 자기 문명권의 종교만을 주장함으로써 다른 민족과 문명권의 그것들을 파괴하고 배척하는 비도덕적 인류 역사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비판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향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경고는 그의 엄격하고 철저한 연구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성적, 과학적 언어로써 반과학적인 종교적 교의를 거부하고 신화를 객관적인 사실과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 일뿐만 아니라 영혼의 언어이기도 하다.”

맺는말.
‘이력서를 수십 통이나 썼지만, 그를 불러주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은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조각가 지망생인 누이 앨리스와 우드스톡의 숲속에 있는 값싼 작은 집을 빌려 극빈 속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그는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식비를 조달했다.’

지금, 수 십통의 이력서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이력서가 받아들여져 어느 조직에 캠벨이 채용되었다면 우리는 그의 역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름’ 때문에 소속 되지 못하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강점을 키우는 배경이 된 은자와 같은 생활을 한 캠벨.
섹소폰을 연주하며 생계를 유지한 그의 생활을 눈을 감고 한동안 상상해 보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묵지근한 것이 올라왔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믿을 것” 켐벨이 나에게 가르친다.

♣ 공명되는 구절
p.129.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 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 내부의 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구별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육체적이고 가변적인 면과 영속적인 불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은 그 불꽃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p.143. 건너편에서 나룻배가 와서 우리의 발치에 정박한다. 배에는 한 명의 남자가 타고 있는데 “가든 스테이트의 저지로 가실 분 없나요?” 하고 묻는다. 당신은 재빨리 “제발 저지로 데려다주세요” 하고 말한다. 그러자 나룻배 사공이 말한다. “잘 들어보세요.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답니다. 이 배는 편도만 운항합니다. 당신의 가족, 당신의 이상, 당신의 돈, 당신의 미래, 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요?” 당신은 말한다. “이곳 생활에는 이미 넌더리가 난 상태입니다.” 그러자 사공이 말한다. “그럼 타세요.”
이것이 작은 나룻배[小乘]인데,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실제로 기꺼이 버리는 사람만 탈 수 있다. 어떤 경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열반을 구하지 않으려거든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여기에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금욕과 현세 부정의 사상이 있다. 그래서 작은 나룻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배에 탄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에 당신은 “어머니!” 하고 불러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배가 움직인다. 결국 당신은 철썩철썩 뱃전을 치는 물소리를 좋아하게 된다. 새로운 말도 깨치게 된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라는 말 대신 좌현(左舷) 이나 우현(右舷)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이물이나 고물 이라는 말 대신에 선수(船首)나 선미(船尾)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지금도 건너기 전과 마찬가지로 저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맨해튼의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 배 위에서 하는 일은 매우 적다.-중략-
여기까지가 소승이다. 맨해튼을 떠나 저지로 간다. 비참한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세상(samsara)을 떠나 열반이라는 해방의 세계로 간다. 뉴저지에 도착하여 맨해튼을 뒤돌아본다. 당신은 지금 비(非)이원성의 세계, 모든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 있다. 그러나 건너편에 맨해튼은 없다. 중간에 허드슨 강도 없다. 나룻배도 없다. 사공도 없다. 그렇다. 모든 것이 그렇다. 당신은 이원성을 초월하며, 그래서 깨닫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견해가 바뀐 것이다. -중략-
나룻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불교의 훌륭한 역설이다. 핵심이 되는 말은 “무아(無我, anatman)"이다. 삼라만상에는 자아(自我)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런 초월성의 표현이다. 우리를 타인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관념이다. 그것을 없애라. 두려워하지 말고 상대에게 양보하라. 타자의 먹이가 되라. 그럴 때 당신은 완성자가 된다. 그때의 경지를 극락(極樂, mahasukha)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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